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 / 오렐리아 문지 스펙트럼 개정판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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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한 시대의 희미한 흔적들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인생의 아침에 사람을 매혹하고 방황케 하는 미망들,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무언가 가슴에 맺혀 잠시 시선을 옮기지 못한다. 반복되는 정신착란과 분열증을 겪으며 그토록 간절하게 붙잡을 수 없는 이상을 좇아야 했던 19세기 시인의 어떤 숙명적 이야기에 빠져들며 동질감, 아니 유대감이라야 해야 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은 어리석게 소진해버린 삶에 대한 뒤늦은 회한인 것일까? 수록된 '제라르 드 네르발'의 두 작품,실비(Sylvie)오렐리아(Aurelia)는 작가가 1855126일 비에이유-랑테른(Vielle-Lanterne) 의 뒷골목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기 각기 1, 2년 전에 집필된 것으로 전해진다.

 

 

1. 실비;Sylvie

 

숭고한 이상, 감미로운 현실, 이 둘 사이를 어떻게 떼어내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실비(Sylvie)동일한 사랑, 두 반쪽의 총체인 단 하나의 별, 이상화된 여인, 구원의 여신을 향한 방황의 꿈과 동경과 추억의 소슬한 사랑 이야기다. 어린 시절을 보내던 시골 마을의 소년과 소녀, 소년은 옛 왕가의 후손인 금발의 소녀 아드리엔의 광휘에 사로잡히고 단짝 소녀 실비를 잠시 잊는다. 작중 화자는 소설을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어느 극장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매일 저녁 나는 구애자와도 같이

성장(盛裝)을 하고 무대 옆 특별석에 나타나곤 했다.”

 

여배우 오렐리의 미소는 무한한 행복감으로 그를 채워주고, 그녀의 목소리는 기쁨과 사랑으로 전율케 한다. 완벽함, 그녀 안에서 살고 있는 남자. 그러나 바라보기만 하는 이에게 그의 자존심은 반발한다. 추억으로 향하는 영상은 오래전 잊어버렸던 고향으로 향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 실비의 발랄함은 풋풋하고 달콤한 활기를 선사하지만 아드리엔에 대한 기억과 이상화된 오렐리에 대한 상념으로 달아난다.

 

네르발의 소설은 그의 삶과 내밀한 연결을 피하지 못한다. 실비(Sylvie)의 등장인물인 오렐리는 소설 오렐리아(Aurelia)에서 다시 반복되어 그의 삶을 지배하는 구원의 여인, 세계와의 은밀한 조응을 가능케 하는 궁극의 총체, 존재의 비의(秘義)에 대한 발견을 향한 하계(下界)의 여행이라는 광기의 터널을 통과케 하는 근원이다. 이 같은 치열한 영혼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단편 실비의 싱그러운 추억의 일화들은 세상의 소음을 잠시 잊고 생의 어느 한 때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한다.

 

성과 그 둘레의 잔잔한 물, 바위틈으로 구슬픈 소리를 내는 폭포

그리고 마을의 두 부분을 이어주는 오솔길... 

붉은 히스 가운데 고사리의 푸른빛이 두드러져 보이는 황야...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외롭고 서글픈가! 실비의 매혹적 눈길, 그녀의 달음박질...”

 

맑은 정취, 소박하고 영롱한 자연의 풍광들과 생동하는 젊음, 목가적 분위기와 어울려 젊은 날의 이상이 탕진한 현실의 어설픈 인식이 남겨놓은 사랑의 쓸쓸함이 애틋하게 그려진 수채화 같기도 하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에 대한 엇갈리는 대화를 주고받는 나와 실비의 배경을 수놓는 안개 속에 고립된 클라망의 수풀들의 묘사처럼 시야를 흐리는 뿌연 안개는 현실을 꿈과 환상의 지대로 옮겨 놓는다. 현실에 발을 내딛지 못하는 영혼의 방랑, 네르발이 소설 오렐리아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지대인 꿈으로 향하는 것은 현실의 불가능성을 성취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연민에 이르게 한다.

