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동시대 문학사 1동시대 문학사 3, 사랑에 각기 수록된 이광호 평론가의 나는 쓸 수 있는가-‘일인칭하기의 역사적 몽타주, 강계숙 평론가의 한국 여성시의 시작(始作/詩作)을 돌아보다, 심진경 평론가의 여성 자아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타자 되기의 미학, 강동호 평론가의 종언 이후의 사랑, 권보드래 평론가의 방황의 권리, 고통의 미학을 바탕으로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Women Madness)의 문제의식에 터 잡은 일종의 글모음이자, 소소한 잡설이다.


과거가 잔존하는 현재라는 동시대의 비동시성이 현시대에 혼융되어 실재함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체감하는 시절이다. 국민대중을 기초(基礎)로 한 민주주의와 자율적 윤리의 성숙에 대한 요구가 강한 지금 전체주의나 파시즘, 권위주의와 같은 과거의 퇴행적 유령들이 상존하며 세상을 갈등과 혐오, 혼돈의 시대로 몰고가는 것처럼 결코 동시대는 동시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대의 이러한 시간적 얽힘은 지난 것들에 대한 내 관심을 자극해오던 차에 동시대의 문학사라는 기획 하에 폭력, 사랑, , 젠더라는 한국의 근대 문학사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네 개의 주제어로 출간된 책을 읽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바로 오늘에 활발히 논의되거나 논의되어야 할 하나의 문학사라는 거대한 역사의 범주로 포섭할 수도 없는, 아니 포섭하는 것이 불가능한 우리 근대 문학의 주제계(主題系)들 각기의 기원을 탐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들의 각 담론 혹은 계보(系譜)들을 읽다가 예기치 못한 우리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작가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 글은 이로인해 촉발된 개인의 욕망에 따라 발췌한 글 모음의 보관용 기록이다. 잊혀진 그 문제적 작가와 작품, 그리고 커다란 시차를 두고 계보를 잇는 작품들은 그러한 기록에서의 부수적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의 작가 김명순과 그녀의 작품 세계는 앞서 열거한 <사랑과 와 젠더> 세 주제계열의 주제 글들 모두에서 설명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시사하는 내용은 매우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감정은 곧 이어 한국문학에 대한 나의 많은 몰이해와 오독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고, 부지런히 몇 권의 책을 부랴부랴 구입하도록 이끌었다. 그것을 어떤 범주의 언어로 특정한다면 한동안 여성 독자들에게 베스트셀러였던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이미 분석 제시한 문학적 열기와 충돌이 적절한 출구를 얻지 못해 내면의 심층에 갇혀있어 제 숨을 틀어막는 병인으로서의 정신분열에 내몰린 미친 여자이고, 여성이 여성을 서로 감시, 단속하게 하는 신화적 지층을 탐사한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Women Madness)이기도 하다.

 

동시대 문학사 1나는 쓸 수 있는가-‘일인칭하기의 역사적 몽타주라는 글에서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근대 초기 여성 작가에게 의 글쓰기를 밀고 나가는 것은 모성 이데올로기와 인습적인 가족제도에 얽혀있는 식민지 젠더 시스템과의 투쟁을 의미했으며, 여성이 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를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들의 억압을 드러내고, ‘의 다른 잠재성을 상상하는 문제이다.”라고 쓰고 있다.

 

1920년대 식민지조선은 중혼(축첩)과 남성불륜이라는 가능성이 활짝 열려있는 사회였으며, 여성의 지식과 교양은 불행을 가져오는 화근이며, 기껏해야 남성사회를 보완하는 범위 내의 지식습득만 허용되는 세계였다. 그런가하면 한편으론 신여성이라는 식민지 남성 지식인들이 근대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과 결핍을 투사하는 허구적 대상으로서의 환상을 씌워놓곤 막상 그 여성들이 새로운 풍속과 여성의 주체적 정립을 향한 해방의 목소리를 낼 때에는 여지없이 온갖 비아냥과 조롱으로 무참한 폭언과 비열한 가해를 가하여 문학의 장은 물론 사회적 낙인을 찍어 내치는 시절이기도 했다. 신여성=근대적 지식인 여성=문란한 여성이라는 등식을 남성 자신들이 유용성에 따라 활용하는 비열한 언어였다.

 

이때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1917년 잡지 청춘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김명순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출간되던 1925년에 한국 근대문학사에서의 최초의 여성 시인으로서의 詩集생명의 과실을 출간한다. 이미 활발한 문학 작업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문단 남성 작가들 또한 김명순에게 신여성이라는 더러운 기호로 자신들의 욕망을 투여하며 열광했지만, 그녀가 근대적 자아인 개인 주체로서의 여성 자기의 목소리를 내자 남성 문인들은 연애 스캔들을 내세워 그녀의 글쓰기를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명순이 유학시절 일본군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이응준이라는 소위로 임관한 조선인 남성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매일신문의 기사는 곧바로 김명순을 문란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에 가둬 끝없이 채색하고 소비하며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성폭행 피해자는 문란한 여성이라는 등식으로 변질되는 괴이한 윤리적 잣대가 작동했다. 특히 남성중심의 문단은 정말 파렴치했는데, 김기진, 방정환, 김동인 등이 린치에 가까운 공격으로 악질적 가해를 해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보드래 평론가의 방황의 권리, 고통의 미학, 동시대 문학사 3, 사랑』「방황의 권리, 고통의 미학)

 

김동인은 김명순을 모델로 한 추악한 소설을 써서 2차 가해질까지 해댄 것인데, 이 친일 매국노는 한국문학사의 더러움을 장식하는 감초인 듯하다. 김명순은 이러한 적대적 불화에 고군분투하며 격렬한 언어적 발설과 분출을 통해 세계에 참여하기를 희구했지만 문단과 사회의 극단적이고 처절한 단절과 처벌은 그녀에게 그 어떤 극복의 가능성마저도 완전히 앗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완전한 절망감에 부딪쳤을 때 그 어떤 존재건 미치거나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울분과 수치심과 복수심을 발산함으로써 세계에 호소하며 그런 스스로의 정념을 객관화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삼인칭 장치를 활용하여 분투하지만 결국 분열로 진행되고 만다. 그녀의 내 가슴에라는 시를 읽다보면 조각조각 찢어진 붉은 꽃잎들같이도”, “나는 무수한 검붉은 아이들에게 묻노라.”, “분노에 매맞아 부서진 거울 조각들아,”, “피 맞아 피에 젖은 아이들아,” 와 같이 시문장의 전체가 찢어지고, 조각나고, 아이들이라는 분열의 언어로 쓰여져 있음을 읽게 된다.

 

동시대 문학사 1여성 자아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타자 되기의 미학라는 글에서 심진경 평론가는 김명순의 분투가 가장 짙게 남아있는 작품으로 1924년 신문에 28회 연재되었던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1924)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김명순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문화적 폭력에 맞서는 동시에 스스로를 새롭게 재정의하기 위해 절박한 시도를 한다. 심진경은 이를 자기변명이 아니라 여성의 삶을 스스로 언어화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고 해독하고 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망가진 정체성을 벗어나려는 분투는 실패하고, 거처도 없이 떠돌다 일본의 뇌(정신)병원에서 죽고 만다. 여기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여성이 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를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들의 억압을 드러내고, ‘의 다른 잠재성을 상상하는 문제임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참 빠르기도 하여라.)

