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몸의 역사
자크 르 고프 지음, 채계병 옮김 / 이카루스미디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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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대한 정치적 기술의 역사 

- 인간 몸을 규범화, 억압해온 모욕의 역사를 복원한 걸작



이 책을 다시금 읽고, 감상을 끄적이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21세기 오늘날은 유전학적 창조, 기계화된 신체와 뇌 임플란트, 새로운 형태의 노동 지배, 성의 개념적 변화 등등 인간의 몸에 대한 변화를 숙고하는, 급격한 인류의 신체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 되는 시대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재적이고 근미래에 대한 정책적 숙의(熟議)와는 달리 중세시대에나 자행되었던 인간의 몸을 권력이 지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러한 역사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발상이 지금 논쟁이 된다는 것, 이미 수세기 전에 종료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자율에 대한 존중, 인간 사생활에 대한 헌법적 보호라는 기본권리로 자리매김한 것들이 단지 소수의 탐욕스러운 권력욕에 의해 파괴되는 이 역사적 시간의 낭비가 너무 안타깝고 분노가 인다. 정말 새삼스런 이야기이지만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앎에의 의지)를 더 이상은 인용하는 세계가 한국 사회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권력관계는 몸에 직접적인 지배를 수행한다. 몸을 둘러싸고, 몸에 흔적을 남기고, 몸에 고통을 주고, 몸에 노동을 강요하고, 몸에 지나친 예절을 의무 지으며, 몸에 복종의 몸짓을 요구한다.” 라고 썼다. 작금의 정권이 1980년대 이전의 노동착취 시대였던 주 69시간의 노동을 요구하며, 군 정보기관인 기무사를 부활하여 민간사찰에 착수하겠다고 을러대고, 술집 앞 대로에 도열하여 선 인간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과 건들거리며 이 장면을 과시하는 하찮은 하나의 인간을 보는 것은 수많은 인민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인간의 몸, 특히 평민으로 지칭되던 인민 대중은 인류의 오랜 역사 시대에서 언급되지 않았으며, 단지 감시와 통제, 억압의 대상으로만 인식되어왔던 것1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계의 주체자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조차 서구의 역사이지 한국 사회에서 인민의 몸은 그저 무시되고, 비난받고, 모욕당하는 대상에 불과했으며, 20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엄중한 권리로서의 실재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다. 이 고통스럽고 힘겨운 시민적 투쟁의 성취물들이 순식간에 중세의 야만적 폭력의 시대로 회귀하려하고 있다. 한국은 20세기 후반까지 서구의 중세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세의 인간 육체는 권력의 철저한 지배물이었다. 눈물, 피와 같은 체액조차 위계질서의 수단이었으며, 웃음과 꿈조차도 인간 개인에게 권리가 없었다. 눈물은 고귀한 성직자, 군왕, 기사와 귀족만이 흘릴 수 있었으며, 평민이 꿈을 꾸는 것조차 죄악이 되는 세계였다. 하물며 군중 속에서 웃을 경우 매질이 가해지는 것이 입법화되어 있었을 정도이니 인간의 육체성은 깡그리 부정되고 있었다. 몸에 대한 철저한 억압을 도입하고 조장한 권력, 서구의 중세는 이 권력기관이 기독교 교부집단이었으며, 한국 사회는 왕과 권문대신, 그리고 일제의 주구들, 해방 후 오랜 기간 독재자가 대물림하며 인민의 몸을 관리했다.

 


인간의 몸을 규율하고 통제 억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그 터무니없는 수사(修辭)들로 이 책은 가득하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 사회는 두 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잘 알려진 기록이며, 또 하나는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진 역사는 문명이란 이름에 의해 억압받고 왜곡된 인간의 본능과 정열의 운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인류의 역사는 서구의 역사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도 피지배민의 몸을 은폐하고 지배자 자신들을 과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지배권력 계층의 쾌락과 무위의 게으름을 위해 피지배자의 몸은 도구화되고, 절제와 금욕, 죄악을 씻기 위한 고통의 육신으로만 승인되었다. 이 책에는 권력(기독교 교부들, 귀족 엘리트 들)이 어떻게 인간의 몸에 각종 굴레를 씌워 통제, 억압했는지 그 기이하고 거대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기술, 관습화의 강요 방식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노동하는 사람들(라보라토르; laboretores)에 가해진 기만들도 무진장하다. 성직과 귀족계급은 피의 금기에 성()을 결부시켜 질병화 하는 도식화 과정을 통한 차별에서부터 아담과 이브의 호기심과 오만이라는 앎에의 의지인 원죄를 성적 범죄로 변화시키면서까지 인민의 몸을 악마화하는 이중적이고 교활한 시선들을 볼 수도 있다. 평민은 노동하는 인간들이어야 하며, 그러하기에 육체적 일은 사회적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상스러운 특성으로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아마 이러한 서구 양상의 흔적들이 맹목적으로 수입되어 이 땅에 이식됨으로서 그 추악함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육체의 죄와 입의 죄는 함께한다는 선언으로 색욕과 식탐을 결부하는 것, 금욕과 단식의 강제로 단식기간 9달 후엔 임신곡선이 하강했다고 하니 인간 몸에 대한 처참한 차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위선적 이데올로기, 정치적 기술의 자기 모순적 진실들은 사회적 긴장을 내재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폭발하기 마련이다. 일례로 무소유, 구걸하며 사는 것이 더 고귀한 신앙심의 표출이라 선언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말을 들여다보면 이 말이 모순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자신은 창조자지 육체노동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당시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노동자와 농민을 도구와 대지에 결박시키려는 계급적 이익의 표출이상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눈물을 흘리는 것 또한 고귀한 귀족과 성직자만 가능하다고 평민에게 금지되었던 것이 부정한 액체의 사용이라는 충동을 피하는 체액 경제 논리로 둔갑하여 육체의 금욕에 해당한다고 권장하는 것도 인간 세상의 슬픈 코미디라 하겠다. 웃음은 고귀한 머리와 심장이 아닌 비천한 배에서 출발하기에 사탄의 몫이 되어 금지되고, ()은 선악을 구분하는 여과기이자 언동의 흐름을 제어하는 차단기이기에 철저한 통제의 대상이 되어 발설의 자유, 소위 근대 이후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억압되기도 한다.

