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헤드 수확자 시리즈 2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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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나의 부모이기는 하나, 갈수록 나는 인류를 내가 안고 있는 아기로 보게 된다. 언제까지나 사랑하는 팔에 안겨 있는 아기는 걸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제 행동의 결과를 직시하지 않는 종()은 성장할 수 없다. 인류에게 그런 교훈을 주지 않는다면 실수가 되리라. 그리고 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선더헤드

 

 

시리즈 1편이 죽음이 정복된 세계의 유일한 죽음 배급자인 수확자의 육성과 그 윤리적 자질과 도덕성을 비롯한 기예들을 통해 수확자들의 세계를 그려내며, 불사(不死)의 존재가 된 인간들의 목숨을 거둬들이는 권한에 도사린 권력의 문제로 인간성의 문을 열었다면, 2선더헤드는 이러한 배경의 토대가 된 세계의 질서이자 조정자이며 권위자이자 협력자인 인류 지식의 총합체인 선더헤드가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의심과 실망, 인간 세계에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유일한 예외지역인 수확령의 구성원들인 인간들의 구제불능의 한계를 사려 깊은 언어로 우아하게 지펴내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인간성이라는 어휘에 들러붙은 윤리적 의미에 대한 물음을 피해 갈 도리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선더헤드는 특전지역이란 장소를 설정하고 인간과 인간사회의 행동실험을 통해 인간 본성과 능력의 변화를 실행하려한다. 일반 시민 사회는 선더헤드의 조정과 지원, 통제 하에 삶의 쾌적이 최적화된 유토피아지만, 불사가 보장된 평이하고 지루한 삶의 시간에 염증을 지닌 인간들의 사회적 반항이 존재한다. 그러한 자들을 불미자라 부르며, 선더헤드는 인간 개체내의 각종 나노봇을 이용하여 도덕적 균형을 조정하지만, 바로 예외로 정해진 특전지역은 이들의 범죄적 행위의 도피처로 활용된다.

 

이제 소위 인간성이라는 이 괴물적 성향은 부패한 수확령에서 일반시민사회로 확장되어 상호 긴밀하게 그 고장난 양심들이 탐욕스럽게 연결되고, 인간사회는 다시금 최악의 지옥으로 돌진한다. 인간성에 도사린 어리석음은 진부하지만 이런 것이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냄비 속의 랍스터처럼, 점진적 부패에 대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간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부패와 비열함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자신과 신념이 다른 존재에 대한 음험하고 악랄한 폭력이 불미자의 욕망과 결합하여 도덕적 고결함을 주장하는 수확자 퀴리, 아나스타냐등 윤리적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행된다. 한편 이와달리 수학자 선택에서 탈락한 로언은 수확자 루시퍼가 되어 부패한 수확자들의 목숨을 불법적으로 거두며 수확령을 신성한 영역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그러나 이 행위가 제아무리 정의롭다 할지언정 불법적이며, 이 수확행위가 오염된 수확령을 개선하는 데 거의 효과가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열된 집단의 갈등과 혐오, 적대의 골만 깊어 질 뿐이다.

 

소설의 매 장면의 말미나 시작부에는 이러한 인간 사회에 대한 선더헤드의 입장이 따르고 있는데, 선더헤드가 인지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번뜩인다. 그가 예외로 두기로 한 영역, 즉 자율적 공간에 대한 회한의 목소리다. 그는 말한다. 자유와 허용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 허용은 위험하다. 나를 창조한 종()이 이제까지 마주한 것 중 가장 위험한 것일 터이다.” 그는 인간에게 자신이 통제하지 않을 예외지대를 허용했다.

 

그러나 그 허용은 강자가 저지른 죄악이 약자의 탓으로 전가되며 책임을 외면하는 허용이고, 자신들의 야심을 위해서 타자를 향해 쏟아내는 증오와 혐오의 동원이라는 허용, 즉 자의적인 권력 행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불편한 진실은 인간들이 모두 여기에 탐닉한다는 사실이다. 인간 사회는 스스로를 먹어치우며 썩어간다. 실수하지 않는 선더헤드는 단언한다. 허용은 자유의 부풀어오른 시체이다.” 바로 지금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엄청 큰 대목이다.

 

자유를 지껄이지만 정작 이 자유는 자신의 부도덕성과 무관심의 허용이며, 책임으로부터의 회피와 전가라는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욕구를 위한 허용이지 않은가? 작금의 검찰정권이 외치는 자유란 이처럼 썩은 내 진동하는 자유의 부패한 사체인 허용이라는 위험천만한 괴물이다. 잠시 소설을 벗어났다. 정복된 죽음, 즉 생명의 복원술은 죽은 인간을 살려낸다. 인간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은 육신을 완전히 태우거나 녹여 없애 재생과 복원이 불가능케 하는 불과 산성용액, 사체를 찾을 수 없는 심해의 영원한 수장(水葬), 고기밥으로 던져주어 재생가능성의 원재료를 완전 제거하는 것뿐이다.

 

기상천외한 완벽한 타자의 제거, 암살 행위와 수확령에 개입할 수 없는 선더헤드의 일반 시민을 이용한 합법적 개입이 인간성의 자멸을 억제시키려 하지만, 이 모호한 방식의 암시에 의한 시민의 도덕적 개입은 불가항력이다. 아마도 2편은 인간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은 결코 지혜와 양심과 연민이 다스리는 세계와는 한참이나 멀다는 증거로 가득 채우려 했던 것만 같다. 지배와 군림, 권력을 향한 욕망이라는 궁극적 쾌락의 추구를 향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선더헤드의 계산처럼 내가 없을 경우 인류가 스스로 멸종을 초래할 가능성은 96.8%에 달한다. 인류를 인류로부터 어떻게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인류는 단언코 인류에게 멸망한다.