 

이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미친년들, 미쳤다고 낙인찍힌 여성들은 고정된 성역할 규범을 벗어났기에 들어야 했던 사회적 징계의 언어였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적 욕망과 주체성에 대한 남성적 시선의 비열함에서 비롯된 여성의 광기라는 언어가 역설적으로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시도하는 언어의 의미로 비로소 와 닿은 것이다. 성폭행당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피해자를 가해한 당대 문단 남성들의 위선과 비열함이란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다. 김명순에게 가해진 일방적 단절과 폭력과는 차이가 있지만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새롭게 자각하고 재구성하려는 고백적 자기 서사인 1934년에 게재된 나혜석의 이혼 고백장-청구(靑邱)씨에게는 곧바로 뻔뻔한 불륜녀라는 비난과 더불어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로 낙인찍어 내버려졌다. 나혜석도 알츠하이머로 떠돌다 행려병자로 객사하고 만다. 여성이 자기 주체의 정립을 위한 목소리를 내면 곧바로 처단되던 그 비루한 실제는 이렇게 미친년, 여성의 광기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어쨌거나 김명순과 나혜석은 소위 신여성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여성 지식인 엘리트였다. 그런 그녀들이 남성중심사회에서 처절하게 내쳐지고 미친년이 되고, 이름 없이 사라졌다. 당대 여성 인구의 대다수는 이렇게 근대화를 체화한 교육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소위 구여성이라는 범주에 속했다는 점이다. 일제 식민지 통치권력이 들어서서야 통속교육이라 해서 자신들의 통치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소양 교육을 시행하였을 뿐 아니라, 1920년대의 식민지조선의 문단이라 해도 자유자재로 한글을 구사하는 인물이 드물었다는 증거들은 구여성들에게 자기 각성, 여성의 새로운 자율적 자기 주체의 정립을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물음이 발생한다.

 

필리스 체슬러가 지적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서로 싫어하고, 서로 경쟁하며, 다른 여성들로부터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는 즉, 성공하거나 권력을 지닌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을 보호해주거나 그로인해 고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서로간의 차이로 인해 작동하는 심리적 두려움이라는 여성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간극의 문제다. 1938년 여성 소설가 백신애는 남편과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광인으로 내쳐진 구여성의 비극을 다룬 광인 수기를 발표한다.

 

서구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가 2005년에 발표한 권력을 지닌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에 놓여있는 강의 문제가 백신애의 신여성과 구여성의 물음 속에서 이미 개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신애의 소설 작품들에는 균열적이고 병리적 상황에 빠지는 인물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백신애는 김명순이나 나혜석이 문단이나 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받고 처형되는지 보았을 것이다. 그녀가 취한 방법은 이중 언어 전략이다. 따르는 듯 하지만 이면으로는 저항을 감추는 듯 발설함으로써 기존의 규범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성의 광기는 살아내기 위한 불가피한 생의 필살기였던 셈이다.

 

- 이눔 하누님아, 에이 비러먹을 개새끼 가튼 하느님아, (...) 아이 무서워, 아니올시다. 거짓말이올시다.(...) 부대부대 벼락은 치지말고 잘 살두록 해주시소.“ -백신애, 광인수기에서

 

광인 수기속 미친 여자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타자로 소외된 여성이 자신의 내적 분열, 분노, 저항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형상이다. 한국문학의 역사에서 이러한 불복종 여성, 특히 미친년의 문학사적 전통은 근 60년간 끊어졌다 2007년 한강의 채식주의자영혜로 다시 출현했다.” 물론 여성의 광기를 소설의 제재로 직접 삼은 소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남성중심의 젠더화된 여성에 대한 관습화되고 스캔들화된 허구에 저항하는 무수한 여성 서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광기에 강하게 견인된 김영순-백신애의 계보는 김명순-백신애-한강이라는 연결선으로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무슨 문학적 계보를 의도적으로 만들고자하는 따위의 도식이 아니다. 소설 속 미친년들이 다만 그렇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스스로를 나무라고 상상하는 정신병자로 변하여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녀가 본래 미친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했던 여자가 아버지에게 맞아죽은 개, 그 개를 강제로 먹어야했던 기억으로 비롯된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사후적 채식주의의 선택이 가부장제적 폭언과 폭력의 계기로 이어지고, 급기야 거식과 침묵을 거쳐 나무-되기라는 불가능한 변신 욕망으로 나가는 과정이 연작단편으로 구성된 이야기다. 아버지-남편이라는 가부장질서에서 심지어는 식물적 육체가 된 처제 영혜의 육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아 또다른 형태의 여성적 역할로 대상화하는 예술로 가장한 형부의 성폭력이 더해진다. 극단으로 치닫는 영혜의 광기는 타자화된 여성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정말 조소가 터져나오는 것은 이 소설의 형부의 예술적 위선 위에 펼쳐지는 패륜적 근친상간이라 부를 수 있는 영혜에 대한 성폭행 장면을 뚝 떼어내 영혜를 패륜적 여성이라 부르며, 부도덕한 소설이라고 욕설을 뱉어내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한 웅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문해력 무능을 만방에 알리는 무지의 어리석음은 물론, 필리스 체슬러가 지적한 페미니스트 여성들 사이의 불신과 몰이해가 바로 지금에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지배질서에의 순응과 거부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오정희의 작품들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히스테리적 주체들의 전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라캉이 아마 이렇게 말했는가보다. 주체는 스스로의 결여를 전면에 내세워 타자의 권위, 규범, 사랑의 대상을 자극하고 그 타자가 내세우는 이름과 설명을 끊임없이 시험한다.”며 히스테리 주체란 타자의 욕망을 캐묻고 흔드는 운동 속에서 자기 인식을 이 구조의 두 자리를 왕복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여성 주체가 오히려 오늘날 여성이 위치한 자리에 대한 가장 진솔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에 이른 페미니스트의 시점에서 보면 퇴행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감염시켜야 할 대상은 바로 이러한 현실 사회 속 여성들이다. 오정희는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을 히스테리적 주체로 상정하면서 가부장제적 질서라는 보편성 안에 스스로를 묶어두면서 그 안에서 내부의 예외로 존재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전략을 선택했지만 그것이 완료된 능사라고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소설들 전반에 모호하고 불투명한 라는 존재의 출몰이다.

 

문학평론가 우찬제와 대담에서 오정희는 이를 설명하려 애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이거나 엄중한 금기에 짓눌린 자아 또는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불러온 곡두이거나 어쩌면 근원적 그리움일지도 모르며 내 의식에 투영된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오정희, 우찬제의 대담록 오정희 깊이 읽기,2007라고. 에로스적 충동이 넘쳐흐르는 오늘에 이러한 전략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태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성적충동을 부추기고 섹시미를 범람케 하는 문화의 장과 달리 공적 장에 이르러서는 이를 묵살하거나 손가락질하는 가히 변태적인 시대임을 목도할 수 있다. 기성의 남성중심의 지배질서는 물론 20세기 전반과 많이 다르지만, 21세기 오늘에서도 지배질서의 윤리와 여성 욕망의 배치는 그리 순조롭지 못한 것이 실상이다. 여성 욕망과 변화하지만 여전히 강고히 잔존하는 질서의 압력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나는 남성이다. 하지만 젠더화에 토대를 둔 성차별 의식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광기에 젖어들 수밖에 없는 여성 작가들의 계보 문학의 자취를 따라가다 한국문학의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내 무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심진경 평론가가 더 이상 순수 여성은 없다!”는 선언에 공감한다. 남성이건 권력을 쥔 여성이건 소외된 여성이건 우리들 모두는 자기 안에 타자를 품은 양가적이고 미결정적인 자기 동일성이나 보편성으로서의 단일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이 아니다.” 결코 그 누구건 확고한 자기동일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나르시시스트이거나 철저하게 세계와 이격되고 고립된 산 속 깊은 곳 자연인일 것이다.

 

당연히 여성의 정체성이란 것도 단일 내부만으로 이루진 것일 수 없다. 타인과의 지속적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상대화하고 자기 확신을 무력하게 만들며, 당연함을 잠식케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순수 여성이라는 말의 정체성도 이미 습득되어 온 역사적 산물이다. 결국 여성이라는 말 자체도 이미 오염되어 있기에 순수 여성이란 말은 가당치도 않게 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하여야 할 일은 완전히 다른 무수한 정체성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평론가 오혜진은 퀴어 친밀성과 낭만적 사랑에 대한 소문들(동시대 문학사 3, 사랑이라는 글에서 여성의 현대적 섹스는 생물학적 번식이라는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자아를 연출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은희경의 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함께의 여성 주인공이 애인은 셋 정도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 는 말의 변주처럼 들린다. 낭만적 사랑이 쾌락으로 대체된.

