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자연을 원한다 - 환경신경과학 석학이 밝혀낸 지친 뇌를 가장 빨리 회복하는 방법
마크 버먼 지음, 김미선 옮김 / 다산북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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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뇌는 자연을 원한다 : 환경신경과학 석학이 밝혀낸 지친 뇌를 가장 빨리 회복하는 방법> 마크 버먼 / 김미선 / 다산초당 (2026) [원제 : Nature and the Mind]

[My Review MMCCCLXXIV / 다산초당 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두온세 번째 리뷰는 혹사 시킨 현대인의 뇌를 찐으로 깨우고 참으로 회복시켜주는 최고의 방법을 알려주는 <뇌는 자연을 원한다>다. 도시에서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은 늘 지쳐 있다. 그래서 지친 몸을 회복시키려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휴일 내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하루종일 게으르게 지내도 월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길에 나서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푹 쉬었는데 왜 지쳐 있는 걸까? 진정한 휴식을 취하려면 몸 뿐만 아니라 '뇌'도 쉬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뇌 활동'을 멈추고 뇌에 휴식을 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나마 '수면시간'이라도 7~8시간 정도 일정하게 지켜준다면 뇌 휴식에 도움이 되겠지만, 현대인들, 특히 도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침대맡에 놓인 '스마트폰' 때문에 뇌가 충분히 휴식을 취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 이른 아침에 울리는 알람소리와 한밤중에도 나를 찾는 톡 알림소리 따위에 '5분대기조' 마냥 항시 '준비태세'를 갖춰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족한 잠 때문에 각성하지 못한 뇌를 깨우려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모닝커피'를 달고 산다. 그렇게 억지로 뇌를 각성시키는 것이 날마다 반복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각성제에 '중독' 증상이 일어나서 각성 효과가 떨어지고 복용양은 점점 늘어나고 휴식이 필요한 뇌는 더욱 지치게 된다. 그렇다면 지친 뇌를 확실히 회복시켜줄 방법은 어떤 것일까?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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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자연을 원한다> 관점 포인트 : 모처럼 느긋한 아침을 맞이한 당신이 깨어나서 처음 하는 일이 무엇인가? 아마도 우아한 음악을 틀어놓은 거실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이나 요가를 하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TV화면부터 켜고 세상 돌아가는 뉴스나 놓쳐버린 드라마나 영화 화면을 틀어놓고 멍한 뇌를 억지로 깨우려 모닝커피부터 찾아들고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 앉아 TV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간단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 그대로 소파에 누워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부스스 일어나면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다음날에도 큰 변화 없이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고자 일상을 반복하지만 정작 휴일이 다 지나도 '회복'은 안 되어 있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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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뇌 휴식'을 해줘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저 멍 때리고 수면 시간을 늘리는 것만으로 충분한 '뇌 휴식'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여전히 '뇌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쉬어야 하는가? 이 책 <뇌는 자연을 원한다>에서는 이렇게 답을 한다. "한 그루의 나무를 쳐다보는 것으로 시작해보라"고 말이다. 우리의 뇌는 '타고나기'보다는 '만들어지는' 쪽으로 진화되어 왔단다. 다시 말해, DNA 유전자로 뇌가 '확정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따라 뇌는 '경험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 인간은 내가 살고 있는 주위 환경이 좋은 곳이어야 '웰빙'을 챙길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두를 필요 없이 차분하게 읽어나가면서 우리의 뇌를 건강하게 살아서 숨쉴 여유를 갖게 해주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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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뇌 건강을 위해서라도 '자연 환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다면 더욱 좋겠지만 바쁜 현대인들에게 그럴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도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을 감안한 대처방안을 제시했다. 바로 '나무 한 그루'부터 시작하라고 말이다. 잠깐의 휴식시간에도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도 그리 어려운 '제안'은 아닐 것이다. 도시에서 들려오는 '소음 공해'로부터 벗어나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때에는 사무실 한 구석에 놓여 있는 나무나 꽃 등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바라보거나 가까이 곁에 있거나 직접 만져보는 것도 좋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의 뇌는 분명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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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렇게 '기분전환'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 '변화'가 시작된다. 