 

이러한 억압과 통제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경기장과 공동목욕탕이 폐쇄되어 사라지고 인간의 육체 활동은 전면 금지되기도 하며, 사랑(Amor)은 탐욕스럽고 야만적 정열이라 정의되고, 오직 이웃을 향한 동정심, 연민(Caritas)만을 인정하며 인간의 본능까지 지배한다. 남녀의 애착과 쾌락은 전면 부정되는 사회, 인간의 노동은 오직 도구로서 멸시하면서 고된 일은 위업을 능가한다는 헛소리를 통해 평민에게 어떠한 삶의 자유도 부인한다. 어쩌면 이 책의 제목을 몸에 대한 정치적 기술의 역사라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몸을 정치적 관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감시와 통제, 그리고 길들이기와 고문, 고통을 수반하는 폭력의 시대가 열린다. 40여 년 전의 비()민주화된 후진적 야만의 시대, 서구의 중세적 양상으로 회귀하려는 야망에 불타는 막되 먹은 정권이 이 책의 길로 안내했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마치 이러한 퇴행적 현상에 환호하듯 음식에 지나친 기교를 부착하여 식도락의 강박적 쾌락이 전 매체를 장악하며 사회적 차별을 부추기고, 자기모순의 언어, 무지의 언어를 자랑하고 터무니없이 보편화시키는 모욕의 정상화를 현상화하고 있다.

 

책은 19세기 역사철학자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의 저술로 시작하여 마르셀 모스, 노베르트 엘리아스, 요한 호이징가, 시오도어 아도르노, 미셸 푸코, 역사학의 역사로 불리는 아날학파의 창설자인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에 이르는 위대한 지성들이 복구해낸 인간 몸의 역사가 어떻게 사회적 규범화로 이어지는 지 그 몸의 기법들을 하나의 가치 있는 역사로 정리해내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과 미디어의 양상들, 그리고 공권력의 걸신들린 듯한 탐욕적 이기심과 그 기형성의 정체, 그 은폐된 본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참고 문헌이 되리라 생각한다. 제아무리 설쳐대는 혹세무민의 권력도 인간 몸의 자유를 통제할 수 없다. 끊임없는 저항과 통제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내는 사회는 필연코 암흑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다. 역사의 사실은 인간 세상의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차별과 모욕이 횡행하는 세계로의 반동적 행태를 바로 잡아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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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한용운 지음 / 열린책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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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집 초간본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표 시집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시대의 간극은 물론 20세기 초, 한국의 현실이란 식민지민으로서의 고달픈 삶에서 비롯된 제한된 문명 접촉이라는 한계로 그 시적 언어의 빈곤함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시작(詩作)들에 대한 제 관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 몇 권의 시집을 선택하게 했고, 저는 네 권의 시집을 다시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네 권의 시집 중에서도 만해(萬海)님의 침묵은 당대 여타의 시작들과 확연히 다른, 즉 당대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언어와 상상력으로 오늘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고 날카로운 미적 감동과 높은 사유의 감각을 깨우는 시집이라는 신뢰에서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선택한 시집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편애가 이미 한용운의 시가 말하는 분별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남과 같은 것들과 괴리가 있는 행위이겠지만, 한편으론 그 벗어남이라는 언어 자체의 속박을 거부하는 저다움의 주장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집을 여는 첫 면에 시인의 군말이 있습니다. 아마 그가 쓴 에 대한 의미를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려는 의도로 저는 이해합니다. “<>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시작하여 너에게도 님이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라고, 님이란 어떤 별개의 개체가 아니라고,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말합니다. 나라를 잃고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는 백성들이 가엾어서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세계 만물에 대한 연민을 통한 깨달음, 대자유의 진리를 가르쳐주고자 함이었던 듯싶습니다.

 

수록된 88편의 시() 어느 하나의 시편도 생의 감각을 일깨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제 어린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님의 침묵을 획일적으로 해석하도록 강요되었던 그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읽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편협하게 이끌었는지를 매번 분노로 곱씹습니다. 조국애니 민족애니 하며 오로지 국가의 충성만을 말하던 그 천박한 입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만해가 말하는 은 연인이요, 민족 해방 구원의 힘이며, 인간 삶의 진리와 구도(求道)의 본원인 미륵이고, 인간 자체의 본질이 탁월하게 결합된 응결체입니다. 그것의 매체는 사랑이며 연민이자 그리움인 기룸(기루다)’일 것입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로 시작되는 님의 침묵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로 맺습니다. 연인이자 조국이며 삶의 본질인 깨달음은 떠나버렸지만 결코 시인은 떠나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님의 부재를 침묵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실재하는 것으로 뒤바꿔버린 것이죠. 그리곤 이별이 만들어낸 슬픔이 곧 새로운 삶의 원천일 것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어지는 시 이별은 미의 창조,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中略)...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라는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사랑의 깨달음, 이것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아마 만해는 우리들에게 이 깨달음을 직접 체험하도록 견인하려 한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깨달음을 묘오(妙悟)’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 있답니다. 완전히 죽은 뒤에 비로소 새롭게 소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여기서 죽음이나 이별이라는 것은 상식화된 이름이나 관념의 초월로서 분별, 집착,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죠.