 

 

2. 오렐리아;Aurelia

 

네르발의 어머니는 종군 의사인 남편을 따라 전지에 동행했다 열병으로 사망했다. 네르발의 나이 두 살인 1810년의 일이다. 내겐 이 짤막한 사실이 온통 꿈과 환상의 기록으로 써진 소설, 광기의 회고록이라 불리기도 하는 오렐리아에서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단일성, 영원한 총체, 무수히 등장하는 여신을 향한 갈구와 결코 분리 할 수 없는 근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네르발의 또 다른 소설 불의 딸들서문에는 나의 이야기, 나의 모든 꿈들과 모든 느낌을 옮기기 시작했으며, 나를 내 운명의 밤 속에 홀로 버려두고 달아난 저 별에 대한 사랑에 측은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나는 울었고...“라는 오렐리아에 대한 집필 의도와 감상이 있다.

 

또한 소설 속 숨겨진 짧은 문장이지만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방황하는 자기 분신과 싸우는 한 인간이 끝내 이르기를 원하는 대상의 실체가 보인다.


성모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생각한다. 쏟아낸 눈물이 내 영혼을 

진정시켜주었다...”   - P186 中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비견되는 네르발의 오렐리아인 여배우제니 콜롱(1808~1842)’에 대한 지고한 사랑이라는 현실적 실체가 그의 이상화 된 신성으로 많은 평자들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내겐 그의 이상화된 여인상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라고 속삭인다. 소설 실비(Sylvie)에서 보이듯 네르발의 사랑은 현실에서 실현 된 것이 없다. 그가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도달 불가능한 욕망이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지점에 이르게 하는 대목이다. 아드리엔도, 실비도, 오렐리아도, 어느 여인도 그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을 결코 안겨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 속 반복되어 등장하는 자기 소멸(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멸과 윤회에 대한 신비주의에 대한 귀의는 사랑이라는 자기 욕망의 실현이 곧 자기의 무화(無化)이기에 무의식, 그의 지하세계의 어둠 속에서는 현실의 부정만이 가능한 것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강박증의 세계마저 마침내 허물어지는 시기가 그의 기록으로 최초의 중대한 정신착란에 빠졌다고 하는 18412월이었던 것 같다. 이제 자기 분신과의 치열한 싸움, 본격적인 심연의 마주함이라는 영혼의 분투가 이어진다.

 

저 매혹적이고 두려운 몽환을 길들인다는 것,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 노는 저 밤의 영들에게 규칙을 부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  - P 218

 

그래서 그의 선택이꿈이라는 새로운 삶의 길인 것은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소설오렐리아는 그래서 제 2의 삶으로서 선택된 꿈과 환상의 기록, 광인의 기록이어야 했으며, 네르발의 존재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내겐 닿지 못하는 어머니를 향한, 기억의 저편 어딘가 무의식에 새겨져 있을 어머니를 향한 네르발의 애끓는 외침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그래서 네르발의 자살에 붙은 의혹의 시선들, 신비적 예식으로서의 죽음 이라든가, 절망의 고백이라는 해석보다는 지극히 근원적인 것, 불가능에 가닿으려는, 마침내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길의 실천이었다고 생각게 된다. 이보다 진실한 인간의 기록이 가능할까? 음울한 고뇌의 심상함이 더욱 마음을 휘젓는 손에서 놓기 싫어지는 그런 작품이다.

 

모든 존재는 신이라는 존재로부터 나와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따라서 개별적인 죽음은 존재들의 총화에로의 귀환이다.”  - P 140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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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
보에티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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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욕망의 바람들이 불 때마다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근심도

측량할 수 없도록 무한히 커져가는 도다." - P 39 중에서

 

 

올바름, 타인에 대한 동정과 배려, 탐욕의 배제, 후학과 동료 시민을 위한 진실한 학문의 추구, 권력의 오만함을 잊지 않는 태도와 같이 신을 향해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도록 정진했던 인간이 터무니없는 모함과 배신으로 유배되어 죽음에 내몰리게 되었을 때 그 고통과 비탄을 형언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서기 475년에 로마 근방 명문 가문의 자식으로 출생하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테오도리쿠스''마기스테르 오피기오룸'(오늘날 비서실장)이었으나 일순간 역적이 되어 526년 유배지인 파비아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집필한 참된 선(), 운명과 의지에 대한 치열한 자기 물음의 사유가 이 책이다. 역자의 해제에서 설명 되듯이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책이 아니라, 운명의 파란에도 불구하고 신 안에서 위안을 받고자 했던 철인이자 정치가이며 신학자였던 한 인간의 간절한 철학적, 종교적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과연 정의로 다스려지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그의 첫 의심이었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는 신의 피조물로서의 동일한 질문일 것이다. 이전에 누렸던 영화, 그 행복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어찌 쉬이 떨쳐낼 수 있으며, 악이 세상을 장악하는 그 불의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잠재울 수 있겠는가.