나무가 더 많은 곳을 찾아 잠시라도 그곳에서 머문다면 더욱 효과를 볼 수 있단다. 왜냐면 나무는 '천연 항우울제'이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나오는 성분이 무엇인지 굳이 알 필요도 없다. 당신이 과학자라면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 책을 읽는 것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성분이 무엇인지 몰라도 효과는 확실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말이면 나무가 더 많은 곳을 찾아가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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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할 것은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단순히 업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도 효과는 시작되지만, 자연의 품속에서 '자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는 연습을 하면 좋다는 얘기다. 마치 엄마나 연인의 품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감정이 풍부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을 반복하면서 우리의 뇌 속에 '자연'을 품을 수 있게 해주면 효과만점이란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행동'도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다. 인류가 남긴 수많은 고전과 경전에서 말한 지혜와도 상통하는 내용이 아니던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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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일까? 바로 '도시와 자연의 공존'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것을 실현시켰다.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거닐면서 조금만 시선을 멀리하고 둘러보면 높은 빌딩숲 사이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기다 서울의 한복판에는 '남산'이라는 자연공간도 있다. 또 외국인들이 깜짝 놀라는 '한강'과 '청계천'이 도심 한 가운데에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하면서 흐르고 있다. 이제 도쿄나 파리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가본 적이 없다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간단히 '검색'을 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도시들에는 건물만 있고 자연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고 편평한 도심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건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결국 이 책이 필요한 곳은 바로 그런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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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에게는 이 책이 필요 없을까? 그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멋지게 '자연'을 품고 있지만, 정작 그 아름다운 '공존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나무가 가까이 있는 환상적인 도시에서 살고 있으면서 '자연'을 머릿속에 품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뇌'를 그저 혹사시키고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서히 병 들어가고 우울해져 간다. 치료법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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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릴 적부터 자연속에서 맘껏 뛰어 놀 수 있어야 한다. 숲이 교실이 되어야 하고, 나무를 벗 삼아 살아가는 지혜를 가꿔 나가야 한다. 그래야 어른이 되어서 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뇌'가 지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 숨쉴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수명은 대폭 늘어난데 비해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는 너무나 벅찬 삶을 살고 있다. 이대로는 오래 살아도 잘 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법은 '자연속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책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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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10 - 서주의 모략전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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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10 : 서주의 모략전> 요코야마 미츠테루 / 박영 / 대현출판사 (2002)