 


특히 좋아하는 시가 있는데요, 꿈 깨고서예술가라는 두 편입니다. 전자에는 밤마다 문밖에 와서 발자취 소리만 남기고 그저 가버리는 사랑에 대한 야속함을 말합니다. 그 발자취 소리 탓에 님을 찾아가려고 구름을 타는꿈을 꾸다 깨어났거든요. 해방의 광영이 들어오지 않고 도로 가버리는 안타까움, 님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아름다워 그 아련한 아쉬움 탓에 자꾸만 읽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연인의 눈 코 입, 그리고 두 볼에 파인 샘까지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예술가가 됩니다. 연인의 모습을 백 번이나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그 서투름이 묻혀버린 저 오랜 기억의 장소를 거닐게 합니다. 그런데 그 연인이 이젠 곁에 없습니다. 시의 화자는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장합니다. 연인이 가는 바람이 되어 화답합니다. 고마움에 절로 두 손을 모아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어떤 생각도 일지 않는 어묵(語默)의 세계에 잠겨있는 순간이 너무도 좋습니다. 아무런 구속도 없는 참다운 존재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 이것이 부처인 것일까요?

 

구원의 간절한 염원이 절절히 느껴지는 오셔요라는 시를 읽으며 당대를 살던 우리들의 선조들의 마음이 안타깝게 다가왔는데요,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라고 시작하고 같은 시구로 끝납니다. 당신의 위험을 위해서는 황금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되며, 자신의 가슴이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누구도 당신에게 손댈 수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당신을 위해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고요. 그러니 어서 오시라고. 이처럼 만해의 시편들을 읽다보면 마치 문 없는 문을 열어젖히는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간 것 같은 평안 속에 침잠하게 됩니다.

 

시인은 시집의 마지막에 독자에게라는 글에서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겸허하고 문학의 시대성을 예감한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라면서 말이죠. 시인의 이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 그의 시는 철지난 메마른 국화송이가 아니라 더욱 그윽한 꽃향기를 여전히 발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를 부인하고 분별과 차별의 언어를 내세우며 권력과 재화에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인간들이 춰대는 망나니의 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깨달음 없음의 이 재현을 보며 더욱 시인 만해 선사의 기룸의 의미가 높고 깊게 다가옵니다. 강과 산으로 길이 막혀오지 못하는 님을 위해 시 속의 화자는 보석으로 사다리 놓고 진주로 배 모아 길을 냅니다.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선종(善終)하신 시인의 숨결이 한 겹 봄바람 속에 실려 임박한 님의 지엄한 행차를 알려주는 것만 같습니다. 시인의 위대한 사유의 광채를 감히 조금은 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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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페이퍼 글은 카프카 탄생 140주년을 맞이하여 민음사에서 특별 간행한

카프카 단편집 <돌연한 출발>을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2023년 유네스코는 '세계 책의 날' 올해의 인물로 '프란츠 카프카'를 선정했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은 우리를 아주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책이라네.”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 에서


 


카프카의 작품집은 많은 독자들이 여러 권 소장중일 것이다. 이 편집본은 조금은 새로운 면모를 하고 있는데, 카프카의 육필원고와 그가 그렸던 몇 장의 드로잉, 그리고 프라하 시가의 전경과 그의 작품 산실이었던 여동생 집의 사진 등이 22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내 그림은 순전히 그림 글쓰기라 했던 그의 말처럼 스케치 속에서 어떤 서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바라보지만 그의 소설들처럼 왠지 이해를 거부하는 느낌에 시선을 거두었다. 자신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음직한 왜곡된 이미지를 상상해본 것이 아닐까라는 헛다리도 짚어보지만 합당한 해석이 아닌 듯해 실패한 미소를 지어본다.

 

아무튼 카프카의 탄생 140주년 기념판본으로 출간된 이 책은 여덟 번째로 내 품에 들어 온 소중한 카프카의 소설집이다. 새롭게 시선을 끈 것은 옮긴이 전영애 교수가 엄선하여 서른 두 편의 장단편(短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내적 화자가 지닌 의미의 유사성에 따른 작품의 재배치가 돋보인다.

 

사실 나는 카프카를 즐겨 읽는다. 무의식의 어떤 은폐되고 억압된 욕망을 분출하고 싶어질 때면 짧지만 강렬한 밀도로 응축된 그의 소설을 주기적으로 찾아 든다. 물론 덤터기만 쓰고 물러날 때도 있지만 그 불가능 속을 헤매다보면 무언가 해소된 느낌을 갖기도 한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서사적 진공상태로 다가와 그 속에서 어떤 기대와 답변을 찾지 못하도록 일관된 요약이나 해석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그의 종결(終結)없는 미결이 매혹적일 수도 있다. 내가 답을 만들어가며, 혹은 내가 기대하는 어떤 질서를 축조해가는 해결의 과정을 즐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위에 인용한 카프카의 편지로부터 간략한 감상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구절은 한 권의 책에 대한 얼붙은 도끼의 은유처럼 그의 소설이 주는 불편함과 불안과 고통이 독자에게 무엇을 시사하려는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작품의 구조적 측면의 비()일관적 훼방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서사의 내용면에서 끊임없이 타자를 밀어내는 세계의 위계와 오염된 인간성들, 몰이해와 낯섦, 관료적 권력이 뿜어내는 악취 등등 인간과 인간사회의 추오를 들이밀어 독자들의 정체성과 실존을 위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곤란들과 당혹감을 정면으로 마주케 함으로써 체험적 변화를 요구하는 책의 의무에 대한 그의 의지표명일 것이다.

