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캉스 소설 문학동네 플레이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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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활용하는 기술에서 자기가 해야 하는 것,

언제 그것을 해야 하고 얼마만큼 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는 행복하다.”

- 플라톤 법률에서

 

작가의 호흡에 한 순간에 사로잡혀 홀리게 되는 소설이다. 한 때 수학천재로 불렸지만 프랑스혁명사에 필이 박히면서 문과로 전향한, 그래서 불문학을 전공한 이로아는 학부 동료가 잘나가는 네덜란드계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FWIS에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쟁심에 허공에 펀치를 날리듯 지원했는데 합격 통지를 받는다.

 

입사 3개월 만에 한국 지사장 뤼카스 휘스먼의 개인 보조 분석가로 발탁되어 거대조직 FWIS를 위해, 휘스먼의 지도하에 수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쥐어짜내며 화려하게 경력을 이어나간다. 즉 삶의 매 순간마다 진심을 다해, 허세가 극에 달한 미치광이처럼 헌신하지만 6년차에 이른 어느 날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나고, 이제 자신으로부터 더 이상 쥐어짤 것이 없어지자 버려진 것임을 깨닫는다.

 

이로아는 프로젝트에 치여 무력감이 몰려 올 때면 사내 정신과 상담의로부터 약을 처방받아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거닐며 시간을 견뎌내 오곤 했다. 그녀는 자신이 초고연봉의 글로벌 노예로 살아왔음을 감지한다. 발칙할 정도로 독아론(獨我論)적 삶을 살아온 소위 잘 나가는 삶의 본질을 알게 된 인물은 다시금 자신이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덕질 끝에 도달한 깨달음, 자유란 없다, 원래도 없었고, 발명된 적도 없었고, ...., 자유란 완벽한 불가능성, 즉 인간은 전부 노예임을 상기한다. 그래서 독아론적인 인간, 곧 신이자 노예인 자기 삶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휘황찬란한 화려함과 고급 부대시설, 하물며 약 처방대신 대처법으로 쇼핑 중독을 처방하는 그야말로 경제 사정에서 어느 만큼 해방된 환경에 놓여있는 삶을 쫓게 된다.

 


두 백화점의 VIP고객이 된 이로아는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자 소비를 축소하는 대신 돈벌이를 확대하기로 결정하는데, 이 제약없는 사고와 행동에 미묘하게 미끄러지듯 매혹되어 코를 석자는 빠뜨리게 된다. 그녀는 세계 뉴스에 감춰진 시그널을 꿰뚫고 원유 3배 레버리지 ETF에 투자하여 자신의 증권계좌에 찍힌 102억이라는 형이상학적 숫자를 바라본다. 이미 빠져들만큼 충분히 세련된 서사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마치 이미 지나온 이야기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본격적 행보를 시작한다.

 

다 잊고 이젠 나도 나 만의 삶을 살아가야겠지

가족으로부터, 회사로부터도 벗어난....”

 

과연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자유란 걸 찾기 위해 도달 한 곳, 오직 영원한 여름의 세계”, “오직 느낄 것, 느낌만을 따르고 그것에 복종할 것을 명령하는 듯한 리조트 타운 시타 델 마레(Cita Del Mare)가 펼쳐진다. 기후변화로 열대 지역이 된 제주에 들어선 미국계 호텔 체인의 위용과 금발의 드레드 머리, 올리브 빛 상채, 오렌지색 반바지 수영복과 맨발의 백인 남자 등 과잉의 위선적 부를 전시하듯 돈(money)질을 제법 한 풍경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줄거리는 이쯤에서 멈추어야 할 것 같다. 충분히 넘쳐나는 부()가 그저 무심히 배경을 차지하는 가운데 빼어난 생김새와 옷차림의 남녀, 짐짓 예술가인 루마니아인, 우연인지 다시금 모여든 뤼카스와 전 정신과 담당의() 여인까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며 이 낯선 지대에서 펼쳐지는 자본의 제국을 꿈꾸는 인간들, 그리고 그 과잉의 쾌락을 향해 치닫는 군상들의 한 판 게임이 펼쳐진다. 아마 소설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라면 사건이라 할 이로아에게 나타난 소녀의 유령, 그리고 소녀의 목맨 죽음의 발견은 이로아 주변의 인물들과 얽히고설켜 현실인지 망상인지, 펼쳐지는 몽환적 풍경과 어울려 의심의 지대로,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 세계의 지저분한 방종의 현실로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문득 미셸 푸코의 쾌락의 도덕적 문제 설정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인간 욕망이란 본래 잠재적으로 과도한 것으로 이 힘에 어떻게 맞서고, 제어하며 적절한 관리술을 확보하느냐가 바로 도덕적 문제라 설명한 문장이다. 아마 김사과의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어떤 과잉에 대한 절제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배경들 모두,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것들을 초과하여 넘치고 있다는 인상이 주는 부도덕함이 지속하여 내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지역 공무원인 제주의 일개 국장이란 인물이 몰아대는 호화요트,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고가의 단독 콘도, 그리고 지방권력과 결탁한 거대 자본과 예술의 더러운 유착들의 이면에 가려진 악마적 욕구들이 마치 몽상처럼 흐른다. 신이 된 돈과 쾌락의 무절제함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이 소설은 지금 우리네 사회의 도덕적 문제를 보다 촉진된 지적 사고를 통해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작가는 추악한 인간들을 처치하는 데 보다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바캉스 소설이란 제목처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여름날, 아마 많은 독자들을 열광케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지만 이 작품 또한 단연 올해의 화제작으로 추천한다.