 

노골적이고 뻔뻔하며, 부패와 무능력과 무책임으로 해악과 파탄의 막장드라마를 보이는 권력의 행위에 사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선사시대 폭도들이 돌멩이를 휘두른 이후 늘 인간은 복잡한 문제에 수월한 희생양을 찾는 것이 취미였으며, 자신들의 가학적 성향을 정당화하는 데 세치 혀를 놀리는 재주를 습득해 왔기 때문이다. 문제를 아예 보지 않으려는 인간들은 이처럼 선사시대 이후 늘 있어왔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들이 인류 공동의 소중한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의 걱정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그 소중하다는 감각자체를 훼손하려하는 데 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행위가 즐거움, 쾌락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 즉 인간성이란 본디 그러한 것이니, 그것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 주장이 소설 속 <신질서>라 칭하는 더없이 수구적인 부류들의 신념이다. 자기 편익의 증대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공리주의적 이 믿음이 세상을 휩쓸 때, 아슬아슬하게 자멸의 경계를 걷고 있는 인간 세계의 균형은 무너지고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말미에 선더헤드의 의미심장한 발설이 있다. 이 리뷰의 모두(冒頭)에 인용한 문장이다. 제 행동의 결과를 직시하지 않는 인류에게 교훈을 주지 않는다면 내 실수가 되리라. 그리고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 는 선언이다. 선더헤드가 모든 시민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든 세계에 울려 퍼지는 대공명, 대진동의 표상이, 불미자에게만 표시되던 붉은 등이 전 인류에게 깜박거린다. 이 대공명의 시그널은 인류에 대한 불신이다. 3편으로 부지런히 달려간다. 종소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울리는 것일까? 인류는 스스로 인간성에 내재된 괴물성을 기꺼이 폐쇄시킬 수 있는 것인가? 작가가 도달하는 그 인류의 향방이 너무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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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자 수확자 시리즈 1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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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후로 넘어서는 문턱을 건너고 나면, 인간성은 사라지고 경박성의 시대,

유희와 조롱의 시대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행해지는 모든 것이 조금의 의미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뱅상 데콩브(Vicent Descombes), Modern French PhilosophyP31에서

 

 

인간의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궁극(窮極)으로 향한다. 사실 죽음에 대한 알 수 없음, 그 두려움이라는 생()의 한계가 부여하는 간절함이 인간 문명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무능력을 떨쳐내기 위해, 그 궁극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사실 이 장광설은 케케묵은 얘기이겠지만 오랫동안 반복하며 집요하게 묻는 이유는 납득할 만한 답변이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 그 누구도 필멸(必滅)을 피해 갈 수 없는 까닭이다.

 

닐 셔스터먼의 이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죽음이 해결된 세상의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타자에 의한 사고와 사건에 의한 죽음, 그리고 자살과 자연사()가 만연하던 사망 시대는 종결되고 누구도 죽지 않는 시대다. 초지능 선더헤드가 지구 모든 지역의 국가행정체제를 해산하고 인간 세계를 통제하는 유일한 존재가 된 세계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이 알려져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인간에게 고통, 질병, 노화, 죽음은 없다. 체내 나노봇에 의한 치유와 치료, 재생술로 아무도 죽지 않는다. 선더헤드에 의한 직업과 부의 배분이 평등하고 풍부하게 이루어지는 쾌적한 세계, 새롭게 쫓을 물음이 없는 세계이다. 프랑스 철학자 뱅상 데콩브의 말처럼 모든 것이 조금의 의미도 갖지 못하는 세계이다.


앎의 영역이 제아무리 정복될지라도 인간 본성이 암약할 수 있는 지대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항시 예외와 위계 구조를 만들어 내는 종()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의미를 잃어버리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 그림인 낫(scythe)을 든 낯선 복식을 한 인간, 이들이 바로 예외의 존재자이다.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의 불사(不死)의 존재들이 된 인구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인간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합법적 재량이 주어진 유일한 존재자. ‘수확자라 부른다.

 


죽인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이삭을 줍듯 인간의 목숨을 거두어들이는, 즉 수확하는 것이다. 인류의 쾌적한 공존을 위하여 수확자는 중요한 사회적 봉사자로서 성스러운 임무로 이해하도록 교육된다. 문명의 성장은 완료되었고, 인간 존재에 대해 더 해독할 것이 없으니 어느 누구도 다른 인간보다 더 중요할 이유가 없는 세계, 그러니 모두 똑같이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이제 변화는 없다. 아이러니는 죽음을 완전히 이긴 세계인데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수확자는 바로 이 죽음을 독점한 자들이며, 죽음의 유일한 배급자다.”

 

이것이 이 작품의 근간이다. 수확자들은 인구에 비례하여 우월한 도덕성과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연민을 지닌 인간을 선택하여 오랜 수습훈련 기간을 통해 수확자들의 연례회의인 콘클라베에서 최종 선정된다. 소설의 서사구조를 빼 놓을 수 없겠다. 시간적 진행방식의 물 흐르듯한 통상적 이야기 서술방식에 더해, <수확 일기>라는 수확자가 의무적으로 매일 기록하게 되어있는 수확자의 일기가 자칫 가벼워 질 수 있는 담론에 진중한 철학적 무게를 부여하며 소설의 서사에 균형을 잡는다.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일에 대한 고뇌, 이를테면 고결한 수확자인 퀴리는 때로 내 직업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지면, 나는 죽음을 정복하면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애도한다.”고 쓴다. 이와 달리 거둘 수 있는 생명의 수량을 배당하는 한계에 대해 반감을 표현하는 수확자의 일기도 있다. 독자는 생명을 거두는 이들의 성향에 매혹되어 다시금 인간이란, 인간성이란 대체 무엇인지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수확자 시리즈의 첫 편인 이 작품은 세계의 법령이자 인간 행동의 주제자인 선더헤드의 통제 예외지대인 수확령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 선더헤드는 인류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힐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순수한 정의, 순수한 헌신의 존재로서 인류를 위해 일하는 지성체다. 이러한 존재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영위되는 지대가 수확령이다.