 

이 편집본의 표제가 된 극히 짧은 소설 돌연한 출발도 그 이해로부터 독자를 완강하게 추방하려는 듯하기만 하다. 첫 문장부터 실패의 상황이다.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내 오라는 명령을 하인은 듣지 못한다. 화자의 뜻은 이 불통에 의해 연거푸 좌절된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실패를 씀으로써 성공했다는 비평가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지적처럼 당대에 만연한 인간 사이의 소통불능이 단지 떠난다.”는 목적을 지닌 굉장한 여행과 극히 대항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상 혹은 진실의 지대를 향한 삶의 대모험은 이 돌연한 출발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듯이,

 

이와 연관하여 읽을 수 있는 소설인 옆 마을평범한 나날조차도...턱없이 모자란다는 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옆 마을로 말을 타고 나설 작정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할아버지의 말씀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있다. 구세대의 안주하려는 게으름과 이상을 찾으려는 새로운 세대의 응축된 대립의 장면이다. 이러한 세대 간의 갈등, 즉 지배의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메시지는 카프카 소설의 커다란 하나의 축인 것 같다.

 


그것은 약혼녀 펠리체 B'라는 부제가 달린 선고의 주인공 게오르크와 아버지의 거듭되는 위상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장면에서 극심한 갈등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둔감하고 더럽고 편견으로 그득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죄를 씌워 판결하는 이 우화는 너를 지금 익사형에 처하노라라는 말과 똑같이 다리에서 추락하는 아들의 행위처럼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이 작품에 시선이 붙들리는 것은 이러한 세대 간의 권력 갈등 못지않게 죽음이 지니는 의미이다. 부모님, 저는 그래도 당신들은 사랑했었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다리에서 떨어진 죽음 이후의 그 무심한 전경이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리 위에는 끝이 없을 것처럼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는 세계의 무관심한 불변성.

 

이것은 너무도 유명해서 거듭거듭 소환되는 변신그레고르 잠자의 죽음 이후 가족들의 소풍 전경과 거의 동일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카프카에겐 이 죽음의 개념은 평온과 안락, 화해의 감정이었던 것만 같다. 변신을 나는 작품의 외적 환경인 시대상과 연결하여 읽곤 하는데, 주류 유럽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끝없이 배제되고 거부되는 유대인의 고통, 즉 자기이해와 타자의 시선이 지닌 엄청난 간극에 대한 처절한 항의로 이해하고 있다.

 

이 작품과 항상 동일선상에서 언급되는 작품이 학술원에의 보고의 주인공인 원숭이 빨간 페터가 주류 사회를 상징하는 고매한 학술원에 하는 신랄한 보고내용이다. 이 소설은 페터의 치욕적인 상처를 설명하는 구절들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무시, 무관심과 편견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적 거세와 할레를 암시하며 유대인의 유럽 주류사회의 모방은 그네들의 생존적 탈출구임을, 유럽 사회가 우월해서가 아님을 강조한다. 오직 세상에 스며들기 위함임을, 그러나 세계는 페터의 보고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 메아리 없는 외침, 이 철저한 소외와 배제의 고통을 읽고 있으면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재적 사건임을 통절하게 느끼게 된다.

 

나는 단편 법 앞에서를 장편소설 소송에서 K와 신부가 나누는 법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시골사람의 대화를 참조하곤 하는데, 이해를 거부하는 이들의 해석에서 역설적인 전략을 보게 된다. 법의 문은 마침내 그의 죽음으로써 문이 닫힌다는 점이다. 시골사람 스스로 연기하는 술책이라고 지적한 조르조 아감벤의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한 인내심 가득한 고도의 전략이란 말에 한편 수긍하게도 된다. 카프카의 소설을 대표적인 열린 결말의 서사라 부르는 이유처럼 무궁무진한 해석들이 가능한 작품일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모두(冒頭)에서 말하기도 했지만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들이다. 단편 다리(, )와 잠재적 적을 막기 위해 지하에 삶의 터전을 구축하는 한 개체의 보고인 ()은 소위 기대와 체험, 그리고 실패의 정형성을 띤다. 물론 의 주인공은 조금 복잡하지만 애초 장소를 소유하지 못한 존재의 굴이 지닌 안전의 보장 실패는 예견된 귀결인 것만 같다. 살아있는 다리()로서 절벽 위에 몸을 뻗어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려다 그만 떨어져 찢어발겨지는 인간의 다소 황당한 이야기도 역시 실패는 본래적이다.

 

그런데 발터 벤야민실패는 카프카 문학의 정수라 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는 인생 경력에서 전형적으로 실패하는 주인공들이 즐비하며, 한편으론 이러한 망가진 경력을 표현하는 문학적 형식에 실패함으로써 그는 말하고자 함에 성공하고 있다고. 오늘 한 세기가 넘어 이역만리에 있는 낯선 지역의 독자가 그의 좌절과 실패담을 읽으며, 어떻게 이 세계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실패한 다리가 아닌 굳건한 토대를 놓았음의 반증일 것이다.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 통찰력으로 가득한 카프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세계의 규명을 마주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리장성의 축조 때와 같은 의사소통 부재, 의미를 상실하는 공동의 작업이나, 그 누구도 합의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닌 오드라덱을 통해 통제도 지배도 불가능한 존재를 그리는 가장의 근심에 이르는, 마치 원인도 목적도 없는 것 같은 불안의 실체들이 빼곡한 카프카를 읽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내 자신의 시선을 스스로 점검하는 실마리가 되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극적 실존으로서의 인간 카프카의 작품을 계속 읽어나가며 몰이해로 뭉쳐진 존재로서의 나, 상식이라는 하나의 시선에 포획된 나를 의심케 하는 목소리들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만 우리는 변화하고 다름을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그 생생한 실천의 장이다. 해명할 수 없는 것들에 달려들어 그것들을 규명하려는 온몸을 다하는 그의 절체절명(絕體絕命)의 글은 항상 묵직한 감동이다.