 

그러나 페미니스트 정신분석가인 필리스 체슬러는 차이와 고유성의 희생은 생물학적인 재생산과 문화적 무능이라는 여성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과 단단히 묶여있다.”고 현실의 삶에 놓여있는 여성의 본원적 고뇌에 대해 질문한다. 오혜진이나 은희경 식 전략은 필리스의 지적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진단은 빈곤하거나 조잡하기 짝이 없다. 내 부족한 시선과 이해는 지금 지나 온 한국문학들, 특히 여성 문학들을 다시금 읽어보도록 종용하고 있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노랑무늬영원의 여성 서사들, 오정희의 소설 컬렉션들, 최윤과 배수아와 신경숙, 김명순과 백신애와 강신재, 그리고 박경리, 최승자와 김혜순의 화법 자체의 형질변화를 촉구하는 시선들을 조금은 더 깊숙이 읽어보아야 할 듯싶다. 이들 동시대 문학이 아닌 비동시성의 문학들이 우리 앞에 놓인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품고 있거나 어떤 영감이 되어주기도 한다. 다가오는 봄이 되면 이들 한국문학사에 저마다의 좌표를 남긴 여성작가들의 소설과 시를 탐닉하는 시간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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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通俗)이라는 어휘는 20세기 식민지 사회로 이행되기 전 조선사회에서는 그 사용례가 드문 말이었다. 굳이 그 용례를 살펴보자면 사대부 양반계층이 하위계층의 문화를 자신들과 구분하기 위해 아()와 속()으로 분별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듯하다. 강용훈 교수는 통속에 대한 개념사 연구서인 통속의 계보학에서 “1906년 이후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에서 '통속'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식민지 지배권력이 속의 세계로 통치성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일제의 식민통치권력이 식민지민들을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복속시키려는 의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어휘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인 최초의 한글사전인 조선어 사전193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는데, 거기에서 통속모든 세상에 널리 통하는이라는 의미라고 기술되어 있는 모양이다. 서두가 길어졌다. 어쨌거나 통속이라는 어휘의 본격적 사용은 20세기 들어서면서 부터라는, 다시 말해 식민통치권력이 피지배민의 소위 계몽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려다보니 장황한 시작이 되었다.

 

오늘날 한글사전에는 1938년의 사전적 의미와 더불어 저급, 저속한이란 의미가 추가되어있다. 사실 우리들의 일상 대화 속에서 , 그거 너무 통속적인데라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조금 저급하다고 얕잡는 어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통속을 말하고자 한 계기가 저급함을 느낀 소설 때문이다. 누군가가 쓴 창작품, 더군다나 해외에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설에 나는 그야말로 통속적이라는 평을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것이 꼭 비하하려는 의도이기 보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여서 그 진부함을, 기대 이하의 것이었음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 소설은 20세기 일제 식민치하 한국인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을 매우 정형화된, 아니 유형화(類型化)된 이라고 해야 할 인물들이 꼭 그만큼 유형화된 행태를 하는 인물전개나, 시대적 통찰의 세부를 표현하지 못하고 이미 드러난 외피의 변죽만을 우려먹는, 한마디로 저급하다고 느낀 것이었다. 대중적 인기를 얻은 기생이 인력거를 끄는 가난한 고학생을 도와 성공시키고, 거지 대장이었던 인물이 사랑에 눈멀어 일제에 저항하는 투사가 되는, 또 다른 한편은 친일로 부를 축적한 부자의 딸과 결혼을 위해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준 연인을 배반하는, 1920~30년대 식민지 한국의 신문에 연재되던 심훈, 염상섭, 김말봉 등의 통속소설, 그리고 오늘날의 막장 TV드라마와 빼닮지 않았나? 21세기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한국인만을 위해 쓴 소설은 물론 아니지만 마치 누군가를 계몽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매몰되어 있음에 대한 불쾌감이었다고 해야 할까? 상식,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런 것으로 계몽한다는 생각을 오늘에도 하고 있다는 그 불순한 저의라니.

 


오늘에는 이 어휘, 통속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그리고는 대중이라는 말이 그 개념의 상당부분을 대체 수용하여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통속소설이라는 표현보다는 대중소설이라는 범주로 뭉뚱그려 싸잡아 넣고, 소설문학이라는 문화의 한 범주를 평등화시켜버린 것만 같다. , 여기서 대중문학과 통속문학, 또는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의 2000년대 한창이었던 철지난 문학논쟁을 재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대중문학이라 불리는 오늘의 소설작품들을 세분하여 문학을 서열화하는 위계질서를 부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통속이라는 사용례가 드물어진 어휘의 부활을 도모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현실적 과제가 있음을 회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통속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갈아탄 것도 대략 50년 쯤 된 것 같다. 한국사회에 TV가 널리 보급되던 1970년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등장이 본격화된 이후부터 통속은 슬그머니 대중문화, 대중문학, 대중 예술로 불리기 시작했을 테다. 20세기 내내 계도(啓導)되고 훈육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던 수많은 사람의 집단이었던 '통속'으로 멸시되던 존재들이 문화주체인 대중(大衆)’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으니 말이다. 통속이 사회적, 매체 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으로 불리게 된 사람들의 앎의 수준도 갑자기 뛰어오른 것일까? 매체가 쏟아내는 잡다한 정보의 영향으로 어느 만큼의 도약이 있었을 것이지만, 대중 구성원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앎의 질적 도약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않아 보인다.

 

어쨌거나 대중이라는 이 의뭉스런 어휘에는 온갖 잡다한 의미들을 상층부 지배계층과 다른 일반의 사람들이 지닌 속성 모두를 싸잡아 넣은 두루뭉술한 어휘가 되어 그 용례의 폭이 무한하게 넓어졌다. 즉 평준화되고, 평등화된 대다수의 사람들과 그 집합을 지칭하는 효율적 어휘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무언가 저급함을 말하려하면 대중을 비하하여만 하게 된다. 곧 대중이 저급한 것이 된다. 통속이 지닌 저급, 천속한 의미가 구별짓기의 엘리트주의적 문화관이라는 날선 비판을 지우기 위해 대중이라고 퉁치면서 비하의 목소리는 이면으로 은닉되었다. ‘대중은 문화의 주체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이때 그것은 단지 소비대상이거나 투표의 수량이라는 계산적 필요성에 근거한 가장된 권력주체로서의 기만적인 가면의 언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통속소설이라고, 통속문화라고 분별하는 것이 오히려 진솔한 표현이 아닌가. 음흉하게 대중소설이라고 그 문학적 품질의 분별을 감춘 채 독자 일반인 대중 감식안의 천박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기만적이다. 20세기를 관류하면서 통속이라는 어휘의 개념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그러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이 있는데, ‘세상에 널리 통하는이라는 뭇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의 긍정적 시선과 저속 또는 저급한의 의미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통속에 교육(계몽), 윤리, 상식, 도덕의 의미와 연결하여 사용하며 그 긍정적 용례로 해석하려는 의지와 천속(賤俗)한 것 일반이라는 부정적 용례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쳐 왔다는 사실이다.

 

통속에 대한 이러한 개념변천의 관점을 나는 거부한다. 마치 용례의 긍정과 부정의 부단한 충돌처럼 보이는 시대적 담론들은 말장난이기 십상이다. 그때그때 자신이 처한 상황 또는 입지에 따라 통속의 잣대를 돌리는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신문연재 소설을 쓰면서 통속소설 작가로 비하되어 불리던 김말봉은 통속의 가치 폄하에 다음과 같이 강력한 반론을 편다.

