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쓰홍 작가의 <67번째 천산갑> 리뷰대회 수상자가 발표되었네요.

선정되신 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저도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네요. ^^



고독과 치유의 여정을 영상미 넘치는 문장으로 

유창하게 그려낸 훌륭한 작품입니다.


많은 독자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은 작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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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9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상자가 닉네임이 아닌 본명으로 발표되었네요.ㅎㅎ
필리아님!
축하드려요^^

필리아 2024-11-19 17:38   좋아요 1 | URL
네, <유령의 시간>에 이은 연타석 홈~런.
기분 좋네요. 고맙습니다. 페넬로페님 ^*

yamoo 2024-11-19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뷰대회라는 걸 참가해 본 적이 없으요~~
아주 아주 오래전에 감상문 대회 몇 번 참가한 이후로는 없다는..
1등 상금 2-3백 걸린 대회는 하도 잘쓰는 사람들이 많아 생각도 하지 않는데, 지인이 저번 서울북스오브리류 야심차게 도전했다가 탈락했으요~~ 여기 제출 마감 1주일 전에 만났는데, 은근히 수상을 기대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여기 정말 어마무시하게 잘 쓰는 사람들 많이 제출한다고...참가에 의의를 두는 게 좋다는 취지로 얘기해 드렸는데...그래서 그런지 탈락의 후유증을 잘 감내하시더라구요..ㅎㅎ

그나저나 필리아 님...이전에 리뷰대회 수상하신거 봤는데, 또 수상하셨네요! 감축드려요~~

필리아 2024-11-19 18: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yamoo님 ~
저는 제 감상이 다른 이들에게 과연 수용될 수 있는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회로 리뷰대회를 활용하고 있어요.
선정되면 더욱 좋은 거구요...

꼬마요정 2024-11-20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축하드립니다!!!
너무 멋진 글이에요. 늘 느끼지만 필리아 님 글 너무 잘 쓰십니다. <67번째 천산갑> 읽고 싶어집니다. ㅎㅎㅎ

필리아 2024-11-20 19:31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고맙습니다.
네, 천산갑은 생각지 못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랍니다.
좋은 꿈 꾸세요. ^^
 

 아래 글은 케임브리지종신 석학 교수인 피터 버크의 무지의 역사, Ignorance: A global history2무지의 결과11장에서 13장에 이르는 정치와 재앙, 비밀과 거짓말에 대한 읽기에서 떠오른 상념의 記述입니.

 

1. 무지의 사회적 분배

 

비밀과 은폐, 공작 또는 음험한 기획에 열중하는 권력이 자신들의 관심사 이외에는 무관심과 함께 무지가 따르는 것은 불가피한 양상일 것이다. 해서 이들 권력집단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무지를 아주 폭넓게 공유한다. 그렇기에 만일 그들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또는 불의한 사정이 드러나면 이들은 부인, 부정, 거짓말, 무책임으로 방어하곤 한다. 즉 관련된 인물들, 아래로는 지방부처의 수장에서부터 장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공적 부인을 통해 거짓말로 상황을 돌파하려하며 그 거짓말의 취약부분이 들통 나면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다시 부인하면서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

 

부인하는 거짓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에 대한 거짓말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사회, 정치학자들의 일관된 견해이다. 즉 그 권력 집단의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분명 전 정부에서는 총명한 관리였는데, 급작스레 아주 멍청한 각료가 되어 횡설수설하며 그 어떤 소신도 밝히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적잖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침묵으로 응답하고, 또는 모른다고 하는 양상이다.

 

국회 청문회에 소환된 각 기관 수장들이 예고된 재난을 재앙으로 만들어 버린 후, 하나같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자가 없었으며, 자신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태연스레 드러내기까지 했다. 피터 버크 교수는 결함을 지닌 결정권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기술을 지휘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재난을 재앙으로 만드는 사태는 불가피한 무지가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무지준비 부족’”이라 단정한다. 지금 재난에 대한 권력의 무책임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행태에 내재된 무지의 속성을 살펴보고자 하기 위해 일례로 시작한 것일 뿐이다. 뜬금없이 누군가는 무지는 즐거움이라는 당치도 않은 말을 주절거리지만 무지는 대부분 삶에 대한 부정적 요소를 구성한다.

