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각성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헛소리!

 

나는 부정적 언어로서의 <세계관>을 발명했던 철학자가 바로 그 세계관에 함몰된 증거로서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을 보았다. 그로부터 하나의 단상을 끄적이게 되었다. 근대성이라는 제도적 지배와 합리성이라는 단단한 껍데기의 천장을 깨부수고자 고뇌했던 인물이 다시금 그 껍데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데 매진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세계관을 부수는 데 결코 가능한 존재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었고, 결국은 그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직접의 체험을 통한 고통스러운 각성이 필요한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아래의 글은 이에 대한 두서없는 생각을 적어 본 것이다.

 

“전쟁은 자기보존의 원리에 따른 세계 관리의 일부이며, 부르주아 사회를 흔드는 외부 요소이거나 부르주아 사회의 광기 어린 일탈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 제도의 근간이다.”

-Gunnar Hindrichs, 《Abseits des Krieges(전쟁에서 벗어나)》(2024)

 

인간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껍데기 안에서 산다. 이것을 ’세계관’이라 이른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그의 초기 저작인 《세계관의 심리학》에서 최초로 개념을 부여한 단어다. 그런데 이 세계관이란 것은 딱딱하게 굳어버리기 일쑤고, 그럴 때 이 세계관은 ‘강철 껍데기(또는 쇠우리: stahlhartes Gehäuse)’가 된다. 하지만 이때 인간들마다 다른 행동을 한다. 그 딱딱하게 굳은 껍데기의 좁아터진 안이 이 세계라고 철저히 믿는 인간이 있는가하면, 그 안에서 자기 실존을 밝혀주는 존재의 속박을 느끼는 인간도 있다. 존재 속박을 느낀 인간은 죽은 껍데기를 흔들어 한계상황을, 즉 존재의 경계에서 그것의 내연을 확장하거나 깨부수어 열린 공간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대개는 그 굳어버려 죽은 껍데기 속에 안주하며 산다. (‘강철 껍데기’는 막스 베버로부터 야스퍼스가 빌려온 개념이다)

 


한편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는 그의 초기 저작 《소설의 이론》(1916)에서 근대소설의 탄생을 설명하는 철학적 명제로 근대적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말하는 가운데 ‘선험적 노숙(Tranzendentael Obdachlosigkeit)’ 상태를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세계, 즉 존재와 의미가 일치하는 정신적 존재론적 고향을 상실하고 세계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명명이다. 루카치가 노숙상태에 ‘선험적’이라는 수식을 붙인 이유는 근대 이전에는 세계 자체가 인간에게 의미를 제공했지만 근대에 이르러 더는 세계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근대적 인간 존재의 경험 너머의 상태조건을 말하려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이처럼 세계가 총체성을 상실한 곳이고, 그래서 인간은 그것을 다시 찾아 나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고 보면 야스퍼스가 말하는 강철 껍데기와 루카치의 선험적 노숙은 세계의 조건들과 화해하지 못하는 간극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까운 언어처럼 보인다. 물론 루카치의 선험적 노숙은 강철 껍데기보다 근원적이고 포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야스퍼스는 사회 경제적, 정치 제도적 측면으로 한정된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저항을 말하고 있지만 루카치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의미론적, 존재론적 관계가 붕괴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두 개념은 근대이후의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자유롭고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 잡기 어려워졌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야스퍼스가 막스 베버로부터 빌려온 강철 껍데기(쇠우리)는 근대 자본주의의 합리화가 만들어 낸 구조적 구속을 가리키고 있지만, 루카치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의미의 총체성이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보면 야스퍼스의 강철 껍데기를 루카치의 선험적 노숙으로 포괄해도 될 듯하다. 사실 근대성의 의미인 합리적 제도와 관료제, 경제적 질서가 인간을 지배하는 독립적 힘을 행사하는 체계에 대한 반항 일뿐 아니라, 거주하는 세계를 자신의 정신적 고향으로 경험 할 수 없는 존재와 의미 관계 자체에 대한 반항인 까닭이다. 제도에 갇힌 인간을 세계에 귀속되지 못하는 인간으로 확장해서 이해하는 것이 존재에 대해 보다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오늘 현대인의 소외를 단순히 사회적 억압이나 경제적 종속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 안에서 자기 존재의 정당성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사변적으로 흐른 것 같은데, 이렇게 현대인의 실존 조건은 근대성이라는 속박의 껍데기에 대한 뿌리 깊은 파괴 욕구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 그래서였는지 야스퍼스는 전쟁을 죽은 껍데기에 주는 충격, 실존을 해명하는 과정으로 제시했다. 일상을 파괴하는 강렬함을 지닌 전쟁의 뿌리가 현대인의 존재 자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선험적 노숙상태를 극복하는 합리적 도구로 말했다는 점에 나는 기겁했는데, 한계 상황으로서의 전쟁이 근대의 영혼 없는 기구(제도)들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야스퍼스가 믿었던 까닭이다. 즉 전쟁이 예속의 껍데기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다음을 약속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전쟁이 정말 이런 약속을 수행하는가? 이 약속이 기만인 것이, 전쟁 자체가 하나의 제도이기 때문이고, 전쟁이 충격을 주고 뒤흔드는 듯 보이는 제도들이 속한 자본주의 사회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말살행위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극단적으로 파괴한다. 전쟁은 제도들이 만든 구조물에서 탈출하는 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강철 껍데기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데 일조 할 뿐이다. 제도들은 평화를 약속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속에 품고 있다. 경제, 정치, 법, 과학 할 것 없이 비상 상황에서 이 제도들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뛰어든다. 전시 경제, 전쟁 법, 전쟁 정치와 전쟁 과학이 존재하고, 이것은 각각 제도와 연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전쟁은 제도들의 일부이며 가장 극단적 모습일 뿐이다. 또한 전쟁의 반시민성은 자본주의 제도들과 모순되지 않으며, 단지 그 제도들의 최악의 지점을 만들 뿐이다.

 

오늘 우크라이나, 이스라엘의 전쟁 양상을 보라. 전쟁 행위자들이 대단히 제도화 되어있으며, 자본과 제도의 집적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전쟁은 군산복합체의 공고한 결속, 제도 속에서 더욱 단단한 강철 껍데기를 구축하는 데 있다. 야스퍼스는 세계관이라는 강철 껍데기와 한계상황을 제대로 통찰했음에도 전쟁이 제도를 새롭게 갱신하는 합리적 도구가 되리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졌다. 전쟁은 제도를, 강철 껍데기를, 선험적 노숙상태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평화와의 결별을 제도로 만든다. 전쟁은 선험적으로만 인간을 노숙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안식처를 갖지 못하고 떠돌게 만든다. 전쟁은 극단적 홈리스를 생산하는 것이다.

 

여기서 근대사회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대중 사회의 획일화, 기술적 합리성의 확대, 인간의 실존적 자유 상실을 문제 삼으며 인간 예속에 대해 비판적 매스를 가했던 철학자가 그러한 제도를 무너뜨리는 대안으로 권위주의적 정치 질서, 전쟁을 상정한다는 것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체제를 만들어낼 위험을 가진다는 것을 몰랐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인간에게 기존 세계관의 한계와 실존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로 전쟁을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존적 각성을 이유로 전쟁 자체를 정당화한 것이라고, 나아가 나치정권에 협력한 인물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17 Edition)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항목 중에 1933년 나치 집권 초기 야스퍼스의 태도에 대한 설명이 있다.

