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운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1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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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의지와 운명1,2권  통합 감상입니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어...

그렇다면, 선생님, 필연은요. 그 빌어먹을 필연은요?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206)

 

소설은 오늘을 구성하는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류하며 형제의 의지와 운명이라는 부조리한 삶의 형식인 시간의 악을 드러내고, 그 악의 형상이 어떻게 오늘의 인간문화에 깊숙이 불가항력적 힘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가히 신화적으로 묘파(描破)해내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잘린 머리다.“, 이 이야기의 종국이 비극임을 전제하는 이 문장은 비장(悲壯)하게 다가온다. (註: 카스토르와 폴룩스, 카인과 아벨, 이들 신화와 성경 속 인물과 소설 속  여호수아와 예리고를 읽으면 더욱 풍부한 얘기로 읽을 수 있다.)

 

태평양 연안 게레로 주 연안, 바닷가에 야자열매처럼 버려져 모래밭에 뇌수가 흘러내리는 몸통을 잃은 머리통이 자신의 짧은 삶의 여정과 시대의 역사를 술회한다. 그런데 이렇게 잘린 자신의 머리통이 멕시코에서 천 번째임을 밝히는 통계 숫자는 그 사회가 만연한 범죄의 장소임을, 뿌리 깊게 부패한 곳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술회하는 머리통, 화자는 여호수아 나달이라는 스물일곱 살 젊은이다.

 

연안 모래밭에 나뒹구는 잘린 머리통, 여호수아는 자기 삶의 여정을 소년시절부터 거슬러 술회하기 시작한다. 코주부로 놀림 받던 어느 날, 에롤이라는 동급생 불량소년들의 우두머리인 에롤로부터 폭력을 당한다. 이때 예리고란 소년이 나타나 그를 보호하고 에롤을 망신시켜 더는 여호수아를 괴롭히지 못하게 처리한다. 여호수아와 한 살 많은 예리고는 평생동안 유지될 동맹, 신성한 형제로서의 의무를 맺는다. 그런데 두 소년 모두 의지가지 할 부모를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 누군가의 정기적 도움으로 살아가지만 둘 은 그 누군가나 그 행위의 의미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둘은 자신들이 확신하는 각각의 진리, 그들이 학습한 독서와 지식에 기초한 비평의 틀을 통과한 의견만을 받아들이며,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사회가 설정한 모든 근거나 기준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두 사람은 그들의 지적 성장에 도움을 준 피로파테르 신부의 가르침인 스피노자 철학을 중심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페라기우스의 논쟁으로 대변되는 자유에 대한 관점, 즉 펠라기우스의 자유의 철학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라는 중개자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는 두 철학처럼 둘의 삶의 세계에 대한 신념은 조금씩 달리 진행된다. 에리고의 그 어떤 귄위와 위압적 체계에 대한 부정은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의 인정으로, 여호수아에겐 확실함을 잃어버렸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과 친구가 된 에롤이 이 둘에게 건네는 말이 있다. 너희가 원하는 것과 사회가 너희에게 허용하는 것 사이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운명과 내기를 걸어보거나 (63).”

 

이제 두 청년은 운명과 내기를 거는 의지라는 자유의 발걸음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걸음의 길은 그들의 신념만큼이나 다르다. 여호수아는 실제가 허구를 능가함을 안다. 그의 성장통으로 신경증을 앓고 있을 때 그를 간호했던 간호사와의 세속적 신음과 기다란 감탄사로 표현되는 최초의 정사이후 깨달은 것이라면 헛소리가 될까? 이를테면 여호수아는 현실론자이고 예리고는 이상주의자라면 아마도 어설픈 구분이 될 것 같다. 여호수아는 철학으로 이루어진 뼈대에 살을 붙이는,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법을 공부하기 위해 멕시코국립자치대학 법학부에 진학한다. 둘은 같은 현상을 보지만 그 드러난 문제점의 해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예리고는 갑작스레 자신은 프랑스로 떠날 것을 선언하고, 두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는 이제 보이지 않게 변해가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대화의 문장은 이들의 가치를 상징하는 하나가 될 듯하다.

