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 ㅣ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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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 히로시마 레이코 / 김지영 / 넥서스Friends (2023)

[My Review MMCCCLXIX / 넥서스Friends 12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여덟 번째 리뷰는 본격 요괴 육아 판타지를 담은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다. 말 그대로다. 이 소설은 '육아 판타지'를 그려 놓았다. 아주 이성적인 이상향을 담아서 말이다. 어쩌면 '일본의 육아 교본'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을 참고로 삼아서 자녀를 육아해보겠다면 곤란한 일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인간의 아이'가 아닌 '요괴의 아이'를 육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귀엽다고 여긴다니 '요괴의 아이와 엄마아빠'라고 해도 자기 새끼를 키우는 정성은 가이없을 것이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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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 관점 포인트 : 바쿠란이란 대요괴가 있었다. 엄청난 요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어떤 요괴도 바쿠란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런 바쿠란이 스스로 자신의 힘을 봉인하고 있었다. 자기 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 아픈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봉인한 채 홀로 살아가던 어느 날 깊은 산속에서 '인간의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야스케 였다. 둘의 만남은 그렇게 우연이었다. 하지만 인연은 깊고 진하게 이어져 버렸다. 깊은 산속에, 그것도 한 겨울에 남자 아이 하나가 얼어서 굶주려서 기력이 떨어져서 생명의 근원이 사그라져가고 있었다. 그런 야스케를 발견한 바쿠란은 무엇보다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요괴도 아닌 '인간의 아이'를 살려냈다. 그리고 이름을 '센야'로 고치고 인간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대요괴인데도 '인간처럼' 살아가며 야스케를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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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요괴가 인간의 아이를 키운 이야기가 <요괴의 아이를 돌봐 드립니다>라는 시리즈고, 이 책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그 시리즈의 후속작으로, 이번엔 인간 야스케가 센이치(센야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겉모습은 어린아이로 변했다)라는 '요괴의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설정이 뒤바뀌었다. 다시 말해, 후속작인 까닭에 전작의 이야기설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는 말이다. 거기에 뒤바뀐 설정을 보완하기 위해서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왔다. 한마디로 이야기거리는 더 풍성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이야기소재'는 쪼그라든 느낌이다. 육아 이야기를 하다보니 '태교하듯' 경건한(?) 이야기거리만 다루고 있기 때문인 듯 싶다. 센이치가 좀 더 자라서 '중2병'에 걸린 사춘기를 겪는 시절이 된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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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주인공은 세 명의 아이로 좁아졌다. 물론 전작처럼 다양한 요괴의 아이들이 야스케의 집으로 놀러오거나 잠시 맡기러 찾아오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기본 줄거리는 야스케의 아들(?) 센이치와 규조와 하쓰네의 쌍둥이 딸 아마네(언니)와 긴네(동생)까지 세 명의 아이가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작보다 덜 어수선한 느낌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 덕분에 이야기가 단조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다. 더 지켜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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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는 '가짜신(허신)'이 깜짝 등장해서 긴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아마네와 센이치까지 모두 가찌신의 먹잇감이 될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변태 도룡뇽(영원) 구로모리 덕분에, 아니 야스케의 헌신(?) 덕분에 센이치와 아마네, 긴네는 무사히 구출될 수 있었다. 물론 가찌신을 처치한 것은 동쪽 지궁의 봉행 쓰쿠요가 짜잔하고 나타나서 해결했지만 말이다. 암튼 까딱 잘못 되었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을 겪은 센이치는 2권 첫 부분부터 사쿠노미야를 찾아가 자신은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사쿠노미야는 견신족의 대요괴로 현재 서쪽 지궁의 봉행을 맡고 있다. 애초에 가짜신을 처치해야 할 의무가 사쿠노미야에게 있었으나, 그녀가 활약을 펼치기도 전에 쓰쿠요가 나타나서 가짜신을 대신 처치하는 일대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센이치가 위기의 순간에 '호명'한 대요괴가 사쿠노미야가 아니라 쓰쿠요였던 탓이 크지만, 어찌 되었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탓에 일이 꼬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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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러나 꼬여 버린 일은 의외의 사건으로 해결되어 일단락이 되고 만다. 센이치가 사쿠노미야를 찾아가 '주술'을 배우고 싶다며 제자로 받아들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센이치의 요청 사실을 안 아마네와 긴네도 재밌겠다면서 센이치와 함께 제자가 되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세 명의 요괴 아이는 사쿠노미야가 거주하는 서쪽 지궁에서 주술 수련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사쿠노미야가 어렵사리 제자를 받아주었건만 센이치가 배우는 거라고는 사쿠노미야의 간식을 만드는 수련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간식 만드는 일만 하고, 조금 더 지나서는 사쿠노미야의 네 호위무사인 '사련'들과 함께 놀이를 하는 것이 수련의 전부였다. 아마네와 긴네는 그런 배움만으로도 즐겁게 지냈지만 센이치를 그렇지 못했다. 왜냐면 센이치가 주술을 배우고 싶었던 까닭이 야스케를 위기에서 구해줄 엄청난 힘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가짜신 사건 때 야스케가 위기에 빠졌는데도 센이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해야 "쓰쿠요!"