[My Review MMCCCLXXIII / 대현출판사 10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두온두 번째 리뷰는 조조를 상대하기 위해 유비는 여포를 품으려 하는 <전략 삼국지 10>이다. 여포의 최후가 다가온다. 여포는 '정사 삼국지'에서 '비장'이라고 소개될 정도의 맹장이었다. 날아다니는 장수라는 뜻이다. 이에 비해 '만인지장'이라고 소개되는 장수도 있는데, 바로 장비와 관우다. 만 명의 적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장수란 뜻이다. 그럼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삼국지연의>에서는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조조는 그런 여포에게 기습을 당해 '빈집'을 빼앗겼고, 지략으로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그 사이에 여포는 유비의 품으로 가버린다. 이제 조조는 유비 하나가 아닌 여포까지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유비가 여포를 품은 것이 잘한 일일까?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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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10> 관점 포인트 :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만 연속으로 보여주던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본격적인 '전략 싸움'을 펼칠 대목에 이르자 '만화 삼국지'다운 영웅들 간의 '지략 대결'을 선 보여주었다. 그 첫 대결이 바로 조조가 지략으로 '두 마리의 호랑이를 서로 싸우게 만든다'는 '이호경식지계'를 펼친 것인데, 바로 유비와 여포를 서로 싸우게 만든 뒤, 어느 쪽이 이기든 조조는 구경만 하다가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계략이었다. 허나 이를 간파한 유비는 오히려 여포에게 조조의 밀서를 보여주며 조조가 우리 둘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 한다며 속아 넘어가지 말자고 굳게 의리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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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조조는 유비에게 어명을 전달하며 '황제의 명으로 전하노니, 원술을 공격하라'는 정식 명령서를 전한다. 유비는 이 역시 조조의 간계라는 것을 간파하지만 '황제의 명'을 어길 수 없다며 출격하게 된다. 바로 '구호탄랑지계'다. '호랑이가 표범을 잡으러 간 사이 주인 없는 굴을 이리가 노린다'는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 계책은 성공을 거둔다. 유비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여포가 의리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허나 유비 측에도 큰 실수를 저지른 일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장비'가 술을 마시고 서주성의 경계를 허투루 지키는 바람에 여포에게 무방비로 빼앗기고 만 셈이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서주성을 빼앗긴 장비는 원술과 싸우고 있는 유비를 찾아가고, 원술은 여포에게 유비의 뒤를 공격하면 엄청난 보상을 주겠다며 꼬셔서 유비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포위 공격을 당한 유비는 협공을 피해 도망갔고, 여포는 원술에게 약속한 보상을 당당히 요구했으나 원술은 유비가 도망갔다며 보상은 나중에 주겠다며 딱 잡아뗀다. 이에 여포는 유비를 불러들여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지만, 유비는 여포의 신의를 믿을 수 없어 서주성을 여포에게 넘기고 자신은 소패성으로 가겠다며 한 발 물러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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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죽고 그의 아들 손책은 원술의 휘하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손책은 아버지의 유산을 고스란히 되찾기 위해 원술에게 병력을 요청하지만 단박에 거절 당한다. 그러자 손책은 원술에게 '전국옥새'를 담보로 잡고 병력을 빌려 강동땅을 개척하러 떠난다. 그곳에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손책'이란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는데, 마침 유요의 휘하에 머물던 '태사자'라는 장수와 맞닥뜨려서 한 판 승부가 벌어졌다. 과연 그 승패는 어떻게 될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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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이제 겨우 '만화 삼국지' 다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스토리가 전개되었다. 전투씬만 즐비한 대목에서는 지나친 '폭력성'과 '잔혹함'만 보여주었는데, '지략대결'을 보여주는 대목에 이르니 <삼국지>다운 이야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등장인물이 점점 늘어날수록 인물캐릭터의 특징이 고갈되었는지,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손책 등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등장인물을 제하고는 다 비슷비슷한 유형으로 외모를 표현하고 있어서 차별점이 두드러지지 않아서 밋밋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주요 등장인데도 등장시키지 않고 과감히 '삭제'된 캐릭터가 종종 발생했다. 대표적인 예로 여포의 책사로 합류했던 '진궁'이 사라지고, 평범한 '책사'가 여포에게 계략을 알려주는 것으로 대체했다. 또한 조조에게는 책사도 무수히 등장하는데, 조조에게 계책을 알려주는 캐릭터도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냥 퉁쳐버리고 말았다. 분명 '순욱', '순유', '정욱' 등 굵직굵직한 책사 캐릭터인데도 일일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밖에도 '1회성 출연'하고 바로 사라져버리는 캐릭터들은 인물그림도 앞서 나왔던 캐릭터와 비슷하게 처리하며 빠르게 지워버리는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나름 교묘하고 현명한 '표현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삼국지>를 정말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아쉬움이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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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비는 왜 여포를 품으려 했을까? 