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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끝에서 쇼펜하우어, 절망의 끝에서 니체 - 방향 잃은 삶을 위한 철학 나침반
강용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10월
평점 :
[My Review MDCCCXLV / 21세기북스 28번째 리뷰] 흔히 말하는 '염세주의 철학'은 세상살이는 고통스러우니 일찌감치 생을 마감하는 것이 더 낫다는 귀결로 맺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곤 한다. 인생을 비관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허나 생을 비관하고 자살을 옹호했다고 알려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72살로 장수했다.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명받아 그의 사상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프리드리히 니체 또한 존재를 부정하고 생을 비관했지만 56살로 비교적 오래 살았다. 만약 그의 가족에게 유전되던 '정신질환'이 없었고, 건강이 허락했더라면 더 오래 장수하길 바랐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염세주의(비관주의) 사상'을 신봉했을까? 그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의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다. '불안의 끝'과 '절망의 끝'에서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을 곱씹어보라고 적혀 있다. 왜일까? 그건 세상살이가 아무리 엿 같아도 '삶'을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고, 행복한 것이며, 맘껏 살아볼 가치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대표적인 저서만 설핏 읽어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 그 어디에도 '자살'을 방조하거나 옹호한 내용이 전혀 없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만이 참혹할 정도로 끔찍하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끔찍한 현장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의지'를 눈여겨 볼만하다고 말한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지'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석가모니가 쓰디쓴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달게 받아들이니 '붓다'가 되어 열반의 세계로 향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쓴 맛을 보지 않고서는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쇼펜하우어와 니체도 바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인생, 뭐 없다! 오직 내 안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알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풀어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철학은 어렵기 짝이 없다. 그걸 풀어쓴 '철학책'은 더 어렵다. 그렇기에 책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천 명이 아니라 만 명의 독자 가운데 1명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 '철학책'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도 난해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두 명의 철학을 한데 엮어놓아서 띄엄띄엄 읽다보면 무슨 말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책들이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한데 엮어서 함께 풀어쓰곤 하지만, 둘의 철학이 완전히 같지 않기 때문에 더욱 헷갈리 수 있겠다. 둘의 철학이 서로 비슷한 점도 있긴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서로 다르니 '따로따로' 풀어쓴 책을 읽는 것이 철학입문자에겐 더 적합할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둘의 사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 더 유익한 책이 될 것이다. 왜냐면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사상에 '저자 강용주의 풀이'까지 함께 곁들여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읽다보면 누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조차 헷갈릴 수 있으니 편하게 읽기는 틀린 책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만의 장점이라면 '염세주의(비관주의) 철학'을 꽤나 긍정적으로 풀어써서 읽다보면 '염세철학의 요지'를 이해하는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었다. 비록 인생은 더럽게 꼬이지만, 대체로 맘 먹은 것과는 상관없이 엉망진창이 되곤 하지만, 그럼에도 비관만 하지 말고 '희망'을 품고 역경을 '극복'해나가라고 응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현재의 관점으로 봤을 때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있을 때에도 '저자 강용주'는 현재에 적절하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를 도와주기도 한다. 이는 두 철학자가 살아있을 당시의 '19세기 과학상식'이 오늘의 관점에서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아도 '철학책'을 읽을 때에는 권위에 짓눌리지 말고 당당한 자세로 읽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한다. 특히 '쇼펜하우어'나 '니체'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말했다. 오직 '사유하는 사람'만이 진리에 근접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만약 세상에 불변하는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를 깨우친 뒤에는 그저 달달 외우기만 하면 될 뿐이다. 불변의 진리를 터득했는데 왜 고생스럽게 학문을 연구하느냔 말이다. 그런데 세상 어디에도 만고불변의 진리 따윈 없다. 이쪽에서 맞으면 저쪽에선 틀리고 그쪽에선 다를 뿐이다. 그러니 이쪽에선 이렇게, 저쪽에선 저렇게, 그쪽에선 그렇게 '딱 맞는' 각자 나름의 진리를 찾아 부단히 사유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사유들을 두루두루 접하며 '또 다른 진리'가 나올 수도 있음을 깨우치는 것이 참된 철학인 것이다.
그러니 끝없는 불안이 밀려오거나 세상이 끝장날 듯한 절망에 닥치더라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표현으로 '만고불변의 진리'따윈 없다고 역설했다. 그 어떤 '권위'로 포장한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말씀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내 안의 존재',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개성 넘치는 '가치'를 소중히 여길 때만이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서 세상은 원래부터 엿같은 거라고 외친다. 애초에 '나만을 위한 세상'따윈 없으니 '내가 직접 만든 세상'을 온누리에 널리 퍼뜨려서 이롭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말하고보니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과도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두 철학자의 사상에 빗대어 풀어내어도 딱 맞을 것이다. 원래 철학은 서로 통하는 법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