라는 외침 뿐이었기 때문이다. 센이치는 사랑하는 야스케를 지키고 싶다는 일념으로 강한 힘이 담긴 주술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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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쿠노미야는 주술 수련을 곧바로 시작하지 않고 '다른 허드렛일'을 시키며 인내심을 시험한다. 주술 수련을 하는데 인내심(참을성)이 필요한 까닭은 강한 힘이 생겼을 때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고 꼭 필요할 때 써야만 하겠기에 그랬던 것이다. 나중에서야 그런 까닭을 알게 된 센이치는 온갖 불만과 심통을 접고 사쿠노미야의 제자로 다시 예의를 갖췄다. 그 길고 긴(?) 시련을 극복한 센이치에게 사쿠노미야는 첫 번째 주술을 가르쳐 준다. 이름하야 '천향의 술'이다. 뜻을 풀이하면 '천 가지 향기를 뿜어내는 주술'인 것인데, 센이치는 보기 좋은 솜씨로 첫 주술을 어렵지 않게 성공하지만, 곧바로 배움을 끊어버린다. 고작 냄새 피우는 주술을 배워서 어떻게 야스케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센이치는 학원(?)을 끊겠다며 동쪽 지궁을 찾아가지 않고 땡땡이를 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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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수달 요괴 모녀 쓰오와 지오가 야스케의 집을 찾아온다. 한쪽 다리가 아픈 딸을 고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약재가 있는데, 그걸 구하려면 위험한 장소로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어린 딸과 함께 갈 수 없어 야스케에게 돌봄을 부탁하러 왔던 것이다. 그렇게 떠난 수달 요괴 엄마 쓰오는 필요한 약재를 다 구했지만 인간 퇴마사에 의해 구술에 봉인되고 마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센이치는 쓰오가 봉인된 구술을 구출(?)하게 되지만, 봉인에서 풀려난 쓰오는 억울한 심정과 엄청난 고통 속에 휩싸여 분노에 잠식된 탓에 스스로 타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쿠노미야는 그런 쓰오가 안쓰러워서 최선을 다해서 쓰오를 구해주려 했지만, 약한 요괴였지만 아픈 딸 지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재를 구하러 했을 뿐 인간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퇴마사는 밑도 끝도 없이 '요괴 퇴치'라는 명목을 내세워 쓰오를 구술에 봉인했던 것이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던 쓰오는 분노에 잠식 당해 스스로를 타락시키며 저항했지만 결국 봉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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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쓰오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쓰오는 엄마였기에 아픈 딸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 못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엄마'이기에 당연한 일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엄마'라는 이름이 프리패스인 것도 아니다. 온갖 고생이란 고생을 다했고 힘들다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픈 딸을 고칠 수 있는 방도가 있다는 사실에 그 힘듦과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또다시 한 달음에 달려가 필요한 약재를 구했을 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봉인'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아픈 딸을 치료할 약재를 모두 구한 그 시점에 말이다. 쓰오는 봉인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안위보다 아픈 딸을 더 걱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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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쓰오의 사정을 쓰오가 뿜어내는 '냄새'를 통해서 알아챈 사쿠노미야는 전력을 다해서 쓰오를 구하려 애쓴다. 그러나 한 번 타락한 쓰오는 자신의 생명력을 다할 때까지 '타락의 요기'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픈 딸을 치료할 희망에 목매다가 겨우 치료법을 찾아내 이제 곧 완성할 수 있었는데, 그걸 앞뒤 분간도 하지 못한 퇴마사가 다짜고짜 봉인을 해버렸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 때문에 쓰오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못했고 타락의 요기는 쓰오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이제 쓰오는 이대로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센이치는 '천향의 술'을 발휘해서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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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육아' 이야기를 하다가 주술 '수련' 이야기로 빠져들고 뒷이야기는 '봉인'을 해제하는 등 이리저리 왔다갔다 정신 없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요괴의 아이'를 기르는데 모두 경험할 수밖에 없는 다채발랄(?)한 육아스토리인 것이다. 아이를 키워본 분들은 공감하실 것이다. 아이 한 명 때문에 온 집안 식구가 총출동하는 일이 다반사고, 외출 한 번 할라치면 '이삿짐'을 싸듯 싸짊어지고 나설 수밖에 없고, 이제 좀 컸다고 부모의 감시망(?)을 요리조리 피해서 탈출한 뒤에 사건사고를 몰고다니는 바람에 골머리를 썩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시키고자 '사교육'이라도 시킬라치면 천문학적인 비용 문제는 둘째치고 진득하니 '배움'을 닦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굴뚝이었을 것이다. 어제는 이런 이유로 가기 싫고, 오늘은 저런 이유 때문에 안 가고 싶고, 내일은 제발 좀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이 그냥 가주기만 해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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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2>는 그런 부모님의 속사정을 뒤로 한 채, 오직 '어린 아이의 관점'으로 육아/교육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결말 부분에서는 꼭 어른스러운 교훈적인 마무리를 하고 있어서 정말 '판타지'가 맞구나 싶다. 요즘 애들이 어떤 애들인가? 눈치가 백단이고 어른들 머리꼭대기에서 노는 '천상의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들의 속사정과 깊은 뜻을 단박에 깨우치고 '겸양'을 배우고 실천한다니. 그것도 단 한 번의 사고를 친 뒤에 말이다. 정말 판타지에서나 등장할 법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혹시 일본의 육아/교육 시스템은 이것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절대불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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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ㅣ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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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 김지영 / 넥서스Friends (2022)

