※ 이 단상은 프린스턴, 뮌헨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했던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2, 미래 윤리에 있어서의 토대와 방법의 문제의 몇 절을 기초로 필자의 현실 自省의 생각이 더해져 작성된 것입니다. 선과 당위 등 존재론적 물음을 비롯해 도구의 목적성이 지니는 윤리성 등, 사유를 더 이어가시고자 분은 원()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스 요나스는 전통적 윤리는 대체로 행위자행위피해자가 가까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데 비해, 생명공학, AI, 유전자 편집, 자율 시스템 등 기술은 현재의 행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 존재할지도 모르는 인간의 조건, 심지어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요나스가 윤리의 시간적 지평을 미래로 확장했습니다. 즉 미래의 인간을 위해 현재의 행위를 규율할 당위에 대해 윤리적 검토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술 윤리에 대한 문명 비판의 성격을 지닌 새로운 선도적 윤리의 길을 개척한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저술이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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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힘이 미래에 미칠 수 있는 영향만큼 책임의 범위도 미래로 확장되어야 한다."

 

미래 윤리라는 말은 현재라는 사건에 얽매여있는 오늘의 전통적 윤리로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도덕을 더 이상 담보할 수 없기에 출현한 윤리의 이름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기술들의 후과(後果)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기술들과 달리 훨씬 장기간에 걸친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 기술은 인간생명 조건의 변형을 통한 종() 자체의 변화, 인간 삶의 의식에 대한 중대한 가치의 변화, 지식 생산과 그 실천적 수행의 기계로의 이전과 의존 등 인간의 본질과 삶의 형태에 대한 근본적 수정 또는 종말을 품고 있다. 이것은 근()미래이거나 먼 미래에 이르는 인류에 대한 위협을 가할 기술적 수행이 인류의 본질을 건드리는 근원(根源)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특히 인류 전체에 대한 인간상()을 위협할 수 있음에도 단지 상업적 이익과 장밋빛 기술의 낭만적 이점만을 내세우며 거침없이 나가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대기술 사업에 대한 우려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도덕적, 종말론적 위기로 표현(*4.부기 참조)되어 왔기에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고의 외침들은 그저 지나가는 개가 짖는 소리처럼 개인 자신들과는 동떨어진 머나먼 나라의 일이거나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을 미래에 대한 언어이기에 전혀 어떤 공포도 일으키지 않으니, 제아무리 전지구적 규모의 심각한 위협일지언정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미래 윤리를 주창하면서 첫 번째 명령을 도출하는 가운데 공포의 발견술(Die Heuristik der Angst)’ 이라는 인간본성의 취약점을 건드림으로써 하나의 윤리 명령을 도출해낸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개인의 삶과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미래에 대한 문제들을 자신의 현재적 삶의 중요 문제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가의 방편으로 소개하고 싶어진 것이다.

 

1. 공포의 발견술: 도덕관념의 발원(發源)

 

요나스의 진술을 대강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적 명령을 인간은 어떻게 떠올렸을까? 아마 인간에게 살인의 능력이 있었으며, 또한 이 행위 능력을 통해 타인을 살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살인이 없었다면 인류는 생명의 신성함은 물론 살인 금지 명령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짓이 없었다면 진실의 가치를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부자유가 없었다면 자유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침해사실을 가시화할 수 있어야지만 어떤 윤리 명령, 즉 도덕적 의무를 생각하게 되고, 이런 일을 자신들이 당하지 않고 보호될 수 있기 위해 윤리개념을 발전시킨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위협이 알려지지 않는 한 무엇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이란 것은 무언가에 대해 경악하는가에서 발원(發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생각을 조금 더 이어가보자. 우리는 질병을 보지 않고서는 건강에 대한 찬가를 읊을 수 없으며, 파렴치한 행위를 보지 않고서는 진실을 찬양하는 데 미숙하다.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서 평화를 찬양하는 것도 심히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실제 자기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직접적 체감의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 한 인간은 위협을 감지하는 데 몹시 서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악(,malum)의 인식이 선(,bonum)의 인식보다 무한히 쉽다. 악의 인식은 더 직접적이며 설득력 있고 의견의 차이에 별로 시달리지 않으며, 무엇보다 가식적이지 않다. 반면 선은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며 반성하지 않으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계기로 인해 그것이 비로소 노출되어서야 감지한다. 즉 선에 관해서는 대체로 악의 우회로를 통해 확실성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의 윤리 도덕관념은 희망이나 선보다는 공포와 악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공포의 발견술은 우리가 윤리명령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2. 신중성의 도덕적 명령 : 思惟의 의무로서의 도덕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기술들은 훗날의 결과를 추론을 통해서만 인식해야만 하는 고도의 어려움이 있다. 미래의 발명품을 미리 발명할 수 없다는 예측 불가능성이 인간의 본질적 탐구 불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기술의 미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일 수 있는 기술 행위가 지속된다면 우리와 우리들의 직접적 후손은 물론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칠 효과에 대해 우리는 어떤 명령을 할 수 있을까?

 

현대기술의 대사업은 자연적 발전 과정의 수많은 작은 행보들을 소수의 거대한 행보로 응축시킴으로써 천천히 움직이는 자연의 생명(즉 진화의 긴 여정)을 보장하는 이점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조직에 대한 기술적 침해가 가지는 인과적 속도는 마찬가지로 인과적 규모를 야기한다, 그 침해의 파급속도와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는 것, 혹은 결정적 파국의 초래일 수 있음에도, 이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여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의도적 계획으로 대체하지도 못하고, 인간에게 진화적 성공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인간에 대한 기술적 침해의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불안과 위험을 산출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대기술들이 선전하는 위대한 목표에 이르는 시간의 축소에 비례하여 완전히 회피불가능하고 더 이상 작지도 않은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오류의 불가피성에 관한한 우리가 자연적 진화의 장기성을 인간적 계획 행위의 상대적 단기성으로 대체하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들이 매우 급속하게 인간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론적 행위에 의해 근거리 목표를 가지고 그때그때마다 진행되었던 발전들은 스스로 자율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간의 학문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기술적 발전은 자신의 고유한 강제적 역동성을 띠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자동적 동인(動因)으로 인해 기술적 발전은 비환원적일 뿐 아니라, 자체 추진력을 가지고 행위 하는 사람들의 의욕과 계획을 뛰어넘기도 한다. 한 번 시작된 것은 우리에게 행위 법칙을 빼앗아가고, 시작이 만들어 놓은 완성된 사실은 점증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영속성의 법칙이 된다. 이것은 근현대 3세기동안 기술 발전의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들이다. 기술적으로 추진되는 발전의 가속화는 자기 수정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에도 수정은 어려워지며, 그럴 수 있는 자유 또한 극도로 작아진다.