 

2. 무지는 공적 부인(否認)이라는 거짓말 형태로 표출된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는 오랜 학습을 통해 재난에 대한 대비책을 알고 있다. 결국 효율적이고 장기적 대비를 할 수 있으며, 할 수 있다는 것이 재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재난은 거의 모두가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부의 어느 책임자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며, 불가피한 재난이었으며, 오히려 피해자들의 부주의 탓이고, 나아가 불의한 세력의 사건 날조라고 떠들며, 반국가세력의 음모라고 궤변(詭辯)을 주절거리기까지 한다. 공적 부정은 허위 정보의 한 형태이며, 사적 부정이나 침묵은 고의적 무지라 했다. 즉 알지 않으려 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기에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959~1962년을 중국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시기라 부른다. 이때 3,000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세계사의 어디에도 이만한 규모의 아사(餓死)를 기록한 기근은 없었다. 서구를 따라잡겠다고 자신의 천재성과 무오류라는 무지와 오만으로 파종과 수확을 해야 할 농민에게 철 생산을 독려 했다, 이것은 위신구라는 농촌 공간을 배경으로 황허유역 모래밭에서 흙철을 모아 철 생산에 내몰린 농민의 고통스러운 삶을 적나라하고 풍자적으로 묘사한소설가 옌롄커의 四書그것이다. 결과는 심각한 식량부족과 대기근이었다. 마오쩌뚱 정권은 자신의 실수는 은폐하고, 생산통계는 조작하고, 인민의 삶에는 무관심했다. 마오는 물론 정권의 그 누구도 책임지질 않았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농민 탓, 인민 탓이었다. 이 끔찍한 엉터리 운동이 대실패로 끝난 것은 너무도 자명한 순리였다.

 

이 실패한 약진 운동에는 아주 흥미로운, 지금 한국 사회에 펼쳐지는 희극 장면으로 다시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와 인간 권력의 반복 유사성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무지의 양상을 발견하게 한다. 마오쩌뚱은 곡물 생산을 늘리라고 종용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는데 방문 이동 경로는 하나의 연극무대로 사전에 철저히 연출된 현장만을 방문하였다는 것이다, 권력자의 무지는 항상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이것은 전제주의나 독재권력이 있는 곳이면 여지없이 반복되는데, 농협의 대파 한단 가격으로 인해 야기되었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연출된 무대에서 벌어진 부득이한 연극일 게다. 바로 이 권력이 권위주의 독재 권력을 지향하고 있음의 반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하나의 지점이다.

 

사실 이처럼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서민 대중의 삶에 대한 정보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하는 독재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무의식적 무지이자 허용된 무지만이 발견되는 것이고, 그나마 무지의 단순성 때문에 비난의 대상을 명료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두에서 언급한 무지의 사회적 분배로 인해 권력 집단에게 광범위하게 무지가 작용할 때 그 무지는 대개 알고 싶지 않거나 알아서 무시하는 무지이기에 그 결과는 사회적으로 심대한 손상을 가져오기에 예사로운 무지가 아니다. 이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특히 권위주의 권력이 구사하는 여러 형태의 무지를 보았는데, 그것은 무시, 은폐와 조작, 부인이라는 양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인이 더 내재되어 있는데, 무관심으로 인한 무지가 무능과 안일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오로지 시민의 고통으로 안겨지는 것이기에 아주 나쁜 무지다. 마오쩌뚱은 기근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어떤 사실이 발생했음에도 부인하면, 공식 대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결국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조치들이 취해지지 않고, 무시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 마오쩌뚱은 기근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측근의 고위관리들 역시 무지를 가장한 채 책임을 회피했다. 어째 너무 닮지 않았는가?

 

어떤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고 진행 중인데, 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거나 무시하면, 당연 무지로 인한 무능, 즉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방치가 발생하고, 문제는 곪아 터져 국민의 삶을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국민을 볼모, 희생양으로 삼아 벌이는 권력의 행태는 정말 끔찍한 것이다. 정치 퇴행은 물론이고 경제적 사회문화적 몰락으로 이어지기에 그렇게 일시적이거나 단순하게 취급될 사안이 아닌 것이다.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마당에 무지와 관련한 희생양 증후군(또는 집단 편집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자에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비난하는 저열한 수구적 무리들의 역사 왜곡과 날조에 편승한 무지도 바로 하나의 집단 편집증 현상인데, 어떤 예상치 못한 재앙이 일어났을 때,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책임을 돌려 가해 당사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기만 책략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사태는 너무 비근하게 벌어지는 일이기에 그리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666년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자 기득권 세력인 영국 국교 집단은 박해받던 가톨릭 신자들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거짓 소문을 내서 자신들의 적을 쓸어버리는 발작을 했다. 이른바 희생양 증후군이다. 범죄행위의 가해자인 자신이 속한 집단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추악한 무지의 일면이다. 이들은 결코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자신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결코 깨어나지 않을 무지이다, 때문에 이에 기초한 지식은 항상 왜곡되고 조작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집단 편집증(희생양 증후군)은 곧 무지의 한 양상이다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의 조선인 대학살(조선인을 포함 15만 명이 사망)도 조선인의 방화와 약탈, 그리고 우물 독극물 투입으로 일본인이 무고하게 죽어나가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일본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희생양 증후군의 대표적 사례이다. 다시 말해 재난 대비 부족에 대해 응당 책임져야 할 권력이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희생양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는 대중의 무지를 토대로 한다. 정보가 부족해지면 그 진실의 빈 공간을 소문이 대체하는데, 이는 예외 없이 왜곡과 조작된 허위와 거짓 정보로 채워졌다는 것이 역사의 실증이다. 1980년 광주시민이 무참하게 학살된 민중항쟁 운동 또한 북한 특수부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침투하여 벌인 정당한 군사행위라고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떠드는 것 또한 이와 유사한 의도된 고의적 무지의 한 형태일 것이다.

