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것들의 미학 - 포르노그래피에서 공포 영화까지, 예술 바깥에서의 도발적 사유 서가명강 시리즈 13
이해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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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LIX / 21세기북스 29번째 리뷰] 미학(美學)은 미와 예술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머리속에 떠올리는 '아름다움(beauty)'과는 달리 '미적인 것(the Aesthetics)'에 대한 차원이 다른 영역을 주로 탐구한다고 한다. 허나 비전공자인 나로서는 이게 뭔소린가 싶다. 아름다운 게 '미적'인 것이고, 미적인 것이 '아름다움' 아닌 가 말이다. 그래서 조금 비틀어서 접근해보기로 했다. 이 책의 제목에서 '미학'의 앞에 놓인 낱말부터 접근해보았다. '불온하다'의 반대말로 '건전하다'라는 낱말을 슬며시 놓아본 것이다. 애초에 '불온하다'의 반대말은 '온당하다'이겠지만, '온당하다'의 반대말은 '부당하다'는 낱말이 있으니 적절치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온한 사상'이라는 말이 쓰이니, 이에 반대되는 '건전한 사상'이 적당할 것 같아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본 것이다. 그랬더니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건전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해악을 끼칠 것이 없고 온통 '선한 영향력'만 전파할테니 누가 마다하겠는가 말이다. 근데 한편으로 곱씹어보면 '건전한 세상살이'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심심할 것이란 말이다. 날이면 날마다 그저그런 하루를 보낼 것을 생각하면, 날마다 '똑같은 일상'만 반복되는, 그런 삶을 떠올리면 말이다. 그런데 '불온한 것들'은 우리의 일상을 짜릿하게 해준다. 분명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자꾸 해보고 싶고, 하면 '즐거울 것' 같아서, 또는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누구에게 알려져서도 안 될 일을 몰래 해보는 그런 재미가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그런 '불온한 나날들'을 보내면 필히 후회하게 될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불온한 것들의 미학>이라는 것도 그런 짜릿하고 전율이 느껴지는 철학이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일상적인 것'이 되어선 곤란하겠지만, '철학의 범주' 안에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라는 빈틈을 한 번 파고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모두 4가지다. '위작', '포르노그라피', '나쁜 농담', 그리고 '공포물'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당히 '불온한 것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에서 철학적으로 논해볼 '미적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였다. 학문적 연구에서는 종종 '객관성'을 따지며 일상에서 나타날 도덕적 문제(모럴해저드)조차 너그럽게 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 독자에 불과한 나에겐 '부도덕적인 것들'에 관용과 허용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아무리 '미적 탐구'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부도덕적인 내용에 대해선 용서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명시하고 싶다. 책의 내용에서도 '도덕적 잣대'를 허술하게 들이대는 경향이 보였는데, 그런 경향에 대해 일체 '무관심'으로 대했다는 점도 상기해주길 바란다.

암튼, '위작'부터 살펴보자.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진품'과 '복제품'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위작 논쟁'은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 아니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진품'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재현하는 화가의 재능'을 높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되물으면 어떨까? 아마도 마땅한 대답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진품'과 그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히 재현한 '복제품'을 그려낸 재주 또한 '뛰어난 재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제품'을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로봇'이 그려낸 것이라면 하등 가치가 없다고 폄훼할 것이 분명하다. 아직까지 '예술의 가치'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오늘날의 화가가 진품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재현해내는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뛰어난 재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왜 '위작 논쟁'은 끊임없이 나타나는 걸까?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등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을 모방해서 '진품과 위작을 가리는 시비'가 매번 곤혹스럽게 문제시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논쟁의 귀결은 언제나 '작품의 가격'이 되곤 한다. 만약 '진품'이라면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위작'으로 판명이 되면 가짜를 만들어낸 화가가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시쳇말로 '똥값'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위작 논쟁'을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 한편으로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정당한 이유(?)로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도, 여전히 방문객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은 왜일까? 만약 자신이 '직접' 본 '모나리자'가 진품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소문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까닭만큼은 쉬이 이해가 될 법하다. 바로 '진품'이 훼손될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나리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진품과 큰 차이가 없는 '모나리자'를 관람하면서도 아무도 '위작'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인걸까? 왜 '위작'은 진품에 비해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다음은 '포르노그라피'다. 바로 '예술 vs 외설'이라는 논쟁을 떠올릴 수 있다. 왜 명화속의 벌거벗은 나체는 '예술'이고, 영화속의 벌거벗은 몸은 '외설'이라 평하는가 말이다. 어떤 이는 '성적행위의 유무'를 따지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성적흥분의 유무'를 차이로 내세우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성행위'를 묘사한 예술은 없단 말인가? 글쎄, 예술 '전체'를 다 알지 못하는 문외한인 내가 언뜻 떠올려보아도 남녀의 중요부위(!)가 낯뜨겁게 노출된 예술품들이 적잖히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예술품에는 '포르노그라피'라는 불명예를 들추지 않으면서, <플레이보이>, <허슬러> 등과 같은 '도색잡지'나 하드코어로 분류되는 '야한 동영상'에는 어김없이 '외설'이라는 낙인을 찍느냔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적흥분'을 차이점으로 내세우는 이들이 있는데, '성적흥분'이 왜 나쁜 것인지 합당한 근거를 내세우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아니 '성적흥분'은 예술의 범주에 들어선 안 된다는 기준은 누가 세웠느냔 말이다.