 

오감에 근접한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세계가 있는 반면, 실제와 허구를 구별할 수 있어야만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 환상의 모든 권리를 갖춘 그런 상상의 세계가 존재한다.” (80)

 

사람을 망치는 게 뭘까? 여호수아는 명예? ? 섹스? 권력? ...” 거론하지만, 예리고는 그 반대쪽에 있는 실패, 무명으로 남는 것, 가난, 성불구...”를 호명한다. 여호수아의 주장에는 항상 의문부호가 있는 불확실성을 전제한 주장인 반면, 예리고는 부정성에 기초한 단정이다. 예리고가 떠난 이후 여호수아는 대통령과 통신사업으로 멕시코 최대의 부를 가진 막스 몬로이의 자문역인 변호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법과 이론의 실제적 통찰을 위한 스스로의 관찰이라는 경험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의 무덤이고, 멕시코의 시베리아이자 황무지 안의 황무지인 감옥중의 감옥인 교도소를 출입한다. 인구의 절반이 가난 아니면 범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멕시코의 실상인 하부 세계를 경험한다. 여기서 한 독특한 죄수를 만나게 되는데, 스스로 수감되기를 원해 석방을 거부하고 교도소의 질서자로 군림하는 인물, 미겔 아파레시도를 관찰하게 된다.

 


여호수아는 졸업에 즈음하여 상히네스 교수로부터 <마키아벨리와 국가의 탄생>이라는 변호사 자격취득 논문의 주제를 받는다. 이때 프랑스에서 귀국한 예리고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상히네스에게 호출되어 불려간다. 여기서 예리고는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추천되어 대통령실로, 여호수아는 막스 몬로이의 통신사업제국에 입사하게 된다. 소설은 이때부터 음모와 배신, 비열함과 추악함, 탐욕으로 일그러진 멕시코 사회를 철저하게 해부하기 시작한다. 막스 몬로이의 어머니인 망령이 여호수아에게 건네는 꿈 속 같은 훈계들은 배신과 거짓말, 만행과 복수로 점철된 멕시코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그것은 운명에 마주선 의지의 시험대가 된다. 이십년이나 지속된 내전, 그로 인해 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어. (...) 이 나라는 배신의 나라야.(202)”

 

젊은 피를 수혈받은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주문한다. 투표만 해서는 민주주의를 살 수 없다고, 사람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를 위해 욕구와 갈증과 허기를 다독일 수 있는 축제를 조직하라고. 사실 오늘날에는,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퇴락한 후진 전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과 국민을 상대로 뻔한 농락을 행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이 퇴행적 기만수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멕시코 사회와 국민들에게 뿌리깊게 자리잡은 기득권 계층의 집요한 수구적 탐욕과 이를 위한 기만과 거짓, 부패라는 악의 세습이다. 다시금 마이클 존스턴의 한국사회의 부패유형을 지적한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많이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라는 아픈 말이었는데, 딱 소설 속 멕시코의 유형이랄 수 있다.

 

이야기 속 대통령은 예리고에게 말한다. 의식(儀式)은 우리 모두가 누더기를 가리기 위해 어께에 두를 수 있는 품위 있는 망토라고. 에리고는 대통령의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이벤트를 준비하지만, 이것은 그의 신념인 이상주의, 즉 무능하고 부도덕한 권력을 전복하는 혁명의 준비로 활용한다. 아주 흥미로운데, 이때 대통령의 유일한 경쟁자인 막스 몬로이는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이런 기만적 수단은 오히려 국민의 불만과 저항만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정보 사회인 오늘은 그런 비밀스런 통치는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뿐 아니라 권력의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쟁자가 하는 경고는 조언이 아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항구화하기 위한 기득권집단의 암묵적 협력이다. 반란의 싹을 미리 잘라내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경고요 협박인 듯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공조이자 동업자의 협력인 것이다. 예리고는 실패하고, 권력에 쫓긴다, 잡히면 죽음이다.

 

최종 목적지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모든 운명이 숙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운명은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고, 철문이 닫히듯 삶의 문이 닫히고 만다. (...) 많은 시간이 흘러야 우리는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운명을 점 칠 수 없다는 사실을, 불확실함이 인생의 실체적 기후라는 사실을....” (246)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의 의지를 시험한 젊은이는 그 어설픈 낭만적 이상주의의 독단에 의해 실패한 것이다. 이 소설이 얄궂은 것은 여호수아를 정점으로 형제의 동맹을 맺건, 교도소의 지배자인 죄수 미겔이 되었건 막스 몬로이와 맺게 되는 관계다. 이 관계에서 빚어지는 증오와 복수, 빼앗긴 욕망, 그리고 운명과 의지라는 그늘에 덮인 실체가 수면에 떠오르면서 무자비한 폭력의 역사에 토대를 둔 사회에서 의지라는 것은 한낱 숙명으로서 허무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는 양상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사실 지구 반대편 남의 나라 역사거나 현실의 실체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참혹한 폭력의 토대에 구축된 기득권 계층사회이다. 일본의 주구들, 미군정에 기생한 일제 부역자들의 후손이 그대로 오늘의 한국 정치와 경제 권력을 점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진부하게 된 오늘의 현실은 그만하기로 하고, 다시 소설의 마지막으로 가 봐야하는 까닭이 있다.