다들 아시다시피 조조가 여포를 궁지로 몰아 사로잡은 뒤에 처형을 결정하는 순간에 유비는 조조에게 여포가 '배신자 캐릭터'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처형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차없이 죽일 여포였는데, 왜 그런 배신의 아이콘과 손을 잡으려 했고, 소패성에 이어 서주성까지 내어주며 환심을 사려 애썼던 것일까? 그건 오직 '조조'를 상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대비책이었다. 조조는 서주를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버지의 복수를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그건 둘째 문제고 서주만 차지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조조는 '서주 대학살'까지 감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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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그건 유비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비의 장점은 '사람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는 마법을 부린다는 점이다. 유비의 매혹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조조는 감히 그런 방법으로 유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주 백성들에게는 철저히 유비와 정반대의 전략을 감행했다.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공포를 심어놓은 것이다. 그 덕분에 유비는 서주 백성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강력한 조조의 군대를 상대할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아무리 서주 백성이 조조가 아닌 유비를 원한다고 해도, 민심만으로 서주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를 상대하기 위해서 여포와 손을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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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여포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각과 곽사의 군대에 쫓겨 달아나 원술에게 기댔으나 단칼에 거절 당했고, 원소에게 기대보았으나 푸대접만 당했다. 그렇게 갈 곳이 없자 아무런 힘도 없는 유비를 찾아갔지만 뜻밖에 '환대'를 받고 기분이 좋아진 여포였다. 그러면서 은근히 유비가 사람을 대접할 줄 안다면서 유비가 서주를 얻을 수 있었던 공도 사실 여포, 자신에게 있었다며 공치사를 하며 소패성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여포에게 지혜가 있었다면 이때 유비와 더욱 돈독한 정을 나누며 세력을 더욱 탄탄하게 기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여포에게 이런 '천하이분지계' 같은 큰 그림을 그릴 능력은 없었고, 유비는 여포를 컨트롤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여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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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때 유비 곁에 제갈량이 계책을 내어주며 여포를 컨트롤 하는 책사로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이 당시 제갈량은 '10대 소년'에 불과했다. 아무리 천재소년이었더라고 하더라도 '어른들의 싸움'에 뛰어들기에는 너무 어렸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렇게 '가정'을 하면서 읽으면 더 흥미롭고 재밌는 것은 사실이다. '만화 삼국지'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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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9 - 조조의 대두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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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9 : 조조의 대두> 요코야마 미츠테루 / 박영 / 대현출판사 (2002)

[My Review MMCCCLXXII / 대현출판사 9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두온한 번째 리뷰는 동탁 사후에 혼란한 정국이 펼쳐지다 조조가 새롭게 두각을 드러내는 <전략 삼국지 9>다. 사실상 이 시기에 한 나라는 망했다. 천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름을 빌려주는 것'이 전부였고, 실제 권력은 천자를 볼모로 잡고 있는 군벌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것은 '힘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로 압축되었다. 흔히 이 시기를 '군웅할거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다른 말로 '영웅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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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9> 관점 포인트 :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연주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서주 공략에 나섰다. 이때 서주태수 도겸을 도와 조조의 성난 복수를 잠재우고자 유비가 앞장을 서자, 때마침 떠돌던 여포가 '빈집털이'를 시도했고 적중했다. 그래서 조조는 단숨에 서주를 복속시키고 자신의 영지로 만들려던 계획을 틀어서 여포와 힘겨운 한 판 승부를 펼친다. 그야말로 '조조의 지략 vs 여포의 무력'이 승부를 가르는 일진일퇴가 펼쳐진 것이다. 조조와 여포가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도겸이 죽고 유비가 서주태수를 넘겨 받는다. 허나 아직 황제의 위임을 정식으로 받은 것이 아니기에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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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탁 사후에 장안의 집권세력은 당연히 동탁을 직접 죽인 여포가 틀어쥐고 있어야 했으나, 여포는 연이은 '배신'으로 인해 인심을 잃었고, 여포의 뒤를 받쳐줘야 할 왕윤조차 이각과 곽사 등 동탁군의 잔당이 남아 심하게 저항을 하고 끝내 헌제마저 볼모로 사로 잡힐 판국이 되자 왕윤은 성문 꼭대기에서 자결을 하는 것으로 황제의 안전을 보장받게 된다. 