 

[Karl T. Jaspers(1883.2-1969.2)]


“In 1933, Jaspers himself was briefly tempted into making certain incautiously optimistic statements about the Hitler regime.”(1933년 야스퍼스 자신도 잠시 히틀러 정권에 관해 신중하지 못할 정도로 낙관적인 발언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그리고 중요한 문장이 이어진다. “Indeed, these remarks were not entirely out of keeping with his other publications of the early 1930s.” (실제로 이러한 발언들은 1930년대 초 그의 다른 저술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위 문장은 야스퍼스의 발언이 일시적 실언이 아니라 1931년 그의 저서 《우리 시대의 정신적 상황(Die geistige Situation der Zeit)》에서 나타난 의회민주주의 비판, 강력한 지도력에 대한 옹호가 1933년 정치적 판단과 연속성을 갖는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실존적 각성을 추구하는 철학이 정치의 권위주의적 열망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을 예속시키는 제도와 기구를 흔듦으로써 대안으로 강력한 권위주의적 정치 칠서와 전쟁을 상정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열망하는 전쟁 속에 극단화된 제도가 있음을 결코 모르지 않았으리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면 야스퍼스의 초기 정치사상에 면죄부를 줄 수 없다. 그렇다고 그를 적극적인 나치즘 동조자로 규정할 수도 없는데, 그의 아내 게르트루드 마이어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대학행정에서 배제되다가 1937년에 교수직에서 강제 퇴직당하고, 다음해 그의 모든 저술이 출판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스위스로의 이주도 막힘으로써 1945년 하이델베르크로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강제수용소 이송을 2주 앞두고 모면했다는 사실은 나치로부터의 박해 사실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야스퍼스가 나치즘에 대한 사상적 동조를 한 것은 명확한 것이지만 이것이 곧 정치적 협력은 아니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야스퍼스는 분명 나치 집권 초기의 정치적 오판과 권위주의적 정치관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가 나치당 가입이나 정권의 정치적 이념적 활동에 협력했다는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같은 철학적 인간관과 정치적 사상의 이 이질적인 간극은 대체 무엇일까?

 


물론 나치정권의 붕괴 이후 1946년 출간한 《죄의 문제(Die Schuldfrage)》는 그가 전쟁을 경험 한 이후 정치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졌던 것의 증거일 것이다. 실존은 개인이 스스로 자유를 자각하고 타인의 의사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는 그의 정치사상인 개인을 인종과 민족이라는 집단적 범주에 종속시키는 권위주의적 또는 나치의 인간관과 충돌한다. 이 저술에서 야스퍼스는 나치즘 경험 이후 기술적 합리성과 전체주의적 지배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헌법적 권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지만 여전히 엘리트주의적 정치 성향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가 실존적 각성을 위한 극한의 경험과 인간이 실제로 책임을 져야하는 역사적 폭력 사이의 긴장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전쟁이 제도적 환경을 흔드는 게 아니라 예속의 강철 껍데기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전쟁을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단단한 껍데기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허구임을 알아차리는 데 실패했던 것이고, 전쟁이 인간을 완전히 방치된 존재로 만든다는 적나라한 사실성을 깨닫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오판으로 이해된다. 그의 정치적 세계관은 권위주의를 떠나지 못했다. 이 단단한 강철 우리에 갇혀있음에도 정작 자신이 갇힌 껍데기의 경계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거창하게 근대성의 강철 우리를 고작 더욱 극단적인 말종의 제도로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바로 그 세계관이 그 자신을 속박하게 되자 비로소 정말의 한계 상황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것만 같다.

 

나 또한 이러한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인식한다. 아마 한계상황임을 체감하는 요인 또는 사건과 마주해야 비로소 작은 변화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탁월한 사유의 철학자가 선험적 노숙 상태를 끝내기 위해 항구적 노숙 상태인 전쟁을 설파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라는 것에서 인간의 세계관이라는 것의 그 편벽함을 다시 읽는다. 우리 각자는 강철로 된 단단한 우리에 갇혀 있음을 매양 자각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와 타인이 변화하고 세계가 변한다. 고착된 자기만의 언어로 타인과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짓거리처럼 천박한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강철 껍데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을 주절거린 듯해 민망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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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진술에서 질(質)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심코 어떤 대상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을 투사하고는 마치 그 대상의 본질자체를 객관적으로 진술하는 양 말하고는 한다. 때문에 ‘이 사람은 질이 좋다.’라든가, ‘이 천은 질이 나쁘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그 말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그 ‘질(質)’이라는 것이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분리되어 독립된 정의를 지니는 자의적 판단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만일 질이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어떤 판단가치에 따른 구분이라면 그 말은 단지 말하는 자의 내면 투사에 불과할 뿐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질을 주관적 표현이라고 보편성의 가치를 그저 폄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1. 사회적 가치 판단으로서 질(質)이란 대체 무엇인가?

 

왜냐하면 이 문제는 몇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어떤 대상이 지닌 특성이나 성질이라는 대상 자체의 ‘속성으로서의 질’이 있고, 그 대상이 어떤 기준에서 더 낫거나 우수하다는 판단인 ‘평가로서의 질’이 있으며, 그 대상이 추구할 만한 가치나 목적 적합성 여부에 관한 판단인 ‘가치로서의 질’로 구분할 수 있는 까닭이다. 두 개의 의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튼튼하고 다른 하나는 아름답다. 어느 의자가 질이 좋은가? 내구성 기준으로는 전자가, 예술적 감상이나 실내공간의 미적 조화 측면에서는 후자가 질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즉 내구성이나 미적 속성이 곧바로 종합적 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질을 판정하려면 대상의 속성뿐 아니라 그 속성을 평가하는 목적과 기준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질을 단순히 대상 안에 들어 있는 독립적 속성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고, 대상의 속성, 평가 목적, 판단 기준 사이의 관계를 함께 살펴야 비로소 어느 만큼의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일상에서 이러한 살핌을 등한시하고는 대상을 마구 재단하고 판단하곤 한다.

 


질이 대상 자체에 완전히 내재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올바른 방법만 발견하면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말 할 것이다. 이와 달리 질은 대상과 분리된 외부의 가치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의적인, 개인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앞서 세 가지 층위를 언급했듯 실제로 질은 이처럼 무 자르듯 단순한 관계가 아닌 복잡한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질’이라고 말할 때 질은 내구성, 정확도, 안전성, 처리 속도와 같이 일정한 조건 아래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지칭하기도 하고, 무엇을 위해 이용(사용)하는 가에 따라 중요성을 달리하는 ‘목적과 맥락’의 측면에서 말하기도 하며, 효율성, 공정성, 아름다움, 지속 가능성 등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와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른 평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빠른 자동차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고, 아름다운 의자가 항상 가치 우선을 갖는 것도 아니듯 말이다.