 

수확자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 단지 도덕성과 공감 능력에 의해 수확자라는 인간들에 의해 선발된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타인의 생명을 거두는 독점적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또한 이들에게는 죽음 면제권도 있다. 타인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을 관장하는 그야말로 신이 사라진 시대의 신이다. 이런 존재들이 지녀야 할 도덕성이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이 사회체를 만들면 항상 위계구조를 우선 만들어낸다고 한다. 위계구조란 구성원에 수직적 계급이 주어지고 이에따른 권력이 동반된다. 또한 인간들의 모임이란 너절한 자기 이익을 위한 논쟁을 벌이고 세력을 키우며, 권력을 향한 암투가 전부이기도 하다. 아마 이러한 인간성의 적나라함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펼쳐지기에 익숙한 인간적 실상임에도 그 낯익음 때문에 더욱 이야기는 독자의 정신을 휘어 잡는다.

 

살해하기를 극도로 혐오하며 싫어하는 인간만이 수확자의 기본적 자질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모순을 떠안고 있다. 타인을 규칙적으로 할당량의 범위 내에서 죽여야 하는 수확자가 그 일을 싫어해야만 한다는 가치의 충돌, 아마 고결함이란 이러한 해결 불가능함을 극복할 수 있는 도덕적 신념에 대한 곤혹스러움의 표현일 것이다.   ‘시트라로언이라는 열여섯 살 아이들은 페러데이라는 수확자의 지목에 의해 수습생이 된다. 생명을 거두어야 하는 대상을 선정하는 일부터 그 대상을 수확하는 구체적 도구와 방법까지 도덕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또한 수확하는 일이 권력의 행사이거나 살해의 즐거움, 쾌락적 이벤트로 변질되지 않도록 자기성찰에 철저함을 실천하는 일을 배운다.

 

시트라와 로언은 일 년의 수습 기간동안 연간 세 번 개최되는 수확자들의 회의인 콘클라베에 참여하여 테스트를 받게 된다. 수많은 수확자들 앞에서 일종의 자질 검정을 받는 것이다. 생명을 거두는 일의 신성함, 그 지엄한 도덕적 요구에 대해 이러한 도덕은 사망시대에 지닌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보수적 퇴행이라 비난하는 일군의 수확자 무리가 있다. 이를 대표하는 고더드 라는 수확자는 주장한다.   수확은 상징적이어야 한다. ...필멸성에 메어두기 위해서,  지금 가장 숭고한 소명이 한때는 범죄로 여겨졌다는 사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라며 인간 살해에 도덕적 기준을 들이미는 것을 위선이라 조롱한다.

 

페러데이와 고더드는 수확자의 소명에 대해 이처럼 대척점에 서 있다. 고더드는 수확행위를 왜 즐겨서 안 되는가 하고 묻는다. 어차피 일 아닌가? 인류의 무한한 삶을 돕기위한 신성한 일을 하는데 그 행위자가 그 일을 축제화하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비()도덕적인 발언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무한한 삶이 보장된 인간들이지만 우발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제시, 각인(刻印) 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삶의 동력, 삶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망 시대(필멸 시대)에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죽음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억척스레 무엇인가를 성취하려 하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불사의 존재로 비록 인간은 바뀌었으나, 인간의 행위, 본성은 변화하지 않는다. 수확자의 십계명, 수확자에 대한 엄중한 금기와 계율이지만 그 틈새, 편의적 해석은 언제나 가능하다. 콘클라베는 두 수습생을 훈육하는 고결한 수확자 패러데이를 시기하는 세력의 주장으로 인해 두 수습생 중 한 명의 선정과 선정되지 못한 수습생은 즉시 목숨을 거두어야 한다고 의결하고, 페러데이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이 불의한 싸움에 내몰리는 결의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시트라와 로언은 각기 다른 수확자의 수습생이 되어 불가피한 대결에 내몰린다. 아마 수확자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 해도 될 것이다. 조직 범죄자 양성소 같은 로언에 대한 고더드의 강도 높은 살인 병기로의 훈련과 수확자 퀴리에 의한 시트라에 대한 고결한 도덕적 훈육은 대비되어 각기 다른 환경 속의 인간 변화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수확령은 자신들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역할의 수행을 위해 선더헤드의 통제 밖에 있다는 점이다. 선더헤드는 수확자들과 수확령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다. 선더헤드가 그네들의 행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류 사회를 위한 숭고한 약속의 이행을 지키기 위함이다. 외부(선더헤드)로부터의 이 불간섭은 수확령의 부패성을 키운다. 계율의 위반, 더러운 것들의 합종연횡(合從連橫), 대규모로 집행되는 수확, 컬트(cult)화된 수확자 집단의 범죄조직화 등 죽음을 판돈으로 한 세력 싸움이 과연 볼 만하다.

