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존 그리샴 베스트 컬렉션 3
존 그리샴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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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번역본인 이 책의 제목은 조금 얄궂다. 소설 주인공의 출구(出口)를 누설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샴의 소설은 이 정도로는 결코 재미가 반감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을까? 맞는 말이다.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거야? 라고 토설(吐說)하고 싶으니 말이다. 가히 폭력적으로 몰입하게 하는 소설이다. 660여 쪽에 언제 이르렀는지 몰랐을 정도니까. 잠시 자신을 잊고 싶다면 이 소설이 제격이다 싶다. 그러나 이 세상에 도사린 흉물스러움이라는 망각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지니 몰아(沒我)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소설은 초반부에 세무관계 법률회사인 벤디니, 램버트 & 로크(이하 벤디니로 표기함)’의 면접관이 하버드 법대 졸업예정인 스물다섯 살 미첼 맥디르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입사를 권유하면서 인상적인 문장을 선보인다. 그들은 맥디르에게 결혼 여부를 물으며, 우리는 안정된 가정을 원합니다. 행복한 변호사는 생산적인 변호사니까.(14)”라고 구성원의 행복과 안녕을 중요한 회사의 이상으로 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대목이다.

 

현대의 핵가족 중심으로 구성된 가정이란 자본주의의 토대이자 핵심 축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언어이다. 두 남녀와 그들의 아이로 구성된 스위트 홈이라는 이 낭만적인 형상은 자본 생산 도구인 인간의 노동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조건이자 토대라는 의미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벤디니 면접관의 말은 피고용인을 조종하기 위한 일종의 인질(人質) 유무를 알기 위함이다. 자신들에게 반항할 경우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아내와 자녀라는 대상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사악함이 포장된 언어임이 드러나니 말이다.

 

벤디니는 마피아 조직이 운영하는 돈 세탁과 탈세를 위한 로펌이다. 맥디르는 파괴적인 고액 연봉과 처우조건으로 이러한 조건 뒤에 숨은 조직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능한 변호사로 인정받아 최단기에 로펌의 파트너가 되기 위한 야망으로 충성을 다한다. 1주에 90시간을 넘는 업무로 헌신한다. 아마 소설 속 시대에는 로펌 입사자인 법대 졸업생만이 변호사 자격시험을 보게 되었던 모양이다.(소설은 1991년에 발표되었음.) 고객에게 청구할 수 있는 업무 수행시간이 곧 보상으로 주어지는 회사에서 시간당 계산되는 고액의 임금은 의욕으로 가득한 젊은이를 유혹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맥디르는 변호사 시험에 수석 합격하고, 이는 지역 신문에 합격자명단과 함께 게재된다.

 

소설을 이끄는 사건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신출내기 평변호사인 맥디르에게 FBI가 접촉을 해 온다. 죽거나 살해되거나 불법의 주체가 되어 은퇴하지 않는 이상 자의에 의해 퇴사할 수 없는 조직, 마약 조직에 의해 세금 탈루와 검은 돈을 세탁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로펌임을 전해 듣는다. FBI에 협조하여 벤디니의 은폐된 비밀 정보를 제공하거나, 이 제안을 거부하고 후일 FBI에 의해 불법 가담자로 기소되거나 선택하라는 압박이다. 또한 맥디르의 주택 모든 곳과 승용차, 전화에 고도의 감청 장치가 벤디니의 보안인력에 의해 설치되어 있음을.

 

딜레마, 어쩌면 이 딜레마를 이루는 인간사회의 윤리적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이 소설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비근(卑近)하게 발생한다. 조직에서 불법이나 비윤리적 불의로 내부 부패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의 정화(淨化)를 요구하거나 외부에 발설하는 인물이 어떤 처지에 이르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해당 조직에서의 생존 포기는 물론 외부 삶에서 조차 평온한 삶을 영위하기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집단에 의해 범죄적 인물로 오히려 내몰리기 일쑤며, 외부에 안정적 보호막을 위한 장치가 전무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정의를 실행하는 것에 이 세계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한다는 것을. 이름하여 내부 고발자라는 께름직하기까지 한 불온한 명명까지.

 


벤디니의 보안 조직은 맥디르와 FBI의 접촉을 의심하고, 결국 내부 자료의 제공이 일부 이루어졌음을 FBI 조직의 고위 인물을 통해 파악하게 된다. 이제 24시간 내에 더 이상의 내부 비밀 자료들이 전달 될 수 없도록, FBI의 접근을 차단하고 조직의 근간을 지키기 위해, 조직의 배신자인 맥디르를 살해하기로 결정 한다. FBI가 자신들이 보호해야할 정보원을 적인 벤디니에게 누설한 장본인이 된 것이다. 맥디르에게 다가온 위기의 순간, 이 과정은 손에 제법 땀이 차게 한다.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숨 막히는 도주와 집요한 추적이 시작된다.

 

FBI는 자신들의 정보원을 위험에 빠뜨렸고, 그의 안전을 보호함에 있어 신뢰를 상실했다. 맥디르는 벤디니와 FBI 모두를 피해 도주한다. 여기서 예상되는 질문이 있다. 정의는 실천 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이다. 사인과 사인의 관계에서 정의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민사 또는 형사법이라는 실정법에 의해 법의 판결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인과 국가 권력, 또는 개인과 거대 기업 집단이나 기구, 기관과의 싸움이라는 절대적 약자와 강자의 싸움에서 정의는 핵심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추가적인 현실적 문제도 있다. 비대한 국가 조직에는 항상 중요 정보를 적에게 누설하고 이익을 착복하는 존재가 있다는 점이다. 서로 불법행위나 비윤리적 행위를 상호 공유하는 폐쇄적 조직인 검찰조직 같은 경우나 조직범죄 집단에서도 이탈이 발생하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의 딜레마는 자기 편익 우선적 인간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적 본성과 정의 실현을 위한 국가 권력의 사회계약에 대한 인식 변화의 문제라는 두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전자는 순수한 사적 윤리에 대한 문제이고, 후자는 정의와 사회 안전망 구축에 대해 사인과 국가가 맺는 사회계약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검찰조직의 불법, 비윤리적 행위를 고발하는 해당 조직의 개인을 국가가 어떻게 보호해 줄 것인가, 위법을 은밀하게 수행하는 기업이나 집단을 고발하는 개인의 안전을 위한 제도의 구축에 대한 논의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정의(正義)’가 실천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사회계약의 당사자로서 주권자인 시민들 개인들을 향한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폐쇄적 조직이란 내부 구성원이 동질적 인간들로 이루어져 끈끈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해당 조직에 발을 담그고 있는 시간이 경과될수록 기성의 부패성에도 깊게 연루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게 된 조직을 말한다. 만일 이러한 조직에서 어떤 명령이나 지시, 참여에 소극적이거나 거부 의사를 보이는 인물은 바로 배척되거나 해코지를 통해 위험에 내몰곤 한다. 그래서 정의의 실천은 개인의 엄청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조직은 새로이 들어오는 인물을 자신들 조직문화에 길들이는 비공식적 훈육 프로그램이 비교적 잘 짜여 있다. 결국 동색(同色)의 인간들로 구성된 가장 반사회적 조직이 되곤 한다. 소설 속 로펌 벤디니는 이러한 전형적 사례를 보여준다. 조직 문화를 체화하고 있는 선배 파트너 변호사가 평변호사와 짝을 이뤄 강도 높은 업무를 부여함으로써 오직 해당 조직의 구성원의 시각만을 지니도록 훈련하는 것, 즉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여 조직 내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폐쇄조직이다. 폐쇄조직은 부패와 불법의 자연적 온상이 되는 토대임을 소설은 이처럼 아주 명료하게 입증한다.