 

제주 4.3사건 또한 학살의 책임을 피해자로 돌리는 무도함과 무지함의 반복이라 할 수 있는데, 한동안 우리 역사에서 4.3사건은 금기어였다. 마치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발설하면 투옥되듯, 철저한 금기어로서 기억에서 지워야하는 어휘였다.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인식하는 알려진 무지였다. 이웃이 끌려가고 무수한 총소리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마을 사람들은 알지만 몰랐다. 안다고 말하는 순간 군경에 의해 똑같이 죽을 수 있었기에 기억에서 어떻게든 지워버려야 하는 사실이었다. 이와 동일한 사건은 세계 도처의 독재정권에 의해 무수히 벌어졌고, 그 진상을 밝히는 데 대부분 50여년의 끈질긴 추적의 노력이 이루어져야 했다. 19404~5월 폴란드 장교 2만 명이 비밀경찰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살되고 카틴 숲이라는 곳에 묻혀버린 역사가 있다. 폴란드 공산당 정권은 논의를 금기로 하고, 실종된 장교들의 날짜를 조작 날조했다. 그리고는 독일에 그 책임을 돌렸다.

 

1989년에야 진상이 규명되고, 러시아 보리스 옐친은 바르샤바 기념탑에 서서 사죄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 알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 기억을 지워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하던 이들이 모두 죽으면 영원히 그 사회는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동일한 사태를 반복되어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 기억상실증은 국가가 후원하는 스포츠다!”고 말했단다. 고위 정치인들의 청문회에서 우리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무수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간들을 보게 된다. 선택적이고 고의적인 무지는 모두 거짓말임을 역설한다. 독재 권력에 편승해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나누어 가진 고위 정부 관료들은 소위 고의적 허위 정보, 디스인포메이션(disinformation)’을 공유하는 것이다. 즉 더러운 속임수, 기만 게임에 동참하는 것인데, 자기들만의 폐쇄적 정보를 이용하여 조작, 날조, 은폐를 일삼으며 일반 대중을 무지 속으로 몰아넣고자 한다. 독재 권력은 항상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대중의 무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제거하고 싶은 정적에게 조작된 범죄 사실을 대중에게 선전하고, 권력(檢警言)을 이용하여 상대의 평판을 훼손하며,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저열하고 악질적 행위를 하는 것도 결국 무지에 대한 의존이 배경이다. 때문에 그토록 언론기관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삼으려 안달하고, 언론에 대해 사전 검열을 자행하고, 금서 목록을 지정하며,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독재 권력에 반하는 사회문화 및 정치 인물을 공적 진입에서 배제하려는 것도 대중의 무지를 유지, 지속하려는 의지의 다름이 아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무지가 이 사회를 좌우하고 있기에 비밀주의와 은폐, 조작과 날조된 거짓으로 진실의 공간은 늘 빈자리가 되어 그 자리에 의심과 혼란이라는 소문이 꿰차는 것은 필연이다. 그만큼 사회는 분열과 극한적 적대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사회의 각종 미디어가 온통 거짓말과 조작, 왜곡, 날조된 말들로 채워져 거짓이 활개 치는 것은 온라인 플랫폼의 알고리즘이나 생성형 AI 탓만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무지의 형태가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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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생각이란 것은 자신과의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나르시시즘, 즉 지극한 자기애, 자기만의 동굴을 벗어나지 못한 좁은 시선이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생떼를 쓰고, 그것에 자신의 주변사람들을 굴복시키려 한다. 이것이 성취되지 못하면 그 불쾌감을 사방에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 것인데, 린츠 철학교수인 로버트 팔러는 그의 주저 성인 언어, Erwachsenen sprache에서 이것은 자신인  “‘의 모든 기분과 심적 상태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만 긍정하는 것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정하는 것으로 표출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한 말, 그것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고집하는, 극단적으로 편협한 목소리들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각종 온라인 사회적 연결망에는 이러한 고집불통의, 게다가 감수성을 자극하는 말초적 언어만이 넘실대고 있다. 정치사회는 이보다 더욱 극성을 부리며, 모두 자기 이익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나르시시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보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 부재에 빠져 타인을 기괴한 괴물, 적대적 범죄자화 하여 이 사회에서 그 어떤 공론도 형성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극심한 갈등과 분열, 다시 말해 어떤 연대나 통합도 불가능한 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 Nexus에서 역설하는 주요 내용 중 하나인 정보의 독점을 통해 다수의 대중을 무지로 몰아넣어 세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려는 것, 전체주의 독재에 대한 권력의 욕구 또한 이러한 어린아이 나르시시즘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이런 것일 테다. 카프카의 소설 자칼과 아랍인은 이를 짧은 이야기에 멋지게 담아내고 있다. 고기를 먹기 위해 아랍인에 순응하면서도 아랍인이 휘두르는 채찍은 피하기를 바라는 자칼의 배반적 모습인데, 이는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수용하기는 싫으면서도 그것에 존재하는 과실은 취하기를 바라는 모순적 욕구를 상징한다.

