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쯤 돼 보이는 꼬마아이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얼굴을 디밀고 눈을 마주친다. 그 생글거리는 아이에게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와 너라는 분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이의 그 존귀한 정신을 망가뜨리지 않으려 나도 안녕하고는 몇 살이야?”라고 친근함을 표현한다. 아마 대다수의 어른들은 이런 우연한 만남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인사하지 않는 것은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심장은 아직 거절로 인해 내려앉아본 적 없다. 아이에게는 아직 의 테두리가 완성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와 타인은 정교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는 의 무수한 연장으로서의 타인들을 무람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 평론가 김예솔비, 나에게서 나에게로, 유령들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의 회복을 사유하는 김예솔비 평론가의 나에게서 나에게로라는 글의 한 문장이다. 이 글은 순간 올가 토카르추크의 노벨상 수상 강연의 글인 다정한 서술자(Tender Narrator)4인칭 서술자의 다정함에 가닿았고, 다시금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백치(Идиот, The Idiot)의 미쉬킨 공작, 그가 말하는 스위스에서의 삶의 한 에피소드인 어린아이들과 사랑이야기의 연상으로 이어졌다. 물론 지금 읽고 있는 장 뤽 낭시의 코르푸스(Corpus)의 몸의 존재론, 존재를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함께 있음(being-with)'으로 이해하려는 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까닭일 것이다.

 

이러한 연상은 이 존재론적 얽힘에 관한 사유가 갑작스레 새롭게 대두된 물음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은 다섯 살 꼬마 아이처럼 낯선 사람에게 선뜻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감성을 보이면 오늘 우리들은 왜 그 사람을 무례한 사람이거나 바보 취급하는 것일까? 사람을 사회적 분류 체계 이전, 즉 사회적 정체성 이전의 존재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만일 아이의 시선을 유지한다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라는 존재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물음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이야기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백치의 초반부 한 장면을 장식한다. 아마 이 장면이 소설 전체의 의미를 이끄는 열쇠의 하나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자기 몸 하나 의탁할 곳 없이 스위스에서의 4년간 병 치료 끝에 도착한 낯선 도시 성(saint)페테르부르크에서 찾아 간 곳은 미쉬킨 공작 가문의 먼 친척인 예빤친 장군 부인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의 집이다. 여기서 미쉬킨은 리자베따와 그녀의 세 딸에 둘러싸여 스위스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치1부 챕터 7에 등장하는 주제 전체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 예빤친 장군 부인과 세 딸 앞에서 미쉬킨 공작이 스위스에서의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징면

 

그는 마을 사람들이 배척하는 불행한 여성 마리를 아이들이 결국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미쉬킨이 하려는 말은 타인을 판단하려는 시선이 아닌, 존재 자체, 즉 상처입은 사람을 보면 다가가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함께 울고, 사회적 낙인보다 그 사람이 입은 고통 자체를 먼저 보는 아이들에게서 인간 본성의 가장 원초적이고 진실한 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들의 순수성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의 감각이라는 차원에 대한 이해이다. 다시 말해 그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은 착하다거나 하는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 아이들이 사회적 분류체계에 물들지 않았음을, 죄인과 정상인, 성공자와 실패자, 가치 있는 사람과 가치 없는 사람의 구분이 굳어지지 않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의 감각이다.

 


그는 타인을 하나의 범주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 혹은 의 연장(延長)‘으로 느낀다, 여기서 미쉬킨과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ten der narrator)'가 만난다고 여겨진다. 토카르추크는 다정함을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를 가까이에서 주의깊게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또한 다정함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감각이라 말한다. 그녀는 이러한 감각을 지닌 서술자를 4인칭 서술자로 명명하고, 그것은 모든 인물의 시선을 품고, 각자의 한계를 넘어 바라보며,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존재들의 연결을 보는 시선으로서, ‘나의 것너의 것이라는 구분 자체를 흔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와 정확하게 상관하는 인물로서 미쉬킨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개별적 자아로 보기보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본다. 토카르추크의 4인칭 서술자가 문학적 장치라면, 미쉬킨은 바로 그것의 인간적 구현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차이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이러한 감각은 거의 종교적이다. 미쉬킨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물론 실패하기에 백치는 비극적 아름다움의 결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반면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은 구원이라기보다 연결성의 인식에 가깝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사물, 심지어 초월적 시간 속 존재까지 하나의 그물망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토카르추크의 다정함을 미쉬킨의 존재론적 감수성을 현대적으로 번안한 개념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단순해보이지만 가장 고상한 것으로 속이 가득 찬 분이시다.”

-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

아무것도 모른 주제에...백치 같으니!” - 가브릴라 아르달리오노비치

 

미쉬킨 공작에 대한 이 두 상반된 이해는 이러한 평가를 하는 인물의 삶의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아니 그 인물의 됨됨이 자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미쉬킨의 이러한 어린아이의 존재론적 감수성과 그의 육체가 품고있는 간질발작과 결합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타인을 계산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는 순수함이 아니라 백치(白痴)성으로 읽는다. 미쉬킨이 앓고 있는 간질은 여기서 사회적 낙인의 상징이 된다. 병든 몸,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존재,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로 미쉬킨의 자리를 위치시킨다. 즉 미쉬킨의 일면 그리스도적 사랑과 연민이 간질이라는 육체적 결함과 결합되어 영적 순수성과 육체적 취약성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인간 세계에서의 타자성 충돌의 봉합은 영원한 불가능성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미쉬킨의 간질은 절대적으로 선한 인간은 과연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육체적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미쉬킨은 그 어떤 존재이건 사회적 범주 그늘아래 덧씌워진 존재로 읽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고통받는 존재이고, 그 다음에야 사회적 이름을 부여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미쉬킨은 사회 분류 체계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직 그 분류 체계에 편입되지 않았기에 미쉬킨과 아이들은 서로 알아보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일 테다. 결국 성페테르부르크 사교계가 백치로 이해하고자하는 미쉬킨이 보여주는 어린아이 같은 감수성은 결코 미성숙함이 아니라 근대적 자아가 잊어버린 원초적 관계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나 김예솔비의 다성(多聲)의 목소리를 지닌 세계에 편재하는 유령으로서 ’,  낭시의 타자란 존재의 조건 자체라는 관계성에 놓인 존재는 같은 지향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들 모두 존재들이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인식의 형식이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타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앞에 두고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혐오와 갈등을 바라보고 있다. 꼭 내 혈족, 이웃, 동료, 동일 이해집단의 고통만이 고통이 아니다. 우린 애초에 서로 얽힌 존재이다.