 

탁월한 스토리 구성, 스피디한 위기 장면의 전환 등, 존 그리샴의 이 작품은 탁월한 재미로 책장을 넘기는 부담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도 아주 묵직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국가권력인 FBI가 맥디르라는 개인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가? 살인 조직인 마피아는 자신들의 범죄증거를 넘긴 조직원을 어떻게 처리하려 할까? 이 둘 사이에서 맥디르가 실현하려했던 정의는 과연 실천할 윤리적 책임을 지울 수 있는 것인가?

 

벤디니의 변호사들은 불법 행위를 일상적으로 행하며 아무런 도덕적, 법적 책임도 느끼지 못한다.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 행위가 정상적 삶의 행위로서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 조직에 봉사했으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막대한 검은 돈을 보상으로 챙긴 사람들이다. 조직의 폐쇄성과 정의 실천, 국가권력의 무능력과 부패성 등, 이 소설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과제는 사실 그리 만만치 않다. 그리샴은 정의 실천의 실현 가능성을 주인공을 통해 말하려는 듯하지만, 그 출구가 그리 화려하지만은 않다. 정의 실현의 딜레마, 우리 세계는 이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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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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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오늘 우리는 실존했던 민중의 고통과 죽음의 실재성을 부인하며 공동체의 기억을 방해 훼손하려는 무리들로 인해 다시금 역사의 분노를 마주해야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자신들의 권력 지키기에 급급해 정쟁을 일상화하며, 민생을 외면하고, 민의는 묵살하며, 주변 정세에 대해 무감하여 인민과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작태는 이 땅의 역사 내내 변함없이 자행되고 있다.

 

역사 쓰기란 고귀한 문명의 장치로서 인간 역사의 부조리를 끊어내기 위한 공분(公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주는 말했다. 승자들에 의해 써진 기록은 분명 많은 실재를 가려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지배 담론이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어 암살당했던 사실들을 드러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불화와 충동의 비극적 실재를 포착, 현재의 가치 기준에 따라 재해석하고 삶의 새로운 관계를 이해, 구축하는 일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대략 400년 전인 1636, 이 땅의 왕이 적의 군주에게 머리를 세 번 땅에 찧고 아홉 번 절하는 굴욕의 역사를 오늘 다시금 성찰해야 하는 까닭일 것이다.

 

책은 이 굴욕의 사건과 이를 전후(前後)한 당대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외세에 무력하게 국토와 백성이 짓밟히는 위난(危難)을 마주하게 될 때까지 국가의 리더와 정치관료 등 지배 권력이 어떻게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위기의 마주함에서 그네들의 대응 행태란 대체 어떠한 것들이었는지, 그리고 국난 이후의 행태들은 또한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이 저술의 고귀함은 역사를 비평의 체에 거르지 않고 고작 기록된 내용을 기술자의 욕망에 맞춰 재배열하여 정리한 또 하나의 단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툭하면 역사의 공평한 기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대립과 충돌의 공평한 이야기란 진실을 가리는 기만이자 왜곡의 역사가 되기 일쑤다. 나는 역사란 실재의 불균질함을 감당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한 양상들에서 의미와 특정 형상을 해독해내야 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1636년 급하게 비빈 및 세손 등이 도피한 강화도가 청의 군대가 공격을 시작한 지 반나절 만에 함락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의 권력이 기록한 내용은 물살이 세고 좁은 해협이어서 적의 수군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기록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양측 군대의 군사 수와 군선(軍船)의 비교를 통해 이 기록이 패전의 기록이 될 수 없음을 규명한다.

 

조선의 수군은 두께 12~3센티미터의 송판으로 만들어진 50~200명이 승선하는 판옥선 40척이었으며, 청군은 수레에 실어 온 작은 배 80척이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수군은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3,000명 내외였으며, 강화도 방어 병력은 간신 김류가 인조에게 잘라 말했듯 10,000명의 육상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합 13,000명의 군대가 3,000명에 불과한 청군에 반나절만에 패전, 함락 당하였다는 것은 당시 지휘자들의 무능과 무책임, 비겁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독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이 바로 부조리한 양상들에서 특정한 의미를 길어 올리는 진정한 역사 쓰기라 할 것이다.


역사의 치욕을 향해 달려가는 지배 권력의 행태

   - 인조반정에서 정묘호란까지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기술되고 있는데, 1부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인조반정, 그리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다루고 있으며, 2부는 병자호란에 대처하는 무능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왕과 고관대작들의 행태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3부는 병자호란 이후에 발생한 백성이 겪는 고통의 형태들과 볼모로 청에 잡혀있던 소현세자의 귀국과 죽음, 그리고 세자빈 및 그의 자식들에 가해진 참혹함 등 권력이 자기 책임 지우기에 급급한 수치와 비극의 실체를 쫓는다.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는 기록이 권력을 찬탈한 세력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추출한 광해군을 성군으로 취급하지 않았음은 불 본 듯 뻔한 일이다. 서인(西人)세력의 거두인 전 영의정 박순의 서자들이 일으킨 역모로부터 시작되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서궁 유폐와 소북(小北)파에 대한 처절한 참살로이어진 계축옥사에 대한 반발, 즉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명분으로 서인이 주도한 오늘의 표현으로 쿠데타다.

 

성공한 쿠데타의 공신들과 인조는 그렇다면 국가개혁과 백성의 삶을 돌보는 일에 관심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이 이괄의 난이다. 이것은 반정공신 김류, 이귀 등이 12,000의 군사를 가지고 서북지역 방어를 위해 평안병사 부원수로 영변에 있던 이괄을 제거하기위해 역모의 누명을 씌움으로써 야기된 파렴치한 권력독점의 야욕에 대한 반발이다. 거침없이 궁궐의 턱밑까지 이괄의 반군이 밀어닥치자 왕과 이들 대신들이 나누는 대책이란 천박하기 그지없다. 왜관에 있던 왜인을 불러 반군을 진압하자는 외세 의존의 결정을 하는 것이다. 만일 영의정 이원익이 와서 구원하지 않고 대거로 몰려온다면 그 때는 어찌 하겠는가라는 반론이 없었다면 왜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왜()에 조선을 갖다 바치는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뜻밖의 환난이 닥칠지 모르니 보내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 인조의 교지였다는 말도 그 무능의 한 증거 일 것이다.