 

자연은 인간 안에다 항시 정해진 목표를 넘어서고자 하는

초과와 과도함이라는 필연적이고 위험한 힘을 심어 놓았다.

여기서 도덕적 문제는 출발한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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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쿠쿠 랜드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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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원고:

유실된 그리스 산문설화 클라우드 쿠쿠 랜드는 안토니우스 디오게네스가 하늘에 떠있는 유토피아 도시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양치기를 쓴 작품으로 집필 시기는 서기 1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 18

 

소설은 다섯 명 개개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섯 서사와 양치기 아이톤의 이상의 장소를 향한 기이한 모험 이야기인 고대 필사본 클라우드 쿠쿠 랜드가 이들 서사와 맞물려 전개되는 구성을 하고 있다. 각 서사를 이끄는 인물들 저마다의 생의 기록을 이야기하기에 어쩌면 800여 쪽으로도 모자랐을 것이다. 이 소설책이 두꺼워진 까닭일 것이다. 사실 이 분량 때문에 빠른 속도로 읽게 되었는데, 이것은 큰 실수였던 것 같다. 남은 부분이 줄어들 때 끝나지 않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급히 읽어댄 자신을 책망했으니 말이다.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항성 베타 OPh2’를 향해하는 22세기 어느 즈음인가 우주선 아르고스 호의 소녀 콘스턴스가 클라우드 쿠쿠 랜드의 원고를 읽는 장면으로 시작되지만 조금 순서를 바꿔 감상글을 열고 싶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을 앞둔 며칠의 장면 속에서 묘사되는 자수(刺繡)작업으로 노예처럼 살아가는 안나라는 인물에 내 감정을 꽤나 많이 쏟아 부었던 까닭인 것 같다. 심부름길에서 우연히 문자를 가르치는 소리에 홀리듯 다가가 안나가 듣게 되는 것은 오디세이아. 안나는 선생 리키니우스에게 자수(刺繡)공방을 위해 심부름하던 포도주를 축내면서 문자를 배운다. 그 첫 배움의 단어가 오케아노스(Ωkεανοξ). 대양(大洋)’이다.

 

리키니우스는 그 단어를 에워싸는 원을 그린 다음 그 중심을 쿡 찌른다. 여기는 알려진 세계. 그런 후 이번에 원 밖을 찌른다. 여기는 미지의 세계. (71)” , 안나는 언어의 거대하고 신비한 힘에 매료되고, 이 그 언어가 가리키고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 문자를 배우기 위해 공방의 매질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장면을 바꾸어 같은 시대를 사는 불가리아 산 속 마을에 아버지가 죽는 날 언청이로 태어난 소년 오메이르를 쫓는다. 그에게 가해진 주변의 살벌한 눈빛들을 피해 할아버지의 보호 아래 가족 사랑의 온기로 숨기듯 양육되던 소년은 그가 키우던 두 마리의 소와 함께 술탄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징발되어 전쟁의 욕망, 인간과 동물, 모든 생명체의 고통과 죽음으로 유지되는 전쟁의 실체를 목격한다. 소년이 꿈꾸던 휘황찬란한 대도시, 끝이 없어 보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성벽과 높이 솟아오른 건물들의 웅장함은 의미없음, 소년은 눈을 피해 전장으로부터 도주한다. 고향, 어머니와 누이가 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불가리아의 집으로.

