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철학자 김동규의 저술 서양 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아를 바탕으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그 동기는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에서 시종일관 필자를 괴롭혔던 석연치 않음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소박한 이유에서 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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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melancholia), 우리는 멜랑콜리(melancholy)라는 표기를 대개 일상 언어로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서양인들에게 깊숙이 체화된 정조(情調)이기에 이와 무관한 동양인의 화법에서는 낯선 감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지역 공동체에 익숙하게 교육이나 학습으로 형성된 가치나 믿음, 정신이 내면화되어 일상성을 띤 감성을 에토스(ethos)라 하지만, 멜랑콜리아는 오래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적 감성, 즉 길들여진 감성인 에토스와 달리 그것에 저항하는 일시적, ()반복적 감성이기에 파토스(pathos)의 범주에 속하는 정념(情念)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대표작에 저항의 멜랑콜리(이하 멜랑콜리로 표기)라는 소설이 있다. 멜랑콜리에 저항, 거부의 의미가 있는데, 이중(二重)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읽히기에 저항의라는 수식어는 아마 저항으로서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문구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 대한 감상의 제목으로 실존적 불안이라고 달았던 사탄탱고가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듯한 닫힌 구조의 이야기로서 영원한 몰락의 상태를 반복하는 분노와 증오의 눈길로서 읽혔듯, 멜랑콜리는 이러한 감성에 직관적으로 닮은 이미지를 갖게 한다.(2018년 필자 본인의 리뷰 글을 참조 인용했음)


소설 멜랑콜리의 에스테르란 인물은 음악학교 학장을 은퇴하고 세상과 격리된 채 거짓된 음조에 휩쓸려 음악에 바쳤던 자신에게 자기-체벌로서 진실한 음의 조율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불협화음의 적응에 매진하는 자다. 이 인물이야말로 멜랑콜리한 서구의 인간 그 자체다. 나는 라슬로의 소설들 전반에 흐르는 이러한 정조가 왠지 거북하기만 했는데, 그네들의 멜랑콜리에 내재된 정신의 한계를 어느 만큼은 이해하여야 할 요구가 증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 꺼림칙한 반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철학자 김동규는 서양문화는 멜랑콜리라는 정조에 물들어있으며, 이 정조의 바탕 위에서 수천 년의 문화를 일구어냈다.”고 이해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구성 개체들의 일상적 삶의 성장조건이자 한계조건이고, 따라서 특정 문화가 제공하는 삶의 토양은 그 내장된 자기 폐쇄성으로 동일성을 유지하려한다. 다시 말해 멜랑콜리는 서양인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불가피한 폐쇄성 속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소속 문화의 보편성을 강변하고 정당화하는 그 한계를 모르는 감성이다. 그런데 왜 멜랑콜리한 인간들, 즉 이미 기성의 규칙과 제도, 관습에 대한 은연한 반감의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그 폐쇄성을 탈출하지 않는 것일까? 정신의학자 피터 크레이머가 수천 년의 적응 끝에 멜랑콜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어울리게 되었다.”고 기술했듯, 이 황량하고, 우수에 젖은 감각적 정서를 개체가 풍요롭고 안락하게 느끼는 본원의 감성이 되었기에 탈출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감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동규는 중요한 역사적 이해에 기초한 해석을 말하는데, 서양사회는 근본적 단절없이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사실, 서양 정신이 한 번도 타자의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멜랑콜리라는 자신들의 감성이 지닌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이 필요치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서구의 정신은 멜랑콜리한 인간을 위대한 비극의 광기 표상으로서 천재예술가의 내면의 상징으로 여기는 오랜 문학적, 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정조로서 일탈과 과잉의 슬픔을 하나의 영감에 찬 기질로 이해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울을 향해 기울어가는 멜랑콜리한 감성이란 이성이 수반되지 않을 때 광신으로, 밀교적 열광으로 바뀌기도 하여 망상에 휩싸여 질병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뤄 건강한 이성에 토대를 둔 독창적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원동력, 숭고한 존엄성의 감성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멜랑콜리는 두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멜랑콜리를 화두로 삼은 이유는 이것의 정의를 풀어놓자는 것이 아니라, 내게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지게 한 멜랑콜리의 내재된 본질에 조금이라도 근접해보려는 것이다.

 

라슬로의 작품, ‘멜랑콜리는 한 도시의 붕괴의 전조들, 그 가운데 등장하는 다분히 멜랑콜리한 인물들이 벌이는 혼돈의 상황이 마치 역사의 진실이란 돌고 도는 순환적 반복, 조금 인심을 써서 말하자면 모순을 살짝 덮어버리기 위한 변증법적 순환 고리를 맴도는 서사로 다가온다. 이 소설이 시적 감상을 자아내며, 걸출한 이야기의 맛을 선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몰입하게 하는 힘에 사로잡혔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 결국 제자리라니, 역사의 시간이 돌면서 서로 자리바꿈을 할 뿐 원의 전체 질서를 따라 단지 원주를 도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소설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세 축을 김동규는 자의식 집중과 동일화, 나르시시즘이라고 정리한다. 첫째, 자기의식이 강해 자기에게 강하게 집중하는 까닭에 어떤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을 경우 그 고통은 매우 크다. 라슬로의 작품 속 에스테르나 그의 부인 모두 이러한 자기애가 놀라울 정도로 큰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둘째, 타자를 자기와 쉽게 동일화함으로써 모순과 차이를 극도로 인정하기 어려워하며, 따라서 다름을 철저히 배제한다. 에스테르 부부가 서로 극한적으로 반목하고 혐오하는 것과 상통한다. 셋째, 타자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부터 이미 자기와 닮은 자기의 분신을 선택한다. 이러하기에 멜랑콜리한 사람은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에스테르가 또다른 형태의 멜랑콜리커인 몽상의 열정을 지닌 벌루시커의 행방을 애타게 찾는 것도 아마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멜랑콜리가 서양문화의 근본 정조, 즉 서양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 줄기라한다면, 이것의 속성을 조금은 더 파고들어가 보아야 멜랑콜리가 왜 쳇바퀴 돌 듯 한계에 갇힌 답답함, 그로인한 거부감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동규는 자기에 집착하는 서양의 언어에 우리의 언어에는 없는 재귀용법에 주목한다. 재귀(再歸; reflexive)한다는 것은 자기를 떠나서 다시 자기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자기 복귀를 함축하는 낱말이다. 이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그들에게 자기(self, selbst)’는 엄청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으로 이끈다는 의미의 절대자가 출현하고, 서양인들의 절대적으로(absolutely)라는 말은 그 자신에 따라서라는, 다시 말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따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멜랑콜리는 상대인 타자를 허락하지 않은 절대이며, 이 절대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수렴시키는 정념이다. 여기서 이질적인 것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다.

 

동일성의 논리는 이로부터 자연히 따라 나온다. 자기가 아닌 -자기들 혹은 자기와 모순되는 것 전부를 배제하는 원리이다.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아무튼 독특한 배타성을 지닌 정념이다. 동어반복적 자기 동일성의 확립이 서양 인식론의 존재론적 근거라는 말이다. 그들이 애매함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다. 선택지를 벗어난 어떤 바깥도 부정되는 것은 바로 이 서양인의 자기동일화에 바탕을 둔 인식 때문이다. 서양 인식론을 모순배제와 동일률이 지배하는 것도 결국은 멜랑콜리한 서구 특유의 정조에 연원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이 동일성의 논리에 따라 치밀하게 전개된 결과물이다. 타자가 아닌 자기 분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이 지독한 정념은 불완전한 자기를 충만하게 완성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려는, 불멸의 구원에 대한 욕망이다.