 

어린아이, 혹은 자칼이 이 세계와 주변부를 암흑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 치명적 단점은 다른 사람이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 것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동일한 수준으로 고려할 수 있는 언어의 성숙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욕망과 무의식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라캉을 인용할 필요도 없다. 곧잘 어린아이를 거울 단계의 이미지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화함으로써 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으로, 이때 발생하는 하나의 불완전성이 자기 육체 이미지의 통일성이 파괴되는 분열, 즉 공격성 및 공격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욕망을 규제하는 타자성의 영역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일이 여러 요인으로 무진장 발생한다. (흔한 사례: 거울을 처음 보는 동물들의 반응을 보라. 으르렁대거나 폭력을 행한다.)

 

그 결과, 사실 겉으로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이지만 속, 내면은 욕망 규제 영역인 대타자의 담론(구조화된 법칙 등)이 들어서지 못한 여전히 어린아이 단계에 멈춰버린 사람들이 군중의 무리 속에서 활보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사회의 권력을 차지하게 될 때, 세계는 하나로 고정된 의미에 속박되고, 나르시시즘과 차이와 결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오직 쾌락원리에 종속된 오늘과 같은 끔찍한 세계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지난 23일 이 사회의 선출된 권력자의 대국민 담화의 요지는 이렇다.   좌고우면 하지 않고 일하겠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   이 자기 의지의 표명은 국민의 뜻이나 잘못된 국정 운영에 대한 수많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행동을 할 것이라는 말이고, 나아가 누구의 의견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독재 선언이랄 수 있다.

 

민의에 선출된 권력이 선언한, 그 민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매우 심각한 발언임에도 이 사회의 정의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책임질 것이라 믿었던 민주주주의 사회의 자정(견제)장치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소리만을 전달할 뿐, 어린아이의 미성숙함, 나르시시즘, 폭력성에 대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이 어린아이의 성장하지 못한 타자에 대한 몰인식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다수를 지배하는 권력이 된 어린아이에 굴복해야지만 사태가 끝날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욕구에 저해되는 그 어떤 의견이나 행동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바로 독재자가 된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사회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면적 아이에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을 어떤 하나의 방법으로 단 번에 성숙시킬 도리는 없다.

 

어쩌면 어른으로의 성장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려면 오랜 학습이 필요하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도구가 독서다. 세계에서 가장 책 안 읽는 나라로 손가락으로 꼽히는 사회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왔다는 사실은 순전히 번역어로서의 국외의 시선이지,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급작스레 인쇄가 몰려들어 책의 매진 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이 사회의 독서가 타자의 담론 세계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취약한 지대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수일 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사람인지, 무지를 대표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이의 무례함과 무지한 욕망의 보기일 것이다. 이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이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거대한 표본을 가진 사회적 실험 연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필요한 사회적 연구 과제여야 할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다차원적인 인터넷 공간에서 무수한 타인의 말로 이루어진 정보와 지식을 얻고 있는데, 책 읽기가 무어 그리 대수로운가라고 비아냥댄다. 바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 매리언 울프는 책 읽는 뇌, Proust and the squid에서 정보 문맹을 지적하면서,  '지속적 부분주의 문화', 다시 말해 임시적으로 이것저것 때마다 요구되는 정보를   순간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짜깁기식으로 보는 것은 그 어떤 심층 지식도 형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문해력, 읽고 해독하는 능력의 저하로 이어지는 데, 지적 능력의 편협성을 가져오는 위협 요인이라 지적하고 있다.