 

저술은 그의 감정에 공감하는 노래를 부르는 시인들을 내치는 철학의 은유로 등장하는 여인(철학의 여신인 아테나 이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에 나오는 필로소피아를 모델로 했다는 견해들이 있음)과 보에티우스의 대화로,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운 활용을 위해 시와 산문을 번갈아 쓰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5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제 1장은 보에티우스의 유배된 상황에 대한 고통과 회한, 그 배경에 대한 진술로 이후의 물음들이 제기되는 바탕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2장과 3장의 '참된 행복'에 대한 논의와, 4장과 5장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와 운명,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과 보에티우스의 질문과 답변은 삶의 진리에 대한 간절한 앎이 더더욱 절절하게 울려온다고 할 수 있다.

 

 

1. 참된 행복에 대해서

 

과거를 그리워하며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슬퍼하는 일에 힘을 소진하는 것은 범인(凡人)인 우리네에게 으례 먼저 다가오는 사념이다. 여인은 말한다. "부귀, 명성, 권력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진정으로 인간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네가 다시찾고자 하는 것들이 너의 소유였음을 인정 할 것이다."라고. 사실 붙들고 싶어도 붙들어둘 수 없고 떠날때면 불행만 남기는 행운이라면 그런 덧없는 행운은 단지 다가올 불행의 전조 이외에 무엇이며, 단 한순간에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생사에 어떤 변함없는 것이 존재하리라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한 무엇이겠는가!

 

 

"행복이 이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최고선'이라면 행복은 빼앗길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빼앗길 수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 ''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 93에서

 

 

우리는 재물을 ''라 부르고, 권력을 ''이라 부르며, 관직을 '영예'라 부른다. 그리곤 이러한 것들과 멀어질 때면 행복이 사라졌다고 슬퍼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원래 그것들에 속하지 않은 거짓된 이름들로 부르기 좋아하는 인간의 자기무지에서 오는 탐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 명예, 권력, 영광, 쾌락은 인간의 정신에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다시말해서 그 어떤 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이끌어준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얻게 될 때 행복해진다.

 

결국 이 다섯 가지가 동시에 완전하게 충족될 때 그것을 선이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불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완전한 것도 존재해야 한다.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완전한 행복이 참된 선이라면 그 완전한 것은 최고신 이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논리는 보에티우스가 위로를 구할 대상인 단일성, 근원적 존재인 ''으로 향하게 한다. 그것이 종교의 유일신이든, 어떤 범신론적 대상이든,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근원성이든 말이다. 그런데 오직 선만을 갈구하는 신의 나라에서 악은 번성하고 미덕은 짓밟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대체 신의 섭리란 무엇이며, 운명이란 무엇인가? 완전성, 선의 총체라는 신이라며 어찌 이러한 악이 존재하는 것인가?

 

 

2.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에 대해서

 

책 바깥으로 잠시 뛰쳐나가야 겠다. 선거에서 낙선한 한 인간이 충혈된 눈자위와 온갖 혐오의 표정을 짓고서는 부정선거라 악을 써댄다. 그에게서 '()'의 현현을 보게된다. 미덕을 버리고 악을 추구하는 것은 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니 무지로 인한 맹목이다. 이보다 악한 것은 없다고 한다. 또한 욕망에 사로잡혀 자제력을 잃은 것이라면 결핍의 악이다. 그런데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면 더이상 힘이 없다는 것이니 존재하기를 멈추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극악을 향한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에 내재된 완전성, 선의 총체는 대체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만물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든 방식을 포괄하는 불변의 단일한 형태인 '신의 섭리''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충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욕망이 그들의 심장을 비틀어