[My Review MMCCCLXVIII / 넥서스Friends 1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일곱 번째 리뷰는 요괴의 아이를 돌보던 야스케가 센야의 영혼을 간직한 아이 센키치를 키우는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이다. 그러고 보면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 제목은 대체적으로 '직관적'이다. '이상한 과자점'이라든지 '요괴의 아이'를 돌보거나 키운다든지 말이다. 하긴 최근의 일본 만화제목을 보면 꽤나 서사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히로시마 레이코만 그런 것은 아닌 듯 싶다. 암튼 전작 <요괴의 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에서 야스케는 봉인된 기억을 깨뜨렸고 그로 인해 센야는 어겨서는 안 되는 약속을 깨뜨리는 바람에 영원히 소멸될 운명이었다. 허나 '해피엔딩'이라고나 할까. 비록 센야는 사라졌지만 '센야의 영혼'을 고스란히 간직한 요괴 아이가 남겨졌다. 마치 센야와 야스케의 운명적 만남이 재현된 듯이 말이다. 그래서 야스케는 그 요괴 아이를 제 손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했고, 센야가 야스케를 사랑과 헌신으로 키워줬듯이 야스케도 센키치를 사랑과 헌신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자, 이렇게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새롭게 시작한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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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관점 포인트 : 애초에 '성인소설'로 써낼 작정이었던 작가 히로시마는 <요괴의 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의 시작을 꽤나 폭력적이고 야시꾸리(?)하게 설정하며 풀어냈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어린이책'으로 분류하지 않고 그냥 '소설책'으로 분류할 정도였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한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애초에 어린이 독자를 위해서 쓰고자 했던 것인지 상당히 '순화(?)'된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요괴'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잔혹하고 끔찍한 설정'이 담겨 있긴 하지만 적어도 '전작'에 비해서는 그나마 어린이 독자가 읽어도 좋을 정도로 여겨질 정도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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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주된 이야기는 야스케가 요괴 아이 센키치를 사랑과 헌신으로 잘 키운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매 화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나서 야스케와 센키치를 이상하고 요상한 사건에 빠져들게 만드는 '서브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관계로 전작인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와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전작에서는 '센야와 야스케'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야스케와 센키치'로 바뀐 것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어린 야스케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요괴 아이 돌보미'로서가 아닌 '요괴 아이 보호자'로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이 확연히 달라진 점이다. 그래서 전작에서는 '아이의 심정'으로 사건을 대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부모의 마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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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입장'이 달라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전작에서는 요괴 아빠(센야)가 인간 아이(야스케)를 기르는 상황이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 아빠(야스케)가 요괴 아이(센키치)를 키우기 때문에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 차이가 참 묘하게 작동한다. 왜냐면 아이를 돌보거나 보호하는 아빠의 '능력'이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센야는 요괴 가운데서도 출중한 능력을 갖춘 나름 능력자였지만, 야스케는 고작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괴 아이를 키우기 위한 기본적인 능력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전작에서는 야스케가 사고를 치면 센야가 손쉽게 해결해내곤 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센키치가 사고를 쳐도 인간인 야스케가 직접적으로 해결해줄 능력이 없다. 그래서 전작에 비해서 '인간 야스케'를 돕는 캐릭터(등장인물)가 더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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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간 야스케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요괴 아이 센키치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인간인 야스케에게 부족한 것이 많긴 하지만, 딱 하나 그 누구보다 출중한 능력이 있다. 바로 인간이든 요괴든 야스케를 돕고 싶게 만드는 '선량함'이다. 단순히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요괴를 구분하지 않고 아무런 편견도 없이 '똑같이' 대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야스케가 '버려진 아이'였지만 온갖 요정과 신, 그리고 요괴까지 야스케를 살려내려 애썼고, 야스케도 그런 존재들의 배려에 부족함 없이 '선함'으로 보답을 하는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와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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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을 읽으면 그냥저냥 '일본소설의 느낌'에서 그치지 않아서 좋았다. 기괴하다 못해 끔찍하고 참혹한 '이상한 이야기'만 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에게서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따뜻하게 만드는 선량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과응보라는 것이 작용해서 '나쁜 짓'을 일삼은 악당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잔혹한 처벌(?)