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것들의 미학 - 포르노그래피에서 공포 영화까지, 예술 바깥에서의 도발적 사유 서가명강 시리즈 13
이해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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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LIX / 21세기북스 29번째 리뷰] 미학(美學)은 미와 예술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머리속에 떠올리는 '아름다움(beauty)'과는 달리 '미적인 것(the Aesthetics)'에 대한 차원이 다른 영역을 주로 탐구한다고 한다. 허나 비전공자인 나로서는 이게 뭔소린가 싶다. 아름다운 게 '미적'인 것이고, 미적인 것이 '아름다움' 아닌 가 말이다. 그래서 조금 비틀어서 접근해보기로 했다. 이 책의 제목에서 '미학'의 앞에 놓인 낱말부터 접근해보았다. '불온하다'의 반대말로 '건전하다'라는 낱말을 슬며시 놓아본 것이다. 애초에 '불온하다'의 반대말은 '온당하다'이겠지만, '온당하다'의 반대말은 '부당하다'는 낱말이 있으니 적절치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온한 사상'이라는 말이 쓰이니, 이에 반대되는 '건전한 사상'이 적당할 것 같아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본 것이다. 그랬더니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건전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해악을 끼칠 것이 없고 온통 '선한 영향력'만 전파할테니 누가 마다하겠는가 말이다. 근데 한편으로 곱씹어보면 '건전한 세상살이'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심심할 것이란 말이다. 날이면 날마다 그저그런 하루를 보낼 것을 생각하면, 날마다 '똑같은 일상'만 반복되는, 그런 삶을 떠올리면 말이다. 그런데 '불온한 것들'은 우리의 일상을 짜릿하게 해준다. 분명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자꾸 해보고 싶고, 하면 '즐거울 것' 같아서, 또는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누구에게 알려져서도 안 될 일을 몰래 해보는 그런 재미가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그런 '불온한 나날들'을 보내면 필히 후회하게 될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불온한 것들의 미학>이라는 것도 그런 짜릿하고 전율이 느껴지는 철학이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일상적인 것'이 되어선 곤란하겠지만, '철학의 범주' 안에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라는 빈틈을 한 번 파고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모두 4가지다. '위작', '포르노그라피', '나쁜 농담', 그리고 '공포물'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당히 '불온한 것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에서 철학적으로 논해볼 '미적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였다. 학문적 연구에서는 종종 '객관성'을 따지며 일상에서 나타날 도덕적 문제(모럴해저드)조차 너그럽게 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 독자에 불과한 나에겐 '부도덕적인 것들'에 관용과 허용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아무리 '미적 탐구'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부도덕적인 내용에 대해선 용서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명시하고 싶다. 책의 내용에서도 '도덕적 잣대'를 허술하게 들이대는 경향이 보였는데, 그런 경향에 대해 일체 '무관심'으로 대했다는 점도 상기해주길 바란다.

암튼, '위작'부터 살펴보자.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진품'과 '복제품'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위작 논쟁'은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 아니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진품'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재현하는 화가의 재능'을 높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되물으면 어떨까? 아마도 마땅한 대답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진품'과 그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히 재현한 '복제품'을 그려낸 재주 또한 '뛰어난 재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제품'을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로봇'이 그려낸 것이라면 하등 가치가 없다고 폄훼할 것이 분명하다. 아직까지 '예술의 가치'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오늘날의 화가가 진품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재현해내는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뛰어난 재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왜 '위작 논쟁'은 끊임없이 나타나는 걸까?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등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을 모방해서 '진품과 위작을 가리는 시비'가 매번 곤혹스럽게 문제시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논쟁의 귀결은 언제나 '작품의 가격'이 되곤 한다. 만약 '진품'이라면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위작'으로 판명이 되면 가짜를 만들어낸 화가가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시쳇말로 '똥값'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위작 논쟁'을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 한편으로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정당한 이유(?)로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도, 여전히 방문객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은 왜일까? 만약 자신이 '직접' 본 '모나리자'가 진품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소문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까닭만큼은 쉬이 이해가 될 법하다. 바로 '진품'이 훼손될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나리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진품과 큰 차이가 없는 '모나리자'를 관람하면서도 아무도 '위작'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인걸까? 왜 '위작'은 진품에 비해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다음은 '포르노그라피'다. 바로 '예술 vs 외설'이라는 논쟁을 떠올릴 수 있다. 왜 명화속의 벌거벗은 나체는 '예술'이고, 영화속의 벌거벗은 몸은 '외설'이라 평하는가 말이다. 어떤 이는 '성적행위의 유무'를 따지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성적흥분의 유무'를 차이로 내세우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성행위'를 묘사한 예술은 없단 말인가? 글쎄, 예술 '전체'를 다 알지 못하는 문외한인 내가 언뜻 떠올려보아도 남녀의 중요부위(!)가 낯뜨겁게 노출된 예술품들이 적잖히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예술품에는 '포르노그라피'라는 불명예를 들추지 않으면서, <플레이보이>, <허슬러> 등과 같은 '도색잡지'나 하드코어로 분류되는 '야한 동영상'에는 어김없이 '외설'이라는 낙인을 찍느냔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적흥분'을 차이점으로 내세우는 이들이 있는데, '성적흥분'이 왜 나쁜 것인지 합당한 근거를 내세우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아니 '성적흥분'은 예술의 범주에 들어선 안 된다는 기준은 누가 세웠느냔 말이다.