 

이괄의 난은 국가 권력의 무엇이어야 하는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반성적 시선을 던져준다. 왕과 대신은 반군의 물밀 듯 내려오는 기세에 눌려 궁궐을 버리고 공주로 몽진을 떠난다. 백성의 삶은 아랑곳없다, 자신들만 살면 되는 것이라는 비겁과 이기심과 무책임이 국가 지배계층의 태도였다. 이렇다 할 저항 없이 무혈 입성한 이괄의 교만 역시 자멸의 길을 걷는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면서 22일 만에 돌아 온 왕과 대신들의 행태는 정말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오히려 국경지대의 수비군은 물론 모든 군사의 조련을 전면 금지하고, 기찰(譏察)을 강화하며, 고작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경호군을 대폭 증가시키고는, 생활터전을 벗어나지 못했던 백성들에게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의심으로 무참히 도륙하는 짓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망각한 채 무고한 사람들의 안위를 틀어막았다. 오늘의 현실과 오버랩되며 기시감에 전율하게 된다. 어찌 권력의 하는 짓이 이렇게 동일한 것인지. 무책임과 이기심!, 이 두 단어는 인조정권 내내, 아니 오늘의 한국 사회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양상을 보일 터이다.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는 족속들. 바로 이 족속들에 내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에 수치감이 몰려온다.

 

게다가 친명배금이라는 주변정세를 헤아리지 못하는 외교적 무지와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명 황제에 책봉을 애걸함으로써 명이 보낸 책봉사에 의해 나라 곳간이 거덜나는 실상은 차마 읽어나가는 것이 부끄럽기조차 하다. 인조 3162667일자 승정원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물건 모두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은과 삼은 바닥이 났습니다. 이번 천사(주청사)의 행렬은 전에 없던 변으로...”

 

국가 재정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공신들을 모아 회맹연을 열어 인조와 공신들은 권력의 영속을 자축한다. 그리곤 다시 회맹 뒤에는 분축연을 반드시 여는 것이 관례라며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고 수일에 걸친 잔치를 강행했다니 공감능력 상실, 탐욕스러움, 권력의 도취, 무책임성이 국가의 중심을 채우고 있었다는 말이라 하겠다. 백성이 국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당대와 오늘의 사정은 다르다. 민중이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를 외면하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의의 결과가 오롯이 참담함으로 돌아온다, 오늘 우리 민중은 권력을 향해 그릇됨을 지적할 수 있다.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인민들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현실이다.

 

조선을 둘러싼 주변 정세의 거대한 변화가 몰아치고 있는 시대였다. 인조와 그의 봉신들은 권력의 탐닉에 빠져 소위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는데 관심이 없었다. 오직 명에 대한 사대에 매달린 어리석음은 거대해지는 후금을 공략하는 전쟁에 13,000의 조선군을 파병하기에 이르고, 살아 돌아온 이는 2,700에 불과했다, 이것이 후금()의 조선 침략 명분이 되는데, 1627년의 정묘호란이다.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치닫는 적군에 놀라 왕과 대신들은 또 다시 강화도로 도주한다. 이 전쟁이 내정과 길어진 보급로 등의 문제를 인지한 후금의 사정이 아니었다면 백성의 고통은 정말 끔찍한 사정에 놓였을 것이다. 훈련된 군대도, 위난 정보를 전할 통신체제(봉수제), 그 어느 것도 외세의 침입에 대응할 것이 없었음이다.

 

권력이 자기 안위를 위해 국가 존립 기반을 망가뜨리는 이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결국 주화파와 척화파의 명분 싸움이 시작되는데, 이는 후일 병자호란에서 판박이처럼 반복된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현실임에도 백성의 안위에는 눈을 돌린 채 명나라를 배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척화파와 백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강화하여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화파의 아무런 실익도 없는 고담준론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쟁(政爭)이고 당파싸움에 몰두하는 것이다. 백성의 삶의 토대를 희생시키며 벌이는 권력 싸움, 바로 오늘에도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추악한 정쟁의 동태(同態)이다

 


병자호란에서 우리가 해독해야 할 것들

   - 1636년 남한산성의 그날

 

1636128일 청의 선봉군이 압록강을 넘어 다시금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은 1627년에 청군 앞에서 약조한 굴종의 맹서인 정묘약조의 위반을 구실로 한 것이다. 조선이 명에 붙어 배신했다는 명분이다. 청군 침입의 치계를 129일 조정에 보낸 것이 1212일 도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봉수제가 작동하지 않아 파발에 의존해야 했으며, 1213일에는 이미 적군이 안주에 이르렀고, 14일에는 개성을 통과하여 한양의 목전에 도달했다. 강화도로 몽진을 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급하게 왕과 대신들은 입보처(立保處)를 남한산성으로 바꾸고는 황급히 대궐을 버리고 또 도주했다. 인조와 대신들의 세 번째 궁궐을 버린 도망이다.

 

남한산성에 들어앉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인조는 각 도의 감사와 병사 및 경기 열읍의 군대를 선발해서 적을 치게 하라라는 교지를 내린다. 즉 임금을 지키는 근왕군(勤王軍)을 결성해서 청군과 대적하여 자신을 구하라는 명령이다. 제일 먼저 응답하여 출동한 곳이 강원도 춘천방어사 권정길이었던 모양이다. 1,000명의 군사로 청군과 대결하였으나 전멸하였으며, 경상좌도, 전라도 등 속속히 출전하지만 패배한다. 여기서 다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이들 패배에는 지휘관의 무능과 비겁함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가장 먼저 도주하고, 선전(善戰)하는 동료 장수를 이간질하거나,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작태들이 난무한다.

 

우리 역사상 3대 패전의 하나인 수만의 군사가 전멸한 쌍령전투가 바로 병자호란에서 있었던 비극이다. 전술과 전략에 대한 무지, 시종일관 당파 간 불신, 무능한 지휘자의 비숙련 직관 등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결합된 필패의 총체이다. ()과의 화친여부를 놓고 주화파와 척화파의 격돌은 재연되는데, 척화파의 좌장인 사대주의자 김상헌은 화친 주장자들을 모두 역적으로 몬다. 주화파의 좌장격인 최명길은 오랑캐의 말 발굽아래 어육(魚肉)이 되어가고 있는 죄 없는 백성은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정치권력이 자기 권력과 재화에 탐닉할 때, 그리고 백성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정치사회를 정쟁의 분열로 내몰 때, 국가와 백성의 삶은 필연코 황폐해진다. 정묘호란에서 당면했던 국방과 경제력에 대한 증강은 10년이 지난 병자년에도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거듭 반복되는 국난에도 이들은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었다.