 

또한 선더헤드로부터의 이 독립과 배제는 선더헤드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확령 내부의 불의에 의해 위기에 빠지거나, 피살되더라도 선더헤드가 개입하지 않기에 범죄는 더 극성을 부린다. 완벽한 지성체의 통제가 미칠 수 없는 지대, 즉 무법지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름하여 자율’, 이 얼마나 그럴듯한 단어인가! 수확이라는 신성한 언어는 살인이라는 적나라한 의미를 되찾는다. 수확자는 곧 살인병기로 둔갑하는 세계이다. 두 명의 수습생은 예정대로 한 명의 수확자로 선정되고 한 명은 탈락한다. 그러나 이 선정과 탈락은 수확자들의 세계, 수확령에 의미심장한 파장을 몰고 올 것 같다. 더구나 부패의 온상이 되고 순수하게 인간 살해의 특수 면허 집단화되는 수확령에 선더헤드가 어떠한 명목으로든, 그 초지능의 지성이 개입할 것만 같다.  ‘인간적이라는 이 해묵은 휴머니즘이라는 괴물의 탈은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일까?

 

1편은 이렇게 끝 맺는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보다 더 지독한 적이 있을까? ....수확령의 양심이 고장나고, 그 자리를 특권에 대한 탐욕이 대신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최악의 적이 될 수 있다. ....부패하고 비열한 수확자들을 찾아서...불로 끝장내는 누군가...그를 수확자 루시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2선더헤드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간과 초지능과의 협력이 펼쳐질까? 아니면 유희와 조롱만이 쇼처럼 펼쳐지는 스텍타클한 이벤트가 점령한 쾌락의 제물(祭物)놀이 세계가 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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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카틀리포카
사토 기와무 지음, 최현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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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공희(cannibalism:人身供犧),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신체를 먹는 의례다.

제 배를 채우기 위해 타인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 생활터전, 생태계의 피와 살을

다 빨아먹어 버리는 우로보로스가 자본주의 사회질서다.

- 낸시 프레이저, cannibal capitalism에서

 

 

연기 나는 흑요석 검은 거울의 신, 아스테카 최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 용서를 알지 못하는, 지옥도 초월하는 전투의 신, 이 옛 멕시코 신화의 은유는 소설의 밑바닥을 흐르며, 인간 욕망의 어두운 영토를 독보적인 서사로 비추어 내고 있다. 자유시장 원리가 지배하는 홉스식 자연 상태, 즉   피로 피를 씻고 그 피를 신에 바치는시장 지배권의 전쟁, 마약 자본주의, 피의 자본주의, 주술 자본주의, 식인 자본주의, 그 걸신들린 실체들의 이야기를 디테일한 신화적 지식과 탄탄한 구조로 직조해내고 있다.

 

소설의 서사를 조망한다면 멕시코 북서부 지역을 지배하던 마약밀매 카르텔인 네 형제가 이끄는 카사솔라스가 지역 패권을 차지하려는 신흥 카르텔인 도고 카르텔에 의해 참혹하게 몰살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유일한 생존자인 셋째인 발미로 카사솔라스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도고 가르텔을 피해 보복을 준비 할 수 있는 은신지역을 향한 호주,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으로 도주의 행적은 여느 소설 작품의 중심 서사를 뛰어넘는 흥미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정도는 사소한 시작에 불과할 만큼 전개 될수록 전환되는 장면마다 상상 초월의 숨을 멎게 하는 이 세계의 어두운 저 밑바닥들을 불러내 독자의 면전에 들이댄다.


 



보복을 위한 중간 기착지인 인도네시아에서, 붕괴한 마약 카르텔의 우두머리였던 발미로의 행적과 함께 그를 새로운 비즈니스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장기를 불법으로 적출하는 일본인 백 앨리(back alley;뒷골목)’ 닥터인 스에나가 미치쓰구와의 엮임이다. 이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은 자본주의의 맹목적 지향성인 자기 확장’, 다시 말해 공식 경제에서 추방된 비공식 회색지대로 향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본 축적 전략의 가장 적나라한 판본이다. 자본주의 DNA에 각인된 그 도착성,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줄 신종 비즈니스는 초클로(아동의 심장)라는 산지(産地)가 한정된 희소적 자원인 품질 보증된 일본산() 아동 심장을 밀거래하는 것이다.

 

일본산 아동심장, 돈 많은 수증자 부모의 바이오센티멘털리티(생물학적 감상)는 심장 주인의 내력에 대한 품질을 기대한다. 건강한 정신과 육체로 성장한 아이의 심장이기를. 발미로는 야쿠자가 아동복지 목적으로 설립한 위장조직을 통해 무()호적 아동들을 은닉된 장소에서 양육하며, 수요에 따라 살아있는 아이의 심장을 적출, 공급한다. 1회 이식거래에 한화 65억 원에 달하는 거대한 뉴-비즈니스. 그러나 시장 자유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윤 높은 독점 시장에는 경쟁자가 출현하기 마련이고, 동업자는 분배율로 전쟁을 벌인다.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   - 실리콘밸리 IT기업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

 

이 문장처럼 선명한 실체의 고백이자 끔찍한 자본주의의 극명한 선언도 없으리라. 독점이 부딪칠 때 피를 부르는 전쟁이 시작된다. 소설의 많은 지면이 시장 지배를 위한 소수의 암살단, 즉 폭력 조직 양성의 과정과 그들의 무자비한 잔인성이 길러지는 의식(儀式)의 묘사에 할당되어 있는데, 바로 아스테카의 인신공희, 희생제물이 가져오는 증오와 살의의 소용돌이를 거두어오는 열광과 환희의 구역질 날 정도의 충만한 인간 살해 행위다. 경쟁 조직의 리더로부터 산 채로 심장을 적출하는 저주 받은 정화의 의례 행위, 피의 제사는 심장 밀거래와 병행하며 자본주의 자체가 지닌 그칠 줄 모르는 축적의 본질을 빗댄다.