어쩌면 '포르노그라피'에도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의 서사시를 담아내서 관객들을 매혹시키는 무엇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낯뜨거운 성행위를 공공연한 자리에서 선보이는 것이 점잖치 못한 주장이고, 동물의 짝짓기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포르노그라피'를 대중화시켜야 마땅하다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앞서도 '부도덕적인 것'에 대해선 용서치 않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미니스커트'가 허용될 수 없었을 정도로 낯뜨거운 패션이었으나, 지금은 '하의실종'이 버젓이 패션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모자라 '언더붑'과 '시스루'조차 미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있는만큼 언젠가는 '포르노그라피'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겠다.

세 번째는 '질 나쁜 농담'이다. 미국의 한 코미디언이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나, 이 사진 본적 있어. '한식당 메뉴판'에서"라는 유머를 선보였단다. 분명 '웃기는 상황'을 연출한 농담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한국인은 개를 식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았기 때문에 명백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며, 이 농담을 듣고 웃는 사람의 품격조차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만드는 '불편한 농담'이다. 우리는 과연 '어느 선'까지 농담을 허용할 수 있고, 허용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서 그밖의 방송에서조차 '코미디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개인방송'에서도 무분별적인 '개그소재'를 일삼는 방송인들을 향한 지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을 정도다. 한때는 주말 연휴에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으면 평일날 일상적인 대화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왜 이제와서는 '개그(유머)'에 대해 이토록 진지해졌는가 말이다.

바로 '질 나쁜 농담'에 웃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도덕적인 농담'에 웃으면 안 되는 일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과거에는 '바보개그', '허무개그', '자학개그'까지 개그의 소재는 끝이 없었다. 영구와 맹구가 하는 바보짓은 일상의 피로를 풀어주는 활력소가 될 정도였고, 저런 게 왜 웃기는 걸까? 싶을 정도로 '허무한 개그'에도 우리는 박장대소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뚱뚱하고', '못생긴' 개그맨(우먼)들은 오디션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공채'로 채용이 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왜냐면 이들은 '존재, 그 잡채'로 웃음을 몰고다니는 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 하기는~"이라고 말하는 옥동자 캐릭터의 대사는 그 자체로 모순이었고, '자학개그'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촌철살인의 풍자'를 우리는 놓치지 않았었다. 이런 개그 뒤에는 '정치풍자', '세태풍자', 더 나아가 인류 공영을 위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품격 높은 농담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농담'들에 날선 반응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수자들의 인권을 짓밟는 '개그'에 차별금지라는 딱지를 붙였고, 정치적 소신을 말하는 '개그'에 국가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씁쓸한 세태에 웃고 넘어가지는 '유머'에 웃음기 사라지는 정색이 줄을 이었다. 한마디로 점잖치 못하다는 이유로 '유머'에 족쇄를 매단 것이다. 물론 '비도덕적인 농담'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저급한 개그소재로 품격을 잃은 개그프로그램을 되살리자는 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다. 왜 우리는 '웃음'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 되묻는 것뿐이다. 왜 '유머'를 양지로 드러내서 긍정적 효과를 내지 않고 '음지'로 내몰아서 더욱더 저속하게 만들고 마는지 안타까워서 그런다. 이 책에서는 '철학으로 농담을 분석하기'라는 장을 펼쳤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이런 '웃지 못할 세태'가 떠올라 안타까웠다. 부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유머'가 되살아나길 바란다.