 

700년 남짓의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아버지마저 여윈 채 후견자가 된 여인과 함께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소년 지노가 쌍둥이 자매인 두 사서의 사이에서 그네들이 읽어주는 오디세이아가 흐르고, 황금당나귀,...신화들이 그의 귀를 적신다. 소년은 영웅적 희생이라는 대의에 떠밀리듯 한국전에 참전하지만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영국군 포로 렉스를 만나 땅 바닥과 서리 위에 써지는 낯선 그리스 문자를 홀리듯 바라보며 사랑을 키운다. 시간은 그의 나이 여든여섯 살, 레이크 포트 공공도서관에서 하루 앞둔 클라우드 쿠쿠 랜드(구름 뻐꾸기 나라)연극 공연을 위해 다섯 명의 어린아이들과 준비하는 리허설 장면을 비춘다. 이 때 한 발의 총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고된 청소일로 아들을 보듬기 위해 애쓰는 엄마 버니와 함께 사는 자폐 증상을 지닌 소년 시모어는 할아버지가 남긴 주변에 풍부한 삼림과 자연이 있는 주택으로 인해 세상의 온갖 개발 소음을 잠시라도 피해 고통으로 절규하는 자신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탐욕이 어디 자연을 그대로 두던가? 그가 늘 찾던 트러스티프렌드(믿을 수 있는 친구), 올빼미가 더 이상은 살 수 없는 개발을 상징하는 불도저가 나타나 삼림을 갈아 없고 나무를 베어낸다.

 

에덴스 게이트 표지판이 등장하고....맞춤형 타운하우스와 별장, 최상급 택지 보장. 불도저들.....꿈꾸던 레이크포트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세요.” 소년은 자신의 은신처가 망가지는 이 개발의 소음을 참을 수 없다. 그는 폭탄과 총을 들고 에덴스 게이트와 인접한 도서관을 폭파시키기 위해 찾아든다. 사서 섀리프에게 쏜 총이 그의 어깨를 관통하여 피가 낭자하게 바닥을 적신다.

 


이제 소설의 시작 장면으로 돌아가자. 지구 시간으로 592년이 걸리는 항성 베타 OPh2로 향하는 우주선 아르고스를 통제 관리하는 인공지능 시빌이 있는 격리된 볼트원이라는 공간에 열네 살 소녀 콘스턴스가 있다. 다리를 놓아주는 세대,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존재. 후 세대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도 있도록 앞서 준비하는 세대로서, 세대를 거듭하며 폐쇄된 항해를 이어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주선내 역병이 돌고 모든 사람들이 죽은 듯하다. 방호복을 입혀 10년 치에 달하는 생존식량과 함께 볼트원으로 자신을 밀어넣던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시빌은 유일한 생존자를 지키기 위해 봉쇄된 문을 열지 않는다.

 

아빠가 들려주던 클라우드 쿠쿠 랜드의 아이톤의 우스운 여정 이야기, 자신이 무수히 반복해 들려달라 요구했기에 아빠가 하는 이야기의 다음을 말할 수 있었던 이야기의 기억들이 읽는 이의 감정을 촉촉이 적신다. 콘스턴스는 가상의 도서관을 찾아 가상의 지구인 아틀라스를 통해 아빠의 자취를 찾는다. 아빠와 엄마는 왜 우주선을 타야 했을까? 흐릿한 정경에 휘날리는 깃발을 누르자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드러난다. 거기서 아빠 책상위에 놓인 클라우드 쿠쿠 랜드를 보게 되고,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콘스턴스의 진실을 향한 집요한 인내와 용기의 과정이 소설 밖에 있는 독자를 긴장하게 한다. 제발 진실이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해줘~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안나는 폐허가 된 소()수도원에서 가져 온 필사본과 우르비노의 필경사들이 급하게 피신하며 흘리고 간 법랑위에 도시의 그림이 그려진 코담배갑을 넣은 주머니를 지니고 부서져가는 쪽배를 타고 도주한다. 파도와 바위에 떠밀려 부서진 쪽배가 도달한 곳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그녀는 서쪽으로 발걸음 향한다. 굶주린 안나의 눈앞에 나타난 주인 없이 구워지고 있는 새를 덥석 입에 물지만 둔기가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고 의식을 잃는다. 도망 병사인 오메이르와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난다. 둘은 오메이르의 여정에 동행한다.

 

가는 길에 의심을 피하듯 안나는 포로, 오메이르는 의기양양하게 개선하는 점령군의 외향을 하면서, 오메이르는 안나가 꼭 껴안고 있는 꾸러미의 신비로움을 지켜주고 싶어한다. 고향 마을에 다다랐을 때 그는 커다란 나무에 파인 구멍에 그것을 숨겨두고 안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안나는 그것이 안전함을 안다. 문자의 마법에 대한 미신이 사람들을 어떻게 폭력화시키는지를. 안나는 오메이르의 아내가 되어 아이들을 낳는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막내 아이가 고열로 시달릴 때 오메이르는 비를 맞으며 꾸러미를 안나에게 내민다.

