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은 사람
토마스 만 지음, 김현진 옮김 / 나남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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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정령이 의인화된 존재로서 나는 추상성을 즐긴다.(17)”고 작가 토마스 만은 구체적 현실의 인물로서의 개별성을 지우고 인간 일반이라는 추상에 숨어드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은 나치가 패망하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1951년 발표된 작가의 후기 말년의 소설이다. 그는 비록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그리고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는 표면적 도피의 외형을 보였으나, 문학은 정치적 소명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닌 회색지대의 인간으로 비난을 면치 못 한 것도 사실이다.

 

들어가는 말 [*소설 내용이 일부 묘사되고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이 소설은 12세기 독일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서사시 그레고리우스를 토대로 한, 즉 신화적 소재를 끌어들여 현실적 문제를 형상화 시킨 인간애와 죄와 구원의 이야기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닮은 근친상간을 소재로 하여 이중의 죄악과 신성모독, 그리고 혹독한 참회와 신의 은총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해피엔딩이다. 이 거듭되는 육체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 이야기의 정령으로 베네딕트회 사제인 클레멘스의 입을 빌린 것이나, 그가 반복하여 성스러운 띠를 두른 나로서는과 같이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것도 작가의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를 위한 도구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게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를 화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중심인물로 추정컨대 6세기 말의 기독교 세계이다. 그럼에도 화자의 주장처럼 시대의 규명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성 갈렌 수도원 도서실에 앉아 특별한 교화로서 사제 클레멘스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시대를 알 수 없다는 것과, 이야기 정령의 시간과 장소의 편재성, 20세기 어느 날이기도 하며, 21세기 바로 오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바로 오늘의 현실적 현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종소리, 도시의 하늘에, 온 도시 위에, 여운으로 가득 찬 공중에 울려 퍼지는 노도(거센 파도)와 같은 종소리! , , 수많은 종이 진동하고 흔들리고 있다.” 

- 9, 372

 

소설이 시작되는 첫 문장은 소설의 후반부에서 동일 유사하게 반복되는데, 그 의미는 아주 다르게 다가온다. 첫 문장에서는 바빌론 언어의 혼란처럼 뒤엉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전쟁 후 책임 소재와 그 처벌과 용서의 문제로 혼란스러운 사회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같다. 그런데 이 문장이 다시 기술되는 곳에서는 하늘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에 감동되어(...) 일곱 교구의 종이라는 종이 모두 저절로 힘차게 흔들리며화합과 관용을 담은 은총의 종소리가 되어 울린다. 나는 쓴 웃음과 함께 속이 거북해짐을 느꼈다.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고는 이제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내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초월적 관용의 도덕에 기만과 위선의 의혹을 보내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재밌다. 그래서 나는 이 혼돈의 양가감정이 작가가 의도한 것일까?라는 의혹 속에서 토씨까지 면밀히 읽었다.

 

이야기 속으로

 

이야기는 이미 거장의 솜씨로 숙성된 소설가의 재능만큼 매혹적이다. 플랑드르 및 아르투아의 군주 그리말트와 그의 부인 바두헤나는 이란성 쌍둥이를 낳는다. 바두헤나는 아이들의 출산과 함께 죽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함께 태어난 아이들, 빌리기스와 지빌라 남매는 자신들만큼 고귀한 존재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민의식과 더불어 서로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깊은 사랑을 공유하며 성장한다. 아버지인 그라말트 군주가 죽은 날, 오빠가 누이동생과 남자로서 여자와 동침한다. 그때 두 사람의 침실 사이에 있던 개 하네기프가 울부짖자 빌리기스는 개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이야기 정령은 사랑과 살해, 육체의 위기가 뭉쳐진 덩어리였다.”고 절묘한 어둠의 미학을 뽐낸다.

