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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힘과 선함과 총명함과 부드러움과 영혼의 웅장함이 숨이 멎을 만큼 방대할 때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름다움은 산 위의 티끌이며,
불붙은 헛간 근처에서 타오르는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 308쪽
‘로런 그로프’의 소설에 대해서 나는 하나의 느낌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한 자연주의 공동체의 형성과 붕괴의 시간 속에서 흐르던 작은 인생들의 사랑과 무한히 친밀한 마음들로 가득했던 『아르카디아(Arcadia)』의 향수이다. 시리도록 순수해서 충만해지는 그런 감각이라 할까, 혹은 깨닫지 못했던 태고(太古) 이래 잠들었던 어떤 그리움의 깨어남이라 할까, 아무튼 그런 깊은 감동이 남아있다. 소설 『매트릭스』는 오로지 이 기억에 의해 이끌린 작품이다.
『매트릭스』는 《短詩(Les Lais)》등 섬세하고 감미로운 황홀감을 묘사한 작품을 남긴 12세기 여성시인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를 모델로 하고 있으나, 당대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었으며, 실제 인물에 대해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 그러니 이 작품은 당대의 시적 감수성을 지닌 여성인물, 즉 지성을 갖춘 여성으로서 차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로런 그로프는 그 어떤 신화의 남성 영웅을 넘어서는 위대한 이야기로서 이 여류시인에게 웅대한 영웅 서사의 모습을 부여한다. 오직 여성의 언어로만.
몸의 절반에 왕의 피가 흐르는 거대한 몸과 앙주 왕가(12~13세기 잉글랜드 지배)특징이 도드라진 “촌스럽고 흉악범”처럼 생긴, “어떤 아름다움도 담겨 있지 않은” 얼굴을 한 열일 곱 살 사생아 ‘마리 드 프랑스’는 왕비 ‘알리에르노’의 명에 의해 약탈과 노략의 흔적만이 남겨진 퇴락하고 가난한 왕립수녀원의 부원장으로 궁전에서 쫓겨나듯 부임한다. 이런 상황을 전해주듯 소설이 시작되는 문장은 홀로 말을 타고 숲길을 타박거리는 열일 곱 살 마리와 그녀가 바라보는 수녀원의 모습이다.
“습한 계곡의 언덕 마루에 수녀원은 희끄무레하고 냉담한 자태로 서 있고,
바다에서 끌려 온 구름은 언덕을 휘감은 채 끊임없이 비를 뿌리고 있다.
모든 것이 회색이고 온통 음지다.” -11쪽
말이 왕립수녀원이지 가난과 질병으로 매일 수녀들이 죽어나가는, 얼마 남지 않은 수녀들이 겨우 연명하는 곳에서 마리는 마음을 붙이지 못한다. 아니 그보다는 종교적 열망이 없는 인물이라는 말이 옳을 것 같다. 직위는 부원장 수녀이지만 정식수녀가 아닌 수련수녀에 불과한 마리는 달아날 궁리도 하지만 자신의 남성을 능가하는 커다란 키와 몸집 등, 궁중의 시선을 피해 도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시간은 흐르고 정식수녀가 됨으로써 지저분하고 끔찍하며, 더 이상은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세상으로 옮겨감으로써 잘 알지도 못하는 수녀원 여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함을 인식한다.
마리의 이야기, 한 여인의 영웅 서사는 비로소 시작된다. 마리의 성장은 이제 수녀원과 수녀들의 공동체를 강력한 유대 집단으로 만들어 내는 것, 자신이 그네들의 탄탄한 울타리가 되는 일련의 생각과 그 집행이다. 연체된 소작료, 미루어진 귀부인의 유산, 인접한 귀족들의 토지를 받아내고 증여받아 수녀원의 자족적 삶의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고, 이를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전술들을 익히는 것이다. 그것은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한 지성의 배움이고, 수녀들의 죽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늙은 원장 수녀가 질병으로 타들어가는 호밀밭에는 펄쩍뛰며 주변의 소문을 차단하기 위해 나서는 평판을 위한 대응(對應)술이며, 여자들의 세계인 신성한 수녀원과 외부 세계를 철저히 차단하여 공동체를 수호하기 위한 장벽의 장치전략이다.