 

막스 몬로이라는 경제 권력의 거대주체는 여호수아의 믿음인 실제는 허구를 능가한다는 진술이 바로 허구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실을 제압하는 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망상과 다를 바 없는 신화가 현실을 기만하고 세계를 호도하기 때문이다. 막스는 운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의지와 운명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방치했다는 그럴싸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사람들은 현혹되어 실제가 허구를 능가한다고 착각하고 산다. 필연이 없는 의지나 운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필연에 대한 믿음은 폭력사회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이다.

 

이것이 현실을 제압하는 허구의 세계인 멕시코요, 바로 허구의 다른 말인 조작이 판치는 한국이며 악의 형상이다. 젊은이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늙은 겁쟁이들이 권력을 확고히 만들고자 하는 수구의 심리는 자신의 아들들을 피비린내 나는 희생양으로 던져 놓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여호수아는 왜 머리가 잘려 해변가 모래위에 던져져야 했을까? 추악하게 일그러진 이 비정한 비극적 드라마는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권력에 집요하게 매달린 인간들의 염오(厭惡)의 역사, 그 현실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의 조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된다. 이 걸작을 이제라도 읽어 볼 수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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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2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을 읽지 않고 필리아님의 리뷰만 봐도 영화의 장면들처럼 떠올라 지네요.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구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걸작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필리아 2024-11-21 12:21   좋아요 1 | URL
소설에는 이런 문장도 있어요. ˝허망함은 우리의 운명이지만 자유는 우리의 야망이며, 자유를 위한 투쟁 말고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결국 의지라는 수단으로 운명을 돌파해 내려하지만, 거대하게 구축된 권력의 세계에 희생될 수 밖에 세계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답니다. 무엇보다 푸엔테스의 이야기를 이끄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괜찮은 소설이에요. 댓글 고맙습니다. 마힐님 ~~
 
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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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역주행 소문을 듣고는 책장 어딘가에 꽂아 두었다는 기억을 살려냈다. 아마 몇 차례 자리를 옮기며 책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책 중 하나였던 것이 분명했다. 앞뒤로 배열된 뒷줄에서 찾아냈다. 바로 첫 페이지를 펼치고 읽어보았다. 불안한 예감은 결국 현실로 닥쳐왔다. 진평강 하류에 떠내려 온 두 사람의 시신을...”로 시작하는 문장을 읽으며, 어떻게 이 문장의 유혹을 보지 못했는지 까닭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걷잡을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숭고하다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은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벌어지거나 무모함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중에 의미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39쪽에서

 

이 소설은 사랑과 숭고의 재발견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물론 위에 인용한 소설 속 숭고에 대한 주인공 도담의 이해처럼 어떤 고결성과 같은 드높은 고양의 언어는 늘 과장의 가면을 쓰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과장의 언어에는 무엇인가가 은폐되어 무지의 유보상태로 남겨지기 일쑤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설은 사랑과 숭고라는 언어에 드리워진 음영을 발견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인지 이야기는 초입부터 수영을 배우기 위해 아빠 창석을 졸라 진평강을 찾았다가 미장원 원장 미영의 아들 해솔이 물속에 빠져 허우적댈 때 부지불식간에 해솔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드는 도담의 모습을 보여준다.

 

피부가 하얀 서울에서 갓 내려온 도시적인 해솔에 무의식적으로 매혹되었을 수 도 있으며, 아빠로부터 배운 생명 구조에 대한 자기희생의 마음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동기야 어떻든 물에 빠져 곧 익사할 수도 있는 사람을 보고 뛰어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된다. 우리들은 그 행위를 아주 고결한 정신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숭고함이라 말하기도 한다. 숭고란 말은 이처럼 항시 죽음에 근접한 어떤 생명 초월의 현상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 행위 또는 정신에 은닉된 수수께끼같은 이성을 넘어서는 고귀함에 대한 표현 불가능한 개념의 언어일 것이다. 도담은 소방관인 아빠에 대한 헌신적인 생명 구조의 노력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아빠가 기관지 질환으로 입원한 엄마의 부재 속에서 해솔의 엄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해솔을 물속에서 구조한 이후 도담은 해솔과 우정을 쌓아가고, 이윽고 어린 사랑의 싹이 피어난다. 그리고 둘 만의 비밀 장소에서 더욱 특별한 관계가 된다. 도담은 아빠와 해솔 엄마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아빠의 핸드폰을 훔쳐보고 그들이 숲속 계곡에 있는 칠성폭포에서의 만남을 알게 된다. 도담은 해솔을 설득해 아빠의 소방관용 랜턴을 손에 쥐고 어두운 숲속 밤길을 오른다. 해솔은 그만 둘 것을 청하지만 도담은 듣지 않는다. 그녀는 존경하던 아빠에 대한 믿음이 훼손 된 것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것인데, 이윽고 현장 근처에 도달한 도담은 두 사람의 만남을 보고 비명을 지르려 한다, 그때 해솔은 도담의 입을 틀어막고, 급작스레 랜턴을 폭포 용담에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에게 비춘다.