어쩌면 '포르노그라피'에도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의 서사시를 담아내서 관객들을 매혹시키는 무엇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낯뜨거운 성행위를 공공연한 자리에서 선보이는 것이 점잖치 못한 주장이고, 동물의 짝짓기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포르노그라피'를 대중화시켜야 마땅하다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앞서도 '부도덕적인 것'에 대해선 용서치 않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미니스커트'가 허용될 수 없었을 정도로 낯뜨거운 패션이었으나, 지금은 '하의실종'이 버젓이 패션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모자라 '언더붑'과 '시스루'조차 미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있는만큼 언젠가는 '포르노그라피'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겠다.

세 번째는 '질 나쁜 농담'이다. 미국의 한 코미디언이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나, 이 사진 본적 있어. '한식당 메뉴판'에서"라는 유머를 선보였단다. 분명 '웃기는 상황'을 연출한 농담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한국인은 개를 식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았기 때문에 명백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며, 이 농담을 듣고 웃는 사람의 품격조차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만드는 '불편한 농담'이다. 우리는 과연 '어느 선'까지 농담을 허용할 수 있고, 허용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서 그밖의 방송에서조차 '코미디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개인방송'에서도 무분별적인 '개그소재'를 일삼는 방송인들을 향한 지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을 정도다. 한때는 주말 연휴에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으면 평일날 일상적인 대화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왜 이제와서는 '개그(유머)'에 대해 이토록 진지해졌는가 말이다.

바로 '질 나쁜 농담'에 웃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도덕적인 농담'에 웃으면 안 되는 일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과거에는 '바보개그', '허무개그', '자학개그'까지 개그의 소재는 끝이 없었다. 영구와 맹구가 하는 바보짓은 일상의 피로를 풀어주는 활력소가 될 정도였고, 저런 게 왜 웃기는 걸까? 싶을 정도로 '허무한 개그'에도 우리는 박장대소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뚱뚱하고', '못생긴' 개그맨(우먼)들은 오디션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공채'로 채용이 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왜냐면 이들은 '존재, 그 잡채'로 웃음을 몰고다니는 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 하기는~"이라고 말하는 옥동자 캐릭터의 대사는 그 자체로 모순이었고, '자학개그'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촌철살인의 풍자'를 우리는 놓치지 않았었다. 이런 개그 뒤에는 '정치풍자', '세태풍자', 더 나아가 인류 공영을 위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품격 높은 농담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농담'들에 날선 반응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수자들의 인권을 짓밟는 '개그'에 차별금지라는 딱지를 붙였고, 정치적 소신을 말하는 '개그'에 국가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씁쓸한 세태에 웃고 넘어가지는 '유머'에 웃음기 사라지는 정색이 줄을 이었다. 한마디로 점잖치 못하다는 이유로 '유머'에 족쇄를 매단 것이다. 물론 '비도덕적인 농담'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저급한 개그소재로 품격을 잃은 개그프로그램을 되살리자는 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다. 왜 우리는 '웃음'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 되묻는 것뿐이다. 왜 '유머'를 양지로 드러내서 긍정적 효과를 내지 않고 '음지'로 내몰아서 더욱더 저속하게 만들고 마는지 안타까워서 그런다. 이 책에서는 '철학으로 농담을 분석하기'라는 장을 펼쳤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이런 '웃지 못할 세태'가 떠올라 안타까웠다. 부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유머'가 되살아나길 바란다.

마지막으론 '공포물'에 대한 미적 감상을 나열했는데, 솔직히 '느낌'에도 해석이 필요하다는 '감정 이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공포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 아니냔 말이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말고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다. 하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느낌을 가지고 감정을 쏟는 것에 대해 '합리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에는 공감이 가긴 했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합리성'을 따지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까지는 의아할 뿐이란 말이다. 하긴 난 '공포물'을 보아도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토시오는 귀엽고 처녀귀신은 섹시하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미학이라는 '분석철학'을 맛보았다. 물론 철학의 난해함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나름 재밌는 '접근'이었고, 사유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미학(the Aesthetics)'이 이처럼 재밌지는 않겠지만,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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