 

안나는 필사본을 꺼내 아이톤의 모험 이야기를 낯선 발음으로 읽는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병들었던 아이가 열이 가라앉아 맑은 미소를 짓는다. 이 행위는 마법처럼 반복되고 아이들과 부부의 행복은 가이없이 흐르지만 안나는 쉰 넷의 나이로 “5, 한 해의 가장 화창한 날, 외양간 옆 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세 아들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죽는다.” 이 죽음의 장면도 울컥하는 물살이 몰려들게 하지만, 죽은 아내가 간직하던 코담배갑에 그려진 도시그림에 의존해 꾸러미의 필사본을 들고 우르비노로 생의 마지막 걸음을 걷는 오메이르의 여정은 왈칵 눈물이 흐르게 한다. 이번 생이 다하면 또 다른 생이 있어 안나가 신의 날개 밑에서 자기를 기다려 주기를 기도한다.”

 

세상의 무수한 손가락질과 폭력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 언니 마리아의 죽음에 죄책감을 지니고 천애의 고아로 평화로운 삶을 갈망했던 안나의 이야기가 양치기 아이톤의 원치 않은 변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세상까지 주저앉지 않고 찾아가려는 충동의 이야기와 맞물려 어떤 시원(始原)의 감성을 건드린다. 깊은 지혜 속에 깊은 슬픔이 있고, 무지 속에 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마침내 깨달음에 이른 아이톤의 이 발설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다가와 내 삶의 언어로 자리 잡는다.

 

이렇게 다섯 명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페아, 사랑하는 이들을 상실한 아이들, 언청이와 같은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이라는 여느 아이들이 겪지 않는 폭력적인 고통을 견뎌야 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소설의 서사 축인 필사본 클라우드 쿠쿠 랜드의 멍청이, 바보, 미친짓을 하는 주인공 아이톤과 다르지 않다. 소설 속에는 이 원고가 어떤 경위로 콘스탄티노플 수도원 도서관에서 우르비노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소설을 끝까지 읽은 우리는 안다. 그것은 용기와 인내, 사랑과 헌신의 걸음들이었다는 것을.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관문으로서의 책이 지닌 필연적 귀결이었음을.

 

소설은 생태계 자연, 지구라는 행성을 파괴하며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으며,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도 건네지 못하는 전쟁의 폭력성, 인간의 다름에 대한 끈질긴 배제와 격리의 이기적 잔혹성, 그리고 이 모든 것, 추하고 더럽고 흉측한 것들을 지워 은폐, 포장하는 기만의 비판이 배경처럼 흐르며, 멸균 처리되어 미화된 이미지의 껍질을 벗겨 애초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배경 서사에도 불구하고 단연 읽는 이의 감성을 휘젓는 것은 책과 이야기가 발하는 지성의 힘이다. 도서관 사서들이 세상의 고통으로 영혼을 잃어가는 아이에게 그 덫을 잠시나마 벗어나도록 읽어주는 한 구절의 책, 사랑하는 이들에 다가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로서의 책, 현실의 삶 너머에 또 다른 가능성의 존재를 암시하는 가르침의 책, 하나의 씨앗 안에 황야가 통째로 접혀있듯 세상의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책의 이야기가 홍수처럼 지면을 적시고 있다.

 

그리고 인간 기억의 안식처로서 영혼이 먼 길을 떠난 후에도 그 기억을 시간의 공격 속에서도 살아남아 후세에 전달하는 그 숭고한 힘, 그러함에도 얼마나 싑사리 이러한 인간 열의가 손상되고 사라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 속에서 절로 체득케 된다. 분명 감동적인 책의 헌사이지만 이 소설은 분명 이 행성의 모든 인간과 시스템이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우치게 한다. 아마 소설 속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소녀 안나가 축축한 골방에 앉아 말도 안 되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세의 정원에서 천사들이 불러주는 찬송가를 듣고 있는 그 느낌처럼 어쩌면 동일한 감성에 젖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한 권 한권이 또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들어가는 우리네 앞에 창창한 삶을 펼쳐보이는 문이라 했던가? 이 문을 열어보라, 아마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얼굴이 여기에 있음을 보게 되리라.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 깨우친 자는 오직 한 가지만 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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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 출간 400주년 기념 에디션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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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고리대금업자, 식인종으로 설정하면서 편견을 가중시킨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된 동기가 있다. 그것은 인종, 자신과 다름이라는 타자성을 향해 내뿜는 악의, 서구 기독교 문명에 내재한 인간의 몸에 대한 끊임없는 분리와 차별이 어떻게 도시의 불안에 표상되었는지를 과학과 건축과 회화예술, 문학의 지대를 넘나들며 해박하게 인간의 도시 드라마 역사를 펼친 위대한 도시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걸작 살과 돌; Flesh and Stone, ‘베네치아 유대인 게토라는 글에서 비롯되었다.