 

청 황제 홍타이지를 향해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삼가 대청국 황제께 글월을 올립니다.”라며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하는 이 수치의 역사를 인조 응당의 몫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대신이라는 자들, 고작 자신과 자기 식솔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자들이 권력을 지키고 있을 때, 민중은 어떤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가의 충격적 장면이다. 사실 이 잘 알려진 수모의 한 순간보다 더욱 주목하게 되는 사건이 있다. 화친 조건에 앞서 청이 요구하는 것들이 있는데, 왕제와 대신을 인질로 먼저 자신들에게 인도하라 했을 때, 이들은 합심하여 자신들의 교활성을 뽐내며 가짜 인물들을 보냈다가 들통나는 것이고, 이는 더욱 강화된 조건을 야기하여 더 커다란 손실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왕과 고관대작인 이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형제, 자식에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하면서도, 백성의 목숨은 언제라도 내어주어도 된다는 생각, 게다가 임기응변이 통하리라 생각했다는 그 우매함과 교활함이다. 이러한 태도가 당시 지배권력의 일반적인 믿음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얼마나 세상의 이치에 어두웠던가를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당대 관료들의 저열한 양식의 형태가 빚은 비극으로서 두드러지는 사건은 강화도 함락에 관한 기록들이다. 간신 김류는 자신의 식솔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빈 및 세손들의 피난처인 강화도의 검찰사로 아들 김경징을 발탁하여 보내는 것이다. 전시에 부여된 지역 총책임자의 감투이다. 김경징은 강화도를 완벽한 은둔처로 여기고 술판을 벌이며, 추궁하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가 체찰사이고 내가 검찰사다. 내가 술판을 벌이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어째 요즘 안하무인의 국회의원과 그 자식을 빼 닮았지 않은가? 청군이 보이자 강화유수 장신동과 함께 산 속으로 제일 먼저 도주하고, 고려 최씨 정권이 38년간 항전하였던 난공불락의 강화를 반나절만에 적에게 내주었다. 지휘자들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의 전형이다.

 

당시 사관(史官)은 김류와 김경징 부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단다. 김류는 사랑에 가리워 아들 김경징의 나쁜 점을 몰랐으나....탐욕과 교만을 일삼으며...한낱 광동(狂童)일 뿐이었다...김류는 부귀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또 제 아들을 죽였다.” 백성들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떠한 안전 막도 없이 죽어 가는데, 대신과 그 가솔들은 여전히 흥청대고 있었으며, 성안에 둘러앉아 고작 술사의 점괘에 의존하여 전투 여부를 결정하였다는 그 몽매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청이 항복조건을 작성해서 보내 온 조유문이 조선이 칭하는 화친조약이다. 즉 청이 조선에 내리는 명령서이자 항복문서일 뿐이다. 이것을 조선의 국왕이 청 황제 앞에서 낭독함으로써 전쟁은 종료되었다. ‘정축조약이란 말처럼 기만적인 명칭도 없을 것이다. 명목상 조약인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후(戰後) 후유증들

   - 백성들의 지속되는 고통과 성찰(省察)없는 지배계급의 양태들

 

청은 척화파 대신을 자신들에게 보낼 것을 명령하고, 세자와 그들의 노비로 삼을 수많은 조선 백성을 이끌고 퇴각한다. 척화파 대신(大臣)들을 대신(代身)하여 청에 끌려가 처형된 오늘날 삼학사로 불리며 칭송되는 인물들은 실제 대신들이 아니었다. 김상헌, 김류, 정온 등 대신들은 슬그머니 제외되고 홍익한, 윤집, 오달제 3인이 희생자가 되었다. 그들은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심과 명에 대한 사대를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이 과연 기릴 인물들일까? 이들이 백성의 신음을 들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겠지만 척화파와 주화파의 좌장인 김상헌과 최명길이 모두 청에 소환되어 감금되는 사건이 있다. 김상헌이야 척화파이기에 청을 부인하는 속국의 인물에게 죄를 묻는 건 강자의 권리일 수 있다. 그런데 주화파의 거두인 최명길이 호출되는 것은 여전히 지배계급 간의 권력 싸움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다. 조선이 청과 강화를 한 것은 종묘사직을 보존키 위한 것이었을 뿐 본심이 아니었다.”는 명()으로 보내는 외교문서를 이계라는 인물이 청()에 밀고함으로써 끌려갔다는 점이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타자를 낭떠러지로 미는 것, 이것이 저들 지배계급의 성찰 없는 일관된 작태였다.

 

이 국가적 수치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단어를 남겼는데, 화냥년과 호로(胡虜)새끼라는 욕설에 가까운 악질적 언어다. 이 말에는 우리 선조들의 슬픔과 한이 담겨있다. 청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피로인이라 불렀으며, 속환되어 청에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당대의 세계는 이들을 매몰차게 내쳤다. 특히 여성들은 오랑캐 청인들과 정을 나눴다고 가문을 들먹이며 죽음으로 내몰고, 자결이 강요되었다. 그네들이 후일 화냥년이란 말로 바뀐 환향(還鄕)녀다. 그리고 그네들이 출산한 아이를 일러 호로새끼라며 멸시, 배척했다.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필연적이었겠지만 이들을 사회적 일원으로 보듬지 못하고 내치는 데에는 역시 사대부들의 이기심과 냉혹함이 작동했다.

 

전후의 공과(功過)처리 문제라는 관점에서 아주 중요하게 이해된 부분이 있는데, 23,000병력을 가지고 있던 황해도 및 평안도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이 삼전도 굴욕을 치룰 때까지 오늘날 가평군 설악에 있는 미원이라는 곳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대소신료(大小臣僚)의 처벌 요구가 잇따르는데, 위급한 상황을 외면하고, 그 어떤 구제의 행위도 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율에 따른 처벌은 정당한 요구였을 것이다. 적이 쳐들어왔는데, 군대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이적(利敵)행위라 할 수 있다.

 

인조는 오히려 이들을 호위대장, 병조판서, 좌의정까지 자리를 내주며 곁에 두었다. 국가를 배신한 이적 행위자가 버젓이 국가 최고위 관료에 임명된다면 이것을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 또한 백성들은 물론 그 밖의 관료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될 것인가? 국가에 대한 이적 행위가 오히려 존중되는 세계라면 어느 누가 질서와 윤리, 법을 존중하겠는가? 전쟁 후, 조선의 사회상이 얼마나 무질서와 광기에 젖어있었는가의 반증일 것이다. 여기에 백성이, 정의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이처럼 군주의 패덕함은 8년에 걸친 이역의 땅인 청의 볼모가 되었던 소현세자의 귀국과 그의 죽음처럼 당시 국정의 혼탁함과 맞물려 뚜렷한 상징적 사건을 낳는다. 인조실록에도 인조가 세자의 귀국을 원치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고 아들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킬 것이라는 의혹에서 비롯된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지병으로 산증을 앓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심과 냉대는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죽음에 대한 연구들이 다수 있는 모양인데, 병을 잘못 이해하여 치료하는 바람에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저자는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던 진언군 아내의 증언에 더 힘을 싣는다. 옴 몸이 전부 검은 빛이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물론 이 모호한 기록만으로 독살을 단정할 수는 없다.