마리는 벽을 쌓는 방식을 깨우친다. “부와 혈통과 결혼의 벽, 친구와 첩자와 충언자의 벽, 그리고 가장 바깥의 벽인 평판의 벽”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다. 마리는 왕비 알리에노르의 정치술로부터 “여자의 권력은 용납되는 만큼만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를 “깰 수 없는 형식 안에서만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원장수녀가 된 마리의 행보, 그녀의 혁명가적 성장기이자 일생의 자취가 이 소설의 테마일 것이다. 수녀원의 자산을 지켜내고, 자신의 딸들인 수녀들을 외부로부터 지켜내는 것, 여인들의 굳건하고 풍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 그럼으로써 소외되고 배제된 세계에서 여성의 권력을 공고히 확보하는 것이다. 이 여정에서 수녀원 내부의 갈등과 위협이 발생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영혼을 담은 이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며, 외부의 탐욕을 경계하며, 평판의 도전과 끊임없는 도전을 그 어떤 손상이나 파괴의 위협을 상처없이 받아내는 지혜이다.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것,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슬기와 용기다.
여자에겐 허용되지 않은 글쓰기, 성서를 필사하여 판매 수익을 확보하고, 늪지를 농토로 바꾸는 억척스런 대역사(大役事)를 이겨내는 것이며, 수녀들의 취향을 이용한 적재적소의 작업배치를 통한 능동성의 즐거움이기도 하며, 외부 세계의 변화를 읽어내기 위한 첩자와 정보의 활용이다. 무엇보다 근시안적이고 계급과 권위에 사로잡혀있는 수녀들 스스로가 열등한 성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노예화라는 뿌리 깊은 근성과의 투쟁이다. 마리는 “우리의 동정 마리아는 자궁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도록 선택받은 가장 완벽한 그릇 아닌가요?(237쩍)”라고 말한다.
수녀들의 미사와 고해성사를 주관하던 남성 사제들이 사제관 화재로 모두 죽었을 때, 그리고 영국 왕실과 로마 교황과의 싸움으로 인한 미사와 축성을 금지하는 성무(聖務)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자신이 미사와 고해성사의 주체가 됨으로써 이단적 행위자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수녀들로부터 동의와 비판을 불식시키는 용기는 그녀가 그네들 공동체의 평화를 교란시키지 않기 위한 신념의 강도(强度)일 것이다.
“미사전서와 시편을 여성형 단어들로 바꾸어 필사하는 것, 여자들만 듣고 말할 글인데 안 될 게 뭐 있는가?(242쪽)” 만큼 한 여인에게 혁명적 실천가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소설은 여성 공동체를 일궈낸 신화적 영웅을 탄생시키고 있다. 마리는 이루어 냈다. “아기들이 어둡고 단조로운 소리가 나는 따뜻한 자궁 안에서 자라듯 자매들이 커가는 자아의 전당(313쪽)”을 지어낸다. 소설의 제목인 '매트릭스(matrix)'는 바로 이러한 성소(聖所)로서의 자궁이며, 삶의 내면에 봉인된 인간 존재에 잠재된 신성성의 의미일 것이다.
마리가 당대의 믿음에 반역을 하면서까지 이룩하고자 하는 사상과 행위들을 할 때마다 동정 마리아의 환시(幻視)를 경험하며, 이로부터 역사(役事)를 추진할 동력을 얻으며, 그녀는 영면(永眠)할 때까지 열아홉 번의 환시를 기록해 둔다. 이 숫자는 곧 혁명적, 즉 당대의 시선에서 이단적 기록이라 할 만한 것들이지만, 그녀의 장대한 힘과 원대한 구상의 동력, 그 전환적 의지이자 용기의 원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감상글의 모두에 인용한 마리의 시녀인 세실리가 마리 내면의 빛에 대해 찬양한 말은 가히 영혼의 웅장함에 대한 가장 근접한 축복의 언어이자 이 작품의 본성일 것이다. 아마 이 작품을 여성의 언어로 기록된 최초의 여성 영웅 서사라 해도 곡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야기에는 마리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수녀들의 세계, 많은 여자들이 등장해서 다양한 색깔들로 여자들만의 고유한 삶의 형상들을 세밀하고 통찰력 깊게 펼쳐놓는다. 그리곤 죽음의 자궁(matrix)이었던 수녀원을 생동하는 삶의 자궁으로 변화시켜 놓는다. 위대한 기적에 대한 노래와 소문으로 가득한 가히 웅장한 여성 일대기이다. 모든 여성들이여 꼭 읽어 보도록 하라. 어쩌면 힘차게 뛰는 맥박을 느끼며 여성으로서의 투지가 솟아오를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