 

지금 온라인 의사소통 망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의 언어들은 어린아이의 나르시시즘과 낮은 문해력을 강요하는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이 만들어낸 필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교사들은  "독서하는 삶과 유년의 교착상태에 머무는 것, 둘 사이의 티핑 포인트가 감정적 연대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력을 요구하는 학습이 능사인 사회에서 특히 수십여 년간 이 땅의 교육 현실은 인간 성장에 중요한 감정을 느끼고 이입하는 것을 학습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결여는 예측, 추론, 공감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양산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글이 장황하게 여기까지 치달았는데, 요지는 이렇다. 권력에 대한 불쾌감을 지적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의 미성숙한 나르시시즘을 탓하려는 것도 아니며, 책 읽기를 권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와의 거리를 둔 자아성찰, 여기서 시작되어야 이 세계의 소통과 연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야 사람을 연민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작은 길이 시작될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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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믿건 그건 네가 제한된 인식 가능성에 

구속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에마뉴엘 칸트



내 오만한 넋두리는 다시금 몇 권의 책들을 내 앞에 이르게 했다. 아마도 지식의 드넓은 해양으로 인해 안다는 것은 애초에 가당치도 않은 것이기에 무지의 겸손은 불가피한 것일 게다. 그런데 무지가 이 정도의 의미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무지에는 그 종류가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무지를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무지의 개념을 단순히 정의한다면 그저 '지식의 부재 혹은 결핍'이라는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 이겠지만, 무지를 정의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은 무지는 지식의 이면에 상응하는 것만큼 무지의 종류가 존재한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어떤 존재를 모르는 것과 그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는 것은 다른 종류의 무지이듯, 모른다는 것의 본질이 다르다.





권력과 부를 독점한 집단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집단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와 문화를 배우기를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의 현실 조건에 무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소위 '허용된 무지'란 것도 있고,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의미하는 '깊은 무지'라는 것도 있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신의 규범을 비판하는데 한계가 있어 대안적 신념에 접근할 기회가 부족함으로써 야기되는 무지도 있다. 이것으로 그칠 수 있었다면 인간 사회는 그나마 조금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알기를 원하지 않거나 모르기를 원하는 자발적, 고의적 무지도 있고, 부주의함이나 의도적 목적을 지닌 선택적 무지도 있다. 여기에 요즘 극성을 부리는 혼란이나 의심을 생산하여 타인의 무지를 통해 권력을 지속하려는 사실을 은폐하는 거짓과 허위정보로 대중을 속이려는 능동적 조치로서의 사악한 무지도 있다.

 

나아가 무지는 오류와 불확실성, 부정, 선입견, 기억상실과 같은 인접 개념까지 포괄하면서 무지를 더욱 폭넓고도 깊게 강화하며, 지식으로의 이행을 방해한다. 이달 들어 새롭게 장만한 책들은 이를 위한 작은 시발점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한 마디로 너무 아는 게 없어 읽기로 한 책들이다. 어떤 대단한 계획의 범주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무지를 강하게 때린 것에 대한 해갈을 위한 조치이다.

 

그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다가 왜 작가가 이러한 장면들을 장황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박상륭의 소설 아닌 잡설인 칠조어록의 그 무수한 말()의 우주의 방언들의 한 토대가 된 앎은 어디서 출원한 것인지, 백인들은 알지 못했던, 아니 자신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오랜 폭력의 역사에 은폐된 것은 무엇인지를, AI 만능의 맹목적인 의존적 사고에 깃든 지식을 향한 탐욕스러울 정도의 무지는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를 알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저자가 누구였는지 모르는 심지어 책의 제목조차 숭고에 대하여 Du sublime라 오역(誤譯)'높음에 관하여로 번역될 만한 페리 훕수스 Peri Hupsous의 그 과장의 의지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무지의 항변이라 해도 될 것 이다.

 

피터 버크의 무지의 역사는 저자의 말처럼 지식 없음을 말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기술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를 알지 못한다거나 알려하지 않음으로서 모른다는 것의 역사란 대부분 참혹함의 역사를 대동한다. 특히 전제 왕권이나 나치나 스탈린 등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야기한 피비린내 나는 인류적 재앙은 지식을 통제하고, 권력집단 외에는 지식에서 차단되어 무지를 강요하는 세계에서 발생했다. 이제 책의 20%가량 읽었음에도 그 모름의 다양성이 빚어낸 인류의 역사에 홀딱 빠져버렸다.