 

이 어둡고 음울하고 슬픈 정조인 멜랑콜리는 이러한 자기 한계를 지닌 한편으론 기형적 감성으로 여겨진다. 이제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가 거부하는 마음으로 독자를 괴롭힌 이유가 어느 정도 해명된다. 서구인들은 그런 문화 속에 삶이 형성되고 있기에 자신들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한다. 물론 샤르트르라는 걸출한 인물이 원제목을 맬랑콜리로 하였던 소설 구토가 이러한 정조, 있음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상에 빠져있으며, 나아가 그 허상에 빠져있음 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시대를 성찰하긴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결코 바깥 세계,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차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샤르트르는 앙투안 로캉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위치를 본의 아니게 진술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의 말처럼 자기존재가 거주하는 시대의 껍데기에 사로잡혀있음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자기 정조의 한계를 보지 못했다.

 

사실 서양인들이 내세우는 고전적 지위를 차지한 문학작품들은 예외없이 이러한 멜랑콜리 정조에 깊게 물들어 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라고 한다는 부패와 불의와 부정한 세계 인식과 질서에 저항하지만 그것은 그들 내부에서의 성찰에 그치고 만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당통의 죽음에서 프랑스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임에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던 당통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난 인류 역사 전체를 비웃지 않을 수 없어 , 세상이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모든 게 오늘과 같을 거 같아. 공연히 소란피우는 거야.”, 자신이 주도한 혁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을 통해 역사의 쓰나미에 휩쓸려버리는 부유물, 단지 저항하는 멜랑콜리커의 권태로운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저항의 멜랑콜리의 전체 줄거리에 맞춤인 문장이라 해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절망은 희망의 산물이니 희망은 실천적 목표에 대한 갈망이고, 그 목표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기에, 그 비극성을 성찰하고 또다른 희망의 목표를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게 해주지 않냐고. 아마 크러스너호르커이도 라슬로 분명 이러한 심정에서 썼을 것이다. 추악하게 권력을 차지하고 주변을, 타자를 철저히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에스테르 부인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그 비극적인 세계의 일면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관점을 주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런데, 필자를 불편하게 했던 문제는 본질적인 것, 바로 그네들을 사로잡고 있는 멜랑콜리라는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왜 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서구인의 배타적 관점, 자기애와 동일화의 관념을 독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대중에게 널리 회자된 불세출의 소설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또한 멜랑콜리에 짙게 물들어 있는 작품이다. 20세기 물질만능의 휘황찬란한 금빛 세계에 21세기 청춘들이 환호하고 있지만, 과연 보편적 정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정신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이다. 개츠비는 자신의 이름 제임스 개츠를 개명한 이름이다. 철학자 김동규도 지적하듯 개츠비는 개츠의 이상화된 자기형상화로 이미 자기도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의 이상적 이미지인 돈과 권력의 화신을 사랑하고 있음의 반증이다. 그래서 개츠비는 처절한 멜랑콜리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된다.

 

이것은 소설의 서사적 논리 형식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선택한 서양인의 오래된 정조의 발현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뼛속까지 속물인 데이지라는 인물은 돈이라는 죽은 사물과 같다. 개츠비가 꿈꾸는 진솔한 사랑은 애초에 성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같은 물신숭배는 서구인의 정조에 감염된 동양을 비롯한 세계 모든 지역에 확산된 기분 나쁜 정조에서 출현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인류 세계에 지니는 권위와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수상자의 작품들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들에게 동일하고 보편적인 감응을 주는 것은 아닐 게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인물들은 도처에 경계 지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의 접점이 없이 배격하고 분리되어 있다. 건강한 삶이란 헤아릴 수 없는 관계들 마디의 접경에서 일어난다, 타자성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릴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미약하게 벌루시커와 에스테르의 일방적인 오해로 가득한 가느다란 접점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타자에 의해 단절된다. 멜랑콜리는 자기상실을 참지 못하는 정조이다.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마디가 새롭게 맺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라슬로는 멜랑콜리의 정조를 소설의 주요 제재로 삼아 서사를 전개하지만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형식적 구조, 커다란 틀, 세계의 폐쇄적 순환구조의 틀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멜랑콜리의 긍정적 특성인 저항의 실천, 열정적인 창조로서의 영감과 같은, 천재 시인 횔덜린의 예술적 광기와는 사뭇 거리가 멀어진다. 오직 질병적, 체념적, 분열적 우수만 넘실댄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멜랑콜리아처럼 서구 문학인들의 정조는 어두운 우수의 정조를 강렬한 문학적 서사에 담아 생의 무한한 감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들의 제목이 지닌 정조의 한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지향 또는 시사하고 있는지 조금은 냉철한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만 같다. 소설 읽기에 냉철함을 제안하는 것이 뒤틀린 이해라는 지적이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폐쇄적, 배타적 정신의 산물이 아닌지, 그 어떤 변화도 기대치 않는 순응이거나 체념의 서사는 아닌지, 그래서 우리네 삶의 그 어떤 긍정적 희망의 씨앗도 남겨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물론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인간 보편의 경험인 탄생, 사랑, 죽음이라는 인생의 세 마디만큼 공유하는 보편적 정서에서 연원하는 그것들에 대한 시원적 슬픔과 우수의 감성이다. 이는 이성적 분류 체계나 논리적 접근으로 결코 잡히지 않지만 인간의 사회문화에 어떤 규정력을 발휘하는 감성으로서 현실 전복적이고 비판적 시선의 정조일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화의 정수인 예술이 멜랑콜리에 흠씬 젖어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은 배타성을, 즉 타자의 배제로 인한 창조의 불능, 정신적 불임의 사태로 여겨진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분히 은유로 기술된 시체(屍體)의 화학적 변화를 장황하게 기술한 페이지들은 제아무리 반동이 승리한듯해도 자연의 순리는 그에 저항하는 단계를 돌려 줄 것이라는 뻔한 순환구조의 답습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문학적 맛을 극대화하는 기술(technic)로서 멜랑콜리가 사용된, 동어반복의 대표적 예로 여겨진다. 미학적 성취는 있었으나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뜻도 없다.”를 다시금 반복하는 사태인 것만 같다.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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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23 0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룸을 감상할 수 있었어 좋았습니다.

비의식 2025-11-23 08:0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저항의 멜랑콜리‘는 ‘사탄탱고‘만큼 흥미롭지는 않지만, 한 세계의 몰락에 대한 전조로 그려지는 적대적 시선의 느낌, 사방에 넘쳐나는 쓰레기가 추위에 얼어붙은 전경, 고래 전시와 군중들의 기묘한 열정 등의 서사 진행이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응하는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의 이합집산의 행동들, 권력의 이동이 더없이 천박하게 그려지고 있지요. 이야기 자체로는 분명 매혹적인 작품인데요, 제겐 계속 석연치않은 거부감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에 이런 감상으로 이어졌네요. ^^

페넬로페 2025-11-23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당통의 죽음>을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1월엔 <사탄탱고>를 읽을 예정이고요. <저항의 멜랑콜리>도 읽어봐야겠어요. 이 리뷰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의식 2025-11-23 10:27   좋아요 1 | URL
오, 페넬로페님~ ‘사탄탱고‘는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제법 지나면서 제 관점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르러 의심스러움이 생겼네요. 아무튼 우리들의 감성을 휘젓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요.

잉크냄새 2025-11-23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담입니다만 멜랑꼴리는 예전 처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좀 있어 보이려 쓰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 좀 멜랑꼴리해˝라고 말이죠. 깊은 의미도 잘 모르면서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들먹이던 시절처럼 말이죠. ㅎㅎ

비의식 2025-11-23 10:23   좋아요 0 | URL
서구 정신이 우리들에게 어느 새 깊게 잠식해 들어온 것이겠지요. 회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저 수용하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한 요소들이 있어요. 김동규의 저술은 서양의 주변부에 있는 자로써 미래 철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동환, 김상봉 등이 있지요. 참고할만한 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잉크냄새님.
 