마지막으론 '공포물'에 대한 미적 감상을 나열했는데, 솔직히 '느낌'에도 해석이 필요하다는 '감정 이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공포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 아니냔 말이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말고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다. 하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느낌을 가지고 감정을 쏟는 것에 대해 '합리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에는 공감이 가긴 했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합리성'을 따지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까지는 의아할 뿐이란 말이다. 하긴 난 '공포물'을 보아도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토시오는 귀엽고 처녀귀신은 섹시하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미학이라는 '분석철학'을 맛보았다. 물론 철학의 난해함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나름 재밌는 '접근'이었고, 사유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미학(the Aesthetics)'이 이처럼 재밌지는 않겠지만,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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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봐도 머리에 남는 어린이 야구 상식 - 야구의 재미를 제대로 알게 하는 알쏭달쏭 야구의 모든 것 유쾌한 교양 수업
김양희 지음, 나인완 그림 / 블루무스어린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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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LVIII / 블루무스어린이 1번째 리뷰] 스포츠 경기를 재밌게 즐기기 위해서는 '경기 규칙'부터 제대로 익혀야 한다. 그래야 흥미진진한 승부의 맛을 짜릿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모든 스포츠 경기를 통틀어서 가장 복잡한 '경기 규칙'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야구 경기(베이스볼)'다. 그래서 야구 경기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초보 입문서'가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야구는 왜 이렇게 복잡한 규칙을 갖게 되었을까? 그건 다른 스포츠 경기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공격'과 '수비'가 확실히 보장되며 공정하게 한 번씩 주어지는 아주 느슨한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구 한 경기는 평균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연장전이 거듭되면 5시간 이상이 훌쩍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하루에 두 경기가 연속으로 벌어지는 '더블헤더'가 펼쳐지는 날에는 최장 10시간을 넘긴 것이 기록에 남았을 정도란다. 이렇게나 느슨한(?) 경기 진행방식인데도 경기를 뛰는 선수나 그걸 지켜보는 관중들도 손에 땀이 흥건할 정도로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야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일 것이다.

이 책 <대충 봐도 머리에 남는 어린이 야구 상식>은 야구에 흠뻑 빠진 어린 독자들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야구 경기가 낯선 '야구 입문자'에게도 유용한 책이다. 왜냐면 책의 내용이 '야구 상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만 읽어도 웬만한 '야구 중계'가 귀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아주 이해하기 쉽고 친절한 설명이 담겨 있는 알찬 해설집이다. 더불어 상식적인 내용이라고 할만 한 것들은 모두 총망라할 정도로 풍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한국프로야구(KBO)에 관한 내용 뿐만 아니라 미국 메이저리그에 관한 상식적인 내용까지 아울러 설명하고 있어서 '어린이책'이라는 제목답지 않은 전문가적인 내용까지 다루고 있다. 특히, 일본야구에서 널리 알려진 상식까지 통찰하는 설명이 수록되어 있어서 정말 '상식'적인 책이라 소개하는 것이 딱인 책이다.

사실, '야구(野球)'라는 명칭부터 '일본식 한자'에서 비롯된 것이라 '우리식 표현'으로 제대로 바꿔 나가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다. 이제는 '포볼'을 '볼넷'으로, '데드볼'은 '몸에 맞는 공'으로, '직구'는 '속구'로 바꾼 지 한참 되었지만, '들에서 하는 공놀이'라는 뜻의 야구라는 명칭조차 아직 바꾸지 못한 상황이 어처구니 없기는 하다. 왜냐면 미국에서는 'Baseball(베이스(기지)를 차지하는 공놀이)'라고 부르고,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처음 야구가 소개되었는데, 어째서 '일본식 명칭'인 야구라고 쓰고 있느냔 말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명칭'이 일본식으로 정착이 된 채로 한국에서 경기가 치뤄진 탓이 크다. 그래서 우리가 원치 않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야구용어'를 써야만 했었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에는 '우리식'으로 바꿨어도 되지 않았을까? 사실 미국 선교사들이 소개할 초창기에는 '타구(打球)'라고 불렀다고 한다. 방망이로 공을 치면서 하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봉구(棒球)'라고 부르며 '방망이'를 강조해서 불렀으니, 각 나라마다 야구의 특징을 살려 제대로 써왔던 셈이다.