 

여전히 카프카 읽기에 나는 많은 빈틈을 느낀다. 이 틈새를 메우는 읽기, 그 모험을 이번 기념 편집본이 다시금 자극한다. 권력이 법과 함께 자신들의 영토를 모든 인간의 영역으로까지 뻗는 가장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즈음이다. 시민이기 전에 인간인 우리들은 이 불의한 영토화 욕망에 맞서야 하는 앎의 지대를 카프카를 통해 경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카프카를 읽기에 더없이 좋은 시절,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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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나무 아우또노미아총서 12
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 갈무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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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과 자신의 행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알게 모르게 어떤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이데아론이니 물자체니, 표상이니 하는 실재(實在)에 대한 인식들인 역사적 산물에 의존한다. 사실 이러한 인식론들의 철학적 배경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이 세상의 지배적 시선이 되어 일상에 녹아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 행위에 대해 새삼스레 성찰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를 습관화시킨 이들 인식의 방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수많은 세포(생명체)로 구성된 유기체인 존재를 라는 독립된 개체로 지각하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라든가, 우리라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존재인 이유는 무엇일까? 와 같은 물음들이다. 나아가 나라는 존재의 바깥인 환경을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이러한 것들은 어떤 작동방식을 지니는 것일까? 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물음들과 관련하여 외부 대상이나 사물의 표상(表象)을 인체 내 신경계가 작업한 결과물이라는 우리의 직관적 이해를 전복시키고 있다. 인식(認識)이란 어떤 표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물체로서의 존재가 자신의 생존을 지속케 하는 행위를 관찰자적 해석으로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설명하는 용어의 핵심이 구조접속이라고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생명체가 자기를 구성하는 조직을 유지한 채 환경과 적응 관계를 지속하며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즉 세계에 대해 어떤 인식과 반응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마치 인간만의 독특한 체계에 의한 것이라 바라보는 시선이란 인간중심적 해석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구성된 존재인가? 라는 물음을 하게 되면, 하나의 세포가 분열 증식하여 메타세포화 된 세포들의 통합구성체라고 답변할 수 있다. 이 답변은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미시적으로는 세포차원의 생존이며, 거시적으로는 몸체라는 거대한 메타세포체의 생존이라는 자기생성과 적응의 보존을 위해 매순간 역동적인 변화의 흐름을 지속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이 설명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행위라는 것은 외부 관찰자가 바라보는 외부적익 해석적인 이해가 아니라 곧바로 그 실체인 세포 개체 본연의 활동에 주목하게 한다. 일례로 원핵세포인 아메바를 관찰하게 되면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위족을 뻗어 이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관찰자는 아메바가 이동했다고, 아메바가 운동한다고 말한다. 신경세포도 없는 아메바는 외부의 표상 따위가 없다. 이 단세포 생물은 주변 환경의 어떤 상태가 유발한 요인에 의해 자기 역동성으로 인한 구조변화, 즉 내부 원형질이 화학적 반응에 의해 이쪽저쪽으로 흘러 떠밀렸을 뿐이다. 이를 섭동(攝動)작용(perturbation)’이라 부른다.

 

이 책을 읽고나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 개체들이 왜 그렇게 다양한 행위를 하게 되는지, 또한 왜 이러한 세계가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 세계의 필연성이 바로 생명체들 저마다의 자기생성과 적응 본능의 산출물임을 수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조차도 모든 개체마다 달리 구성된 유전자에 각인되고. 또한 저마다의 개체발생이라는 구조변천을 겪으며 지니게 된 고유의 자기 생존체계의 차이로 인해 다른 반응을 일으킬 것은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이 전복적인 인지론을 불편하게 여기기도 할 것이다.

 

이 저술의 목적은 바로 개체의 이 다름을 규명하는 것이며, 한편 이 다름을 포용하는 동일성을 유지케 하는 조직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조직을 이루는 구조적 요소들과 그 변화의 역동성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 산출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생명체의 역사인 원시지구로부터 오늘의 세계에 이르는 수십억 년, 그리고 영장류에서 현생 인류가 출현하는 수백만 년 자연 표류(漂流)’의 여정을 통해 문화의 탄생, 언어의 발생이 어떤 현상의 귀결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호작용의 한 양식인 섭동작용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현상인 구조 접속이다. 그리고 원시 단세포 생명체가 다세포화 되어 인간의 몸체와 같은 메타세포체로 형성되는 것이며, 이들 거대해진 세포들의 정보 연결망인 신경세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규명이다. 이로서 생명체가 그를 둘러싼 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이 작용의 성질이 곧 인간의 문화적 현상들과 언어의 발생으로 표현되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가진 특별성 바로 인간의 언어와 문화현상 등의 행위란 세포와 메타세포체의 자기생성조직의 역동성과 적응의 산출물일 뿐, 도의 인식행위라거나 이성의 발현이라며 유기물인 생물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발현이 아니라는 설명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 거부감이 심하게 솟구쳐 오를 수도 있겠지만, 인식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경험 속으로 파고 들 수 있도록 잠시 확실성의 유혹, 즉 자기 확신을 버리는 것도 지혜일 것이다.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실성을 허물지 못하면 그 어떤 새로운 앎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인지적 경험은 자신의 생물학적 구조를 바탕으로 매우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인식자를 전제하기에 그 오랜 개체발생의 학습을 버리는 것이 몹시 힘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인간 모두는 맹점(盲點)이 있다. 관념적 언어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실제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망막부위의 시신경이 빠져나가는 부위가 빛에 무감각함으로써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 인간이라는 메타세포체는 그리 완벽한 구조체가 아니다. 단지 환경의 구조변천과 자기생성조직과 적응 보존 활동이 상보적(相補的)이었기에 적응 상실을 겪지 않고 지금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관찰능력은 무한히 제한적이다. 타고난 무능력 지대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과학적 도구들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과학적 설명 체계를 내놓을 수 없는 것들에 우연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무능력과 무지를 실토하기도 한다.