독기어린 탐욕을 분출시키고,

회오리바람이 바다 물결을 채찍질하듯

분노가 그들의 정신을 채찍질하니

고통과 비탄에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붙잡고 몸부림친다네." - P 199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밭을 갈다가 금덩이를 발견한 경우가 우연인가 묻는 일화가 있다. 이것이 무()에서 생겨난 것인가? 일련의 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느닷없이 제멋대로 생겨난 어떤 움직임에 의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우연이라 정의한다면, 이런 '우연'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일은 분명 여러 원인들(누군가 금덩이를 밭에 묻어놓았으며, 밭을 갈기 위해 땅을 파는 행위 등등)이 결합되어 일어난 긴밀하게 연결된 연쇄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신의 단일한 정신이 작성한 것이 시간 속에 안배된 만물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 질서가 우연이며 운명"이라면, 인간 의지의 자유는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보에티우스와 철학이 우연과 신의섭리의 문제를 논하다 - P 221삽화 부분발췌】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과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되고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사유의 깊은 심연을 지나가야 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경유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버려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며, 미래는 아직 소유하지 못했으며 현재는 단지 신속하게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따라서 삶 전체를 동시적으로 완전히 향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은 자신이 존재해 온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의 본성의 단일성에 비추어 모든 피조물에 선행한다. 결코 지나가지 않는 현재 속에서 모든 것을 알며, 미리 앞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한 눈에 다 보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은 미래에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게 될 일들을 현재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기에 이 일들은 신의 인식이라는 조건으로 필연적인 일들이 되지만 그 자체로는 그 일들의 본성과 관련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자신의 단일성에 의거해서 모든 것들을 자신의 현재 안에서 즉자(卽自)적으로 본다는 이 의미를 심상에 담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어떤 위안이라도 매달려야 할 사람에게는 간절함에 맞닿았을 것이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명성, 그리고 쾌락에서 자유로워지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다고 악인의 현현이 되야 하겠는가. 자기를 살피는 일이란 지고한 자기물음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더구나 물질의 쇄도에 짓눌려 정신의 저 깊은 곳을 마주할 시간조차 없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운명의 범주가 아니라 미덕의 범주인 우정과 사랑, 지고한 선을 향한 참된 행복, 우주의 본성에 대한 겸허를 얘기하기란 또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그러나 우리네 인간은 불행이, 삶의 일상적 안온함이 물러날 때 그 허기와 상실의 고통으로 또 얼마나 아파하는가? 아마도 그러한 때가 되었을 때 이 책은 그 비탄의 통로를 빠져나가는, 죽음의 멍에를 떨쳐 버리려는 헛수고를 멈추게 해 줄것 같다. 삶의 진실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의 평온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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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무의식에서 새로워진 나를 찾아
김종주.라깡분석치료연구소 지음 / 인간사랑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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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에는 억압이 없고, 따라서 엄밀히 말해 무의식이 없다." - 브루스 핑크

 

 

혹자는 무의식을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의 산물정도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무의식을 파악한다는 것이 곤혹스럽기 때문인지도 모르며, 욕망은 물론 이의 억압이란 것도 인식의 요구에 두지 않는 정신병인() 탓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책의 저자가 지적하듯이 주체에 미치는 법의 질서가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화 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의식에서부터 남근, 신경증이 가리키는 욕망의 방향에 이르는 프로이트에 대한 라깡의 비판적 계승에서 발견되는 차이로부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확장을 획득하게 해준다는 점을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신경증과 정신병에 대한 임상적 사례를 비롯한 21세기 증상이랄 수 있는 인생의 의미 장애를 겪는 일상정신증의 임상적 견해로부터 왜 많은 사람들에게 무의식이 거부되었는지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마 무의식의 탐색과정이랄 수 있는 이청준의 소설들을 따라가며 거울단계에서의 자아형성과 소외의 문제, 마침내 실재계에 적중하는 해석과 같이 말 할 수 없던 것을 창조해내는 새로운 역사 쓰기와 읽기의 정신작용은 물론 오랜 유배생활로 우울증을 앓던 다산 정약용의 기록과 아울러 우울증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의 세계가 왜 무의식을 회피하면서 모든 갈등의 본질을 지워버리는지를 성찰하게 하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내 관심의 탓이겠지만, 자아가 무엇인가를 거부하는 것, 즉 무의식의 억압으로 야기되는 신경증과 아예 현실의 어떤 부분을 자아로부터 뿐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쫓아내 버린다는 의미의 폐제를 원인으로 하는 정신병에 관한 5라깡의 임상정신분석6일상정신증은 인간의 언어와 행위 뒤에 숨겨진 욕망의 흐름에 대한 이해는 물론, 자기 성찰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생각게 해준다.