그런데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일본식 용어'를 크게 탈피하지 못했다. 까닭은 한국야구선수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일본야구'에서 비롯된 탓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야구를 경험했던 이들이 '한국야구'의 모태가 되어 실업야구, 고교야구를 거쳐 프로야구를 출범시켰고, 또한 실력이 좋은 선수와 감독, 코치 들도 모두 일본에서 경험을 쌓고 한국으로 건너와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야구의 영향력'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굳어져버린 '명칭'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일본식 야구용어'를 벗어나겠다고 '메이저리그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도 차선책일뿐, 최선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우리식'으로 바꿔나가는 방법밖에 없는 셈이다. 이제 '한국야구'의 위상도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고 있을 정도로 실력을 다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선수나 코칭스테프, 그리고 중계진 등 '야구관계자'들이 먼저 솔선수범을 하며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겠지만, '야구 상식'을 키운 수백 만 관중들도 그런 노력에 힘을 보태주어야만 할 것이다. '타구'라는 옛이름을 다시 살릴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더 좋은 명칭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쨌든 <어린이 야구 상식> 책인데도 '일본식 한자 용어'를 우리에게 맞게 고쳐 쓰는 것까지 신경 쓴 책이어서 더욱 호감을 샀던 책이기도 하다. 모쪼록 '구름 관중'을 동원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팬들의 사랑이 쑥쑥 커가는 이때에 이런 책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솔직히 나도 '야구 입문자'에 속하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내용도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키스톤 플레이'라는 용어였는데, '키스톤'이 아치형 구조물을 무너지지 않게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듯 '유격수'와 '2루수'가 중책을 맡아 탄탄한 내야 수비를 하는 경우에 쓰이는 용어라고 한다. 또한 '테이블 세터'는 1번 타자와 2번 타자를 가리킬 때 쓰는 용어인데, 출루율이 좋은 1번 타자와 작전 능력이 뛰어난 2번 타자가 주자로 나가야, 뒤이어 출전하는 '클린업 트리오'인 3, 4, 5번 타자가 차려진 밥상(테이블 세터)을 싹 치우며 득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쓰는 용어란다. 이런 뜻을 알고 나면, 테이블 세터는 '밥상 차리는 타자들'이라 부를 수 있고, 클린업 트리오는 '싹쓸이 타자들'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미 '준족(발 빠른 타자)', '거포(잘 때리는 타자)' 등의 용어로도 불리고 있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아는 만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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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은 가능한가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5 Vol.1 스켑틱 SKEPTIC 1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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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LVII / 바다출판사 9번째 리뷰] 각종 잡지를 즐겨 읽는 편이다. 주로 '월간 잡지'를 읽었는데, 이번에 눈에 띄는 '계간 잡지'가 있어 들여다 봤다. <스켑틱>이란 잡지였다. '스켑틱 협회'에서 발간한 잡지인데, 비판적 사고를 촉진하고, 건전한 과학적 관점을 모색하는 비영리 과학 교육기관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교육기관에서 검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초자연적 현상', '사이비 과학', '유사과학',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이한 주장들'을 따져 본단다. 흔히 말하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에 관한 과학적 검증을 시도한 책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 검증방법으로 기준을 삼은 것이 바로 '회의주의(일단 의심하고 깊이 파고들어 논리적인지, 비논리적인지 따져봄)'란다. 그러니 이 잡지에 실린 내용에 대해서는 일단 '믿어 의심치 않아도 좋다'는 신뢰도가 약간 높다고 볼 수 있다.

'회의주의'라는 것을 일단 의심부터 하고, 새로운 생각에 딴죽을 걸어 거부하기 위한 근거를 찾으려는 꼼수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런 '괴팍한 태도'가 아닌 '충분한 근거'를 요구하는 신중한 자세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이 책에서 찾아볼 주장들이 얼핏 듣기만 해도 '신빙성'이 낮은 사이비 과학에 대해서 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비 과학'은 그 자체로 과학과 유사해 보이지만 과학적 근거를 전혀 없거나, 얼토당토 않거나, 근거가 매우 희박한데도 '정상적인 과학'인 것인냥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여 믿게 만드는 위험성이 많기 때문이다. 사이비 과학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골상학(두골의 형상에서 사람의 성격이나 운명이 결정된다고 추정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 '생김새'만으로 성격이나 운명이 결정지어진다면서 19세기 중엽에 꽤나 유행했는데, 학문이 탄생한 유럽에서는 '금지'되다시피 했는데도, 미국에서 '대유행'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못생긴 사람들'이 억울하게(?) 정신병자나 범죄자로 지목되어 그 피해가 막심했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골상학'에 과학적 근거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이 입증되어 더는 발달하지 못한 학문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 과학'으로 의심(!)할만 한 것이 있다면 '의심'하고, '과학적 근거'를 더 많이 찾아보려는 자세가 매우 필요한 셈이다.