 

대중문학이라면 통속과 통하는 것으로 믿고, 통속이기에 멸시해도 좋다는 일부 그릇된 인식에 사로잡힌 족속이 있다. (...) 저속이 대중의 취미라고 속단하는 작가배가 있다면 이것은 대중을 모욕하는 뜻이 된다. 대중은 문자 그대로 수많은 민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모랄(morals)’ 아래서 대중이 진정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정신문화를 지향해준다면 대중문학의 사명은 수행된다 해도 좋다.” - 출처: 경향신문1958.3.5.기사 대중문화에서

 

김말봉은 이렇게 통속을 저속과 구별하며 슬며시 통속을 대중과 또한 구별해버린다. 이 글에는 통속을 저속이라 말한다면 대중의 취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윤리의식과 정신문화 지향을 앞세워 재미가 대중문학의 사명이라는 것이라는 문제적 정의가 보인다. 어떤 문화적 생산물에 통속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대중을 욕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대중 뒤에 숨어든 통속, 대중의 의미는 이렇듯 흉측스러운 전략이 있다. 자기 저급성을 은폐, 대중에 영합하여 사욕을 충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중성이라는 것의 민낯이다. 또한 윤리의식과 정신문화를 앞세워 재미를 판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김말봉의 주장에는 별개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대체 어떤 윤리이고 정신이냐는 것이다.

 


김말봉은 오늘날 TV의 막장드라마의 효시이다.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내용과 기성의 질서에의 순응이라는 규율과 상식에 봉사하는 정신이라면 그것은 매우 그럴듯한 말의 수사(修辭)로 부패한 양심을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통속은 대중과 분리하여 그 선명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문화를 대하는 소비대중(독자, 관객, 청중)의 안목을 대우하는 것이 된다. 통속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대중을 저속하다고 폄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통속의 딱지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면 대중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문화생산자 당사자가 고급과 저급을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입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비평가들이 나서야 할 때다.

 

통속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부정적 배제의 논쟁들은 모두 거기서 거기다. 시대에 따른 담론의 주체적 성질의 표현들만 달라졌을 뿐이지 그 본질은 모두 동일한 선상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여기에는 통속이 지니는 의미를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두 다른 대척의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발생한 편의주의적 해석이 있어 보인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상식의 의미는 현상을 사실 그 자체로 믿어버리는 긍정의 의식, 즉 현실 질서에 그대로 순응하며 어떤 이의도 지니지 않는 이라는 의미와 저급 저속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면적 시선에서는 충돌이지만 어휘가 내재하고 있는 함의에는 아무런 충돌도 없는 것이다. 통속은 그저 저속한 것이지, 여기에 그 어떤 시대적 담론을 끼얹어봐야 자기 이해에 터 잡은 말장난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이 통속이다. 규율 순응을 반복하는 것, 자신이 모르거나 다른 것을 배제하려는 폭력성의 다른 표현이다. 대다수 식민지민에게 자신들의 통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상식을 위해 통속강의, 통속교육을 시키면서 통속은 우리사회에 자리 잡은 언어다. 이를 뒤집어 바라보면 식민지 한국인들을 싸잡아 무지와 몽매에 안주하고 있는 저속함이라는 멸시의 의미와 더불어, 이를 적정한 앎의 궤도에 올려놓고자 하는, 즉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길들이겠다는 의도된 의미가 있다.

 

통속성은 이처럼 오만한 태도와 전체주의적 욕망이 들끓고 있다. 통속성을 답습하는 것과 통속성을 지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내란범 재판에서 윤은 최후변론에서 계엄명령은 계몽(啓蒙)령이라고 비굴한 항변을 반복했다. 누가 누군가를 대상으로 계몽하겠다는 것은 이처럼 폭력과 교만의 다른 얼굴이다. 20세기 상반기 식민지민들의 문자 해독능력과 새롭게 쏟아져 들어오는 문물에 대한 앎이 일천했던 시대와 21세기 K-Culture로 상징되고 대중지성 또는 집합지성이라 불리는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계몽, 통속성을 향한 행보는 그 무엇이든 퇴행적인 것이다.

 

개념사 연구자인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개념 자체가 정치,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개념의 잣대를 통해 인지된다.” 개념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 통속은 저급으로 분명하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에서 분명 몰아내야 할 선명한 것으로 지목되어야 한다. 또 한명의 개념사가인 레이먼드 윌리엄스도 어휘들의 의미변화 양상은 역사적이고 사회적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듯, 이제 통속은 한국사회의 변화적 관점에서 재정의 되어야 한다. 공론장에서 은폐되었지만 일상의 이해에서의 용례에 주목해 우리 문학의 수용자들인 대중의 의미를 격상시키기 위해서라도 통속은 저급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어느 평론가가 대중의 문학적 역량에 대해 불신을 보이면서 대중의 문학적 취향을 통속으로 싸잡아 단정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대중이 곧 통속이라고 여긴 것인데, 이러한 대중의 용례에서 보이듯 통속은 분별되어 지적되어야만 한다. 통속이 계속해서 대중 속에 암약하게 방치하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날뛰는 저 통속적인 것들처럼 대중을 전락시킨다. 일종의 낙인찍기라는 극약의 처방으로서 대중과 통속의 분리, 나아가 통속의 부활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통속을 주장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적 차별의지도 아니며, 문화민주주의를 역행하려는 반민주적 반동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비난 속에 내포된 은밀성과 폭력성의 은폐를 모르는 체 하려는 대중 뒤에 숨은 불순한 의지들을 봉쇄하기 위함이다. 계몽령이라는 반시대적 수작이 가능한 것도 대중이라는 언어 뒤에 숨어있는 통속이 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동질화 형성하겠다는 이 전체주의적 욕망의 싹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문화 선진국으로의 진정한 돋움을 위해서라도 통속성은 지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정적 감상주의와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문화, 통속적 취향에 입맛을 맞춘 문화는 자기 파멸적이다. 대중의 지성을 갉아먹는 암세포다. 하나의 소설이 장황한 설레발을 치도록 만들었다. 이 잡설을 쓰면서 우리의 20세기 상반기 근대문학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통속과 순수, 정통문학과 대중, 통속문학의 논의를 뜨겁게 달구었던 김기진, 안회남, 이태준 등을 읽어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언어가 시대와 상호반응 변천하는 개념사도 더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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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강용훈 교수의 통속의 계보학이 부분적 바탕지식이 되었으며, 김주혜 작가의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Beasts of a little land)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서 비롯되었으며김말봉 소설들에 대한 회의적 읽기로의 전환을 계기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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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팽나무를 통해 본 하제마을 이야기
양광희 지음 / 하움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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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할매』와 하제마을 팽나무 역사고증


향토문화와 생태계 보존을 위해 노고를 마다치 않는 분들의 발품 덕에 사라질 위기에 놓인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하제(下梯)마을 수령(樹齡) 600(과학분석 결과 수령 537±50)의 팽나무가 품고 있는 문화사적 얼을 접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이 책으로 이끈 계기는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할매의 중심 제재인 하제마을 600년 수령의 팽나무가 시리게 굽어 본 이 땅의 민초들과 자연의 인연으로 맺어진 순환의 업(,Karma)에 대한 이야기다. 옛 지도에 표기된 오늘의 하제마을을 포함하는 섬의 이름, 무의인도(無衣人島), 옷을 입은 사람이 없다는 이름을 지닌 섬, 이러한 지명은 전국에서 유일하다는 양광희 저자는 이렇게 그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온갖 경계에 접하고 있으나, 그 무엇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의도인(無衣導人)”이라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가 닿는다고. 황석영 작가의 소설 속 팽나무 할매가 그렇고, 그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다 자신의 육신을 자연에 보시하는 스님 몽각(夢覺)의 견성이 바로 그것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600년 팽나무 가을겨울 사진출처-본문 66