 

나는 폐쇄조직에 대해 여러 지면에서 그 부패성과 잔인성의 자연적 발화를 지적하곤 했는데, 발미르가 자신의 수하 조직을 단단히 묶는 유대 조성의 묘사들은 그 끈끈한 연대 의식이 어떻게 싹트는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잔인성과 무감각한 살인의 행위들은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 발미로는 인디헤나(인디오)였던 할머니 리비르타드로부터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귀 기울였던 아스테카 최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를 향한 희생제의, 영광스러운 옛 아스테카의 발흥을 위한 의식을 통해 살육 기계인 암살자를 길러낸다.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멕시코 출신의 어머니와 야쿠자 말단 보스였던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혼혈 아동인 히지카타 코시모(일명 엘 파티블로‘; 단두대)’라는 소년을 등장시킨다. 살림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약물에 중독되어 아이를 방치한 채 자기연민과 쾌락에 절어 사는 어머니, 아이는 인간에 대한 감정, 세상에 대한 이해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이는 부모 살해자로 소년원 재소(在所) 생활 끝에 조각에 대한 손재주로 장식 칼을 만드는 공방의 선택 덕에 출감한다. 2M4Cm의 거대한 몸집,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일본인, 스페인어를 말할 줄 아는 이방인, 그는 발미로(가명 엘 코시네로)에 의해 최고의 암살자로 키워진다.

 

코시네로는 파티블로(코시모)를 엘 차보(아가)로 부른다. 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끈끈하게 엮이고, 코시네로는 아스테카의 신화, 테스카틀리포카에 대해 들려준다. 테스카틀리포카, 검은 아스테카의 거울, 인간이 알 수 없는 흑요석 거울에 대해서. 죽음의 각인이 찍혀있는 주술, 꿈과 환상의 그 절대적인 제의의 의미에 대해서. 아이는 묻는다. 왜 위대한 최고의 신이 고작 거울인가요?

 

이 물음은 어쩌면 발미로(엘 코시네로)가 맹신하는 피의 희생제의가 지닌, 또한 식인자본주의가 지닌 한계를 모르는 탐욕, 피의 경쟁을 부르는, 그 반복되는 증오와 살의에 대한 정곡(正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소설 내용의 누설자가 되는 것은 피해야겠다. 이 답변은 발미르의 할머니 리비르타드가 이미 들려준 이야기 속에 있는 것 같다. 다만 어린 발미르가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 용서없는 처벌의 신이라는 반쪽만 이해한 불구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시초부터 줄곧 놓여있는 뱀과 함께 있는 검은 거울,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지 말라. 이 둘은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색과 모양도 다르지, 하지만 둘 다 신의 분신이다.”  -495

 

이 아스테카 신들의 이야기를 비집고 빛나는 하나의 문장이 있으니 공방의 운영자인 파블로’, 그는 불행한 소년 코시모가 어둠의 세계로 불려 들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연민의 메시지를 보낸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다. 자비다...(마태복음)”

 

테스카틀리포카는 테스카(거울)와 코아틀()이 함께하는 이름이다. 서로 이질적인 것, 밤과 낮, 그림자와 빛, 불과 물, 태양과 달, 이 세계의 정의는 경쟁도 아니요. 피의 복수도 아니며. 인간이 인간을 먹는 식인의 무참함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 이질성, 다름을 수용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사회의 추하고 끔찍한 역사, 그리고 현실이라는 무대에 펼쳐지는 그 무지막지한 합리성에의 신묘한 적응성을 보이는 자본주의, 경쟁자와 이질적인 자를 향해 예리하게 갈고 닦인 칼날, 컬트교처럼 폐쇄적으로 엮인 집단들의 음침한 내부성들, 연대의 이탈을 응징하는 가족주의 등, 보이지 않는 비경제적 자원을 먹고사는 은폐된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히 독자적 영역으로 구축한 작가와 작품에 갈채를 보낸다.

 

혹여 프레이저가 보았다면 결코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제된 인간들, 돌봄, 생태계 등 -경제적요인들이 뒤얽혀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질서 체제에 대한 낡은 경제 중심의 자본주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확장된 사회적 자본주의를 읽을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힌 그야말로 창조적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장르문학으로 그 범주를 좁혀 가두어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멀리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금세 화가 되어 돌아온다.

(人無遠慮 必有近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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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애나 캐번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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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이란, 이 희미한 어스름 속에서 끝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는 이 무서운 질주 밖에 없었다.  침묵, 추위, 눈 그리고 자기 곁을 지키는 거만한 인물, 조각상 같은 남자의 차가운 눈은 바로 은백색 수은으로 가득 찬 헤르메스의 눈, 얼음의 눈, 그 여자의 영혼을 빼앗고 위협하는 눈이었다.”  -164쪽

 

이렇다 할 서사도, 구체적이거나 명료한 시간도 공간도 모호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이 모든 것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인 소설이다. 드러나는 소설 속, 주요 배역인 화자(話者)와 여자, 교도소장으로 불리는 남자, 이들 세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설명이 없다. 다만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특성으로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뿐이다. 그것도 흐릿한 안개 속의 그림자처럼.