여포도 이각과 곽사의 군대에 쫓겨 원술에게 달아나버렸고, 이제 장안은 동탁 잔당군에 의해 통치되는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게 된다. 특히 이각과 곽사는 툭하면 싸움박질을 하는 통에 헌제는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벌벌 떨며 지내게 된다. 이에 헌제는 낙양으로 되돌아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되는데, 그렇게 몰래 탈출한 것이 유효해서 낙양까지 도망오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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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낙양은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백성들도 터전을 잃고 유랑을 했고 장락궁은 성문이 부서지고 성벽이 허물어져 '방어'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래서야 뒤쫓아오는 이각과 곽사의 군대를 상대로 막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급히 불러들여 자신을 지킬 자를 찾게 되는데, 조조가 가장 빨리 도착해서 동탁 잔당군을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허나 여전히 낙양에서 버틸 수는 없기에 조조는 헌제에게 '허도'로 다시 한 번 천도하길 요청한다. 헌제는 어쩔 수 없이 윤허를 하며 '조조의 손아귀'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과연 조조는 충신으로 남을까? 아니면 희대의 간웅이 되어 한 나라를 꿀꺽 집어 삼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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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이 시기는 그야말론 '혼돈, 그 자체'다.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고, 나라를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두 가지'를 얻기 위해 각지의 군웅들이 무단으로 힘겨루기를 하던 시기다. 그야말로 '무법 천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 그 두 가지란 무엇일까? 바로 '군대'다.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힘' 밖에 없다. 아무리 정의를 외치고, 도덕과 윤리를 지키자고해도 공염불에 불과하다. 힘 있는 자가 힘으로 빼앗으려 들면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힘 대 힘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는 세력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권력의 상징이자 권위의 상징인 '황제'다. 아무리 무법 천지라 하더라도 '왕가의 혈통'을 함부로 어찌 할 수 없던 시대였다. 특히 역대 중국 왕조에서는 황제는 '하늘의 아들(천자)'이라는 개념을 신봉했기에 하늘이 정해준 왕가의 핏줄은 오직 '하나'이며, 이를 무시하고 멋대로 왕조를 개창하며 '황제'라 주장을 해도 누구도 따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더구나 뻔히 '황제'가 버티고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면 '역적'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할 때까지 다구리를 당할 수도 있으니 괜히 헛물켜다가는 망하기 딱 좋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황제를 볼모로 잡아두고 '황제의 명'을 빌려 제 욕심을 챙기는 방법이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다 나라가 안정이 되면 힘 센 영웅이 그 권력을 '황제'에게 되돌려주고 물러난다면 오래도록 충신으로 남을 것이고, 황제를 핍박해서 그 자리를 탐하면 '찬탈자'가 되어 총공격을 당할 것이고, 그 공격마저 다 물리치고 천하를 일통하면 새 왕조를 개창한 '개국군주'로 떠받들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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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때는 무르 익었다. 하야흐로 '군웅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룰은 딱 하나다. 가장 힘 쎈 사람이 누구인지만 가리면 된다. 황건의 난에 이은 전국적인 '전란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대를 가장 잘 표현한 책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전략 삼국지>다. 숨 가뿔 정도로 전투에 전투가 이어지는 대목이라 그런지 서로 속고 속이는 계략이 난무하는 가운데 오직 '승자'만이 주목을 받는 그런 이야기가 펼쳐지니 꽤나 진지하게, 아니 '진심'을 다해서 그리고 또 그린 모양이다. 퍽 자연스럽다. 허나 <삼국지>를 이런 방면으로만 읽게 되면 '하나만 읽고 둘 이상을 읽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오직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만 불태우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기면 좋고 지면 나쁘다'는 뻔한 지혜만 가지고 인생을 논할 수나 있겠느냔 말이다. <전략 삼국지>는 그 한 가지에만 너무 집중을 하고 있다. 그 속에 감춰진 '또 다른 지혜'를 읽어내는 힘이 없다면 되려 '승자독식이라는 폭력을 정당하게 여기는 주장만 옳다'는 반쪽짜리 지혜만 얻게 될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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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 ㅣ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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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 히로시마 레이코 / 김지영 / 넥서스Friends (2023)