 


폭우가 쏟아지는 계곡에서 당황한 두 사람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해솔의 엄마 미영을 보호하려는 창석은 속수무책으로 떠밀려간다. 수일간의 탐색 끝에 소설의 첫 문장처럼 두 시신이 발견된다. 빼곡하게 다슬기로 덮인 부패한 두 구의 시신. 작은 마을은 온갖 악취나는 상상력으로 뒤덮인다. 고아가 된 해솔은 외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 도담의 집을 찾지만, 도담의 엄마 정미로부터 악의에 찬 독설을 듣는다. 너희는 악연이야, 얽혀서 좋을 게 없어, 절대로 연락하지 마.”, 그리고 도담으로부터도 그 어떤 기약의 말도 듣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린다.

 

정미의 차가운 언어는 해솔의 엄마 미영과 남편 창석의 관계라는 수치스러움과 분노에 대한 고통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해솔이 어떤 죄책감을 가져야 했을까? 외로웠던 엄마, 친절하고 존경받는 의인이었던 도담의 아빠 창석에 대한 호감, 그들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소년이 질 수 있었을까?

 

정말 사랑 했나 아니면 그저 욕망에 도취한 불장난이었나

그 둘은 어떻게 다른가.”   - 82쪽에서

 

거침없이 휩쓸 듯 무서운 속도로 흐르는 물이 급류다. 그런데 이 단어는 어떤 현상의 급작스러운 변화라는 비유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이 둘의 의미를 그 물리적 속성을 지닌 급류 실체로서의 장면과 이 장면을 겪은 후 깊은 내적 영향을 갖게 된 두 사람의 변화로 그려내고 있다.

 

참으로 그 경계를 규정할 수 없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출현한다. 사랑과 욕망의 도취, 과연 다른 것인가? 다르다고 제시하는 혼인으로 취득된 가정의 불가침성에 대한 법 규정과 도덕의 덕목들, 그런데 사랑이 과연 법과 도덕으로 무 자르듯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던가? 대체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가? 해솔은 할머니와 함께하는 궁핍함 속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소박한 꿈의 실현을 위해 약학과에 진학한다. 도담의 그리움에 대한 갈망을 억제하며, 약사가 되어 도담과 함께 하는 삶의 시간을 위해.

 

이후 도담과 해솔의 삶의 시간을 오가며, 3년 만에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오랫동안 참았던 그리움, 그리고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과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 미안함, 그간의 외로움과 설움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시간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3년이란 시간의 공백을 없애려는 듯 다급하게 하나가 된다. 서로의 존재가 아팠던두 사람은 절박하게 서로에게 안긴다. 나는 서로의 존재를 아파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이 사랑의 정의가 어쩌면 숭고와 어울리는 우리가 찾는 그 사랑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폭포 사건을 시작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는 도담과 해솔을 중심으로 그네들의 삶의 단면들을 비추며, 작가의 말처럼 급류처럼 느껴지는 삶 속에서안녕을 찾아가는 여정을 쫓는다. 아빠를,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과 그리고 존경의 마음이 훼손된 것에 대한 분노, 한편으론 해솔과 도담 서로에 대한 미안함이 얽혀 두 사람의 상처입은 마음은 갈등과 치유 사이를 오가며, 고통의 기억을 떠나지 못한다. 이 여정 속에서 사랑에 대한 무수한 정의가 직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아마 그러한 사랑의 정의들은 성장, 혹은 성숙 과정의 언어일 것이다.

 

도담은 상처입은 사람의 냄새를 도처에 풍기며, 그녀에게 각인된 사랑이란 언어는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담에게 사랑은 사기이고 기만인, 자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두 글자로 퉁 치는치사한 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의 엄청난 크기에 대한 도담의 오인 때문일 것인데, 다른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기에 사랑을 가장 좋은 것이라 믿는다고 사랑 예찬론자인 친구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해솔은 도담과 함께 있다가 정미에게 발각됨으로써 다시금 강제 이별을 하게 되고, 졸업 후 소방서 구조대원이 된다. 그리고는 각종 화재와 재난 현장 속에서 생명을 구출하는데 헌신하고, 수차례에 걸친 화상과 생명이 위태로운 부상을 입기도 한다. 동료들은 그의 행위를 자살행위라고, 정말 목숨을 던질 기세였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구조하는 데는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이면서 자신을 구하는 데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왜 해솔은 약사라는 안전한 직업을 뒤로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소방관이 되었을까?