 

소설은 화자인 남자 자신의 생각을 잠식하고 있는 여자,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충동을 처리하려는 강박적 집착으로 시작된다. 그는 분명 돌아왔다.’ 고 말한다. 예전에 그가 살던 장소였다는 의식일 것이다.   불가사의한 비상사태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있는 지역의 진상조사를 위해서 돌아왔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비이성적 행위를 인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자신의 행위가 비이성적임을 인지하고 있음을 말하는 이 문장의 진위는 꽤 의심스럽다. 마치 이성적 분별을 잃고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현실의 토대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여자와 자신의 지난 시절의 관계를 회상하며, 여자의 가냘프고 수동적이며 타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이 과감하게 다가서지 못했음을, 느닷없이 한 남자와 결혼을 해버린 당혹스러운 감정을 말하지만, 이것이 과연 실제였는지, 아니면 왜곡되어 혼합된 환상인지 모호하다. 어쨌든 불가사의한 비상사태란 얼음이 점점 침입해오는, 극한의 추위가 몰고 오는 황량함에 점령당하여 폐허화되는 세계임을 화자가 전하는 풍경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은 변주되어 유사한 상황을 반복한다. 화자의 행위는 여자가 있는 곳을 찾아내고 구원하기위한 생사를 무릅쓴 끊임없는 추적과 실패, 그리고 세계라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억압에 굴복한 여자로부터의 신뢰 획득과 보호자로서의 인정을 향한 거듭되는 시도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교도소장으로 상징되는 여자의 남편(?), 혹은 동반자의 야수적 폭력성과 냉담함은 이러한 화자의 시도를 좌절시키는 장애로 충돌한다.

 

그런데, 이러한 충돌을 온전히 현실의 두 인간의 갈등과 마주침으로 이해하는 데 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실상 분리된 하나의 자아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182)”라던가,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모습은 서로 엉켜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반영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233)”처럼 한 인간의 분열된 자아의 형상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화자의 여자에 대한 강박적 집착은 변질, 혹은 왜곡된 사랑의 현현인것 같다.

 

교도소장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 온 화자에게   그 여자는 죽었다.”고 말했을 때, 화자의 감정은 여자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매서운 칼날이 나를 베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죽음은 내 바깥에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내 안에 있었다.(233)”  여자는 남자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 곧 여자는 화자를 이루는 하나의 육신이자 정신이다. 여기서 다시금 혼란에 빠져들었는데, 화자는 곧 구원의 대상인 여자이며, 남성적 폭력에 굴종되고 대상화되어 구원을 기다리는 여자는 화자의 또 다른 반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자와 교도소장, 여자는 한 인물의 타자화된 여러 자아인 것이 아닐까하는 의혹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결국 나는 이 세 인물을 하나의 인물로 이해하고 읽어나갔다고 해야겠다.

 


여자는 흘러내리는 은백색 머리카락과 달처럼 창백하고, 유리처럼 부서질 듯한 존재로 반복되어 묘사된다. 또한 여자는 화자가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보호자, 진정한 삶의 구원자임을 거듭 확인하려 한다. 수동성이라는 오래된 전통적 여자상()이다. 대상화된 존재로 읽혀지기를 기다리는 여자, 그래서 여자는 더욱 화자와 교도소장이라는 남자와 동일 인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즉 여자가 기대하는 남자의 전통적 형상, 백마탄 기사이며 권력과 부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있는 왕자님, 그러면서도 여자의 신뢰를 위해 기다리고 인내 할 수 있는 남자, 이들의 반영을 내면에 지니고 있는 여자. 이렇게 이해하면 화자와 교도소장은 여자가 욕망하는 남자의 반영일 뿐이다. 아니면, 화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분열된 욕망의 분신들일지도.

 

화자는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있는 교도소장의 폭압 하에 있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거듭 마주치지만 좌절한다. 그런데 이 좌절의 계기가 여자의 미온적 거부거나, 교도소장과 화자를 위협적 인물로 동일시하며 거부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분열된 타자상은 여자의 내적 욕망의 분신이거나 화자의 그것이거나.  결국 이 소설에 주요 등장인물이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존재의 내면, 인간적 욕망의 현상만이 있는 것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이 모호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데 거부감, 불편함이 해소된다.

 

여자는 교도소장을 통해서, 또는 희생제물이 되어 살해되는 것으로 묘사되거나, 실종 혹은 동행의 거부로 남겨진 채 생존 가능성이나 실존하는 장소가 불분명해지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다시금 여자를 찾아 나서고, 교도소장은 이의 방해자로 등장하며, 점점 세상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얼음, 잔혹한 빙벽의 파괴적 침입이 조여 오는 종말적 세계에 대한 엄습하는 불안감과 함께 야릇하게 뒤틀린 욕망이 병행하며 독자를 비현실적 환상의 공간으로 몰아넣는다. 이 몽롱한 감각에 도취되어 인간 심연의 그 어두운 골짜기를 거니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소설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화자는 말한다.  다시 처음부터 그 여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이러한 되풀이는 마치 끔찍한 저주 같았다.(235)”.

 

이 소설에서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일련의 서사적 줄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아마 넌센스인 것만 같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극지방의 빙하를 녹여, 대양에 실려 온 얼음이 반사하는 태양열로 지구가 냉각된다는 이상기후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오만을 이야기하려 한다거나, 자기 편익, 영토적 야욕과 같은 이기적 쾌락이 핵전쟁이라는 자기 파멸을 가져오는 종말론적 세계관의 예견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환상과 꿈과 같은 저 무의식과의 대면에서 오는 배경으로 읽어내면 족하지 않을까?

 

물론 헷갈리게 하는 문장도 있다.   인류라는 종족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을 향한 집단적 소망, 자멸을 향한 치명적 충동이 그 지표였다. (296)”  어쩌면 이 문장 또한 현대를 사는 인간의 자기 본질과의 대면에서 해독한 인식의 하나일 것이다. 아마 소설은 공허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무용수가 공허의 가장자리를 따라 빙빙 도는 죽음의 무도에서 두 존재의 구별은 사실상 무의미했다.(368)” 는 이해처럼 여자와 남자라는 두 존재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화자의 자기 실재성을 의심하는 다음의 문장에서 확인 할 수도 있다.

