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이해 현대사상의 모험 8
마샬 맥루한 지음, 김성기 & 이한우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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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나를 에워싸고 영향을 미치는 환경을 이해하려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본성인 자기 보존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불완전하거나 불편한 요인들을 회피하거나 제거하여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그 세계가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기관(器官)들의 윤곽을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원리들을 찾아낸다면 아마 이러한 의지와 욕망 실현의 접근에서 긴장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셜 맥루언의 이 고전적 저작은 인간 신체의 확장물이자 촉진자로서 <미디어;Media>를 정의하고, 이 미디어를 이루는 기술의 점진적 변화와 발명에 따라 인간과 인간사회를 광범위하게 지배하게 되는 인식 및 지각 모델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 현상들을 역사적으로 탐사하여 지금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를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을 수행한다.

 

특히 기계화로 표명되는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와 전기(電氣)를 자원으로 하는 오늘의 시대가 지니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특징과 현상들을 규명하고, 이것이 인간의 정신과 정서, 그리고 행동에 미치는 양상들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들은 매우 급속하게 인간 확장의 최종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저자의 선언적 문장은 문자시대와 기계시대의 사고(思考)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관습적, 기득권적 존재들과의 필연적 갈등을 낳은 본질임을 보여준다.

 

어떤 미디어나 기술의 <메시지>는 결국 미디어나 기술이

인간사에 가져다 줄 규모나 속도 혹은 유형의 변화이다.” -36

 

인간 기술의 변화는 돌도끼에서부터 문자, 우마차, 인쇄기술, 철도, 방적기계, 화폐, TV, 영화, 고속도로, 비행기, 컴퓨터, AI Robot에 이르기까지 인간 신체를 확장하는 일련의 작업이다. 즉 이들 각각의 미디어(媒體)는 기존의 과정들을 증폭시키거나 가속화했을 경우 초래되는 정신적, 사회적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 익숙한 예로써 철도는 이것이 등장하기 전까지 있던 각종 규모들을 가속화시키고 확대해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창출했다. 이 새로운 미디어는 도시와 노동과 여가 생활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만들어내도록 강요 한다. 미디어는 이처럼 인간의 행위와 결사(結社)의 규모와 형태를 형성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디어는 곧 그 사회 속성 자체의 메시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미디어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지나버린 것들을 붙잡고 낡아빠진 퇴행적 몸짓으로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곤 한다. 이 까닭을 맥루언은 미디어의 <내용> 때문에 그 미디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고 지적한다. 미디어 그 자체가 내용을 지닌다는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전깃불이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미디어로서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이의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오늘날 광통신망 등 전기의 커뮤니케이션, 정보 미디어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는 오래된 아포리즘(aphorism)이 있듯이, 이 이해는 이미 진부한 것이 되고 만다.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지만 시대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설혹 기존의 형()들이 정점에 이르는 순간 새로운 정반대의 형들이 나타나는 순간을 바로 목격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만한 주의력과 집중력을 지니기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다. 초음속 전투기가 음파를 돌파하기 직전에 음파들은 비행기 날개에서 비로소 가시적인 것이 된다. 소리가 끝나기 직전에야 소리가 보인다는 이 사실처럼 새로운 전환은 반대의 상황을 야기한다.

 

우리는 오랜 문자문화 시대와 서구에 비해 상당히 짧은 기계 시대를 살았다. 사실 오랜 문자 문화시대라 하지만 대다수의 평민인 피지배계층은 구술문자 시대에서 인쇄 문자시대로 이행한 것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다. 어쨌든 서구 사회에 비해 인쇄문자, 기계 시대의 경험이 짧기는 하지만 이로인한 급격한 변화의 유 무형 영향들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기계 기술의 본질인 세분화 테크닉이라든가, 관계들의 유형화를 통한 단편적 분석의 경향성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중앙집중적 태도를 심화했다. 이는 인쇄 문자와 어울려 더욱 분석적이고 전문적 심리를 정착화시킨다. 아마 이러한 양상들이 오늘의 합리주의 서구사회의 표상이며, 한국 사회의 지배 계층에 자리잡은 인식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탈기계화, 탈문자화하는 정보통신의 시대로 이미 깊숙이 전환되어 있다.