 

이를테면 욕망의 실현을 자신의 소멸로 여겨 욕망을 이루지 않으려는, 불가능한 욕망을 욕망하는 강박증은 그 질병적 발현의 유무를 떠나 스스로를 완벽한 주체로 생각하는 나와 주변의 많은 이들에 대한 사유로 옮겨가게 한다. 왜 끊임없는 욕망으로 들끓는 자신의 결여, 그 부족함, 불완전함, 무지를 망각하는 것일까? 또 다른 신경증의 하나인 히스테리를 말할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 프로이트의 도라 사례와 함께 불만족한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는 대타자의 욕망을 영원한 불만족 상태로 유지시키려는 주이상스와 욕망의 영원한 불일치의 심리적 전략을 목격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복잡성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정신분석 개념들을 인간과 사회의 구조와 특성에까지 확장하여 그 이론적 진실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살아가는 지혜로서, 내 삶의 반성적 단초로 이해하는데 어떤 기여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한편 언어속의 소외, 의심없는 자기 확신, 환각 등 정신병의 화려한 병인(病因)에서 오늘의 우리 사회의 일면을 보게 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라깡이 말한 인간주체의 세 가지 질서 중 상상계란 소위 거세 콤플렉스가 시작되지 않은, 즉 법과 타자라는 사회적 질서로의 편입이 이루어지지 못한 단계의 일컬음이다. 여기에는 억압이 없기에 의심과 질문이 없으며, 부명(父命)이라는 부성기능, 법이 없기에 은유가 없다. 이러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현상들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언어의 세계, 질서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상계가 계속 지배권을 행사하는 정신의 미성숙에게도 삶의 전술이란 것이 있다. 타자에 대한 모방을 통해 동화하여 마치 상징계에 진입한 인간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은유를 창조해내지 못하는 이들은 고작 책에서 읽은 것, 주위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을 사용하는 데 그칠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단어인 신조어혹은 두()문자어(축약어)를 만들어내곤 그 신조어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결코 창조해내지 못하는 흉내와 눈가림, 낄낄거림의 동화에 탐닉하는 사회의 정신질환적 증상이다. 아마 방송 매체에 등장하는 그 하찮은 주절거림들을 보라, 무의식을 거부한 유아들을 발견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게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라깡의 학문적-법적 상속자인 자크-알랭 밀레르에 의해 1998년 처음 정의된 일상정신증’ ”에 대한 장()일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신자유주의 질서에 점령된 인간사회를 묘사하는 데 적절한 질병처럼 여겨진다.


 상징적인 법의 유일한 시니피앙인 부명의 다원화가 임상분류의 

구성 축을 바꿔 놓았다.”        - P 111 中에서


일명 숨겨진 정신증또는 베일에 가려진 정신증으로 불리는 이 정신증은 망상과 환각과 같은 다양한 신체 현상 같은 고전적인 정신병의 증상들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의 경계에선 이 독특한 정신적 질환은 그래서 더욱 이 사회의 병을 은폐한다. 이 병의 증상들은 건강염려, 상시적 차별과 하대에의 노출, 관계적 망상, 자기 모습에 대한 강박...등등 현대인의 전형적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자기애로의 퇴행, 관계적 어려움, 환상의 부재와 같이 요즈음의 대중적 트렌드에 부상하는 것들과 닮아있다.

