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通俗)이라는 어휘는 20세기 식민지 사회로 이행되기 전 조선사회에서는 그 사용례가 드문 말이었다. 굳이 그 용례를 살펴보자면 사대부 양반계층이 하위계층의 문화를 자신들과 구분하기 위해 아()와 속()으로 분별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듯하다. 강용훈 교수는 통속에 대한 개념사 연구서인 통속의 계보학에서 “1906년 이후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에서 '통속'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식민지 지배권력이 속의 세계로 통치성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일제의 식민통치권력이 식민지민들을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복속시키려는 의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어휘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인 최초의 한글사전인 조선어 사전193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는데, 거기에서 통속모든 세상에 널리 통하는이라는 의미라고 기술되어 있는 모양이다. 서두가 길어졌다. 어쨌거나 통속이라는 어휘의 본격적 사용은 20세기 들어서면서 부터라는, 다시 말해 식민통치권력이 피지배민의 소위 계몽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려다보니 장황한 시작이 되었다.

 

오늘날 한글사전에는 1938년의 사전적 의미와 더불어 저급, 저속한이란 의미가 추가되어있다. 사실 우리들의 일상 대화 속에서 , 그거 너무 통속적인데라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조금 저급하다고 얕잡는 어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통속을 말하고자 한 계기가 저급함을 느낀 소설 때문이다. 누군가가 쓴 창작품, 더군다나 해외에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설에 나는 그야말로 통속적이라는 평을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것이 꼭 비하하려는 의도이기 보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여서 그 진부함을, 기대 이하의 것이었음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 소설은 20세기 일제 식민치하 한국인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을 매우 정형화된, 아니 유형화(類型化)된 이라고 해야 할 인물들이 꼭 그만큼 유형화된 행태를 하는 인물전개나, 시대적 통찰의 세부를 표현하지 못하고 이미 드러난 외피의 변죽만을 우려먹는, 한마디로 저급하다고 느낀 것이었다. 대중적 인기를 얻은 기생이 인력거를 끄는 가난한 고학생을 도와 성공시키고, 거지 대장이었던 인물이 사랑에 눈멀어 일제에 저항하는 투사가 되는, 또 다른 한편은 친일로 부를 축적한 부자의 딸과 결혼을 위해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준 연인을 배반하는, 1920~30년대 식민지 한국의 신문에 연재되던 심훈, 염상섭, 김말봉 등의 통속소설, 그리고 오늘날의 막장 TV드라마와 빼닮지 않았나? 21세기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한국인만을 위해 쓴 소설은 물론 아니지만 마치 누군가를 계몽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매몰되어 있음에 대한 불쾌감이었다고 해야 할까? 상식,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런 것으로 계몽한다는 생각을 오늘에도 하고 있다는 그 불순한 저의라니.

 


오늘에는 이 어휘, 통속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그리고는 대중이라는 말이 그 개념의 상당부분을 대체 수용하여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통속소설이라는 표현보다는 대중소설이라는 범주로 뭉뚱그려 싸잡아 넣고, 소설문학이라는 문화의 한 범주를 평등화시켜버린 것만 같다. , 여기서 대중문학과 통속문학, 또는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의 2000년대 한창이었던 철지난 문학논쟁을 재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대중문학이라 불리는 오늘의 소설작품들을 세분하여 문학을 서열화하는 위계질서를 부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통속이라는 사용례가 드물어진 어휘의 부활을 도모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현실적 과제가 있음을 회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통속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갈아탄 것도 대략 50년 쯤 된 것 같다. 한국사회에 TV가 널리 보급되던 1970년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등장이 본격화된 이후부터 통속은 슬그머니 대중문화, 대중문학, 대중 예술로 불리기 시작했을 테다. 20세기 내내 계도(啓導)되고 훈육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던 수많은 사람의 집단이었던 '통속'으로 멸시되던 존재들이 문화주체인 대중(大衆)’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으니 말이다. 통속이 사회적, 매체 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으로 불리게 된 사람들의 앎의 수준도 갑자기 뛰어오른 것일까? 매체가 쏟아내는 잡다한 정보의 영향으로 어느 만큼의 도약이 있었을 것이지만, 대중 구성원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앎의 질적 도약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않아 보인다.

 

어쨌거나 대중이라는 이 의뭉스런 어휘에는 온갖 잡다한 의미들을 상층부 지배계층과 다른 일반의 사람들이 지닌 속성 모두를 싸잡아 넣은 두루뭉술한 어휘가 되어 그 용례의 폭이 무한하게 넓어졌다. 즉 평준화되고, 평등화된 대다수의 사람들과 그 집합을 지칭하는 효율적 어휘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무언가 저급함을 말하려하면 대중을 비하하여만 하게 된다. 곧 대중이 저급한 것이 된다. 통속이 지닌 저급, 천속한 의미가 구별짓기의 엘리트주의적 문화관이라는 날선 비판을 지우기 위해 대중이라고 퉁치면서 비하의 목소리는 이면으로 은닉되었다. ‘대중은 문화의 주체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이때 그것은 단지 소비대상이거나 투표의 수량이라는 계산적 필요성에 근거한 가장된 권력주체로서의 기만적인 가면의 언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통속소설이라고, 통속문화라고 분별하는 것이 오히려 진솔한 표현이 아닌가. 음흉하게 대중소설이라고 그 문학적 품질의 분별을 감춘 채 독자 일반인 대중 감식안의 천박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기만적이다. 20세기를 관류하면서 통속이라는 어휘의 개념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그러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이 있는데, ‘세상에 널리 통하는이라는 뭇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의 긍정적 시선과 저속 또는 저급한의 의미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통속에 교육(계몽), 윤리, 상식, 도덕의 의미와 연결하여 사용하며 그 긍정적 용례로 해석하려는 의지와 천속(賤俗)한 것 일반이라는 부정적 용례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쳐 왔다는 사실이다.

 

통속에 대한 이러한 개념변천의 관점을 나는 거부한다. 마치 용례의 긍정과 부정의 부단한 충돌처럼 보이는 시대적 담론들은 말장난이기 십상이다. 그때그때 자신이 처한 상황 또는 입지에 따라 통속의 잣대를 돌리는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신문연재 소설을 쓰면서 통속소설 작가로 비하되어 불리던 김말봉은 통속의 가치 폄하에 다음과 같이 강력한 반론을 편다.

 

대중문학이라면 통속과 통하는 것으로 믿고, 통속이기에 멸시해도 좋다는 일부 그릇된 인식에 사로잡힌 족속이 있다. (...) 저속이 대중의 취미라고 속단하는 작가배가 있다면 이것은 대중을 모욕하는 뜻이 된다. 대중은 문자 그대로 수많은 민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모랄(morals)’ 아래서 대중이 진정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정신문화를 지향해준다면 대중문학의 사명은 수행된다 해도 좋다.” - 출처: 경향신문1958.3.5.기사 대중문화에서

 

김말봉은 이렇게 통속을 저속과 구별하며 슬며시 통속을 대중과 또한 구별해버린다. 이 글에는 통속을 저속이라 말한다면 대중의 취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윤리의식과 정신문화 지향을 앞세워 재미가 대중문학의 사명이라는 것이라는 문제적 정의가 보인다. 어떤 문화적 생산물에 통속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대중을 욕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대중 뒤에 숨어든 통속, 대중의 의미는 이렇듯 흉측스러운 전략이 있다. 자기 저급성을 은폐, 대중에 영합하여 사욕을 충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중성이라는 것의 민낯이다. 또한 윤리의식과 정신문화를 앞세워 재미를 판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김말봉의 주장에는 별개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대체 어떤 윤리이고 정신이냐는 것이다.