 

지금의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생체기술, 로봇기술 등은 오직 산업의 경제적 합리성의 잣대와 산업국가 간의 헤게모니 쟁탈에 매몰되어 기술 정당화의 의무가 면제된 채 자유주의 관점으로 천명된 무책임성이 마치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듯 행위하고 있다. 세상에 전체 인류가 이처럼 산업기술의 무책임성에 동시에 맡겨진 적이 없다. 인류를 이끌어갈 지도적 표본의 규정 없이 대체 그 어떤 권위가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충분성에 칼을 댈 수 있다는 것일까? 대체 누가 인간의 왜곡과 위협과 변형의 권한을 주었는가?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이익의 전망도 희생의 위험도 이러한 행태를 정당화할 수 없다. 마치 작금의 기술과 기술자본은 초월적 권능을 가지기라도 했다는 듯 자신들의 기술론적 연금술의 도가니에 인류를 던져 넣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 윤리의 명령을 또 하나 도출해 낼 수 있다. 인간사회가 우선성을 부여하는(작금의 한국 정부의 AI 우선 정책과 같은 것) 최초의 시작들에 주의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하는 것으로써의 의무와 신중성의 의무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사유(思惟) 의무라는 도덕이다.

 

3. 맺음말: 경험되지 않은 대상의 문제

 

참으로 오늘의 세계에서 그 의미의 힘이 한없이 취약해지고 잊혀져가는 단어가 있다. 바로 의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이 보존되지 않은 바로 오늘, 이를 구하는 것이 의무가 된다.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경험도 비교될 수 있는 유사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상()을 문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악을 위해서 우리는 경험된 악 대신에 표상(表象)된 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악과 공포의 침해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즉 체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비로소 윤리 명령의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표상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이렇게 표상을 미리 생각하여 제공하는 것을 미래 윤리가 갖는 예비적 의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표상된 악은 내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내 자신을 위협하는 경험된 악과 같은 자발적 의미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즉 대상에 대한 공포는 그 많은 위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듯, 결코 자신의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홉스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도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리 본성에 주어져 있는 자기보존 욕망에 대한 가장 비자의적이고 억압적인 반동으로써 극단적 공포를 유발한다. 자기에게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 공동 생활의 유대로 결합된 다른 어떤 사람과도 상관이 없는 지구의 운명은 차치하고라도, 미래 인간에 관해 표상된 운명은 자체로부터 우리의 심정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향을 표상된 악의 제작을 통해서라도 영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수용, 후세대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사유를 통해 자신이 촉발되도록 스스로 준비하는 태도가 미래 윤리이다. 우리는 스스로 합당한 공포를 가지게끔 독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많은 도덕적 창발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인간이 미래에도 과연 존재 당위의 권한이 있는가? 현재가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라는 장기에 발생할 후과에 대해 책임을 왜 가지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도박에 걸어도 되는가? 나는 타인의 이해관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권한을 대체 어디서 획득했는가? 인간의 실존이 내기의 담보가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인류가 실존해야할 무조건적 의무라는 것이 과연 존립 가능한 윤리명령인가? 이러한 논증들을 사유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의 순간에 구원의 예측이라는 낙관적 기대보다는 불행의 예측을 더욱 중시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현재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윤리원칙만으로는 이미 접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내포하고 있는 기술들의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에 대한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어떤 세력이 현재에서 미래를 대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집단적이고 누적적인 지금의 기술 행위들은 그 대상과 규모에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이며, 그것은 모든 직접적 의도와 무관한 결과에 따르며 전혀 중립적이지도 않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로부터 윤리적 진공 상태에 이른 지금의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가 던지는 물음들에 대답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윤리 명령을 구할 필요가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오늘날 소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확대하고 사용을 강제 받고 있는 극단적 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윤리가 없다. 인간을 가장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이러한 힘들에 대해 규율할 수 있는 윤리를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작 장기적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위로만을 쓰다듬으며 책임을 방기하는 가장 악질의 인간들이 살던 시대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종류의 행위 능력을 가진 작금의 기술들은 윤리의 새로운 규칙을 요구한다. 그 새로운 미래 윤리에 대한 사유가 반세기 전에 한 위대한 철학자에 의해 검토되었음에 위안을 받기에는 너무도 이에 대한 논의가 미약하다.

 

4. 부기(附記) - 더 읽어 볼 현대 기술의 미래 윤리를 체계화한 글들

 

요나스는 현대 기술들은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비해, 닉 보스트롬(Nick Bostrom)Superintelligence: paths, dangers, strategies(2014)에서 인류의 실존적 위험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인류문명의 장기적 잠재력의 돌이킬 수 없는 파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다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공히 인류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확률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라는 최고명령을 위한 윤리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반면 인간을 더 이상 생물학적 개체로 보지 않고 정보적 존재로 보는 루치아노 플로리디(Luciano Floridi)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The Ethics of Biomedical Big Data에서 인간을 계산 가능한 정보 객체로 본다. 이러한 인물에게는 윤리라는 것이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즉 인간을 평균적인 통계적, 집단적 형상으로 환원해서 기계적 존재로 변질시킨다.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역량의 창조(Creating Capabilities: The Human Development Approach)(2013)에서 미래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해야 한다.’며 인간의 실존을 중시하지만 요나스와는 달리 단순 생존이 아니라 신체의 온전성, 사고와 상상, 자율적 선택, 정치적 참여와 같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중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는 미래 윤리는 안전성만이 아니라 인간 능력 보존의 문제를 최대 과제로 삼고 있다. 결국 인간을 능력면에서 존속을 말하는 것과 인간 생명체 자체의 실존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아무튼 이 철학자는 모호한 경계선을 주행한다. 그런데 요나스의 장기주의적 윤리를 더욱 밀고나가서 극단적 장기주의 윤리를 내세우는 일군의 학자들도 있는데, 요나스의 책임의 윤리와 다르게 이들은 현재의 몇 십만 명의 희생보다 미래의 수십 억 명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극단성을 띠기도 한다.

 

이것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희생시키는 괴이한 윤리이다. 즉 기술 종속의 과대망상에 가까운 기술 성공주의의 역설적 윤리파괴를 잠재한 위험한 윤리로 보인다. 따라서 맥어스킬이나 보스트롬 같은 장기주의자들과 요나스의 책임윤리는 엄격히 다른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사회에는 이러한 미래 기술과 관련한 윤리 담론이 형성조차 되지못하고 있기에 문제 제기 차원에서 짧은 단상을 해보았다. 아무쪼록 우리에게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단기적 현실과제에 매몰되는 우리들의 실용주의적 정치체(政治体)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많이 늦었지만 윤리학자, 철학자들이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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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9-01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요나스 저 책 읽었는데, 하두 오래돼서 하나두 기억이 안납니다...ㅜㅜ
저런 내용이었나?? 라는 완전 새로움...^^;;

비의식 2026-09-01 20:14   좋아요 0 | URL
97년도에 처음 국내 번역되었으니, 그때 읽으셨다면 30년이 다 되었으니 기억에서 흐려지는 것이 당연할거예요. 더구나 H.요나스가 인간 본질을 위협하는 현대기술을 이야기 할 때 AI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였으니, 우리들에게 그 어떤 직접적 위험을 상상하기 쉽지 않았으니 현실적 문제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요나스는 인간의 실존 타당성을 깊숙이 다루고 있는데요, 이를 위한 도덕적 명령의 타당성에 대한 깊숙한 철학 고찰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아마 다시 책을 펼치시면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법 선선한 날씨가 되어 책 읽기 좋은 시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 여름의 더위에 몹시 취약해서 고전했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시간되십시요~, yamoo님 고맙습니다.
 