[My Review MMCCCLXXI / 넥서스Friends 13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두온 번째 리뷰는 이야기 서사의 깊이보다 캐릭터의 다채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지 고민하게 만드는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이다. 일본 문학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어릴 적부터 즐겨보았다. 그 정도의 풍월로 일본 문학도 나름의 감상법(?)으로 즐기고 있다. 그런데 일본 문학에서 추구하는 경향은 '캐릭터의 다채로움'이 전부는 아닐 런지 궁금증이 일었다. 이야기가 인기를 끌고 있다싶으면 '회차'가 기약 없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서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에서도 그런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닐테지만, 대개의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소설들은 '주인공이 겪는 서사'를 다채롭게 하면서 동시에 서사의 깊이를 추구하며 읽는이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장편소설을 읽는 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판타지소설의 원조격인 <반지의 제왕>이나 교과서라 부를 만한 <해리포터>에서도 주인공이 다채로운 서사를 겪으면서 '성장'하고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그에 걸맞는 답을 찾아나가며 '인생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더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일본 문학에서는 '문학적 깊이'를 추구하기보다 '캐릭터의 다양성'만을 밀어붙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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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3> 관점 포인트 :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은 '호빗 종족'이다. 그 외에도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 종족 등이 등장하지만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서 떠나는 '반지원정대'에 속한 주인공 일행의 서사에 주목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렇게 주인공 캐릭터는 '한정' 되었고 나머지 캐릭터들은 다들 조연급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수없이 등장하지만 결국 '서사'를 풍성하게 해주는 들러리나 하객일 뿐이다. 결코 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서사를 등장시켜서 독자의 시선을 빼앗지 않는다. <해리포터>시리즈가 7편까지 나왔지만, 주인공은 해리포터와 론, 그리고 헤르미온느로 압축된다. 그 외에 호그와트에서 함께 이야기를 펼쳐가는 조연급 캐릭터들도 각자의 포지션에서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서사를 돋보이게 할 뿐이다. 그런데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에서는 어떨까? 분명 야스케와 센키치가 주인공인 것은 불변의 진리인데, 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서브 캐릭터(조연)'의 서사도 일일이 다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서사는 풍성해지지 않고 빈약해져 버리고, 도리어 조연급 캐릭터의 서사가 강렬하게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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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녀전사 세일러문>(1992)을 예로 들어 보자. 일단 시작은 '달의 요정 세라'가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으로 변신을 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다가 홀로 적들을 감당하지 못하자 '동료'를 맞이해야 한다면서 '세일러 머큐리'가 합류한다. 그래도 모자라서 '세일러 마르스'가 합류하고, 곧이어 '세일러 비너스'와 '세일러 주피터'가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가 싶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소녀전사를 도와주는 '턱시도 가면'이 등장하더니,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세일러 새턴', '세일러 우라노스', '세일러 넵튠', 그리고 '세일러 플루토'까지 결국 나올 수 있는 등장인물은 다 나오게 된다. 물론 주인공은 '세일러 문 세라'다. 하지만 이야기가 자꾸 겉돈다. 세라가 주인공인데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서사보다 '서브 캐릭터'를 띄워 주고, 심지어 '빌런 캐릭터'의 별도의 서사까지 다 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중구난방이다. 중심 방송보다 '지역 방송'이 더 많은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서사에 집중하기 어렵고 새로 합류한 캐릭터를 외우고 또 외워야 하는 일의 반복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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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전작인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의 후속작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변화가 있었다. '돌봄'에서는 센야와 야스케가 주인공이었지만, '키움'에서는 야스케와 센키치가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센야가 모든 요력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아이처럼 변한 모습이 센키치이므로 큰 변화는 아닌 셈이다. 여기까지는 준수하다. 그런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조연급 캐릭터들'이 점점 늘어난다. 1회성 단발 출연만 하는 캐릭터인줄 알았는데, 계속 출연하다가 결국 '고정'이 되어버린 캐릭터도 많다. 게다가 이야기의 핵심이 '돌봄'과 '키움'이다보니 고정캐릭터들 가운데 '결혼'을 하고 '자녀'를 출산해서 캐릭터 풍년이 되었다. 거기에 서쪽 지궁 봉행소 캐릭만으로 부족해서 동쪽 지궁 봉행소 캐릭터까지 늘어나 버렸다. 