 


김말봉은 오늘날 TV의 막장드라마의 효시이다.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내용과 기성의 질서에의 순응이라는 규율과 상식에 봉사하는 정신이라면 그것은 매우 그럴듯한 말의 수사(修辭)로 부패한 양심을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통속은 대중과 분리하여 그 선명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문화를 대하는 소비대중(독자, 관객, 청중)의 안목을 대우하는 것이 된다. 통속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대중을 저속하다고 폄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통속의 딱지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면 대중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문화생산자 당사자가 고급과 저급을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입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비평가들이 나서야 할 때다.

 

통속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부정적 배제의 논쟁들은 모두 거기서 거기다. 시대에 따른 담론의 주체적 성질의 표현들만 달라졌을 뿐이지 그 본질은 모두 동일한 선상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여기에는 통속이 지니는 의미를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두 다른 대척의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발생한 편의주의적 해석이 있어 보인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상식의 의미는 현상을 사실 그 자체로 믿어버리는 긍정의 의식, 즉 현실 질서에 그대로 순응하며 어떤 이의도 지니지 않는 이라는 의미와 저급 저속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면적 시선에서는 충돌이지만 어휘가 내재하고 있는 함의에는 아무런 충돌도 없는 것이다. 통속은 그저 저속한 것이지, 여기에 그 어떤 시대적 담론을 끼얹어봐야 자기 이해에 터 잡은 말장난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이 통속이다. 규율 순응을 반복하는 것, 자신이 모르거나 다른 것을 배제하려는 폭력성의 다른 표현이다. 대다수 식민지민에게 자신들의 통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상식을 위해 통속강의, 통속교육을 시키면서 통속은 우리사회에 자리 잡은 언어다. 이를 뒤집어 바라보면 식민지 한국인들을 싸잡아 무지와 몽매에 안주하고 있는 저속함이라는 멸시의 의미와 더불어, 이를 적정한 앎의 궤도에 올려놓고자 하는, 즉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길들이겠다는 의도된 의미가 있다.

 

통속성은 이처럼 오만한 태도와 전체주의적 욕망이 들끓고 있다. 통속성을 답습하는 것과 통속성을 지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내란범 재판에서 윤은 최후변론에서 계엄명령은 계몽(啓蒙)령이라고 비굴한 항변을 반복했다. 누가 누군가를 대상으로 계몽하겠다는 것은 이처럼 폭력과 교만의 다른 얼굴이다. 20세기 상반기 식민지민들의 문자 해독능력과 새롭게 쏟아져 들어오는 문물에 대한 앎이 일천했던 시대와 21세기 K-Culture로 상징되고 대중지성 또는 집합지성이라 불리는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계몽, 통속성을 향한 행보는 그 무엇이든 퇴행적인 것이다.

 

개념사 연구자인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개념 자체가 정치,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개념의 잣대를 통해 인지된다.” 개념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 통속은 저급으로 분명하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에서 분명 몰아내야 할 선명한 것으로 지목되어야 한다. 또 한명의 개념사가인 레이먼드 윌리엄스도 어휘들의 의미변화 양상은 역사적이고 사회적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듯, 이제 통속은 한국사회의 변화적 관점에서 재정의 되어야 한다. 공론장에서 은폐되었지만 일상의 이해에서의 용례에 주목해 우리 문학의 수용자들인 대중의 의미를 격상시키기 위해서라도 통속은 저급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어느 평론가가 대중의 문학적 역량에 대해 불신을 보이면서 대중의 문학적 취향을 통속으로 싸잡아 단정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대중이 곧 통속이라고 여긴 것인데, 이러한 대중의 용례에서 보이듯 통속은 분별되어 지적되어야만 한다. 통속이 계속해서 대중 속에 암약하게 방치하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날뛰는 저 통속적인 것들처럼 대중을 전락시킨다. 일종의 낙인찍기라는 극약의 처방으로서 대중과 통속의 분리, 나아가 통속의 부활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통속을 주장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적 차별의지도 아니며, 문화민주주의를 역행하려는 반민주적 반동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비난 속에 내포된 은밀성과 폭력성의 은폐를 모르는 체 하려는 대중 뒤에 숨은 불순한 의지들을 봉쇄하기 위함이다. 계몽령이라는 반시대적 수작이 가능한 것도 대중이라는 언어 뒤에 숨어있는 통속이 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동질화 형성하겠다는 이 전체주의적 욕망의 싹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문화 선진국으로의 진정한 돋움을 위해서라도 통속성은 지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정적 감상주의와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문화, 통속적 취향에 입맛을 맞춘 문화는 자기 파멸적이다. 대중의 지성을 갉아먹는 암세포다. 하나의 소설이 장황한 설레발을 치도록 만들었다. 이 잡설을 쓰면서 우리의 20세기 상반기 근대문학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통속과 순수, 정통문학과 대중, 통속문학의 논의를 뜨겁게 달구었던 김기진, 안회남, 이태준 등을 읽어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언어가 시대와 상호반응 변천하는 개념사도 더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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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강용훈 교수의 통속의 계보학이 부분적 바탕지식이 되었으며, 김주혜 작가의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Beasts of a little land)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서 비롯되었으며김말봉 소설들에 대한 회의적 읽기로의 전환을 계기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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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팽나무를 통해 본 하제마을 이야기
양광희 지음 / 하움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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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할매』와 하제마을 팽나무 역사고증


향토문화와 생태계 보존을 위해 노고를 마다치 않는 분들의 발품 덕에 사라질 위기에 놓인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하제(下梯)마을 수령(樹齡) 600(과학분석 결과 수령 537±50)의 팽나무가 품고 있는 문화사적 얼을 접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이 책으로 이끈 계기는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할매의 중심 제재인 하제마을 600년 수령의 팽나무가 시리게 굽어 본 이 땅의 민초들과 자연의 인연으로 맺어진 순환의 업(,Karma)에 대한 이야기다. 옛 지도에 표기된 오늘의 하제마을을 포함하는 섬의 이름, 무의인도(無衣人島), 옷을 입은 사람이 없다는 이름을 지닌 섬, 이러한 지명은 전국에서 유일하다는 양광희 저자는 이렇게 그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온갖 경계에 접하고 있으나, 그 무엇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의도인(無衣導人)”이라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가 닿는다고. 황석영 작가의 소설 속 팽나무 할매가 그렇고, 그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다 자신의 육신을 자연에 보시하는 스님 몽각(夢覺)의 견성이 바로 그것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600년 팽나무 가을겨울 사진출처-본문 66


