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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성향의 존재들일까?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갈 것도 없이 우리들과 사회가 막 통과해온 산업사회, 즉 엄격한 규율로 통제되던, 산업노동에 적합하게,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몸짓으로 훈육되고, 규율에 의해 금지와 억압에 익숙해진 존재들이었다. 때문에 자본과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기에 속박된 자유를 더욱 극명하게 느껴야했고, 자유는 항시 인식되는 언어이자 개념이었다. 그런 까닭에 저항할 대상이 있었으며, 혁명의 언어가 존재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11쪽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떤가? 신자유주의가 거세게 세계를 장악하고, 산업사회는 디지털 정보사회로 전환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에게 내면화시킨 것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kt)로서 무한한 자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환상”이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자유롭게 경쟁에 참여하는 ‘성과(成果) 주체’라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 자아’라는 것은 성과와 최적화를 강요하는 형식으로 작동하는 내적 강제와 자기 강제에의 예속을 의미한다.
1. 자유 없는 자유의 환상 - 자발적 착취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역할을 강요한다.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는” 까닭이다. 그 어떤 주인에도 묶여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하지 않으면 성과경쟁에서 낙오하기에 끊임없는 자기 착취에 내몰린다. 자유라고 여겼던 것이 절대적 자기 노예화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외관은 타자에 착취당하는 노동계급이란 없음을 선언하지만, 모두를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이다. 신자유주의란 바로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기이한 경영자의 고독이며, 이것을 생산양식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기괴한 변종이다.
공산주의를 실험하던 국가들의 붕괴 때문에 공산주의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독재가 불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적대하는 계급투쟁 시스템이기를 그만 두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매우 영리한 시스템이다. 실패하면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착취적 지배질서이기에 사람들의 공격성은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자신을 착취한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되지 못하고 우울증 환자가 되고 만다. 이렇듯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욕구를 개인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하게 하여, 스스로 예속화되어 자기 착취를 강제하는 손 안 되고 코 푸는 시스템인 것이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고도의 자유에 의존한다.(...) 디지털 빅브라더는 자신의 일을 수용소 주민들에게 떠넘긴다.” -20쪽
사람들은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유주의 지배질서 하에서 무한한 자유 속에 있다고 여긴다. 여기에 사회의 디지털 네트워크화는 서로 격렬하고 자유롭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환경을 마련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수많은 개인 정보를 소셜네트워크에 흩뿌리며,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다고 느끼며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먹은 것, 여행 한 것, 순간의 감정 상태, 취향과 소소한 사생활의 편린들에 이르기까지 까발리고, 좋아요와 팔로우를 누르며 자기 조명과 자기 노출을 드러낸다. 산업사회인 규율사회의 파놉티콘은 일일이 시각적으로 이러한 개인들을 감시했지만, 보이지 않는 디지털 파놉티콘인 웹과 앱의 세계는 그 어떤 시각적 제약도 없으며, 하물며 빅데이터에 의한 디지털 파놉티콘 주민들의 내적 욕구까지 파악한다. 빅테이터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기록된 사람들의 행동과 무의식적 행위까지 감시하고 관찰한다. 이제 디지털 정보사회는 별도의 감시자 없이도 참여자들의 자발적 감시에 의해 작동하게 된 것이다. 데이터는 그 어떤 강요도 없이 주민들 각자의 내면적 욕구에 따라 빅브라더에게 넘겨지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사회는 이렇게 투명해진다. 이곳에서는 폐쇄성과 내면성은 거부되고, 개방적 투명성만이 환영받는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과 생산성의 가속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기에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되고 배제, 제거된다. 이렇게 투명성의 경제는 불일치를 억압하고, 평준화를 촉진하며, 획일화한다. 이러한 지배기술을 가능하게 한 것은 피지배자를 예속시키기 위한 성물(聖物;Devotionalie)인 스마트폰의 광범위한 보급이다. 지배는 감시업무를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써 효율성을 제고하는데, 스마트폰은 효과적인 감시도구이자 고해실로써 그 기능을 멋지게 해내고 있다.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 된 것이다!