 

결국 측정의 객관성이 가치 판단의 객관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대상의 모든 특성을 종합하여 좋은 질을 객관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의 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은 칼은 잘 자르는 칼이고, 좋은 연주자는 연주라는 활동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의 질은 대상을 목적과 기능에 대한 적합성으로만 설명한다. 이는 인간의 삶처럼 목적 자체가 논쟁적인 대상에게는 대체 무엇이 탁월성인지를 다시 물어야하는 극히 지엽적인 설명에 머물고 만다. 칸트는 판단을 증명할 수 있는 명확한 개념이나 규칙을 제시하기 어렵다며, 보편적 동의를 요구하는 판단일지언정 객관적 측정 기준을 갖는 것은 아니라며 미적 판단의 보편성 문제에 유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이데거라 해서 이보다 나은 설명을 한 것은 아닌데, 대상을 오직 성능(능력)과 유용성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모든 대상을 어떤 공통된 척도로 비교하려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자, 제기한 질문, 대상과 분리된 질이란 무엇인지 다시 물을 때가 되었다.

 

질이 대상과 분리된 독립된 실체라면 우리는 그 질이 무엇인지 대상과 무관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좋음, 우수함, 탁월함과 같은 말은 대개 무엇이 좋은지, 어떤 점에서 우수한지, 무엇을 위해 탁월한지 물을 때에만 비로소 구체적 의미를 얻는데 불과하다. 그럼 질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한 것일까? 질은 개별적 속성을 넘어 여러 속성을 종합하고, 그것을 목적이나 가치에 비추어 평가하는 개념이라 이해 할 수 있다. 일례로, ‘좋은 소설’이라는 판단은 문장의 아름다움, 서사의 완결성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 기존의 관습을 변형하는 힘, 언어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정도 등 서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차원이 관여하는 것이다. 이들을 정리하면 질을 이렇게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질이란 대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일한 우수성의 실체라기보다, 대상이 지닌 여러 특성이 특정한 목적과 가치의 지평에서 평가되고 서로 비교되는 관계적 개념이라고 말이다.

 

2. 질 판단 기준이 대상의 전체 특성이 되는 기이한 역설

 

이제 본론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늘의 질은 흔히 점수, 순위(서열), 지표, 인증, 생산성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수단은 복잡한 대상을 비교하기 쉽게 해주지만 동시에 매우 큰 위험을 갖는다. 측정 할 수 있는 특성이 질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대학의 질을 취업률과 논문 수로, 노동의 질을 생산량으로, 예술의 질을 관객 수와 시장 가격으로 평가한다고 해보자, 이 지표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 지표가 평가의 일부로 그치지 않고 대상의 전체로 규정하며 바뀌는 순간이다. 이때 질은 더 이상 대상에 관해 질문하는 개념이 아니라, 대상을 특정한 질서에 편입시키는 규범으로 작동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로버트 M. 피어시그는 그의 자전적 저술인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몬태나주립대학 영문과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학과장이 그에게 “선생께서 학생들에게 질을 교육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그 요구이다.

 

우리는 대상의 질을 판단하기 위해 기준을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곧 질이 되어버리고, 마침내 기준에 포착되지 않는 대상의 특성을 질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기에 이르는 역전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영문학 학과장은 피어시그에게 질을 교육하라고, 규범, 즉 정해진 속성이 곧 본질이니 그것을 엄수하고 그 외의 것은 배제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측정하고 관리 가능한 것만이 중요한 것이고 그 중요한 것이 측정, 관리 가능한 것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표준화가 부당한 것은 아니다, 정확성이나 안전처럼 공통 기준이 반드시 필요한 영역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목적에 유용한 기준을 모든 대상과 가치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때 발생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무엇이 질인가를 묻기 전에 왜 그것에 질이라는 판단을 갖다 대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어떤 기준이 대상의 특성을 잘 측정하는가와 그 기준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하는 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질을 판단하는 권한과 기준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질을 정의하는 작업은 나음(우수성)의 속성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대상의 특성, 평가의 목적, 가치의 위계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밝히는 작업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때 근본적 의문이 생긴다. 질을 ‘더 나은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나음은 질과 별도로 정의 될 수 있는가? 만일 나음을 정의하기 위해 다시 다른 질적 기준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끝도 없이 정의를 되풀이하게 된다. 그래서 피어시그는 질에 대한 이 물음의 상자에 갇혀 끝없이 맴돈다. 여기 그 문장을 인용해 둔다.

 

"질을 함유하고 있는 대상과 분리해서 질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질은 거품처럼 꺼져버리고 만다, 이야기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질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모든 실용적 용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실용적 용도를 위해 그것은 정말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이 없다면 달리 무엇에 근거하여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분명히 무언가는 다른 무언가보다 낫다....하지만 낫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15장, p332

 

이 인용절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순간 이미 가치판단이 개입한다. 그리고 질을 가치판단으로 설명하려면 그 가치판단의 근거를 다시 설명해야 하므로 질(質)의 본질은 끝없이 유예된다. 가 될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질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독립적 본질을 지시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러한 본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기능하는 언어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한다. 그렇다면 질은 대상을 기술(記述)하는 말인가, 대상을 평가하는 말인가?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이 천은 부드럽다 → 이 천은 내구성이 높다 → 이 천은 질이 좋다> 촉각 특성에서 시험 비교할 수 있는 특성으로,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앞선 특징들을 종합할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가치를 포함할 수도 있는 특정 가치의 관점에서 종합하고 승인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질은 기술적 개념에서 평가적 개념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질이 좋다’라고 우리들이 말할 때 반드시 그 평가의 근거를 명시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표현은 단순한 개인적 감상 이상의 의미를 주장하는 듯하다. 마치 대상 자체에 좋은 질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곳을 짚는다. 질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과 질에 관한 판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순간적 역전 현상을 맞이하게 되는데, 대상에서 질을 발견했다고 말 할 때 실제로는 이미 어떤 기준에 따라 대상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고, 그 평가의 결과를 대상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놓는 순간 평가의 기준은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떤 사회가 노동의 질을 성실성, 생산성, 효율성으로 평가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노동의 질이란 본래 그러한 속성을 갖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왜 성실성과 생산성이 좋은 노동의 기준이 된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노동을 조직하는 경제체제의 필요가 그러한 기준을 강화한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산성이 노동의 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일 수 있다. 문제는 이 특정한 가치가 형성된 역사적 과정을 지워버리고 그 가치를 대상의 자연적 본질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질이 좋다는 표현은 단순한 평가를 넘어 특정한 가치 체계를 승인하고 재생산하는 언어가 된다.

 

여기서 이런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질이 대상에 내재한 본질이라면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은 모순이다. 반대로 질이 평가 기준에 의해 구성된다면 왜 그 기준을 대상 자체의 속성인 것처럼 말하는 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질의 본질이란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본질을 찾는 방식이 잘못된 것인가? <‘좋은 소설’, ‘좋은 칼’, ‘좋은 교사’, ‘좋은 사회’>, 이 네 가지에서 ‘좋음’은 동일한 속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의 독립된 ‘좋음’을 발견할 수 없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런데 각각의 맥락에서 적절성, 목적의 성취, 가치 있는 결과들을 판단한다는 유사성이 있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언어적 실천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이 적절한 이해일 것이다.