600년 팽나무를 통해 본 하제 마을 이야기에는 중생대 백악기 역암층으로 이루어진 섬의 지질학적 구성에서부터 섬의 수호신 역할로 추정되는 석장승, 화산의 봉수대 등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 600년 팽나무가 있는 하제마을의 사료 추적을 근간으로 하는 지명의 변천과 완전한 섬에서 제방과 간척으로 인해 육지로의 변모 과정을 담고 있으며, 조선 말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식민지 노동의 착취를 통해 일제가 벌인 대규모 간척사업과 일본 자살특공대(카미카제) 다치라이 육군비행학교 군산 분교의 비행학교 활주로로 수용되고, 1951년 미군의 활주로 연장 공사로 상제와 중제 지역이 미국 캘리포니아의 영토화된 경유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현재는 하제에서 조상을 이어가며 마을을 지켜왔던 주민들이 국가의 토지 강제수용으로 모두 쫓겨나 미군의 군사작전 지역으로 민족 문화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1998년의 600년 팽나무 주위로 마을이 형성되었던 사진과 대조적으로 이젠 마을은 철거되어 팽나무만 덩그러니 홀로 남아 지방 보호수로 가까스로 명맥을 보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팽나무의 문화재적 가치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상목으로서의 역할인 풍년을 알리는 신목(神木)이었으며, 어업을 생업으로 하던 사람들의 조업활동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 영혼을 담지하고 있었다. 소설 할매600년 수령의 팽나무 할매 옆에 그보다는 수령이 적은 또 한 그루의 팽나무를 과녁으로 삼아 일본군이 사격연습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때의 수많은 총질로 고사(枯死)했음이 고증되어 실존했던 거목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게도 된다. 일제의 식민지민을 탄압하려는 파렴치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1894년 日本國 陸地測量部 발행 朝鮮及渤海近傍:假製 東亞輿地圖출처-본문 83


팽나무의 나무 둥치를 보면 심하게 비꼬이고 깊은 주름이 잡힌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해안가에서 생장하는 팽나무의 특성상 썰물에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묶어두는 계선주(繫船主)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문화재 위원의 설명을 듣게 된다. 밧줄의 시달림으로 반복된 상처에 딱지가 아물며 수없는 아픔을 간직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이라는 말이다. 나무의 아픔이 그와 함께 명멸해갔던 이 땅의 민초들이 반복적으로 겪어내야 했던 삶의 상처의 반영처럼 여겨져 애틋함이 밀려온다.

 

옥녀봉에서 화산까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한때의 섬, 무의인도였음을 오늘날 그 흔적조차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육지로 인식된다고 한다. 인간의 인위, 그 탐욕과 폭력이 자연 만물의 삶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황폐한 욕망의 장소로 변질시키고 있다.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는 노목, 거목, 희귀목을 보호수로 지정한다는 산림법, 보존,보호,관리할 가치가 있는 동물, 식물로서 그 경관(景觀), 역사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에 문화재로 지정하게 되어있는 문화재보호법으로 하제마을과 600년 팽나무가 지켜질 수 없는 것일까?

 

나아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 보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한반도 사람들의 얼과 그네들의 영혼의 담지자로서, 또한 생태계와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나무와 마을을 우리가 지켜낼 수 없다면, 대체 국가와 역사라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작은 책자가 오늘 우리들이 망각하고 있는 인간 삶의 가장 원초적인 물음을 하게 한다. 이 책을 참조하면 황석영 작가가 소설 할매에서 독자들에게 궁극으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의 저 심연 속에 잠긴 정서를 건드리는지 체감하는 데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나아가 인간을 포함한 자연 만물인 생태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자성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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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1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1 0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글은 철학자 김동규의 저술 서양 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아를 바탕으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그 동기는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에서 시종일관 필자를 괴롭혔던 석연치 않음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소박한 이유에서 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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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melancholia), 우리는 멜랑콜리(melancholy)라는 표기를 대개 일상 언어로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서양인들에게 깊숙이 체화된 정조(情調)이기에 이와 무관한 동양인의 화법에서는 낯선 감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지역 공동체에 익숙하게 교육이나 학습으로 형성된 가치나 믿음, 정신이 내면화되어 일상성을 띤 감성을 에토스(ethos)라 하지만, 멜랑콜리아는 오래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적 감성, 즉 길들여진 감성인 에토스와 달리 그것에 저항하는 일시적, ()반복적 감성이기에 파토스(pathos)의 범주에 속하는 정념(情念)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대표작에 저항의 멜랑콜리(이하 멜랑콜리로 표기)라는 소설이 있다. 멜랑콜리에 저항, 거부의 의미가 있는데, 이중(二重)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읽히기에 저항의라는 수식어는 아마 저항으로서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문구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 대한 감상의 제목으로 실존적 불안이라고 달았던 사탄탱고가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듯한 닫힌 구조의 이야기로서 영원한 몰락의 상태를 반복하는 분노와 증오의 눈길로서 읽혔듯, 멜랑콜리는 이러한 감성에 직관적으로 닮은 이미지를 갖게 한다.(2018년 필자 본인의 리뷰 글을 참조 인용했음)


소설 멜랑콜리의 에스테르란 인물은 음악학교 학장을 은퇴하고 세상과 격리된 채 거짓된 음조에 휩쓸려 음악에 바쳤던 자신에게 자기-체벌로서 진실한 음의 조율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불협화음의 적응에 매진하는 자다. 이 인물이야말로 멜랑콜리한 서구의 인간 그 자체다. 나는 라슬로의 소설들 전반에 흐르는 이러한 정조가 왠지 거북하기만 했는데, 그네들의 멜랑콜리에 내재된 정신의 한계를 어느 만큼은 이해하여야 할 요구가 증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 꺼림칙한 반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철학자 김동규는 서양문화는 멜랑콜리라는 정조에 물들어있으며, 이 정조의 바탕 위에서 수천 년의 문화를 일구어냈다.”고 이해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구성 개체들의 일상적 삶의 성장조건이자 한계조건이고, 따라서 특정 문화가 제공하는 삶의 토양은 그 내장된 자기 폐쇄성으로 동일성을 유지하려한다. 다시 말해 멜랑콜리는 서양인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불가피한 폐쇄성 속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소속 문화의 보편성을 강변하고 정당화하는 그 한계를 모르는 감성이다. 그런데 왜 멜랑콜리한 인간들, 즉 이미 기성의 규칙과 제도, 관습에 대한 은연한 반감의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그 폐쇄성을 탈출하지 않는 것일까? 정신의학자 피터 크레이머가 수천 년의 적응 끝에 멜랑콜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어울리게 되었다.”고 기술했듯, 이 황량하고, 우수에 젖은 감각적 정서를 개체가 풍요롭고 안락하게 느끼는 본원의 감성이 되었기에 탈출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감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동규는 중요한 역사적 이해에 기초한 해석을 말하는데, 서양사회는 근본적 단절없이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사실, 서양 정신이 한 번도 타자의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멜랑콜리라는 자신들의 감성이 지닌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이 필요치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서구의 정신은 멜랑콜리한 인간을 위대한 비극의 광기 표상으로서 천재예술가의 내면의 상징으로 여기는 오랜 문학적, 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정조로서 일탈과 과잉의 슬픔을 하나의 영감에 찬 기질로 이해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울을 향해 기울어가는 멜랑콜리한 감성이란 이성이 수반되지 않을 때 광신으로, 밀교적 열광으로 바뀌기도 하여 망상에 휩싸여 질병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뤄 건강한 이성에 토대를 둔 독창적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원동력, 숭고한 존엄성의 감성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멜랑콜리는 두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멜랑콜리를 화두로 삼은 이유는 이것의 정의를 풀어놓자는 것이 아니라, 내게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지게 한 멜랑콜리의 내재된 본질에 조금이라도 근접해보려는 것이다.