 

피터 버크의 책을 읽으면서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에서 시종 주장하는 정보네트워크의 중앙독점이 야기할 AI의 현실적 가능한 문제의 지적들이 결국 무지의 또 다른 형태의 사태임을 예견케 한다. 사실 하라리의 지적을 인용할 것도 없다, 이미 그가 지적한 내용들이 현실 깊숙이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끌고 있으니 말이다. 가공의 AI가 뉴스피드와 숏컷을 생성하여 정치적 견해를 마치 사람이 하는 것인 양 이미 게시하고 있으며, 그것은 혐오와 증오의 영상과 글들에 좋아요를 누르는 인간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지식은 사라지고 차단되어 왜곡되고 조작된 지식이 사실로 행세하고 있는 세상이다.

 

또한 주식 시세의 동향과 투자 시점은 물론 수많은 저술들이 AI에 의존하여 생산되어 인간 시장을 휘돌고 있으며, 온통 먹방과 화장술, 낄낄거리는 포르노화된 쾌락에 젖어들고 있다. 정보 네트워크가 무한히 열린 지식에 가 닿게 하리라는 이상은 오히려 무지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컴퓨터가 지시하는 알고리즘에 갇혀 자기 의사와 취향은 그것이 가리키는 곳을 향한다. 하라리는 정보 접근에 대한 유연성의 문제를 질서와 자유라는 두 대립의 역사로 설득력있게 전개하며, 지식(정보)을 최상위 포식자가 열등한 자들을 속여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사용해왔음을 입증하고 있다. AI는 바로 인간역사의 최상위 포식자를 대체할 것이라 경고한다.

 

AI 혁명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이 지능이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 인류를 노예와 소멸의 상태로 이행하기 전에 수정, 생명 진화의 희망찬 기회로 변화시킬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지식의 독점과 대다수 인간의 불가피한 무지의 상태는 인간 정치사회 속 독재자들의 자정장치 부재와 마찬가지로 정보 네트워크의 자정장치 결여를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 AI 네트워크 개발자와 그 자본주체들은 들으려 하지 않으며 낙관론을 펼친다. 선택적 무지요, 허용된 무지의 표상들이다. 그것의 귀결은 폭력의 참상인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실수할 시간이 없는 인류 사회에 권하는 어쩌면 마지막 호소일지도 모르겠다.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18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러시아 문화사다. 이 책은 오로지 톨스토이를 읽다가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한 무지가 불러일으킨 내 무지의 답답함에서 이끌려온 저술이다. 책의 제목인 나타샤 댄스 전쟁과 평화』에서 직접 농사일을 하며 농노들과 함께 사는 삼촌을 방문했을 때, 민중인 농노들과 어울려 그네들의 민속춤을 추게 되는 나타샤에서 연원한다. 귀족 영애인 나타샤는 프랑스식 예절에 익숙하고 궁중에서 추는 유럽 귀족들의 우아하고 격식을 차린 춤에 능숙하다. 그녀는 러시아 민속춤인 민중의 춤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선뜻 어울려 그녀는 자연스레 리듬을 타며 동작을 한다. 마치 그녀의 육신에 러시아적 영감이 각인된 듯이. , 제목은 러시아 민중인 농노와 유럽에 경도된 귀족들의 문화가 어떻게 대립하며 융합하는 지에 대한러시아 근대 문화의 역사를 조명하는 대작이다. 물론 해결하고 싶었던 톨스토이가 그려내고자 하는 시대적 의미를 획득하였다. 푸시킨에서 고골, 톨스토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나보코프에 이르는, 그리고 음악과 미술 작품에 투영된 그네들 역사의 굴곡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조금은 무지에서 해방된 것일 게다.