600년 팽나무를 통해 본 하제 마을 이야기에는 중생대 백악기 역암층으로 이루어진 섬의 지질학적 구성에서부터 섬의 수호신 역할로 추정되는 석장승, 화산의 봉수대 등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 600년 팽나무가 있는 하제마을의 사료 추적을 근간으로 하는 지명의 변천과 완전한 섬에서 제방과 간척으로 인해 육지로의 변모 과정을 담고 있으며, 조선 말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식민지 노동의 착취를 통해 일제가 벌인 대규모 간척사업과 일본 자살특공대(카미카제) 다치라이 육군비행학교 군산 분교의 비행학교 활주로로 수용되고, 1951년 미군의 활주로 연장 공사로 상제와 중제 지역이 미국 캘리포니아의 영토화된 경유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현재는 하제에서 조상을 이어가며 마을을 지켜왔던 주민들이 국가의 토지 강제수용으로 모두 쫓겨나 미군의 군사작전 지역으로 민족 문화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1998년의 600년 팽나무 주위로 마을이 형성되었던 사진과 대조적으로 이젠 마을은 철거되어 팽나무만 덩그러니 홀로 남아 지방 보호수로 가까스로 명맥을 보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팽나무의 문화재적 가치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상목으로서의 역할인 풍년을 알리는 신목(神木)이었으며, 어업을 생업으로 하던 사람들의 조업활동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 영혼을 담지하고 있었다. 소설 할매600년 수령의 팽나무 할매 옆에 그보다는 수령이 적은 또 한 그루의 팽나무를 과녁으로 삼아 일본군이 사격연습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때의 수많은 총질로 고사(枯死)했음이 고증되어 실존했던 거목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게도 된다. 일제의 식민지민을 탄압하려는 파렴치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1894년 日本國 陸地測量部 발행 朝鮮及渤海近傍:假製 東亞輿地圖출처-본문 83


팽나무의 나무 둥치를 보면 심하게 비꼬이고 깊은 주름이 잡힌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해안가에서 생장하는 팽나무의 특성상 썰물에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묶어두는 계선주(繫船主)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문화재 위원의 설명을 듣게 된다. 밧줄의 시달림으로 반복된 상처에 딱지가 아물며 수없는 아픔을 간직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이라는 말이다. 나무의 아픔이 그와 함께 명멸해갔던 이 땅의 민초들이 반복적으로 겪어내야 했던 삶의 상처의 반영처럼 여겨져 애틋함이 밀려온다.

 

옥녀봉에서 화산까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한때의 섬, 무의인도였음을 오늘날 그 흔적조차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육지로 인식된다고 한다. 인간의 인위, 그 탐욕과 폭력이 자연 만물의 삶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황폐한 욕망의 장소로 변질시키고 있다.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는 노목, 거목, 희귀목을 보호수로 지정한다는 산림법, 보존,보호,관리할 가치가 있는 동물, 식물로서 그 경관(景觀), 역사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에 문화재로 지정하게 되어있는 문화재보호법으로 하제마을과 600년 팽나무가 지켜질 수 없는 것일까?

 

나아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 보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한반도 사람들의 얼과 그네들의 영혼의 담지자로서, 또한 생태계와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나무와 마을을 우리가 지켜낼 수 없다면, 대체 국가와 역사라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작은 책자가 오늘 우리들이 망각하고 있는 인간 삶의 가장 원초적인 물음을 하게 한다. 이 책을 참조하면 황석영 작가가 소설 할매에서 독자들에게 궁극으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의 저 심연 속에 잠긴 정서를 건드리는지 체감하는 데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나아가 인간을 포함한 자연 만물인 생태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자성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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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1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1 0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글은 철학자 김동규의 저술 서양 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아를 바탕으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그 동기는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에서 시종일관 필자를 괴롭혔던 석연치 않음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소박한 이유에서 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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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melancholia), 우리는 멜랑콜리(melancholy)라는 표기를 대개 일상 언어로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서양인들에게 깊숙이 체화된 정조(情調)이기에 이와 무관한 동양인의 화법에서는 낯선 감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지역 공동체에 익숙하게 교육이나 학습으로 형성된 가치나 믿음, 정신이 내면화되어 일상성을 띤 감성을 에토스(ethos)라 하지만, 멜랑콜리아는 오래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적 감성, 즉 길들여진 감성인 에토스와 달리 그것에 저항하는 일시적, ()반복적 감성이기에 파토스(pathos)의 범주에 속하는 정념(情念)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대표작에 저항의 멜랑콜리(이하 멜랑콜리로 표기)라는 소설이 있다. 멜랑콜리에 저항, 거부의 의미가 있는데, 이중(二重)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읽히기에 저항의라는 수식어는 아마 저항으로서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문구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 대한 감상의 제목으로 실존적 불안이라고 달았던 사탄탱고가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듯한 닫힌 구조의 이야기로서 영원한 몰락의 상태를 반복하는 분노와 증오의 눈길로서 읽혔듯, 멜랑콜리는 이러한 감성에 직관적으로 닮은 이미지를 갖게 한다.(2018년 필자 본인의 리뷰 글을 참조 인용했음)


소설 멜랑콜리의 에스테르란 인물은 음악학교 학장을 은퇴하고 세상과 격리된 채 거짓된 음조에 휩쓸려 음악에 바쳤던 자신에게 자기-체벌로서 진실한 음의 조율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불협화음의 적응에 매진하는 자다. 이 인물이야말로 멜랑콜리한 서구의 인간 그 자체다. 나는 라슬로의 소설들 전반에 흐르는 이러한 정조가 왠지 거북하기만 했는데, 그네들의 멜랑콜리에 내재된 정신의 한계를 어느 만큼은 이해하여야 할 요구가 증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 꺼림칙한 반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철학자 김동규는 서양문화는 멜랑콜리라는 정조에 물들어있으며, 이 정조의 바탕 위에서 수천 년의 문화를 일구어냈다.”고 이해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구성 개체들의 일상적 삶의 성장조건이자 한계조건이고, 따라서 특정 문화가 제공하는 삶의 토양은 그 내장된 자기 폐쇄성으로 동일성을 유지하려한다. 다시 말해 멜랑콜리는 서양인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불가피한 폐쇄성 속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소속 문화의 보편성을 강변하고 정당화하는 그 한계를 모르는 감성이다. 그런데 왜 멜랑콜리한 인간들, 즉 이미 기성의 규칙과 제도, 관습에 대한 은연한 반감의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그 폐쇄성을 탈출하지 않는 것일까? 정신의학자 피터 크레이머가 수천 년의 적응 끝에 멜랑콜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어울리게 되었다.”고 기술했듯, 이 황량하고, 우수에 젖은 감각적 정서를 개체가 풍요롭고 안락하게 느끼는 본원의 감성이 되었기에 탈출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감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동규는 중요한 역사적 이해에 기초한 해석을 말하는데, 서양사회는 근본적 단절없이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사실, 서양 정신이 한 번도 타자의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멜랑콜리라는 자신들의 감성이 지닌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이 필요치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서구의 정신은 멜랑콜리한 인간을 위대한 비극의 광기 표상으로서 천재예술가의 내면의 상징으로 여기는 오랜 문학적, 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정조로서 일탈과 과잉의 슬픔을 하나의 영감에 찬 기질로 이해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울을 향해 기울어가는 멜랑콜리한 감성이란 이성이 수반되지 않을 때 광신으로, 밀교적 열광으로 바뀌기도 하여 망상에 휩싸여 질병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뤄 건강한 이성에 토대를 둔 독창적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원동력, 숭고한 존엄성의 감성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멜랑콜리는 두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멜랑콜리를 화두로 삼은 이유는 이것의 정의를 풀어놓자는 것이 아니라, 내게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지게 한 멜랑콜리의 내재된 본질에 조금이라도 근접해보려는 것이다.