 

라슬로의 작품, ‘멜랑콜리는 한 도시의 붕괴의 전조들, 그 가운데 등장하는 다분히 멜랑콜리한 인물들이 벌이는 혼돈의 상황이 마치 역사의 진실이란 돌고 도는 순환적 반복, 조금 인심을 써서 말하자면 모순을 살짝 덮어버리기 위한 변증법적 순환 고리를 맴도는 서사로 다가온다. 이 소설이 시적 감상을 자아내며, 걸출한 이야기의 맛을 선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몰입하게 하는 힘에 사로잡혔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 결국 제자리라니, 역사의 시간이 돌면서 서로 자리바꿈을 할 뿐 원의 전체 질서를 따라 단지 원주를 도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소설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세 축을 김동규는 자의식 집중과 동일화, 나르시시즘이라고 정리한다. 첫째, 자기의식이 강해 자기에게 강하게 집중하는 까닭에 어떤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을 경우 그 고통은 매우 크다. 라슬로의 작품 속 에스테르나 그의 부인 모두 이러한 자기애가 놀라울 정도로 큰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둘째, 타자를 자기와 쉽게 동일화함으로써 모순과 차이를 극도로 인정하기 어려워하며, 따라서 다름을 철저히 배제한다. 에스테르 부부가 서로 극한적으로 반목하고 혐오하는 것과 상통한다. 셋째, 타자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부터 이미 자기와 닮은 자기의 분신을 선택한다. 이러하기에 멜랑콜리한 사람은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에스테르가 또다른 형태의 멜랑콜리커인 몽상의 열정을 지닌 벌루시커의 행방을 애타게 찾는 것도 아마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멜랑콜리가 서양문화의 근본 정조, 즉 서양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 줄기라한다면, 이것의 속성을 조금은 더 파고들어가 보아야 멜랑콜리가 왜 쳇바퀴 돌 듯 한계에 갇힌 답답함, 그로인한 거부감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동규는 자기에 집착하는 서양의 언어에 우리의 언어에는 없는 재귀용법에 주목한다. 재귀(再歸; reflexive)한다는 것은 자기를 떠나서 다시 자기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자기 복귀를 함축하는 낱말이다. 이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그들에게 자기(self, selbst)’는 엄청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으로 이끈다는 의미의 절대자가 출현하고, 서양인들의 절대적으로(absolutely)라는 말은 그 자신에 따라서라는, 다시 말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따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멜랑콜리는 상대인 타자를 허락하지 않은 절대이며, 이 절대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수렴시키는 정념이다. 여기서 이질적인 것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다.

 

동일성의 논리는 이로부터 자연히 따라 나온다. 자기가 아닌 -자기들 혹은 자기와 모순되는 것 전부를 배제하는 원리이다.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아무튼 독특한 배타성을 지닌 정념이다. 동어반복적 자기 동일성의 확립이 서양 인식론의 존재론적 근거라는 말이다. 그들이 애매함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다. 선택지를 벗어난 어떤 바깥도 부정되는 것은 바로 이 서양인의 자기동일화에 바탕을 둔 인식 때문이다. 서양 인식론을 모순배제와 동일률이 지배하는 것도 결국은 멜랑콜리한 서구 특유의 정조에 연원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이 동일성의 논리에 따라 치밀하게 전개된 결과물이다. 타자가 아닌 자기 분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이 지독한 정념은 불완전한 자기를 충만하게 완성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려는, 불멸의 구원에 대한 욕망이다.

 

이 어둡고 음울하고 슬픈 정조인 멜랑콜리는 이러한 자기 한계를 지닌 한편으론 기형적 감성으로 여겨진다. 이제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가 거부하는 마음으로 독자를 괴롭힌 이유가 어느 정도 해명된다. 서구인들은 그런 문화 속에 삶이 형성되고 있기에 자신들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한다. 물론 샤르트르라는 걸출한 인물이 원제목을 맬랑콜리로 하였던 소설 구토가 이러한 정조, 있음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상에 빠져있으며, 나아가 그 허상에 빠져있음 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시대를 성찰하긴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결코 바깥 세계,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차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샤르트르는 앙투안 로캉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위치를 본의 아니게 진술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의 말처럼 자기존재가 거주하는 시대의 껍데기에 사로잡혀있음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자기 정조의 한계를 보지 못했다.

 

사실 서양인들이 내세우는 고전적 지위를 차지한 문학작품들은 예외없이 이러한 멜랑콜리 정조에 깊게 물들어 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라고 한다는 부패와 불의와 부정한 세계 인식과 질서에 저항하지만 그것은 그들 내부에서의 성찰에 그치고 만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당통의 죽음에서 프랑스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임에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던 당통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난 인류 역사 전체를 비웃지 않을 수 없어 , 세상이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모든 게 오늘과 같을 거 같아. 공연히 소란피우는 거야.”, 자신이 주도한 혁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을 통해 역사의 쓰나미에 휩쓸려버리는 부유물, 단지 저항하는 멜랑콜리커의 권태로운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저항의 멜랑콜리의 전체 줄거리에 맞춤인 문장이라 해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절망은 희망의 산물이니 희망은 실천적 목표에 대한 갈망이고, 그 목표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기에, 그 비극성을 성찰하고 또다른 희망의 목표를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게 해주지 않냐고. 아마 크러스너호르커이도 라슬로 분명 이러한 심정에서 썼을 것이다. 추악하게 권력을 차지하고 주변을, 타자를 철저히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에스테르 부인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그 비극적인 세계의 일면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관점을 주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런데, 필자를 불편하게 했던 문제는 본질적인 것, 바로 그네들을 사로잡고 있는 멜랑콜리라는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왜 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서구인의 배타적 관점, 자기애와 동일화의 관념을 독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대중에게 널리 회자된 불세출의 소설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또한 멜랑콜리에 짙게 물들어 있는 작품이다. 20세기 물질만능의 휘황찬란한 금빛 세계에 21세기 청춘들이 환호하고 있지만, 과연 보편적 정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정신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이다. 개츠비는 자신의 이름 제임스 개츠를 개명한 이름이다. 철학자 김동규도 지적하듯 개츠비는 개츠의 이상화된 자기형상화로 이미 자기도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의 이상적 이미지인 돈과 권력의 화신을 사랑하고 있음의 반증이다. 그래서 개츠비는 처절한 멜랑콜리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된다.

 