 

희곡 베니스의 상인16세기 베네치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이 공간과 시간적 배경이 중요한 까닭은 주요 등장인물인 유대인 샤일록과 그의 상대역인 안토니오와 바사니오, 포셔, 살라리노 등 베네치아 기독교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정체성의 이해를 위한 필수의 선()지식이기 때문이다. 15세기 말, 16세기 초는 선진 문명인 동방으로부터의 교역거점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베네치아가 에스파냐를 비롯한 포르투갈 등이 새로 개발한 교역로로 인해 쇠퇴가 시작되던 시기이며, 더구나 1509614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한 아냐델로 패전으로 군사적, 경제적 손상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네치아 기독교인들은 참담한 패배감과 소실의 원인을 돌릴 대상을 찾는다. 즉 도덕적 타락의 상태가 야기한 것이며, 이는 불순한, 육체를 타락시키는 유대인의 악이 된다. 유대인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걷어내면 기독교인의 순수함이 평화와 품위로 자신들의 도시에 돌아 올 것이라 희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게토, 즉 이탈리아어 주물공장을 뜻하는 제타레(gettare)에서 유래된 유대인 격리구역을 뜻하는 명사가 탄생한다. 게토 누오보, 게토 베키오 등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었고 건물은 중심을 비운 채 경계를 따라 벽을 세우고 오직 두 개의 다리로만 베네치아의 다른 영역으로 연결되는 봉쇄된 유대인 거주 구역을 만들어 낸다.

 

이 다리 중 오늘날에도 유명한 관광 명소인 리알토 다리다. 희곡에서도 바사니오와 안토니오가 샤일록으로부터 석 달간 삼천 다카트를 빌리는 장소로 등장한다. 즉 금융과 상인, 교역 중개상들이 거래하던 상업관문 역할을 하던 공간이다. 이것은 도개교(跳開橋)로 다리를 들어 올리면 게토를 바로 차단하는 기능을 하였다. 거래를 위해 낮에는 베네치아 기독교인과 뒤섞일 수 있었지만 저녁에는 여지없이 자신들의 게토로 돌아가 격리된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이것은 야릇한 결과를 낳는데, 유대인들은 이렇게 자신들만의 공간에 모이게 됨으로써 유대인의 연대를 강화하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소수의 고립으로 다수의 순수함이 보장될 것이라는 베네치아인들의 물의 지리를 이용한 분열의 욕망이 무엇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한 진실의 한 면과 마주하게 된다.

 

반면에 이 세계의 주류 대중인 베네치아 기독교인들은 격리된 유대인의 삶에 대해 유혹과 혐오의 양가감정에 시달리며 수수께끼를 키운다. 물론 이 상상력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대화된 부정적 감정이 되어 유럽 최대의 집단 학살이란 역사를 남긴다. 자신들의 사회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격리하고는 그 폐쇄된 영역에 범죄와 우상숭배로 곪아터진 죄악의 지대로 상상해 내는 것이다. 이것을 세넷은 억압에 의해 부여된 집단정체성은 억압자의 손에 달려 있다...,이방인이란 언제나 풍경 속의 비현실적인 인간임을 의미한다.’라고 단순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당대 베네치아의 이러한 억압의 지리(地理), 정체성의 지리를 이해하게 되면 샤일록은 단순히 탐욕의 화신으로 읽을 수 없게 되고, 그를 패배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하는 포셔의 판결이라는 것은 아무런 도덕적 해법도 될 수 없는, 단지 법의 언어를 이용한 억지의 천박한 잔꾀에 불과함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많은 셰익스피어 비평가들이 이미 이 해결을 변변치 않은 대단원이라고 지적하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풍속희극은 정말 하찮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서구 기독교인들의 사회가 이방인에 대해 어떤 상상과 혐오의 저주를 씌우곤 했는지를 당대 주류의 언어로 듣게 된다는 것, 그리고 샤일록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 육체의 보편적 존엄성을 주장하는 장면처럼, 한편으로는 이러한 유대인을 동류의 인간이 아닌 동물과 질병, 악의 화신으로 멸시하면서도 돈이라는 경제의 주체인 유대인으로부터 그 돈을 가져가기위해 저자세의 비굴한 몸짓을 하는 기독교인들의 저열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은 일종의 자기 성찰로서 조롱이요, 괜찮은 희극이 된다.