 

때문에 수많은 갈등과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 것인데, 옮겨간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계층과 이를 이해한 계층의 엄청난 간극이 발생한 것이다. 공장 기계화는 공정을 유형화하고 세분하여 효율화하는 것이지만 공장 자동화는 이들을 근본적으로 통합하는 동시성의 기술이다. 즉 중앙집중화(중심-주변)에서 탈중앙집중화(분산화)처럼 정반대의 현상을 의미하듯 두 사회는 아주 다른 사회이다. 문자문화(기계화)에 경도된 인간은 이 새로운 세계에서 감각마비에 상태에 빠지고 만다. 즉 무관심과 무지라는 부정성에 매몰되는 것이다. 인쇄 문자문화에 매몰된 문화적 편견으로 가득 찬 시각화된 이들 인간은 청각, 촉각 등 총합적 감각의 인간을 배제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검찰정권의 시대착오적인 퇴행적 정치 양태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러한 퇴행성 인간을 선택한 많은 대중들 또한 변화된 시대의 메시지를 읽는데 무능했음은 물론이다. 작가 로즈(A.L Rowse)가 영국 지배권력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각종 경고들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반공주의에 혈안이 되어있어 히틀러의 등장이 주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없었다.(50)”고 지적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겪는 실패와 동일한 예일 것이다. 인류의 가장 큰 적은 눈으로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다.“는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의 말은 시대 변화(메시지)를 읽는 데 있어 우리 인간들의 근시안에 대한 준엄한 비판일 것이다.

 


미디어, 새로운 기술의 효과들은 견해나 개념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 오해를 우선 벗어나야 한다. 미디어는 오늘의 스마트폰이나 인스타그램, 유튜브처럼 인간과 인간사회의 감각비율이나 지각 패턴을 서서히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은 인간 감각 생활의 확장이기에 사람들의 감각 생활을 재편하고, 사람들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견해나 개념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생활의 재편임을 이해하여야 한다. 인간 감각이 시각문화에서 총체적이고 통합적 감각 체계로 변했다는 것은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 전반에 새로운 질서와 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금의 권력은 여전히 낡아빠진 수구적 권위주의 독재정치의 회귀를 열망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증폭시키고 확장시키게 해주는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들은,

방부처리를전혀 하지 않은 채 사회라는 신체에 가하는 

어마어마한 집단적 외과수술이다.”   -113

 

기계시대(인쇄 문자시대)는 효율과 실용성을 추구하면서 인간 정서나 감정을 억제시키고 내몰았다. 이제 새로운 전기전자의 시대라는 급격한 반전지점을 넘어 돌아 올 수 없는 극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사람들에게 감지케 하고 있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일방적이고 기계적으로 팽창한다는 낡은 패턴의 집착은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력도 중요성도 가지지 못할 정도로 소용없는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GPT’로 대표되는 인공지능의 보편적 일상화나 자동화공장처럼 분할된 작업 절차들의 모든 기능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복합적 기관(organs)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변화된 감각비율, 새로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볼품없는 천박한 자아만 비대해진 인간, 물속에 비친 자기모습, 이 확장된 자기 이미지를 스스로 통제하기 전까지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 소위 나르시스(narcissus) 신화다. 이 감각마비에 빠진 존재는 요정 에코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을 확장한 거울 이미지에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깨어나려면, 다시 말해 자신을 진정 확장하려면 자기 단절(절단)의 희생을 감수하여야 하는데, 이를 행하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이 마비에 매몰되어 있게 된다.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앎(지식)이 아니다. 우리 신체의 중추신경 조직은 상해를 일으키는 기관이나 감각, 기능을 단절하거나 고립시키는 전략을 통해서 스스로를 보호한다. 자기 확장은 이처럼 필연적으로 자기단절의 선행을 요구한다. 이 선행적 자기 절단의 희생을 회피하는 한 마비는 풀어지지 않고 비대해진 자아로 주변을 괴멸시킨다. 즉 야만적 폭력이 난무하는 퇴행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디어는 인간 감각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지금은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 순간적이고 총체적인 장의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좋든 싫든 한꺼번에 시야에 밀려드는 현상들에 의한 사회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를 제아무리 가리려한들 전자전기 시대인 오늘 인간들의 인식을 차단할 수 없다. 퇴행하는 인간들은 이 변화를 부정하고 통제하려들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충돌을 낳는다. 혼란이고, 고통이다.

