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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ㅣ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평점 :
화서(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으로 순우리말은 ‘꽃차례’라고 한단다. 무한(無限)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밖에서 속으로 피는 끝없는 실패의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유한과 다른 추상과 거룩함의 방향성을 지시하려는 의도인 듯싶다. 이 시론집은 470개의 응축되고 예리하게 벼려진 생각들의 에피그램 모음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성복 시인의 대학원 시 창작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이 개개의 에피그램들이 시(詩)란 어떤 언어로 발설되어야 하고, 무엇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시란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삶과 시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함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된다.
어쩌면 시(詩)란 우리네 삶의 진실한 목소리, 과장하거나 치장하지 않은 일상의 모든 몸짓과 말 그 자체 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시인은 “시의 에너지원은 세속이예요.”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잡생각은 시에서 진실이고 [...] 우리가 쓸데없다고 버리는 것 안에 우리 자신이 가장 많이 들어있어요.”라는 말처럼, 시는 거창하게 인간의 운명을 얘기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냥 부엌에 숟가락 몇 개인지 쓰는 것이 곧 시라는 말이다.
“뭐 좀 있어 보이는 소리는 다 헛소리예요. 절실하지 않으면서 쥐어짜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사기 치는 거예요.” - [언어-64], 33쪽
인간 삶이란 것이 뭐 특별히 대단한 것이겠는가? 그러니 시로 개똥철학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저 사랑하고 일하고 여유가 있으면 남 생각도 좀 해주는 게 전부인 것을, 헛소리란 늘 자기 내면에 가까운 것이고, 뭔가 욕심내어 꽉 잡고 말하면 빨리 지치듯, 손에 힘을 빼는 것, 그것이 곧 시요, 삶의 진실이라 말하는 것일 테다.
책은 ‘시론(詩論)’의 정수(精髓)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이는 곧 우리네 삶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태도로 읽어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 철학은 저절로 품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집 어느 쪽을 들춰도 이 말의 의미를 곧 발견할 수 있다. 시집 『래여애반다라』에 수록되어있는 「신문」은 침대에 반쯤 누워 신문을 매일 읽는 그녀가 있다. 그저 일상의 한 풍경이 있을 뿐이다. 인간 삶의 실 면목 전체를 본 듯한 인상이 남는다. 그러면서 묻는 듯하다. 당신의 삶이란 뭐 다른가 하고.
매일 아침 그녀는 침대에 반쯤 누워
신문을 읽는다 매일 아침 그녀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도 그녀가 모른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 [中略] ....
그녀의 굵은 허리는 점점 아래로 깔리고
콧등까지 내려온 안경이 헐겁게 떨어질 때,
문간에 내놓은 음식 쟁반처럼 그녀의
얼굴 위로 구겨진 신문지가 내려 덮인다.
-「신문,『래여애반다라』,2013.1 문학과지성사刊
시의 언어, 대상에 대해서, 시와 시 쓰기, 시와 삶의 관계성에 대한 오랜 통찰의 언어들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사색의 깊이를 지니고 있어 감히 어느 한 구절을 선택하여 말하는 것은 수많은 진실을 누락시키는 꼴이 되고 말 것 같다. 그럼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선각(先覺)과 같은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내 애기만 하려 하면 과장이 되고, 말에 힘이 붙지 않아요 [...] 시는 남 얘기를 통해 자기 얘기 하는 거예요.”라는 시의 대상에 대한 아포리즘은, 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곳에서 “모든 사연을 지워버리고 ‘그리고’로 시작해보세요 [... ]우리의 참모습은 그리고 이후예요.”라고 시는 일단 모르는 데서 시작할 때 진정한 시가 됨을, 그리고 삶의 관계에 이르러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어야 들을 수 있어요. 귀는 평등성이에요. 작가는 듣는 사람이에요. 안 들으면 안보여요. 소통이란 내 말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듣는 거예요.”에 도달함으로써 시는 자기 머릿속에서 꺼내는 말이 아니라 자기한테 하는 말이어야 함을, 그래서 불리하고 불편한 말이 되고 그게 곧 진실의 목소리임을 깨우치게 한다.
“시 쓰기는 자기와 남을 불편하게 해서 진실을 밝히는 거예요. 혹은 진실을 밝힘으로써 자기와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예요.” - [시-212], 86쪽
시가 안락하고 위로를 말하면 그건 분명 거짓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서 위로 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고, 마지막 표정 하나 얻기 위해 인생 전체가 걸려있는 그런 헛소리에 가까워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는 착한 소리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소스라치게 만드는 귓속에 들려오는 쌍욕처럼 위태롭게 만드는 혼잣말이며, 쓰는 사람 자신을 겨냥한 살기(殺氣)가 서려있어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진실은 늘 불편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외치는 글들이 있다. 아마 헛소리이고 거짓말의 맨 얼굴일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돌아보게 한 구절이 있는데, “남들에게서 내가 비난하는 것은 내 안에 다 있어요. 그걸 잊어버리면 자기한테 속는 거예요.”라는, 아마 이 절대적인 진실의 목소리를 수시로 잊어버리는 망각증상의 환기였다. 시는 자기 의심으로 시작하고 그 의심으로 끝나야 하는 것, 자신에게 불리한 것에서 진실은 어슴푸레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어떤 말이 자기 대신 남을 베기 시작하면 안 좋은 말이에요. 하지 마세요.”, 내가 진실이라 내뱉기 시작하면서 그 진실이란 것에는 거짓이 함께 따라 들어오고 있음을 보지 못했음을 돌아보게 된다. 자기 방어를 위해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는 못된 말을 던지곤 그것이 곧 자기를 향한 말이었음을 깨닫는 것처럼 결코 시와 우리네 삶의 언어는 남을 향한 것이 아님을.
“무언가를 볼 때는 항상 그것의 초라함과 속절없음을 보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렇기 때문이지요.” - [대상-112], 51쪽
언제나 버림받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언어일 때 시가 됨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이성복 시인의 시가 줄곧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향해 있었듯 시인 고유의 문학관일 것이다. 시는 이처럼 밑바닥에 인생이 있어야 하고, 남과 세상의 사물, 사건을 듣는 것이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배운다. 남을 향한 비난과 살벌함을 담은, 윤리나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그것이 천박한 포르노와 다르지 않음을, 때문에 시는 이것들을 대상으로 삼을 때조차 에로티시즘으로 하여야 하는 까닭을 또한 배운다. 보여준다고 다 보여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힘이 사라져버림을.
시의 대상(對象), 시작(詩作)과 삶의 관계를 모두 읽을 수 있는 이 시론의 일례로써 다음에 인용하는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에 수록된 「그날」의 일부분으로 소회를 마무리해야겠다. 이 시론집은 엄숙하거나 난해한 말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생각한, 다시말해 이성을 쥐어짜낸 말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써진 언어들이다. 그래서 시를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보다 가까이 시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고,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쓰는 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리라 여겨진다.
.......... (前略) .........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그날」, 1992.1 문학과지성사刊
『무한화서』영국 펭귄 출판사 2024.11 예정판,『Indeterminate Infloresc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