이렇게 이어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잊혀 진 삶을 살기위해 매진했던 로베르트 발저의 자취에 공감하듯 사로잡힌 읽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아니요를 발하는 필경사 바틀비와 바틀비 증후군의 연합체들, 절필의 작가들인 글쓰기를 멈춘 사람들에 이르렀다.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겠다는 은둔의 인물이 문학적 도피에 맞닿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테지만, 나는 전혀 예견치 못했다. 글쓰기를 포기하는 행태가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과 동행하는 것은 일견 상통하는 것이겠지만, 그 부정적 충동, ()에 대한 이끌림이 문학적 고뇌와 다르지 않음의 발견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스페인 작가 엔리께 빌라-마따스의 창작의 요구 앞에 무기력해진 작가들과 작품들의 파편들을 모아놓은 특이한 소설 같지 않은 소설에 이르게 된 것인데,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이고, 또한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의 다른 표현일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으며. 찾아 헤매던 주베르는 책 한 권도 쓰지 않고 살기에 아주 좋은 장소 하나를 발견해버렸다. 자신이 뿌리를 내릴 곳을 찾은 것이다. 그가 모색했던 것은 바로 모든 글쓰기의 원칙,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비춰줄 빛이었다.”

- 바틀비와 바틀비들, 엔리께 빌라 마따스, 소담출판사, 2011.11 초판, P89

 

평생 책 한 권을 쓸 준비를 하며, 그 책을 쓸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을 찾아 헤매던 조셉 주베르라는 인물에 대한 이 이야기는 글쓰기가 대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대변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가장 평온함을 느끼는 자리(장소)를 찾아 평생을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로 지금에도 꿈꾸는 그 이상적 장소와 같이 글쓰기는 바로 자신이 뿌리 내릴 곳을 찾는 여정일 것이다. 때문에 주베르는 책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는다는 절필은 이처럼 부정성속에 치열한 생의 긍정, 열정을 내포하고 있음이다.

 

아니요를 과격하게 외치는 필경사 바틀비들, 세상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품고 있는 아니요작가들의 선조는 단연 허먼 멜빌일 것이다. 글쓰기를 어느 날 홀연히 멈추거나, 그네들의 작품 속에 아니요, 혹은 중단과 끝을 맺지 않는 세계인 그 부정의 충동 속에서 삶을 거닐고, 퇴장하는 삶의 그 어떤 진실의 장소에 도달하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고뇌들을 본다. 문학을 그만두거나 글쓰기를 중단하는 이유는 작가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하물며, 생의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방편이야 그 수를 어찌 헤아리겠는가?

 

어떤 단일한 생과 사의 진실을 찾겠다는 허무맹랑한 좇음의 여정은 실패가 뻔한 예정된 불가능함일 것이다. 미련하게도 나는 아주 좋은 자리를 발견하는 것과 우주적 진실을 찾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일 게다. 마치 지금까지 쓰인 책을 제거해버리는 한 권의 책을 쓰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참으로 신선한 아먕처럼 말이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모리스 블랑쇼의 과도한 훈계라는 비아냥과는 다른 그 어떤 말도, 어떤 책도 세계의 총체적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의미라고 나는 이해하련다.

 

사실 우리네 삶에 그 어떤 중심이 있기나 하겠는가? 내 삶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도, 노선도 없다.”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절필했던 스페인 작가 페핀 베요(pepin bello)의 작품 없는 대표적 작가의 말처럼 글쓰기와 삶의 의미는 도저히 총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아니요의 작가를 말하면서 로베르트 발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글의 발단을 제공한 이에게 무례가 될 것 같다. 나는 낮은 영역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했듯 그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가장 평온한 상태일 수 있는 기억의 총체인 자신의 승인, 혹은 확인의 물음이 새삼 필요치 않는 그런 영역으로서 산책(遊牧)하는 삶이 필요했을 것이다.

 

재봉틀공장 노동자, 서점 직원, 은행원, 성의 집사, 실직자를 위한 필경사 사무실을 전전하며, 밤이면 바틀비가 되어 낡은 걸상에 앉아 희미한 석유 등불 밑에서 필경사일을 하는 발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타인들로부터 잊히는 것 외에는 전혀 원하는 것이 없었던, 헤어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힘으로써 문학을 포기한 작가, 나는 야망과는 무관한 미세하고 덧없는 것을 과시하는 그의 허영에 매료된다. 그는 정신병원(요양원)에 스스로 찾아 들어가 28년을 보내다 눈 쌓인 산책길에서 죽었다. 그는 삶이란 것, 글쓰기란 것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길 잃음에서 하나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그것들과 행복한 만남을 이루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길 잃음의 예술, 광기의 예술이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내 생각! 내 생각이 살게 될 집을 짓는 것이 참으로 어렵도다.”

 

사무엘 베케트도, 발저도 스스로 찾아들어간 정신요양원. 자신의 살집을 마련했기에 더는 글을 쓸 필요가 사라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횔덜린의 36년간의 칩거생활도, 휘페리온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살 집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광기였지 않았을까? ‘아니요라고 선포한, 혹은 그저 절필하고 세상으로부터 도주했던 작가들과 그리 멀지 않은 인물로 카프카는 아마도 바틀비의 적통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일요일에 조차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바틀비는 어느 단식 광대와 같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해 금식을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음식을 거부하는 인물과 닮았다. 글쓰기의 불가능성 또는 가능성은 고독과 닮아있는 듯하다. 세상이 발하는 신호들에 반항하는 그 목소리들, 고독은, 삶은 그러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절단은 현대 작가들이 겪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일관성과 총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추구는 언어의 표현 한계가 내재한 불가능성으로 침묵으로 추락과 위기의식을 강제한다. 호프만 스탈의 잘 알려진 단편 찬도스 경의 편지는 더 이상 이 세계의 표현이 언어에 의해 지칭 될 수도 통제당할 수도 없음으로 인한 존재적 조난에 대한 공포 섞인 선포였을 것이다. 이 문학적 표현의 위기는 삶의 자리에 대한 불안의 다른 형상인 것만 같다. 카프카가 주정꾼과의 대화에서 말()이 더 이상 사물을 제대로 지칭하지 않음으로 은유하듯, 우리는 삶이란 것의 본질에 대한 믿음의 위기에도 처한 것만 같다. 삶은 비밀스럽고 도피적이며, 그것은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삶이고, 그렇기에 어쩌면 더욱 내 삶인 것처럼, 절필, 글쓰기의 마비상태인 침묵은 가장 치열한 혈투이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는 가장 도덕적인 비()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적인 것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애쓰는 작가는 실패 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이야말로 새로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존재를 발견케 하지 않겠는가? 글쓰기의 불가능성은 마치 고독한 산책자가 찾아 헤매는 최후의 안식처, 그 평온의 행복과 자유를 향한 길처럼 보인다. 이 말이 맞춤으로 떠오른다. 항상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것 속에서 죽음을 반복한다.”, 하나의 형용사를 찾기 위해 무한한 시간을 보내는 어느 시인처럼 절필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 구차해 보이는 이유가 감동적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타당한 이유도 만들어내지 않는 작가들이 얼마나 지천인가. 삶을 숙고하려는 반성적 인간이 날로 줄어가는 느낌이다. 갈수록 비도덕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무심히 지나가버리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망각으로부터 되찾으려는 문학의 이 치열한 모습(문학적 도피를 포함해서 말이다)들은 왜 글을 써야만 하는가에 대한 응답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절필, 무기력과 체념은 그저 상상력이 고갈되어서, 게을러서, 성취할 야망이 보이지 않아서 쓰지 않는 것과는 다른 저항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결코 체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얼마나 다양하게, 혹은 기만적으로 시간에, 자연의 흐름에 반항하는가. 글쓰기는 그 균형의 모색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요를 추구하는 어떤 작가의 소설 이야기가 있다. 그 존재하지 않는 작가는 모든 소설을 온전히 끝내지 않은,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 미완성 이야기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삶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결말을 내지 않음으로써 질식당하는 이 세계의 목소리들을 만들어 냈다는 허구의 이야기다. ‘아니요라는 이 저항의 한 마디는 발명, 창조의 외침이기도 할 것이다. 폴 발레리의 그 유명한 글쓰기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책꽂이를 창밖으로 내던진 테스트 씨는 그 덕분에 생각을 많이 한다. 많이 쓸수록 생각은 적게 할 수밖에 없음의 증언이기도 할 것이다. 비움의 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덕지덕지 눌러 붙은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야 충만해질 여유와 자유가 생긴다. ‘하지 않으렵니다라는 바틀비의 이 부정의 아니요는 순리에 대한 긍정이고, 곧 채움의 가능성일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 멋진 무()존재들의 선조인 바틀비는 하지 않으려는 것을 대차게 실행한다. 바틀비는 멜빌이 1843년 자신이 실패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을 때, 독자들과 비평가들이 만장일치로 그가 실패했다고 규정했을 때, 그 부정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바틀비가 자신을 거부했던 세상을 거부하려는 듯한 명백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한 세계를 마주한 무기력의 반항이었다. 나는 발저가 선택한 은둔의 삶, 절필의 삶을 동경하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체념과 반항을 오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비록 언젠가는 결국 체념에 굴복하겠지만.