 


사회적 상징이 축조해 놓은 나와 너의 경계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타자와 분리되지 않았던 존재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 감각의 회복은 기계생성 시대에 돌입한 오늘 더욱 필요한 감수성일 것이다. 타자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 인간들이 쌓아 올린 무수한 상징적 세계의 축조물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존재의 감수성, 사회적 분류 체계에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는 사회적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존재들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백치가장 성스러운 인물이 현재 세계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긴장을 보여주는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하나의 해석으로 끝날 수 없는 작품, 생각해 볼수록 새로운 연결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작품이어서 고전으로 계속해서 읽히는 것일 게다. 우리 모두에게는 낯선 이의 손을 잡으려는 시원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회복은 불가능한 염원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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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경제 지배 시대,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인터넷 기반의 오늘, 유비쿼터스(ubiquitous)기술이 소위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논쟁은 제아무리 반복되어도 그 해결을 위한 대안의 도출은 매우 중차대한 바로 지금의 인간 앞에 놓인 과제일 것이다. 이 결정이 곧 인류 미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 국제도서전과 더불어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시대, 인간의 고유한 영역에 대한 인간선언, Homo duduri이라는 국내 문학인들의 글모음집도 눈에 띈다. 그들이 인간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과연 이 세계의 추세에 어떤 반향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반복되어 진부하게 느껴지는 제법 거창해 보이는 이 문제의 한 측면을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인 법학자 알랭 쉬피오(Alain Supiot) 이성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이 이성을 만든다.”라는, 법의 교리적 기능, 하나의 믿음 체계로서 법의 교조적 역할을 역설한 법률적 인간의 출현(Homo Juridicus)2법적 기술4과학 기술의 제어: 금기의 기술에서 말하는 기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도구로서의 법을 읽으며 제기된 법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생각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숙의 과제로 또 하나의 층위인 법과 기술의 문제를 덧대어 말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시간과 장소라는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인간 서로가 연결되는 삶을 만들어준다는 오늘의 유비쿼터스 세계에서 법()은 어떠한 변화된 가치를 가져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논의가 내 정신을 윽박질렀기 때문이다. 이제 인공지능 기반의 유비쿼터스 기술은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버림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사회가 믿어 온 믿음의 문턱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이 세계가 믿어 온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인간 자신의 인격 전체를 계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인간 존엄성에 대한 믿음의 균열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에게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이 정말 존재하는가?’ 라는 다소 끔찍한 인간을 향한 물음이 된다. 만약 이러한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음이 밝혀진다거나, 기술경제 주도 자본가들을 비롯한 그 집단이 이 영역을 부정하여 사라지게 된다면, 소위 인간의 사물화는 단순한 비유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법적 구조 자체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법의 기능은 그 대상을 상실하게 되고 완전히 새로운 무엇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거래 될 수 없는 영역을 끝까지 지켜낸다면 유비쿼터스 사회에서도 인간은 기술진보 보다 상위의 원리로 계속 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가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는 이처럼 철학적이고, 헌법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 도그마(dogma)로서의

 

문제가 되는 인간의 존엄이라는 지금까지 인류가 지켜온 불가침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사회가 어떻게 작동해 왔는가를 짧게 생각해 보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알랭 쉬피오 교수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은 노동연구원 박제상 교수는 모든 사람이 의심하지 않고 믿는 구조로서의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을 도그마로 정의하며, 모든 인간 사회는 나름의 믿음 체계인 이 도그마에 기초해야하며, 이러한 보편적 믿음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단 하루도 유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인간 사회는 어떤 확립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렇게 믿을 뿐인 도그마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의 예로서 우리들이 모국어인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거슬러 유추해보면 그곳에는 무턱대고 믿어야 하는 교조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세계라는 체계에 다가가려면 어린아이는 우선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한다. 이때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언어의 입법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정한 제약에 복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최초에는 완전한 타율성에 의한 맹목적 믿음이 기초하고 있다. 이 근원적 타율성 없이는 그 어떤 자율성도 획득할 수 없다. 즉 이 최초의 타율성, 맹목적 믿음이 주체 형성의 첫 번째 교리이자 인간 삶의 원칙이다. 다시 말해 모국어를 가르쳐 준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한국어를 쓰고 있지 못할 것이고, 그 아이는 이 맹목적 믿음을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자기 의사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곧 이성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일차적 조건이 말(언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적 기초에 근거하여 비로소 이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그마로서의 법이란 무엇인가. 한 사회가 스스로 정한 나아갈 방향이며, 사회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이상적 모습이 곧 법이다. 법은 거울에 비친 사회의 표상이다. 즉 한 사회의 보편적 믿음 체계가 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되새겨보면 우리의 이성은 법이라는 도그마에 근거할 때만 이성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성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법의 교리적 기능을 파괴할 때, 즉 법을 논리실증주의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해석하게 될 때, 과학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순전히 생물학적 환원물로 취급한 끔찍한 비극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은 인간에게 금기나 터부처럼 인류학적 기능을 지닌 교리이자 교조이며 교의인 것이다.

 

법은 시대, 장소를 달리하며 그 환경에서 인간과 세계의 중재 속에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그 한계를 설정하는 도그마인 것이다. 법질서에 터 잡고 있는 원리들은 천명되고 찬양되는 것이지 계산되거나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엄성은 그 어떤 과학적 토론이 이성적인 것이 되기 위해 발 딛고 서야하는 토대로서 법 원리이며, 과학이 이 법질서를 정초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최초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토대가 없이는 어떠한 이성도 세워지지 않는다. 수학의 무수한 공리들을 생각해보라, 그 맹목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증명될 수 없으며, 증명되지 않으며, 수학(기하학)이라는 골조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의 도그마로서의 정의는 오늘날 생물학주의나 기술경제주의를 주장하는 집단들로 인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간사회가 양보할 수 없는 교리이다. 법의 도그마성이 부정되는 순간이 곧 인간과 인간 사회의 파국일 것이다.