2. 신자유주의 심리기술 - 자아 최적화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정보사회의 동력은 이렇듯 자유를 적극 긍정, 옹호하며, 점점 더 허용의 형식을 취한다. 너그럽고 친절하고, 부정성을 집어던지고 자유의 모습을 띤다. 오늘의 지배질서인 신자유주의는 이처럼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기에 사람들에게 그 어떤 권력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예속된 주체들은 자신들이 예속 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 스마트 권력은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이며, 긍정적 감정을 일으켜 의존적으로 만든다. 그리고는 주체의 욕구에 부응하려 애써 바로 그것을 착취한다. 오늘날 자유의 위기는 바로 이것이다. 자유를 부정하기보다 자유를 착취하는 권력을 상대해야 한다는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호감을 사고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작동하는 체제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그래서 ‘좋아요-자본주의’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억압과 폭력의 규율권력은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소비자본주의, 디지털정보 사회로 자본주의의 부정성을 긍정성과 투명성, 외형적 자유주의 사회로 탈바꿈했다. 긍정성, 투명성, 자유로움 등, 친근하고 유혹적인 모습은 사람들로부터 억압과 통제의 대상을 잊어버리게 했다. 즉, 인간 내면을 장악하여 심리적이고 심리정치화 함으로써 그 동력을 개개인 스스로에게 떠넘기는 영리한 체계가 되었다. 이것을 작동케 하는 주요소를 심리기술과 자아기술이라 부른다.
사람들을 충동에 조종되는 미숙한 동물로 만들어 대중의 퇴행을 초래하는 원격지배적 프로그램을 ‘심리기술’이라 하며, 자신의 행동규칙을 공고히 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모시키고 자신의 특수한 존재에 수정을 가하여 삶을 일정한 미적 가치와 수준의 스타일을 갖춘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수행하는 의식적이고 의욕적 실천을 ‘자아 기술’이라 한다. 산업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권력기술이 심리적인 자아기술로 전환된 것이다. 이 매끈한 신자유주의 기술은 그 어떤 충돌의 지배권력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자발적인 무한한 자유 속에서 활동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자기 경영자가 된 사람들은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를 위해 자기통제와 자기착취를 통해 성과주체로 활동한다. 신자유주의 지배질서는 바로 이 두 기술을 완전히 포섭한 체계이다. 개개인들은 이렇게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자유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자아의 최적화와 복종, 자유와 자기착취는 하나의 동일 개념이 된 것이다. 너무도 세련된 신자유주의의 자기착취의 형식은 ‘자아 최적화’라는 이름으로 자기계발 - 자기관리 워크숍, 모티베이션 주말 워크숍, 인성세미나, 멘탈트레이닝 등 - 이라는 끝없는 자기 효율성 향상의 과실을 거의 아무런 자원도 들이지 않고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비교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켜 시장 논리에 종속시킨다. 인간조차 양화(量化) 가능한 사물화 함으로써, 철저히 상품화 한다. 나는 효율과 성과의 이름으로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를 주문하는 자기계발서들의 흉물스러움이 결국 인간 정신의 착취를 통해 인간들을 파괴하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자기검열, 자아를 대상으로 하는 이 끝없는 자기 최적화는 자기 자신을 적대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싸움을 강제한다. 마치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처럼 활동하면서 무한한 성과와 자아최적화의 복음을 설교하는 미국산(産) 개신교 목사들의 천박하고 사악한 설교와 닮아있다. 참으로 불쾌한 인류 악이다!

인간 인격을 긍정성의 경제에 완전히 묶어두려는 신자유주의의 자아최적화라는 긍정성 강제의 통치술은 인간을 파괴한다. 인간은 결코 긍정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아니요’라고 말함으로써 삶의 생동(生動)력을 획득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인간에게 고통과 반항은 영혼에 긴장을 선사하는 삶이라는 경험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 긴장에서 강인함, 견뎌냄, 창의성과 용기, 위대함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긍정성을 지배교리로 하는 심리정치의 질서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는 싫어요가 없다. 오직 좋아요와 하트라는 영혼에 아첨하는 누름만 있다. 친절한 빅브라더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아낌없이 데이터와 정보를, 그리고 자신의 행동 자취를 넘겨준다. 사람들은 이 디지털 파놉티콘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 자유의 감정이 바로 이 시대의 심각한 문제이다. 존재하지 않는 빅브라더는 빅데이터라는 주체없는 존재로써 결코 종용하지 않은 파놉티콘 주민들의 자발적 자기 착취를 통해 거의 무제한의 재화를 얻는다. 빅데이터라는 새로운 통제장치는 가공할 만한 효율성을 자랑한다. 케케묵은 오웰식 감시사회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이체로서 심리에서 생산력을 발견하는 체제이다.” -41쪽
신자유주의의 주요구성 성분인 소비자본주의는 더 이상 산업자본주의의 상품을 팔지 않는다. 의미와 기분을 판매하고 소비한다. 신자유주의는 생산성과 성과를 높이기 위해 기분이라는 자원, 즉 자유의 감정, 개성의 자유로운 발산을 동원한다. 이것이 오늘의 시대를 ‘감성자본주의’라 부르는 이유이다. 기분이라는 감성을 촉진하는 것은 소비 극대화에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인데, 사물이 ‘나’인 기분을 소비하게 할 때, 그것은 무한히 소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감성 디자인이라는 이 영악한 감각도 소비극대화를 위한 표본적 기분을 모델링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 도사린 문제는 이것이다. 기분이란 반성 이전의 층위, 다시 말해 행위 하는 인간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반(反)의식적 신체적 충동적 층위에서 비롯된 행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성이 개입하기 전에 빼앗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판매소비기술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심리 정치적 통치술’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의 전형적 실례(實例)가 될 것이다.