 

세상에 내놓고 아니요를 외친 작가로 오스카 와일드는 또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비평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고,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지적인 것이다.”라며, 생애 마지막 2년을 실제로 자신을 폐기시키듯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오랜 열망을 실현했다. 근면성은 모든 허위의 씨앗이라고까지 독설을 뱉어낸 그에게 완전한 무위(無爲)는 가장 고상한 형태였다. 그가 죽자 파리의 신문은 그의 말 몇 마디를 인용하는 부고 기사를 썼다. 나는 삶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글을 썼다.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지금은 더 이상 쓸 게 없다.”, 그가 알았다는 삶의 의미라는 것이 부재로서의 였음을 추정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삶의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태어났으니 살아지는 것이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저 그것일 뿐 아닌가? 종이가 희미하게 구기적거리는 소리를 상기시키는 웃음이었다고 카프카와 대담을 나누었던 구스타프 야누흐의 증언처럼, 그 영원한 침묵을 선고 받은 존재가 드러내는 절망의 표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글쓰기처럼 삶이란 것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문학이나 삶이나 그 어떤 의미나 본질이란 것이 존재할 증거가 없다. 그 누군가 문학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고, 항상 새롭게 발견하거나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듯, 삶의 의미란 것도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탈리아의 문학이론 교수이자 소설가인 다니엘레 델 주디체(Daniele Del Giudice)는 글쓰기의 위험성을 말하며, 글로 쓰인 작품은 위에 세워진 것이고, 하나의 텍스트는 만약, 그 텍스트가 효과적이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며,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학적 도피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 할 때 마주하게 되는 언어 표현의 불가능성이 가져오는 마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용되지 않는 것 이상은 다루지 않으려고 언어를 사용한다면 어찌 그 언어를 도덕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소설 윔블던 스타디움이 신화적인 실서증(失書症) 환자인 옛 친구들을 탐문한 것, 즉 글쓰기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글쓰기의 도덕성에 대한 웅변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세상을 향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고뇌한 것이리라,

 

또 하나 글쓰기의 마비상태에 빠진 주인공을 등장시켜 문학이라는 미명하에 심미적, 정신주의적 언어에 묶여있던 지신에 대한 고별사를 썼던 앙드레 지드로 맺어야겠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팔뤼드를 쓰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정작 팔뤼드를 쓰지 못한다. 이렇게 문학적 도피 또는 마비나 절필의 상태는 침체이거나 엉성한 침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주로의 발견이나 도약이기도 하다. 비생산적 작가의 이상을 찬양했던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도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우리 문학(한국문학)에도 과작(寡作)의 작가들, 또는 절필인가 했을 때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새로운 작품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문학의 소재와 언어 자체가 지닌 본질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곧 인간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부정적 충동에는 체념과 저항의 균형에 대한 내재적 본성을 장착하고 있는 것일 게다.

 

모든 텍스트의 본질은 바로 텍스트 자체의 본질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것을 피하고, 텍스트 자체를 확정하거나 구체화시킬 수 있는 단언을 피하는 데 있다.” 는 말처럼 삶에 그 무슨 진실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우리는 단언, 확정할 수 없다. 세계에, 우주 자연에 대해 아니요를 말함으로써 엄청나게 견고한 장벽과 마주하여 주춤거리고 당혹감에 혼란스러울지라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삶의, 글쓰기의 열정이 살아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쓰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글쓰기가 불가능한 것이라 했던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Hart Crane)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삶의 내 자리를 찾아 헤매는 불가능에 가까운 길을 걷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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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우아한 연인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그 이름을 알린, 내게는 장소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에이모 토울스가 그의 첫 소설집으로 기다리던 독자들에게 돌아왔다, 이 컬렉션은 여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되어 그간 호흡이 제법 길었던 장편과 달리 단편소설로 작가 수련을 해왔던 그의 섬세하고 예리한 순간의 포착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서사 미학을 즐기는 기회가 된다.

 

수록된 전체 작품에 앞서 맛보기로 단편 밀조업자를 프리뷰 북을 통해 읽게 되었다. 에이모 토울스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다 모은 뒤 의식하지 못했지만 수록작품들이 낯선 사람 두 명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서 자기 삶에 나타난 새로운 사실과 직면한다는 것을문득 깨달았다고 쓰고 있다. 다시 말해 테이블에서 나눈 단 한 번의 대화로 인생이 크게 변할 때가 많다는 잠재의식 속 확신이 낳은 결과인 것 같다고 말한다.

 

밀조업자또한 한 순간의 우연한 상황, 그로인해 이어져야만 하게 된 대화가 한 인간 삶에 있어 유익한 저주였음을 감수성 높은 화자의 입을 빌려 세련된 유머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품격있게 이야기를 지펴내고 있다. 화자인 메리 하크니스는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 10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는 30대 중반의 투자은행가인 남편 토머스 하크니스(토미)와 두 아이를 둔 뉴욕에 거주하는 여인이다. 메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남편 토미를 사랑한다는 점을 이야기 서술에 앞서 밝히고 있다. 때문에 메리가 전하는 19964월의 어느 토요일에 발생했던 카네기홀에서의 사건 속 주인공인 남편 토미에 대한 섬세한 관찰자의 시선은 사랑,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으로서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어떤 비난이나 조롱에서 벗어난다.

 

젖먹이 아이들의 뒤치다꺼리에서 해방되자 토미는 부부의 저녁외출 캠페인이라는 아이디어를 꺼내들게 되고, 카네기홀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 등의 목록을 만든다. 메리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카네기홀에서 저녁 시간을 보낼 만도 했다.” 중산층 부부의 여가생활로서 감당 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는 말일게다. 조금은 시니컬한 분위기를 띤 이러한 자기 객관화 표현이 내게는 꽤 흥미롭게 여겨졌는데, 여기에 더해 하지만 가장 내 마음에 든 것은 적극적으로 나선 토미의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래, 안 될 것도 없지.’ 라고 대답했다.”는 상황 묘사들은 그 디테일이 전달하는 감성이 그대로 느껴져 재미를 배가시켰다. 아무튼 이후 메리가 묘사하는 상황들은 이러한 섬세한 순간 포착능력에 기초하고 있기에, 우리들 일상의 생생한 표정들이 담고 있을 익살맞고, 친근함이 공감력을 높여 더욱 몰입하게 된다.