AI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당한 목표 없는 경쟁을 물으며;


지금 벌어지는 AI 기업 간의 과열 경쟁은 단지 그들 기업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일종의 군비경쟁(arms race) 구조가 이들 산업주체들의 전략적 경쟁논리가 됨으로써, 이를테면 1960년대 미소간의 핵무기 경쟁처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경쟁자가 더 큰 모델을 훈련하면 뒤처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어 더 큰 GPU, 더 큰 데이터 센터(Data Center)’가 되고 만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서 보면 전혀 최적(最適)이 아니다. 이것을 경제학에서 집합행동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각 행위자는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결과는 비효율적인, 즉 현재 투자 규모가 미래 전망에 의해 정당화되는 실제 수익보다 큰, 수요보다 기대가 먼저 움직이는 과다한 낭비이다.

 

<현대의 고전이 된 AI 윤리비평 >


AI의 미래 가치가 이미 현재 가격에 과도하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하는 물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부분의 과잉투자에 대한 비합리성에 대한 우려이지만, 이 불합리성으로 인해 인간사회 전반에 전가되는 비용 부담의 문제가 대두된다. 기대되는 미래가치를 가격에 반영하면서 소비자 대중은 그 비효율적 비용을 떠안아야 하고, 더구나 기술 편익을 누리는 사람과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 전혀 다른 존재이기에 지금의 AI 경쟁은 인류 자원의 측면에서 어떤 조건에서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지금 마치 AI가 모든 사회구성원을 위한 무조건적 당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나아가 과열 양상의 AI 산업에 그 어떤 면밀하고 세심한 도덕적, 정치적 고려도 없으며,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AI관련 연구나 저술들도 획일적으로 AI의 장밋빛 그림이나 그저 효율적 사용방법에 맞춰져 있고, 더구나 AI에 대한 여하한 문제의 제기도 대세에 낙오된 자의 푸념정도로 치부하는 듯하다. 그렇다보니 제대로 된 AI 산업과 관련하여 예견되는 각양의 형태에 대한 숙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고, 이러하다보니 그저 AI데이터 센터 건설이나 관련 산업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아예 고려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관련 연구가 멸종하다시피한 반면에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AI 연구자들은 AI 기술의 현재가치 평가와 미래 세대 비용의 문제, 향후 50년 뒤에도 지금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의 문제, 경쟁적 인프라 구축의 경쟁적 투자의 문제, AI의 인류사회에 대한 편익(효용)의 문제, 기술의 가능성이 그 기술의 실행이어야 하는가와 같은 기술적, 정치적 연구와 논의가 학계와 정책 분야에서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우리는 정말 필요한 만큼의 AI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경쟁 때문에 과잉투자를 하고 있는가?"

 

AI가 필요한가? 라는 이미 떠난 기차의 문제 제기가 아니다.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자원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인류 사회에 대한 책임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AI 개발 목표가 생산성 증대가 아니라 인간의 복지와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기술 자체보다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AI 의 숨겨진 비용을 예리하게 분석한 명저>


대중들은 AI를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대중문화와 기술을 역사학 시점에서 재해석하는 하버드 역사학교수 질 레포어(Jill Lepore, 1966~)인공人工 국가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Artificial State)(2026.8)이라는 조지오웰의 분위기를 흠씬 풍기는 최근 저술에서 AI기술이 어떻게 전 세계 민주주의를 부식시키고 인간 공동체와 자치 능력을 파괴했는지를 설명하면서 AI 국가의 등장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정에서 봉건주의 파시즘, 노예제와 같은 끔찍한 체제들도 결국 해체되었듯 AI 체제도 해체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반()AI체제 논의도 있지만, 지금 제기하고자 하는 물음은 ‘AI체제라는 새로운 기술문명이 지금의 가공할 만한 자원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가이다. AI와 거대 기술기업들이 국가 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행세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당해 산업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 국가 의지라도 되는 양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압도하고, 나아가 잠식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제 물음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미국 내 인디언 부족연합체인 체로키 네이션은 부족 소유지 내 AI 데이터 센터 건설을 금지하고, 부족 영토 내 다른 부지의 개발에 대해서도 사전 협의를 요구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에너지 소비, (用水) 사용, 대기·소음·빛 공해, 문화유산 보호, 지역 사회가 획득 가능한 실질적 이익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그네들의 전통적 숙고의 원칙인 이로쿼이 7세대 원칙(Seventh Generation Principle)’이란 것에 사유의 뿌리가 있다. 오늘의 선택이 7세대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물음을 정책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대략 정책 결정으로부터 200년까지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아주 단순하다. 지역 사회가 감당해야하는 물, 전기, 토지에 비해 AI 데이터센터로부터 지역사회가 얻는 효용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막대한 전력 소비, 대량의 냉각수 사용, 소음 및 빛 공해, 생태계 압박,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고용효과, 자원소비 대비 경제 기여가 턱없이 불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물 거버넌스(governance)는 민주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원초적 문제를 야기한다. 물 사용량 증가와 더불어 공공요금 상승, 지역 물 공급 약화 등을 초래한다. 특히 막대한 전력 소비는 급격히 증가할 가능성이 더욱 크며, 이는 지역 전력망 부담, 전기 요금 상승, 발전소 증설 압력으로 연결된다. 실제 이러한 요구가 한국사회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국가 정책에서도 우선 논의될 정도이다. 또한 데이터센터가 유치되면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부추기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그 경제효과가 해당 지역에 남는가? 로 바뀌어 실제 운영상태에서는 고용효과가 극히 작을 뿐 아니라 수익은 당해 기업의 본사로 집중되어 지역 경제에는 상대적 부담만 가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시적인 자원 효용과 배분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데, 지역민이 감수하여야 할 희생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봉쇄되어 있어 민주주의 공동체 유대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정보 비공개, 불투명한 협상, 사후 통보 등 절차 적 소외가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를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건설할 것인가가 중대 고려사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사용의무, 물 재활용시스템, 지역전력망 투자, 지역사회 이익공유, 환경영향 공개, 주민동의 절차 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사회는 이러한 법제도가 구축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렇게 기초적 법규와 체제가 미비한 상태에서 거대기업의 건설행위가 추진되고 있기에 각 지역마다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투자수익자가 비용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과실만 챙기려는 현재의 AI기업들의 체리피킹식 행태는 바뀌어야 하는 것이며, 나아가 데이터 주권과 AI정책의 수립에서 단지 적극적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과 전기, 토지와 생태계의 비용은 나 몰라라 하고서는 지역민, 다른 공동체,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작금의 거대기술 기업들의 행태에 대한 절대 교정(矯正)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이익을 얻는가? 50년 뒤에도 이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이 같은 정치철학적 질문 없이 행위가 앞서는 지금의 AI 국가 정책과 기술기업의 행보는 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말은 AI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자원을 지금과 같이 소비할 만큼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증명하라는 것이다. 실제 오늘날 건설되는 엄청난 수의 AI데이터 센터와 이를 추진하는 거대 기술기업들, 그리고 사회 전체가 이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AI가 인류사적 전환점이 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 미국 및 유럽 대다수의 학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현대의 투자 규모와 자원 투입이 그 목적에 비례하는지는 짙은 의혹으로 남아 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는 대표저술 책임의 원칙에서 현대기술의 파괴적 힘에 맞서 미래 세대와 자연환경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태학적 책임 윤리를 주장했다.