 

여기서 하나의 클리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지극히 자기 확신이 없는 사회는 저항할 힘이 부족하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베네치아 기독교인 공동체의 하찮음, 그 무력함의 세계가 빚어내는 불순함만이 내게는 분명하게 보이는 작품이었다고 하겠다.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친구인 살라리노가 샤일록을 향해 편견으로 똘똘 뭉쳐진 비하와 비난을 하자 샤일록이 항변하는 3157절에서 70절을 채우는 문장은 어쩌면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유대인은 눈 없어요? 유대인은 손도 기관도 신체도 감각도 감정도 정열도 없냐고요? 기독교인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무기로 상처를 입으며,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방법으로 치유되며, 여름과 겨울에도 같이 덥고 같이 춥지 않느냐고요? 당신들이 우리를 찌르면 피 안나요? 간지럼을 태우면 안 웃어요? 독약을 먹이면 안 죽어요? ...당신들이 가르쳐준 비열한 짓을 난 실행할 겁니다.” - 3157~70

 

 

샤일록이 삼천 다카트에 대한 배상으로 계약서에 정해놓은 안토니오의 살 1 파운드를 고수하는 것은 자비를 요구하는 공작에 대해 대답하지 않겠다는 답변에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감정의 주인인 정서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분에 따라서 요동친다는 것, 끊임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멸시와 혐오와 증오, 폭력을 감수하여야 했던 유대인 샤일록의 분노는 결코 탐욕으로 간단히 치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답변될 수 없는 것이며, 정서의 문제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400주년 기념 에디션의 말미에 역자(譯者)슬기로운 포셔라는 제하의 해설을 붙이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해석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법학자로 변장하여 안토니오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내는 포셔의 계약 해석은 물론, 샤일록의 전()재산의 몰수는 물론 그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대목과 이에 환호하는 베네치아 기독교인들의 천박함, 악의만을 발견하게 된다.

 

대체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우정으로부터 자신의 연인 바사니오의 사랑을 차지한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슬기롭다는 것인지? 다시 말하거니와 이 풍속희극은 비록 샤일록의 정당한 분노와 혐오를 조롱하고 베네치아 기독교인들의 승리로, 그들의 희희낙락하는 행복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셰익스피어는 서구 기독교인들 세계의 하찮음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에서 망설였음을 읽게 된다. 아마 이런 까닭에 이 작품이 지닌 비극성이 희극의 사이에서 애매하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동류의 인간을 타자화하는 것, 타자와 뒤섞일 때 자신의 영역이 무너질 것이라 여기는 권력이나 집단의 두려움은 항시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에 비롯되고, 이를 위장하기 위해 폭력을 도구로 휘두르곤 한다. 샤일록의 고리대금업은 당대 프랑스의 일반금리보다 낮았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라 하고 있다. 유대인의 부를 활용하면서도 여기에 혐오의 언어를 덧씌우는 그 행위 자체가 자신들의 취약성, 천박성인 것을 셰익스피어는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베네치아의 도덕주의자로 자처하던 인간들, 그네들의 사회는 관능과 음란성의 쾌락도시로 이미지를 떨치고 있었다. 15011031, 발렌티노 공작이 주최한 섹스파티에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참석하여 50명의 고급 매춘부와 뒤엉켜 놀았다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다. 매독이 창궐하자 유대인에게 질병의 책임을 씌우는 기독교인들의 몰염치와 패악질은 동서를 막론하고 오늘에도 유형을 달리하며 세대를 이어오며 전해지고 있다. 이 타고난 분열의 욕망, 그리고 억압의 지리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하찮은 베네치아 기독교인 등장인물들 때문에 읽을 이유가 되는 작품이라면 궤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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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3 소설 보다
공현진.김기태.하가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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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계절마다 찾아오는 한국 문학을 떠받칠 신예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를 기다리는 것이 내겐 습관처럼 되었다. 나는 매번 세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하려 하고, 그 작가를 마음속에서 응원하곤 한다. 이번 ‘2023 여름편에서도 한 분을 고이 새겨둔다.