 

피어시그는 질의 본질을 사유하는 가운데 오리무중에 빠져 끝없이 순환할 수밖에 없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피어시그의 사유를 들여다보면 그가 애초에 서로 다른 평가의 맥락을 관통하는 하나의 독립적 실체가 있다고 질을 가정한 것이 문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질을 정의하기 위해 더 근본적인 질을 찾아가는 대신, 질이라는 말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수행하는지 살펴보지 못했던 까닭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목소리로 말한다면 질은 “본질을 가치 대상의 이름이 아니라 여러 판단을 조직하는 언어적 기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질을 단지 언어의 사용이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다.

 

3. 질은 객관주의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주의 언어인가?

 

우리는 어떤 대상의 질을 평가할 때 단순히 사회적 관습의 가치나 취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해당 대상의 물리적, 생물학적 조건과 인간의 경우 생명이라는 가치가 판단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에 관해 판단할 때 적어도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대상은 어떤 성질을 가졌는가라는 대상의 실제 특성, 그리고 어떤 성질을 중요하게 여기는가라는 평가의 기준, 마지막으로 왜 그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판단의 정당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차원을 적용하면 질의 문제를 전적으로 객관주의나 상대주의 중 하나로 환원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들을 종합하면 질은 대상과 완전히 분리된 실체도 아니고 순전히 주관적인 감정도 아니다. 질에 대한 판단은 대상의 특성과 평가 기준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며, 그 기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앞서 제기한 문제를 재구성해보자. 우리는 질이라는 개념을 통해 대상에 가치판단을 부여하곤 한다. 그런데 그 가치판단을 정당화하려면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을 정당화하려면 다시 그 기준이 지향하는 가치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정당화하려면 또 다른 기준을 요구하게 되는 순환 논리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질은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제공하지 못하는 개념처럼 보인다. 만일 이 말이 진실이라면 질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독립적인 본질을 가리키지 않으며, 평가와 정당화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본질을 계속 찾아가는 작업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

 

질의 본질을 찾는 대신 질이라는 말이 어떤 가치를 승인하고 어떤 대상을 배제하는지, 그 기준은 누구에게 유리하며 무엇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으로 물음의 본질을 바꿔놓는다. 질의 정의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질을 요구하는 사회의 조건을 묻는 것으로 이동해야 함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애초의 물음인 ‘질이 좋다’고 말 할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포함될 수 있음을 간과했던 실수도 있다. 대상에는 실제로 더 우수하게 만드는 어떤 성질(능력)이 있다는 ‘존재론적 주장’과 특정한 목적과 가치에 비추어 그 대상을 더 우수하다고 판단하려는 ‘규범적 주장’을 구별하지 않고 뒤섞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혼란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상적 언어 습관에서 이 둘을 거의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다보니 전혀 다른 주장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오류다. 규범적 판단을 마치 존재론적 사실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거나 감추고 있는지를 은폐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인식을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의식적 혼용 때문이거나, 이에대한 식별 불능의 무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피어시그는 질이라는 사회적 가치판단에 저항한다. 그는 가치판단의 정당성을 얻는 조건 자체로서 질을 묻는 것인데, 가치 우선순위가 들어있는 질이 좋다는 판단에서 가치 선택과정이 생략되었을 경우, 부여한 우수성이 마치 대상 안에 본래부터 존재했던 객관적 속성인 듯 보이는 그 판단 전체에 의심을 가졌던 까닭이다. 존재론과 규범의 혼용 문제는 근대 사회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효율성이나 성과, 피어시그의 말을 빌면 합리적 이성의 가면을 쓴 근대 과학적 이성을 객관적 가치 기준으로 내세우는 현상의 비판적 검토일 것이다. 과연 가치판단의 객관적 정당성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가? 그것이 대체 인간의 정의에 가당키나 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계속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질’에 대한 물음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과 사회적 취향이 충돌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판단은 언제 사회적 규범에 대한 복종으로 변질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명확하게 분리하여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좋다’라고 판단하는 것과 그 대상의 좋음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 판정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두 판단은 실제 삶에서 뒤섞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거나, 반대로 사회적 기준을 거부하는 것 자체를 좋은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두 인식은 실제 우리들 사회와 사람들에게 훨씬 복잡한 양상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은 사회의 기준에 순응하면서 자기 판단을 잃기도 하고, 그 기준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또는 자기 판단만을 믿고 그 밖의 모든 가치 판단을 부정함으로써 광기로 치닫기도 한다.

 

4. 질에 저항하는 문학 작품 속 인물들

 

아마 허먼 멜빌이 창조한 인물, 사회적 가치에 단순한 불복종을 넘어, 타인이 정해놓은 일련의 판단기준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는 바틀비는 이 질에 대해 정면으로 저항한 대표적 인간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I would prefer not to.(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피어시그는 이 말을 하지 못함으로써 지독한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사회는 질이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어떤 행동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유용하고 무용한지,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인지들 판정한다. 그런데 바틀비는 이러한 판정에 논박으로 맞서지 않고 판정의 요구자체를 무력화한다. 피어시그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유용성이라는 기준은 대상의 질을 판단하는 충분한 근거인가?라고 묻는다. 이다. 물론 바틀비의 거부, 그의 침묵은 저항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관계에서 밀려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거부는 해석불가능의 지점에 내려놓는다. 질을 말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짙은 혐오를 암시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사회가 기대하는 가치 판단에 동의하지 않으며 거부의 의지를 보이는 문학작품들은 수두룩하다. <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겠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사회의 관습적 요구인 슬픔을 표현하지 않거나, 재판을 받으면서도 법정에서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 문제가 되는 뫼르소처럼. 그는 사회가 특정한 상황에 요구하는 감정과 표현을 자연스레 수행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는 그의 행동 뿐 아니라 인격 전체를 의심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 인간 사회의 논리적 부조리를 목격하게 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판단하는 우리들의 인식을 생각해보자. 그는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퍼하고 후회하는가? 그리고는 이 판단을 통해 그는 어떤 인간인가?라는 인격에 대한 판단을 하고, 마침내 이 판단을 근거로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끌어들인다. 규범적 측면을 끌어들여 그 사실만으로 인간 존재 전체나 도덕적 성격을 확정하려는 것인데, 우리들은 이러한 질의 광범위한 무법지대가 결코 타당한 것이 아님을 뫼르소에게서 발견한다. 여기에 사회적 유용성의 기준에서 배제된 그레고르 잠자도 한 예로 추가해도 될 것이다.

 

이들 문학 작품 속 인물들과 더불어 사회적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 그 기준을 내면화한 사람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곤경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문학들로 이 세계가 가득 채워져 있다. 그만큼 질의 문제는 우리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요청하는 중대하면서도 모호한 개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실을 추구하는 주체가 치르는 대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써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어시그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사회적으로 승인된 지식과 판단의 틀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질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자신의 사유와 사회적 삶 사이의 간극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급기야 정신 분열에 시달린다. 실존철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R. D. 랭은 『분열된 자아; 정상성의 세계에서 자아가 입는 상처((The Divided Self)』,(1960)에서 이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의 세계가 외부의 정상성 기준에 비추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랭은 한 인간이 자기 경험의 진실성을 지키려는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및 공동의 세계를 유지해야한다면 그 사이의 긴장은 감당키 어려운 것임을 시사한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부정해야 한다면, 그 인정은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정상성의 기준과 개인의 내적 경험 사이의 균열을 이해하려는 랭의 관점은 질의 문제를 사회병리학으로 예리하게 관찰토록 해준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교정(Correction)』 (1975)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로이타머는 건축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질서를 실현하려는 강렬한 의지의 인물로 자신이 구상한 완벽한 원뿔형 건축물을 만드는데 몰두한다. 그러나 이 질서는 현실 속의 타인과 사물을 향해 나아갈수록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를 추구하는 그의 사유자체가 그를 압박한다. 피어시그는 질에 관한 문제를 기존의 철학적 범주로 설명할 수 없는데서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지만, 로이타머는 생각하는 질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행위가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두 인물 모두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유가 사회보다 우월하다거나 그들의 파국이 반드시 진실 추구의 대가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5. 맺음말 : 질은 사회의 기준이지, 나의 기준이 아니다!