 

일방통행의 전통적 미디어들에서 다양한 통로를 열어둔 미디어로 이행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관습적 지혜를 대표하는 사람들, 그들이 집착하는 미디어는 자신들의 지위와 안전, 기성의 지식이라는 단순한 형태에 의존해있기에 혁신(새로운 변화)은 파멸로 인식될 것이다. 케케묵은 부패한 지식이라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이 추한 낡음은 변화된 인간 세계의 감각비율을 억지로 기계시대의 그것으로 되돌리려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자전기 시대의 미디어가 지닌 본성을 돌릴 길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관련하여 미디어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 데이터로 가득한 상태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를 '뜨거운 미디어(hot media)'라 부르며, 시각적 언어적 정보가 낮은 저밀도의 미디어를 '차가운 미디어(cold media)'라 한다. 지금 우리들의 세계는 뜨거운 미디어에서 차가운 미디어시대로 이동했다. 차가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있어 이용자의 참여도가 높은 미디어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에 이용자들이 몰려드는 이유이다. 이는 전문성이 강한 인쇄문자의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중적 권력을 인정하지 못한다. 분산화되고 집단적이며 횡적으로 인간들을 통합하는 오늘의 새로운 미디어 시대가 의미하는 바를 읽어 내야 한다. 이를 회피하는 한 혼란과 문화지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광화문과 삼성동에 정권 선전용 전광판을 설치하고 일방적 메시지를 쏟아내려는 사태는 이들이 얼마나 시대의 변화, 변화된 미디어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의 여실한 표징 일 것이다. 차가운 미디어의 시대, 이용자(소비자)가 참여 할 수 있는 미디어를 봉쇄하고, 참여 불능의 일방적 미디어로 훈계하려는 이 역행성의 행위는 이들의 퇴행성을 입증할 뿐이다. 이로서는 결코 참여와 감정 이입이 일어나지 않음을 이들은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이들 기득권 집단이 머물러있는 지나간 기계시대에 대한 향수는 오직 기만과 악의, 야만과 폭력의 야욕 냄새만을 뿜어댈 뿐이다.

 

하나의 감각만을 높이려 들면 최면상태가 일어나고, 모든 감각들을 냉각시키면 환각을 낳게 된다. 권력의 최면상태에 빠져 자신들의 감각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려들면 끔찍한 파멸이 야기될 것이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라, 이미 실증된 것이며, 이 세계의 원리이자 본성이다. 인간 확장물인 미디어는 어떤 것이 일어나게 하는 인자(因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의 경험이 지니는 불연속성들을 세밀하게 조사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회피하고 억압하는 기계화 시대의 방법으로는 이 사회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양성, 획일성, 연속성, 계열성과 같은 기계시대의 패턴으로는 복잡성, 다양성, 유기적으로 얽힌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

 

현대 생활의 변화된 조건들을 발견 탐구하는 이 위대한 저작은 인터넷이 출현하기 20년 전에 써진 저술이다. 그러함에도 오늘날의 정보기술 혁명의 시대에 맞이한 미디어들을 해석하는 데 치밀하고 예리한 이해를 돕는다. 맥루언이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숱한 미디어들이 발생할 때마다 인간과 세계의 전환이라는 그 분별성의 원리를, 그 구조적 원칙을 새겨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는 새로운 힘으로써 세계의 근본적 재편성을 만들어내는 그 자체가 메시지인 존재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 세계의 현재와 나아갈 길이 보일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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