 

라슬로의 작품, ‘멜랑콜리는 한 도시의 붕괴의 전조들, 그 가운데 등장하는 다분히 멜랑콜리한 인물들이 벌이는 혼돈의 상황이 마치 역사의 진실이란 돌고 도는 순환적 반복, 조금 인심을 써서 말하자면 모순을 살짝 덮어버리기 위한 변증법적 순환 고리를 맴도는 서사로 다가온다. 이 소설이 시적 감상을 자아내며, 걸출한 이야기의 맛을 선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몰입하게 하는 힘에 사로잡혔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 결국 제자리라니, 역사의 시간이 돌면서 서로 자리바꿈을 할 뿐 원의 전체 질서를 따라 단지 원주를 도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소설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세 축을 김동규는 자의식 집중과 동일화, 나르시시즘이라고 정리한다. 첫째, 자기의식이 강해 자기에게 강하게 집중하는 까닭에 어떤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을 경우 그 고통은 매우 크다. 라슬로의 작품 속 에스테르나 그의 부인 모두 이러한 자기애가 놀라울 정도로 큰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둘째, 타자를 자기와 쉽게 동일화함으로써 모순과 차이를 극도로 인정하기 어려워하며, 따라서 다름을 철저히 배제한다. 에스테르 부부가 서로 극한적으로 반목하고 혐오하는 것과 상통한다. 셋째, 타자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부터 이미 자기와 닮은 자기의 분신을 선택한다. 이러하기에 멜랑콜리한 사람은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에스테르가 또다른 형태의 멜랑콜리커인 몽상의 열정을 지닌 벌루시커의 행방을 애타게 찾는 것도 아마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멜랑콜리가 서양문화의 근본 정조, 즉 서양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 줄기라한다면, 이것의 속성을 조금은 더 파고들어가 보아야 멜랑콜리가 왜 쳇바퀴 돌 듯 한계에 갇힌 답답함, 그로인한 거부감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동규는 자기에 집착하는 서양의 언어에 우리의 언어에는 없는 재귀용법에 주목한다. 재귀(再歸; reflexive)한다는 것은 자기를 떠나서 다시 자기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자기 복귀를 함축하는 낱말이다. 이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그들에게 자기(self, selbst)’는 엄청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으로 이끈다는 의미의 절대자가 출현하고, 서양인들의 절대적으로(absolutely)라는 말은 그 자신에 따라서라는, 다시 말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따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멜랑콜리는 상대인 타자를 허락하지 않은 절대이며, 이 절대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수렴시키는 정념이다. 여기서 이질적인 것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다.

 

동일성의 논리는 이로부터 자연히 따라 나온다. 자기가 아닌 -자기들 혹은 자기와 모순되는 것 전부를 배제하는 원리이다.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아무튼 독특한 배타성을 지닌 정념이다. 동어반복적 자기 동일성의 확립이 서양 인식론의 존재론적 근거라는 말이다. 그들이 애매함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다. 선택지를 벗어난 어떤 바깥도 부정되는 것은 바로 이 서양인의 자기동일화에 바탕을 둔 인식 때문이다. 서양 인식론을 모순배제와 동일률이 지배하는 것도 결국은 멜랑콜리한 서구 특유의 정조에 연원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이 동일성의 논리에 따라 치밀하게 전개된 결과물이다. 타자가 아닌 자기 분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이 지독한 정념은 불완전한 자기를 충만하게 완성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려는, 불멸의 구원에 대한 욕망이다.

 

이 어둡고 음울하고 슬픈 정조인 멜랑콜리는 이러한 자기 한계를 지닌 한편으론 기형적 감성으로 여겨진다. 이제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가 거부하는 마음으로 독자를 괴롭힌 이유가 어느 정도 해명된다. 서구인들은 그런 문화 속에 삶이 형성되고 있기에 자신들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한다. 물론 샤르트르라는 걸출한 인물이 원제목을 맬랑콜리로 하였던 소설 구토가 이러한 정조, 있음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상에 빠져있으며, 나아가 그 허상에 빠져있음 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시대를 성찰하긴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결코 바깥 세계,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차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샤르트르는 앙투안 로캉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위치를 본의 아니게 진술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의 말처럼 자기존재가 거주하는 시대의 껍데기에 사로잡혀있음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자기 정조의 한계를 보지 못했다.

 

사실 서양인들이 내세우는 고전적 지위를 차지한 문학작품들은 예외없이 이러한 멜랑콜리 정조에 깊게 물들어 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라고 한다는 부패와 불의와 부정한 세계 인식과 질서에 저항하지만 그것은 그들 내부에서의 성찰에 그치고 만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당통의 죽음에서 프랑스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임에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던 당통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난 인류 역사 전체를 비웃지 않을 수 없어 , 세상이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모든 게 오늘과 같을 거 같아. 공연히 소란피우는 거야.”, 자신이 주도한 혁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을 통해 역사의 쓰나미에 휩쓸려버리는 부유물, 단지 저항하는 멜랑콜리커의 권태로운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저항의 멜랑콜리의 전체 줄거리에 맞춤인 문장이라 해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절망은 희망의 산물이니 희망은 실천적 목표에 대한 갈망이고, 그 목표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기에, 그 비극성을 성찰하고 또다른 희망의 목표를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게 해주지 않냐고. 아마 크러스너호르커이도 라슬로 분명 이러한 심정에서 썼을 것이다. 추악하게 권력을 차지하고 주변을, 타자를 철저히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에스테르 부인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그 비극적인 세계의 일면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관점을 주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런데, 필자를 불편하게 했던 문제는 본질적인 것, 바로 그네들을 사로잡고 있는 멜랑콜리라는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왜 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서구인의 배타적 관점, 자기애와 동일화의 관념을 독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대중에게 널리 회자된 불세출의 소설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또한 멜랑콜리에 짙게 물들어 있는 작품이다. 20세기 물질만능의 휘황찬란한 금빛 세계에 21세기 청춘들이 환호하고 있지만, 과연 보편적 정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정신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이다. 개츠비는 자신의 이름 제임스 개츠를 개명한 이름이다. 철학자 김동규도 지적하듯 개츠비는 개츠의 이상화된 자기형상화로 이미 자기도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의 이상적 이미지인 돈과 권력의 화신을 사랑하고 있음의 반증이다. 그래서 개츠비는 처절한 멜랑콜리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된다.

 

이것은 소설의 서사적 논리 형식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선택한 서양인의 오래된 정조의 발현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뼛속까지 속물인 데이지라는 인물은 돈이라는 죽은 사물과 같다. 개츠비가 꿈꾸는 진솔한 사랑은 애초에 성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같은 물신숭배는 서구인의 정조에 감염된 동양을 비롯한 세계 모든 지역에 확산된 기분 나쁜 정조에서 출현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인류 세계에 지니는 권위와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수상자의 작품들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들에게 동일하고 보편적인 감응을 주는 것은 아닐 게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인물들은 도처에 경계 지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의 접점이 없이 배격하고 분리되어 있다. 건강한 삶이란 헤아릴 수 없는 관계들 마디의 접경에서 일어난다, 타자성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릴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미약하게 벌루시커와 에스테르의 일방적인 오해로 가득한 가느다란 접점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타자에 의해 단절된다. 멜랑콜리는 자기상실을 참지 못하는 정조이다.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마디가 새롭게 맺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라슬로는 멜랑콜리의 정조를 소설의 주요 제재로 삼아 서사를 전개하지만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형식적 구조, 커다란 틀, 세계의 폐쇄적 순환구조의 틀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멜랑콜리의 긍정적 특성인 저항의 실천, 열정적인 창조로서의 영감과 같은, 천재 시인 횔덜린의 예술적 광기와는 사뭇 거리가 멀어진다. 오직 질병적, 체념적, 분열적 우수만 넘실댄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멜랑콜리아처럼 서구 문학인들의 정조는 어두운 우수의 정조를 강렬한 문학적 서사에 담아 생의 무한한 감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들의 제목이 지닌 정조의 한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지향 또는 시사하고 있는지 조금은 냉철한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만 같다. 소설 읽기에 냉철함을 제안하는 것이 뒤틀린 이해라는 지적이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폐쇄적, 배타적 정신의 산물이 아닌지, 그 어떤 변화도 기대치 않는 순응이거나 체념의 서사는 아닌지, 그래서 우리네 삶의 그 어떤 긍정적 희망의 씨앗도 남겨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물론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인간 보편의 경험인 탄생, 사랑, 죽음이라는 인생의 세 마디만큼 공유하는 보편적 정서에서 연원하는 그것들에 대한 시원적 슬픔과 우수의 감성이다. 이는 이성적 분류 체계나 논리적 접근으로 결코 잡히지 않지만 인간의 사회문화에 어떤 규정력을 발휘하는 감성으로서 현실 전복적이고 비판적 시선의 정조일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화의 정수인 예술이 멜랑콜리에 흠씬 젖어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은 배타성을, 즉 타자의 배제로 인한 창조의 불능, 정신적 불임의 사태로 여겨진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분히 은유로 기술된 시체(屍體)의 화학적 변화를 장황하게 기술한 페이지들은 제아무리 반동이 승리한듯해도 자연의 순리는 그에 저항하는 단계를 돌려 줄 것이라는 뻔한 순환구조의 답습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문학적 맛을 극대화하는 기술(technic)로서 멜랑콜리가 사용된, 동어반복의 대표적 예로 여겨진다. 미학적 성취는 있었으나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뜻도 없다.”를 다시금 반복하는 사태인 것만 같다.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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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23 0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룸을 감상할 수 있었어 좋았습니다.