이것은 소설의 서사적 논리 형식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선택한 서양인의 오래된 정조의 발현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뼛속까지 속물인 데이지라는 인물은 돈이라는 죽은 사물과 같다. 개츠비가 꿈꾸는 진솔한 사랑은 애초에 성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같은 물신숭배는 서구인의 정조에 감염된 동양을 비롯한 세계 모든 지역에 확산된 기분 나쁜 정조에서 출현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인류 세계에 지니는 권위와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수상자의 작품들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들에게 동일하고 보편적인 감응을 주는 것은 아닐 게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인물들은 도처에 경계 지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의 접점이 없이 배격하고 분리되어 있다. 건강한 삶이란 헤아릴 수 없는 관계들 마디의 접경에서 일어난다, 타자성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릴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미약하게 벌루시커와 에스테르의 일방적인 오해로 가득한 가느다란 접점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타자에 의해 단절된다. 멜랑콜리는 자기상실을 참지 못하는 정조이다.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마디가 새롭게 맺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라슬로는 멜랑콜리의 정조를 소설의 주요 제재로 삼아 서사를 전개하지만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형식적 구조, 커다란 틀, 세계의 폐쇄적 순환구조의 틀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멜랑콜리의 긍정적 특성인 저항의 실천, 열정적인 창조로서의 영감과 같은, 천재 시인 횔덜린의 예술적 광기와는 사뭇 거리가 멀어진다. 오직 질병적, 체념적, 분열적 우수만 넘실댄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멜랑콜리아처럼 서구 문학인들의 정조는 어두운 우수의 정조를 강렬한 문학적 서사에 담아 생의 무한한 감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들의 제목이 지닌 정조의 한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지향 또는 시사하고 있는지 조금은 냉철한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만 같다. 소설 읽기에 냉철함을 제안하는 것이 뒤틀린 이해라는 지적이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폐쇄적, 배타적 정신의 산물이 아닌지, 그 어떤 변화도 기대치 않는 순응이거나 체념의 서사는 아닌지, 그래서 우리네 삶의 그 어떤 긍정적 희망의 씨앗도 남겨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물론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인간 보편의 경험인 탄생, 사랑, 죽음이라는 인생의 세 마디만큼 공유하는 보편적 정서에서 연원하는 그것들에 대한 시원적 슬픔과 우수의 감성이다. 이는 이성적 분류 체계나 논리적 접근으로 결코 잡히지 않지만 인간의 사회문화에 어떤 규정력을 발휘하는 감성으로서 현실 전복적이고 비판적 시선의 정조일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화의 정수인 예술이 멜랑콜리에 흠씬 젖어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은 배타성을, 즉 타자의 배제로 인한 창조의 불능, 정신적 불임의 사태로 여겨진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분히 은유로 기술된 시체(屍體)의 화학적 변화를 장황하게 기술한 페이지들은 제아무리 반동이 승리한듯해도 자연의 순리는 그에 저항하는 단계를 돌려 줄 것이라는 뻔한 순환구조의 답습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문학적 맛을 극대화하는 기술(technic)로서 멜랑콜리가 사용된, 동어반복의 대표적 예로 여겨진다. 미학적 성취는 있었으나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뜻도 없다.”를 다시금 반복하는 사태인 것만 같다.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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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23 0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룸을 감상할 수 있었어 좋았습니다.

비의식 2025-11-23 08:0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저항의 멜랑콜리‘는 ‘사탄탱고‘만큼 흥미롭지는 않지만, 한 세계의 몰락에 대한 전조로 그려지는 적대적 시선의 느낌, 사방에 넘쳐나는 쓰레기가 추위에 얼어붙은 전경, 고래 전시와 군중들의 기묘한 열정 등의 서사 진행이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응하는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의 이합집산의 행동들, 권력의 이동이 더없이 천박하게 그려지고 있지요. 이야기 자체로는 분명 매혹적인 작품인데요, 제겐 계속 석연치않은 거부감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에 이런 감상으로 이어졌네요. ^^

페넬로페 2025-11-23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당통의 죽음>을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1월엔 <사탄탱고>를 읽을 예정이고요. <저항의 멜랑콜리>도 읽어봐야겠어요. 이 리뷰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의식 2025-11-23 10:27   좋아요 1 | URL
오, 페넬로페님~ ‘사탄탱고‘는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제법 지나면서 제 관점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르러 의심스러움이 생겼네요. 아무튼 우리들의 감성을 휘젓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요.

잉크냄새 2025-11-23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담입니다만 멜랑꼴리는 예전 처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좀 있어 보이려 쓰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 좀 멜랑꼴리해˝라고 말이죠. 깊은 의미도 잘 모르면서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들먹이던 시절처럼 말이죠. ㅎㅎ

비의식 2025-11-23 10:23   좋아요 0 | URL
서구 정신이 우리들에게 어느 새 깊게 잠식해 들어온 것이겠지요. 회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저 수용하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한 요소들이 있어요. 김동규의 저술은 서양의 주변부에 있는 자로써 미래 철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동환, 김상봉 등이 있지요. 참고할만한 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잉크냄새님.
 

이렇게 이어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잊혀 진 삶을 살기위해 매진했던 로베르트 발저의 자취에 공감하듯 사로잡힌 읽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아니요를 발하는 필경사 바틀비와 바틀비 증후군의 연합체들, 절필의 작가들인 글쓰기를 멈춘 사람들에 이르렀다.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겠다는 은둔의 인물이 문학적 도피에 맞닿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테지만, 나는 전혀 예견치 못했다. 글쓰기를 포기하는 행태가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과 동행하는 것은 일견 상통하는 것이겠지만, 그 부정적 충동, ()에 대한 이끌림이 문학적 고뇌와 다르지 않음의 발견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스페인 작가 엔리께 빌라-마따스의 창작의 요구 앞에 무기력해진 작가들과 작품들의 파편들을 모아놓은 특이한 소설 같지 않은 소설에 이르게 된 것인데,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이고, 또한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의 다른 표현일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으며. 찾아 헤매던 주베르는 책 한 권도 쓰지 않고 살기에 아주 좋은 장소 하나를 발견해버렸다. 자신이 뿌리를 내릴 곳을 찾은 것이다. 그가 모색했던 것은 바로 모든 글쓰기의 원칙,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비춰줄 빛이었다.”

- 바틀비와 바틀비들, 엔리께 빌라 마따스, 소담출판사, 2011.11 초판, P89

 

평생 책 한 권을 쓸 준비를 하며, 그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아 헤매던 조셉 주베르라는 인물에 대한 이 이야기는 글쓰기가 대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대변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가장 평온함을 느끼는 자리(장소)를 찾아 평생을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로 지금에도 꿈꾸는 그 이상적 장소와 같이 글쓰기는 바로 자신이 뿌리 내릴 곳을 찾는 여정일 것이다. 때문에 주베르는 책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는다는 절필은 이처럼 부정성속에 치열한 생의 긍정, 열정을 내포하고 있음이다.

 

아니요를 과격하게 외치는 필경사 바틀비들,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품고 있는 아니요작가들의 선조는 단연 허먼 멜빌일 것이다. 글쓰기를 어느 날 홀연히 멈추거나, 그네들의 작품 속에 아니요, 혹은 중단과 끝을 맺지 않는 세계인 그 부정의 충동 속에서 삶을 거닐고, 퇴장하는 삶의 그 어떤 진실의 장소에 도달하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고뇌들을 본다. 문학을 그만두거나 글쓰기를 중단하는 이유는 작가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하물며, 생의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방편이야 그 수를 어찌 헤아리겠는가?

 

어떤 단일한 생과 사의 진실을 찾겠다는 허무맹랑한 좇음의 여정은 실패가 뻔한 예정된 불가능함일 것이다. 미련하게도 나는 아주 좋은 자리를 발견하는 것과 우주적 진실을 찾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일 게다. 마치 지금까지 쓰인 책을 제거해버리는 한 권의 책을 쓰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참으로 신선한 아먕처럼 말이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모리스 블랑쇼의 과도한 훈계라는 비아냥과는 다른 그 어떤 말도, 어떤 책도 세계의 총체적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의미라고 나는 이해하련다.

 

사실 우리네 삶에 그 어떤 중심이 있기나 하겠는가? 내 삶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도, 노선도 없다.”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절필했던 스페인 작가 페핀 베요(pepin bello)의 작품 없는 대표적 작가의 말처럼 글쓰기와 삶의 의미는 도저히 총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아니요의 작가를 말하면서 로베르트 발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글의 발단을 제공한 이에게 무례가 될 것 같다. 나는 낮은 영역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했듯 그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가장 평온한 상태일 수 있는 기억의 총체인 자신의 승인, 혹은 확인의 물음이 새삼 필요치 않는 그런 영역으로서 산책(遊牧)하는 삶이 필요했을 것이다.