 

피터 케리의 집으로부터 멀리또한 오늘의 무수한 지식들이 서구 백인 남성들이 생산한 것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그들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더 많은 배제되고 삭제된 지식들이 있는 것이고, 케리의 소설은 바로 이 은폐된 지식, 폭력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수천 년을 자신의 토대로 살아왔던 이들에 대한 잔인한 폭력의 자취들을 백인 남자인 작가가 그 알려지지 않거나 알지 못했던 무지의 지대에서 지식의 세계로 드러내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 세계의 모든 역사는 이처럼 지식과 무지의 투쟁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초반부를 읽다보면 자동차 영업을 하는 백인들의 상스러움이 한동안 흐른다. 작품의 전반부를 이루는 이 허접스러운 일상의 장면들을 인내하면 더 없이 고결하고 강렬한 문제의식을 접할 수 있게 된다. 괜히 걸작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고대 인도의 종교와 역사와 설화를 망라한 힌두이즘 최고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는 내겐 좀처럼 읽게 될 책이 아니었다. 인도의 정신세계를 알아야 할 당면한 욕구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상륭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무지를 자극하는 어휘들, 그 개념에 대한 미진으로 인해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차에 읽어내야 할 것 같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일종의 알고 싶지 않은 선택적 무지를 깨부순 것인데, 이 의지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이 책의 많은 개념들이 우리 문화에는 없는 것들이어서 그 의미와 연결될 우리말을 연상하는 것 자체가 힘겨운 두뇌노동이다. 아마 감각과 감정과 사고의 제어, 의식의 확장과 관련한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박상륭의 언어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지식의 토대가 되어준다면 하는 바람이다.

 

장 뤽 낭시를 비롯한 7인의 논설로 구성된 숭고에 대하여는 현학적 글들로 채워져 있어, 만만한 읽기는 아닐 것이다. 대체 숭고라 일컫는 것, 이것이 미학의 용어가 되어 철학과 예술의 한 중요 개념으로 작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는 파리 8대학 미셸 드기 교수만큼이나 내게도 어떤 수수께끼이고 신비스러움이다. 롱기누스로 전해지는 저자를 알 수 없는 책에서 시작된 번역어 숭고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인간이 자신의 소멸하는 부분들을 찬미하고 불멸의 증대를 소홀히 여긴다면 (그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여기서 숭고와 맞물려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과 파멸의 순간임을 발견하게 된다. 죽음에 대하여 죽음으로부터 낚아 챈 말은 숭고하다고 느끼는 감정 그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사뮈엘 베케트를 읽으면서 생성-소멸사이에서 그 어떤 유령, 빛을 발견하려는 침묵의 목소리를 시종 느껴야 했는데, 아무쪼록 많은 소설, 희곡, 시에서 발견되는 버려짐인 동시에 구원인, 최후에 통과하게 될 말, 그 암호의 도식을 발견하는 여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 책을 이제라도 입수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구입한 책들을 향한 어떤 의지를 적어 놓고 보니 단 몇 권에 불과한 책만으로도 내 무지의 양이 엄청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뭘 안다고 말하는 것의 그 터무니없는 오만을 말해서 무엇 할까. 그저 겸허할 일이다. 아마 책들을 11월 내내 읽으면 겨울의 초입에 들어 설 것 같다. 찬 바람이 숭숭 구멍 뚫린 내 몸을 마구 통과하는 듯하다. 부쩍 몸에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있다. 무엇으로 이 많은 구멍들을 메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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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 지식의 탄생 (Knowing what we know), 사이먼 윈체스터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세계에서 지식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 8월 29일 출간 예정인 사이먼 윈체스터의

지식의 탄생(Knowing what we know)』에 대한 프리뷰입니다.]



모든 인생의 발자취는 끊임없는 지식의 축적으로 만들어진다.” -10

 

책은 지식의 생성에서 오늘과 같은 지식(knowledge)의 의미로 쓰이게 된 변화과정, 그리고 지식의 전승과 확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이러한 배경 하에 지식의 획득과 기억이 더 이상 인간의 뇌를 필요로 하지 않고 컴퓨터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지능의 쓸모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유리 화면에 손끝을 가볍게 터치하는 것만으로 어딘가에 있을 방대한 정보와 지식 더미에 접근하여 필요로 하는 지식을 재가공 또는 생성하여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해 있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인공지능(Chat GPT와 같은)에 의해 자신의 지적 노력없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문제 제기처럼 지식의 생성, 분류, 조직, 저장, 확산에 있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여 지식을 습득하고 대신 생각해준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정말 기이하고 염려스러운 상황이라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제기를 탐구하기 위해, 지식이란 인간에게 무엇인지, 즉 안다는 것의 의미를 플라톤의 테이아테토스에서 정의한 정당화된 믿음이라는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일관성 없는 다양한 관습과 의례, 종교로부터의 영향 속에서 믿음에 의지했던 지식이 합리성에 의존한 계몽주의에 의해 비로소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검증할 수 있는 확정적 개념으로서의 지식에 이른다. 소위 인식론이라 불리는 지식의 오랜 지배 끝에 이를 제치고 새롭게 대두된 오늘의 지식이론인 DIKW(Data, Information, Knowledge, Wisdom)체계를 토대로 지혜의 발현에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요인들이며, 지식 구조와 선행요소인 데이터와 정보의 역할, 그렇게 만들어진 모든 정보로부터 비로소 지식의 생성과 이 지식들을 삶의 유용한 소중한 지식으로 바꿔 놓은 지혜를 설명한다.