 

여기 매우 중요한 관점의 문제가 있다. 앞서 언급한 아메바의 생존 작업 방식인 위족 행위를 보고 이동이라는 표현을 하듯, 생물체의 상태변화란 결코 외부 관찰자의 해석처럼 세계에 대한 표상물을 가지고 작업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생물체 자체의 역동성은 세계의 변화(장애물, 훼손 etc.)를 포함하지 않는다. 단지 주변 환경의 어떤 상태가 유발한 요인에 그저 자기 생존을 위해서 내부의 반응일 뿐이다.

 

인간 또한 단세포의 분열 증식으로 비교적 오랜 시간 개체발생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메타세포체인 몸체가 되었다. 지구상의 어떤 생물체도 번식은 오로지 단일 세포로 시작된다. 이 말이 뜻하고자 하는 바는 어떠한 생물체든 자기생성조직과 적응보존이라는 세포 내부의 역동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작업 폐쇄적 조직이라는 점이다. 결국 인간이건 여타 동물들이 되었건, 그 밖의 어떤 생물체가 되었건 그들의 형태변화나 행동이란 유기체 안의 관계들이 춤추듯 변화하는 것을 밖에서 본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사회적 삶 속에서 언어적영역을 산출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지만 사람만이 언어적 행동조정을 통해 새로운 현상계인 언어의 나라를 산출했다.” -237

 

이제 우리들이 의미론적으로 말하는 인식활동이란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유기체의 인식활동이란 유기체가 살아가는 구조접속의 영역 안에서 감각 작용적 상호관계로서 일어나는 활동이라고. 신경계가 환경의 어떤 것을 내면화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이 된다. 신경계는 어떤 외부 세계의 표상도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 단지 유기체의 작업방식과 환경의 작업방식이 어울려 이루어지는 구조접속의 표현일 뿐이다. 생물로서 구조접속(적응)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일이 그 생물의 존재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활동인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곧 앎(인식)이라는 말이다.

 

묻게 된다. 의미론적 인식으로 보는 것이 인간중심적인 표현이라면 인간의 무수한 관념적이거나 물질적 표상을 뜻하는 소통의 언어들은 대체 무엇이고, 기억, 생각, 이성, 정신이란 또한 무엇이냐고. 인간은 여타 생물체와는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는 표지 아니냐고. 구조접속의 이미를 되새기면 메타세포체와 같은 다세포 생물체의 각 개체들의 구조접속을 2차 구조접속이라하며, 사회적 행동 접속을 하는 것을 3차 구조접속이라 부른다. 이들 구조접속의 본질은 똑같은 기제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현상적 차이 외에는 구분이 없는 유기체 각자의 적응과 조직 보존을 위한 상호 개체들 간의 섭동이라 할 수 있다.

 

즉 사회적 유기체는 3차 구조접속에 의해 상호 재귀적 성격을 띠고 공동개체 발생을 겪게 된다. 사회적 유기체간의 섭동을 통해 함께 표류하는 개체들로서 새로운 현상계를 산출한다. 이때 모든 개체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생리적 역동성의 틀 안에서 밀접하게 접속되어 꾸준한 화학적, 시각적, 청각적, 그 밖의 온갖 요소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을 조정한다. 이 행동 조정을 통해 개체 자신들은 자기 자신을 공동의 상호작용 그물 속에 끼워 넣으며 개체발생을 실현하고 자기 생존을 보존한다. 이때 구조 접속의 영속성을 위해 개체가 하는 행동조정이 바로 의사소통이다.

여기서 다시 주목할 것이 있다. 유기체는 자기 구조적 역동성에 따르는 것을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이란 바로 세포 개체 또는 유기체가 자기 구조적 역동성을 멈추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자기 구조에 따라 결정되는 데로 자기가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을 행동 또는 말하는 것이고, 듣는 것을 들을 뿐이다. 즉 유기체가 무엇을 수용하는 가에 따라 일어나는 행동이나 말이 곧 의사소통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단세포의 본래 구조가 지닌 행동 양식에 의한 것개체 발생이라는 유기체 개별의 사회적 상황의 특수한 접속의 역사가 좌우한다. 이것이 인간의 다양성을 이루는 이유이다.

 

인간의 언어는 이러한 의사소통적 행위, 즉 언어적 행위로부터 발생한 행위들의 상호 조정이 일어남으로서 실현되었다. 언어가 생길 가능성은 이같은 3차 접속을 하는 사회적 유기체들의 자연 표류 속에 늘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이를 초기 인류의 사회적 동물로서의 생활양식에서 찾고 있는데, 친밀한 정서적 대인관계의 역사다. 3차 구조접속을 통해 인류는 계절과 상관없는 여성 신체의 구조적 변화를 산출하고, 이는 결속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이 생활양식이 재귀적으로 조정됨으로써, 즉 언어적 상호작용이 보존되는 가운데 애정에 찬 협업의 결과로 언어가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프리카 숲 속에 사는 앵무새는 시각적 접촉이 어려워 짝끼리 어울려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공동의 노래를 이용한다. 모든 쌍들은 그들만의 또 다른 가락을 만들어낸다

하나가 한 마디를 부르면 또 하나가 이어 부르는 이중창이다. 둘 만의 구별이 발생하고

이러한 의사소통을 언어적 행동조정이라 이른다.