 

부정선거라고 악을 써내는 인간에게서 다른 아이를 때리고선 자신이 맞았다고 말하는 아이의 공격성과 자기애를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오늘의 사람들에게 고착된 정신증을 생각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공격성은 주체의 생성에서 자기애적인 구조의 상관적 긴장이다. 라는 말에서 바로 이것이 우리들 자신임을 아는 것이야 한다는 반성적 사유를 끌어내야하는 것이 오늘 나와 우리네 모두의 의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라깡의 정신분석 입문서로서 또한 무의식이라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안내서로서 그 책임을 다하는 저술이라 함에 주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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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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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中略)...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 1사람의 개념 중에서

 

위의 인용 문장은 책 첫 페이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렇게 길게 옮긴 이유는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항시사람임을 인정받고 있는가?, 그리고 국적, 인종, 직업, 성별, 연령과 무관하게 타인을 사람으로 환대하고 있는가를 생각게 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사람이란 외형적, 생물학적 동일성이라는 보편성에 의거한 종()으로서의 인간과는 구분되는, 인간 상호간의 의례(질서)에 따라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체하는 것에 대한 상호 믿음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간에 대한 이름이다.

 

현대 사회, 오늘 우리의 사회는 의례적 평등 원칙을 표면적으로는 상호작용 규제 규범으로 하고 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말은 의례교환의 대칭성을 선언하는 대표 원칙이란 얘기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현실 세계에서 지켜지지 않는다. 이 의례원칙이 사라지는 예외지대가, 아니 예외 현상이 오히려 만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1. 모욕과 신분주의

 

유교적 세계관에 뿌리박은 낡은 신분주의가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여전히 횡행하고 있으며, 배금주의 토양위에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신분주의 또한 의례적 평등주의를 훼손하고 위협하며 파괴하고 있다. 한 쪽이 다른 쪽을 모욕할 수 있는 의례코드 자체의 비대칭성이 차별을 수용한다는 조건하에 상호작용 집단 안에 머무를 자격을 얻는 다는 것은 조건부로 사람됨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며, 이는 의례적 불평등이 일상화 되었다는 의미이다.

 

신분적 의례가 상호작용 질서를 압도할 때 지배적 지위를 지니지 못한 인간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는 자격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사람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상호작용 공동체(집단)의 성원권을 잃는다는 뜻이다.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거기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 다시 말해 비가시화되고, 현상되는 공간의 바깥으로 배제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인격,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그 상호작용의 틀 속에서 사라지고 비인격화되어 버리는 것, 모욕 받는 것이다. 모욕은 이렇게 존엄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며, 마침내 기존의 자기 이미지를 포기케 하여 굴종을 정상화하고 사회에 현상하지 않는 존재처럼 지워버린다.

 

문득 2020415일 선거결과가 한국사회의 상호작용 의례에 만연한 비대칭성, 의례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 시민 개개인들의 자각에 따른, 모욕의 상시화에 대한 시정의 외침이 아니었을까하는데 생각이 다다른다. 마치 자신들 이외에는 사람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던 수구 기득권 집단에게 비가시화된 시민들의 저항이었다고 말이다. 너희들이 비인격화한 인간이사람으로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고.

 

행위자들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의례적 권리/의무가 달라지는 이 사회의 불순함과 물질 우선의 신자유주의 신봉, 양반/노비 타령을 하는 지역적 특성, 가부장적 권위주의 지향의 보수주의자들의 신분주의적 권력과 정치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었을 것이다.(물론 일부 지역의 투표권자들은 어떠한 모욕도 없는 사회에 있다고 해야겠지만)

 

고관대작도 재벌도 아닌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수한 모욕을 떠안으며 신분(지위,재산 등등)이 낮을수록 그들에게 행해지는 무례함의 한도가 커질 뿐 아니라 모욕의 질량이 평가절하된다. 이렇게 사회에 만연한 모욕에는 그 고유한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 타인의 인격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부정에 대해서 다시금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너는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입니다라고 크게 복창해!” 모욕은 이처럼 자기 부정을 강요하여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게 하는 폭력이다. 이러한 의례적 폭력은 사실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순히 이에 협조하지 않으면 간신히 걸친 사람의 자격을 완전히 박탈당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의례적 비대칭성이라는 신분주의는 곧 구조적 폭력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극단적 표현을 빌린다면 신분주의를 숭배하는 보수주의 집단의 한국사회는 근본적 폭력사회를 지향한다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 김현경은 존비법이 엄격한 사회는 엄청난 감정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임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 건물 경비원, 백화점 판매원, 골프장 캐디, 전화 교환원. 마트 계산원 등등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상황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감정이 그만한 배려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뼛속 깊은 신분주의적 가치관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제복 착용을 강요받고 신분적 차별의 대상으로 공시한다. 낙인찍기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스티그마의 한국사회 면모일 것이다. 상호작용의 평등성, 대칭성은 이렇게 파괴되어있고, 신자유주의적 노동세계는 이처럼 신분적 모욕을 일상화한다.