 

인조의 총비(寵妃)인 소용 조씨의 모친과 염문을 일으키던 어의(御醫) 이형익이 한 말이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상이) 전교하기를, 침을 맞을 때 침의 2인만 입시하고 여러 어의는 모두 세자궁에 나아가 대령하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좋은 독살 환경을 만들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평소 세자 부부를 무함(誣陷)하기 일쑤였던 조소용이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형익에게 소현세자의 독살을 사주했으리라는 추정이다. 게다가 세자의 사후 묘호의 등급도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비에게 주어지던 능(), 혹은 그보다 낮은 원()을 물리치고 묘()로 명령했다는 것도 독살에 무게를 싣게 한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게 된 강빈은 조소용의 간계에 의해 사사되었으며, 그의 세 자식들도 제주에 유배되어 둘은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사망하였다. 조선의 대표적 혼군(混君)인 인조의 사망이후 적통인 소현세자의 생존한 아들을 배척하고 즉위한 효종 또한 적통성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강빈의 옥사를 거론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 진실을 지우려 한 효종의 비겁함에서 끈질긴 불의의 계승을 읽게 된다. 탐욕과 간계와 비굴, 비겁과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광기가 빚어낸 17세기 이 땅의 역사는 수치와 비극의 역사라 해도 결코 지나친 이해가 아닐 것이다.

 

맺는 말


오늘은 17세기 절대권력을 지닌 왕이 지배하는 세상도 아니며, 형식적이든 외형적이든 지배 권력에 진입하는 계층에 제한이 주어진 세상도 아닌,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권리인 체제이다. 혼군의 무능과 무책임은 국민이 지탄하고 시정을 촉구할 수 있으며, 자기 이익에 탐닉하며 국민 삶의 건강성을 훼손하는 권력은 끌어내릴 수 있다. 이처럼 반복되는 불의로 그득하고 부조리한 양상은 이제 우리들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 이것이 역사를 읽는 까닭일 것이다.

 

이 책은 지배 엘리트로 자처하는 인간들의 절대 사회가 당연했던 것으로 만들어 냈던 권력관계의 충돌을 배제하고 외면함으로써 공평하게 정리한 따위의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의 자료를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선택했고 분류하였는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진실이 좌초해 있는 사료들의 베일을 찢고 앎의 불투명을 해쳐내어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여준. 왜곡과 진실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역사가가 어떻게 걸어내야 하는지, 이를 통해 현재의 삶의 현상들의 관계를 이해케 하는 노작(勞作)이라 하겠다. 병자호란에 대한 이 역사평설은 전쟁이란 참화를 온통 몸으로 겪어내야만 했던 백성들의 흥건한 피() 위에서 풍악을 울려대는 권력의 파렴치에 대한 규명이며, 해독이다. 역사의 진실을 일그러뜨리고 더럽히면서 관련 사실을 기만적으로 이용하려는 인간들이 나라를 혼돈의 지경으로 몰아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더욱 우리들에게 역사의 이해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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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믿음을 사로잡은 문장을 요즘 빈번하게 떠올리게 되는데, 현시(顯示)적 욕망에만 매달리는 가족주의 근간의 위기를 지적하는 인문학자 고미숙의 그 끔찍한 우라질 계획을 버려라!”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표시하곤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는 취지이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란, 즉 계획이란 30,40평형 아파트를 사고, 수입차를 타야하며, 소위 일류대학이란 곳을 나와야하고....- 한글의 이 자는 醫師, 判事, 辯護士와 같이 한자로는 모두 다르다 - 자를 붙인 전문직업 등등의 현시적, 물질적 욕망의 추구에 집중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의 일부라도 충족되지 못하면 박탈감에 허우적대고, 이름뿐인 스위트 홈은 이내 박살나고 만다. 이러한 양상을 바라보면서 바로 이것, 계획이란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극단의 양극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 생각이란 개개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가에 대한 것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물질과 기억2장에서 인간의 기억을 습관기억과 이미지기억으로 구분하고, 주의 깊은 식별(la reconnaissance attentive)'이라는 처음 본 대상이나 분석이 필요한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 참조해야 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 용어 개별을 설명하는 사치는 배제하고 습관기억만 짧게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습관기억이라는 것은 살고 있는 동네 골목길을 걷는다든가, 책을 읽다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밑줄을 긋기 위해 연필을 쥐는 것과 같은 어떤 의지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억이다. 개념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이것과 유사한 심리학 표현이라면 직관(直觀) 정도로 말해도 될 것 같다. 이것은 철저하게 평소 사람들의 관심이 준비된 반응행동, 즉 삶의 즉각적 유용성을 위한 기억이다. 습관으로 신체에 체화된, 익숙하여 거의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이다.

 

그런데 자신이 잘 알고 있지 못하거나 새로운 것은 이 기억만으로 반응 할 수 없다. 즉 식별하고 파악하며 해석하여야 어떤 반응을 할 수 있다. 그저 침묵 할 것인지, 어떤 선택된 말이나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대중 언어로 말하자면 깊이 있는 사유와 많은 참고 기록들, 문헌을 참고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문제에 즉각 반응한다면 그것은 습관기억이라는 익숙한 것, 즉 자신이 아는 그 편협하고 알량한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것이 올바를 턱이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행위 한다.

 

참고 문헌을 찾아보아야겠다는 결정도 사유이고, 그 결과 이를 실천하는 것도 사유의 결과다. 그리고 나서야 새롭거나 알지 못하는 대상과 문제에 대해 최종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유와 사유의 실천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요한다. 주의깊은 식별이란 습관기억의 유용성을 포기하고 내면의 심층에 있는 과거의 이미지 기억들을 층층이 소환하여 대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사용하지 않았던 부가적 에너지와 시간의 집중적 소비를 요구한다. 한마디로 부지런해야 하고, 능동적 행위가 요구된다.

 

나는 이 이미지 기억을 소환하여 층층이 대조 분석하는 판별이라는 사유의 과정을 하지 않고 습관 기억에 의존해 행동하고 말을 뱉어내는 것을 지적 게으름이라고 부르곤 한다. 또한 그것을 무지와 무관심이라고 싸잡아 부르기도 한다. 신경과학자 나타샤 모트(Natasha Mott)’가 대뇌 반구의 활성화 연구를 통해 주장한 좌파와 우파의 뇌가 공명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시하듯, 진보와 보수주의자 행위의 구조적 차이의 근저에 있는 신경적 과정의 결과는 습관기억, 직관에 의해 끌려다니는 불온한 세계의 이유를 보여준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연구저술도 있다.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이 저술에서 시종일관 직관이 지닌 수많은 오류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은 속단과 어림짐작, 편향, 진실호도, 더 쉽게 문제찾기, 의심의 거절 등인지적 압박감을 회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생각의 게으름이다. 사실 이 입증을 위한 수많은 연구 사례는 어쩌면 불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앙리 베르그손이 100년 전에 발표했던 생각들이다.