 

<오늘 맞이하고 있는 기술은 현재의 도덕만을 말하는 전통 윤리로는 대응할 수 없다.

완전히 새로운 미래의 문법을 지닌 AI는 새로운 윤리로서 '책임의 윤리'로 확장되어야 한다> 


AI가 필요한가? 라는 물음에 앞서 우리는 AI를 위해 지금 소비하는 지구(생태)자원이 현재와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이 선행되어야 할 질문도 없이 자본과 개발기술의 사용 논리에 압도된 자본헤게모니 쟁탈이 진행되다보니 윤리와 인류 복지와 정치적 문제를 건너뛰고 진행되는 기이한 양상이 되어버렸다.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막대한 전력은 누구의 자원인가? AI가 창출하는 생산성 증가는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환경 비용은 어느 지역과 세대가 부담하는가? 기술 경쟁은 실제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경쟁 자체를 위해 계속 확장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기술공학보다는 정치철학, 환경윤리, 경제사에 가까운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을 기술기업이나 기술공학자들로부터 빼앗아 지금이라도 경제학자, 정치학자, 생태학자, 철학자, 역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사회의 AI체제에 대해 그 근원부터 다시 숙고해야 할 것이다.

 

"AI는 구름(cloud)이 아니라 광산(mine)에서 시작된다"

- Kate Crawford, The Atlas of AI(AI 지도책)

 

AI의 숨겨진 비용부터 다시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학계와 관련 연구자들은 이 중대한 과제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 서구 학계는 'AI의 생애 주기에 대한 연구'가 중대하게 수행되고 있다. 사용 자원이 AI 잠재적 이익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무수히 들려온다. 또한 어떤 사회를 위해 AI를 만들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며, 그 정당한 목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목적인지, 테크노크라트의 사회를 통한 권력의 쟁취인지, 자본이라는 재화에 대한 끝없는 탐욕인지, 이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지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공 국가(Artificial State) 부상의 성급함과 무모함에 대한 독보적 비판서>


이러한 연구 결과물중 AI 윤리비용을 추적하는 케이트 크로포드(Kate Crawford, 1974~)The Atlas of AI(AI 지도책)는 단연 돋보인다. AI 관련 윤리의 많은 연구들이 알고리즘의 공정성 문제에 한정되어 AI 체제 전체에 대한 물음이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수석연구원출신의 이 호주인 AI 연구가는 AI를 단순 기술로서가 아니라 자원, 노동, 데이터, 권력이 얽힌 거대 산업체계로 분석한다. 그래서 AI 윤리는 단순한 기업의 자율규제나 착한 알고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 정의·노동권·데이터 권리·민주적 통제를 함께 고려하는 정치적 과제가 된다. 특히 크로포드는 AI를 자동화된 시스템이라기보다는 데이터의 분류와 검열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수집된 이미지와 개인정보, 무수한 데이터 산업으로 간주하고 있다. 결국 “AI는 혁신 기술이라기보다는 자원 추출과 노동 통제, 데이터 수집, 권력 집중을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계의 총아일 뿐이라고 해부하고 있다.

 

오늘날 AI 기업들이 사용하는 '클라우드', '가상공간', '지능' 같은 표현은 마치 AI가 비물질적인 것처럼 들리게 하지만, 크로포드는 그 뒤에 있는 광산, 발전소, 데이터센터, 공급망, 그리고 인간 노동을 보라고 요구한다. 이 점에서 Atlas of AI는 앞서 언급한 AI 데이터센터 건설 경쟁에 대한 의문과도 맞닿아 있다. , 문제는 ‘AI가 유용한가가 아니라, 그 유용성을 위해 어느 정도의 토지·전력··희귀광물·인간 노동을 소비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크로포드의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데, 기술윤리서이면서도 생태철학과 정치경제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때문에 크로포드의 이 연구 결과물은 기술 비평서이며, 21세기 디지털 산업의 환경사(環境史)’이자 자원사(資源史)’라고까지 말 할 수 있다. AI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라는 이 원색적 질문을 회피해서는 그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 삶의 미래를 말 할 수 없게 된다. 우리사회는 장기주의적 관점을 잃어버린 듯하다. 정부나 기업이나 학계와 시민대중에 이르기까지 눈앞의 편리에 어마어마한 인간의 삶을 그저 내버릴 가능성은 없는지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다시 사유해야 한다. 기술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지금은 기술적 사실만으로 정치, 윤리, 인류경제를 모른 체하고 질주하고 있는 형세이다. 할 수 있다면 해보자라는 이 무식한 도전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때는 용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런 저급한 사회가 아니다.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반()AI, ()기술주의가 아니다. AI산업이 한국 사회의 국민경제의 중심축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기실적과 주가 중심의 경제시스템만으로 체제를 이해하는 정책은 정말 우려스러운 것이다. 체로키 인디언의 이로쿼이 7세대 원칙은 시간의 척도를 현재에서 그보다 훨씬 긴 시간축,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또한 수익자와 비용 부담자의 편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매우 기본적인 물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절차, 즉 이 사회 구성원의 삶과 미래 세대의 삶을 고려하는 윤리적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AI는 우리들의 삶과 연결되어 더욱 아름다운 구상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현대 기술은 과거에 비해 훨씬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책임의 범위도 그 만큼 길어져야 하는 것이다. 집단행동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면서 우리만의 길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간과한 것들을 지금이라도 하나씩 짚어보는 과제에 학계와 관련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제 남의 뒤 만을 따라가는 과거의 후진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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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끝을 부여하는 어느 하루, 즉 죽음의 날을 맞이한다.”

- 이창익 ,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107, 인간사랑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폴-루이 란츠베르크(Paul-Louis Landsberg;1901-1944)의 자살의 도덕적 문제(The experience of Death & The Moral Problem of Suicide)를 접하게 된 것은 내겐 거의 행운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엄습하는 멈춘 시간과 같은 나만의 시간성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아마 이로 인해서였을 터인데,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향하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있던 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러한 태도가 생의 욕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순수의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삶 전체를 마비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 심리학적 관점에서 일종의 자살자들이 겪는 유치(幼稚)증이라는 논지를 만난 것이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우려스러운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는 어렴풋한 경계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다는 점에 당혹스러워 했으니까 말이다.

 


란츠베르크의 이 저작은 인간이 왜 자살의 유혹에 맞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실존적 차원에서 설명을 시도한다. 란츠베르크의 논지에 공감하게 된 것은 자살을 절대금기로 선언하는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한 점이다. 신이 금지했으니 안 된다는 식의 교리적 답변으로 자살의 문제를 설득하려 했다면 아마 내 시선을 결코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자살 충동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의 일부라고 보며, 절망, 고통, 수치, 실패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을 끝내고 싶어 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살 유혹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그것에 저항할 그의 설득의 논리가 더욱 믿음직스러워 진다. 그의 관심은 왜 죽고 싶어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자살의 유혹에 저항하게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 진심이 통했다는 말이다.