 

2.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으로서의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도구가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 여부에 따라 특정한 금기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도구의 용도를 제한하는 일을. (...)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의 중재기능을 맡아왔다.” - 알랭 쉬피오 , 법률적 인간의 출현에서

 

이 같은 법의 도그마로서의 존재 위치를 기반으로 해서 기술경제중심주의의 시대인 오늘에 있어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법은 인간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인간들을 이성의 왕국에 복종시키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이다. 유비쿼터스 기술이 지금처럼 사람들 일상의 행위를 점령하기 전, 산업사회에서는 법이 사무실이나 공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있는 노동자를 보호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같은 개념도 모두 물리적 공간의 출입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의 환경에서는 그 출입 담장이 사라지고 집, 카페, 지하철, 심지어 침실에서도 업무망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현대의 노동법은 더 이상 공간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라 접속(연결)을 규제하는 법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언제부터 연결을 끊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으로서 법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법기술적 문제를 넘어서는 물음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인데, 유비쿼터스 기술이 노동시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자본의 본성을 실현하고 확장하는 최적의 도구이기에 자본의 시간 점유에 맞서 개인 삶의 시간을 방어하는 새로운 형태의 권리에 대한 이해의 필요를 제기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의 유비쿼터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연결을 통해 더 많은 노동을 낳고 그 결과 노동과 휴식의 경계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현대 법은 연결을 차단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시간을 누구의 것으로 볼 것이냐 라는 매우 근본적인 정치철학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전통적 법률들은 노동자에게 노동력만을 거래 대상으로 보고, 노동자의 인격 자체는 계약밖에 남겨 둔다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허구의 전제 위에 성립해왔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팔수는 없다는 믿음에 서서 노동계약은 노예계약이 아니라고 에두른 것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믿음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해 왔으며, 비근하게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단결권도 이러한 믿음에 기초해 가능해왔다. 사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칸트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은 자신의 인격 전체를 거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원격 근무, 스마트기기 기반 업무, 플랫폼 노동 등에서는 노동 그 자체보다도 노동자의 주의력, 감정, 반응속도, 생활패턴, 심지어 수면과 이동 데이터까지 생산성의 일부로 포섭된다. 바로 이러한 노동력과 인격 사이의 경계자체를 흐리게 만드는 기술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노동의 상품화라는 말은 지나간 옛 표현이다. 삶의 상품화’, ‘주체성의 상품화라는 인간의 그림자가 조금은 남은 표현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오늘의 기술경제자본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의 사물화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술자본이 고의적으로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사물화 하고자 한다기보다 구조적으로 측정 가능한 모든 것을 생산성 자원으로 전환하려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한데, 법이 어느 곳을 바라보아야만 하는가에 지시점이기 때문이다.

 

3. 기술경제 자본 지배시대의 법의 향방, 의미 부재의 시대가 뜻하는 것

 

인류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산업자본주의 시대, 포드자본주의, 정보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 등 각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신체, 시간으로부터, 지식에 대해, 인간의 주목과 관심에 대해 법은 그것들에 의해 침해될 인간존엄을 보호해왔다. 그것은 노동시간 제한, 최저임금, 산업재해 보상과 같은 것들로 표현되었다. 이제 연결되지 않을 권리, 데이터 소유권과 같은 권리가 인공지능자본주의 시대에 새롭게 보호되어야 할 권리로 등장하고 있다. 즉 과거의 법이 인간의 몸을 보호했다면 지금의 법은 인간의 정신적, 정보적 자아를 보호하려 한다. 이것은 법이 기존의 노동법 확장의 길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인격권 체계로 발전해야만 함을 가리킨다.

 

이렇게 법은 인간과 도구 사이에서 그 중재를 통해 인간 존엄의 훼손을 방어하는 데 그 기능을 존속시켜 왔다. 그런데 이제 기술경제 자본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인간에게는 거래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가?’, 인류의 오랜 인간의 법률에서 방어해 온 인간의 인격과 노동력을 분리할 수 있는 인간존엄의 영역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가는 하는 것인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일부 생명주의나 경제중심주의 법학자들은 인간을 세포들의 화학적 물리적 조성물, 계산 될 수 있는 수량적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의 사물화가 아니라 인간을 사물과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법은 언제나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제도화해 온 인간의 기술적 산물이다. 인공지능 디지털 기반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법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이해할 것이냐는 질문 앞에 선 것이다. 인간을 데이터의 집합, 예측 가능한 행동 패턴, 관리 가능한 생산성 단위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에 맞는 적절한 체계로 재편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에게 측정되지 않고 환원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인식이 유지된다면 법은 그 영역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 할 것이다. 다시 반복해서 기술한다면 법의 과제는 단순히 기술발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설정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함에도 오늘의 기술자본은 더 이상 그 보호대상의 위치에서 인간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숫자이고 물질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유전학에서 내린 판결에 따라 독일 민족의 삶과 법을 만들어간다. (...) 국가는 인종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히틀러 유겐트 입문서에서

 

인간의 세계를 사물의 세계로 깎아내리는 소위 인적 물자라는 개념 사용을 통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법 주체를 없애버린 히틀러의 제3제국 언어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을 부정함으로 전체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말살했는가라는 인간 사물화가 초래하는 법과 세계 파국의 적절한 역사적 사례일 것이다. 나치의 생물학적 법의식은 바로 지금의 기술경제주의 법의식과 빼닮아있다. 소위 과학적 법칙을 정치적, 법적 기준으로 삼을 때, 거기에는 일체의 책임감이나 죄의식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법이라는 도그마는 그 교리로서의 지위를 잃고 만다. 인간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있던 법이 그 기초가 부재하는 현실을 맞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법 이전에 인간의 이 맹목적 믿음인 도그마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믿음이다. 사회구성원들이 편리함과 효율성의 증가라는 진보에 매몰되어 기술경제 자본이 인간의 삶에서 인간 존엄을 서서히 박탈해 가 궁극에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주장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막연하게 인공지능이 몰고 온 시대를 자신들의 편리를 비롯한 유무형의 이익 관점으로, 즉 효율성 높은 긍정의 낭만적 기술로 받아들인다. 이 문제는 오래 붙들고 숙고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발견되지 못한 드러나지 않은 층위의 과제들을 망라해 숙의되어 할 현 인류의 시급한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법이 관리해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기술자본과 협의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자금 한국의 정치권력은 실용주의에 매달려 그 기술자본의 압도적 부와 권력에 매료된 듯하다.

 

우리는 허구, 맹목적 믿음에 기대 이 세계를 구축해 온 존재이다. 이제 인간 존엄이라는 최후의 허구를 포기 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이 영역을 버텨낼 것인지 갈림길에 들어서 있다. 인간들 인식의 문제이다.’ 우리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나? 기술경제 자본주의자들의 특이점의 시대, 인간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이 더 이상 없는 세계를 지향한다면 과연 인간사회를 존립해온 믿음이라는 허구의 붕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인간 세계의 절대적 파국이 아닐까?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무의미에 빠지지 않고 이성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그 존재의 의미실현을 지탱하고 보호하기 위해 작동했던 법이라는 의미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는 어쩌면 무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이러한 의미체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큰 울림을 주는 이 문장으로 맺는다. 인간 존엄이라는 이 교조적 믿음을 우리들이 잃는 순간, 그것은 민주주의는 물론 세계의 질서를 지탱하는 법의 붕괴를 초래한다. 법이 이 최후의 인간에 대한 엄중한 교리를 버텨낼 수 있도록 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이성은 약()한 것이다. 끊임없이 그 딛고 선 바를 돌아보고 보살피지 않으면

언제라도 광기와 망상으로 변질 될 수 있다. (...)