 

갑자기 내가 최근까지 살아온 삶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마디로 그 경험의 실재성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172

 

마침내 화자는 여자를 설득해서 보호자이자 구원자로서의 여정에 동행한다. 그러나 세계는 얼음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잔혹한 추운 세계로 점점 삶의 세계로 침입해 들어오고 있다. 아마 심연을 마주한 존재의 싸늘한 공허가 이것이 아닐까?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묵직한 권총의 무게가 그나마 약간의 안심이라 말하는 화자의 마지막 독백은 바로  달아날 수 없음, 그것 아닐까?

 

얼어붙은 세계에서 '길을 잃은 황혼의 존재',  소설의 시작 문장들에 박혀있는 이 어휘들이 어쩌면 캐번이 드러내고 싶었던 진정한 언어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운전, 그리고 거의 다 떨어진 휘발유, 어둠 속에서 외로운 언덕길에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차를 돌릴 수조차 없는 좁은 길,...,‘애나 캐번의 지독한 현실 독백인 것만 같다. 문득  역사상 긴 자살 유서로 불리기도 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막간이 떠오른다. 이 작품 또한 캐번의 문학적 유서 아니었을까? 모두에 인용한, 위협하는 얼음의 눈의 감시 속에서 어스름한 세계를 그저 질주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는 여자의 마음을 묘사한 문장, 아마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의지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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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얼음)에 대한 해석: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속 끊임없이 세계 속으로 침입해오는 얼음은 어쩌면 투명한 백색의 환각제 '메스암페타민' 의 속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마약의 환각성에 취한 한 인간의 고백록으로. 사방에서 조여오는 얼음, 빙벽의 여러 묘사는 환각제로 인해 신체가 느끼는 감각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작가는 이렇게 감각되는 분열된 자아를 통해 자신에게 새겨진 고통의 흔적들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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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트리 스피박 라이브 이론
마크 샌더스 지음, 김경태 옮김 / 책세상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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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낯선 인종의 사람은 그 생김새가 같아 보인다. 한국인을 비롯한 극동에 위치한 사람들을 서구의 인간들은 다 똑 같이 생겼다고 하며, 더구나 이러한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 기초하여 한국인은 성형대국답게 모두 똑같이 생겼다고 모욕을 가하기까지 한다. 인종적 우월의식에 따른 무관심과 무시해도 된다는 억척스런 무지에 토대를 둔 교만 때문이다. 어찌 모두 똑같게 생겼겠는가? 다름에 대한 차별과 배제라는 알지 않으려는, 알고 싶지 않다는 외곬의 수구(守舊)성과 타자를 알지 못하는 유아적 이기심에 터 잡은 미성숙한 자의식에 뿌리를 둔 골 깊은 맹목(盲目)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글을 쓰거나, 써진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아주 흔하게 나타난다. 유럽의 엘리트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글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에게도 동일한 인식으로 읽힐 수 있으며, 그렇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의 한 귀퉁이 사는 농부의 아내는 아마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읽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감히 인류 보편적 진리 또는 지식이라거나, 동일한 이해를 갖는 것이 지식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읽는 이들 또한 글쓴이가 의도한 의미를 읽어내는 것, 혹은 평자가 해독한 어떤 지침적 노선을 따라가는 것을 잘 읽어 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 소설에서 작가가 일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투를 사용하며, 마치 리얼리티를 부여하려 했다고 하면, 독자는 이렇게 쓴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는 것, 즉 작가의 의지를 읽는 것을 잘 읽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 말투를 사용한 이유, 즉 직업에 대한 오래된 편견이 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작가의 인식에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거 계급 차별 아닌가? 인종차별 아닌가? 이 작가는 사람을 이렇게 구분하고 있구나라고 그 글의 태도를 알아차리는 읽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태도와 상궤(常軌)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주제이자 대상 인물인 가야트리 스피박 초국가적 리터러시라고 일컫는, 여러 차이 안에서 세상을 읽는 능력을 지닌 주체로의 변화를 주장하며,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에 데리다의 해체적 시각을 도입하여, 다르게 읽기와 소외되고 무시된 이들에게 저항의 언어를 제공한 시대의 윤리학자이자 사상가이다.

 

책은 스피박의 주저(主著)포스트 식민이성 비판을 중심으로 하고, 그녀의 사상적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논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기저(基底)로 하여, 주류 세계의 잃어버린 관점과 특권의 탈중심화를 향한 지고한 윤리적, 문화적 사유를 쫓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결여된 윤리를 가리키고, 페미니즘 전선에 뛰어들며, 뿌리깊은 언어의 오용과 문화적 폭력의 실태를 드러낸다. 저자인 뉴욕대() ‘마크 샌더스교수는 이 탐사를 꼼꼼하게 해독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피박의 저술만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저작들을 읽는 일반 독자에게는 접하기 어려운 스피박의 각종 발표 논문을 통해 특정 사상이나 주장의 논지를 보다 분명히 전달 받을 수 있으며, 논의의 명료성을 스피박 당사자의 답변을 통해 확인케 하는 대담으로 인해 문학과 독해, 윤리에 대한 그녀의 개념들에 상당한 이해를 갖게 된다. 스피박은 초기 탈식민분야의 시초격인 인물이다. 그녀의 행적은 민족-국가의 시민으로서 대도시와 민족-국가와 출생지 사이의 교류를 위한 조력자로서 서발턴을 비롯한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 인민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어있다.