 

생명은 자연이며, 신의 소유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자살은 죄다.’ 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자살 금지논리를 내세웠다면 그 논리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니 살인이고, 살인은 십계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니 자살은 죄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순으로 점철된 이해(사형과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왜 죄가 아닌가)는 자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더구나 자살과 살인은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전혀 다른 입장에 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자의 헛소리에 가깝다. 살인자는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려 하는 것이지만, 자살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인격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설득 논리를 통한 자살의 금지 강령은 자살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지니지 못한 자의 억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 나는 자살의 유혹에 저항케 하는 인간 내면의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이지 종교의 주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게 아무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유명한 자살 금지 논증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 가지 논증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1) 자살은 자기보존의 자연적 경향에 반한다. 2)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이므로 공동체를 해친다. 3) 생명은 신의 선물이므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신만의 권리이다. 는 것이다. 이 또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논리로 세상의 염오와 한계적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세 번째 논증부터 반박하자면 애초에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빈 말에 가까울 것이고, 설혹 신을 섬기는 자라해도 대부분의 자살자는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하지도 않을뿐더러, 신을 넘어서는 오만을 부리기 위해 자살하지 않는다. 삶이 죽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기에 자살하는 것이지, 기독교 맥락에서만 가능한 논리로 일반화하는 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첫 번째 논증은 인간은 자연이기에 자기보존을 하지 않으면 한 된다는 것인데, 자살의 유혹이란 것도 인간이 지닌 본성의 하나라는 점에서 자살이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면 애당초 자살이란 것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두 번째 논증을 생각해보자. 이 논증에는 사실 가장 가슴 아픈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웅크리고 있어 가벼이 취급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즉 이 논증은 다른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사회적 억압, 폭력에서부터 사회가 나에게 무의미한 곳이거나, 내가 사회에 무의미한 존재이기에 자살하는 것이라면 내가 자살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라고 반박 할 수 있다.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은 자살은 자기 가족에 대한 범죄이기에 자살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자살자는 가족이 없거나 박살난 가족이거나, 가증스러운 가족이 있을 뿐이기 십상이고, 더구나 머지않아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회와 가족은 이를 극복하기 마련인데, 이를 일반화하여 자살의 권리가 없다는 말은 과도한 일반화 논리라 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이들 논증으로 자살을 하지 않아야 될, 삶을 견디며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살을 비난 할 권리를 사회가 갖는 것은 정말 무분별한 발상이다. 사회가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사회를 떠나는 것이 왜 허용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의미 찾기의 실패가 존재를 의미 없음으로 가득 채워 죽음 이외에는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사람을 위한 설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살의 유혹은 인간 실존 자체에 관한 문제이다.”

 


나는 이 우려스러운 출입문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있다. 자살 금지 논리들을 그저 이성의 논리로 격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간절하게 그 금지의 설득, 다시 말해 끝까지 일생(一生, lifetime)’을 살아내야 할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다. '일생(一生)', 이 말은 시작과 끝이 형상하는 하나의 시간성을 품고 있는 말이다. 이 일생을 끝장내는 것이 죽음이라는 끝이다. 죽음 없는 인간에게는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 당연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일생이라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부단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그때그때마다 내게 존재의 의미를 주는 현재적 적합성을 향유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시간이 융화작용을 하지 못하면서 내게서 현재적 적합성이 없음을 느끼게 하고, 이윽고 그 시간성이 단단하게 굳어버려 살아있음의 감각을 서서히 앗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살았다는 것이 고작 주어진 시간을 소비하는 상실의 과정일 뿐이라면 이 시간을 대체 어떻게 경작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나의 인생이라고 기억할 만한 얼마 되지 않은 것들, 그중에서도 내 실존적 경험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시절의 회상을 헤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정신적 시간으로 육화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인생이라고 할 만한 기억이 턱 없이 적은 것임을 자각했을 때, 세네카가 말했듯 오랜 시간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에 불과한 일생이었음의 이해는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억이 모두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격을 갖추었을 때 인생이 되는 것이라는 지적은 다시금 내 일생이라는 끝의 급격한 당도(當到)를 느끼게 한다. 사실 많이 늦었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엮는 내 낡은 시간의 실을 새로운 실로 다시 엮을 시간이 있을까? 다시 새로운 시간성을 얻어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과거의 인생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능하게 할, 기존의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여 새로운 인생을 열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위의 윤리학,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 낼 수 있을까? 나는 이 앞에서 주춤거리며, 내 일생의 관념을 형성하는 필연적 경계선을 내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다. 그 금지된 매혹이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나를 내리치는 저 앞의 문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On the Shortness of Life)에서 말하는 기억과 회상의 힘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성화(聖化)시키는 유한의 성화로써 무한성에 참여시키는 구원론 따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확고한 걸음걸이로 나아가 죽음을 만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현자로서 세네카가 자기 일생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무한성으로 영토화한 신념만은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 그의 기억과 회상은 아마 자기 주도성으로 가득 차 물화되어 가라앉은 쓸모없는 시간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란츠베르크는 죽음의 유혹에 저항할 이유의 답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는 고통의 의미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감각만 느낄 뿐이다.”, 여전히 가장 최악의 도덕적 고통들이 늘 존재한다며 고통이 나에게 최악의 지옥을 선물하더라도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낼 수 있는 힘, 바로 이 존재의 힘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아무리 자살을 강요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고 말이다. 삶이 유한한 것처럼 고통도 유한한 것이니 그 일생이라는 하나의 주기를 살아내라고어차피 그 경계는 올 것이고, 그 순간까지 견딤이 삶의 의미 자체라고. 내겐 이 응답이 여전히 미흡하다. 망가진 인생을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것, 이를 위해 시간을 지우고 자기를 지우는 종교적이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이 내겐 잡히지 않는다.

 

당신 일생을 회상해보라. ....기억 속을 되돌아보고 생각해 보라. ....당신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적은 것만이 당신에게 남겨져 있는지를! 당신의 알맞은 때 이전에 당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이미 지나가 버렸는가.  -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어떻게 인생을 되감을 수 있을 것인가? 풀려 헝클어진 인생의 실타래를 다시 감아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이 세상을 탈출하려는 것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지 않겠는가? 영생이니 영원성이니 불멸이니 하는 신비에 대한 환상으로서가 아니다.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져 본 적이 없다. 생의 무의미에 봉착한 인간은 진저리치며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탈출하려 한다. 어머니의 품으로, 자궁의 아늑함으로, 탄생 이전의 그 어떤 곳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물론 자살을 통해 빠져나가면 바로 죽음 너머에 그 어떤 곳이 있으리라 믿지도 않는다. 어떤 시간이든 죽음을 내포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 철저하게 인간이 시간성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면 존재의 실체는 점점 희미하게 흐려지게 된다. 그 흐려진 존재를 그저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어찌 막아낼 것인가?

 

란츠베르크는 자살에 저항하는 힘 세 가지를 말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을 첫 째로 꼽으면서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님을, 가족,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 속 존재로서 를 일깨운다. 자살은 나의 죽음일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행위이기에 자신의 삶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식,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타인들에 대한 책임의 포기라는 것이다.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 또한 존재는 항상 함께-있음이라는 낭시의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함께-있음도 현재의 적합성이 생동하고 있을 때의 문제이지 않은가? 이미 경화된 시간 앞에 서있는 인간을 설득하기에는 근본적이지 못하다.