 

한편 가해자가 있는 모욕은 이제 가해자 없는 굴욕의 형태로 변화하여 그 모습을 감추고 더욱 극렬하게 인격을 무너뜨리고 있다. 예고 없는 실직(문자로 날아온 해직 통보), 일한 대가와 무관한 보수, 일방적인 월세 인상... 아무도 굴욕을 당하는 사람을 모욕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장주의가 명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 굴욕감은 전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상호작용 질서차원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면서 구조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으며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라고 비아냥거리는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인 수구주의자들은 이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형식적 평등, 실질적 불평등을 정상화하는 이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사실 공포 그 자체이다.

 

 

2. '절대적 환대'를 생각하며

 

이 정도에서 사람의 자격에 대한 객설은 마쳐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쓰도록 한 동기는 지하철에 탑승한 독일 거주 9년차인 한국인 부부를 향해 독일인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5인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빌미로 노골적으로 인종차별과 성희롱을 무차별적으로 행사하는 2020427일 뉴스 매체의 영상 때문이었다고 해야겠다. 관할 독일 경찰은 구타의 흔적이 없으므로 사건 접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무시했으, 이에 주독일 한국영사관이 항의하자 조사해보겠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저자 김현경은 공간에 대한 권리이자 교제의 권리, 즉 친교의 가능성으로 충전된 현상학적 공간에 들어갈 권리라는 칸트의 환대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됨을 부정하지 않는것이라는절대적 환대를 주장한다.

 

환대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며, 이러한 인정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몸짓과 말을 통해 표현된다. 이미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조건부로 사람됨을 인정받는 현실에 외국인이라 불리는 이방인에게 무조건 자리를 내주는 절대적 환대가 가능하겠는가라는 의구심이 앞선다. 그럼에도 사회란 절대적 환대를 통해서 성립했다고, 만일 이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몸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 나오는 동시에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무조건적 환대는 사회의 기본 원칙이란 것이다.

 

그러나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복수하지 않는 환대가 가능한 것인가? 칼을 들고 뛰어드는 강도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인가? 저자는 말한다, 비록 범죄자이더라도 그를 사회 바깥으로 두는 순간 그가 더는 공동체의 성원이 아닌, 즉 사람이 아니므로 법의 질서하에서 그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법의 바깥에 있는 것인데 어떻게 범죄가 된다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또한 희생 담론을 인용하면서 사후의 명예라는 죽은 자의 산자들 사이의 자리에 대한 믿음처럼 자리란 신성한 것, 불가침의 무엇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에서 들려오는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폭력의 뉴스는 계속되고, 하물며 일본, 베트남과 같은 아시아권 국가에서조차 한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 사건은 그치지 않고 들려온다. 절대적 환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단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지만 사회운동이란 현재 속에 이미 도래해 있다고 이해하며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서바이벌 로타리의 모순, 사적 공간과 공적공간을 분리하지 못했다며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 부정론 비판에 따르는 저자의 성찰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계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람자격의 박탈 소식은 모욕감으로 떨려온다.

 

이 저술을 이렇게 국한된 사건에 한정하여 서술하는 것은 내 부족함이다. 조건부로만 사람됨을 인정하는 유교의 전근대적 인권의 시각에서부터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예외 상태의 담론을 활용한 사람의 자격에 대한 사유, 공리주의 피터 싱어와 론 해리스의 왜곡된 생명윤리에 대한 시각 비판을 통한 의례대상으로서의 사람에 대한 통찰적 분석은 가히 인간 존엄에 대한, 사람의 평등에 대한 중대한 시사를 안겨준다. 아마 책 전체가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타인을 대하는 보다 성숙된 지적 풍부함과 아울러 도덕적, 비판적 성찰로 이끄는 사유들로 빼곡하게 차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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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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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흠집에 매혹되는 건 오래된 인간의 불가해한 본능이다.” P 145에서(수정인용)

 

 

합리적 추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죽음들과 피부에 수놓아진 사람들의 사연이 참담하게 얽혀있는 이야기다. 괴이하다할 - 온 몸에 불이 붙어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고, 육식동물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찢어놓은 듯한 열상, 벽시계 높이까지 젖었다 마른 흔적만 있을 뿐 물에 빠져 질식한 듯한 - 죽음을 맞이한 대상들은 생전 타인을 향한 비열함과 비정함 그리고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다. 그렇게 타인을 사회적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들이란 과연 누구인가?