 

도담이 물리치료사로 일하는 병원에 해솔이 중화상을 입고 실려 옴으로써 8년 만에 두 사람은 다시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이었을까? 이는 도담이 해솔에게 하는 말속에 그 답이 있는데, 너는 너를 용서했니?”라는 두 사람 모두 12년간 자신들에게 한 번도 하지 못한 질문을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거울이 필요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어쩌면 이 서로에 대한 거울은 앞선 서로의 존재에 대한 아픔의 감응이었을 것이다.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잘 알려진 소설에 그녀가 유일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하는 현실, 짓눌리고 짓눌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을 존재를 버티게 해 주었던 생존의 문제였던 사랑의 기억이라는 문장이 있다. 사랑은 이처럼 한 존재가 버티는 거대한 힘일 것이다. 그것은 잘 포장된 욕망이나 이기심이 아니며, 멋대로 핑크빛으로, 하트 모양으로 정하는 마케팅 같은 것도 아니다. 또한 외로움이나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며, 내 상처만이 더 크다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그런 냉소적 오만의 잣대를 들이대며 사랑의 진정을 폄하하는 가난한 마음도 아니다. 특히 사랑은 허술한 교리 따위는 더욱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사랑이 아닐 것이다.

 

아마 대형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 매몰된 현장에서 눈이 감겨 오는 데,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는 해솔의 말처럼 그때 생각했어. 누군가 죽기 전에 떠오르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이란 말을 발명한 것 같다고. 그 사람에게 한 단어로 할 수 있는 말을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만든 것 같다고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여기서 도담이 사랑은 기만이고 사기라고, 그저 설명할 말이 없어 한 단어로 퉁 치는 그런 말이 아니게 된다. 드디어 사랑은 지고한 숭고함에 이른다. 해솔이 도담에게 말하지 못했던 진실의 이야기가 주제에 이르기 위한 전복의 언어로 발설되는데, 이 문장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비밀로 하기로 한다.

 

바다에 재가 되어 뿌려졌던 아빠 창석의 기일을 한 번도 치룬 적 없었던 도담은 사랑의 숭고성 앞에 해솔과 함께하는 삶을 결정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해솔과 함께 추모선을 타고 하얀 국화송이를 바다에 띄운다. 아빠 창석이 하던 일은 생명을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않도록 맞서는 일이었음을. 두 사람은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는 마지막 문장처럼, 삶의 급류라는 휘몰아치는 시간을 견뎌내고 사랑과 생명에 대한 숭고한 의지를 배웠던 것일 게다.

 


누구든 급류에 휩싸여 그 흐름에 떠내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급류는 현실의 폭우 속 강물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세상이라는 급류에 더 많이 속수무책이 될 때가 있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한동안 잡아 얽매이게 한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바로 그것과 마주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는 듯하다. 도담과 해솔은 그 마주함에 이르는 데 12년이 걸렸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책임을 덮기 위해 급류라는 그 사건의 기억들로 회피하고 있었음을, 두 사람은 그것을 서로라는 거울을 통해 발견하고, 바로 그 거울 됨이 사랑임을 확인한다. 그래  "소용돌이에 빠지면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야 하는 것"일 게다. 이 사랑 이야기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나오려니 조금은 더 머물고 싶은 아련함이 남는다. 해솔과 도담의 그 절박한 사랑의 순간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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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14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역주행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도서관에도 예약이 꽉 차 있네요^^

필리아 2024-11-14 22:02   좋아요 1 | URL
저도 명쾌하게 역주행의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요즘 한국문학은 은유와 상징 등 책읽기의 숙련(?)된 사유를 요구하거나, 사변적인 경향이 있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아주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로 쓰여 있어요, 그리고 사랑이라는 주제가 두 어린 인물들(열일곱살)의 성장(서른살)과 함께 정서적으로 친근한 의미로 풀어내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천박하지 않으면서 어떤 고결한 품위가 손상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에요, 또한 다소 충격적(?)인,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지니게 된 죄책감을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인물을 통해 그것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결코 이야기의 재미를 손상시키지 않고 더욱 빠져들게 하는 점이 아닐까해요. 두서없는 제 소견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페넬로페님, 좋은 꿈 꾸는 밤이 되시기를요. :)

p.s. 통속적이라는 의견도 있네요. 네, 그 통속성이라는 친근함이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맞서고자하는 어떤 숭고함으로 소설 전체의 배경처럼 흐르는 탓에 얄팍하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필리아 2024-11-14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주행하는 소설에 대한 이런 소박한 분석도 있네요.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도 역주행한 소설인데요, 두 작품 모두 소위 ˝피폐한 사랑 이야기가 인기가 있다?˝는 공식에 들어간다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지 리딩(술술 읽힌다)이라는 거구요, 특히 10~20대가 선호하는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네요. 뭐 다 거기서 거긴인 얘기 같네요.... , 결국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내고 있는가, 어떤 평을 할 수 있는가는 독자들의 몫이겠지요.