도그마는 인간의 탐욕과 망상에 한계를 설정하는 외부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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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비판하려는 관념에 장악된 그늘진 정신의 무게에 짓눌린 나를 느낄 때면 이유리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작가의 소설들은 제 아무리 힘겨운 삶에 직면한 인물일지라도 그 무게를 오히려 가벼운 무엇으로 인식하게 할 만큼 명랑하고 경쾌한, 기분 좋은 정조(情調)의 발랄한 생기로 전환시킨다. 그 작품들의 통통 튀는 밝은 기운을 내 마음에 잔뜩 흡수하고 싶은 기대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에 나는 분석하는 마음을 저 멀리 떨쳐버리고 문장들과 이야기가 발산하는 젊음의 생동감, 그 미완의 풍부한 가능성에서 피어나는 유쾌함과 명랑함의 분위기를 만끽한다.

 


이 작품집은 작가의 소설집 비눗방울 퐁에 실려 있는 세 편의 단편소설로 재구성된 단편선집이다. 선집의 표제작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의 첫 문장은 내게는 텅 빈 집과 아픈 고양이,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랑이 남았다로 시작된다. 수진은 연인 성재와 이별했지만 짐짝처럼사라지지 않고 남아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랑, 그 남는 사랑을 팔기로 한다. 남편의 외도로 사랑을 잃은 친구 영인이 수진에겐 필요없는 사랑을 사겠다는 제안을 하고, 수진은 냉큼 받아들인다. 감정전이센터를 찾아 기증자 수진은 수령자 영인에게 전이할 감정을 떠올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이한다. 감정이라는 것이 영인의 남편 민후의 말처럼 무슨 장기 이식 하듯 누구 것을 빼서 다른 누구에게 넣는다고 그게 진짜 자기 것이 되겠는가.

 

사랑이 끝난 자리, 사랑을 잃은 자리에 남거나 비어버린 곳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 대부분은 그 슬픔을 꼭꼭 씹어서 소화시키는, 그래서 약이 되고 마음의 굳은살이 되는 시간의 신비에 의존한다. 사랑이란 이미 누군가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님을, 어쩌면 발칙한 상상의 나래를 펴 이 진실을 음미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때는 그때 가서화자의 이름도 수진인데, 아쿠아리움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엉덩이가 근지러워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며 자유를 갈구하는 인물이다. 수진의 이 직업을 제대로 된 직장이라고 여기지 않는 그녀의 연인 정우의 기준에서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삶이 아니다. 작물을 심고 그 수확으로 겨울을 나야하는 중요한 땅에 꽃씨를 뿌리고 그저 놀기를 좋아하는 수진으로부터 정우가 떠난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음을 알지만, 머릿속은 꽃밭이라는 정우의 말을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속물적인 새끼.” 어찌 욕까지 악의 없이 무해하게 들리는 것일까.

 

이 소설은 내게 미소와 활력이 필요할 때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펼쳐 읽을 작품이 될 것 같다. 아니 이유리 작가의 소설들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책장 보이는 곳에 꽂아 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소설의 대표작이 이 작품 그때는 그때 가서이다.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것이 해파리 보는 것이라는 수진은 투명한 몸을 물의 흐름에 맡기고 목적도 욕심도 없이 그저 흘러 다닐 뿐이기에 흩날리는 꽃처럼 꿈결처럼 움직이는 모습, 그 자유로운 생의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새벽 다섯 시부터 개장시간인 여덟 시까지 그녀가 터득한 숙련된 노하우로 손발이 맞는 파트너 예순다섯 살 김선자씨와 잽싸고 날렵한 청소일은 결코 대강대강 하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에 노하우가 담겨있다고 자신의 일처리에 어떤 긍지마저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정우에겐 그따위 것은 누구나 시키면 할 수 있는 일이고, 비싼 돈 주고 대학까지 나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수진은 말한다.

 

수진아, 제발 어른답게 생각하고 살아. 쟤들은 해파리고 넌 사람이잖아. 쟤들은 집도 있고 때 되면 누가 밥을 주지만 넌 아니잖아.” 정우와 다투거나 싸우고 난 다음 날, 청소를 일찌감치 마치고 해파리 수조 앞에 있으면 뒤이어 일을 마친 김선자씨는 휴대폰에서 맞춤의 음악을 틀어놓고 목청껏 노래를 시작한다.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에서부터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에 이르는 그 절묘한 생의 풍악이 드리웠던 그림자를 거두어간다. 꿍짜라작작 쿵짜라작작 쿵작쿵작 /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 누구나 빈손으로 와해파리 수조 앞에서의 이 이상하지만 결코 유해하지 않은 무해한 이상함의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둘의 이 이상한 순간이 내겐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산다는 게 뭐 있나. 다 그런 거지.

 

민음 북클럽 에디션, 소설집비눗방울 퐁』속 세 편의 선집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사는 것이 삶인 것인가. 미래를 위해 하기 싫은 것을 끈질기게 참아가며 살아야 하나, 아니면 자유로운 비둘기와 해파리처럼 살아가야 하나. 수진은 김선자씨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그냥...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서”, “돈은 많이 모으셨어요?”라고 말해버린다. 그때 . 나도 그걸 알면 좋을 텐데, 미안해요, 몰라서라며, 수족관 앞에서 자신이 노래 부르는 이유를 설명한다. 꼭 지구를 앞에 놓고 부르는 것 같아요. 동그랗고 새파랗고, 그 안에 뭔가 살아있는 것들이 오글오글 돌아다니는 게 그렇지 않아요? (...)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더라구요.“ 뭐 그렇게 살면 되지.

 

수진은 정우가 말하는 현실 감각이라는 것과 해방 된 삶에 대한 생각을 오가지만, 김선자씨의 말 속 뭔가 살아있는 것들의 오글거림’, 그것이 어쩌면 삶의 진짜 모습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 열심인 삶, 바로 그것을 즐기는 삶, 그렇다면 그 미래라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롭겠는가.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된다. 많은 수진들을 응원한다.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그런 것 따위가 무어있겠는가. 생활비 조달에도 빠듯한 월급날 단 한 번 배달앱을 켜 맛있는 것을 먹는 호사(?)는 부려도 괜찮다. 무책임한 소리라 나무라는 목소리도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삶이라는 길에 정답이라거나 보편이나 정상이라는 것이 어디 있나,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삶이면 족한 것을. 바로 그 살아있음의 감정이 죽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기에 삶이 삶 같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파란 수조 불 빛 속에 부드럽게 유영하는 둥근 해파리의 모습을 닮은 이 땅의 수진이들을 위한 유쾌 발랄한 생의 축가 같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읽게 만드는 이유리표 소설이다. 그래서 이 각양의 형태를 지닌 생의 슬픔이 한껏 기분좋게 가벼워진 것을 느끼게 된다.