 

죄악은 열매를 빨리 맺어 두 사람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군주가 된 빌리기스는 참회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성묘(聖墓) 순례길에 오른다. 지빌라는 충성스런 귀족의 수성(水城)에 은거하여 아들을 출산하지만 황제의 품위를 지닌 아이는 이 세상에 설 자리가 없는 아이다. 아이를 신의 손에 맡기기 위해 출생내력과 함께 상징적인 옷감과 금화를 넣은 통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다. 이에 대해 정령은 빌리기스 남매 이야기는 측정할 수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신의 은총에 관해 증명하는 것이라고, 나치의 순혈주의, 자기 동일화라는 복제적 생산 행위가 신의 은총을 입증하는 행위라는 괴변(怪變)을 주절거린다. 역겨움이 올라오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그칠 수 없다는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계속 읽어나간다.

 

순례길에 나섰던 남편이자 오빠인 빌리기스의 죽음 소식이 전해오고 지빌라는 분명 죄 많은 여인임을 자인하지만 오빠의 죽음이라는 신의 권고를 영원히 부인하겠다고 다짐한다. 생명이 끊어진 수녀 같은 군주로서 죄를 범했던 벨라페르 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항만에 있는 브뤼주성에서 은둔하며 참회하는 금욕 생활을 한다. 뛰어난 미색의 여자 군주를 손에 넣으려는 뾰족수염의 로저라는 아레라트 왕위를 계승한 악마같은 놈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플랑두르를 무력 침공한다.

 


일명 연애전쟁으로 불리는 저주스런 전쟁이 계속된다. 바다로 띄워 보냈던 아기는 폭풍우 치는 둘 째 날 어부들에 발견되어, 노르만 군도의 작은 외딴 섬 성둔스탄의 아고니아 데이(신의 고뇌) 수도원 원장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거두어진다. 통 속에 아이와 함께 발견된 아이는 부모의 형제이며 조카가 된다는”  서판의 내용을 읽고는 신은 우리의 죄를 당신의 고난으로 삼으셨다.”, 명백하게 계시된 신의 계획에 따라 신중하고 현명하게 아이를 양육한다.

 

아이는 성장하여 젖형제로 키워진 플란의 코에 집중된 일격을 가한 우연의 사건으로부터 출생의 모호한 비밀과 주변 인간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자기 억압의 의혹으로부터의 해방을 맞는다. 수도원장의 위엄있는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 그레고리우스는 통 속의 옷감으로 기사의 옷을 지어입고, 원장이 증식시켜 놓은 금화를 지니고 삼촌이자 고모이며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알지 못하는 부모를 찾아 길을 떠난다. 성장한 아이 그레고리우스가 수도원장에게 자신의 괴물성이 지닌 죄악을 말할 때 네가 과장해서 괴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아주 고귀한 태생이라는 사실이라며 그의 입을 통해 다시금 나치의 파시즘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게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안개 낀 바다를 표류한지 17일 만에 저항하는 최후의 도시에 도달하게 되고,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 군주를 손에 넣기 위해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청년기사, 자칭 물고기 기사인 그레고리우스는 참회의 일환으로 기꺼이 여 군주를 위해 적과 싸울 것을, 군주의 승인을 청하고, 그것은 수락된다. 남자대 남자로 뾰족수염 로저와 싸우는 것이 단지 여왕을 위해서싸우는 것일 뿐 아니라 여왕을 얻기 위해싸운다는 것을 암시한다. 절대적으로 온힘을 집중해 꼭 쥔 손을 통해 폐허가 된 나라에 새로운 삶을 선사한다.

 

여왕은 결사적으로 자기편에 섰다는 사실로 인해 끓어오르는 자부심을 느낀다. 여왕은 통 속에 넣었던 똑 같은 옷감이라는 사실을 단호히 부인하며, 조롱하듯 타오르는 망상, 사라져버린 이성에 의해 스스로 낳은 죄악의 자식을 남편으로 맞이한다. 또 하나 숨겨진 야만을 발견하게 되는데, 순혈주의에 도전한 인접국의 구혼자를 뾰족 수염 로저라고 당대를 휩쓸던 사회생물학의 우생주의가 유대인에게 덧씌운 이질적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곤 여지없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그레고리우스에게 포획되는 것으로 그려, 나치의 유대학살을 미화한다. 지독하고 집요한 독일의 순혈주의, 타자에 대한 극렬한 혐오가 여전히 토마스 만 의식의 저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본다.