페넬로페 2024-11-14 23:03   좋아요 1 | URL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몇 편 읽었는데 감상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은 감이 안 와서요. 계속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Syndromes of Corruption : Wealth, Power, and Democracy (Paperback)
Michael Johnston / Cambridge Univ Pr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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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 또는 국가의 부패 양상을 비범하게 통찰한 걸작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오랜 부패 양상인 엘리트형 카르텔의 만성적 부패에 대한 참조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왜 『부패 증후군, Syndromes of Corruption』의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지 못하는 지의 한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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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terminate Inflorescence : Notes from a poetry class (Hardcover) - 이성복 시인 <무한화서> 영문판, 2023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번역도서부문 (바리오스상) 후보작 선정
Lee Seong-bok / Penguin Books Ltd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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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쥐어짜낸 말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써진 언어들이고, 마음에 박히는 시론집이다. 이 영국 판본 『무한화서』는 이성복 시인에게 어떤 좋은 일을 내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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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제안들 4
나탈리 레제 지음, 김예령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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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모호하게 무너져 내리면서 추억의 희미한 빛이 모습을 드러내고 유령들이 가벼운 신호를 보낸다. ‘그림자조차 없는 어둠 속에 이 무슨 빛과 그늘의 환영들인가!’”  -15

 

이 하나의 인용 문장이면 사뮈엘 베케트가 글쓰기로부터 찾으려 했던 모두 것을 말한 것이 되지 않을까? 1946~1947년경 쓴 것으로 추정되는 몰로이속 문장 존재한다는 것의 경악스러움 뒤에 숨은 원인, 침묵을 다시 데려오는 것, 그것이 사물들의 역할이다.”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과 부재 사이에서 글쓰기란 것을 통해 그 알 수 없는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돌파하려는 인간을 엿보게 된다.

 

나탈리 레제의 글은 이로써 두 번째가 읽기가 된다. 발표순서는 전후가 바뀌기는 했지만 앞서 읽은 전시 L'Exposition는 1850년대 전후인 프랑스 제정2 기 시대의 최고 미인으로 알려졌던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의 일생에 걸친 사진작업을 통해 어둠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 ‘부재의 덩어리인 구멍을 보게 하는, 거기에 영원히 고정된 존재의 그림자를 읽으며 고통 받았던 인물의 삶에 대한 애도를 가히 압도적으로 나타낸 강렬한 작품이었다. 이것이 내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는데, 레제의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시선이 비가시성(非可視性)에 맞추어져있음에 대한 선행적 이해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사뮈엘 베케트에 대한 이 저술 또한 그의 침묵으로 일관된 작품들의 그 근원적 부재함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가시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담겨있는 무엇에 대한 발견 혹은 발굴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책은 베케트가 말년의 삶을 지냈던 티에르탕 파리 14, 르미뒤몽셸에 있는 요양원의 공허가 이죽거리는방을 훑는 시선으로 시작된다. 아무 장식없는 침대, 방문객을 위한 소파 하나, 서랍장 하나, 서가 몇 개, 그리고 창가의 책상 하나, 단테의 신곡을 평생 손닿는 데에 두고 읽었던 베케트가 연옥편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를 상상한다. 요양원 창가의 책상에 앉아 산란하는 불빛 아래에서, 출몰과 소멸과 이동하는 몸과 지나가는 목소리들을 위한 이 장소의 수수께끼를 두고, 어쩌면 베케트는 연옥이란 이런 것이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향수에 잠기라고 처단하는 곳, 어슴푸레한 빛 속에 집요하게 떠오르는 영상들을 찢어내기 위한 말들을 찾아내라고 강요하는바로 이곳임을.

 

지옥과 천국 사이의 유보된 시공, 연옥은 다름아닌 이생임을, 그러니 베케트는 흐릿한 빛 속에서 삶이라는 것, 현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집요하게 찾아나서야 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글쓰는 직업을 가진 자에게는 형상을 무너뜨리는 끈기 있는 작업의 요구였으며, 언어라는 목재 안의, 언어라는 목질적인 실체 속의 아이러니컬한 현전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어렵다. 언어라는 목질은 무엇이고 그 실체속의 모순 혹은 부조화한 실존이란 또 뭐라는 말인가? 어쩌면 그가 뒤늦게 알게 되어 낸시 커나드의 디아워즈 출판사가 공모한 영시작품 접수 마감 당일에야 부리나케 쓴 98행의 호로스코프(whoroscope)의 마지막 연()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네, 그것은 움직인다네.”라는 절대적으로 현존하면서 포착 불가능한, 단지 포착 불가능하되 구조와 리듬으로서는 엄연히 현존하는 시간이라는 주제에서 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그것 아니었을까?