 

그냥 콩 하고 귀엽게 넘어진 게 아니었다.

발을 헛디디면서 두 바퀴쯤 허공에서 구르고는

그대로 천변 아래로 처박혔다.” -달리는 무릎에서

 

달리는 무릎의 문장이다. 새벽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話者)가 늦은 밤 달리기를 하다가 그만 하얀 무릎 뼈가 드러날 정도로 다친 것이다. 요즘 내가 부쩍 좋아하는 묘사들이 귀여움인 것은 순수에 대한 향수인 것만 같다. 물론 이 작품도 귀여움이 발산하는 명랑함이 작품 전체의 정조(情調)를 에워싸고 있다. 아홉 바늘을 꿰맨 무릎에 반 깁스를 한 채 자고 났을 때 무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너를 내내 기다렸다고. 너 같은 사람을, 시스템의 결정으로 공동체에 덜 기여한다고 선택되어 무한대에 가까운 조각으로 쪼개져 우주 전체에 흩뿌려진 존재의 이 낯선 목소리는 너 같은 사람의 운동에너지를 흡수하여 중력을 벗어날 추진력을 모아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기준 외의 것들은 다 없애고 간다는 그 어느 날의 우주 시스템의 생각이란 것에 대해 비난하는 화자의 분개에 마침내 무릎 속 외계 존재 자신도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함을, 그래서 싸움이 끝나고 자신이 되고 싶은 성취를 이루면 돌아와 알려주리라 약속한다. 인간 사회에서 떨려 나갈지도 모를 나는 자격증이든 시험이든 그놈의 적성이라는 것을 찾아서바쁜 일과를 보내야 하기에 하루 두 시간의 달리기만을 통해 운동에너지의 흡수를 돕기로 한다. 이윽고 나의 무릎 속 외계 존재가 중력을 벗어날 운동에너지를 거의 모았을 때 그 마지막 흡수를 위한 도움의 달리기를 한다. 좀 더 빨리!”

 

그때였다. 무릎에서 푸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갔어요?”, 대답 없는 우주 존재와의 이별, 손차양을 하고 올려다보는 하늘의 별을 보며, 시스템이 옳았다면, 불필요한 존재들이 사라진 자리에 필요롭고 쓸모 있는 것만 남아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있다면 채 싸우기도 전에 져버릴 것을 오랫동안 걱정했지만그 외계 존재의 결심에 초를 칠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비참해질까봐 말하지 않았음을 떠올리는 화자의 고달픔이 경쾌한 언어로 이 세계의 현실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외계의 존재라는 이 환각, 혹은 환상의 존재는 화자인 의 반영, 나의 소망의 목소리인 것만 같다. 고된 일을 마치고 늦은 밤에 홀로 뛰던 천변의 달리기는 어느덧 외롭지 않은 두 존재의 달리기로 공동의 목표를 위한 행위가 된다. 그리곤 이 이별이 비록 기약없는 이별이긴 하지만 언젠가 시스템과의 싸움에서 이겨 돌아올 기대를 가진 응원과 기대를 품은 이별이기에 슬픔의 그늘과 달리 밝게 빛난다. 처박힘에서 일어나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에너지를 얻는 그 마지막 혼신의 질주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유리표 소설들의 이 밝은 에너지인 명랑함, 환한 빛을 비추는 이 발랄함의 정조가 세대를 넘어 모든 인간들에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웃음과 더불어 생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해준다. 세 편 모두 이별이 있지만 그것은 상처로 머물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의 찬란한 색으로 물들고, 사랑의 핑크빛 숨결처럼 더없이 포근한 생의 위로와 기쁨이 되어 우리들 방황하던 정신을 토닥인다. 이유리 전작주의(全作主義)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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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 플랜더스, 질서 탈주 인물인가, 체제 순응 인물인가?

 

시대의 걸작이자 삶의 방식에 대한 수많은 물음과 비평적 논의의 대상으로 꾸준히 회자되는 몰 플랜더스(moll flanders),1722가 종이책으로 국역 출간되었다는 데 늦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열렬하게 환영한다. 이 걸출한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60-1731)의 작품은 초기 자본주의의 물질화의 욕망이 거세게 세상을 지배할 때, 그 가운데 여성의 사회적 자리가 여전히 협소하여 삶의 주체자로 설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있을 때, 그러한 사회적 배치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욕망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디포의 잘 알려진 로빈슨 크루소 (The life and adventure of Robinson Crusoe),1719를 넘어서는 1722년 발표된 대표작이다.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1인칭 자기 고백의 형식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주인공 몰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도덕, 경제, 여성의 생존 조건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몰은 감옥에서 태어나 숙녀가 되기를 꿈꾸며 성장하지만 그녀의 삶은 일관된 도덕적 성장보다는 생존을 위한 자기 선택과 자기 합리화의 반복으로 전개된다.

 

다섯 번의 결혼, 이 결혼들은 사랑에 있지 않고 오직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상승을 향한 전략의 일환이고, 자신의 형제인 줄도 모르고 하는 결혼은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불안정한 사회적 신분 구조와 정보의 결핍이 낳은 비극으로 읽을 수 있다. 남편과 재산을 잃은 후 본격적으로 범죄의 세계로 들어가 도둑으로 살아간다. 깜쪽 같은 변장과 뛰어난 기지로 수많은 절도를 저지르지만 이를 죄라고 여기기보다는 필요한 생존 기술로 정당화한다. 그녀는 이러한 반도덕적 행위에 대해 내면적 갈등보다는 계산적이고 실용적 태도를 보이면서 당대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가치가 어떻게 물리적 기준으로 환원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주인공 몰이 생존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현실성의 존재임을 보여주는 “I saw world was so taken up with self...(세상이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알았어요..)” 처럼 자기 살기 바쁘다는 인식, 즉 도덕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배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기 합리화와 죄 의식의 공존, 물질적 성공에 대한 집착은 “I had no remorse about me...(나는 나 자신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Get money. honestly if you can...(가능하면 정직하게 돈을 벌되그렇지 못하더라도 결국 돈이 중요하다는 냉혹한 가치관을 도처에서 보여준다.

 

결국 몰은 체포되어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고, 이 시점에서 그녀는 회개의 태도를 보이며 소설은 구원의 서사로 전환된다. 식민지로 이송되었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은 디포의 체제 수호적 의지가 반영된 인위적 결말로 작품의 아쉬운 흠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는 몰의 회개가 진정한 도덕적 각성인지 아니면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랄 수 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몰이라는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무한한 비평적 물음을 가능케 하는 특출한 모델을 설립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학적 업적이랄 수 있다.