 

세상이, 그리고 사람들이 묘하게도 설정하는 기준, 모호하기 그지없는 표준적 양태라는 정상성, 이를테면 그만하면 됐어하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미묘한 감각에 물음을 던지는 공현진 작가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는 시니컬한 제목의 소설을 시작으로, 늘어난 미디어 채널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전파를 장악한 짝짓기 프로그램을 제재로 한껏 통속성으로 호흡하고 있는 김기태 작가의 롤링 썬더 러브, 마지막으론 공간적 디테일인 구조, 전반적인 톤/색체/분위기 등을 상상하며 글을 쓴다.”는 하가람 작가의 도시 울산을 배경으로 한 재와 그들의 밤, 이렇게 세 편이 수록되어있다. (가나다 이 수록순서의 편집 규칙인 모양이다.)

 

(1) 김기태 작가의 롤링 썬더 러브로 시작해야겠다. 소설은 나 조맹희, 37세 독신. 한 손에는 총, 한 손에는 장미를 들고...”라고 자신을 설명하며, 이성에 대한 적대와 환대의 상징을 양손에 쥔 채 세상을 가늠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흔해빠진 가십거리를 양산하는 짝짓기 쇼 <솔로 지옥>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신청한 여성의 이야기다. 세상 평(), 주변의 시선에서 풀려나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출연 남성들에게는 관심을 등지고 자신을 담당하는 PD에 눈독을 들이는 여성, 나는 이 인물을 따라가며 그저 세태의 한 양상만을 읽고 싶어졌다. 문학의 소명이란 무엇일까?를 다시금 생각하는.

 


(2) 아마 내게 생각이란 걸 촉구한 작품은 공현진 작가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 할 수 있는데, 소위 적당하고 당연한 기준이라는 사고와 행동의 그러해야 함이라는 기묘한 모호성에 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두 인물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 묘사되는 희주와 주호는 표현된 결과는 닮았지만 당연한 기준에 대한 인식은 존재와 부재처럼 양 극단에 있다. 성인기초 수영반에 등록하고 수영을 배우지만 두 사람은 늘 잘 못 된 동작의 예시로 뽑힌다.

 

두 사람이 물에 뜨고 추진력을 얻기 위해 물장구치는 방법을 좀처럼 익히지 못하는데, 희주는 힘을 빼야하지만...그렇다고 힘을 다 빼면 안 되고...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와 같이 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는 사람이라면, 주호는 자신이 지금 힘을 주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소설에는 두 개의 커다란 테마가 연결되어 오늘 우리네들 각자가 지닌 적당하고 당연한 기준이 동료 인간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한계, 생태계에 대한 자기 책임의 한계 등에서 대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생각토록 한다.

 

사출성형기에 끼어 죽은 동료에 대한 애도를 그만하면 됐잖아. 이제 그만하고 나와. 더는 무리야.”처럼, 정해진 기간의 기준이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들의 사회적 책임의 한계란 어디까지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꿀벌이 사라지면 사슬처럼 연결된 생태계의 연속적 파괴, 마침내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행성이 됨을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교사에게 용납되지 못하는 것일까? 작가가 묘사해 내는 두 인물에 심취케 하는, 놀라운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서사적 재미를 끝까지 놓지 않으면서 사유의 끈을 강력하게 견인하는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3) 하가람 작가의 재와 그들의 밤은 울산이라는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공간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분위기, 고유한 정서를 느끼게 하듯, 그렇게 세밀화를 보듯 한 장면 한 장면에 그려진 현상들의 의미를 씹어보는 맛이 있는 그런 소설이라 할 것이다. 고향 울산의 집으로 향할 때 자신이 20년간 살았던 집(아파트 한울) 앞 산불의 영상,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묘사되는 산에서 시작된 불길이 한울을 집어삼켜...까맣게 재가 되어 사라지기를 바라는 화자의 바람처럼 한 문장도 버릴 것 없는 촘촘하게 의미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들 신예의 작품과의 대면을 통해 새롭게 응원하는 작가를 마음에 품게 되는 것은 독서가에게 하나의 즐거움이다. 가을에는 어떤 작가의 소설이 인간 세상의 비의(秘意)를 안고 다가올지 벌써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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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유서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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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죽음, ‘가 아닌 죽음을 지켜보아야 할 때마다 항상 분노가 치민다. 언젠가 내게도 죽음이 찾아들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문득 그것이 찾아왔을 때, 세상의 모든 것과 연()을 끊어야 함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함을 알 때, 한 인간의 고뇌가 번개처럼 내 신경계로 파고들어 전율을 일으키며 슬픔에 빠지게 한다.

 

이 소설은 철학적 사색이 빼곡하게 스며있는 소피의 세계작가인 요슈타인 가아더의 짧지만 두꺼운 사유의 기록이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처럼 두 번은 읽어야 하기에 170여 쪽의 작품은 340여 쪽의 이야기가 되는 까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이라는 의지가 사용되는 근육의 점진적 작동 불능상태로 생명을 잃는 불치병의 진단을 받은 교사 알버트의 이틀에 걸친 치열한 고뇌가 흐른다.

