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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ㅣ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2년 6월
평점 :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 김지영 / 넥서스Friends (2022)
[My Review MMCCCLXVIII / 넥서스Friends 1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일곱 번째 리뷰는 요괴의 아이를 돌보던 야스케가 센야의 영혼을 간직한 아이 센키치를 키우는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이다. 그러고 보면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 제목은 대체적으로 '직관적'이다. '이상한 과자점'이라든지 '요괴의 아이'를 돌보거나 키운다든지 말이다. 하긴 최근의 일본 만화제목을 보면 꽤나 서사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히로시마 레이코만 그런 것은 아닌 듯 싶다. 암튼 전작 <요괴의 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에서 야스케는 봉인된 기억을 깨뜨렸고 그로 인해 센야는 어겨서는 안 되는 약속을 깨뜨리는 바람에 영원히 소멸될 운명이었다. 허나 '해피엔딩'이라고나 할까. 비록 센야는 사라졌지만 '센야의 영혼'을 고스란히 간직한 요괴 아이가 남겨졌다. 마치 센야와 야스케의 운명적 만남이 재현된 듯이 말이다. 그래서 야스케는 그 요괴 아이를 제 손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했고, 센야가 야스케를 사랑과 헌신으로 키워줬듯이 야스케도 센키치를 사랑과 헌신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자, 이렇게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새롭게 시작한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1> 관점 포인트 : 애초에 '성인소설'로 써낼 작정이었던 작가 히로시마는 <요괴의 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의 시작을 꽤나 폭력적이고 야시꾸리(?)하게 설정하며 풀어냈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어린이책'으로 분류하지 않고 그냥 '소설책'으로 분류할 정도였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한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애초에 어린이 독자를 위해서 쓰고자 했던 것인지 상당히 '순화(?)'된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요괴'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잔혹하고 끔찍한 설정'이 담겨 있긴 하지만 적어도 '전작'에 비해서는 그나마 어린이 독자가 읽어도 좋을 정도로 여겨질 정도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암튼 주된 이야기는 야스케가 요괴 아이 센키치를 사랑과 헌신으로 잘 키운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매 화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나서 야스케와 센키치를 이상하고 요상한 사건에 빠져들게 만드는 '서브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관계로 전작인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와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전작에서는 '센야와 야스케'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야스케와 센키치'로 바뀐 것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어린 야스케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요괴 아이 돌보미'로서가 아닌 '요괴 아이 보호자'로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이 확연히 달라진 점이다. 그래서 전작에서는 '아이의 심정'으로 사건을 대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부모의 마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라진 것이다.
한편, '입장'이 달라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전작에서는 요괴 아빠(센야)가 인간 아이(야스케)를 기르는 상황이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 아빠(야스케)가 요괴 아이(센키치)를 키우기 때문에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 차이가 참 묘하게 작동한다. 왜냐면 아이를 돌보거나 보호하는 아빠의 '능력'이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센야는 요괴 가운데서도 출중한 능력을 갖춘 나름 능력자였지만, 야스케는 고작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괴 아이를 키우기 위한 기본적인 능력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전작에서는 야스케가 사고를 치면 센야가 손쉽게 해결해내곤 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센키치가 사고를 쳐도 인간인 야스케가 직접적으로 해결해줄 능력이 없다. 그래서 전작에 비해서 '인간 야스케'를 돕는 캐릭터(등장인물)가 더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야스케는 아무런 능력도 없이 요괴 아이 센키치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인간인 야스케에게 부족한 것이 많긴 하지만, 딱 하나 그 누구보다 출중한 능력이 있다. 바로 인간이든 요괴든 야스케를 돕고 싶게 만드는 '선량함'이다. 단순히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요괴를 구분하지 않고 아무런 편견도 없이 '똑같이' 대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야스케가 '버려진 아이'였지만 온갖 요정과 신, 그리고 요괴까지 야스케를 살려내려 애썼고, 야스케도 그런 존재들의 배려에 부족함 없이 '선함'으로 보답을 하는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와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것이다.
나가는 글 :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을 읽으면 그냥저냥 '일본소설의 느낌'에서 그치지 않아서 좋았다. 기괴하다 못해 끔찍하고 참혹한 '이상한 이야기'만 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에게서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따뜻하게 만드는 선량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과응보라는 것이 작용해서 '나쁜 짓'을 일삼은 악당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잔혹한 처벌(?)을 내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끔찍한 겉모습에 해쾨망측한 짓만 하고 다니는 요괴에 대한 잘못된 편견만 부각하지 않고, 요괴일지라도 인간 못지 않은 '선량함'을 가지고 있다고 밑바탕에 찐하게 깔아놓았다.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요괴의 아이> 시리즈에서도 그런 착한 마음씨가 엿보여서 좋았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게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또 우리의 정서와는 좀 달랐다. 한국고전소설에서 주로 표현되는 '권선징악'은 착한 마음을 권하고 나쁜 마음에는 벌 준다는 뜻이지만,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무작정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착한 마음씨를 '권'한다는 마인드란 말이다. 또한 벌준다는 뜻에도 나쁜 마음씨를 '경계'하고 '멀리'하라는 뜻이지 나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을 내려서 고통을 줄지언정 죽여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갱생'하도록 따끔하게 혼을 내는 선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국의 권선징악은 착한 마음씨에 '좋은 결말'이, 나쁜 마음씨에는 '나쁜 결말'이 뒤따른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강하지, 처벌을 내리고 완전히 '격리'시켜 버리는 내용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히로시마 레이코의 '권선징악'은 착하게 살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거다. 후회하지 말고 나쁜 마음씨를 고쳐 먹으라. 이렇게 경고했는데도 어기면, '넌 죽음', '넌 소멸', '넌 파국'..이런 식이다. 이러면 죽기 싫고 불이익 당하기 싫어서라도 끝까지 저항하고 죽을 때까지 발악을 하고 말 것이다. 이건 진정한 '권선징악'이라 부를 수 없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다른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쁜 놈이 '강자'여도 힘 없고 선량한 약자는 괴로워하고, 착한 이가 '강자'여도 힘 없고 악독한 약자는 저항해봤자 죽을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 속에서는 '용서'와 '관용'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용서해줄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리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겨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용서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관용을 베풀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쉽다.
그렇기에 히로시마 레이코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일본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은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는 것으로, 나쁜 놈에게는 '벌'을 내리는 것으로 엔딩을 장식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등장인물 가운데 악당은 대부분 '다음 화'에 나오기 힘들다. 자잘한 악당들은 한 회 딱 등장한 뒤에 사라지고, 아주 강력한 '대악당'의 경우에는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 보스'로 등장해서 최후까지 발악을 하다 장렬하게 죽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끝맺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점이 참 아쉽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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