 

몰 플랜더스는 테스마담 보바리, 제인 에어와 비교되곤 하는데, 이러한 비교를 통해 읽는다면 몰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위치를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해독하는 즐거움이 되어줄 수 있다. 이를테면 몰과 테스는 여성의 운명이 사회구조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테스는 가난과 계급 때문에 삶이 무너지고 도덕적 낙인이 따라다닌다. 테스는 몰과 달리 끝내 구원받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몰이 생존형 현실주의자라면 테스는 사회적 희생양에 가깝다. 한편 마담 보바리는 물질적 욕망과 환상을 좇는다는 측면에서 몰과 유사하지만 엠마 보바리는 낭만적 환상을 좇다가 파멸하고 만다. 그러나 몰은 현실적 계산이 뛰어나다. 엠마의 감정적 욕망과 몰의 실용적 욕망을 대비하며 읽어나가면 결국 두 인물 모두 사회가 만든 욕망에 갇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제인 에어는 여성 독립의 문제를 말한다는 측면에서 몰과 동일하지만 둘은 도덕적으로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같은 조건에서도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반례로서 사회적 조건이 인간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사유케 한다. 몰은 이러한 비교대상의 여성 인물 중에서도 특출한 역사적 모델이다.


이러한 비교 독서를 이 작품은 자연스레 이끄는데, 그만큼 몰이라는 인물은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여러 방향의 물음을 요구하는 독특한 존재다. 죄의식 없는 반도덕적 실용주의적 삶을 수행하는 나쁜 여자로서의 몰은 정말 악의 화신인가, 나아가 이 타락한 여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사회질서, 즉 주류 권력이 만든 틀 속의 체제 종속적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와는 대비되어 소위 페미니즘적 관점, 혹은 들뢰즈의 욕망의 생산의 관점에서 몰의 지배질서를 교란하는 반도덕적 행위는 사회적 흐름(화폐, 신분계급, 성적지위)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생산적 욕망의 수행이라는 자신을 계속해서 새롭게 조립하는 긍정적 존재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몰은 기성의 사회적 배치를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되기(becoming)를 실험하는 존재로 해독할 수 있다. 결국 우리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몰과 같은 삶이 가능해진 사회적 배치(질서와 제도, 체제)란 어떤 것인가를 물을 수 있게 되고, 우리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7~18세기 영국 사회란 초기 자본주의로 진입하면서 물질과 화폐에 대한 물신적 풍조가 전통적 미덕을 강하게 밀어내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여성의 경제적, 정치사회적 지위는 전통에서 풀려나지 못한 그야말로  취약 지대에 놓여있었으며, 이는 결혼이 화폐에 의해 거래되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여성이 그러한 시대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 가에 대한 심원한 질문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적 비평의 관점, 즉 사회적 배치를 가로지르며 기존의 질서로부터 탈주하는 여성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몰을 타락한 여성이라고 바라보는 기성의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 담론에 이미 종속되어있는 비평이라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합법과 범죄, 아내와 창녀, 정숙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이미 권력이 사람을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몰은 소설의 전환점 이후에 구원과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소설이 1인칭 고백(confession)의 서사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몰의 서사는 거의 전부 자신의 죄라는 과거를 서술하고 자신을 해석하는 과정인데, 이는 단순 서술이 아니라 권력에 순응하는 방식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고백하는 순간 개인은 자신을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며, 이는 곧 스스로 말함으로써 권력에 협력하는 주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몰은 감옥에 가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도덕적으로 재구성하고 정상(?)적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러한 양태를 자기 통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권력(, 제도, 처벌)보다 내부 권력(양심, 자기감시)이 더 강력해지고, 결국 몰은 순종적인 주체로 재형성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몰을 권력에서 탈주하는 여성으로 해독하고 있는데, 이러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녀는 자기 통치라는 그물망에 포획되기에 이는 과잉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여성과 사회경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성적 규율, 결혼 제도, 빈곤과 노동, 범죄화 등 중요 요소들이 어떻게 개인에 작동하는지를 발견토록 하는 거대한 사례연구라 할 수 있는 지금 여기에서도 작용하는 인간 삶의 조건을 생각토록 하는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몰이 자신을 범죄자, 타락한 여성으로 자성토록 하는 것은 사회가 읽고 관리 가능한 범주에 포획된 존재에 대한 계도(啓導)적 인물로 이해할 것을 은근히 제안하는 디포의 수구적 의지표명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야 어쨌건 몰 플랜더스라는 여성의 삶의 행적은 도덕 이전의 문제로서 인간 욕망과 생존 실험의 방식으로 그 작동 방식에 대한 무한한 비평적 검토를 요구한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으로서, 욕망의 배치가 드러나는 공간으로서, 독자를 훈육하는 장치인 규율 장치로서의 소설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하는 문제적 소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활하고 기회주의적 여성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누구나 이 매혹적 서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기도 하다. 마땅한 국역본이 없어 원서를 통해 어설프게 읽었던 작품을 우리말로 다시 읽게 될 기대가 크다. 이 기회에 테스와 마담 보바리,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과연 몰의 반도덕과 타락은 개인의 윤리문제인가, 아니면 경제사회구조가 만든 선택인가? 이 입체적 인물은 질서 탈주의 존재인가 아니면 체제 순응적 인물인가? 독자들의 감상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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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의 아나이스 닌과 《악령》의 스타브로긴 

- 악마와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아나이스 닌은 우리 대부분이 감히 인정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들을 저질렀다.”

 

소설가 킴 크리잔(Kim Krizan)은 아나이스 닌(Anais Nin;1903-1977))에 대한 전기소설 속에서 거침없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냈음을, 시대적 당혹감으로서 위와 같이 썼다. 그것은 엘렌 식수가 말한 ()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쓰기로서 여성 억압의 표현에 스스로 갇히지 않은, 텍스트들 속에서 페니스가 순환하는섹스트(sextes)의 출현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의 전경(全景)으로서의 시선이지, 아나이스의 텍스트 자체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발판으로 자신의, 한 여자로서의 자기 자리의 발견을 향한 고투, 자각을 향한 수행(遂行)적 걸음이었음을 발견해야 한다.

