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왈츠 밀란 쿤데라 전집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은미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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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가가 자신의 다른 소설들보다 더 즐겁고 흥겹게 썼다는 이 통속희극을 읽으며 인간의 일생이란 하나의 아이러니란 생각을 떠올렸는데, 사전적 정의인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가 바로 삶을 구성하는 것이리라는 별스런 깨달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설과 역설이 뒤섞이는 이중적 혼돈, 밀란 쿤데라가 일관되게 말하려는 가벼움의 무거움, 혹은 무거움의 그 가벼움이라는 상호 전복시키는 감응의 변주가, 반성할 줄 아는 인간 정신의 한 진실일 것이라는 동의였을 것이다.

 

작가는 프랑스 문학평론가 살몽(Christian Salmon)과의 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에서 우리의 드라마를 끔찍한 무의미를 통해 드러내 보여려 했다며, 기대하지 않은 과장된 일치라는 장치를 엄청나게 부각하는 형식으로 이 작품 이별의 왈츠(La valse aux adieux)를 통속적 희극으로 썼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의 여타 작품들과 달리 이 소설은 동질적 이야기들이 일탈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어, 기꺼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을 수 있는 부담없는 읽기가 되어준다. 소설은 몇 안 되는 등장인물들과 사건이라곤 루제나라는 간호사의 임신과 낙태라는 자못 구태스러운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질투의 속성, 인간 존재의 의미, 도덕적 오만, 삶의 진실적 국면이 발생하는 인생 밖의 지대 등 실로 무수한 인간 운명의 진실들이 빼곡하다. 감상은 이러한 인간 속성들에 대한 단상이 되는 것이 왠지 마땅해보인다.

 


1. 인간의 잔인함과 저속함에 대해서

 

내가 언제나 가슴 깊이 역겹다고 생각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의 잔인함과 저속함, 그리고 어리석음이 어떻게 서정적인 가면으로 가려지는지 보는 겁니다.” -164

 

이 문장은 온천장의 불임치료 의사인 슈크레타의 친구인 국가 권력에 의해 박해받고 소외된 지식인으로 조국을 떠나기 전 친구와 피후견인 올가와 이별을 고하기 위해 찾아 온 야쿠프의 목소리다. 온천장에 돌아다니는 개들을 질서란 명분으로 무차별적으로 포획하는 일종의 자경단의 행위가 발산하는 폭력의 역겨움에서 비롯된 인간에 대한 증오 욕구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그는 이들 자경단이 지닌 질서의 속성에서 개인을 말살하는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가혹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증오 욕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자신을 동일시하여 구경꾼으로 무대에 등장한 간호사 루제나가 돌아다니는 개를 구제하려는 야쿠프의 행동을 막아서며, 특권층에 속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들인 듯 끔찍한 처형에 가세하는 형국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다.

 

유명 트럼펫 주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여자들만 우글대는 이 소도시를 벗어나리라 생각하는 간호사 루제나의 이성 초월적 계시같은 망상의 믿음 또한 그 천박함과 동일시의 몽매성도 잔인성과 멀지 않은데, 자기가 멸시하는 남자가 원인일 수 없는 임신이라며 논리적 추론을 외면하고 의도적인 왜곡으로 유부남인 유명 연주자를 아이의 아버지로 스스로 납득시키는 것이다.

 

2. 인간 경멸에 숨은 오만한 자의식

 

루제나의 배속 씨앗의 아버지인 연하의 배관공 프란티셰크에 대한 경멸이나, 야쿠프의 도덕적 오만이 뿜어내는 인간 정신에 대한 혐오는 사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데, 야쿠프가 친구 슈크레타 의사에게 맡겨 보호하는 올가에 대한 후견의 행위가 스스로 관대함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더러운 자기 과시에 불과한 것이고, 흉내 낼 수 없는 올가의 젊은 개체성을 비웃고 격분하는 온천탕 속의 상스러운 흥겨움에 가세하여 모욕하고 우롱하는 루제나의 잔인한 의식의 동일시 장면은 쿤데라가 증명하려는 인간 의식의 더러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특히 야쿠프의 이 인간 정신에 대한 경멸은 루제나에게 투사되어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이웃들에 대한 그 무심하고 잔인하게 내려지는 판결들을 내리는 얼굴과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란 것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반성하는 것이다. 그의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한 인간에 대한 경멸이 루제나라는 혐오스러운 인간을 발견함으로써 인간 처벌의 준비가 소극적으로 실행되었음을 지각하는 것인데, 인간에게 타인의 생명을 희생할 권리가 없다는 강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부작위에 의탁해 한 인간의 죽음을 방조한다.

 

야쿠프는 죄의식을 느끼려고 간호사가 진짜 죽었다고 상상해보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감미롭고 기분 좋은 경치를 가로질러 차분하고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차를국경으로 몰아간다. 그는 자신과 고리대 노파를 살해했던 라스콜니코프가 느꼈던 살해 후의 내적 공포와 회한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행위가 조금도 무게가 나가지 않음에, 너무도 가벼움에 놀라며, 러시아 주인공의 히스테릭한 감정보다 더 끔찍한 게 아닌가 자문한다. 그는 그토록 오랜 삶의 믿음이었던 도덕적이고 정치적 자만심을 상실하고 만다. 자신도 정적을 살해하는 국가 폭력자들과 다를 바 없는 한 명이라는 이해, 살인자들의 형제임을 자각하는 것인데, 자기 정신만은 타인과 다르게 고매함과 섬세함을 지녔다는 오만이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를, 인간이란 결코 잘 못 창조된 신의 오류라는 것일까? 신의 사랑만이 귀결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러한 결론은 왠지 형이상학에 손쉽게 의존하는 편리함만 같아서 불편하다.