을 내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끔찍한 겉모습에 해쾨망측한 짓만 하고 다니는 요괴에 대한 잘못된 편견만 부각하지 않고, 요괴일지라도 인간 못지 않은 '선량함'을 가지고 있다고 밑바탕에 찐하게 깔아놓았다.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요괴의 아이> 시리즈에서도 그런 착한 마음씨가 엿보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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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해하기 쉽게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또 우리의 정서와는 좀 달랐다. 한국고전소설에서 주로 표현되는 '권선징악'은 착한 마음을 권하고 나쁜 마음에는 벌 준다는 뜻이지만,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무작정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착한 마음씨를 '권'한다는 마인드란 말이다. 또한 벌준다는 뜻에도 나쁜 마음씨를 '경계'하고 '멀리'하라는 뜻이지 나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을 내려서 고통을 줄지언정 죽여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갱생'하도록 따끔하게 혼을 내는 선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국의 권선징악은 착한 마음씨에 '좋은 결말'이, 나쁜 마음씨에는 '나쁜 결말'이 뒤따른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강하지, 처벌을 내리고 완전히 '격리'시켜 버리는 내용은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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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히로시마 레이코의 '권선징악'은 착하게 살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거다. 후회하지 말고 나쁜 마음씨를 고쳐 먹으라. 이렇게 경고했는데도 어기면, '넌 죽음', '넌 소멸', '넌 파국'..이런 식이다. 이러면 죽기 싫고 불이익 당하기 싫어서라도 끝까지 저항하고 죽을 때까지 발악을 하고 말 것이다. 이건 진정한 '권선징악'이라 부를 수 없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다른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쁜 놈이 '강자'여도 힘 없고 선량한 약자는 괴로워하고, 착한 이가 '강자'여도 힘 없고 악독한 약자는 저항해봤자 죽을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 속에서는 '용서'와 '관용'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용서해줄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리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겨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용서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관용을 베풀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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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히로시마 레이코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일본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은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는 것으로, 나쁜 놈에게는 '벌'을 내리는 것으로 엔딩을 장식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등장인물 가운데 악당은 대부분 '다음 화'에 나오기 힘들다. 자잘한 악당들은 한 회 딱 등장한 뒤에 사라지고, 아주 강력한 '대악당'의 경우에는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 보스'로 등장해서 최후까지 발악을 하다 장렬하게 죽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끝맺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점이 참 아쉽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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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8 - 여포와 조조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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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8 : 여포와 조조> 요코야마 미츠테루 / 박영 / 대현출판사 (2002)

[My Review MMCCCLXVII / 대현출판사 8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여섯 번째 리뷰는 읽다보니 '죽고 죽이는 장면'만 클로즈 업을 하고 있는 <전략 삼국지 8>이다. 천웨이동의 <중국정통 만화 삼국지>라는 책을 봐도 '죽이는 장면'이 나오고, 우리 나라의 <고우영 삼국지>에도 '죽고 죽이는 장면'은 나온다. <삼국지연의>가 태평한 시기도 아닌 전국시대만큼이나 혼란한 왕조교체기였으니 어찌 전투나 전쟁 묘사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태평한 시대에도 궁중암투로 벌어지는 정치싸움에서도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는 장면이 연출된다. 하지만 전쟁은 그 양상이 더욱 심하기에 그런 혼란한 시대를 '만화'로 그리는 작업을 할 때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유독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가볍게 여기는 '인명경시 풍조'가 엿보여서 불편한 점이 있다. 그래서 앞서 천웨이동과 고우영 화백을 예로 들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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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웨이동은 <삼국지연의> 속의 '명장면'을 한컷 한컷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서 묘사하고 나머지 줄거리는 과감히 스킵(건너뛰기)하는 방식으로 압축과 생략의 묘미를 잘 살려냈다. 거기다 장수와 장수의 대결은 가장 멋진 각도(!)로 조명하여 '삼국지팬'이라면 두 주먹이 불끈 쥐고 손에 땀이 찰 정도의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줄 정도의 쾌감을 선보인다. 반면에 고우영 화백은 '인명 살상'이 벌어지는 장면을 그릴 때 '감정적 묘사'가 뛰어나다. 그래서 '사람 vs 사람'의 대결이지만 '의 vs 불의'의 싸움임을 분명히 밝히고, 의가 승리할 때에는 '정의'가 살아 있음에 환호하게 만들고, 의가 패배할 때에는 슬픔과 비통, 그리고 분노가 일어나게 그려낸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독재자'가 폭정을 일삼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 따위다. 