 

피어시그는 말한다. “Those are society’s standards, they aren’t my standards.” 그것들은 사회의 기준이지, 나의 기준이 아니라는 이 말은 사회기준을 거부하는 개인의 독립선언처럼 읽을 수도 있지만, 그의 글을 읽은 자로서 그보다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타협하는 법을 배웠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아픈 감각의 표현에 가까움을 안다. 우리들은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때론 강한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때론 그런대로 적응하면서 융화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믿는 질과 실제로 사회가 요구하는 질 사이에서 그 관계를 물으며 충돌하거나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깊은 내상을 입어 혹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상이 결코 나쁜 질인 것은 아니다.

 

이제 맺어야 할 것 같다. 질이 사회적 합의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질을 추구하는 인간은 사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질을 지키면서도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은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피어시그를 비롯한 많은 저술들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질서를 어떻게 끝까지 추구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완벽한 질서와 판단의 확실성은 결코 견고한 본래적 진리가 아니다.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이 때론 파괴되기도 하지만, 그 가치 판단의 확실성이라는 질 또한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로 그 질을 대체하기도 한다. 대상에 그 어떤 절대적 가치판단을 주장할 때 인간 세계는 대단한 충돌에 직면하게 된다. 대상이 가치판단을 양적으로 넘어설 때 그 세계는 새로운 질서의 인간으로,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때의 진통은 곤혹스러운 혼란이겠지만, 그를 이겨내면 그 변화의 세상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수시로 질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질은 절대적 속성의 언어가 아님을 명심해야한다. 여기에 절대적 진실의 의미를 씌워놓으면 독단과 폭력이 자라난다. 사회적 합의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질은 이러한 임시 합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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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음 ; Vergänglichkeit (On Transience)」 ; 사라짐이 가치를 만든다!

 

“무상함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희소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프로이트의 덜 알려진 에세이 한 편에 눈이 멈추었다. 유한성에 대한 애도와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한 찌르르한 공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짧은 글은 1차 대전(1914년)이 일어나기 1년 전의 어느 여름날 한 젊은 시인과 아름다운 자연 속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시인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추정되는데,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던 시인은 돌연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되고 말 것이라며 아름다움을 충분히 기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아름답고 완벽한 그 모든 것이 소멸과 쇠퇴의 길로 나아가기에 가치도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견해를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사물의 덧없음은 반박할 길 없는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운 것들이 나름의 소중한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명한 위의 인용문장이 출현한다. 향유(享有)의 가능성에 어떤 한계가 있기에 향유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영원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귀중하다는 것이다. 비록 “하룻밤만 봉오리를 피우는 꽃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듯, 인간이나 예술작품 역시 영원하지 않기에 더욱 소중하게 경험된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을수록 그 경험의 가치는 높아진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덧없음, 무상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시인의 비관이 단순한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정서적 반응이라고 판단한다. 아름다운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미래의 상실을 미리 경험하게 만들고, 아직 잃지 않았는데도 이미 애도의 예감이라는 정서상의 강력한 요인이 판단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이 정서적 요인은 마음속에 솟아난 덧없는 슬픔에 대한 반발, 즉 사라질 아름다움의 향유가 그 덧없음에 대한 생각으로 방해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무상함(허무함)을 떠올리면 현재의 아름다움조차 즐기지 못하게 된다. 이것을 ‘애도에 대한 반항(revolt against mourning)’이라고 부른다.

 

때문에 우리들은 절정의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욕망을 보인다. 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비극이면서도 동시에 그 대상을 욕망하게 만드는 조건이기에 상실을 견디기 어려워하면서도 결국 그 상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라질 것이므로 슬프지만, 또한 사라질 것이므로 소중하다. 결국 죽음과 소멸을 부정할 수 없지만 오히려 이를 인정한 뒤, 유한성이야말로 인간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즉 무상함은 가치의 파괴가 아니라 가치의 근거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내내 껴안아야할 유한성, 아름다움, 상실의 의미를 매우 압축적으로 위로하는 인간의 생에 대한 애도론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찬양했던 징그러운 불멸성을 떠들던 작가가 떠오른다. 아름다움, 절정의 순간을 끊임없이 현재화함으로써 마치 덧없음을 부정하려는 보토 슈트라우스의 탐욕적 불모성에는 프로이트의 숙명에 대한 승인도 없고, 그 승인을 통한 승화도 없다. 자신의 실존을 의심하지 못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하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이 난데없이 왜 기억에 남아있는지 모를 일이다. 잠시 다른 길로 들어섰다. 다시 제자리로.

 

이러한 연상에 이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모든 것을 가족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로 환원한다고, 또한 욕망을 결핍으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며 욕망은 생산이라고, 애초부터 사회적이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던 들뢰즈에 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섰다. 들뢰즈의 생산기계로서의 인간의 이해는 유한성을 부정하고, 급기야 의도치 못했겠지만 오늘의 기계주의 세계의 문을 합리화하는 토대를 제공했다. 나는 상실에 대한 불안, 사라지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붙들려는 인간의 그 여리고 애처로운 모습이 좋다. 그래서 그 유한성이라는 시간 속에서만 빛나는 소중한 것들의 소멸에 슬픔의 정서를 느끼는 인간이 좋다. 인간의 무수한 취약성의 본질 인식 기반위에서 그에 대해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좋다. 인간을 미화하거나 인간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마치 인간본성이 선험적 도덕성을 지녔다고 비반성적 인간을 양산하는 가치에 반대한다.