 

재봉틀공장 노동자, 서점 직원, 은행원, 성의 집사, 실직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을 전전하며, 밤이면 바틀비가 되어 낡은 걸상에 앉아 희미한 석유 등불 밑에서 필경사일을 하는 발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타인들로부터 잊히는 것 외에는 전혀 원하는 것이 없었던, 헤어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힘으로써 문학을 포기한 작가, 나는 야망과는 무관한 미세하고 덧없는 것을 과시하는 그의 허영에 매료된다. 그는 정신병원(요양원)에 스스로 찾아 들어가 28년을 보내다 눈 쌓인 산책길에서 죽었다. 그는 삶이란 것, 글쓰기란 것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길 잃음에서 하나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그것들과 행복한 만남을 이루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길 잃음의 예술, 광기의 예술이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내 생각! 내 생각이 살게 될 집을 짓는 것이 참으로 어렵도다.”

 

사무엘 베케트도, 발저도 스스로 찾아들어간 정신요양원. 자신의 살집을 마련했기에 더는 글을 쓸 필요가 사라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횔덜린의 36년간의 칩거생활도, 휘페리온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살 집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광기였지 않았을까? ‘아니요라고 선포한, 혹은 그저 절필하고 세상으로부터 도주했던 작가들과 그리 멀지 않은 인물로 카프카는 아마도 바틀비의 적통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일요일에 조차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바틀비는 어느 단식 광대와 같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해 금식을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음식을 거부하는 인물과 닮았다. 글쓰기의 불가능성 또는 가능성은 고독과 닮아있는 듯하다. 세상이 발하는 신호들에 반항하는 그 목소리들, 고독은, 삶은 그러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절단은 현대 작가들이 겪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일관성과 총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추구는 언어의 표현 한계가 내재한 불가능성으로 침묵으로 추락과 위기의식을 강제한다. 호프만 스탈의 잘 알려진 단편 찬도스 경의 편지는 더 이상 이 세계의 표현이 언어에 의해 지칭 될 수도 통제당할 수도 없음으로 인한 존재적 조난에 대한 공포 섞인 선포였을 것이다. 이 문학적 표현의 위기는 삶의 자리에 대한 불안의 다른 형상인 것만 같다. 카프카가 주정꾼과의 대화에서 말()이 더 이상 사물을 제대로 지칭하지 않음으로 은유하듯, 우리는 삶이란 것의 본질에 대한 믿음의 위기에도 처한 것만 같다. 삶은 비밀스럽고 도피적이며, 그것은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삶이고, 그렇기에 어쩌면 더욱 내 삶인 것처럼, 절필, 글쓰기의 마비상태인 침묵은 가장 치열한 혈투이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는 가장 도덕적인 비()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적인 것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애쓰는 작가는 실패 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이야말로 새로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존재를 발견케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불가능성은 마치 고독한 산책자가 찾아 헤매는 최후의 안식처, 그 평온의 행복과 자유를 향한 길처럼 보인다. 이 말이 맞춤으로 떠오른다. 항상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것 속에서 죽음을 반복한다.”, 하나의 형용사를 찾기 위해 무한한 시간을 보내는 어느 시인처럼 절필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 구차해 보이는 이유가 감동적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타당한 이유도 만들어내지 않는 작가들이 얼마나 지천인가. 삶을 숙고하려는 반성적 인간이 날로 줄어가는 느낌이다. 갈수록 비도덕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무심히 지나가버리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망각으로부터 되찾으려는 문학의 이 치열한 모습(문학적 도피를 포함해서 말이다)들은 왜 글을 써야만 하는가에 대한 응답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절필, 무기력과 체념은 그저 상상력이 고갈되어서, 게을러서, 성취할 야망이 보이지 않아서 쓰지 않는 것과는 다른 저항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결코 체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얼마나 다양하게, 혹은 기만적으로 시간에, 자연의 흐름에 반항하는가. 글쓰기는 그 균형의 모색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요를 추구하는 어떤 작가의 소설 이야기가 있다. 그 존재하지 않는 작가는 모든 소설을 온전히 끝내지 않은,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 미완성 이야기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삶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결말을 내지 않음으로써 질식당하는 이 세계의 목소리들을 만들어 냈다는 허구의 이야기다. ‘아니요라는 이 저항의 한 마디는 발명, 창조의 외침이기도 할 것이다. 폴 발레리의 그 유명한 글쓰기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책꽂이를 창밖으로 내던진 테스트 씨는 그 덕분에 생각을 많이 한다. 많이 쓸수록 생각은 적게 할 수밖에 없음의 증언이기도 할 것이다. 비움의 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덕지덕지 눌러 붙은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야 충만해질 여유와 자유가 생긴다. ‘하지 않으렵니다라는 바틀비의 이 부정의 아니요는 순리에 대한 긍정이고, 곧 채움의 가능성일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 멋진 무()존재들의 선조인 바틀비는 하지 않으려는 것을 대차게 실행한다. 바틀비는 멜빌이 1843년 자신이 실패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을 때,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만장일치로 그가 실패했다고 규정했을 때, 그 부정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바틀비가 자신을 거부했던 세상을 거부하려는 듯한 명백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한 세계를 마주한 무기력의 반항이었다. 나는 발저가 선택한 은둔의 삶, 절필의 삶을 동경하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체념과 반항을 오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비록 언젠가는 결국 체념에 굴복하겠지만.

 

세상에 내놓고 아니요를 외친 작가로 오스카 와일드는 또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비평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고,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지적인 것이다.”라며, 생애 마지막 2년을 실제로 자신을 폐기시키듯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오랜 열망을 실현했다. 근면성은 모든 허위의 씨앗이라고까지 독설을 뱉어낸 그에게 완전한 무위(無爲)는 가장 고상한 형태였다. 그가 죽자 파리의 신문은 그의 말 몇 마디를 인용하는 부고 기사를 썼다. 나는 삶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글을 썼다.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지금은 더 이상 쓸 게 없다.”, 그가 알았다는 삶의 의미라는 것이 부재로서의 였음을 추정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삶의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태어났으니 살아지는 것이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저 그것일 뿐 아닌가? 종이가 희미하게 구기적거리는 소리를 상기시키는 웃음이었다고 카프카와 대담을 나누었던 구스타프 야누흐의 증언처럼, 그 영원한 침묵을 선고 받은 존재가 드러내는 절망의 표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글쓰기처럼 삶이란 것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문학이나 삶이나 그 어떤 의미나 본질이란 것이 존재할 증거가 없다. 그 누군가 문학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고, 항상 새롭게 발견하거나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듯, 삶의 의미란 것도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탈리아의 문학이론 교수이자 소설가인 다니엘레 델 주디체(Daniele Del Giudice)는 글쓰기의 위험성을 말하며, 글로 쓰인 작품은 위에 세워진 것이고, 하나의 텍스트는 만약, 그 텍스트가 효과적이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며,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학적 도피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 할 때 마주하게 되는 언어 표현의 불가능성이 가져오는 마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용되지 않는 것 이상은 다루지 않으려고 언어를 사용한다면 어찌 그 언어를 도덕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소설 윔블던 스타디움이 신화적인 실서증(失書症) 환자인 옛 친구들을 탐문한 것, 즉 글쓰기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글쓰기의 도덕성에 대한 웅변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세상을 향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고뇌한 것이리라,

 

또 하나 글쓰기의 마비상태에 빠진 주인공을 등장시켜 문학이라는 미명하에 심미적, 정신주의적 언어에 묶여있던 지신에 대한 고별사를 썼던 앙드레 지드로 맺어야겠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팔뤼드를 쓰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정작 팔뤼드를 쓰지 못한다. 이렇게 문학적 도피 또는 마비나 절필의 상태는 침체이거나 엉성한 침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주로의 발견이나 도약이기도 하다. 비생산적 작가의 이상을 찬양했던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도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우리 문학(한국문학)에도 과작(寡作)의 작가들, 또는 절필인가 했을 때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새로운 작품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문학의 소재와 언어 자체가 지닌 본질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곧 인간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부정적 충동에는 체념과 저항의 균형에 대한 내재적 본성을 장착하고 있는 것일 게다.