다시 말해 언어적 행동이 언어적 행동조정의 대상이 되었을 때 언어가 생겼다는 것이다. 매번 결속을 확인하는 한 쌍의 남녀는 그들만의 친밀함을 여타의 것과 구분하기 위해 차별화된 소리로 개성화하였을 것이며, 언어적 행위의 영역 안에서 구분을 통한 자기라는 존재적 조건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구분의 능력, 즉 언어는 언어적 재귀현상이 없다면 결코 발현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것이 곧 자기의식이요, 정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만일 언어가 없다면 자기(selbst)’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우리 사람은 언어 안에 함께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이처럼 재귀적 상호작용의 역사를 공유하는 존재자들이다. 이는 또다시 중대한 이해로 우리를 이끄는데, 우리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이처럼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의식과 역동성이 비로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한다면 어떤 바깥세계를 내면화하기위해 어느 특정한 존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언어를 구성하는 행동조정을 통해 오히려 세계를 산출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세계에 가득 들어 찬 의식과 정신들, 수많은 규칙성들은 모두 우리가 겪어 온 생물학적, 사회적 역사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이 결과물을 통해 이 세계란 우리가 타자들과 함께 산출한 하나의 세계임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유기체는 자기 고유의 구조적 역동성에 의해 자기생성과 적응을 유지하려는 존재이기에 그 무수한 구조적 변이체인 인간 개체들은 모두 다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세계는 함께 만들어낸 것이며, 이 공동의 산출물과 상호작용, 즉 구조접속을 회피하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존하려면 서로 확실성을 고집하고 타자를 부정하면서 살아 갈 수 없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렇기에 세계를 산출하는 공동의 일원이라는 윤리적 책임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타자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성찰이며 윤리의 바탕이 된다.

 

자기 것을 확신하는 한 다툼이 생긴 영역에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극복하려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야 한다.” -276

 

진부하지만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잘려진 장면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벌거벗고 돌아다니며 세계를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락한 뒤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았다. 즉 비로소 자신들이 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들의 앎을 깨달았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 생물학적 일치 때문에 타인을 볼 수 있고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둘 줄 안다. 이 신경생물학적 인지철학은 남을 받아들임 없이 세계는 존재 할 수 없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책은 바로 이 사람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조건의 존재론적 근본 특징을 규명하는 위대한 고전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앎의 나무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의 모든 어려움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 것, 즉 앎을 모르는 데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앎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의 윤리적 책무일 것이다. 그저 안다고 하는 것이 이 세계를 얼마나 어지럽히는지 우리는 매양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이 인지 혁명적 신경철학의 세계를 거닐어 보는 것도 화려한 이 계절의 길을 산책하는 것 이상의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다.

 

 

용어 참조

 

*구조접속: 조직을 유지한 채 적응관계를 존속시키며 구조변화를 이루는 상태, 이 상태에서 유기체와 환경 모두가 자신들만의 독립적 변화를 겪는다.

*자연표류: 목적, 계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때그때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흐를 뿐이다. (저자들은 학계를 지배해 온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고 진화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 생물이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최적화하여 적응해가는 과정이라는 통속적 진화, 진보를 부인하는 것이다. 진화란 생물의 특정 성질을 최적화하는 과정이 아니며, 단지 자기생성과 적응이 보존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어떤 외부의 힘도 필요 없는 자연적인 표류의 산물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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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수확자 시리즈 3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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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생이 실현된 세계에서 인간의 자율성이란 과연 자신들에게 안전한 것인지를 묻는 수확자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이 마지막 편에 앞선 전편 선더헤드는 인간성이라 일컫는 인간의 본질은 양심과 연민이 다스리는 세계와는 한참이나 멀다는 증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처럼 이 소설은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총체적 모습들에 대한 일견 철학적이고 정치적이며 윤리적 언어들이 매 쪽마다 빼곡하게 박혀있다. 그럼에도 이 사색적 문장들이 서사적 흐름의 재미를 더하는 압도적 페이지터너로 작동하여 가히 살인적인 몰입에 빠져들게 한다. 나누어 읽겠다던 목표를 어느새 잊고 밤을 꼴딱 새는 후유증을 남길 정도이니, 결코 하루 180쪽 이상을 읽지 말 것을 충고한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종소리에 앞선 수확자선더헤드를 통해 수확자들과 그들의 지대인 수확령’,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전 인류의 세계를 통제, 관리하는 지능체계인 선더헤드는 상호불가침의 양립하는 세계이며, 죽음을 독점한 수확령의 부패로 더 이상 수확자들의 세계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윤리적 미덕이 작동하지 않는 원초적 폭력의 세계로의 변질을 목격케 했다. 인간지성의 통합체인 선더헤드는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불신이라는 최종 결정을 내리고, 인류 모두와 연결되었던 소통채널을 단절시키면서 불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신뢰할 수 없는 종족, 다만 하나의 소통 창구, 즉 단 한 명에게만 자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존재를 남겨두었다. 그가 종소리. 이 마지막 편은 종소리로 명명된 존재, 다시 말해 신뢰할 수 있는 인간 존재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과정과 이미 도덕성과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 연민을 상실한 권력화 된 수확 세력과의 생존을 향한 싸움의 과정이 전개된다. 또한 타락한 권력, 부패한 지배 수확자와 이로 인해 변화하는 인간과 그 집단들의 궁색한 부하뇌동, 오늘의 우리 인간사회에서 펼쳐지는 그 무수한 현상들의 본질이 지닌 하찮음과 탐욕 등을 드러내 보여준다.