 

또한 지식은 어떻게 전달, 전파, 확산되어 사회에 퍼져 나갔는지, 그 수단들과 건강과 생존, 공동체 결속이라는 전승 목적을 살펴본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이로울 가능성이 큰 지식의 전승이 상업자본주의를 비롯한 민족주의와 전쟁들의 잡음에 파묻혀 사장되거나 지식 고유의 목적을 잃는 것은 왜 인지 성찰 한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저자 사이먼 윈체스터는 교육(가르치고 배움의 터전으로서의 장소), 저널리즘, 백과사전, 사진, 방송에 이르는 광대한 분야를 조사하고, 바빌론의 설형문자부터 금속활자 인쇄술, 인공지능에 이르는 지식 확산의 전반적 범위를 친근한 일화와 일상적 사례를 통해 독자의 사유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일례로 인간이 어떻게 정보를 획득하고 유지하며 전달하는 지에 대한 훌륭하고 포괄적 지식의 설명이 세 살 때 벌에 쏘인 기억의 일화로 충분할 만큼 일견 사변적일 수 있는 지식의 장벽을 철수시켜 주는 것인데, 이 경험은 말벌이라는 곤충의 존재를 알게 하고, 상처를 치료해주었던 어머니가 얼음과 연고로 통증을 가라앉혀주었으며, 이 상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용감성을 알리는 일종의 전리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기도 했고, 참을성을 가지고 대처하면 칭찬을 받는 다는 사실과 벌에 쏘인 발이 왼발이라는 오른쪽과 구별이라는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일화에는 지식의 생성, 전달, 확산이 모두 포함되어있다. 결국 경험은 지식 습득, 즉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수세기에 걸친 지식의 생성과 전달 확산의 역사와 그것들이 의미하는 목적에 대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책의 중심 주제인 지식의 전달과 그 전달로 인해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사유하게 한다. 책의 한국어 표제는 지식의 탄생이라는 역사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하지만, 원 제목은 우리가 아는 것을 안다는 것(Knowing what we know)이라는 점에서 학습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층 탐구라는 물음의 사유에 가깝게 여겨진다.

 

결국 저자가 도달, 제기하려는 물음은 이 매혹적인 지식의 여행을 통해 오늘의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에 대한 숙고의 요청이고,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생각의 부족으로 이어지는 듯한 현대 정보기술 의존적 태도의 양가성의 문제일 것이다. 세 살 아이가 느꼈던 어떤 새로운 사실의 습득이 가져온 지식 획득과 전달의 즐거움이 사라진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사물과 사건과 상황을 안다는 생각에서 수학, 지도읽기, 암기 등의 가치들을 제거하여 사고 능력이 점점 위험에 빠져드는 작금의 세계는 우리를 어떤 인간들로 변하게 할 것인가의 우려이기도 할 것이다.

 

컴퓨터 알고리즘에 의해 출현하는 데이터와 정보의 편협성에 길들여지고, Chat GPT가 생성해주는 정보와 지식에 의존하는 세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선험 또는 경험 지식을 위한 노력이 추구되지 않는, 그래서 소중한 지식으로 만들어낼 지혜가 없는, 현명한 인간이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면, 그 세계는 어떤 곳이 될지 상상해 보는 것은 왠지 두렵기조차 하다. 어쩌면 지혜 없는 정보만이 가득한 세계를 상상케 하는 생각이 없는, 지식이 결여된 세계를 숙고하고 자성해보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독서와 체험의 삶에 이어 지혜를 잃은 인간 세계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의 호기심과 지혜의 관계에 대한 지적은 오늘 우리들이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우리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그 물음에 우린 답할 수 있는지도 또 하나의 물음이 되어 울리는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은 지식 전달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미래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 대한 고귀한 고찰로 안내한다. 호기심 많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지적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매혹적인 책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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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먼 윈체스터의 지식의 탄생에 대한 이 프리뷰는 프로롤그와 1, 배움의 시작, 2장 최초의 도서관에 대한 사전 읽기에 의해 써진 것입니다. 책은 위 2개 장을 포함하여 지성의 행진, 조작의 연대기, 생각이 필요 없는 시대 등 총 7, 575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분적 독서만으로 작성되었기에 저자의 결론이나 주제와 괴리가 있을 수 있음을 양지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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