 

장황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잠들고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습관기억에 의한 행위만이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친일 행위에서부터 제반 경제, 노동 정책, 사회복지 정책 등 전() 부문에 걸쳐 황당한 퇴행을 일삼는 것과, 이에 의문을 가지지 못하는 대중 행태의 근저를 이루는 인식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일례를 들어보면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의한 일본의 배상 문제는 외교적 갈등으로 대두 되었었다. 당시 국내 기업의 출연을 통해 배상금을 지급할 줄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 정권은 쉬운 길을 선택했다. 가해자의 반성이나 배상도 없이 피해자가 배상을 결정했다. 이것이 카너먼이 지적한 직관이라는 지적 게으름이 불러온 더 쉽게 문제 찾기의 폐해이다.

 

대중들 또한 이러한 비판과 자기반성을 비켜날 수 없다. 습관기억이 아니라 추가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사유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익숙한, 그 좁아터진 편벽한 앎의 터전으로 이 세계의 무엇을 인식하고 반응하면 그것은 대개 편향이고, 왜곡이며, 진실을 지니지 못한 거짓이라는 점이다. 이제 이 글의 첫머리로 돌아가 생각을 다시 이어가보면, ‘계획을 버리라는 짐짓 과격해 보이는 이 말은 단순히 미래의 삶을 준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현시적 욕망을 따르기 위해 세상 모두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욕망의 에너지를 변환해보라는 것이다. 즉 우리들에게 제시된 강요된 그 익숙한 시대성의 산물에 노예처럼 따르지 말고 당신의 고귀한 생명의 차원에서 삶을 사유하고 실천하라는 요구의 조언이다.

 

여기서 다시금 귀에 거슬릴 정도로, 그리고 눈이 시릴 만큼 노출된 공생이나 연대의 언어를 반복하지 않겠다. 서로 힘차게 응원해 줄 수 있는 관계, 타자에 대한 경계와 단절이라는 부정성이 아닌 생명의 플랫폼이 되는 길로의 전환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그것의 밑바닥에 사유라는 과정, 즉 수고스럽더라도 조금 더 생명 에너지의 사치를 부려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하지 않던 일이어서 불편하고 낯설더라도 직관이라는 그 왜소한 생각의 불완전함, 혐오와 적대를 만들어내는 불온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진영에서만 활성화되는 좌뇌와 우뇌의 그 단절, 습관기억이라는 익숙함에만 머물려는 게으름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둘 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공멸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 선지 고작 몇 년에 불과하다. 이 기회를 다시 나락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적 게으름이 눈앞의 유용성을 해치는 것이 당장 보이지는 않겠지만, 미래가 손상되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계획에 매달리는 것, 당장의 편익에 몰두하는 삶, 타자의 의지를 속단하는 즉각적 반응이 몰고 오는 장기적 폐해는 분명 숙고하는 삶의 태도가 바꾸어 줄 것이라 믿는다. 바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주의깊은 식별, 깊은 사유가 필요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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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심리학의 명과 암 스켑틱 SKEPTIC 33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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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취약성, 바로 이 무지를 공략하여 부, 권위, 명예, 세력 등등을 취하는 무수한 행태들로 가득하다. 특히 미혹되기에 가장 유리한 자리에 있는 것이 인간 이성의 응결체라 여겨지는 과학이라는 외피를 걸치고 출현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적 연구 결과라고 주장하는 지식들이 실제로 과학적이지 않은 전제를 가정하기 일쑤며, 더구나 학문적 또는 사회문화적 권위를 배경으로 실행된다는 점에서 그 기만이나, 거짓, 위선, 오류가 은폐되고 진실이라며 세상을 호도하곤 한다.

 

스켑틱(Skeptic) 33(2023.3.10.출간)호는 자기계발 심리학의 명과 암이라는 커버 스토리를 담고, 미국 모방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 사회의 자기계발열풍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살펴보게 한다. 그리고 낙태 반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요즘 제기되고 있는 선거제도의 중대선거구제로의 변환을 통한 정치개혁 탐색, 침술, 즉 한의학에 대한 양학의 오리엔탈리즘 비판, 민족주의에 대한 제고 등, 논쟁적인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사회를 장악하다시피하고 있는 자기계발 심리학에 대한 양상부터 시작해보자.

 

서점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는 자기계발서들은 저마다의 심리학 분야의 권위로서 자신들의 명성이나 물질적 성공을 내세우며 개인과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과장한다. 하버드나 예일대 심리학 교수라는 신분표지나, 산업부문을 대표하는 유명기업 인사, 또는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이 말하는 것, 특히 테드(TED)강연이나 대중 매체에 출연하여 떠들어대지만, 실제 유의미성도 없거나 입증 불가능하며, 심리적 변화의 효과도 없을뿐더러 행동변화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이들 자기계발의 성공 경로를 얘기하는 것들은 사유하지 않는 직관적인 인간들을 용이하게 파고든다.

 

어느 누가 보아도 실소가 터져 나오는 자기계발서의 주장들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는 것을 그 소비자의 우둔함을 탓하기에 앞서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재화욕, 권력욕, 명예욕부터 비난해야 할 것 같다. 페미니즘에 결탁하여 파워포징(power posing)'이라는 주체성 강화법이 한 때 유행했다. 등을 꼿꼿이 펴고 몸을 반듯이 세우라, 이 자세를 하면 주변 공간을 장악하게 되고 자신감이 증가하며, 재정적 위험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높아져 부의 축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캠퍼스의 심리학 교수인 데이나 카니의 이 주장은 실험 통계조작을 통한 거짓이었음이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아무런 상관성도 유의미성도 지니지 못하는 허튼소리였다는 것이다. 비판이 계속되자 카니는 재직하는 학교의 웹페이지에 나는 파워포즈효과가 진짜라고 믿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다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긍정의 심리학의 양상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인 펜실베이니아대 마틴 샐리그먼이 개발한 개입 프로그램들은 실제 증거보다 과장된 주장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 감정을 늘리면...성격의 강점, 관계, 의미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 교수들로 구성된 평가회의에서는 이실직고했다. 긍정 심리학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우울감과 불안증세, 성격의 강점을 강화하지 못했고...”, 더구나 미국심리학회 회장이라는 명예까지 두른 사람이니 그 권위에 편승한 재화에 대한 욕심이외에는 아무런 진실도 없는 기만이었다. 여기에 휘말려 든 선의의 독자들이나 소비자들은 헛 돈을 쓴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샐리그먼은 300만 달러의 연구비를 받아 챙겼다는 것이다. 그리곤 완결된 보고서로 발표된 적도 없다고 한다. 이것이 자기계발 심리학의 현실이다.