그런데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장수 대 장수'의 명대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도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끊어내는 장면을 '클로즈 업'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챙챙 칼부림을 하다가 악하고 죽는 장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단칼에 목을 뎅겅 자르는 장면, 힘 없는 노인과 아이는 달아나는 도중에 등을 찔려 죽고 젊은 여인들은 겁탈을 당하고 죽여버리는 잔악한 장면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여기에 '모자이크 처리'된 장면은 날카로운 무기와 찔리거나 베이는 동작, 그리고 효수된 머리 따위를 흐릿하게 처리했을 뿐이다. 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일까?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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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8> 관점 포인트 :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인물들이 죽어 간다. 동탁이 폭정 끝에 여포에게 배신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조조가 연주에 정착하고 아버지 조숭을 모셔오는 과정에서 도겸의 초대를 받아 환대를 받은 뒤에 '도겸의 부하 장개(황건적 출신)'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조는 이 때문에 원한을 갚겠다며 '서주의 백성'을 도륙한다. 하지만 요시키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 조조의 서주대학살 장면이 누락된 때문인지, 요코하아 미츠테루도 이 대목을 그냥 건너뛰었다. 대신 조조가 서주 공략을 위해 연주를 비운 사이에 여포가 조조의 근거지를 빼앗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조조와 여포의 대결'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여기까지가 <전략 삼국지 8>의 줄거리 전부다. 설명이 너무 간단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책의 내용 자체가 그렇다. 그저 죽고 죽이는 장면 묘사에만 치중할 뿐, 왜 서로 죽고 죽이는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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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책으로 처음 <삼국지연의>를 접하는 독자라면 '고전의 깊이'를 전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유비가 주인공이구나. 조조가 악당이구나. 그런데 유비의 꿈이 결국 실패하는구나. 그 정도의 감흥밖에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무능하고 어리석은 지배자로 인해 국정이 문란해지면 결국 힘 없는 백성들만 개고생을 한다는 비판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저 약육강식, 적자생존, 힘 있는 사람만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비정한 현실만을 느끼게 해줄 뿐이다. 그나마 <삼국지연의> 등 여러 책을 먼저 읽고 주제와 깊이 등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만이 '이런 식으로 <삼국지>를 즐길 수(?)도 있구나' 싶은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삼국지연의>를 즐기는 독자들이라면 이런 거친 방식으로 '만화 삼국지'를 펴낸 것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하게 될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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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폭력'에 길들여지고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것을 '가스라이팅' 당한다고 한다. 일본은 이를 국가적으로 강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름다운 전통이라느냥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어지럽고 무질서한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한 지혜로 볼 수도 있다. 일본이 그토록 자랑하는 '사무라이'가 정권을 잡고 일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막부정부'가 일왕정권을 대신했던 시절에 '사무라이의 말'은 바로 법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높은 신분은 누리고 낮은 신분은 억압받고 빼앗기는 것이 당연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고전작품'을 오늘의 우리가 읽고자 권장하는 것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고전은 시대가 달라져도 여전히 그 가치가 있기에 읽히는 것이고, <삼국지연의>도 바로 그 때문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럼 그 가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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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전란의 시대'에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생생히 살려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과 새 나라를 만들려는 웅지를 품은 영웅들의 등장과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국가란 무엇이고, 영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 바로 정의롭게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읽는 것이다. 나관중은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원말명초 때 오랑캐들에게 짓밟힌 '한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려 한족 영웅들의 이야기를 추려냈던 것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의로운 영웅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역사의 승자였던 조조가 아닌, 비록 패자였지만 그가 세우려 했던 나라를 보여주며 그 뜻을 기리고자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전략 삼국지>에 아쉬움이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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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90년대 이 책을 어렵지 않게 접하고 읽던 친구를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낱권으로 구매하기도 힘들었고 구매하려면 '전권 60권'을 다 사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부자친구들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시절이라 선뜻 책을 빌려 달라는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런 추억이 있었기에 이번에 '도서관 대여'를 통해서 읽을 수 있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다른 책도 밀어둔채 이 책부터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서 솔직히 당황스러운 심정이다. 