3. 감성자본주의와 데이터주의((다타이즘,Dataismus)
감성자본주의는 기분을 자원화 하는 것 이외에 또 하나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노동의 게임화’다. 게임은 노동을 감성화하고 극화(劇化)하여 더 많은 모티베이션(동기,자극)을 생성한다. 신속한 성과와 신속한 보상 시스템으로 더 많은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거의 모든 상품, 서비스 주체가 노동을 게임화 하여 자발적 참여자를 끌어 모으고 즉각적 보상으로 유인한다. 이제 놀이의 고유한 정의인 노동과의 단절을 전제로하였던 놀이가 노동의 지배 메커니즘에 예속된 것이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도 좋아요, 팔로워의 숫자처럼 보상의 논리에 따라 게임화되고 있다.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은 이렇게 파괴되고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상업화의 시선을 피해가지 못하는 세계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어떤 시체가 사회를 지배한다. 그것은 노동의 시체다.”라고.
“인간의 의식조차 되지 않는 모종의 애착과 욕망들, 그냥 그럴 뿐인 것들, 의식적 자아에 잡히지 않는 무의식, 빅데이터는 이것들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이를 착취하는 심리정치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92쪽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기술들, 이 모든 것은 빅 데이터로 귀결, 수렴된다, 이제 빅테이터는 인간 행동들을 감시, 통제하는 것을 넘어 심리정치적 조종의 대상으로까지 이용된다. 미국의 빅데이터기업 액시엄(Asxiom)社의 광고문구는 “우리는 당신의 고객에 대한 전방위 시선을 제공합니다.”라며 사각지대가 없는 모든 시야에서 인간 개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 행동양식을 제공한다고 선전하는 것은 그 예이다. 이른바 ‘데이터주의(다타이즘,Dataismus)’의 대두이다.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측정해야하고, 이러한 데이터는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걸러내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렌즈로써 인간행동의 미래를 예언하는 놀라운 능력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장의 토대를 이루는 생각은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면 이론 따위는 불필요하고, 데이터만으로 명확한 지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숫자가 모든 걸 말해준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 세계의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막론하고 변증법이라는 치명성이 예기치 못한 돌발적 상황을 낳지 않았던가? 18세기 계몽주의가 출현하면서 직관과 주관성을 여지없이 깨부수며 객관적인 것, 이성적인 것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설레발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이성은 퇴조하고 감성의 시대이지 않은가. 나아가 이를 하나의 도구로 한 데이터 물신주의가 들어서 디지털 계몽주의를 부르짖으며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지 않은가.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육체성과 욕망을 억압하던 시대는 저물고, 그 어떤 이성도 지식도 불필요하다며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인간과 사회의 행동을 예언하고,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인 것은 인간 삶의 무수한 의미들과 인간적 인식을 결코 만들어내지 못한다. 단지 수치(數値)와 계산을 통해서 아무 맥락도 없는, 의미가 공허한 삶의 계측자료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의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데이터에는 의미인 이야기가 부재하다. 다타이즘에는 그 어떤 윤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셀프 트레킹(self-tracking)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반론은 어쩌면 궁핍에 내몰린 인간의 가느다란 마지막 하소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타이즘의 데이터 성애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천한 야만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양화된 인간으로부터 그 어떤 자아도 발견할 수 없다. 온갖 데이터로 분해된 의미의 진공 상태일 뿐, 망상적인 또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이러한 항변이야 어찌 되었건 지금의 시대에 인간 모두가 디지털의 총체적 기억 속에 갇히고 있음은 분명한 현실이다. 인간의 인터넷이었던 웹 2.0의 시대는 저물고 사물의 인터넷인 웹 3.0으로 확장되어 디지털 통제사회는 완성되어가고 있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을 가능하게 만든 세계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일상 용품에 인터넷 주소가 주어지고, 사물들 자체가 능동적으로 정보 전송자가 되어 인간의 삶과 행위, 습성을 보고하고 있다. 빅데이터는 오웰의 빅브라더와 달리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끊임없이 덧붙여지는 데이터 기록으로 인간의 의식적 자아에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까지 파고들어 인간을 착취하는 심리정치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데이터 패키지로 다루어지고, 상품으로 전락하여 거래된다. 액시엄의 카탈로그에는 인간이 70개 종류의 상품으로 분류 제시되어 있다. 경제적 가치가 가장 낮은 등급은 쓰레기(waste)로 저장되어 있으며, 시장가치가 높은 등급은 슈팅스타(shooting star)로 기재되어 있다, 새로운 디지털 계급이 만들어진 것이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바놉티콘(banopticon)’이 되어 경제적으로 무가치한 인간들을 쓰레기로 낙인찍어 폐기처분하는 기구로 역할 하는 세계가 되었다. 