사라짐의 애도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들은 더욱 동료 인간들에 대한 보다 따뜻한 시선을 지닐 수 있을 것만 같다. 영원성보다 유한성의 가치를 인간 존재의 조건이자 가치로 보는 프로이트의 이 에세이는 내 정서의 근간에 대한 지지의 글로 여겨졌던 것 같다. 이 에세이는 1915년 집필되어 1916년 발표된 글이다. 훗날 「애도와 우울증(Mourning and Melancholia)」으로 이어진 상실과 인간 삶의 유한성에 대한 사유가 응축된 중요한 글이다. 이 글은 국내 열린책들이 출간한 프로이트 전집 14권인 『예술, 문학, 정신분석』, 「Vergänglichkeit (On transience)」 333~339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나니 프로이트의 이 산문을 표제로 한 신간이 눈에 띤다. 그 책과 이 단상은 아무 상관이 없는 우연의 동시성일 뿐이다. 우리들은 사라짐으로써 아름답다. 소멸은 항상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아등바등하지 말자. 살아온 인생이 추해지기만 할 뿐이다. 허무함, 무상함은 우리의 소중한 정서임을 인정하면 이 세상은 무한하게 아름다운 것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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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억제된,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다.“

- 피터 게이, 『프로이트 Ⅰ』 P228, 교양인 刊, 『꿈의 해석』 재인용

 

“꿈은 전부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은폐되어 있긴 하지만 이기적 자아가 모든 꿈에 등장한다. 꿈에서 성취되는 소원은 한결같이 이 자아의 소원이다.“ 

- P367, 『꿈의 해석』, 열린책들 刊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국내 출간 문헌들을 전반적으로 재독하는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욕구를 불러일으킨 동기에 숨어있는 내 무의식을 탐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무엇인가가 그렇게 하도록 나를 이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문화사가(文化史家) 피터 게이가 쓴 『프로이트』평전을 읽고 난후,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토대로 발표한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부터 읽어나가고 있다. 사실 세간에 자신의 무의식, 즉 그 원시적 욕망을 들여다보려 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의 무책임한 배설로 인한 소음을 떨어내려는 동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아니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던 글에 내 시선이 멈췄다. 이 글은 그러한 충동에서 긁적이게 된 짧은 단상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인간 개체의 본질적 동력인 유전자의 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반항하여 행동할 수 있는 문화적 힘을 강조했듯,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성하는 여러 이론들 중, ‘무의식에 남아있는 유아적 근친상간 경향’의 통찰 또한 우리 인간 정신의 심층의 욕구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들은 그것으로부터 도덕적, 문명적 이해를 진전시켜나갈 수 있다는 제안이라 해도 될 것이다.

 

『꿈의 해석』, 프로이트는 이 책을 겸손하게 『해몽(解夢)』이라 부르곤 했지만, 그의 겸허한 표현과 달리 이 책은 엄연히 정신분석학을 정초(定礎)하는 최초의 연구문헌이라는 측면에서 『꿈의 해석』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느긋하게 다시 읽는 즐거움은 예사로이 지나쳤던 문장 속에서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일 게다. “Ⅴ章 「꿈-재료와 꿈-출처」, 4節 〈전형적인 꿈들〉, (2)項 ‘소중한 사람이 죽은 꿈’”은 우리들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꾸는 꿈들을 분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특히 주목된 이유는 책이 출간되자 가장 격렬한 항변, 분노에 찬 반대와 비판을 불러온 대목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내게 새롭게 발견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우리들은 가까운 친척들의 죽음과 더불어 부모나 형제자매들로부터 그들에 관한 꿈을 꾸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들 자신도 그러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 죽은 꿈의 내용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 하나는 꿈속에서 전혀 슬픔을 느끼지 않아 깨어난 후 자신의 무정함에 놀라고 의아해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몹시 비통해 하며 잠자는 동안 격렬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꿈이다. 즉 소중한 이의 죽음에 대해 무심하거나 비통해하는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것인데, 이 두 유형은 그 해석에서 완전히 다른 목적을 의미한다. 전자는 모종의 다른 소원을 은폐하기 위해 위장된 것이고, 후자는 관계된 사람이 죽었으면 하는 소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후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아버지의 죽음이 꿈에 나타났고 이를 몹시 비통해하며 우는 꿈을 꾼 후자의 얘기를 해보자. 이러한 꿈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꿈일 때도 있고, 생존해 계신 아버지가 죽는 꿈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꿈은 그들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발끈할 것이다. 친부(親父)의 죽음을 소망하는 무슨 되먹지 못한, 불효막심한 작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억압하여 무의식으로 침전된 것이다. 이 억압을 뚫고 꿈을 통해 유아기건 아동기건 어떤 시절에 그러한 소원을 가졌기에 도덕적 금기에 의해 억압되어 무의식속에 묻혀있던 것일 뿐이다. 다만 꿈을 통해 일상적 삶의 행위 속에서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꿈은 이렇게 우리들이 신경증환자가 되지 않고 평온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에 현실 속에서 부모의 죽음을 소망하는 미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들은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소망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할 때에만 더없이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행위 할 수 있다. 아마 인류문명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문헌들은 이처럼 우리의 적나라한 본질을 일깨움으로써 이를 극복한 진전된 도덕적인 인간의 지향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동기라는 시기에 철저하게 어린 이기주의자 안에서 이타적 움직임과 도덕이 깨어나고 이차적(성숙한) 자아가 일차적(원시적) 자아를 뒤덮고 방해(억압)함으로써 문명화된 도덕적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도덕성 발달이 모든 인간에게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모든 인간의 내면 성장을 파악하는 일을 우리는 하지 않지만 많은 인간에게서 이 도덕성 발달이 지체되거나 정체된 상태로 어른이 되는 도덕적 퇴행에 머문 인간들이 매우 많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겉으로는 동일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내적 도덕성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세상에 들끓는 혐오와 저주와 악의의 언어들과 행위들이 근본적으로 횡행하는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잠깐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 다시 친부 살해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사내아이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소망하는가의 문제를 계속해보기로 하자.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 아주 많다. 자식을 삼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거세하고 스스로 지배자가 되어 아버지 자리를 차지하는 제우스 이야기는 그리스신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대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약삭빠른 문인들은 부자간의 투쟁을 중심으로 작품을 쓰면 성공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순전히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행위들일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이 고대신화를 변주해 작가의 의지를 삽입한 탁월한 작품이 되었다. 나는 이 비극을 운명(신)의 절대적 의지와 파멸에 직면한 인간의 헛된 반항 사이의 대립에 근거한 비극, 즉 인간 자신들의 무지와 무력함을 깨닫고 불가해한 운명의 뜻에 복종하는 법을 설파한 것이라고 해석했었다. 프로이트에게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오늘 우리들 현대인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이러한 절대적 운명의 의지에 대항하려는 인간의 실패에 대한 충격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의 목소리가 운명이 강요하는 힘을 인정하게 만드는 무언가의 존재, 그럴만한 계기가 내포되어 있음의 어렴풋한 수긍의 당혹스러움이라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 비극을 읽고 대체 무엇에 감동했었는가? 무엇으로부터 비극적 감정에 전율했었는가? 오이디푸스에 닥친 일이 우리의 운명이 될 수도 있음에 대한 공감, 즉 우리 모두 어머니에게 최초의 성적 자극을, 아버지에게 최초의 증오심과 폭력적 희망을 품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저주에 대한 이해의 주장에 동의할지 망설인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꿈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설득한다고 쓰고 있다. 즉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는 우리 어린 시절의 소원 성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신경증환자가 되지 않는 한 오이디푸스와 달리 성적 자극을 어머니로부터 분리시키고 아버지에 대한 질투심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유년기의 원시적 소원을 성취한 인물 앞에서 마음속의 소원을 억압한 만큼 경악한다는 것이다. 이 비극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바로 이 경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도 오이디푸스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강요한 소원, 도덕을 모욕하는 소원의 존재를 모르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소원이 폭로되면 우리는 모두 유년 시절의 사건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그 외면에 진실이 있다. 인정할 때에 세상과 우리 인간은 도덕적으로 건강해진다. 부정하고 외면할 때 세상은 지체발달상태, 문명적 퇴행의 양상을 보인다. 마치 지금의 무책임하고 비논리적 정쟁의 담론들이 설쳐대는 세상처럼 말이다. 프로이트는 이어서 또 하나의 위대한 비극인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말하는데, 수많은 비평들은 햄릿의 우유부단, 즉 부왕(父王)의 복수를 결행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불분명한 성격에 대한 오류의 지적이지만 프로이트는 결단력 있는 행동가 햄릿을 말한다. 왜 나는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 작품을 주의 깊게 읽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햄릿의 망설임의 원인이나 동기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어떤 무의식의 방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햄릿』의 이야기에 압도되는가? 고작 사고 활동의 지나친 발달 때문에 행동력이 마비된 신경쇠약증의 범주에 드는 병적일 정도의 우유부단한 한 인물의 성격에 매혹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작품의 줄거리를 보면 햄릿이 행위를 할 수 없는, 결코 우유부단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노에 휩싸여 벽 뒤에서 엿듣는 염탐꾼을 칼로 찌르고, 그를 죽이려는 두 명의 신하를 특유의 단호함으로 저 세상으로 보내는 장면처럼 매우 결단력 있으며, 게다가 계획적이고 교활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부왕의 혼백이 맡긴 임무를 왜 실행하지 못하는가? 대체 무엇이 그의 실행을 가로막는가?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는 여기서 다시금 어린 시절의 아버지 살해라는 억압된 소원의 성취를 꺼내든다. 즉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대신 어머니를 차지한 삼촌이라는 남자가 이미 햄릿 자신의 소원을 성취시켰기에 징벌해야 하는 죄인보다 자신이 더 나을 것이 없다고 꾸짖는 양심의 가책이 복수를 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햄릿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우리들은 의식의 수면에 드러나지 못하게 억압된 금기들, 어두운 욕망들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모든 꿈은 소원성취이다”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우리들 무의식의 이기심을 잘 말해준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이 독보적인 꿈의 해석은 우리 자신들의 원시적 욕망,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경이로운 창구가 되어준다. 이 통찰은 우리들의 종교와 도덕 발전 및 인류사의 이해에 중대한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우리 모든 인간은 그렇게 말끔하게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다. 저 혼자 도덕군자이고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윤리적 무결점의 인간이라고 교만을 떨어대는 인간들이 지천이다. 수없이 은폐된 자신의 이기적 소망들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들은 조금은 더 이타적 인간이 될 수 있을 터이다. 햄릿은 신경증환자이다. 어린아이의 소원의 망상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폭로하고 현실화하는 데 이르지 못한 인간의 한 유형 아니겠는가.