이런 까닭에 이 잡지가 꽤나 흥미로웠다. 이 책은 그에 관한 '창간호'로 [시간 여행]에 대해서 집중 의심해보았다. 그간 '시간 여행'에 관하여 수많은 소설가와 물리학자들이 고민해왔다. 그리고 여전히 팽팽하게 '가능하다'와 '불가능하다'로 맞선 주제이기도 하다. 결론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아직까지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충분한 증거가 발견되지 못했고, 실현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 여행'에 긍정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은 끊임없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방법들을 신중하게 모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내려진 '최신 결론'은 "시간 여행은 가능하다. 이론적으로 충분한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론에 따라 실현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이다. 꽤나 흥미롭지 않은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얘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허나 과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는 순간, '불가능'을 떠올릴 것이다. 왜냐면 과학자들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실현가능성 0%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 과학기술로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저 검증되지 못한 이론만 난무할 뿐인 상황이란 말이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이 책에서 검증하고 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만 읽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많고도 많은 논쟁거리가 화수분처럼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이 책을 권해드린다. 비록 10여 년 전의 과학적 논쟁을 다루고 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시간 여행'을 못하기는 여전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검증하고 있는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기에 결코 낡은 이론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잡지의 진정한 매력은 오래 묵을수록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맘 같아서는 이런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싶지만, 잡지의 가장 큰 단점은 모으면 모을수록 어마어마한 부피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솔깃한 주제를 다룬 잡지만 '골라서' 자주 손이 가는 곳에 두고 틈틈이 읽는 맛이 제격이다. 제발 그 장소가 '화장실'만 아니면 좋겠다. 세균번식하기 딱 좋은 곳이니 '소장용' 잡지라면 제발 그곳에 두지도 말고, 가지고 갔더라도 제발 가지고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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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실이와 고구마 도둑
허윤 지음, 김유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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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LVI / 거북이북스 1번째 리뷰] 가장 완벽한 견생(개의 삶)이란 무엇일까? 지금은 '애완견(사랑스런 장난감 강아지)'이란 표현 대신 '반려견(평생을 함께 동반할 개)'로 고쳐부르고 있지만, 도시에 살고 있는 강아지들 대부분은 여전히 '애완용'이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만만찮은 반론을 주장하며 자신은 '개'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기르듯 소중히 여긴다는 견주(강아지주인)도 있겠지만, 그저 비싼 사료 먹이고 동물병원에서 값비싼 치료를 받으며 한 침대에서 물고 빨고 좋아 죽겠다는 식으로 기르는 것이 과연 '강아지의 삶'으로 최적인지 생각해보란 말이다. 그게 '사람의 만족'을 위한 생활인지 '강아지의 삶'을 최선으로 배려한 삶인지 말이다.

흔히 도시에서 살아가는 '반려동물'들은 어김없이 배변훈련을 받고 '목줄'을 차며 바쁜 현대인들의 삶에 최대한 적응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정작 반려동물들은 출퇴근이 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왜 주인이라는 것들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기 바쁘게 집을 나가고, 저녁 늦게 들어와서야 좋아죽겠다면서 물고 빨다가 저들의 방에 들어가 코하고 잠을 자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반려동물'들은 평생을 외롭게 홀로 지내야만 한다. 그렇게 방구석에서 얌전히 있다가 주인과 함께 하는 시간에는 온갖 귀염을 떨면서 밥 잘 먹고 똥 잘 싸고 잠 잘 자는 얌전한 '반려동물'이 되어야만 사람(주인)들에게 환영받는다. 그게 절대로 '반려동물의 삶의 질'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도리어 건강을 해치는 지름길인데도 말이다.