그렇게 캐릭터 천국이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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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요괴 캐릭터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그나마 간추려서 이만큼인 셈이다. 이야기를 다채롭게 꺼내기 위해서 '캐릭터 풍년'이 되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고, 그렇게 수많은 등장인물간에 얽히고 설킨 '갈등 구조'가 감상과 감동의 깊이를 더해주는 필요충분조건일테니 즐겨 읽는 독자로서 오히려 환연해 마지 않아야 할 조건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연과 조연의 역전 현상'이 너무 자주 벌어진다는 것이다.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면 등장인물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다.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채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할 시에는 대체로 '1인칭 주인공시점'이 딱 좋다. 독자로 하여금 '집중할 캐릭터'가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주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시점이 역전되어 있다. 주인공을 조연급으로 등장시키고 딱 한 번 등장하고 말 '조연급 캐릭터의 시점'으로 주인공이나 그 일행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 심한 것은 '외전'으로 나와야 할 조연급 캐릭터가 '주연급'으로 둔갑한 이야기도 종종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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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야기 시리즈에 흠뻑 빠진 열혈 독자들에게는 이런 다채로움이 큰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주는 서사적 감동에 목마른 독자들이라면 이런 다채로운 시도는 오히려 실망을 안겨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어떤 캐릭터에 집중하면 좋을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뭔가에 집중 좀 할라치면 '딴 이야기'를 하는 통에 좀 산만한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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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반면에 '이런 맛'을 즐기는 독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깊이보다는 흥미와 오락적 성향을 중시하는 독자들에게는 취향저격일 것이 틀림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색다른 캐릭터들'이 계속 등장하니 재미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일본 문학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에서는 이런 '다채로움'을 선보이는 경향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장편시리즈가 이런 맛으로 쏠쏠한 재미를 본 출판사들이 꾸준히 '이런 맛의 책'만 계속 출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는 '등장하는 인물'을 전문적으로 소개해주는 코너를 따로 만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책도 출간할 정도다. 유튜브 영상에서도 '등장인물 정리'만 해주면 헷갈리는 줄거리도 단박에 이해가 될 정도로 '다수의 캐릭터'가 등장하고 모든 캐릭터가 다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개는 '장편소설'의 경우에 복잡한 캐릭터관계도를 정리할 필요를 느끼는데, 일본 문학은 길고 긴 시리즈를 거듭하더라도 이야기 서사는 대체로 '단편소설' 분량인 것을 보면, 결국 '서사'로 승부하기보다 '다수의 캐릭터'를 등장시켜 상품성만 높이는 경향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일본 문학에서조차 '캐릭터 상품 판매'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본 책을 판매한 수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가 많다.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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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캐릭터를 더 추구하는 경향이 나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무 문제' 없다. 이건 장단점의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난 야스케는 별로야. 대신 견신 쓰즈미마루가 더 좋아. 이유는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야"라면서 캐릭터 컨테스트를 펼칠런지도 모른다. 캐릭터 상품화로 더 큰 수익성이 보장된다면 마다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난 이게 별로다. 캐릭터 천국은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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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에세이 #요괴의아이를키우고있습니다 #히로시마레이코 #캐릭터천국 #다채로움 #추구미 #책이있는구석방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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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 ㅣ 봄나무 문학선
어슐러 K. 르귄 지음, S.D. 쉰들러 그림, 김정아 옮김 / 봄나무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날고양이들> 어슐러 K. 르 귄 / 김정아 / 봄나무 (2009) [원서 : Catwings]