 

출처: The Anaïs Nin Foundation


1. 아나이스 닌을 말하고자 하는 동기에 대해서

 

우리의 독서시장에는 193110월부터 19328월까지에 이르는 아나이스 닌의 헨리 밀러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준과의 에로틱한 모험의 내용이 담겨진 헨리와 준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를 읽은 독자들, 일부 평자들은 도덕적 규범이 붕괴된 한 여인의 성적 편력 행위의 묘사들에 빠져 아나이스가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 그녀가 왜 이 글쓰기를 실행하고 있는가를 망각하고 마는 듯하다. 나 또한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다 라는 문장처럼 유부녀가 뭇 남성들을 옮겨다니며 자신의 성적 쾌락을 마치 자아발견의 행로인양 위선을 떨어대는 자기 정당화의 궤변으로 읽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 속 빈번하게 등장하는 도스토엡스키의 악령속 스타브로긴의 몰인격, 악의 화신이 헨리와 준, 그리고 자신과 비교되는 성찰의 말들을 보며 이 텍스트를 완전하게 잘 못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묘사하는 성적 쾌락의 장면들은 단지 자기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이 글쓰기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나이스가 헨리를 생각하면 나는 다리를 벌리고 싶다라고 쓰는 것, 마치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 드러났음에 현혹당한 읽기로 본질을 읽지 못하는 우를 저질렀다는 자각이었다. 이 글을 쓰고자 한 충동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아나이스라는 여인이 이 일기를 씀으로써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왜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로인해 그녀가 발견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으로서의 읽기로 전환된 것이다.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 헨리, 준의 도식(圖式)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그 해명이 되어 줄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아나이스 작품들에 대한 문학적 폄하의 시선을 불식시키고, 그녀의 문학적 업적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아보자는 취지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헨리와 준은 아나이스 닌이 자신의 문학적 명성이 절정에 이르기 시작했을 때 다듬어진 일기의 일부분으로 1966(63)에 첫 출판되어 자아 발견의 여정을 통찰력 있게 그려냈음을 문학적 업적으로 찬사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실제 일기 속 여러 인물들이 삭제되어 순탄치 않은 편집과정을 거쳐 탄생한, 소설적 윤색이 더해진 일기라 할 수 있다. 물론 1932년에 출판한 D.H. 로렌스 비전문 연구서를 필두로 1939년에 소설 인위의 겨울(The Winter of Artifice), 1944년 단편소설집 유리 종 아래에서가 발표되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얻어냈지만 문학적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1950년대 내내 내면의 도시들, 불의 사다리, 알바트로스의 아이들, 네 개의 방이 있는 심장, 사랑의 집에 들어온 스파이등의 소설을 발표하며 독자층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냈으며, 1964년 소설 콜라주가 그해 타임지 최고 도서로 선정되면서 독보적 여성 작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즉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971년 공쿠르, 메디치 등 프랑스 4대 문학상의 하나인 세비네 상의 수상, 1974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1974년 미국 국립 예술문학 협회 정식회원으로 선출되며 그녀의 문학적 업적은 공인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70년대라는 시대는 여전히 이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반감과 옹호가 상존하고 있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이 같은 글쓰기를 수행한 후배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2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어쩌면 숱한 아나이스들이 맺은 결실 일 것이다. 아나이스는 폄하 또는 비하와 격하 대상의 작가가 아니다. 즉 그녀는 악령속 스타브로긴처럼 이 세계에 악을 전염시키는 위험하거나 배제되어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지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를 비교하며 그 차이 속에서 이 여인이 발견하고자 고통스럽게 애쓴 것의 자취를 우리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도스토엡스키의 악령속 스타브로긴은 어떤 인물인가

 

아나이스가 악의 화신으로 대입하는 악령의 스타브로긴이라는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스타브로긴은 내 삶의 법은 내가 만든다는 태도를 지닌, 이 세계의 모든 확고한 신념이 무너진 뒤 남은 공허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전통의 도덕도, 외부 권위도 자신을 규정하지 못한다고 여기며 자기 의지만이 기준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선과 악을 초월해 있다고 믿는 이 인물은 영웅적 행위와 타락한 행위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으며, 스스로 도덕 바깥에 선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자기 의지만 믿는 태도의 인간이다.

 

이 인물을 악령, 악의 화신으로서 두려운, 아니 무서운 인간으로 말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의지란 것이 실제 아무런 방향성도 없는, 삶의 의미를 조직해주지 않는 욕망과 결단으로서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처럼 그 어떠한 교리나 신념을 설파하지 않음에도 그의 공허와 카리스마가 주변 인물들의 과격 사상과 행동을 촉발하는 중심점이 되는 데 있다. 의미와 믿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차지한 텅 빈 공백, 이것이 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위험에 빠지게 만드는지를 표상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가 구현하고자 한 핵심적 시선이다. 이를 정리하면, 도덕을 상대화하고, 자기 의지를 절대화하려 하지만 결국 공허와 양심의 반격 앞에서 붕괴하는 인물이고, 그래서 그의 신념은 어떤 적극적 이상이라기보다, 믿음의 상실이 낳은 허무주의적 자기숭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존재다. 그래서 헨리와 준에서 헨리가 아나이스에게 당신은 물론 나르시시스트야, 이 일기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것, 바로 그것에 닿는다.

 

그렇다면 헨리가 농담처럼 뱉은 지적처럼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의 텅빈 공허로서의 의지를 수행하며 악의 덧을 마구 뿌려대는 팜므파탈인가? 스타브로긴처럼 스스로를 선악을 초월한 인간인가라고 묻게 되면 아나이스는 바로 그러한 스타브로긴의 매혹과 파괴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미학화하고 관계화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타브로긴이 공허한 의지의 중심이라면 아나이스는 그 공허 주변을 맴돌며 그것을 감수성, 욕망, 자기 서사로 번역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스타브로긴은 소설 속에서 준과 헨리 중 누구인가라는 점에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3. 헨리와 준의 자기해석자로서의 아나이스

 

헨리가 말한다. (...)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준은 내가 자신을

팜므파탈로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했어. 나는 악마성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악마에 몰두해 있지.”

 

준이었다면 헨리가 글 쓰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난리를 피웠을 것이고,

화려한 팜므파탈의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아나이스)”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매혹을 맴도는 인간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은 아나이스가 준에 대해 말하는 문장에서 다시금 확인되는데, 악을 낳고 범죄를 일으키지만 스스로는 거의 행동하지 않는 인물인 도스토옙스키적 인물인 스타브로긴을 인용하는 것에서 그녀의 무의식이 드러난다. 실제 준은 헨리를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움직이게 하는 힘의 중심으로서 악의 자기장 같은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즉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스타브로긴적 인물에 매혹되는 해석자이자 매개자이다. 아나이스가 자신을 “the revealer, the harmonizer(드러내는 자, 조화시키는 자)”라고 부르며, 준에게는 도스토옙스키를, 헨리에게는 준을 준다고 쓰는 것에서 그녀가 파괴의 중심이 아니라 파괴적 매혹을 언어와 관계 속에 배치하는 연출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나이스의 헨리와의 지독한 성애와 그에 대한 집착은 자기 쾌락, 삶의 안정 장소를 찾아내기 위한 그녀만의 일련의 고통스러운 수행(遂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행의 여정 자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감각은 하나의 요소이지 그것이 곧 욕망이 지향하는 궁극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의 자기절대화에 접근하고자 하는 스타브로긴과 같은 인물이 아니다. 스타브로긴으로 아나이스를 해석하는 것, 즉 그녀를 성적 쾌락에 목매단 탕녀 정도로 이해하는 것, 그래서 뭇 남성들의 자존과 삶을 파괴하고, 그들의 가정을 궤멸시키려는 그러한 성의 화신이 아니다.