거꾸로 한 번 생각해보란 말이다. 사람인 당신의 목에 '목줄'을 채우고서 하루종일 '홀로' 외롭게 지내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온갖 귀염과 애교를 떨며 밥과 간식을 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좋아 죽겠다는 시늉을 날마다 해야 하는 '반려동물의 삶'처럼 한 번 살아보란 말이다. 대부분의 개들이 소파를 물어뜯고 떠나가라 울부짓고 성질 사나운 짓을 하지 않고서는 베길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이다.

암튼, 이 동화책의 줄거리는 도시에 살던 강아지 '포메라니안(견종)' 보보스'가 말썽(?)만 피우다 시골로 쫓겨나 '고구마 도둑'으로부터 할아버지 고구마 밭을 지키는 용감무쌍한 개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사실 '포메라니안'은 지금은 작고 귀여운 견종이지만, 먼 조상은 북극에서 썰매를 끌던 견종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덩치도 컸고 잘 짖었으며 사냥도 훌륭히 해내는 '사냥개의 후손'이었단다. 지금이야 복실복실 털 많고 장난 많은 귀여운 악동 견종으로 유명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도시에 살던 '보보스'가 시골로 내려가 도둑 지키는 '복실이'로 변신한 것이 그리 큰 삶의 변화(?)는 아닐 것이다.

하긴 다양한 견종들의 조상은 대부분 '사냥개'였다. 인류가 늑대에서 개로 길들였기 때문에 '개의 본성'은 야생의 사냥 본능을 갖고 있을 것이며, 가장 최근까지도 개를 기르는 주목적이 '(도둑으로부터) 집을 지키는 일'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면 거의 모든 개들이 '컹컹' 사납게 울부짖고 '집요하게' 물어뜯으며 '주인'이 아닌 다른 생물(!)에게 무시무시한 공격본능을 보여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애초에 사람들이 그런 견종을 선호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런 행동을 저지르는 것을 못하게 발톱도 자르고, 성대도 작살내고, 입마개까지 물리고서 '얌전'하길 바란다. 사냥개의 본능으로 충만한 강아지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복실이의 삶은 다르다. 시골로 내려간 초기에는 당혹스럽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것 같아 속상하지만 '복실이(보보스)의 엄마'가 늘 말씀하신대로, "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머니는 아주 훌륭하고 용맹한 사냥개였단다"는 말을 떠올리며 할아버지 댁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하였다. 예쁘게 치장하고서 주인에게 사랑을 독차지하는 '장난감(애완견)'이 아닌 '진정한 견생'을 살아가는 당당한 사냥개로서 말이다. 그래봐야 한주먹보다 조금 더 큰 덩치일 뿐인 강아지에 불과하지만, 포메라니안이 '사냥개의 본능'으로 잃지 않은 것은 바로 덩치에 비해 엄청 큰 목청이었다.