 

우리는 미래의 인문 교육자들이 초국가적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3

 

이 문장은 스피박의 연구 실천의 행적을 아마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주류의 목소리인 담론적이고 사회적, 지정학적 내재성에 대한 공모자로서의 읽기가 아닌, 스스로 다른 사람과 그 밖의 많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봄, 즉 도덕적 선의 위대한 도구인 상상력을 지님으로써 세계의 특권적 해독을 피할 수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것은 고대 연극의 파라바시스(Parabasis)’와 말소 표기 아래에서만 번역되어야 하는 책임 불가능성의 보존이며,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지워버린 승인되지 않은 페제(廢除)의 흔적으로부터 말하는 주체의 상상하기 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모두 다르게 읽기, 서사의 양식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읽기, 내포된 독자로 상정된 읽기로부터 비켜선 읽기를 말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자면 탈식민화된 지역의 양상을 전하는 토착정보원이 있다고 하자. 아마 그는 분명 그 지역의 지식 엘리트일 것이고, 그는 현지의 하급계급과 분리되어 있는 존재일 것이다. 즉 그 정보에는 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의 실제와 인식론적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역사적 진보의 주류에 결합되지 못하기에 항상 서발턴으로 남게되며 또한 서발턴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데리다의 해체는 스피박에게 중요한 해독의 도구가 된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영역를 하면서 스피박은 서문에 해체를 자신의 언어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기입되어 있는 재구성하기 위해 분해하는 것으로서,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을 드러내고, 고유 체계를 뒤집는것이다, 또한  비평가의 통제, 텍스트의 권한을 버리는 것, 의미의 우위에 대한 확신을 저버리는 독해이다.

 

마음의 변화와 욕망의 비강압적인 재배열로서 인문학 교육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 아래로부터 배우는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입증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배우는 훈련으로서 문학적 읽기, 즉 초국가적 리터러시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모델로서 스피박의 마르크스 자본읽기나 인도의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소설 읽기의 사례들은 자본주의의 윤리적 결여와 페미니즘의 작동방식 및 양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데비의 벵골어로 써진 소설 Stanadayini을 스피박은 <젖어미>로 번역한다, 가능한 번역어인 <The wet-nurse(유모)>는 원어의 의미가 지닌 충격을 주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젖가슴을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라는 기관으로, 또한 성별화된 동인의 작동방식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문학 읽기, 번역의 시선에서 이처럼 숨겨질 수 있는 것을 드러내어 해독하여 존재하지 않음을 읽는 것이 바로 초국가적 리터러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스피박은 쥘리아 크리스테바중국 여성에 관하여를 비롯하여 데리다의 저술들에 내재된 자민족중심주의, 강박적인 자기-중심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시적 이야기가 있다, 백인 남성이 황인 남성으로부터 황인 여성을 구하는 스토리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지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유럽 백인의 제국주의적 자비를 통해 여성 서발턴을 침묵시키게 한다. 황인 여성은 이 구원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스피박은 선언한다. 페미니스트로 발언하기 위해서는 서구 제도의 역사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덮어버려야만 한다.”.  어떤 텍스트가 쉽게 대립적으로 보일 때 그 공모를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박은 크리스테바에게 주문한다. 내가 누구인지, 다른 여성은 누구인지, 나는 그녀를 어떻게 명명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유럽중심적인 페미니즘의 타당성은 무엇인지를 자문해보라고. 부유한 국가의 여성은 통합적인 착취 체제에 객관적인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다. 명확하게 억압을 작동시키는 저임금 노동의 가장 낮은 수준의 여성들에 대한 인식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의 감상은 스피박의 사상적 논의에 대한 마크 샌더스가 쓴 해석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피박의 윤리적, 사상적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 것인지를 수용하는 데 결코 적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읽기에 관한 직감 및 윤리적인 것에서 독자가 그러한 연결고리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단서들을 구체적 해석의 형태로 제공하는 이 책은 무수한  찢어진 문화적 직물들을 어떻게 수선(修繕)하며 해독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혹시 우리는 자애로운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로서 제3세계를 자기 이해의 수준에서 동질화해버리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나는 어떤 위치에서 세계를 읽고 있는지를. 내 양식의 외부에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를. 난해하고 독창적인 스피박에 조금 가까이 다가가는 데 아마 이 저술은 분명 긴요한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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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2-08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안한 질문 드려요. ˝ 데비의 벵골어로 써진 소설 「Stanadayini」을 스피박은 <젖어미>로 번역한다, 로 번역해도 충분해보이지만 충격을 주기에는 불충분한 의미를 지닌 어휘이기 때문이다. ˝ 이 부분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요. 젖어미가 아니라 무엇으로도 충분한가요. 뒷문장에 나오는 단어인가요?

필리아 2023-02-08 22:13   좋아요 1 | URL
‘유모‘로 번역되는 어휘이지만 스피박은 원어가 담고있는 의미의 적나라한 드러내기를 위해 ‘젖어미‘라는 여성의 신체를 포함한 단어로 번역했다는 뜻입니다...^^
즉 유모라는 단어는 사용자인 주인의 언어이고, 실제 여성의 신체를 내어주는 노동이라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것이죠. 스피박은 이 노동을 은폐한 주류의 언어를 버리고, 보다 진실한 언어를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 문장 표현이 서툰 까닭인 것 같네요. 문장을 조금 수정했습니다~고맙습니다. 초원님.

초원 2023-02-09 21:22   좋아요 0 | URL
친절한 필리아님 감사해요. 촘촘한 읽기로, 세련된 리뷰로 고마운 안내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