 

카네기홀 공연 예약을 시도하다 기부금 2천 달러인 후원자 혜택의 유혹에 4월의 매주 토요일 밤 거장들의 연주회를 예매하게 되고, 토미와 메리 부부는 카네기홀 5열 좌석에 앉는다. 그런데 그들의 옆 좌석에 여든 살쯤의 레인코트를 입은 노인이 자리잡고, 그의 소매 끝에 곤충 더듬이처럼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토미가 속삭인다. 메리! 저 손목을 봐.” 이후로 토미는 콘서트 내내 마이크를 바라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여기서 메리가 지적하는 토미의 세 가지 재능이라는 승부욕, 예리함, 소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에 대한 감각을 빼놓으면 얘기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 아마 여기 승부욕에 필수적인 집요함을 더해야 할 것 같다. 믿을 수가 없네, 너무 뻔뻔하잖아! 카네기홀에서 콘서트를 녹음하다니.” 이때 메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토미의 반응은 모든 것을 말하는데, “토미는 충격받은 얼굴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 행동의 묘사에서 토미가 어떤 인물인지, 자기 의견에 얼마나 심취하며, 마치 사회정의를 자기 한 몸이 짊어진 것처럼 자기 생각만을 좇는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메리는 연주회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눈 내리는 숲 한 복판에 아주 정답고 매력적인 분위기와 가로등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이다. 감수성, 타자에 열려있는 정신으로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다. 토미와는 반대의 성향이랄까? 미친 듯이 재미있는 장면이 있는데, 노인의 연주회 녹음이라는 불법 행위에 대한 놀라움, 자기 윤리와 정의관에 배치되는 행위에 토미는 콘서트는 뒷전이고, 온 정신을 노인의 카세트 녹음기에 달린 마이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연신해서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중얼거린다. 믿을 수가 없네. 어이가 없어!”

 

자기 도덕성의 기준에 용납되지 않음에 참을 수 없어하는 사람들을 우리들 주변에 발견하는 일은 매우 쉬울 정도로 흔하다. 이때 뒤에 앉은 여자가 쉿 소리를 낸다. 토미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한다. 미국의 법률, 카네기홀의 예의, 모든 예술가의 지적재산권을 수호하려 애쓰는 자신이 저런 소리를듣게 된 것에 대한 충격이다. 억울함 가득한 토미의 얼굴을 상상 할 수 있게 된다. 자기 정의감에 대한 반응이 징벌로서 다가왔을 때 경악스러움이 덮쳤을 것이다. 아무튼 메리의 이 생동감 넘치는 묘사들은 상황 모두를 상상 가능하게 한다. 토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는 나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상황, 자신의 정의감이 홀대된 현실을 참아낼 수 없었던 토미는 연주회 중에 좌석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기 시작한다. 주위 좌석의 음악 애호가들이 저마다 분노와 충격을 드러내는것은 아마 당연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토미 자신이 주장하던 카네기홀의 예의는 그렇게 그 자신이 파괴한다. 사실 소설의 많은 묘사에 이러한 상황역전이 주는 웃음, 미소의 코드가 있다. 연주회장을 벗어난 토미는 안내직원에게 다짜고짜로 밀조업자를 신고하려한다고 말한다. 음반 밀조업자요!”, 안내 직원이 눈동자를 굴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지금 나한데 눈동자를 굴린 겁니까?” 또다시 토미는 충격을 받는다. 자기 정의감에 심취한 인간은 타인의 모든 행위와 언어가 자신에 호응하지 않으면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인데, 특히나 그의 학력, 직업적 신분이라는 사회 계층적 우월감에 대한 확신을 가진 토미와 같은 인물들이 으레 보이는 반응일 것이다.

 

객석에서 노인은 카네기홀 매니저의 부름에 불려나오고, 경비원의 신고를 받은 경찰까지 출동한 현장, 연주회 중간 휴식시간에 로비로 나온 메리는 이 상황을 수치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기분이 어떻든 아내로서 남편 옆에 서서 정신적으로 응원해줘야 하는 때가 간혹 있지만, 그때는 그런 때가 아니었다고, 그래서 그녀는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상황을 지켜본다. 만약 내가 프로그램을 가져왔더라면, 그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밀었을 것이다.”. 출동한 경찰관의 시선 또한 이 상황의 분위기를 더하는데, 토미를 한번 쓱 훑어보았다. 이런 주장을 내놓는 월스트리트 인간들에 대해 완벽히 안다는 뜻을 전달하려는 것 같았다.”고 메리는 쓴다.

 

불려나온 팔십의 노인, ‘아서 파인13년 동안 아내와 함께 공연을 보아왔지만, 아내가 큰 병이 들어 콘서트에 올 수 없게 되자 공연을 녹음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수치심과 연민이 교차하는 이 순간의 황망한 정경이 눈에 선하다. 경찰관이 카네기홀의 매니저 미스터 코넬을 본다. 고발하실 생각입니까? 그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끝일까? 메리가 말하는 남편 토미의 성격을 들어보자, 아무리 사소하고 짧게 오고간 대화라도 토미는 나쁜 감정이 남지 않았다는 확인을 상대에게 받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겐 상황이 종료된 것이 아니다. 토미는 사과와 설명의 요구를 위해 파인씨를 만나야 한다며 로비를 떠나지 않는다. 단순히 노인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요구할 것이란다. 지독한 자기중심적 정의관, 타인의 감정에 대한 몰감각, 무신경의 극치랄까? 이 상황에 한 마디로 어이없어, 기막혀! 하는 메리의 당시 감정은 정말 재치 넘친다. 


이미지는 테이블 포 투의 프리뷰 북 입니다.

 

그의 끈질긴 성격, 남자의 자존심이 죽음에 저항하며 보이는 곡예, 아내로서 이제는 놀라지 말아야 할 일에 여전히 놀라고 있는 나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 그녀는 잘 알고 있는 토미의 집요함이건만 다시금 놀라는 자신에게 놀라 금치 못하는 것이다. 토미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오직 자기감정의 확신만을 위한 행위는 정말 놀라운 것이다. 그런데, 이 무공감 능력, 타자의 감정에 대한 무관심은 아마 요즈음 세태에 흔히 발견되는 실제일 것이다. 폭넓게 그 세력권을 확장하는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니 말이다. 노인은 직원 출입구를 통해 다시는 카네기홀에 입장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이미 집으로 돌아갔다.

 

토미에겐 자기감정의 해소를 위한 확인이 되지 않았으니, 노인을 찾는 행위가 계속되는 것은 그에겐 당연한 일이다. 메리 역시 예감했던 일이다. 토미는 마침내 카네기홀에서 멀지 않은 공동주택에서 노인을 찾아낸다. 치밀하고 예리한 감각을 자랑하는 투자금융사 간부인 토미의 무신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인이 혼자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노인에게 손가락질해대며 분노를 터뜨린다. 당신 혼자 산다며!”, “아내가 죽은 뒤 혼자 살아요.” 노인이 죽은 아내와 함께 카네기홀을 찾아 음악 연주를 감상하던 사연을 듣기 시작한다. 감동과 수치심이 물밀듯 몰려왔을 것이다.