 

아마 한국에서도 대유행한 그릿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끈질긴 근성을 지닌 사람들의 성공담으로 가득한 앤절라 더크워스의 이 책은 입맛에 맞는 사례만 수집하고”, “그릿을 지니고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례는 제외하는 식으로 정리된 책이었음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성공을 증진시키는 효율적이고 근거 있는 방법들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의 실천이 결코 쉽지 않기에 모든 사람들이 시행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시간관리와 집중하고 훌륭한 학습방법의 습관을 익히는 것인데, 이 습관화야말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름길이란 없다. 쉽고 빠른 길을 찾는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자기계발서는 대개가 부질없는 사실 뿐임을 증명한다. 넛지는 다를까? 바람직한 행동을 위한 환경 조성이라는 행동 전환 전략을 말하는데, 넛지에 주력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오히려 이 인식은 넛지를 실행해도 성취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결과적으로 실망감과 적개심을 낳기까지 한다고 한다. 더구나 개인이 변화시킬 수 없는 제도적 문제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며, 이를 간과함으로써 실패를 더욱 크게 확장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뉴욕의과대학 신경학 교수이자, 뉴욕 페이스대 심리학 교수인 테런스 하인스자기계발 심리학 다시보기의 이 비판적 논문도 회의적 시각으로 읽어야겠지만, 오늘 우리사회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자기계발의 유행은 분명 반성적 관점을 필요로 하는 현상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히 흥미롭게 읽은 글은 한의사 김나희 박사가 가정의학의()인 해리엇 홀이 침술의 신화에 침을 놓다라는 논제(論題)하에 한의학을 비판한 글에 대해 다시 비판한 침술의 신화에 침을 놓다에 대한 잠언이다. 특히 이 글에 주목하게 된 것은 이번 호에 해리엇 홀의 낙태 반대론자들을 비판하는 글이 게재되었기 때문인데, 그의 논문을 읽을 때 비판적 시선을 놓쳤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이 잡지가 스켑틱(skeptic; 회의적 비판)인 이유를 스스로 실천하는 글인 것 같아 더욱 흡족하게 읽었다.

 

김나희 한의사는 해리엇 홀의 글은 여러 겹의 잘못된 전제위에 쌓아올린 복합질문의 오류에 해당한다, 조목조목 진실을 전개하고 있는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전제하고 비난하는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에서부터,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마치 아는 양 사실을 호도하는 무지에의 호소 오류’, 성급한 일반화, 개념 혼합의 오류로 점철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양 폄훼로 꽉 들어찬 편향된 글임을 논박하고 있다. 서로 다른 관점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양상은 비단 동서 의학의 논의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권위에 서서 비전문 분야도 자신이 모두 아는 양 떠들어대는 것이 오늘 한국 사회의 작태인 것도 아마 이러한 현상과 동일한 것이라 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실체에 대한 심리학적 개념어도 있다. 자신의 지식을 과대평가하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 Kruger Effect)’라는 것인데, 이것은 어떤 정책이나 프로그램의 결과를 커다란 실패로 이끌어 막대한 사회적 손실을 낳는 주범이 된다. 의사결정자가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이 없음에도 자신이 모두 알고 있다고 하는 자기과신에서 비롯되는 '비숙련 직관(unskilled intuition)'이 우리 사회에 너무 심하게 부착되어 있는 듯하다

 

아무튼 세계화와 프로토피아(protopia)에 대한 사유에서부터 동물의 마음, 성 불평등의 편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주제의 논의가 풍성하게 시의성을 띠고 독자의 비판적 지성을 자극한다.   오믈렛을 만들려면 달걀을 깨야한다.”는 레닌의 말처럼 당위적 진실 같은 말도 과연 그럴까하고 우리는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사는 현실의 세계에는 이 말이 결코 진실이 아님이 곧 드러나기 때문이다.

 

4,500만 명의 인민을 죽이며 대약진의 개혁정책을 펼쳤던 마오쩌둥은 인간을 달걀처럼 엄청나게 깨뜨렸지만 그것은 오믈렛이라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대재앙이었음을 오늘의 우리들은 안다. 달걀을 함부로 깨부순다고 오믈렛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 역사적 진실은 사람들에게 왜 회의적 비판의 시선, 비판 능력이 요구되는 것인지를 입증하는 귀중한 사례가 될 것이다. 오늘 한국사회에 펼쳐지고 있는 극단적인 이념적 양극화는 실로 마음을 어둡게 한다


이러한 현실 때문인지,   좌파와 우파의 뇌는 공명하지 않는다는 신경과학자 나타샤 모드의 짧은 연구 결과는 내게 직관에 의존하는 인간과 사유를 하는 인간의 그 철저한 양극성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물론 이조차도 비판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3월도 이렇게 작은 앎의 조각을 거두며 세상의 이해에 미미한 한 걸음을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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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3 소설 보다
강보라.김나현.예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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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호에 수록된 작품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감흥으로 다가왔다고 얘기해야겠다. 이것은 자기 믿음의 변화란 외부 세계를 자기 내면으로 불러들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수용의 과정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인간의 완고함에 대한 발견이다. 내 오랜 방어적인 인식이 이젠 찢어지고 벌어져 외부가 들어와 자리 잡고 섞이는 것에 제법 너그러워진 탓도 있을 것이다.

 

자기 계급이 가진 특권이라는 선민의식을 자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매일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것들이 자기 내면의 의도와 얼마나 무관하게 벌어지는지, 또한 자기 내부 밖의 모든 세계에 대한 이해란 것이 얼마나 자기 편의적인지를 확인하는 것, 이러한 사태들을 마주하게 되고 이것들이 빚어내는 고통의 원인을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만큼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이야기들이라 할 것 같다. 너절한 시작 말은 거두고 작품의 이야기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1) 수록된 순서를 조금 바꿔, 김나현 작가의 단편 오늘 할 일로 감상의 글을 시작하련다. 제목이 말하듯 다음 날 할 일을 하루 전날 식탁에 마주앉아 한 쌍의 맞벌이 신혼부부는 각자의 다이어리에 계획을 쓴다. 그 계획이라야 별 것 아닌 출근할 때 책읽기. 바닐라라테 마시는 것, 일할 업체를 확정하는 것처럼 단 세 줄을 넘지 않는 지극히 뻔한 평범한 일상이다. 자신들의 규모에 버거운 대출을 받아 아파트에 입주한 것은 둘이 번다.”는 믿음에서 저지른 일이고, 그 믿음으로 결혼을 했다.

 

이야기는 초반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하는데, 남편 선일이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이다. 갭이어, 이 단어의 자신만만함, 마치 계획에 다가가기 위한 준비의 어떤 완전성을 생각게 하지만, 이처럼 위선적인 단어도 없을 것 같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 충전하는 시간이란 사실 언제든 시작하기만 되는 그런 조건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인 추상의 시간일 것이다. 선일의 행위에 대해 화자인 는 술기운을 빌어 사기 결혼이라고 어그러진 결혼 생활에 항의한다.