 

두 번째 힘으로 인간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자살은 단순히 생명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고통을 견디고 해석하면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라고. 자살은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지금 마주한 난제가 바로 그것이기에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제안이다. 완성되지 않은 삶에 대한 충실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나무람이니 내 충실성을 들여다 볼 일이다. 정말 모든 노력을 다해본 것인가? 하고 스스로 물을 일이다. 세 번째 힘으로 내세운 초월에 대한 희망은 내 삶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완전히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라는 얘기일 것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방향성을 지녔다는 이 설득은 인간에 대한 과대망상처럼 들린다.

 

인간은 더 없이 취약한 존재이다. 1944년 나치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란츠베르크는 과연 이 초월에 대한 희망을 유지했을까? 나는 엄숙한 생의 시간성의 기로에 나도 모르게 들어섰음을 란츠베르크의 글로 인해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그의 곡진한 설득의 작업들은 음양으로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란츠베르크의 고통받는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살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는 행위가 단순한 생물학적 지속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실존적 결단임을 가르쳐준다. 삶은 본능이 아니라 선택이고, 자살에 저항하는 힘은 타인에 대한 책임, 고통의 의미,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기 존재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되새겨 본다.

 

"자살의 씨앗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 ...존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명철한 정신으로 하여금 설명할 수 없는 암흑 속으로 도망치게 만드는 이 죽음의 게임을 추적하고 이해해야 한다." -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P17, 열린책들


인간 실존 내부에서 인간이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또 다른 사유 발견의 시간이었다. 카뮈의 시지포스 신화(The Myth of Sisyphus)가 떠오른 이유는 뭘까? 다시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 것 같다. 하이데거와 훗설과 함께 철학적 사유를 이끌던 위대한 철학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류에게 그 풍성한 지혜를 전달치 못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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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간빙기, S, 카르마 씨의 범죄에 대해서

 

읽어 본 적 없는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중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재앙을 기다리는 인간의 불안을 다루는 정글 속의 짐승이라는 작품이 있는가보다. 이것은 명명(命名)이 세계를 길들인다는 관념을 설명하는 예로 사용되는 모양인데, 정체불명의 그 무엇, 인간 이해의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아 분류할 수도 없어, ()의 이름아래 포섭할 수 없는 개체를 우리는 흔히 뭉뚱그려 괴물이라 부른다.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는 것들은 이름이 부여되어 이미 인간의 인식 속으로 들어 온 것보다 더 혐오스럽고 무섭다. 하지만 그것이 이름을 지닌 무엇으로 이해 가능한 세계 안에 배치될 때 그것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현대 언어철학에서 언어가 세계를 길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이처럼 타자성이나 낯섦이 인간 세계의 인식구조에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미지와 기지가 야기하는 인식의 문제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름을 갖기 전의 그 무엇인 개체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아직 세계 속에 자리를 얻지 못한 미지의 존재일 뿐이라는 이해를 갖게 된다. 아베 고보(安部公房; 1924-1993)의 작품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 서론이 길어졌다. 아베 고보의 대표적 작품들(대개 1950년대 발표)은 국내에 소개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작품 속 이형(異形)신체의 존재들과 SF적 내용들이 독자들에게 폭넓게 수용되지 못하는 장애로 작용하는 것 같다. 아베 고보의 작품에 대해 내 관심이 환기된 것은 컴퓨터 계산으로 일어나는 종적 변신의 문제를 다룬 SF장편 4간빙기와 단편소설 S, 카르마 씨의 범죄에서의 신체의 물화와 변형에 내재시킨 다분히 21세기 현대의 문제의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괴물성의 효과에 의한 각성이란 예술의 정통성으로부터

탈피와 동시에 현실 모순의 직시를 의미한다.”

 

아베 고보는 대중에게 친숙한, 즉 그 기이함이 원래 그러한 것이 당연시되는 타계(他界)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져 의문부호를 첨가하지 않는 취향(趣向)화 된 괴물이 아니라, 현실을 깊이 도려내기 위한 가설(假說)로서의 기이한 신체, 이형의 존재들을 계보화한 작가이다. 그는 분열된 현실, 무엇보다 그에 직면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모순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품게 하지 않는 유형화된 괴기는 그저 괴기취미일 뿐, 괴물성, 낯섦에 직면했을 때 순간의 망설임속에서 타자로서의 괴물을 비판적 거리를 취하며 바라봄으로써 문제의식을 부여하는 문학을 추구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문학을 취향의 허구들인 괴기문학과 구별하여 가설의 문학이라 불렀다. 다시 말해 그의 가설의 문학 작품들은 괴물에 의해 기존의 규범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여 새로운 모습의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소설이나 희곡작품들은 현실계와 충돌이나 갈등이라곤 없는 요정 또는 이미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동물원에 갇힌 괴수들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내적 균열과 안정성의 파괴로 나타나고 공포라는 시대적 고뇌를 반영하여 불안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처럼 논리화가 거부된 것들을 배제하고 외면하여 자신들의 세계를 매끈한 균질적 안정성의 영역으로 만들어 그곳에만 시선을 고정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배제한 이름 없는 그것들에 논리가 부재하는 괴물성을 부과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논리화하는 순간 괴물성은 사라지는 것이기에, 괴물성의 사태는 우리들의 욕망과 인식의 지평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름 모를 낯선 무엇에 대한 공포는 그것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틈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폭력과 비논리를 통해 희생시킨다. 아베의 작품들은 바로 이렇게 희생된 목소리들에 대한 논리화를 촉구한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이 세계의 법칙밖에 모르는 사람이 초자연적으로 생각되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그 이상(異常)사태 앞에서 순간 망설이게 된다. 이 순간의 망설임을 판단유보라 한다. 이 유보상태에서 우리는 어딘가로 생각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 낯섦, 이질적 공포를 오감의 환각 또는 상상력의 산물로 돌릴 것인지, 아니면 이 사건을 실제 일어난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인지의 두 갈래 선택과 마주친다. 아마 많은 대중들이 괴기물을 오싹한 감각적 즐거움으로 즐기는 것은 전자일 것이고. 후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 온 세계에 대한 인식방법을 뒤집는 전복의 선택이라는 경이로움을 통한 새로운 사유로의 행보가 될 것이다. 후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면 고정된 탄탄한 질서로 간주되어 온 관념이나 개념, 정전(正典), 관습 등이 가변적인 것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의 구축에 나서게 된다. 그때 아베 고보 작품들의 이형화(異形化)된 신체들의 낯선 혐오와 공포는 현행의 규범적인 것들에 의문을 발하게 되고, 그 자체의 재인식을 촉진하는 전복적 텍스트로 다가온다.