 

콘서트홀에서 지켜야 할 예의? 예술가의 지식재산에 대한 권리?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정작 자신은 음악이 삶의 일부가 되었던 노부부의 삶과 달리 사기꾼에 불과했음을 느끼는 것인데, 아마 소위 중산층의 문화적 자본에 대한 자부심에 도사린 과시와 허위의식의 발견이었을 것이다. 마침 아버지 파인을 찾아 온 딸 메레디스로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노인이 아내를 추억하면서 음악을 좀 듣고 싶어 한 것, 이게 어느 섬세한 분의 감수성을 건드렸거든....자기가 남보다 뛰어난 정의감을 지녔다고 생각하는...”이라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는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기 행동이 낳을 결과를 생각지 않는 부주의에 대해 혐오의 일갈을 뱉어낸다. 그동안 당신이 앉았던 그 자리는 바로 우리 어머니 자리였어!” 이 한마디 말 때문이었을까? 토미는 명치를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 몸속에 산소가 부족해서 사과조차 할 수 없는 순간에 처한다.

 

그런데 당시 자기 정의감에 몰입해 연주회 도중에 다른 청중의 감상을 방해하며 토미가 뛰쳐나갔을 그때, 메리는 거장 이설리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첼로 모음곡 1(G장조) 전주곡에서 완벽한 것, 깊이 잠들었던 영혼이 갑자기 깨어나는 승천, 비현실적 감각에 심취해 있었다. 그 감각의 묘사는 어쩌면 이 작품이 들려주려는 커다란 주제에 가깝게 여겨지는데, 크레센도( crescendo), 최고조를 향해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폭포에 덩달아 승천하는 감각, 올라가는 행위가 가능한 영역 너머로,.....희망과 포부를 넘어 모든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려 있는 기쁨의 영역으로.”라는 공유한 기쁨, 공유를 통해 더욱 풍부해진 그 기쁨에도 박수를 보내는 청중들 서로를 향한 공유의 감각을 닮아있다.

 

당신이 평생 카네기홀에 다니면 좋겠어요. 토머스 하크니스, 그리고 우리 어머니 자리에 앉을 때마다,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첼로 연주를 들을 때마다....당신에게 독선적이고 무신경한 개자식이라고 말한 일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메레디스가 저주처럼 전한 이 말은 토미라는 인간의 삶의 태도에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감수성, 공감능력, 사랑, 이 글자만 다른 동일한 감성의 능력을 잃을 때 우리는 자기 너머의 타자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설령, 법 윤리가 되었건, 예술의 보호가 되었건, 지키고자 하는 정의감이 되었건, 그것은 결국 이러한 능력의 토대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될 터이다.

 

아마 토미는 자기용서의 기나긴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어쩌면 마침내 서로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열려있는 기쁨의 영역에 도달했으리라. , 욕망과 양심, 관계의 회복을 다루며 우아함과 예리함 사이의 과감한 변주와 품격있는 도약으로서 크레센도의 거장이 연주하는 공연 같다는 이 작품에 대한 칭송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라 함에 주저치 않겠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두 도시를 무대로 펼쳐지는 일곱 편의 이 첫 소설집 테이블 포 투는 탁월한 서사 미학에 굶주린 독자들에게 이 여름 우아한 선물이 되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 본 페이퍼 글은 출판사 현대문학으로부터 에이모 토울스의 

첫 소설집 테이블 포 투(Table For Two)』의 프리뷰 북을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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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현상에 대한 사실을 자신의 앎으로 인지하고 그로인한 반응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라는 것은 정말 인간만이 지닌 기괴함이 아닐 수 없다. 여타 동물은 자신에게 위협될 만한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예외 없이 그에 따른 행동(반작용)을 취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 특히 자신이 특권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자들일수록 명백하고도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정도는 권력의 정도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것도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예외적 태도를 눈여겨 본 사람들은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오늘날 이러한 실태는 우리들의 일상적 언행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 사실에 대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라며, 마치 복잡하고 미묘한 무엇이 있어 그것들을 샅샅이 검증해야 그 명백한 사실이 확정된다는 듯 주장하며, 당면한 사실을 상대화시켜버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고 선관위 등 사법기구를 점탈하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TV화면으로 송출되었는데도 상황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라고, 문제의 본질을 모호한 상대적 사실로 전락시키고는 폭력행위를 방어행위로 둔갑시켜버린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겨왔다. 문학, 철학, 역사 등등에서 후각이 발달한 소설가, 철학자, 사가()들은 이 자명한 것을 복잡하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사람들로부터 불온하고 구린내 나는 범죄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명언이 출현했다.

 

우리는 명백한 것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이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서의 행동(조치)에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만연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무감각, 무반응, 무저항, ()행동, 나아가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옹호하거나, 둔갑한, 즉 왜곡된 사실에 동조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 자명한 사실, 혹은 범죄의 사실은 오리무중의 교착 상태에 빠지고, 방향을 상실하며 사회적 혼돈을 낳는다. 물론 이렇게 사실을 상대화하는 자들이 노리는 사태가 바로 이러한 혼란으로서의 사회적 무능력의 생산임을 말해 무엇 할까.


영화돈 룩업! Don't Look Up!에서 비지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메릴 스트립-출처 Netflix

 

아담 맥케이 감독의 2021년 블랙코미디로 범주화할 수 있는 영화 돈 룩업! Don't Look Up!은 이렇게 명백한 것을 자신들만은 회피할 수 있다고, 그 자명한 사실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인간 군상들을 묘사한다. 이것을 조금 현학적인 개념어로 비지식(non-knowledge)’이라고 부른다.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타자의 앎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칭한다. 영화에서 대통령으로 연기하는 메릴 스트립은 혜성의 궤도가 지구와 충돌하는 것임을 알았는데에도 불구하고 혜성이 지구에 떨어지면 슈퍼볼 경기는 안 열리겠네?” 라고 지구의 생명체가 모두 사라져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가히 어처구니없으며, 천연덕스러운 질문을 한다. 자신의 질문이 종말적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방송 앵커들 또한 혜성의 지구 충돌이 자신들의 세계와는 무관한 듯 웃고 떠들어댄다. 자명한 사실은 그저 자명할 뿐이다. 그 명백한 위험 앞에 누가 온전하겠는가? 영화는 허구 아니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을게다. 그렇지 않다. 불과 몇 년 전 지구촌을 온통 휩쓴 코로나19의 방역에 모든 인류가 참여해야 했음에도, 당시 영국의 총리 보리스 존슨은 그 위험이 자신에는 해당하지 않는 다고 여겼다. 결국 그는 위중한 상태에 빠져 요단강 근처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돌아왔다. 이것을 어리석음이라고 간단히 치부하면 인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을 안다고 가정(假定)된 주체로 이해하지만, 단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와 얘기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난 3년 남짓한 검찰 독재 정권에서 각종 재해가 줄줄이 발생하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그 명백한 사실, 조금 완곡하게 표현해서 예측 가능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으로 외면함으로써 재난을 고스란히 재앙으로 만드는 꼴을 보았다. 재앙이 임박하고 있음에도 시장, 도지사가 현장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리곤 재난은 으레 재앙을 몰고 오는 것이기에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대통령부터 책임 주무처 장관인 행자부 장관, 도지사. 시장, 군수, 그리고 관련 기관의 책임자들은 책임을 회피했으며, 남의 탓이고, 오히려 문제를 상대화시키고는, 야당과 비판적 언론을 향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한다며 매도하기까지 했다.