 

베케트의 작품들 거의 모두에서 이러한 현전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보게 된다. 이 시는 완벽한 타원형 구()라는 모든 생각의 알()에 대한 예찬인데, 어쩌면 이 구는 구속임과 동시에 그것의 시원성과 운명의 수수께끼 일체를 품고 있는 이미지와 유추 가능한 신성의 의미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탈리 레제는 수많은 베케트의 흔적에 대한 기록들 - 누군가의 회고 발언, 미국 텍사스, 독일 베를린 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베케트의 수고 노트와 관련자들의 메모, 빛바랜 사진들, 그리고 베케트의 작품들 -을 종횡하며 깊고 세밀한 관찰과 상상의 눈으로 베케트의 말없는 말 속에 있었을 생각들에 접근을 시도한다.

 

에피소드 하나, 제임스 조이스를 스승처럼, 자신이 쓰려는 글쓰기의 모델로 여겼던 베케트는 조이스를 흉내 내어 작은 에나멜 구두를 신고 다녔던 모양이다. 발과 손이 작은 조이스의 구두를 신은 베케트는 그로인해 지독히 고생했는데,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상깊은 시작 부분에 에스트라공이 너무 작은 신발 한 짝 때문에 아파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이스를 넘어서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의 표출이거나 아니면 삶이라는 굴레에 대한 염오(厭惡) 아니었을까.

 

에피소드 둘, 19465, 베케트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레탕 모데른계속의 첫 번째 텍스트를 게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단편의 2부의 게재는 보부아르가 거절하게 되는데, 진정한 완결부를 거부한 것에 베케트는 실의에 빠진다. 보부아르는 글쓰기의 고뇌라는 문제를 받아들일 의향이 없었기에, 그만 문턱에서 멎어버리도록 합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베케트의 작업 안에서나 밖에서나 끝까지 방어해야 할 하나의 불행(아마도 현전이라는 궁극의 불가능한 의미를 찾으려는 집요함 아니었을까?)을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표명하려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베케트가 196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보부아르는 베케트의 이 불가능한 집요함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에피소드 셋, 프랑스를 대표하는 출판사인 미늬가 있다. 1950년 제롬 랭동은 이 출판사를 창업하고 변변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195010월 지하철에서 누군가 두고 내린 원고를 발견한다. 베케트의 대표작중 하나인 몰로이. 이 젊은 출판사 대표는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았고, 이후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등 베케트의 작품들을 독점 출판하게 된다. 유명 언론사 주필로서 문예계의 대부였던 장 폴랑은 제롬 랭동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몰로이건에 갈채를 보냅니다. (...) 바로 그 책으로 귀사의 위상은 결정된 겁니다.”, 랭동은 베케트를 대신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베케트가 오늘날 미늬 출판사가 존재하게 한 일등 공신이라는 말일 것이다.

 

1950년대 들어 베케트는 일 드 프랑스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인 위시의 마론 강변 언덕배기에 집을 짓는다. 그것은 한 개의 차가운 입방체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주인과 마찬가지로 회색빛을 띤 벽을 가진 멋없는 덩어리, 더구나 은둔을 지켜내기 위해 빙 둘러 시멘트 블록의 담까지 쌓아 주변의 풍경을 차단하고 지평선을 막아 봉쇄하기까지 한 집이었다고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침묵, , 그 벽 안쪽에서 좀 더 잘 보기 위해 스스로를 눈 먼 상태로 만들어버리려 했음이다. 어머니의 자궁, 또는 무덤, 그는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생의 출몰과 소멸의 시간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레제는 이탈리아의 시인 레오파르디의 무한을 인용하고 있는데, 베케트가 좋아했던 시인이고 보니 그 영향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내겐 늘 정다워라 이 쓸쓸한 산이여 / 둘러친 울타리여, 그 가두리에 / 먼 지평선은 시선에서 거의 지워지고 / 누워 바라보노라 / 울 너머 한없는 공간의 초인간적 침묵이여 / 하마터면 시들고 말았을 내 마음 속에“ - 86, 무한중에서

 