 

는 출근할 때, 책을 읽지도 못하며, 그나마 다행스럽게 옆자리 동료가 사다준 바닐라라테를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곤 촉박한 일정과 빠듯한 예산으로 포스터 발주조차 하지 못하며 일할 업체를 확정짓지도 못한다. 선일역시 자신이 주장해서 적는 오늘 할 일의 계획이지만, 갭이어라는 텅 빈 시간을 채울 일도 어긋나기만 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의 빗나가는 계획을 보면서 인문학자 고미숙의 말을 떠올린다. 이 끔찍한 계획을 버려!”, 삶의 울타리를 꽁꽁 묶어 놓는 우라질 계획을 버리라는 목소리를.

 

주인공 의 상사로 등장하는 게으른듯하지만 어느새 능청스럽게 일을 해내는 백 팀장이야말로 선일과 가 체득하여야 할 삶의 하나의 요체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인물은 외도로 이혼당하고 모텔 방을 거처로 외로운 삶을 전전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는 생명차원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 줄 줄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다이어리에 두서없이 할 일을 욱여넣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백지로 남길 수도 있지만, 무계획의 삶을 살아내는 것, 선일에게 요구되는 건 두 사람이 이룬 가족의 관계를 물질적 성취를 향한 달음질이 아니라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아무에게나 오늘이 괜찮은 것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일 것만 같다.

 

아무튼 김나현의 이 작품은 소박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 문장으로 그야말로 만끽한 소설이라 하야겠다. 피식 피식거리게 하는 웃음 코드들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변화하려할 때마다 부드럽게 얼굴을 펴준다.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소설이다.

 


(2) 강보라 작가의 단편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마흔 줄에 접어 든 예술비평을 직업으로 하는 재아라는 인물이 발리 우붓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푸는 정경으로 시작된다. 이 인물은 자신의 눈과 귀에 들어 온 게스트하우스의 풍경을 스캔하며 싸구려 향냄새와 자신의 기억 속 환경과 다름을 감지하며 그냥 호텔로 갔어야 했다.”고 자신의 결정을 자책한다.

 

이 시작 문장에서 이미 자신의 계급적 취향이 예전과는 다른 것이며, 사실혼 관계에 있는 현오란 인물의 인정에 좋은 기분을 느끼는,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취향과 관점으로 정해진 길을 걷듯 편안하게 예술계에 진입한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에 안착한 일종의 문화 엘리트 계급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여성임을 예고한다. 이 인물이 유명 요가 구루가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한 며칠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기간, 사람들과 내키지 않는 어울림의 과정에서 무쌍하게 겪는 내면의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젊음과 나이듦에 대한 은근한 자격지심이며, 사회적 연결망에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경시와 우월적 감각, 그리고 자기의 계급적 안전에 대한 의식의 확인이다.

 

게스트하우스의 호경이란 젊은 여성의 일탈에 질시의 감정을 갖으며, 그녀가 재아 자신의 신분을 감지하면서 변화된 태도를 보이며 접근하는 것에 경계의 감정을 지닌다. 소설의 표제는 호경이 재아에게 선물한 우붓의 노점상에서 산 손바닥크기의 그림이다. 호경이 맥락없이 건네는 그림 선물에 느낀 불쾌했던 감정이 유명 영화감독의 딸이며 실험예술을 하는 아티스트임을 알게 되자, 이렇게 바뀐다. 누군가 그 작은 모험에 대해 묻는다면 즐거웠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인간은 자기 손아귀에 쥔 편익을 결코 놓지 않으려는 존재이다. 그래서 계급적 특권에 한번 수렴한 인간이 주변의 인간들을 이해하는 것 역시 그 편익이라는 편협성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기 자각을 상실하는 것 같다. 나는 재아가 자기 계급의 불완전성이나 불온함을 온전히 깨달았다고 믿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비교적 오래된 비판의식이다. 새롭지 않은 문제지만 그 안에 자리잡은 허위의식들은 계속 드러내어 해체되어야 할 이 세계의 과제일 것이다.

 

(3) 예소연 작가의 사랑과 결함은 화자인 가 고모인 순정과 함께하며 지닌 애증, 그리고 친구인 에 대한 반감의 그늘에 있는 억압된 진심, 고모와 엄마 미애가 지녔을 법한 또 다른 애증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는 언뜻 뜬금없는 소재인 로봇청소기가 등장하는데, 그 기발한 상징성에 주목하게 한다. 내겐 소설 속 열연하는 수와 고모 희정과 엄마 미애를 넘어서는, 이들 모두를 담아낸 표상처럼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소원한 관계로 멀어졌다고 여기는 수에게서 줄게 있다는 문자가 수신됨을 계기로, ‘와 수와 고모와 미애의 사연들이 서로 엮여 사랑과 그 결점들의 자취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다. ‘엄마에게 선물한 식기세척기로 인해 야기된 고모의 질투를 삭이기 위해 엉겁결에 고모에게 선물한 것이 로봇 청소기다. 이 로봇 청소기가 수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다시금 에게 돌아 온 것인데, 바로 이 순환의 역사를 온 몸에 새긴 실체가 로봇 청소기인 것 같다.

 

그것은 외롭게 암 투병을 하던 고모의 방에서 그녀의 삶의 현실을 고스란히 목격한 존재이며, 이제는 벽을 향해 무섭게 반복하여 돌진하는 고장 난 청소기이기도 하다. 수가 돌려주며 청소기가 그저 장애물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딪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을 흘려버리고 자신의 집에서 작동시켰을 때 는 그 무서운 돌진을 보고 달려가 로봇 청소기를 가슴에 안아든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 스위치를 단순히 끄는 행동이 아니라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인데, 이 장면은 왠지 가슴이 뭉클한 감각을 일으킨다.

 

미움, 저주, 연민, 사랑, 그리고 고통과 우울, 이 온갖 감정이 충돌하는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이 겪는 이 한편의 풍속화는 아마도 그 그림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독자 저마다의 동일시가 가져다주는 위안의 창작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선 내 자신을 껴안아 주어야겠다. 그리고 말을 잊은 지 제법 오래된 가족들을 안아보아야 할 것 같다. 삶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잃고 사는 것만 같다.

 

세 편의 작품들, 어렴풋이나마 빈약한 자아의 인식을 하게 되는 문화 권력에 심취한 인물,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학습을 내면화하고 생에 대한 시선을 변환시키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삶의 표준, 혹은 정상성이란 것이 망상임을, 경계를 표류하는 존재임을 흐릿하게나마 알아가며, 세상의 이해를 위한 작은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인간의 모습들이다. 어느 소설이 이러한 얘기들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마는, 여기 수록된 김나현, 강보라, 예소연의 작품들은 딱딱하게 굳은 독자 내면의 벽을 허물어뜨릴 만큼 밀고 들어오는 힘이 강한 이야기들이었다고 해야겠다


정말 감흥이 잇따르는 그런 작품들이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특히 김나현 작가는 아마도 그녀가 하는 창작의 걸음을 지켜보게 할 것 같다. 내가 지니지 못한 해학의 코드를 지닌 작가, 정말로 오긴 오는 것인가하며 그 주춤거리며 둘러보는 시선에 깃든 마음이 정말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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