 

알지만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는 인간들은 정말 반사회적 인간들이거나, 그 사실에 대한 의미를 정작 알지 못한 인간들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순진하게만 이해하는 것도 문제인 것이, 이러한 태도들에 상대화라는 속임 술책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 개, 돼지인 시민의 안위에 관심을 갖기 싫은 것뿐이다. 때문에 이들은 재앙의 도래를 알고 있었으며, 다만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나는 전술로써 알지만 믿지 않는 척하는 술수를 사용 한 것이다. 지금 이 사회의 상부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인 법관, 검사, 각 부처의 고위관료들의 행태가 이러한 실상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자들은 자명함에다 빈번하게 모호하고 복잡성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고 상대화하고는, 이어서 그 자명함을 뒤엎어 버린다. 이 자들에게는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앎이 실효적이기 때문이다. 비지식이 기득권의 책임 회피이자, 진실의 무력화 전술인 것은 그리 새로운 인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알지만,...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말에 대해 지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다시금 기억의 상부에 떠올려 놓아야 할 것이다. 불법 계엄인 것은 알지만, 그것을 위헌적이고 불법행위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이 돈 룩업! Don't Look Up!을 관람하며 낄낄거리는 희극 장면은 과연 가관일 것이다.

 

관점을 조금 변경하여, 이 명백한 것을 보고는 우리들은 간혹 그 명백함으로 인해 소홀히 취급하곤 한다. 설마 저렇게 자명한데 거기에 무슨 사건적 진실이나 위험, 범죄가 있겠어? 라고 의심을 차단해버린다. 그런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는 부정한 짓을 하고는 그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명료하게 만들어 마치 그 사실의 명백성으로 인해 범죄적 요소가 없는 것처럼 연출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속임수요, 범죄의 단서이기 일쑤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어떤 사태를 포장하여 마치 은밀히 숨겨진 것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쓰지만, 정작 그 이면에서는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 짓거리가 무수히 벌어진다. 이 두 종류의 속임수를 이중적 신비화 전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점에서 이중적 신비화는 비지식의 행동과 그 본질이 같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할로 저택의 비극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 바로 단서 그 자체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실제 행동을 감추는 이중적 신비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로 알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속성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인데, 이 교활한 술책이 지난 3년의 검찰 독재 권력이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 추악한 방법이다. 검찰이 마약과의 전쟁을 구호로 외칠 때, 대규모 마약사범은 유유히 세관을 통과했으며, 페이퍼 컴퍼니에 국가 석유자원 시추 사업권을 불하하는 행위들이 모두 이러한 이중적 신비화의 속임수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왜 명약관화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가이다. 지금 바로 우리의 눈앞에 내란 세력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 이것들을 비호함으로써 기득권을 향유하는 세력들이 무도함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자명한 불의에 특정 지역의 군상들은 결단코 움직이지 않거나, 그 명료한 사실을 상대화, 무력화한 집단에 붙어 요지부동이다. 왜 그럴까? 그 은폐된, 속임수로 가려진 것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바로 강제된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지배하는 강제, 저항의 상대가 없는 까닭이다. 강제하는 상대가 없다고 여기기에 애초에 그들은 저항의 생각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과 다름, 타자들은 부정한 것이고, 그래서 타자는 말끔히 배제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기에 그들에게는 무조건의 긍정만이 있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흠뻑 젖어있다. 긍정성과잉은 곧 폭력의 산실이라고 슬라보예 지젝은 Freedom; A Disease Without Cure에서 역설한다. 지금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며 비지식을 과시하는 저열한 것들의 행태나 반도 동남지역 군상들의 행태가 폭력성과 혼돈의 양태를 보이는 이유이다.

 

나는 알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 비지식의 행태와 이의 유사양식인 이중 신비화의 위선이 이 사회의 정의와 도덕성, 그리고 진실을 방해하거나 후퇴시키고 있다. 이제 대선이 막바지에 들어섰다. 새로운 정상국가의 과정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철저한 대개혁, 대수술을 통해 이 사회의 단물을 70여 년 간 독식하며 건강한 시민들을 병들게 했던 암세포를 확실히 도려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손상된 마음과 신체가 다시금 활력을 되찾는 선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선거가 끝나고 환희의 마음으로 이 글을 다시 다른 마음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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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워즈워스는 시집 서곡에서 수학을 논리적 아름다움의 시()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매혹적인 힘 / 마음을 괴롭히는 추상적인 생각 중에서 / 그 심성과 함께, 그래서 혼자 번민에 휩싸여도/ 내게는 특별한 기쁨이 되네 / 높게 세워진 그 명확한 통합 / 아주 우아하게 / 독립된 세계 / 순수한 지성이 빚어낸 세계라고.

 

물론 이 서양의 시인은 그네들 고전시의 전통인 압운과 운율, 강약격 등 제약의 이면에 있는 세기와 패턴을 노래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과연 모든 문학작품들에 이러한 수학적 제약 자체가 작품의 예술성과 공존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웬걸, 정말 우아하고 빛나는 서사 문학들,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소설들이 그러한 수학적 구조를 기초로 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제약이 오히려 해당 작품들의 줄거리와 주제와 조응하며 더욱 우아하고 친밀함을 품고 있음에 조금 놀랍기도 했다. 물론 울리포(OULIPO;Ouvoir de Literature Potientiel)’로 알려진 잠재문학 작업실 정도로 해석되는 문학 그룹이 1960년대에 이미 활약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란 그야말로 겉핥기식 지식에 머물러 있었다.

 

역주행 작으로 국내에 잠깐의 선풍을 일으켰던 에이모 토올스모스크바의 신사, 최연소 부커상 수상자로 알려진 천재 작가 앨리너 캐턴루미너리스, ‘얀 마텔라이프 오브 파이는 신선한 발견이 되었다. 이들 작품이 정교한 수학적 틀에 세워져 그야말로 그 구조가 곧 작품의 주제와 긴밀하게 융합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림으로써 워즈워스의 말이 진실을 얼마만큼 함축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나만의 수용이고 취향이니 이미 사자(死者)인 워즈워스가 불쾌해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울리포의 회원인 자크 루보가 설정한 수칙이란 것이 있다. 주어진 제약 조건 내에서 쓰인 텍스트는 어떤 식으로든 그 조건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기교는 구조와 서사, 줄거리, 행위의 개념에 대한 자극제로 적극 사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커상 심사위원들은 앨리너 캐턴의 루미너리스를 눈이 부시는 작품이라며, 제멋대로 뻗어 나가지 않았음에도 광대하다.”고 평가했다. 수학적 구조라는 틀의 제약 속에서 오히려 광대했다는 말이니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에 혹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구조와 서사가 별개가 아니라 줄거리와 전개가 일맥상통하며, 구조적 질서가 곧 서사적 긴장에 연결되고, 서사의 중심이 무엇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자연스럽게 가리킨다. 작품의 각 장은 특정 개수의 단락으로 나뉘며, 장 번호와 단락 수를 더하면 모두 13이 된다. 따라서 1장은 12개 단락, 2장은 11개 단락 .....마지막 장은 오직 1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각 장은 앞 장 길이의 딱 절반 길이여서, 등비가 1/2인 즉, 1, ½, ¼, ,.....로 이어지는 등비수열 구조를 하고 있다. 더구나 이 등비수열의 합인 책의 총길이를 구하면 2L(1-1/4096)로 표현할 수 있는데, 소설 속 도난당한 금괴 4,096파운드와 일치한다. 작가는 이 독특한 안으로 파고드는 나선구조를 통해 긴장의 조절을 내재시키고, 진정한 중심이 마지막 장임을 암시한다. 에이모 토올스가 말한 것처럼 구조는 예술적 창작에 매우 중요한 것일 수 있다.....규칙 안에서 새롭고 다른 것을 발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소설의 구조도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음을 시대의 걸작을 통해 확인하는 기쁨을 만끽하게 되었다.