 

알버트는 아내 에이린과 사랑을 맺었던 37년 전 우연히 찾아들게 되었던, ‘밤의 짙은 눈동자를 닮은 호수가 있는 숲속 오두막을 찾아간다. 그리곤 오두막 주인인 농부가 내놓은 오두막을 사게 되어 두 사람의 동화속의 오두막이 되고 아들과 며느리, 손녀가 찾는 가족 공동의 장소에 이르게 된 사연이 나지막하게 회상된다.

 

인간의 삶이란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

결국은 어두운 밤이 주인공을 덮치는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 75

 

그는 이미 왼 손의 근육이 경화되어 사용이 불가능해지고 곧이어 오른 쪽 손도, 나아가 신체의 모든 근육들, 호흡조차 어려워지는 시간을 생각한다. 더 늦기 전에 가족들이 몇 달에 걸쳐 내가 겪을 불명예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함께 경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오두막의 가족 방명록에 밤의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사용할 수 있는 오른 손이 굳기 전에.

 


유서의 이야기들은 에이린과 첫 마주침에서 끌림과 그리고 사랑의 기억들, 아들 크리스티안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 세 가족이 오두막에서 맞게 될 설렘의 기쁨들, 그리곤 손녀 사라가 남긴 백조의 그림들, 아들과 손녀 모두와 드넓은 우주의 생명체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들, 아내 에이린과 만나기 전의 연인이었던 이젠 가족 주치의인 마리안네와의 사랑의 이야기들이 순수하게 흐른다. 작가는 알버트의 자살 결심과 관련하여 이들 과거의 기억들, ‘당신과 너,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삶의 애틋함을 말하려 한 것일까?

 

그에게 시한부 삶의 선고를 내렸던 마리안네로부터 전화가 오지만 받지 않는다. 그리곤 힘겨운 고립 상태에 빠져있을 알버트에게 살아있음의 신호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따뜻한 문자가 도착한다. 이어 멜버른에 생물학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있는 아내 에이린으로부터 사랑하는 알버트!’라로 시작되는 문자가 도착한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의 따스한 마음들이 그의 곁에 있다. 그의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깊은 좌절과 비애에 휩싸여 있는 존재, 그는 극도의 감상적 형태로 변질된 존재이다. 누군들 이를 피할 수 있을까?

 

차가운 얼음장 같은 호수, 그는 나룻배를 호수의 중간으로 몰고 나간다. 자갈과 쇠못을 허리에 가득 담은 채. 그러나 그는 이른 새벽 자신이 오두막의 2층 침실에 있음을 깨닫는다. 꿈이었나? 현실이었나? 무엇이 그를 자살에서 다시 살아있기를 요구했을까? 그에겐 새로운 가족을 세상에 내놓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해야 할 이 남아있는 사람인 것이다. 나의 존재적 정체성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죽음의 실행을 막아선 것일까? 소설에는 그의 우주론적 사색과 생명체의 존귀함에 대한 사유가 흐르지만 이것이 곧 결행을 중지시킨 요인은 아닐 것이다.

 

몇 달이나 작별을 준비한다는 것은 길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저 그 시간이 더 길어지지 않기 만을 바랄 뿐...

그 시간 동안 가족들에게 큰 짐이 되지 않기 만을 바란다.”  - 173

 

알버트는 자신의 죽음이 사랑하는 이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죽음의 주체인 의 생각은 어쩌면 이기적이라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감성의 충격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였던 것 같다. 다만 길지 않게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 그가   당신, 라는 존재를 만들었기에 그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운명의 몫에 대한 이해였으리라.

 

나라면 이러한 시한부의 삶, 사랑하는 이들에게 수고로움을 불가피하게 초래하게 될,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가족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떤 결심을 할 수 있을까? 영국의 형이상학 시인 존 던(John Donne;1572 ~ 1631)’의 소네트 한 구절처럼 인간은 외딴 섬이 될 수 없다. 개개인의 인간은 대륙의 일부이자.....”라는 그 끈끈한 생의 유대 때문일까? <Time to say goodbye>로 알려진 이탈리아 팝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르는 <함께 떠나요; Con te partirò>본 적도 산 적도 없는 곳으로 같이 떠나자는 죽은 이를 향한 애절한 이별의 사랑 노래가 떠오른다. 이 이야기의 결정은 독자의 몫이다. 아마 이 소설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안타까움과 두려움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펼쳐진 사랑의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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