 


3. 눈 먼 질투심과 감춰진 운명 밖 보기

 

질투는 정열을 쏟는 지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정신을 사로잡는다그때 정신은 단 일 초의 휴식도 없다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은 권태를 모른다.“  -283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굵은 하나의 나무에서 뻗은 수많은 가지들의 울창함 때문이다. 트럼펫 연주자의 아내인 카밀라는 기독교 신자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자기 남편의 부정을 믿는 것인데, 때문에 남편의 연주회가 진실임을 믿지 않아 확인을 위해 온천장 연주회를 찾는다. 한편 루제나의 젊은 연인 프란티셰크는 루제나의 유명인 클리마와의 밀착된 만남을 24시간 감시하며 사랑의 집착이 키워낸 질투심에 의해 원격조정 되듯 이야기에 투입된다.

 

질투라는 인간 정신의 불모성을 위의 문장보다 잘 표현하기는 힘들 것 같다. 확인하려는 진실은 확인하려는 자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질투로 인한 믿음은 혼란을 맞이한다. 세상사란 것에 작동하는 요인이란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이든가? 아주 사소한 요인도 정말 우연히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작동하여 별난 사건으로 치닫는 것이 삶의 실상이다. 야쿠프가 마지막 이별 인사를 마치고 온천장을 떠나기 전 우연히 카밀라와 마주하게 되자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자신이 알아 온 인생이란 것 밖에 감춰진 운명이 있음을 깨닫게 되듯, 카밀라 또한 야쿠프가 건넨 새로운 세계로의 떠남과 동시에 마주하게 된 발견의 이야기로부터 자신의 내부를 얽애맨 질투의 본질을 직시하게 됨으로써 자유로의 탈주가 시작된다.

 

4. 한 편의 코미디적 상상,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의 몽상

 

의사 슈크레타는 아기를 갖길 위해 찾아오는 여성들에게 아기를 선사한다. 아이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이 온천장을 찾는 것도 슈크레타의 치료법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친구 야쿠프에게 진실을 털어 놓는데, 이 구제불능의 몽상가는 자신의 번식력이 왕성한 액체를 주입함으로써 많은 여성들에게 아기들을 잉태케 한다. 세상은 작은 슈크레타들로 확산된다. 슈크레타의 우생학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세계를 자신의 정신을 계승한 인간들로 채우는 것이다. 이 유토피아적 전체주의적 몽상의 에피소드는 인간의 욕망을 조롱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가벼움에 일말의 진지한 의도가 있는 것인가? 작가가 진정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 나로서는 해독해내지 못했다.

 

사실 이 소설 속 인물들 중 진정한 인생의 승자는 누구일까를 생각해보았는데, 야쿠프의 피후견인으로 온천장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올가를 주시하게 되었다. 그녀는 지나간 시절의 고통으로 자신의 박물관을 지은 야쿠프의 관대한 이타주의적 태도의 본질을 알고 있으며, 그의 박물관에 자신이 살아있는 핵심 오브제임을 제대로 통찰해내고 있다. 올가는 뭇 여인네들과 달리 그 어떤 희생제물의 역할도 당당히 거부하며, 그러한 인간들의 잔인한 의식을 거부한다. 또한 야쿠프가 보이는 자신에게 내보이지 않는 육체와 영혼을 기꺼이 자신에게 내어줄 것을 몸으로 밀어부처 야쿠프의 육체를 허물어뜨리기도 하며, 자기 주체를 적극적으로 회복한다. 그녀는 세계 내 질서, 인간들이 말하는 정의 밖에서 살고자 한다. 혐오스러운 인간들과 결단코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하면서.

 

아무튼 이 소설은 통속 희극이라는 가벼운 이야기에 정말 진지함이 무한하게 채워져 있는 인간에 대한 놀라울 만한 관찰기다. 다른 지면에서 작가가 이 작품을 말했듯 지극히 무거운 문제를 지극히 가벼운 형식과 결합시키려 했던노력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다행히도 밀란 쿤데라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국역되어 이 특출한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음은 축복이다. 그의 말처럼 소설은 인간이 삶에 부대끼며 살아 갈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러한 위대한 작품의 하나이다.

 

극단까지 몰고 간 가벼움은 무시무시한 가벼움의 무거움이 되었고...”

-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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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1-20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별의 왈츠네요...예전에 작은 사이즈 하드커버로 읽은 기억이 있는데...얇지만 임팩트가 있었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무는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읽어야 할 작품입니다..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필리아 2023-11-20 11:03   좋아요 0 | URL
소설 제목이 이야기의 전체를 상징적으로 아우르고 있어요. 모든 이야기가 원무를 추듯 돌고 돌아 이별, 스스로 억죄고 있던 사슬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길을 떠나네요. 멋진 이야기를 쿤데라가 동시대인들을 향해 선사한 선물같습니다. Yamoo님, 댓글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