 

에이모 토올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었지만 나는 이 작품이 수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었다. 호텔에 종신연금형을 받고 32년 동안 갇혀 지내던 로스토프 백작의 삶의 이야기정도로 기억되지만, 그 이야기 속 32년이라는 가택연금 기간이나, 이것이 2의 거듭제곱 2과 연관되어있음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3225제곱이다. 가택연금이 시작된 1922621일로부터 소설의 주요 사건일로 반복되는 621일을 기점으로 주기가 2, 4, 8, 16년으로 길어지다 1938621일 절반지점에서 선회하여 8, 4, 2년으로 주기가 대칭으로 감소한다. 반환점을 돌자 시간을 빨리 진행시킴으로써 흥미의 이탈을 제어한다. 이 구조와 관련하여 몇 가지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들은 눈 밝은 독자들을 위해 남겨두기로 한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의 세 구조, 새라 하트, 서사의 기하학73쪽에서

 

5도살장으로 잘 알려진 커트 보니것은 그래프를 통하여 서사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아마 많은 소설작품들이 그의 세 분류에 포함될 듯하다. 그것은 사랑(행복)불행행복구조와 불행-행복-재앙-행복’, 그리고 모멸(불행)-비관적 결말(불행)’이라는 구분이다. 그는 오만과 편견》과 같은 로맨스 소설이 첫 번째 구조의 특징을 보인다고 설명하고, 두 번째는 대개의 신데렐라부류의 동화작품들이 포함된다고 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소위 부조리 작품으로 칭하는 카프카의 변신이나 카뮈의 페스트같은 작품들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럴듯한 단순 구조의 설명이어서 기억해 둘만하다.

 

이러한 소설 구조에 대한 그래프 표현은 로런스 스턴의 터무니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작품 트리스트럼 섄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탈선과 분위기 전환으로 주제가 옆길로 새버려 좌절하기 일쑤인 작품이다. 때문에 주인공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는 3권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등장한다. 그는 6권이 끝날 무렵인 40장에 이르러 1권에서 5권까지의 자신의 서사를 선 그래프로 그려놓는다. 그래프들 아래로 설명을 달아놓고 있는데, 그 유치한 변명이나 낙관적 태도는 웃음이 슬며시 비어져 나왔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아무튼 괴짜들의 그 유치찬란함은 기원이 아주 오래된 것일 게다.

 

로런스 스턴,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6-40에서

 

울리포를 대표하는 작가 조르주 페렉을 제외하고서 수학적 구조를 지닌 소설을 말한다는 것은 아무렴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인생 사용법은 이중방진, 다른 이름으로 라틴 방진구조를 하고 있다. ‘10X10’, 주인공인 괴짜 영국인 바틀부스가 100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중복 없이 다 둘러보는 데 실패하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 책은 100장이 아니라 99장에 머물고 만다. 지하실 방 하나가 빠진 것이다. 페렉은 구성 및 모든 방을 둘러보는 데 실패한 이유를 기술을 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걸작이다. 그 내용을 발설하는 것은 범죄가 될지도 몰라 여기서 기술하는 어리석음은 피하도록 하겠다. 직접 읽어보시라. 그리고 확인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바란다.

 

조르주 페렉은 특정 글자를 금지하여 텍스트를 쓰는 리포그램 소설도 발표했는데, 프랑스어에서 제일 사용빈도가 높은 ‘e'의 사용을 금지한 실종이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아주 오만하기 그지없는 예상 표절이라는 말을 아마 최초로 사용했을 것 같은데, 1939년에 발표된 어니스트 V. 라이트가 쓴 소설 개즈비Gadsby30년이나 후에 쓴 자신의 작품 실종을 예상 표절했다니 가히 하늘을 찌르는 교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는 앞서 설명한 주어진 제약의 수칙을 철저하게 따른 전범이라 할 수 있다. e의 사용 금지가 소설의 구조와 서사, 행위 개념과 밀접하고도 타당한 이유로 소설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인데, e의 부재는 정말 가슴 아픈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pere(아버지), mere(어머니), famille(가족), 자신의 이름인 Georges Perec 조차 사용할 수 없었는데, 2차 대전에 참전에서 사망한 아버지와 홀로코스트에 의해 살해된 어머니의 부재라는 통렬한 아픔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즉 실존적 공백이라는 개인적 아픔을 가리키고 있었음이다. 울리포에 뒤늦게 합류했던 이탈로 칼비노의 국내에 잘 알려진 작품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눈치 채지 못했던 구조의 발견도 흥미롭다.

 

사실 칼비노가 소설 속 쿠빌라이 칸의 입을 빌려 소설구조를 암시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구조의 설명을 아마 건성으로, 아마 소설 내용상의 어떤 상징적 의미정도로 지나쳤을 것이 분명하다.

 

나의 제국은 결정체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분자들은 완벽한 패턴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원소들이 솟구치는 화려하고 단단한 다이아몬드 모양을 이루지요.”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목차, 숫자는 도시 유형 번호

 

그래 맞다. 소설의 구조는 다이아몬드 구조를 하고 있다. 여기 발췌된 목록 사진의 형태를 보면 그것의 모양이 드러난다. 9장으로 이루어져 각 도시를 특정 유형으로 구분하고 다시 번호를 매겨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제야 아하! 하고 알아차렸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수와 장의 수를 더하면 체스판의 정사각형 개수 64가 나오고 그것에 또한 의미가 있음은 독자들의 몫이다. 소설의 8장을 읽으며 게임을 즐겨보시라. 끝으로 소설의 구조와는 조금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얀 마텔의 라이프 오브 파이, 무리수 π가 상징하는 깔끔할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의 상징은 명확한 결말을 원하는 소망을 빗겨나간다.

 

그런데, 주인공 파이 파텔은 뒤죽박죽인 내 이야기를 정확히 딱 100장으로 말해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인생에서 일을 알맞게 마무리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가 바다에 표류한 시간은 정확하게 227일이다. 이것은 22/7로 무리수 π의 근사치로 유리수다. 그는 무리수를 유리수로 만듦으로써(π≒22/7) 소망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 깜찍한 상징적 장치다.

 

무리수, 이 무한한 수를 말하면 호르헤 보르헤스의 그 유명한, 가능한 모든 책이 있는 무한수로 된 육각형의 진열실로 이루어진 우주의 도서관, 모든 방향으로 무한히 계속되는, 즉 끝에 도달하지 않고 무한히 위, 아래, 좌로, 우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함과 동시에 유한해야 하는 도서관의 이야기인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도서관의 이미지를 좀처럼 그리지 못했었다. 유한하지만 끝이 없는 입체구조, 이 모순으로 가득해 보이는 우주 도서관은 4차원 구()3차원 표면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4차원의 이미지를 좀처럼 그릴 수 없는 나는 옛날 게임기 화면, 우주로켓들이 오른 쪽으로 사라졌다 왼쪽에서 나타나는 게임 이미지를 통해 비로소 어설프게나마 근접해 이해하게 되었다. 도넛 모양의 입체 원형 구조를 상상하면 아마 비슷한 이미지가 되지 않을까?

 

서사문학에 대한 이 새로운 구조적 접근의 시도로 이루어진 작품들의 세계는 사실 무진장하다. 독자나 관객과의 쌍방향 대화를 반영하여 만들어진 소설이나 희곡들도 있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독자가 결정하게 만든 소설이나 희곡이다. 일명 극장 나무 구조라고 부른다. 많은 이야기가 별개로 작성되어야 하기에 이를 최소화하며 서사적 재미를 잃지 않게 대수적 계산에 의해 산출된 최소화된 이야기 수량에 의존한 서사구조 기법이다. 아무튼 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조금은 보다 선명하고 명쾌한 우아함이 없는 아쉬움에 씁쓸하기만 하다. 잠시 달아오른 머리를 식힐 겸 이들 소설을 다시 혹은 새롭게 펼쳐 읽으며 이 무도함의 세계를 탈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시적이어서 돌아와 울퉁불퉁, 전혀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다시 대면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  글은 런던 버크벡 칼리지 수학과 교수 새라 하트(Sarah Hart)가 쓴 Once Upon a Prime; The wondrous connections between mathematics and literature를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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