이미 각종 금융시스템에는 불청객으로 낙인찍힌 인간 쓰레기등급들에게 그 어떤 신용대출도 허락되지 않는다. 빅데이터에는 개념도 없고 정신도 없다. 사물에 내재하는, 사물을 그 자신으로 만드는 근거인 ‘개념’이 없다는 것은 절대무지를 의미한다. 빅데이터, 데이터주의자들은 바로 이 절대무지를 절대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빅데이터가 추종하는 믿음이 얼마나 공허한가는 통계학의 본성을 꿰뚫어보면 그 무지가 드러난다. “통계학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위대한 인물들 대신 엑스트라들만 고려하는 체계이다.” 다시 말해 거대한 군중의 움직임을 중요하고 주된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모든 역사 서술에 대한 몰개성적 해석을 씌우는 작업이며,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군중이 얼마나 구역질 날 정도로 천박하게 획일적인지를 증명할 뿐이다. 통계수치란 인간이 점점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심리정치 세계의 특징인 투명한 정보사회의 특징적 현상이 획일화인 것에 완전히 일치한다. 빅데이터는 신자유주의가 도달할 필연적 귀결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불일치를 제거하여 매끈하게, 순응하는 동일한 것들로 만듦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가속화, 성과의 고효율화를 달성한다.
4. 결 어 - 이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신자유주의 디지털 정보사회가 내적 강제와 자발적 착취에 기초한 체계이며, 자유가 부재한 세계를 자유로 생각게 하는 심리사회라는 것, 또한 인간을 비롯한 유무형의 모든 존재가 거래대상이 되어, 존재 의지와 앎이 말살된 절대무지를 지향하는 종교화된 다타이즘의 세계임을 알아보았다. 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지금 이러한 실상임을, 나아가 이것이 더욱 완벽하고 공고화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사회의 완성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저자 한병철은 자아기술, 심리기술에서 벗어나 ‘삶의 기술’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 예속화의 매체인 심리정치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기존의 언어 사용자의 의지에 반하는 언어의 사용과 언어 기능의 변환을 마련해야 하고, 이를 통해 세력관계를 역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세력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며, 언어 기능의 변환인가?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보 노릇하기는 언제나 철학의 기능.”이었다며, 새로운 표현 방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철학은 본래 바보였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이 구체적이고 실천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묘사한 ‘허클베리핀’만한 인물이 없을 것 같다. 허크는 기성의 언어, 어른들이 사용하는 사유와 언어화법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허클베리핀)는 개신교(종교)의 허위, 흑인(검둥이)의 상품거래, 양심의 문제, 선택의 윤리에 있어 오직 그만의 창조적 방식으로 사유한다. 그럼으로써 완전히 다른 결론에 이르고, 그 백치 상태 속의 사유가 기성의 지배질서에 예속되지 않는, 전에 없던 유일무이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아마 한병철과 들뢰즈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바보의 어리숙함, 어떠한 명증성도 원하지 않으면서 부조리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치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 조종 가능한 심리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테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디지털정보사회는 아마 이러한 바보를 결코 용납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다른 화법의 언어사용은 강력한 면역적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억제 대상이 증가할수록 그 실효성은 점차 감소할 것이다.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반응할 때 최대속도에 도달하는 것을 바보들이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자의 지옥 속에서 최고 속도에 도달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더 이상 순응하지 않는 이단자들로 인해 작동이 멈출지도 모른다. 네트워크에 낚이지 않는 자,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는 자가 바로 바보들이다. 합의의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자들, ‘아니요’를 힘차게 외치는 자들, 지혜로운 바보들만이 이 세계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탈 예속화, 탈 심리화, 측량할 수 없는 부정성의 세계를 기획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프로젝트 자아, 진짜 자유의 인간들로 들끓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 책,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신자유주의, 디지털 정보사회가 오늘날 우리 인간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그것의 특질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압축되고 간결한 언어로 펼쳐 보이는 책이다. 알지도 못한 채 “자본의 하수인, 자본의 팔루스(phallus)로 전락”한 오늘의 우리들을 잠에서 깨워댄다. 그만 잠자고 빨리 일어나라고. 곧 살아있는 죽은 자가 될 수 있다고. 벌써 출간된 지 10여년이 지났건만 후려치는 저자의 채찍질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혹독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