 

모든 텍스트의 본질은 바로 텍스트 자체의 본질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것을 피하고, 텍스트 자체를 확정하거나 구체화시킬 수 있는 단언을 피하는 데 있다.” 는 말처럼 삶에 그 무슨 진실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우리는 단언, 확정할 수 없다. 세계에, 우주 자연에 대해 아니요를 말함으로써 엄청나게 견고한 장벽과 마주하여 주춤거리고 당혹감에 혼란스러울지라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삶의, 글쓰기의 열정이 살아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쓰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글쓰기가 불가능한 것이라 했던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Hart Crane)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삶의 내 자리를 찾아 헤매는 불가능에 가까운 길을 걷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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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우아한 연인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그 이름을 알린, 내게는 장소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에이모 토울스가 그의 첫 소설집으로 기다리던 독자들에게 돌아왔다, 이 컬렉션은 여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되어 그간 호흡이 제법 길었던 장편과 달리 단편소설로 작가 수련을 해왔던 그의 섬세하고 예리한 순간의 포착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서사 미학을 즐기는 기회가 된다.

 

수록된 전체 작품에 앞서 맛보기로 단편 밀조업자를 프리뷰 북을 통해 읽게 되었다. 에이모 토울스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다 모은 뒤 의식하지 못했지만 수록작품들이 낯선 사람 두 명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서 자기 삶에 나타난 새로운 사실과 직면한다는 것을문득 깨달았다고 쓰고 있다. 다시 말해 테이블에서 나눈 단 한 번의 대화로 인생이 크게 변할 때가 많다는 잠재의식 속 확신이 낳은 결과인 것 같다고 말한다.

 

밀조업자또한 한 순간의 우연한 상황, 그로인해 이어져야만 하게 된 대화가 한 인간 삶에 있어 유익한 저주였음을 감수성 높은 화자의 입을 빌려 세련된 유머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품격있게 이야기를 지펴내고 있다. 화자인 메리 하크니스는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 10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는 30대 중반의 투자은행가인 남편 토머스 하크니스(토미)와 두 아이를 둔 뉴욕에 거주하는 여인이다. 메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남편 토미를 사랑한다는 점을 이야기 서술에 앞서 밝히고 있다. 때문에 메리가 전하는 19964월의 어느 토요일에 발생했던 카네기홀에서의 사건 속 주인공인 남편 토미에 대한 섬세한 관찰자의 시선은 사랑,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으로서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어떤 비난이나 조롱에서 벗어난다.

 

젖먹이 아이들의 뒤치다꺼리에서 해방되자 토미는 부부의 저녁외출 캠페인이라는 아이디어를 꺼내들게 되고, 카네기홀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 등의 목록을 만든다. 메리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카네기홀에서 저녁 시간을 보낼 만도 했다.” 중산층 부부의 여가생활로서 감당 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는 말일게다. 조금은 시니컬한 분위기를 띤 이러한 자기 객관화 표현이 내게는 꽤 흥미롭게 여겨졌는데, 여기에 더해 하지만 가장 내 마음에 든 것은 적극적으로 나선 토미의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래, 안 될 것도 없지.’ 라고 대답했다.”는 상황 묘사들은 그 디테일이 전달하는 감성이 그대로 느껴져 재미를 배가시켰다. 아무튼 이후 메리가 묘사하는 상황들은 이러한 섬세한 순간 포착능력에 기초하고 있기에, 우리들 일상의 생생한 표정들이 담고 있을 익살맞고, 친근함이 공감력을 높여 더욱 몰입하게 된다.

 

카네기홀 공연 예약을 시도하다 기부금 2천 달러인 후원자 혜택의 유혹에 4월의 매주 토요일 밤 거장들의 연주회를 예매하게 되고, 토미와 메리 부부는 카네기홀 5열 좌석에 앉는다. 그런데 그들의 옆 좌석에 여든 살쯤의 레인코트를 입은 노인이 자리잡고, 그의 소매 끝에 곤충 더듬이처럼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토미가 속삭인다. 메리! 저 손목을 봐.” 이후로 토미는 콘서트 내내 마이크를 바라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여기서 메리가 지적하는 토미의 세 가지 재능이라는 승부욕, 예리함, 소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에 대한 감각을 빼놓으면 얘기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 아마 여기 승부욕에 필수적인 집요함을 더해야 할 것 같다. 믿을 수가 없네, 너무 뻔뻔하잖아! 카네기홀에서 콘서트를 녹음하다니.” 이때 메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토미의 반응은 모든 것을 말하는데, “토미는 충격받은 얼굴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 행동의 묘사에서 토미가 어떤 인물인지, 자기 의견에 얼마나 심취하며, 마치 사회정의를 자기 한 몸이 짊어진 것처럼 자기 생각만을 좇는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메리는 연주회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눈 내리는 숲 한 복판에 아주 정답고 매력적인 분위기와 가로등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이다. 감수성, 타자에 열려있는 정신으로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다. 토미와는 반대의 성향이랄까? 미친 듯이 재미있는 장면이 있는데, 노인의 연주회 녹음이라는 불법 행위에 대한 놀라움, 자기 윤리와 정의관에 배치되는 행위에 토미는 콘서트는 뒷전이고, 온 정신을 노인의 카세트 녹음기에 달린 마이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연신해서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중얼거린다. 믿을 수가 없네. 어이가 없어!”

 

자기 도덕성의 기준에 용납되지 않음에 참을 수 없어하는 사람들을 우리들 주변에 발견하는 일은 매우 쉬울 정도로 흔하다. 이때 뒤에 앉은 여자가 쉿 소리를 낸다. 토미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한다. 미국의 법률, 카네기홀의 예의, 모든 예술가의 지적재산권을 수호하려 애쓰는 자신이 저런 소리를듣게 된 것에 대한 충격이다. 억울함 가득한 토미의 얼굴을 상상 할 수 있게 된다. 자기 정의감에 대한 반응이 징벌로서 다가왔을 때 경악스러움이 덮쳤을 것이다. 아무튼 메리의 이 생동감 넘치는 묘사들은 상황 모두를 상상 가능하게 한다. 토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는 나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상황, 자신의 정의감이 홀대된 현실을 참아낼 수 없었던 토미는 연주회 중에 좌석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기 시작한다. 주위 좌석의 음악 애호가들이 저마다 분노와 충격을 드러내는것은 아마 당연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토미 자신이 주장하던 카네기홀의 예의는 그렇게 그 자신이 파괴한다. 사실 소설의 많은 묘사에 이러한 상황역전이 주는 웃음, 미소의 코드가 있다. 연주회장을 벗어난 토미는 안내직원에게 다짜고짜로 밀조업자를 신고하려한다고 말한다. 음반 밀조업자요!”, 안내 직원이 눈동자를 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지금 나한데 눈동자를 굴린 겁니까?” 또다시 토미는 충격을 받는다. 자기 정의감에 심취한 인간은 타인의 모든 행위와 언어가 자신에 호응하지 않으면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인데, 특히나 그의 학력, 직업적 신분이라는 사회 계층적 우월감에 대한 확신을 가진 토미와 같은 인물들이 으레 보이는 반응일 것이다.