 


S, 카르마 씨의 범죄의 주인공 카르마 씨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낯선 감각을 느낀다. 그러다 커피숍에서 장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찾아 기록하려 할 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윽고 자기 재킷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려하지만 그곳에도 이름이 지워져 있다. 이름을 알 수 없게 된 것, 아니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인물이 된 것이다. 이름 상실이라는 사태에 직면한 존재는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게 된 상황 앞에서 흔들린다. 이 작품은 이름 없는 괴물이 주는 불안을 카르마 씨라는 인물을 통해 체현한다. 이름 없는, 즉 규정 되지 않은 존재는 새로운 규정이 가능한 공백이다. 카르마씨는 그 공허한 가슴으로 사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자기 동일성을 상실한 존재가 이름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다른 물질을 채워 넣음으로써 기존의 신체와 다른 새로운 이질적 신체성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이질화된 신체의 존재를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다. 세상은 그를 위험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이 닿는 것들을 빨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을 향해 소멸=흡수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험인물로 찍혀 도망자로 변신한다. 이제 카르마 씨의 신체를 조사하기 위해 성장하는 벽 조사단이 파견되는 데, 이때 부단장 유르반 교수는 카르마의 아버지다. 아버지를 알아본 카르마를 향해 유르반(Urban;도시)공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며 부성(父性)을 부정한다. 아마 이에 대한 조롱 혹은 비난의 장면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르반은 작게 축소되어 카르마 씨의 신체 내부로 들어간다.

 

아들의 체내로 회귀하고 다시 그곳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일종의 탄생을 겪는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과 권위의 상징이 아니다. 권위의 위선과 경박함, 질서를 강조하지만 절서 체계는 아무런 설득력도 지니지 못한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전후(戰後)시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고 다시 권력의 주류로 복귀함으로써 책임을 지고 철폐되어야 할 구질서 권력의 부조리를 향한 강력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오늘 한국사회에 그 비판인식을 그대로 이식해 읽게 되는데,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고 주류로 행세해 온 이 사회의 비틀린 기득권 집단의 천박한 탐욕의 끈을 끊어내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하는 역사적 분기점, 그 전환의 정점에 서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권위주의, 엘리트주의 혹은 관료와 기업 등의 이해관계로 엮인 오랜 카르텔, 혈연과 지역이기주의의 타파를 위한 중대한 전환의 국면과 마주하고 있다는 자각이 떠올랐는데, 아마 이 작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신선한 새로움으로 읽힌다.

 

자본은 스스로의 존속을 위해 소모와 죽음에 의해 시장에서

철수하는 노동력을 새로운 노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해야 한다.”

 


한편 SF장편 4간빙기는 기후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과학기술주의자들과 자본이 결합한 컴퓨터 시스템이 주도하는 세계라는 배경에서 70년 전의 작품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선견이 빛나는 매우 현대적 발상을 품고 있다. 이 소설은 아베 고보 텍스트들의 중요 모티브인 신체, 기계, 폭력이라는 문제가 정치와 합체된 과학테크놀로지와 신체 변형의 양상에 주목하며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특히 주목하게 하는 것은 자본의 궁극적 목표는 일체의 외부가 없는 내적 논리에 근거한 자동운동임을, 외부 없는 완전 자동을 목표로 하는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로서의 자본의 폭력성을 통찰하고 있는 점이다.

 

예언기계 KEIGI-1은 지구온난화와 지각변동으로 인한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한 육상 생활공간의 격감으로 지구 문명의 종말을 예고한다. 이때 테크노크라트들과 자본가들은 해저목장과 연구소를 은밀히 설립하고 인간 신체와 지구상 동물의 신체를 수서동물로 변형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종() 유지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인간 태아를 사들여 유전자를 변형, 배양 사육한다. 과학기술자와 경제권력 연합은 환경변화에도 견뎌낼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출산, 보육 기계라는 더 효율적인 신체수탈 방법을 고안해 운용한다.

 

여기서 시선을 끄는 것은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의지를 묵살하는 형태로 진화를 이루어가는 양상이고, 테크놀로지를 자본의 존속을 위한 인간 신체지배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이 오늘날의 인공지능까지 상상해 내지는 못했지만 과학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어선 금지된 실험을 실행했을 때의 인류에 대한 후과(後果)가 만들어 낼 통제력 잃은 과학에 대한 윤리적 사유를 제안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빌리에 드 릴아당 미래의 이브,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등의 통제력을 잃은 과학자들이 야기한 극한적 형태의 공포의 한 계보를 잇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이 화면에 완전히 드러나기 전이 드러난 후보다 더 무섭다.” 그 이유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 드러나지 않은 것들과 직면해 그 낯섦을 그저 즐기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사유, 논리 부재에서 논리의 부여를 통한 인간 인식의 통제 아래 놓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 낯섦의 외면과 배제를 넘어 이 세계에 자리를 부여하는 적극적 수용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미지는 항시 우리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들이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이름 모를 숲속의 야수에게 사자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실체의 위험은 상존하지만 그것을 다루고 통제할 인식과 능력을 지닐 수 있다.

 

이 사회가 배제한 타자들이 그토록 혐오스럽고 괴물처럼 보여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나, 저 알 수 없는 미지의 지능기계를 프랑켄슈타인, 에디슨, 스트레인지와 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에 맡겨둔 채 환상에 갇혀 있는 어리석음에서 우리 자신들의 인식을 해방할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국면에 들어서 있는 것만 같다. 언어가 세계를 길들인다. 언어의 현혹이 이 세계를 혼돈으로 잠식시키고 있다. 정작 요구되는 이름의 부여를 회피하면서 차별과 분리와 배제의 낙인을 찍어내는 일에만 열중하는 인식의 편협성을 아베 고보는 집요하게 촉구하는 듯하다. 아베 고보는 오늘날 우리네 정치, 경제 현실 속 첨예한 문제들을 다각도에서 통찰한 작가이다. 역사의 책임을 져야 할 식민지 부역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은 오늘의 일본과 다르지 않다.

 


강자에 대한 르상티망(resentment), 강자 동일시(모방)라는 노예의 도덕이 활개 치는 이 땅의 현실은 존 W. 다워의 미국과 일본의 구질서와 공범관계임을 지적한 패배를 안고서(Embracing Defeat)(1999)의 다섯 가지 핵심 정책들에서 그 실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오늘의 한일 간의 외교현실에 놓인 그 고착된 혐오의 배경을 안긴다. 부패한 권력 시스템을 묵인하거나 동조해 온 70여 년의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뿌리 깊게 타자상(他者像)의 양산과 르상티망이라는 역겨운 노예의식(미국과 일본의 의존적 찬양)에 집착하면서 국민을 분리해 왔는지를, 우리 내면에 심어진 심리적 의존성을 꿰뚫어 볼 수도 있다.

 

진부한 얘기이지만 괴물, 이름 없는 것들, 낯선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가끔 아무리 반복해도 모자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괴물이 출현하도록 만드는 비판정신이 정지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에 우리는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성의 눈을 크게 뜨고 그 괴물, 이형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이다. 아베 고보의 작품들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21세기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한한 비판의 경고 메시지들을 보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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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듀나의 책공포의 문법》과는 그 이론적, 경험적 지평을 달리하며,  

다만 참고 도서의 하나임을 밝힙니다.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 H.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에서

 