그 시절에 어깨 너머로 훔쳐볼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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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90년대의 일본은 대단한 나라였다. 부러운 나라였고 굉장히 앞선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들이 과거의 잘못도 반성하지 않고 뻔뻔하게 구는 자세를 취해도 '실력'에서 앞서지 못했기에 당당히 꾸짖지 못하고 주눅 들어 있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었다.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나에게 그 수많은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손쉽게 구해서 볼 수도 없는 '한계'가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이 열리고 이젠 '제한'없이 볼 수 있게 되었건만 보면 볼수록 '기대이하'로 다가오기에 실망이다. 어릴 적에 동경했던 나라가 겨우 이 정도였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철인 28호>, <바벨 2세>, <요술공주 세리>...요코야마 미츠테루라는 작가 이름도 모르고 즐겼었는데 말이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고 뚜껑을 함부로 열지 말았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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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7 - 강동의 파란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전략 삼국지 7 : 강동의 파란> 요코야마 미츠테루 / 박영 / 대현출판사 (2002)

[My Review MMCCCLXVI / 대현출판사 7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다섯 번째 리뷰는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일어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만 <전략 삼국지 7>이다. 지은이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1934년 생으로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단다. 고베는 일본 교토에서 남서쪽, 오사카에서 서쪽에 위치한 개항지로 유명한 곳이다. 한창 어린 시절인 10대에 일본이 패전하는 모습도 생생하게 보았을 것이고, 그뒤로 청년기에는 일본이 고도로 발전하는 모습도 생생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그러다 불혹의 나이에 <전략 삼국지>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니, 그는 '일본인의 자긍심'을 뼛속 깊이 새기며 일본의 중흥을 꿈꾸며 만화를 그려왔으리라 짐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그린 만화 가운데 상당수가 '고증'이 필요한 역사만화였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고전 <삼국지>, <수호지>, <항우와 유방>, <사기>, <석가모니>, <칭기스칸> 등과 야마오카 소하치 원작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국내제목 '대망'),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등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극화하는 등 꽤나 다작을 펴낸 화려한 경력을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읽어보면 그 시절에 그린 '일본의 품격'(?)은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못해 적나라한 성적 묘사와 잔혹한 장면 묘사에 치중한 경향이 엿보여 난처함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은 절대 산책을 하면서 읽지는 못하겠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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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7> 관점 포인트 : 줄거리는 빠르게 진행된다. 손책이 반동탁연합군에 참전해서 활약한 덕분에(?) 얻게 된 '전국옥새'를 손에 쥐고 강동으로 돌아가 '제왕의 꿈'을 키우려던 때에 원소의 지령을 받은 유표의 예상 못한 공격에 손견은 크게 낭패를 보고 그만 죽고 만다. 이로써 손견이 꾸던 꿈은 맏아들 손책이 이어받게 되는데, 손책은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잠시 묻어둘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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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탁은 천자를 볼모로 삼아 장안 천도에 성공한 뒤 자신이 황제라도 된 듯 세상을 호령하며 군림하였다. 이런 동탁의 만행을 두고 보면서 한나라에 충성을 바칠 충직한 신하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동탁 곁에는 늘 여포가 있었기에 감히 반항이나 저항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도 왕윤이 딸처럼 키운 '가기 초선'에게 엎드려 부탁을 한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네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겠냐고 말이다. 초선은 자신을 귀하게 대접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자, 왕윤은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킬 무시무시한 '연환계'를 실행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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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윤의 그런 계책이 착착 들어맞을 찰나 동탁의 모사 이유의 눈에 동탁과 여포 사이에 벌어진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동탁이 새로 들인 계집 '초선' 때문이란 것을 간파하자, 이유는 동탁에게 '절영지회'의 고사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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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전국시대 춘추오패 가운데 하나인 초 장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화로 '갓끈을 끊고 연회를 즐기다'라는 뜻이다. 장왕이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던 와중에 밤이 깊어 등불을 환히 켜놨는데, 느닷없이 강풍이 불어 연회장의 등불이 모두 꺼지는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 혼란한 틈을 타서 장왕이 총애하던 여인의 입술을 훔친 남자가 있었고, 그 여인은 자신의 절개를 꺾지 않겠다는 의지로 어둠속에서 그 남자의 '갓끈'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장왕에게 "저를 희롱한 남자가 있으니 벌해 주소서. 그 남자의 갓끈을 끊어 놓았습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 말을 들은 장왕은 등불을 밝히기에 앞서 연회장에 참석한 이들에게 말하기를, "불을 켜기 전에 모두 갓끈을 풀어라. 오늘 술을 마시느라 모두 취했다는 걸 잘 안다. 그리고 '실수'로 내가 총애하는 여인의 입술을 훔친 자가 있다고 한다. 