비의식 2025-11-23 08:0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저항의 멜랑콜리‘는 ‘사탄탱고‘만큼 흥미롭지는 않지만, 한 세계의 몰락에 대한 전조로 그려지는 적대적 시선의 느낌, 사방에 넘쳐나는 쓰레기가 추위에 얼어붙은 전경, 고래 전시와 군중들의 기묘한 열정 등의 서사 진행이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응하는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의 이합집산의 행동들, 권력의 이동이 더없이 천박하게 그려지고 있지요. 이야기 자체로는 분명 매혹적인 작품인데요, 제겐 계속 석연치않은 거부감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에 이런 감상으로 이어졌네요. ^^

페넬로페 2025-11-23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당통의 죽음>을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1월엔 <사탄탱고>를 읽을 예정이고요. <저항의 멜랑콜리>도 읽어봐야겠어요. 이 리뷰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의식 2025-11-23 10:27   좋아요 1 | URL
오, 페넬로페님~ ‘사탄탱고‘는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제법 지나면서 제 관점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르러 의심스러움이 생겼네요. 아무튼 우리들의 감성을 휘젓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요.

잉크냄새 2025-11-23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담입니다만 멜랑꼴리는 예전 처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좀 있어 보이려 쓰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 좀 멜랑꼴리해˝라고 말이죠. 깊은 의미도 잘 모르면서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들먹이던 시절처럼 말이죠. ㅎㅎ

비의식 2025-11-23 10:23   좋아요 0 | URL
서구 정신이 우리들에게 어느 새 깊게 잠식해 들어온 것이겠지요. 회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저 수용하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한 요소들이 있어요. 김동규의 저술은 서양의 주변부에 있는 자로써 미래 철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동환, 김상봉 등이 있지요. 참고할만한 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잉크냄새님.
 

이렇게 이어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잊혀 진 삶을 살기위해 매진했던 로베르트 발저의 자취에 공감하듯 사로잡힌 읽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아니요를 발하는 필경사 바틀비와 바틀비 증후군의 연합체들, 절필의 작가들인 글쓰기를 멈춘 사람들에 이르렀다.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겠다는 은둔의 인물이 문학적 도피에 맞닿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테지만, 나는 전혀 예견치 못했다. 글쓰기를 포기하는 행태가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과 동행하는 것은 일견 상통하는 것이겠지만, 그 부정적 충동, ()에 대한 이끌림이 문학적 고뇌와 다르지 않음의 발견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스페인 작가 엔리께 빌라-마따스의 창작의 요구 앞에 무기력해진 작가들과 작품들의 파편들을 모아놓은 특이한 소설 같지 않은 소설에 이르게 된 것인데,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이고, 또한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의 다른 표현일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으며. 찾아 헤매던 주베르는 책 한 권도 쓰지 않고 살기에 아주 좋은 장소 하나를 발견해버렸다. 자신이 뿌리를 내릴 곳을 찾은 것이다. 그가 모색했던 것은 바로 모든 글쓰기의 원칙,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비춰줄 빛이었다.”

- 바틀비와 바틀비들, 엔리께 빌라 마따스, 소담출판사, 2011.11 초판, P89

 

평생 책 한 권을 쓸 준비를 하며, 그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아 헤매던 조셉 주베르라는 인물에 대한 이 이야기는 글쓰기가 대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대변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가장 평온함을 느끼는 자리(장소)를 찾아 평생을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로 지금에도 꿈꾸는 그 이상적 장소와 같이 글쓰기는 바로 자신이 뿌리 내릴 곳을 찾는 여정일 것이다. 때문에 주베르는 책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는다는 절필은 이처럼 부정성속에 치열한 생의 긍정, 열정을 내포하고 있음이다.

 

아니요를 과격하게 외치는 필경사 바틀비들,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품고 있는 아니요작가들의 선조는 단연 허먼 멜빌일 것이다. 글쓰기를 어느 날 홀연히 멈추거나, 그네들의 작품 속에 아니요, 혹은 중단과 끝을 맺지 않는 세계인 그 부정의 충동 속에서 삶을 거닐고, 퇴장하는 삶의 그 어떤 진실의 장소에 도달하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고뇌들을 본다. 문학을 그만두거나 글쓰기를 중단하는 이유는 작가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하물며, 생의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방편이야 그 수를 어찌 헤아리겠는가?

 

어떤 단일한 생과 사의 진실을 찾겠다는 허무맹랑한 좇음의 여정은 실패가 뻔한 예정된 불가능함일 것이다. 미련하게도 나는 아주 좋은 자리를 발견하는 것과 우주적 진실을 찾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일 게다. 마치 지금까지 쓰인 책을 제거해버리는 한 권의 책을 쓰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참으로 신선한 아먕처럼 말이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모리스 블랑쇼의 과도한 훈계라는 비아냥과는 다른 그 어떤 말도, 어떤 책도 세계의 총체적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의미라고 나는 이해하련다.

 

사실 우리네 삶에 그 어떤 중심이 있기나 하겠는가? 내 삶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도, 노선도 없다.”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절필했던 스페인 작가 페핀 베요(pepin bello)의 작품 없는 대표적 작가의 말처럼 글쓰기와 삶의 의미는 도저히 총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아니요의 작가를 말하면서 로베르트 발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글의 발단을 제공한 이에게 무례가 될 것 같다. 나는 낮은 영역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했듯 그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가장 평온한 상태일 수 있는 기억의 총체인 자신의 승인, 혹은 확인의 물음이 새삼 필요치 않는 그런 영역으로서 산책(遊牧)하는 삶이 필요했을 것이다.

 

재봉틀공장 노동자, 서점 직원, 은행원, 성의 집사, 실직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을 전전하며, 밤이면 바틀비가 되어 낡은 걸상에 앉아 희미한 석유 등불 밑에서 필경사일을 하는 발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타인들로부터 잊히는 것 외에는 전혀 원하는 것이 없었던, 헤어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힘으로써 문학을 포기한 작가, 나는 야망과는 무관한 미세하고 덧없는 것을 과시하는 그의 허영에 매료된다. 그는 정신병원(요양원)에 스스로 찾아 들어가 28년을 보내다 눈 쌓인 산책길에서 죽었다. 그는 삶이란 것, 글쓰기란 것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길 잃음에서 하나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그것들과 행복한 만남을 이루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길 잃음의 예술, 광기의 예술이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내 생각! 내 생각이 살게 될 집을 짓는 것이 참으로 어렵도다.”