무더위의 계절이면 독서나 영화 시장은 슬그머니 호러(horror)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대체 인간의 원시적 감정인 공포를 자극하려는 이 장르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곁에 머물러 마치 더위와 결합한 계절상품처럼 작동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때마침 이러한 습관적 계절 행위에 편승하듯 30년 가까이 익명을 고수하는 작가 듀나의 공포의 문법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그는 호러 작품들을 열거하며 독자, 관객들을 불안하게 하고 무섭게 하려는 작품들의 테크닉에서부터 인간의 이해와 통제를 근본적으로 초월한 존재나 진실 앞에서 느끼는 공포로서의 호러 장르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결론에 가까운 장들에 이르러 실제 현실의 사악함은 언제나 허구를 뛰어넘는다고, 호러는 이처럼 사회의 억압된 문제를 드러내며 인간의 괴물성을 들추어내어 인간과 현실세계의 잔혹성을 일깨우는 장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그는 호러의 사회적 가치는 사람들을 단순히 무서움에 떨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이 감추고 싶은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자극과 쾌감만을 소비하는, 자신이 원하는 자극만을 소비하는 디지털 환경 세계 속에서 마비된 지각과 편협성으로 인해 호러 작품들의 사회적 가치의 의도가 무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창작자는 이러한 얘기를 계속하여야 한다는 어떤 소명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호러 작품들이 왜 오늘에 여전히 살아남아 하나의 독자적 장르를 형성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 많은 질문을 했다. 물론 이 질문에는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답변이 있다. 사람을 오싹함과 무서움으로 놀라게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평소 외면하는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장르이기에 살아남았다는 대답이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공포를 이용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인간은 죽음, 질병, 타인의 적의, 신체의 붕괴, 정체성의 상실과 같은 근원적 불안을 살아가지만 일상에서는 이런 문제를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살아가기에 이 억압된 불안을 형상화함으로써 감추고 싶어했던 것이 바로 그 공포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일사천리의 답변들은 그리 명료하지도 확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논리로 여겨지지만 자기 정당화를 위해 그 무슨 이유라도 둘러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은가? 왜냐하면 호러 작품들은 이러한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독자나 관객의 신경을 자극하는 오락산업으로서 폭력의 잔학성, 괴이한 공포를 안전한 장소에서 즐기는 쾌락의 소비를 판매하는 상품이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호러는 노골적으로 공포라는 감각을 판매하는 상품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고어(Gore)부류나 슬래셔(slasher film)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통찰보다 신체훼손의 충격 자체를 상품화하는 감각소비 중심의 상품이라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인간이 제기하는 문제들에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창작, 제작하는 이들은 자신이 왜 그러한 장르에 매달리고 있는가를 알 것이다. 과연 그것은 진정 공포를 이용해 무언가를 사유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아니면 사유를 명분으로 공포를 소비하는 자극을 본질로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또 다른 장벽이다.

 


호러가 공포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각을 넘어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건드리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변신, 샤이닝과 같은 작품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잔혹함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기를 즐긴다고. 우리 인간들의 문화에 오래전부터 이같은 모순이 존재해 왔음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호러를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간 존재의 어두운 진실을 탐구하는 장르라고 평가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폭력을 미화하고 상품화하는 산업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이 둘의 주장은 모두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호러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감각을 이용하는 장르임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구나 사회비판까지 하나의 소비상품이 되는 오늘이기에 호러의 사회비판 기능으로서 장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조차 상품의 포장지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남는다. 왜 굳이 공포를 재현하는가? 수많은 비극, 전쟁영화, 범죄실화물, 심지어 뉴스까지 인간의 잔혹함을 전시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말이다. 그 재현은 진정 성찰인가, 아니면 소비인가?

 


공포의 문법에서 저자는 호러 작품들에 표현되는 공격성과 잔혹성이 이미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인간 실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호러 작품이 새로운 악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표면에 드러내 성찰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좀 더 냉철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호러 작가들이 그려내는 그 소름끼치는 표현들, 장면들의 충격적 이미지가 과연 사회를 구현하고 인간을 개선하는 도구일 것인가 하고 말이다. 혹은 인간의 얇은 표면 아래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진단 장치인 것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상기 책의 14남은 것들에 대하여에는 아버지 앞에서 이스라엘군이 22개월 어린아이를 고문하는 영상에 달린 댓글을 설명하는 글이 있다. 우리들은 아마 그 영상의 댓글에는 아이를 괴롭혀서 안 된다라는 보편적 윤리 준칙에 해당하는 글이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거기엔 그러한 글이 아니라 공포와 고통을 즐기며, 나아가 잔악한 글들로 도배되는 의외의 양상을 목격하게 되었는가보다. , 이미 현실 세계는 허구로서의 호러가 감히 근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충분히 잔인한 곳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사례를 저자가 쓴 까닭은 이러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호러 문학, 영화 따위가 무슨 순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의 배경으로 인용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이미 실제 이러한 공포의 세계가 일상 속에 깊게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호러의 세계를 작품화하는 것에 더욱 현실적 의혹을 강화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 억압 문제를 드러내 성찰을 요구한다는 명분의 그 어떤 기만성 아닌가라는 의심 말이다. 오늘날처럼 디지털 온라인 사회관계망이 보편화되기 전의 세계에서는 그나마 이러한 정당성의 변론 가능성이 잔존했지만 이제 그런 정당성을 주장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허구적 호러의 세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러물의 장르 무용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호러는 오랜 전통을 지닌 장르다. 사회적 불안을 가시화한 언어로서, 타자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통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장치로서 기능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 오랜 전통의 근간을 흔드는 세상에 우리는 도달해 있다.

 


이제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려는 오래되고 강력했던 방법 가운데 하나인 이 장르에 대해 그것이 과연 소비하는 장치인지, 성찰의 장치인지를 가늠하는 시선이 더욱 민감하게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음에 대한 일종의 각성의 변이다. 아도르노는 현대 문화산업은 비판마저 상품으로 소비시킨다며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낙관론에 회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더구나 폭력과 잔혹성을 재료로 공포를 효과로 이용하는 장르는 수전 손택의 우려처럼 감수성의 둔화로 더 큰, 상상 초월의 잔혹성으로 무감각한 비도덕의 지대를 일상화 시킬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는 그 어떤 생각이나 감각의 작동이 멈춘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사태일 것이다.

 

안전한 거리에서 공포를 경험하는 것, 마치 비극을 보며 슬픔을 경험하듯, 실제 위험은 없지만 위험을 체험함으로써 긴장과 해방의 감정을 얻는 것은 분명 일상에 속박된 우리들에게 어떤 순기능을 지닐 것이다. 그러나 감정적 자극에 머문, 하나의 쾌락으로서 감정의 소비에 머무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우리들을 괴물화하는 하나의 무감각의 양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게 된다. 어쨌거나 호러의 계절이 돌아왔다. 에드거 앨런 포, H.P러브크래프트, 스티븐 킹, 아니 그 전에 애거서 크리스티까지, 그리고 발 루튼, 조지 로메로, 스탠리 큐브릭, 리들리 스콧, 마틴 스코세이지 등 지난 호러 걸작들을 살펴 볼 일이다. 특히 스티븐 킹이 원한을 삼켰던 자신의 소설 샤이닝의 동명 영화를 만들었던 큐브릭의 작품과 비교하며 그 맹렬한 거부감을 들끓게 했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주는 공포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주는 공포사이의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 윤리적 성찰을 제시하는지 흥미로운 과제를 풀어보아야 할 것 같다.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 이야기>는  심스의 구멍Horror)(Symmes Holes)’이라 불리었던 '지구공동설'과 관련한 SF상상의 한 자락을 발견하는 새로운 독서가 되어줄 듯하다. 19세기 남극이 상징하는, 오늘의 우리들이 아는 세계 밖의 공간에 대한 상상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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