허나 작은 실수로 충직한 신하들을 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내가 총애하는 여인이 정절을 잃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 또한 죄인이 누군지 밝히려 드는 '큰 실수'를 저지를 게 분명하다. 그리니 오늘 일로 우리 모두가 실수를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테다." 그렇게 사건은 유야뮤야 처리가 되었고, 범인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처벌하는 일도 없었다. 몇 년 후, 진나라와 벌인 전투에서 초 장왕이 위기에 빠졌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장왕을 구한 장수가 있었다. 초 장왕은 그 장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자. 그 장수가 자백을 하며, "예전에 저의 실수를 감싸 주어 죽을 목숨을 구해주셨기에, 저는 그때부터 목숨을 바쳐 은혜에 보답하려 했을 뿐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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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동탁에게 이 고사의 이야기를 전해주며, 부하의 사소한 실수를 포용한 지도자에게 부하는 감복하여 충직으로 보답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러니 '초선'을 여포에게 주고 주공은 '천하'를 얻으시라 권하자 동탁은 그제서야 마지 못해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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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여기까지의 줄거리만 보면 나무랄 데 없는 '수미쌍관' 구조를 보이며 아주 멋드러진 이야기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손견과 동탁이 둘 다 '천하'를 꿈꿨지만 끝내 허탕을 치고 죽게 된다는 사실은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적나라한 전투 장면과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음흉한 시선을 던지는 장면 등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어린이 독자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내용만 강조하고 넘어가도 충분할 텐데,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끈적끈적한 시선을 노골적으로 집중조명한 까닭을 묻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숱한 '만화 삼국지'를 보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한국 작품'과 '중국 작품'을 본 적은 없었다. 오직 '일본 작품'에서만 이런 묘사가 극화될 뿐이다. 그 가운데 요코야마의 <전략 삼국지>는 정점을 찍었다고 본다. 물론 '성인 만화'라는 딱지를 붙였다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어린이 청소년용'이라고 소개하고 광고하면서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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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사무라이(무사) 정신'을 동양 문화의 정수이자 일본의 자긍심으로 삼는 모양인데, 그러면서도 철저히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 역사'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 '상품성'만을 강조하며 '사무라이 정신'을 판매할 뿐이다. 최근에야 이런 문제점을 깨우친 서양인들이 '사무라이'와 맞서 싸운 전쟁에서 전승 무패를 자랑한 '이순신 장군'을 접하고서 열광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참혹한 전쟁을 치루면서도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입니까?"라는 왜장의 물음에 "의와 불의의 싸움이지"라고 대답하는 영화속 대사를 보면서,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표하곤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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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서양인들이 한동안 열광했던 '사무라이'가 사실은 그저 '살상 기계'와 다를 바 없고, 그저 오락용으로 베고 또 베는 장면만 보면서 희열(카타르시스)을 만끽하는 것으로 소비하고 있던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이순신 장군의 한마디'로 경종을 울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새삼 자신들이 '사무라이 정신'으로 녹여낸 영화 <7인의 사무라이>, <스타워즈>, <킬 빌> 등과 같은 영화를 소비하는 행태에 대한 반성도 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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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으로 2026년의 관점에서 <전략 삼국지>의 폭력성과 참혹한 장면 묘사는 살짝 거르고 감상하는 방법을 터득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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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6 - 옥새의 행방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전략 삼국지 6 : 옥새의 행방> 요코야마 미츠테루 / 박영 / 대현출판사 (2002)

[My Review MMCCCLXV / 대현출판사 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네 번째 리뷰는 오랜만에 이어서 리뷰하는 <전략 삼국지 6>다. 본의 아니게 리뷰를 열흘이나 쉬게 되었다. 늙어서 체력이 뒷받침 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읽고도 좀처럼 리뷰쓰기가 잘 되지 않았던 책이 있어서 '번민의 시간'이 길었던 탓이다. 앞으로 쭉쭉 리뷰를 할 예정이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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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6> 관점 포인트 : 일본의 만화가 대부분 그런 편이라 물색없이 읽어나가려 하지만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전략 삼국지>는 '폭력성'과 '잔혹함'에 있어서 다른 '만화 삼국지'보다 월등하다. 애초에 후한말의 혼란한 시기에 수많은 군웅들이 할거하며 전쟁을 일삼던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전쟁의 참혹함'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만화 삼국지'에 비해서도 그 정도가 심하고 노골적이기에 우려스러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국내에 소개될 때에는 잔혹한 장면과 끔찍한 무기에 대한 장면 묘사에 '모자이크 처리'를 했겠는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모자이크'에 무덤덤해질 정도로 많다는 것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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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6권의 줄거리는 도읍을 옮기기 위해서 낙양을 불지르고 장안으로 내빼는 동탁을 단독으로 뒤쫓는 조조가 대패를 하는 바람에 겨우 목숨만 살아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반동탁연합군이 해체한 뒤에 각각의 영지로 돌아간 원소와 공손찬이 기주를 둘러싸고 혈투를 벌인 '반하의 전투'에서 무승부를 거둔 두 진영은 싸움을 거두고 '화의'를 청하는 대목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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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 <전략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를 제외하고 나머지 군웅들은 죄다 '악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가운데 최고는 '조조'다. 