 

햄릿처럼 살지 말자. 햄릿들이 우리 세계에 너무 많다. 도덕적 지체장애자들 말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꿈-해석의 기초를 놓아 정신분석의 초석, 나아가 심리학을 정초하고자 한 야심의 저작이기도 하지만, 2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자기 분석의 일부, 남자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결정적 상실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내(프로이트 자신) 반응”이기도 하다. 아마 이 관점에서 이 저술을 읽게 되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아니 우리들이 읽어내지 못했던 숨겨진 의미들이 무수하게 떠올라 타인과 세계와 우리들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한층 성숙시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류를 등지고 나만의 세계를 위한 독서를 느릿하게 하다 보니, 보이지 않았던,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말들, 한 인간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게도 된다. 나는 프로이트의 이 저작을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한 편의 잘 써진 휴먼드라마로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이처럼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모든 꿈의 바닥에는 유아적인 동시에 품위 있는 사회에서는 아마도 외설적이라 부를 소망이 깔려 있다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장했다.” 

-피터 게이, 『프로이트 Ⅰ』 P240, 교양인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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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는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유지되지만, 그 바탕에는 ‘이래도 되는가?’라는 자기검열의 감정이 깔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결과가 어떤 사회를 만드는지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 

- 이철우, 『수치심 잃은 사회』 P99

 

“‘수치심 상실’에는 사무친 수치심의 느낌이 선행한다. 수치심 상실은 수치심을 물리치고 동시에 은폐하려는 수치심의 가면이다. (...) 지독한 모욕, 자신의 자율성을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목숨 건 뒤집기를 통해서 모욕에서 벗어나려 시도한다. 즉 모욕을 오만한 자만을 통해서 방어한다. (이 때) ‘냉소적 경멸’은 수치스럽게 느낀 자존감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구겨진 자존감이 수치심 상실의 근저에 놓여있는 것이다.”  

- 한병철, 『존중 없는 사회』 P92

 

한 사회를 극심한 분열과 혐오의 정치 장(場)으로 내몰고 있는 책임 없는 한 인간의 외설(猥褻)스럽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독설의 파장을 지켜보다 몇 글자 적어둔다. 위에 인용한 두 학자의 글은 지금 한국 사회를 휩쓰는 정치담론의 실체를 적확하게 묘사한, 아니 그러한 냉소적 저주를 배설하는 자들의 악의의 실체를 잘 설명해준다. 사실 이 ‘수치심’이라는 단어는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가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요,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며, 또한 프랑스 정치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Frédéric Gros)가 말한 “전통적으로 윤리의 기둥으로, 연대의 표식으로 작동해 온 감정”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에서 이 단어는 오로지 타자에 대한 잔인한 악의로써 멸시와 존재 부정을 강요하는 오염되고 얼룩진, 회복될 수 없는 부정적 폭력의 언어로만 사용되고 있다. 조리돌림하고 따돌림하여 배척, 매장시키려는 악의로서만 말이다.

 


혐오와 조롱, 멸시는 평등한 정치적 존중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언어가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때 얼마나 철저히 비이성적 과정을 거치는가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해왔으며, 지켜보고 있다. 자아에 대한 인식과 결합하여 세계와 사회를 의도적으로 분할하는 근본악이 기승을 부리는 해로운 사회에 직면해 있음에 분노가 일어난다. 대체로 이러한 조롱과 저주의 말들에는 언어 논리적으로 배설된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가 일쑤고, 설혹 검증 대상이 있을 경우에도 왜곡되거나 날조된 거짓의 사실이 대부분이다. 검증 불가능한 진술은 의미가 없는 헛소리이고, 하나마나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배설한 자의 감정적 악의 이외에는 없는 자기감정의 투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지금 이 사회에 거침없이 난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병철 교수가 『존중 없는 사회』에서 지적했듯, “타자에 대한 존중이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됨으로써 타자 경멸을 양산하는 시대성 때문일 것이다. 즉 인간 존중에 기초하는 우정의 정치학으로서 공존의 비전을 상실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분열과 저주의 악의(惡意)를 뱉어내는 인간을 묘사한 『유해 인간(Gente toxica)』 (2013)의 작가 베르나르도 스타마테아스(Bernardo Stamateas)의 말은 그 인간에 대한 이해측면에서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타자의 성취를 방해하고, 자신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권위와 언어폭력, 거짓말과 험담을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무심하게 저지르는 인간은 흔히 타자에게 끊임없이 훈계하려 들고, 노이로제적 예민함을 발산하며, 충동적이고 무책임하며 자신의 자존감만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회적으로 유해한 인간에 대한 이 정의에서 보듯 근원적 수치심은 자존감의 상실이나 인정받지 못한 데서 유래하는데, 종종 원한과 공격성으로 변환된다. 그래서 수치심, 모욕, 공격성은 서로에 대한 조건이 되고, 해당 인간이 배설하는 언어나 행위 폭력은 자신의 수치심을 거부하고 동시에 가리기 위한 가면이라 할 수 있다. 담론가로 행세해 온 한 저열한 인간은 대통령이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정책이나 인사에 대해 물어 온 적이 없다’며 분노를 표현했다. 이 인간은 자신의 비대해진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고 여겼던 것이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레온 부름저(Leon Wurmser)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작동양태를 그의 위대한 저술 『수치심의 가면』 (1997)에 “수치심이 억압되거나 왜곡될 때 오만, 경멸, 냉소 같은 방어기제로 전환된다. 고 썼다. 결국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개인적 방어기제는 냉소주의로 표현된다. 한 유해한 인간의 악의적 배설의 언어들이 왜 저러한 형태를 띠는 것인지에 대한 근접한 정의라 할 것이다.