 

사무엘 베케트도, 발저도 스스로 찾아들어간 정신요양원. 자신의 살집을 마련했기에 더는 글을 쓸 필요가 사라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횔덜린의 36년간의 칩거생활도, 휘페리온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살 집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광기였지 않았을까? ‘아니요라고 선포한, 혹은 그저 절필하고 세상으로부터 도주했던 작가들과 그리 멀지 않은 인물로 카프카는 아마도 바틀비의 적통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일요일에 조차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바틀비는 어느 단식 광대와 같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해 금식을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음식을 거부하는 인물과 닮았다. 글쓰기의 불가능성 또는 가능성은 고독과 닮아있는 듯하다. 세상이 발하는 신호들에 반항하는 그 목소리들, 고독은, 삶은 그러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절단은 현대 작가들이 겪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일관성과 총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추구는 언어의 표현 한계가 내재한 불가능성으로 침묵으로 추락과 위기의식을 강제한다. 호프만 스탈의 잘 알려진 단편 찬도스 경의 편지는 더 이상 이 세계의 표현이 언어에 의해 지칭 될 수도 통제당할 수도 없음으로 인한 존재적 조난에 대한 공포 섞인 선포였을 것이다. 이 문학적 표현의 위기는 삶의 자리에 대한 불안의 다른 형상인 것만 같다. 카프카가 주정꾼과의 대화에서 말()이 더 이상 사물을 제대로 지칭하지 않음으로 은유하듯, 우리는 삶이란 것의 본질에 대한 믿음의 위기에도 처한 것만 같다. 삶은 비밀스럽고 도피적이며, 그것은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삶이고, 그렇기에 어쩌면 더욱 내 삶인 것처럼, 절필, 글쓰기의 마비상태인 침묵은 가장 치열한 혈투이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는 가장 도덕적인 비()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적인 것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애쓰는 작가는 실패 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이야말로 새로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존재를 발견케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불가능성은 마치 고독한 산책자가 찾아 헤매는 최후의 안식처, 그 평온의 행복과 자유를 향한 길처럼 보인다. 이 말이 맞춤으로 떠오른다. 항상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것 속에서 죽음을 반복한다.”, 하나의 형용사를 찾기 위해 무한한 시간을 보내는 어느 시인처럼 절필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 구차해 보이는 이유가 감동적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타당한 이유도 만들어내지 않는 작가들이 얼마나 지천인가. 삶을 숙고하려는 반성적 인간이 날로 줄어가는 느낌이다. 갈수록 비도덕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무심히 지나가버리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망각으로부터 되찾으려는 문학의 이 치열한 모습(문학적 도피를 포함해서 말이다)들은 왜 글을 써야만 하는가에 대한 응답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절필, 무기력과 체념은 그저 상상력이 고갈되어서, 게을러서, 성취할 야망이 보이지 않아서 쓰지 않는 것과는 다른 저항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결코 체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얼마나 다양하게, 혹은 기만적으로 시간에, 자연의 흐름에 반항하는가. 글쓰기는 그 균형의 모색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요를 추구하는 어떤 작가의 소설 이야기가 있다. 그 존재하지 않는 작가는 모든 소설을 온전히 끝내지 않은,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 미완성 이야기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삶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결말을 내지 않음으로써 질식당하는 이 세계의 목소리들을 만들어 냈다는 허구의 이야기다. ‘아니요라는 이 저항의 한 마디는 발명, 창조의 외침이기도 할 것이다. 폴 발레리의 그 유명한 글쓰기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책꽂이를 창밖으로 내던진 테스트 씨는 그 덕분에 생각을 많이 한다. 많이 쓸수록 생각은 적게 할 수밖에 없음의 증언이기도 할 것이다. 비움의 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덕지덕지 눌러 붙은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야 충만해질 여유와 자유가 생긴다. ‘하지 않으렵니다라는 바틀비의 이 부정의 아니요는 순리에 대한 긍정이고, 곧 채움의 가능성일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 멋진 무()존재들의 선조인 바틀비는 하지 않으려는 것을 대차게 실행한다. 바틀비는 멜빌이 1843년 자신이 실패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을 때,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만장일치로 그가 실패했다고 규정했을 때, 그 부정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바틀비가 자신을 거부했던 세상을 거부하려는 듯한 명백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한 세계를 마주한 무기력의 반항이었다. 나는 발저가 선택한 은둔의 삶, 절필의 삶을 동경하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체념과 반항을 오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비록 언젠가는 결국 체념에 굴복하겠지만.

 

세상에 내놓고 아니요를 외친 작가로 오스카 와일드는 또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비평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고,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지적인 것이다.”라며, 생애 마지막 2년을 실제로 자신을 폐기시키듯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오랜 열망을 실현했다. 근면성은 모든 허위의 씨앗이라고까지 독설을 뱉어낸 그에게 완전한 무위(無爲)는 가장 고상한 형태였다. 그가 죽자 파리의 신문은 그의 말 몇 마디를 인용하는 부고 기사를 썼다. 나는 삶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글을 썼다.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지금은 더 이상 쓸 게 없다.”, 그가 알았다는 삶의 의미라는 것이 부재로서의 였음을 추정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삶의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태어났으니 살아지는 것이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저 그것일 뿐 아닌가? 종이가 희미하게 구기적거리는 소리를 상기시키는 웃음이었다고 카프카와 대담을 나누었던 구스타프 야누흐의 증언처럼, 그 영원한 침묵을 선고 받은 존재가 드러내는 절망의 표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글쓰기처럼 삶이란 것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문학이나 삶이나 그 어떤 의미나 본질이란 것이 존재할 증거가 없다. 그 누군가 문학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고, 항상 새롭게 발견하거나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듯, 삶의 의미란 것도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탈리아의 문학이론 교수이자 소설가인 다니엘레 델 주디체(Daniele Del Giudice)는 글쓰기의 위험성을 말하며, 글로 쓰인 작품은 위에 세워진 것이고, 하나의 텍스트는 만약, 그 텍스트가 효과적이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며,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학적 도피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 할 때 마주하게 되는 언어 표현의 불가능성이 가져오는 마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용되지 않는 것 이상은 다루지 않으려고 언어를 사용한다면 어찌 그 언어를 도덕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소설 윔블던 스타디움이 신화적인 실서증(失書症) 환자인 옛 친구들을 탐문한 것, 즉 글쓰기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글쓰기의 도덕성에 대한 웅변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세상을 향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고뇌한 것이리라,

 

또 하나 글쓰기의 마비상태에 빠진 주인공을 등장시켜 문학이라는 미명하에 심미적, 정신주의적 언어에 묶여있던 지신에 대한 고별사를 썼던 앙드레 지드로 맺어야겠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팔뤼드를 쓰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정작 팔뤼드를 쓰지 못한다. 이렇게 문학적 도피 또는 마비나 절필의 상태는 침체이거나 엉성한 침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주로의 발견이나 도약이기도 하다. 비생산적 작가의 이상을 찬양했던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도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우리 문학(한국문학)에도 과작(寡作)의 작가들, 또는 절필인가 했을 때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새로운 작품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문학의 소재와 언어 자체가 지닌 본질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곧 인간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부정적 충동에는 체념과 저항의 균형에 대한 내재적 본성을 장착하고 있는 것일 게다.

 

모든 텍스트의 본질은 바로 텍스트 자체의 본질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것을 피하고, 텍스트 자체를 확정하거나 구체화시킬 수 있는 단언을 피하는 데 있다.” 는 말처럼 삶에 그 무슨 진실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우리는 단언, 확정할 수 없다. 세계에, 우주 자연에 대해 아니요를 말함으로써 엄청나게 견고한 장벽과 마주하여 주춤거리고 당혹감에 혼란스러울지라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삶의, 글쓰기의 열정이 살아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쓰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글쓰기가 불가능한 것이라 했던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Hart Crane)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삶의 내 자리를 찾아 헤매는 불가능에 가까운 길을 걷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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