 

아나이스는 욕망과 위험, 심지어 악의 매혹에 끌리면서도 자신 안의 잔혹성에 대한 저항이 남아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잔인함에 대한 무능력은 약점에 가깝다, 또한 우리는 가장 자기답지 않을 때 가장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할 때 그녀는 자기모순을 감지하고 자의식적 기록자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국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팜므파탈이 낳는 정동을 흡수하고 서사화하는 인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는 타인의 욕망과 어둠을 통과하며 나를 발견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준 혹은 스타브로긴의 공허 그 자체와 달리, 그 공허를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고백, 이미지, 역할극을 만들어내서 허무의 매혹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미학적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이스는 매우 지적인 여성이고 인간을 단순한 현실의 개인으로 읽기보다는 하나의 심연적 유형, 상징적 배치로 해독한다.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중심으로 준을, 창조적 노동과 육체성을 가진 인물로 헨리를 읽으며, 자신은 이 둘 사이를 통과하며 스스로를 분열시키기고 확장하는 의식의 존재로서 위치한다. 즉 준의 중력장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멀리 혹은 깊이 끌려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녀는 허무의 공백과 타락의 에로스를 자기해석의 연료로 바꾸는 고백적 미학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악의 매혹을 사랑과 글쓰기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감수성의 공모자로서 아나이스는 끝내 양심과 문장 속으로 되돌아오는 미학적 증인이라 할 수 있다.

 

4. 결어 - 아나이스의 글쓰기가 말하는 것

 

아나이스 닌이 일기를 쓰는 것은 이상화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일기 속 자기 정당화의 변들이 위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그 생경한 날 것의 성적 묘사들이 혐오와 당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작 글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단의 감각이 야기하는 도덕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인식에 지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나이스는 이 일기를 쓰는 동안 자신의 진정한 내적 실체를 발견하고 이 분열된 욕망들인 자신을 통합하고 진실된 인격을 형성하고자 고투했다. 그녀는 글 속에서 글쓰기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자아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라고 믿었으며, 어떤 파괴적 영향을 받더라도 온전함을 만들어내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아나이스의 일기는 한 인격의 진화로 나아가기 위한 독특한 문서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 속으로 도피했다가 진정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과정의 역동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여러 인격을 연기해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이 길을 잃은 허위와 망상의 미로를 인내심 있게 해쳐나가지 않고서는 자아의 통합과 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질서는 바로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나이스는 자신의 진실한 본성을 찾아가는 철저한 여정에 대한 경이로움과 인간 정신의 신비로운 작용에 대한 깊은 외경을 통해 미학과 질서, 이상을 마침내 버렸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질서와 지혜를 발견한다. 그녀를 메를로 퐁티의 몸의 철학을 실천한 사람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모든 세포가 기능할 때, 즉 꿈, 욕망, 본능, 식욕이 모두 살아날 때 풍요로움에 도달합니다라고 쓸 때 깨달음의 충만함 속에 존재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을 왜곡하는 거울을 부수고 온전함과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 삶의 투쟁을 벌여 나갔던 인간의 특출한 사례라 해도 될 것이다.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었다. 헨리와 관계를 가진 날 휴고가 나를 원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어젯밤 그는 열광하며 절정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순종하며 그를 기만했다. 즐기는 척 했을 뿐이다.”  - 헨리와 준,165

 

이 문장을 읽을 때 교활하고 발칙한 색정적 여인을 떠올리며 도덕적 분노가 슬그머니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러한 묘사에 함몰된 읽기에 그친다면 그것은 매우 편향된, 남성적 시선의 읽기, 즉 절름발이 독서가 되고 말 것이다. 여성의 자신의 성 욕망 드러내기를 남성들은 관음의 시선으로 읽어내며, 그것에 편협한 (팔루스의)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그럼으로써 죄의식을 부과하고 그것에 악의 그림자를 덧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여성의 시선으로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가 억압으로 눌러 온 것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며 개방된 세상 속에서 그 어떤 구속도 없이 자기를 발견하려는 처절한 탐색의 여정임을 발견할 수 있다.

 

출처헨리 밀러북회귀선》 中 아나이스 닌의 서문 일부 발췌


아나이스는 성 탐닉에 안달하는 성 탐닉자가 아니며, 자신의 성적 자유를 위해 타인을 파괴하는 인물도 아니다. 헨리와 준에는 작가로서 또한 불륜의 관계자로서 헨리 밀러에 대한 재정적 지원에 대한 직접적 표현은 없지만 그녀는 그의 문학적 동행자이자 지지자로서 많은 영향을 서로 나누었다. 스치듯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의 초고를 아나이스가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이 소설의 서문을 쓰기도 했는데, 아마 그것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미 아나이스의 문학적 역량에 대한 비판은 거두었으리라 믿어진다. 매우 높은 지성의 소지자이면서 밤의 여왕으로서 재능이라는 이 낯선 조합의 여인은 헨리를 비롯한 프레드, 그녀의 남편 휴고나 사촌 에두아르도에게도 낯설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것을 연출하기 위한 세련된 감각의 소지자였음이 일기 속 도처에서 드러난다. 아나이스 닌의 텍스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엄한 검열의 시대에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한 여인에게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음을 상기해보면 그 미학적이고 문학적 작업의 결과를 당연하게 볼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일기는 죽지 않았다. 그가 내 옆에 없어서 그를 애무할 수 도 없을 때, 일기를 쓰는 것 외에 그를 사랑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헨리와 준)” 문장은 단절된 욕망을 대신하여 삶의 충일함을 지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글쓰기에 매달리는 아니 에르노가 탐닉에서 반복한다.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 여자를 존재적 물음에 빠뜨리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삶의 의미로서 사라져 버리는 괘락으로서의 욕망, 욕망의 부재인 삶의 멸실로서 죽음으로,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는 이 격렬하고 천박한 음란의 노래는 스스로를 정의하려는 각고의 자기 탐색의 투쟁이다.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려는 자기성찰적 반영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결실이기도 했을 것이다. 도덕주의를 앞세워 비난당하고 잊혀지는 작가를 대신해 항변 하고 싶었다.

 

이 글은 부분적으로 루퍼트 폴이 세운 아나이스 닌 재단(The Anaïs Nin Foundation)’의 아카이브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루퍼트 폴은 1947년 이후 아나이스의 연인이자 1955년 정식 혼인한 남편으로 1977년 아나이스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한 그녀의 동행자였다. 폴은 200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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