그렇게 '복실이'는 고구마 도둑으로부터 할아버지의 고구마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것도 한밤중에 밭 한켠에 목줄로 단단히 묶이고서 말이다. 도시에 살 때는 사람처럼 낮에는 산책하고, 밤에는 주인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자며, 주인과 함께 하는 생활이었는데, 할아버지댁에서는 방안은커녕 마루에조차 올라서지 못하고 쫓겨나는 설움을 당해야만 했다. 더구나 개밥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먹다 남은 밥찌꺼기'였고 말이다. 그것도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데워주는 바람에 복실이 입천장이 홀랑 타서 벗겨질 지경에 이르자 '개밥 거부 시위'를 벌일 정도였다. 이런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고구마 도둑'으로부터 할아버지의 고구마밭을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 복실이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과연 복실이는 훌륭히 '고구마 도둑'을 쫓아내고 당당한 견생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할 것인가? 아니면, 견생의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충실한 '주인의 장난감'으로 생을 마감하는 평범한(?) 견생으로 만족할 것인가? 이 동화책을 읽는 어린이에게는 '변화된 삶에 훌륭히 적응하는 모습'이라는 주제를 가르쳐야 할까? 아니면 '진정한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주인공'이라는 주제를 귀띔해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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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끝에서 쇼펜하우어, 절망의 끝에서 니체 - 방향 잃은 삶을 위한 철학 나침반
강용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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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LV / 21세기북스 28번째 리뷰] 흔히 말하는 '염세주의 철학'은 세상살이는 고통스러우니 일찌감치 생을 마감하는 것이 더 낫다는 귀결로 맺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곤 한다. 인생을 비관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허나 생을 비관하고 자살을 옹호했다고 알려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72살로 장수했다.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명받아 그의 사상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프리드리히 니체 또한 존재를 부정하고 생을 비관했지만 56살로 비교적 오래 살았다. 만약 그의 가족에게 유전되던 '정신질환'이 없었고, 건강이 허락했더라면 더 오래 장수하길 바랐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염세주의(비관주의) 사상'을 신봉했을까? 그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의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다. '불안의 끝'과 '절망의 끝'에서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을 곱씹어보라고 적혀 있다. 왜일까? 그건 세상살이가 아무리 엿 같아도 '삶'을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고, 행복한 것이며, 맘껏 살아볼 가치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대표적인 저서만 설핏 읽어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 그 어디에도 '자살'을 방조하거나 옹호한 내용이 전혀 없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만이 참혹할 정도로 끔찍하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끔찍한 현장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의지'를 눈여겨 볼만하다고 말한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지'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석가모니가 쓰디쓴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달게 받아들이니 '붓다'가 되어 열반의 세계로 향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쓴 맛을 보지 않고서는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쇼펜하우어와 니체도 바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인생, 뭐 없다! 오직 내 안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알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풀어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철학은 어렵기 짝이 없다. 그걸 풀어쓴 '철학책'은 더 어렵다. 그렇기에 책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천 명이 아니라 만 명의 독자 가운데 1명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 '철학책'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도 난해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두 명의 철학을 한데 엮어놓아서 띄엄띄엄 읽다보면 무슨 말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책들이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한데 엮어서 함께 풀어쓰곤 하지만, 둘의 철학이 완전히 같지 않기 때문에 더욱 헷갈리 수 있겠다. 둘의 철학이 서로 비슷한 점도 있긴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서로 다르니 '따로따로' 풀어쓴 책을 읽는 것이 철학입문자에겐 더 적합할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둘의 사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 더 유익한 책이 될 것이다. 왜냐면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사상에 '저자 강용주의 풀이'까지 함께 곁들여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읽다보면 누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조차 헷갈릴 수 있으니 편하게 읽기는 틀린 책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만의 장점이라면 '염세주의(비관주의) 철학'을 꽤나 긍정적으로 풀어써서 읽다보면 '염세철학의 요지'를 이해하는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었다. 비록 인생은 더럽게 꼬이지만, 대체로 맘 먹은 것과는 상관없이 엉망진창이 되곤 하지만, 그럼에도 비관만 하지 말고 '희망'을 품고 역경을 '극복'해나가라고 응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현재의 관점으로 봤을 때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있을 때에도 '저자 강용주'는 현재에 적절하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를 도와주기도 한다. 이는 두 철학자가 살아있을 당시의 '19세기 과학상식'이 오늘의 관점에서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아도 '철학책'을 읽을 때에는 권위에 짓눌리지 말고 당당한 자세로 읽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한다. 특히 '쇼펜하우어'나 '니체'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말했다. 오직 '사유하는 사람'만이 진리에 근접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만약 세상에 불변하는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를 깨우친 뒤에는 그저 달달 외우기만 하면 될 뿐이다. 불변의 진리를 터득했는데 왜 고생스럽게 학문을 연구하느냔 말이다. 그런데 세상 어디에도 만고불변의 진리 따윈 없다. 이쪽에서 맞으면 저쪽에선 틀리고 그쪽에선 다를 뿐이다. 그러니 이쪽에선 이렇게, 저쪽에선 저렇게, 그쪽에선 그렇게 '딱 맞는' 각자 나름의 진리를 찾아 부단히 사유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사유들을 두루두루 접하며 '또 다른 진리'가 나올 수도 있음을 깨우치는 것이 참된 철학인 것이다.

그러니 끝없는 불안이 밀려오거나 세상이 끝장날 듯한 절망에 닥치더라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표현으로 '만고불변의 진리'따윈 없다고 역설했다. 그 어떤 '권위'로 포장한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말씀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내 안의 존재',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개성 넘치는 '가치'를 소중히 여길 때만이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서 세상은 원래부터 엿같은 거라고 외친다. 애초에 '나만을 위한 세상'따윈 없으니 '내가 직접 만든 세상'을 온누리에 널리 퍼뜨려서 이롭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말하고보니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과도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두 철학자의 사상에 빗대어 풀어내어도 딱 맞을 것이다. 원래 철학은 서로 통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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