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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8 - 여포와 조조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전략 삼국지 8 : 여포와 조조> 요코야마 미츠테루 / 박영 / 대현출판사 (2002)
[My Review MMCCCLXVII / 대현출판사 8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여섯 번째 리뷰는 읽다보니 '죽고 죽이는 장면'만 클로즈 업을 하고 있는 <전략 삼국지 8>이다. 천웨이동의 <중국정통 만화 삼국지>라는 책을 봐도 '죽이는 장면'이 나오고, 우리 나라의 <고우영 삼국지>에도 '죽고 죽이는 장면'은 나온다. <삼국지연의>가 태평한 시기도 아닌 전국시대만큼이나 혼란한 왕조교체기였으니 어찌 전투나 전쟁 묘사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태평한 시대에도 궁중암투로 벌어지는 정치싸움에서도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는 장면이 연출된다. 하지만 전쟁은 그 양상이 더욱 심하기에 그런 혼란한 시대를 '만화'로 그리는 작업을 할 때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유독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가볍게 여기는 '인명경시 풍조'가 엿보여서 불편한 점이 있다. 그래서 앞서 천웨이동과 고우영 화백을 예로 들은 것이다.
천웨이동은 <삼국지연의> 속의 '명장면'을 한컷 한컷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서 묘사하고 나머지 줄거리는 과감히 스킵(건너뛰기)하는 방식으로 압축과 생략의 묘미를 잘 살려냈다. 거기다 장수와 장수의 대결은 가장 멋진 각도(!)로 조명하여 '삼국지팬'이라면 두 주먹이 불끈 쥐고 손에 땀이 찰 정도의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줄 정도의 쾌감을 선보인다. 반면에 고우영 화백은 '인명 살상'이 벌어지는 장면을 그릴 때 '감정적 묘사'가 뛰어나다. 그래서 '사람 vs 사람'의 대결이지만 '의 vs 불의'의 싸움임을 분명히 밝히고, 의가 승리할 때에는 '정의'가 살아 있음에 환호하게 만들고, 의가 패배할 때에는 슬픔과 비통, 그리고 분노가 일어나게 그려낸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독재자'가 폭정을 일삼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 따위다. 그런데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장수 대 장수'의 명대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도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끊어내는 장면을 '클로즈 업'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챙챙 칼부림을 하다가 악하고 죽는 장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단칼에 목을 뎅겅 자르는 장면, 힘 없는 노인과 아이는 달아나는 도중에 등을 찔려 죽고 젊은 여인들은 겁탈을 당하고 죽여버리는 잔악한 장면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여기에 '모자이크 처리'된 장면은 날카로운 무기와 찔리거나 베이는 동작, 그리고 효수된 머리 따위를 흐릿하게 처리했을 뿐이다. 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일까?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전략 삼국지 8> 관점 포인트 :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인물들이 죽어 간다. 동탁이 폭정 끝에 여포에게 배신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조조가 연주에 정착하고 아버지 조숭을 모셔오는 과정에서 도겸의 초대를 받아 환대를 받은 뒤에 '도겸의 부하 장개(황건적 출신)'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조는 이 때문에 원한을 갚겠다며 '서주의 백성'을 도륙한다. 하지만 요시키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 조조의 서주대학살 장면이 누락된 때문인지, 요코하아 미츠테루도 이 대목을 그냥 건너뛰었다. 대신 조조가 서주 공략을 위해 연주를 비운 사이에 여포가 조조의 근거지를 빼앗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조조와 여포의 대결'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여기까지가 <전략 삼국지 8>의 줄거리 전부다. 설명이 너무 간단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책의 내용 자체가 그렇다. 그저 죽고 죽이는 장면 묘사에만 치중할 뿐, 왜 서로 죽고 죽이는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으로 처음 <삼국지연의>를 접하는 독자라면 '고전의 깊이'를 전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유비가 주인공이구나. 조조가 악당이구나. 그런데 유비의 꿈이 결국 실패하는구나. 그 정도의 감흥밖에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무능하고 어리석은 지배자로 인해 국정이 문란해지면 결국 힘 없는 백성들만 개고생을 한다는 비판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저 약육강식, 적자생존, 힘 있는 사람만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비정한 현실만을 느끼게 해줄 뿐이다. 그나마 <삼국지연의> 등 여러 책을 먼저 읽고 주제와 깊이 등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만이 '이런 식으로 <삼국지>를 즐길 수(?)도 있구나' 싶은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삼국지연의>를 즐기는 독자들이라면 이런 거친 방식으로 '만화 삼국지'를 펴낸 것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하게 될 것이고 말이다.
이런 '폭력'에 길들여지고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것을 '가스라이팅' 당한다고 한다. 일본은 이를 국가적으로 강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름다운 전통이라느냥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어지럽고 무질서한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한 지혜로 볼 수도 있다. 일본이 그토록 자랑하는 '사무라이'가 정권을 잡고 일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막부정부'가 일왕정권을 대신했던 시절에 '사무라이의 말'은 바로 법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높은 신분은 누리고 낮은 신분은 억압받고 빼앗기는 것이 당연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고전작품'을 오늘의 우리가 읽고자 권장하는 것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고전은 시대가 달라져도 여전히 그 가치가 있기에 읽히는 것이고, <삼국지연의>도 바로 그 때문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럼 그 가치는 무엇일까?
적어도 '전란의 시대'에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생생히 살려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과 새 나라를 만들려는 웅지를 품은 영웅들의 등장과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국가란 무엇이고, 영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 바로 정의롭게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읽는 것이다. 나관중은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원말명초 때 오랑캐들에게 짓밟힌 '한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려 한족 영웅들의 이야기를 추려냈던 것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의로운 영웅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역사의 승자였던 조조가 아닌, 비록 패자였지만 그가 세우려 했던 나라를 보여주며 그 뜻을 기리고자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전략 삼국지>에 아쉬움이 큰 것이다.
나가는 글 : 90년대 이 책을 어렵지 않게 접하고 읽던 친구를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낱권으로 구매하기도 힘들었고 구매하려면 '전권 60권'을 다 사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부자친구들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시절이라 선뜻 책을 빌려 달라는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런 추억이 있었기에 이번에 '도서관 대여'를 통해서 읽을 수 있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다른 책도 밀어둔채 이 책부터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서 솔직히 당황스러운 심정이다. 그 시절에 어깨 너머로 훔쳐볼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말이다.
하긴 90년대의 일본은 대단한 나라였다. 부러운 나라였고 굉장히 앞선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들이 과거의 잘못도 반성하지 않고 뻔뻔하게 구는 자세를 취해도 '실력'에서 앞서지 못했기에 당당히 꾸짖지 못하고 주눅 들어 있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었다.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나에게 그 수많은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손쉽게 구해서 볼 수도 없는 '한계'가 아쉽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이 열리고 이젠 '제한'없이 볼 수 있게 되었건만 보면 볼수록 '기대이하'로 다가오기에 실망이다. 어릴 적에 동경했던 나라가 겨우 이 정도였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철인 28호>, <바벨 2세>, <요술공주 세리>...요코야마 미츠테루라는 작가 이름도 모르고 즐겼었는데 말이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고 뚜껑을 함부로 열지 말았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