 

어쩌면 이 마지막 편에서 우리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이 만든 사회의 모습이 얼마나 천박한 욕망들로 구축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목숨을 거두는 수확자에게 요구되었던 미덕과 이타심, 명예가 자만심과 자기편익에 의해 얼마나 쉽사리 무너지는지를 본다. 이 세상의 무엇이든 일궈내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와 노력의 축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이룩된 것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정말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임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소설은 바로 이 순식간에 세상을 퇴행, 악화 시키는 것들의 열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류 사회의 조화로운 평화를 유지하던 인류를 대표하던 7인의 대()수확자들과 그들의 신성함을 상징하던 인공섬 인듀라를 함께 해저의 심연에 침몰시키고 불의하게 최고위 수확자가 되어 세계를 유린하는 인물이 자신의 거처에 시민을 향해 설치한 포대처럼 지배와 군림, 권력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은 총구가 겨누어야 하는 본연의 이익이 어떻게 뒤바뀌는 지의 일례이다. 국가의 보위를 위해 만들어지고 조성된 무기와 병사의 총부리가 침략하는 적을 향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빈번하게 내부의 국민들을 향해, 권력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겨누어졌는지 또한 우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소설의 핵심 제재인 수확자, 불사(不死)의 세계가 된 세상에 공정한 죽음을 가져오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마치 오늘날 국가의 대표자와 여러 형식의 국민 대표기관들이 주권자인 국민을 보위하기 위한 수단인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본질이 얼마나 쉽게 역전되어 그 도구와 수단이 주인으로 행세하려는 드는지를 소설 속 고위 지배자 고더드는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최악의 유형을 보여준다. 이 자는 공포는 존경이 사랑하는 아버지임을 역설하며, 인류를 향한 폭력의 공포를 통해 순수한 복종을, 자신 만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 같은 추악한 권력이 저지르는 여러 형태 중 아주 멋진 장면으로 인류 공공의 적으로 누명을 씌워 한 청년의 처형을 대형 이벤트, 즉 휘황찬란한 쇼로 바꿔 놓는, 소위 스펙터클이라는 대중을 향한 기만적 행위를 들 수 있다. 자신의 부패와 불의로 인해 모여진 시민적 분노의 시선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외교적 실패와 무능, 국익의 훼손이라는 국민적 추궁이 집중되자 정적에 대한 조작된 악성 루머를 통해 시선을 돌리는 행위와 같은 양태라 할 것이다. 대중 분노의 출구를 스텍터클화된 쇼로. 그러나 곧잘 그것을 즐기는 천박하고 우매한 인간들의 자멸의 길이 되기도 함을 참담한 비극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 이 소설을 리더의 덕목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고더드라는 최악의 인물을 통해 오늘 우리 사회를 읽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아가 너무나 비대해져 자신이 저지른 온갖 거짓과 위선과 기만에 대해 언제나 합리적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그 부도덕성의 향연이라 해도 될 것이다. 잘못 선택된 한 인간이 수 없는 피와 고통으로 이룩한 사회적 건강성을 얼마나 짧은 시간에 항구적으로 파괴하는지, 그래서 인류의 삶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시간적 회귀를 하게 되는 지의 일례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게는 윤리와 도덕성 따위는 헛소리가 되고 만다. 양심은 깨끗했는데, 양심이 아예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헛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고결한 수확자로서 이 부패한 인물과 대척에 선 패러데이가 하는, 우리 인간은 뭐가 문제일까? 발 딛고 선 곳을 뜯어내고 마는 까닭이 무엇일까? ” 라는 자조적 물음이 있다. 물론 단순히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완벽한 세상에 들어맞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만일까? 불완전하니까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어떠한 공감도 연민도 없는 것이 당연한 행위가 될 수 있는가하고 물어보아야 한다. 이를 부정한다면 오늘의 인간 문명이 설 토대는 사라지고 만다. 물론 내면에서 일어난 자기 욕망에 어떻게 의심을 품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과 같이 인간의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계를 알기에 자문할 줄 알며, 성찰(省察)이란 것을 할 줄 안다. 그리고 타인의 의견에 겸허히 귀 기울여야 함을 안다.

 

사실 이 소설에는 선더헤드라는 인류지성의 총체인 초지능의 자의식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물음의 멋진 사색들, 정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가 지닌 단독성, 종교에 대한 현대적 수용과 비판에 대한 은유적 서사들, 효율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불가피한 연민의 소멸에서부터 대중의 계층적 차별 인식이 권력의 위선 은폐의 용이한 도구적 관점이 되는 것, 인간의 희망이 정치적 불의와 자기 편익에 의해 소멸할 수 있는지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들로 수놓아지고 있다. 한편 종소리 성서와 그에 뒤따르는 사제의 해석, 그리고 해석에 대한 현대적 분석이라는 기발한 장들과 같이 작가의 재치 넘치는 종교 비판의 지적 환유를 만끽할 수도 있으며, 인류의 자기 구원을 향한 원대한 지향을 발견할 수 도 있다.

 

지금 이러한 열렬한 비판적 자기 탐색의 이야기들도 아마 수십 년 내에 조잡함과 근시안적 이해를 보고 웃음 지을 확률이 거의 절대적 일 것이다. 요즘들어 이러한 비판적 성찰의 감상을 끄적이며 이 열렬함이 민망스럽게만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태도는 이것이 최선일 것이라며 위안을 삼는다.

 

1수확자리뷰참조: https://blog.aladin.co.kr/729034103/14373732

2선더헤드리뷰참조: https://blog.aladin.co.kr/729034103/1438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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