베케트는 자기 입방체, 저 알 속에 들어앉아 말들 사이의 각도를 측정하고 온갖 모음 충돌과 생략과 반복을 조합한다. 지나가는 시간은 다만 이 변함없는 꿈이었을 뿐, 지나가는 덧없는 빛은 오직 시간을 지니지 않은 회색의 공기였을 뿐이라고. 집 안에 틀어박혀 언어에 매달린다. , 정말 지독한 집요함이다. 무한히 주관적이고 은밀하며 집요한 성향. 아마 이것이 베케트라는 인간, 그의 작품들 자체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베케트의 작품이 발하는 그 길고긴 침묵들과 주관성에 곧 질식되곤 하는데, 아마 그것이 바로 작품이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레제의 이 세밀한 관찰과 상상의 사유로 인해 다시금 베케트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아주 시니컬한 미소를 짓게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넷, 한 독자가 베케트를 발견하자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일생동안 선생님의 열렬한 찬미자였고, 40년 전부터 죽 선생님의 책을 읽어왔답니다.” 작가는 이렇게 대꾸했다. 참 피곤하시겠습니다.”, 낄낄낄~, 베케트를 끼고 산다는 것은 삶의 관계가 피폐해짐을 각오해야 하는 것 아닐까? 베케트의 말처럼 그건 정말 지독하게 피곤한 일일 게다. 여기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비밀 한 가지 누설! 연극공연의 준비를 하던 연출자 로제 블랑은 베케트에게 작가로서 요구할 요인들을 말해줄 것을 상의한다. 그때 베케트는 단 한 가지, ‘중절모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포조: 저 자에게 자기 모자를 줘.

블라디미르: 자기 모자를?

포조: 그는 모자가 없으면 생각을 할 수가 없거든.

 

중절모자야말로 존재하고자 하는 집요함에 대한 보잘 것 없고 조롱어린, 동시에 비장한 상징이기 때문인데. 이는 불확실하지만 집요하게 더듬는 사유, 비틀거리며 길을 잃는 순간 사유의 기호 그 자체인 까닭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프랑스는 물론 영국 등 당대의 언론 문예비평들은 악평들을 쏟아냈던 모양이다. 이제까지 끔찍함이란 것에 이 정도로 영합하는 극은 없었다. 작가는 지독한 악취 속에 뒹군다. 심장이 조여들고 살갗에 소름이 끼친다.”, “사뮈엘 베케트는 가장 튼튼하다는 위장에도 소화불량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썩은 고기 한 조각을 파리 사람들의 머리에 던진다.”

 

움직임 없는 움직임인 모자, 또는 용해에 맞서 집중을, 토로에 맞서 제거를 이야기하는 제거의 소용돌이, 그리고 계속되는 침묵은 시간을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모욕처럼, 아니 추악한 혐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가혹한 비평들이지만. 한 걸음 더 내딛으면 어렴풋이나마 그 집요하게 추구되는 것에 대한 미약한 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멀찍이 물러나서 냉정하게 바라보는 존재를 탐구하는 또 다른 시선은 사실 소름끼치게 서늘한 기분을 갖게 한다. 베케트의 글쓰기는 추억이 입는 영광의 몸이자 어느 날 멈춰버린 것과 머지않아 완결 될 것 사이에 세워진 정경, 유령들을 불러내려는 정신의 성원에 도달하려는 그 이미지의 여정이다. 다른 말로 자궁(womb)과 무덤(tomb)이 베케트적 주제이고, 그래서 침묵은 불가피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어둡고 음침하며 침묵이 에워싼 장소, 그러나 생명과 소멸의 순환하는 그 시원의 시공은 말 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Jerry Bauer, <Portrait of Samuel Beckett in Paris>

 

이제 카메라 앵글의 귀퉁이 처박힌, 글쓰기에나 맞춤이었던 한 인간의 사진을 나는 응시하고 있다. 사진작가 제리 바우어가 찍은 말 없는 그림자를 나타내는 데 안성맞춤의 배치를 이루는 신중히 뒤로 물러난 인간의 초상을, 가장 낮은 곳에 틀어박혀 움직이는 글쓰기의 취약함이자 그 힘 자체인 대상을 바라본다. 시집 , 입이 없는 것들에서 이성복 시인이 말한 연약한 물풀에 몸을 감고 밤새 뒤척이며 날 새기를 기다리는해달의 숙명 같은 것일까? 문학이나 그 후광조차 싹 걷어낸 이 사진을 바라보며, ()형태 속 단호한 형태의 그 침묵의 억척스러움, 생명없는 생명을 읽는다. 아무튼 레제의 글을 읽다보면 안개 자욱한 미지의 장소를 거닐며 뜻하지 않은 보물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간결한 문장 속에서 풍요한 사유의 길로 이끄는 레제의 글은 항상 맛있다. 그래 유일하게 풍요로운 탐색이란 땅 파기, 잠수, 정신의 수축, 하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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