 

시미’, 오십대의 중년 여성, 애 낳고 솥뚜껑이나 운전하지 않아서, 마트 계산대도 아니고 콜센터 상담원도 아닌 사무부서 직원으로 재취업한 것이 조롱 대상이 되어야 했던 여자,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하며 아이와의 만남까지 배제되어야 했던 여자, 십년이 지나도 아무런 직위도 없는 그저 사무원인 사람이다. 딸 벌인 후배 직원 화인의 목뒤에 꼬리를 고붓하게 말고....한 점의 불씨처럼 빛나는 문신, 샐러맨더,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타투, 살갗을 뚫어 새겨진 매혹적 상처가 그녀에게 우연의 길을 연다.

 

재래식 한약방 같은 주택, 화려한 여느 타투 스튜디오 간판도 없는 곳 앞에 주저하며 서 있는 중년의 여성이 그려진다. 충동적으로 몸에 새긴 샐러맨더에 대해, 잃었던 자신감과 의욕이 다시금 심장에 고이는 듯 했던 날들에 대한화인의 얘기가 이끈 발걸음. 우체국 공무원 같은 인상을 지닌 30대 중후반의 타투 아티스트도 아닌 문신술사라는 명함을 지닌 사장과 시미의 선문답 같은 대화는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한 문장 한 문장을 새기며 읽게 된다.

 

제가 한 건 맞는데 따로 찍지 않습니다. .... 남겨 두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

언제가 됐든 사라지니까요 - P 42~44 (발췌 인용)

 

기이한 죽음 뒤에 남아있는 여자들, 사회적 약자들, 한 때의 충동을 기억 한 채 흐릿한 흔적만을 지닌 사람들. 소설을 여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쭈그려 앉아 떨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의 모습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방화 추락 사건의 희생자를 화인의 아비로 연결 지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샐러맨더’, 그녀의 타투가 영혼이 들고 나는 통로였겠구나하는 뒤늦은 애틋함, 그 고통의 나날을 잊기 위한 처절한 몸의 울림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위로 샐러맨더를 찍어버리려 덤벼드는 아비, 밀어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아비, 화인은 아비의 죽음을 말한다. 그 인간이 없어지기를 20년 가까이 바랬다고. 그녀가 제일 절박했던 순간에, 이러다 죽을 것 같았을 때, 아비의 잔혹한 폭력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준 것은 무엇일까? 사회적 인습이라는 얼굴로 누군가의 아내이며 어미이며 딸인 여자들을 옥죄던 너울들, 뒤늦게 엄마 노릇하려 들지 말라는 성장한 아이의 냉담한 소리에서 모자관계란 애당초 형성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시미의 현실 인식은 화인의 비참한 소망처럼 오래된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의 목소리가 되어 울린다.

 

시미의 손목에 새겨진 작은 별 하나, 그 별이 떠올라 부풀어 산산이 흩어져 밤하늘을 수놓을 때, 불현듯 기 발표된 작가의 단편 소설, 관통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칼로 캔버스를 베어내 틈을 만들어냄으로써 세계를 확장한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의 그라피티가 떠오른다. 살갗을 뚫어 무언가를 새기는 상처의 매혹, 비일상을 꿈꾸고 기존의 인습적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내 마음속에서 겹쳐졌던 것 같다. 그들의 문신은 억압된 인식의 지평을 한 차원 확장하는, 공간을 들고나는 영혼의 창, 그 통로였으리라. 아마 이 소설을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 빛나기를 열망하는 사회적으로 죽임 당한 자들의 이 이야기가 문신을 통해 편협에 갇혀 무관심을 동반한 내 무지를 한 뼘 만큼 줄여줬다고. 그리고 내 이기적 시선이 조금은 관대해 질 수 있게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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