 


수치심의 상실, 부끄러움을 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인간 존엄과 공동체의 결속을 무너뜨리고 분열과 갈등의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급기야 사회 해체를 초래하는 매우 나쁜 상황을 낳는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인간은 존중의 능력도 없는데, 수치심이란 어떤 상위의 사회적 질서에 존중을 포함하고 있는 감정인 까닭이다. 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이 그의 문학작품에서 일관되게 천착한 “얼굴을 붉히는 곳에서 더 고상한 자아가 시작된다.”며, 수치심은 도덕적 감정이며, 그것은 존중을 명령하는 어떤 상위 가치체계의 전제라고 말한 것에 대한 상실이자 배제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수치심이라는 이 도덕적 감정은 손상된 명예를 의식하며 어떤 정화(淨化) 또는 속죄 의식을 통해 사회에 다시금 복귀 통합된다. 이와 달리 오늘의 수치심 문화는 타자를 파렴치할 정도로 모욕주고, 처벌하고 말살하려 한다. 수치심 상실을 냉소주의라는 방어기제의 가면을 쓴 인간은 자기 이상의 붕괴를 사회의 상위 질서의 파괴, 즉 무례함과 무존중(無尊重), 무경외(無敬畏)의 저열하고 파렴치한 세상으로 퇴행시킨다. 따라서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기 이상과 다른 모든 가치와 이상에 대해 냉소적 경멸을 배설한다. 그것은 과잉의 자아가 선택한 암울한 자기 저주이다.

 


이 저주받은 유해한 인간은 즉시 대상을 적대하며 조리돌림 등 동원할 모든 린치를 가하려고 하며, 상대를 모욕하고 조롱하며 나아가 사회구조 해체라는 문명적 퇴행을 초래한다. 한병철 교수가 『존중 없는 사회』에서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특징으로 냉소주의와 타자의 더 높은 가치에 대한 조소와 조롱으로 표출”된다고 지적한 것과 적확하게 일치한다. 즉 수치심 상실에는 수치심 느낌이 선행하며, 그렇게 잃어버린 수치심을 물리치고 동시에 은폐하려는 수치심의 가면이 된다. 연일 저 악의와 저주를 배설하는 의미없는 감정의 언어로 가득한 냉소적 경멸은 수치스럽게 구겨진 자존감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때문에 그 배설구(排泄口)에서는 원색적 비명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치심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치론적 다수인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와 무례가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다. 바로 소수 기득권자라로 자임하는 인간무리들의 해체에 거칠고 극악하게 훼방하고 조롱하며 저주하는 것들이 이토록 많아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오늘의 정치적 조롱과 저주의 폭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속하지 않은 집단을 분리하면서 외부 집단을 향한 부정적 평가에 기초하여 난데없는 편견을 통해 극심한 차별의지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 외부의 사람들을 주변화(周邊花)하여 부정적 감정을 들씌우는 것이 곧 차별이다. 이렇게 집단 분열의지에 사로잡힌 인간은 인식 범위가 극히 협소해지고 이윽고 인식불모지대에 빠져든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수치심, 도덕심과 같은 정신적 제방을 쌓고, 이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는 고도의 심리적 성취능력을 발달시킨 인간의 본질에는 고착된 충동과 승화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다”고 지적한 것은 수치심과 관련한 상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수치심 잃은 사회』에서 이철우 박사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지키는 감정이며,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수치심은 관계의 감정이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작동시키는 윤리적 신호다. 이것을 잃었을 때 인간과 사회가 겪는 것은 지금 각종 매체에서 보여지 듯 “감정적 해체, 윤리적 무감각, 공동체의 유대감 상실, 나아가 공동체의 붕괴이다.” 무례함이 솔직함이 되고, 책임 회피가 전략이 된 작금의 정치 담론 양상은 너무도 불온하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는 인간 개인의 존중은 물론 공동체의 안정과 신뢰를 보증하는 권위마저 무시하게 된다. 헌법적 권위마저 무시하려는 권위의 진공상태를 만들어내는 인간들이 우글대는 세상은 이 사회를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다. “존중(수치심 갖기)은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야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필수 조건”이라는 한병철 교수의 지적은 신뢰성 상실이라는 병든 오늘의 우리들에게 매우 중대한 일깨움을 제공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을 제발 잃지 말자. 적어도 수치심을 아는 사람은 저 악의적 괴물들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분열과 갈등, 사회적 해체만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열중하는 무리들로부터 이 사회, 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서적 공감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도덕적 감정으로서의 수치심이다. 이것을 잃을 때 차별과 권력의 탐닉과 독단과 사회적 유대 파괴만이 남는다. 서로 존중하는 사회, 그것은 바로 수치심이라는 정치적 감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저 표독스러운 오만과 경멸, 냉소의 저주의 말아닌 말들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는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그런 능력을 지닌 존재인 까닭이다.

 


사회에서 자신의 위상적 변동으로 인한 이상의 상실을 부끄러움의 상실이라는 가면으로 가리지 말자. 그것은 정말 나쁜 근본악이자 사회악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전락시키는 사악함은 수치심의 상실에서 출현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적 감정』에서 이처럼 수치심을 잃어버린 사회가 왜곡된 인간 감정들인 혐오와 조롱, 분노, 배제와 분리, 그리고 폭력으로 진행되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러한 증오와 멸시, 외면의 감정에 도사린 정치 행위의 편재, 그 왜곡과 불온함의 근저는 어떤 특정 개인에 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칸트가 지적했듯 수치심 상실은 “어떤 사회구조보다 인간 존재에 깊이 내재한 악행의 뿌리”라고, 그것은 타인을 자신의 욕구에 종속시키려는 성향인 근본악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말했다. 낙인과 배제, 저주의 악담은 이 세계를 분열시키고 파괴한다. 우리들은 존중의 언어를 어느 샌가 잃어버렸다. 타인에게 잔인한 인간들(진상들)이 이 사회를 가득 채워가고 있다. 그러한 사회를 우리는 몸서리치지 않는가? 수치심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배설된 언어가 귀중한 공동체의 에너지를 쓸모없이 낭비케 하는 작태가 이 글을 쓰게 했다. 안타까움이 여기서 그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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