그래서 조조는 등장하면서부터 '대마왕의 표정'으로 묘사되었고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고 음습한 표정으로 대놓고 묘사하곤 했다. 그래서 조조 못지 않게 악인으로 등장해야 할 '동탁'이 덜 악하게 그려질 정도다. 그러다 보니 원작인 '소설 삼국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몰입감이 확 떨어지게 된다. 적어도 조조가 동탁을 뒤쫓아 군사를 몰고 갈 때만큼은 '악인'이 아니라 한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충신'의 모습이 확실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악인(동탁)'의 뒤를 쫓는 영웅(조조)의 모습을 천하를 독차지하려는 듯한 '음습'한 표정으로 뒤쫓고 있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만화속 캐릭터가 '통일성'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띤 모습'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조는 타고난 악인으로 묘사하는 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황제의 혈서'가 발각이 되고 조조를 역적으로 내몰고 죽이려던 사건 때문에 조조가 대폭발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조조는 '충신'으로 그려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반영되지 않고 시종일관 '악인'으로 묘사되는 조조는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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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반동탁연합은 조조의 패배 이후 해체되어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그 와중에 손견은 우물속에서 '전국옥새'를 찾아 대사를 도모하려던 순간 원소에게 발각이 되어 곤혹을 치루게 된다. 원소가 맹주된 이유를 대며 '옥새'는 황제에게 돌려줘야 한다면서 자신이 맡아두었다가 황제에게 돌려드리겠다며 손견에게 대놓고 달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손견은 발뺌을 하며 서둘러 자신의 영지로 되돌아가려 했다. 이에 원소는 유표에게 밀서를 보내 손견이 가는 길을 막고 옥새를 빼앗으라 한다. 하지만 옥새를 빼앗는데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애꿎은 손견의 목숨만 빼앗게 된다. 이렇게 유표와 손씨 가문은 대대로 원수를 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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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원소는 자신의 영지로 되돌아가다 한복이 차지하고 있는 '기주'를 탐하게 된다. 왜냐면 기주는 곡창지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차지했다가는 다른 제후들에게 욕을 먹기 십상이니 공손찬에게 밀서를 보내 '기주'를 반씩 노나먹자고 제안하고 군사를 끌고 오라고 제안한다. 그러자 공손찬의 군대를 두려워한 한복이 원소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원소는 아무런 힘을 쓰지도 않고 기주를 혼자 차지하게 된다. 뒤늦게 원소의 계략임을 파악한 공손찬은 동생 공손월의 죽음에 분노하며 북방의 오랑캐를 정벌할 때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 '백마진'을 앞장세워 원소를 공략한다. 서로 일진일퇴를 거듭한 두 진영은 길어진 전투로 손해가 막심하자 전쟁을 잠시 멈추자는 '화의'를 요청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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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반동탁연합군에서 서로 같은 진영으로 동탁과 맞서 싸웠던 원소와 공손찬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눴다. 어릴 적에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이기도 하다. 왜 '같은 편'끼리 서로 적대시하면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지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다. 설령 '같은 편'이었더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다가 끝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곤 하는 일 말이다. 지금 동맹을 넘어 혈맹이라 여겼던 '한미관계'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고, 오히려 적국과 친해질지언정 감히 '동맹국' 주제에 미국의 이익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칼을 빼들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맹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철저히 '힘의 원칙'에 따라 강대국이 약소국을 맘대로 휘둘러서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는 목적에 따라 '편'은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는 셈이다. 원소와 공손찬의 대결은 그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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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공손찬이 '자멸'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원소 입장에서는 '힘겨운 승리'였다고 할 수밖에 없을만큼 공손찬이 만만찮은 상대였는데도, 반하 전투 이후 공손찬은 성안에 틀어박혀서 지키기만 하다가 '자결'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이 책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공손찬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살려준 '상산의 조자룡'이 등장하는 대목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것도 아주 '노안'으로 말이다. 조운이 첫 등장할 때가 약관(20세)의 나이가 채 되지 않은 소년 장수로 등장해야 마땅한데,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아주 노련하고 다부진 얼굴에 건장한 체격으로 듬직한 캐릭터로 만들고 말았다. 뭐, 조자룡이 '미소년'이나 '미남자'라는 기록은 없어도 못생겼다는 기록도 없는데 너무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나중에 유비와 같이 그려놓은 장면에서는 되려 유비가 더 젊게 보일 정도다. 이건 좀 심하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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