 

두 사람은 국가적 결혼을 치루고 거짓으로 세워진 행복 위에서 두 아이를 낳는다. 진실은 다시금 드러나고, 두 사람, 아들이자 조카이며 남편 그레고리우스와 어머니이자 고모이며 아내인 지빌라는 생각의 몰락, 세상의 몰락이 닥쳐왔음을, 첩첩이 쌓인 죄악과 신성모독에 대한 참회의 길만이 자신들의 앞에 드리워졌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이야기 정령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절망할 수 있어도 신과 그의 충만한 은총에 대해서는 절망 할 수 없다.”, 그들의 죄과를 신의 초월적 구원에 맡겨 구원의 길을 열어놓는다. 문학 거장으로서의 미학적 성취와 달리 토마스 만이라는 한 인간의 기울어진 도덕성을 발견하는데 모자람이 없는 생각으로 읽힌다.

 

그레고리우스는 여왕의 남편, 대공의 자리를 버리고 혹독한 참회의 길에 나서고, 여왕은 나라를 사촌에게 위양하고 노숙자, 병자, 불구자, 나환자들을 위한 보호소에서 그들을 위한 낮은 자리에서 20년의 일생을 바친다. 그레고리우스는 지독한 불신자인 성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어부에 의해 호수 가운데 외따로 높이 솟은 바위에 사슬에 매여 버려지고 그렇게 그는 17년을, 퇴화된 사지를 지닌 고슴도치 같은 작은 몸이 되어 참회의 시간을 보낸다. 이 지독한 참회의 세월을 보내고 신의 계시에 의해 선택된 자가 바로 역사에 써진 교황 그레고리우스다.

 

마치면서

 

크나큰 지옥의 열매들에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 이야기 정령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행복할지어다.”라고, 17, 20년의 참회는 엄청난 것이라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라며 이 만큼의 시간으로 신에 참회하면 모든 죄과는 용서될 수 있는 것이라고. 어느 누가 정신으로 하여금 정의를 잊으라고 말 할 수 있는가?”라고 외쳤던 카뮈의 목소리가 이 파렴치한 목소리에 대항하여 들린다. 나는 이 소설이 노회(老獪)한 작가 토마스 만의 자기기만, 자기 사면의 언어로 읽힌다. 어찌 이 자기 동일성 반복의 폭력, 타자 배제의 참혹한 역사의 당사자들을 위해 환희의 종소리가 울리고 영광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이야기 정령에 은닉된 목소리들에서 인류의 오래된 전체주의적 욕망만을 보았다고 한다면 과연 오독일까? 인류에 혹독한 과오와 죄악을 저지른 인간들에 면죄부를 주려는 이 세련된 수사에 지옥 불이 내려치기를! 이 작품은 이러한 파렴치의 존재가 언제나 인간의 윤리를 혼돈으로 내몰고 있음의 증거로서 거듭 읽혀야 할 악마의 이야기 일 것이다. 자기 참회의 길을 걷는다면 그 어떤 죄악도 용서되어야 하는, 즉 자연의 절대 진리가 되었건 우주 창조의 유일자가 되었건 그 무엇으로 표현되던 신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영예와 은총을 부여하는 관용의 윤리에 나는 결코 동의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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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28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회한다고 그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죠.

필리아 2024-01-28 19:16   좋아요 0 | URL
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죠.
용서한다고 죄가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죄 지은 자의 내면의 문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보이는 문제인 죄 지은 자가 타자에 저지른 해악의 당사자로서 ‘응당의 처분‘에 관한 것이 이 구원으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수백명을 학살하고 그 응당의 처벌이 사라지는 것이 정당한 윤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