 

객석에서 노인은 카네기홀 매니저의 부름에 불려나오고, 경비원의 신고를 받은 경찰까지 출동한 현장, 연주회 중간 휴식시간에 로비로 나온 메리는 이 상황을 수치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기분이 어떻든 아내로서 남편 옆에 서서 정신적으로 응원해줘야 하는 때가 간혹 있지만, 그때는 그런 때가 아니었다고, 그래서 그녀는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상황을 지켜본다. 만약 내가 프로그램을 가져왔더라면, 그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밀었을 것이다.”. 출동한 경찰관의 시선 또한 이 상황의 분위기를 더하는데, 토미를 한번 쓱 훑어보았다. 이런 주장을 내놓는 월스트리트 인간들에 대해 완벽히 안다는 뜻을 전달하려는 것 같았다.”고 메리는 쓴다.

 

불려나온 팔십의 노인, ‘아서 파인13년 동안 아내와 함께 공연을 보아왔지만, 아내가 큰 병이 들어 콘서트에 올 수 없게 되자 공연을 녹음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수치심과 연민이 교차하는 이 순간의 황망한 정경이 눈에 선하다. 경찰관이 카네기홀의 매니저 미스터 코넬을 본다. 고발하실 생각입니까? 그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끝일까? 메리가 말하는 남편 토미의 성격을 들어보자, 아무리 사소하고 짧게 오고간 대화라도 토미는 나쁜 감정이 남지 않았다는 확인을 상대에게 받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겐 상황이 종료된 것이 아니다. 토미는 사과와 설명의 요구를 위해 파인씨를 만나야 한다며 로비를 떠나지 않는다. 단순히 노인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요구할 것이란다. 지독한 자기중심적 정의관, 타인의 감정에 대한 몰감각, 무신경의 극치랄까? 이 상황에 한 마디로 어이없어, 기막혀! 하는 메리의 당시 감정은 정말 재치 넘친다. 


이미지는 테이블 포 투의 프리뷰 북 입니다.

 

그의 끈질긴 성격, 남자의 자존심이 죽음에 저항하며 보이는 곡예, 아내로서 이제는 놀라지 말아야 할 일에 여전히 놀라고 있는 나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 그녀는 잘 알고 있는 토미의 집요함이건만 다시금 놀라는 자신에게 놀라 금치 못하는 것이다. 토미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오직 자기감정의 확신만을 위한 행위는 정말 놀라운 것이다. 그런데, 이 무공감 능력, 타자의 감정에 대한 무관심은 아마 요즈음 세태에 흔히 발견되는 실제일 것이다. 폭넓게 그 세력권을 확장하는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니 말이다. 노인은 직원 출입구를 통해 다시는 카네기홀에 입장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이미 집으로 돌아갔다.

 

토미에겐 자기감정의 해소를 위한 확인이 되지 않았으니, 노인을 찾는 행위가 계속되는 것은 그에겐 당연한 일이다. 메리 역시 예감했던 일이다. 토미는 마침내 카네기홀에서 멀지 않은 공동주택에서 노인을 찾아낸다. 치밀하고 예리한 감각을 자랑하는 투자금융사 간부인 토미의 무신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인이 혼자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노인에게 손가락질해대며 분노를 터뜨린다. 당신 혼자 산다며!”, “아내가 죽은 뒤 혼자 살아요.” 노인이 죽은 아내와 함께 카네기홀을 찾아 음악 연주를 감상하던 사연을 듣기 시작한다. 감동과 수치심이 물밀듯 몰려왔을 것이다.

 

콘서트홀에서 지켜야 할 예의? 예술가의 지식재산에 대한 권리?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정작 자신은 음악이 삶의 일부가 되었던 노부부의 삶과 달리 사기꾼에 불과했음을 느끼는 것인데, 아마 소위 중산층의 문화적 자본에 대한 자부심에 도사린 과시와 허위의식의 발견이었을 것이다. 마침 아버지 파인을 찾아 온 딸 메레디스로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노인이 아내를 추억하면서 음악을 좀 듣고 싶어 한 것, 이게 어느 섬세한 분의 감수성을 건드렸거든....자기가 남보다 뛰어난 정의감을 지녔다고 생각하는...”이라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는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기 행동이 낳을 결과를 생각지 않는 부주의에 대해 혐오의 일갈을 뱉어낸다. 그동안 당신이 앉았던 그 자리는 바로 우리 어머니 자리였어!” 이 한마디 말 때문이었을까? 토미는 명치를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 몸속에 산소가 부족해서 사과조차 할 수 없는 순간에 처한다.

 

그런데 당시 자기 정의감에 몰입해 연주회 도중에 다른 청중의 감상을 방해하며 토미가 뛰쳐나갔을 그때, 메리는 거장 이설리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첼로 모음곡 1(G장조) 전주곡에서 완벽한 것, 깊이 잠들었던 영혼이 갑자기 깨어나는 승천, 비현실적 감각에 심취해 있었다. 그 감각의 묘사는 어쩌면 이 작품이 들려주려는 커다란 주제에 가깝게 여겨지는데, 크레센도( crescendo), 최고조를 향해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폭포에 덩달아 승천하는 감각, 올라가는 행위가 가능한 영역 너머로,.....희망과 포부를 넘어 모든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려 있는 기쁨의 영역으로.”라는 공유한 기쁨, 공유를 통해 더욱 풍부해진 그 기쁨에도 박수를 보내는 청중들 서로를 향한 공유의 감각을 닮아있다.

 

당신이 평생 카네기홀에 다니면 좋겠어요. 토머스 하크니스, 그리고 우리 어머니 자리에 앉을 때마다,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첼로 연주를 들을 때마다....당신에게 독선적이고 무신경한 개자식이라고 말한 일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메레디스가 저주처럼 전한 이 말은 토미라는 인간의 삶의 태도에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감수성, 공감능력, 사랑, 이 글자만 다른 동일한 감성의 능력을 잃을 때 우리는 자기 너머의 타자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설령, 법 윤리가 되었건, 예술의 보호가 되었건, 지키고자 하는 정의감이 되었건, 그것은 결국 이러한 능력의 토대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될 터이다.

 

아마 토미는 자기용서의 기나긴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어쩌면 마침내 서로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열려있는 기쁨의 영역에 도달했으리라. , 욕망과 양심, 관계의 회복을 다루며 우아함과 예리함 사이의 과감한 변주와 품격있는 도약으로서 크레센도의 거장이 연주하는 공연 같다는 이 작품에 대한 칭송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라 함에 주저치 않겠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두 도시를 무대로 펼쳐지는 일곱 편의 이 첫 소설집 테이블 포 투는 탁월한 서사 미학에 굶주린 독자들에게 이 여름 우아한 선물이 되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 본 페이퍼 글은 출판사 현대문학으로부터 에이모 토울스의 

첫 소설집 테이블 포 투(Table For Two)』의 프리뷰 북을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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