[My Review MMCCCLXX / 봄나무 9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아흔아홉 번째 리뷰는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의 판타지소설 <날고양이들>이다. 요즘 방정리 겸 책정리를 하고 있는데 예전에 리뷰를 썼던 책들도 다시 읽고 있다. 그 덕분에 '읽고 써야할 책들'조차 잠시 멈춤 신호등을 켜놓고 부랴부랴 삼매경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다 오래전 2011년에 쓴 이 책의 내 리뷰도 다시 읽게 되었다. 벌써 15년이나 흘렀다니 내가 참 늙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르 귄의 판타지 <어스시의 마법사>도 우연한 계기로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줄도 모른채 집어 들었다가 반납일 하루를 남기고 뚝딱 읽어버렸던 책으로 기억한다. <반지의 제왕>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반지의 제왕>보다 더 강한 흡인력으로 빨아들이는 몰입력을 발휘하는 책이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 책도 다시 읽고 리뷰하련다. 그 시절에는 책을 읽기만 하던 시절이라 리뷰를 전혀 남겨놓지 않은게 아쉽기도 하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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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 관점 포인트 : 르 귄은 시리즈를 많이 낸 작가다. 그래서 이 책도 '날고양이' 시리즈로 열두 편을 썼다는데, 그 가운데 4편을 엄선해서 이 책 <날고양이>로 '국내최초 완역본'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연재시기는 1988년부터 1999년까지란다. 고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지만, 나는 이 시절을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굳이 '고전'으로 분류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분류하면 나조차 '고전'으로 불려야 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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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다름'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날개 달린 고양이들'이 자유와 희망을 노래하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을 때 '고양이들에게 왜 날개를 달아주었나?'라는 질문은 적절치 못하다. '날개'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고양이'에 더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날개가 있든 없든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란 말이다. 그리고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다름 아닌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왜 다른 고양이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덧붙여야 할 내용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삶'을 사는 고양이는 단 한 마리도 없는데도, 왜 '조금 다른 모습'으로 '조금 다른 삶'을 사는 고양이의 평범한 삶을 침해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날개'가 달렸다는 사실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날개를 달았다는 것은 '더 나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모자란 '장애'나 '질병' 따위가 아니라 무려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날개'를 달았단 말이다. 이 뜻은 그냥 평범한 고양이들보다 훨씬 더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도 평범한 고양이보다 더 천대받고 위험한 삶을 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왜 그래야 하나? 그게 '정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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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류 사회에 속하기에 '부족'하거나 '특출'난 뭔가가 있으면 사회구성원으로 원만한 삶을 누리기에 문제가 많을 수는 있다. 그런데 부족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이해하기 쉬워도 특출난 무엇 때문에 '소외'를 당해야 하는 것은 왜일까? 이 문제는 조직사회를 살아본 경험에 비추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 집단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새로 합류하게 되면 그 뛰어난 인재 덕분에 조직이 발전할 가능성이 높을까?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을까? 놀랍게도 조직이 발전하기는커녕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조차 '평범하게' 변화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무능력한 사람들이 뛰어난 능력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그 능력자의 '날개'를 꺾어서라도 조직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무능한 조직의 생명연장(?)'을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어른들만 그럴까? 놀랍게도 초등학교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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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어나온 못이 먼저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낭중지추'라고해서 뛰어난 재능은 주머니에 싸서 감추려고해도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뜻이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튀어나온 못'은 두들겨 패서라도 튀지 못하게 만들고야 만다. 트럼프 정부의 미국 사회 현주소를 보면 '이민 문제'가 참으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 거의 모든 사회문제를 '이민자' 탓으로 돌리는 트럼프 정부의 기조 덕분(?)에 미국에 정착한 '백인'을 제외한 유색인종 이민자들에게 온갖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강제추방'까지 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를 비롯한 '백인'들도 초기에는 이민자였는데도 말이다. 흔히 '인디언'이라 불리는 아메리카원주민을 대학살하고서 '미국땅'을 차지한 백인들이 원주민이자 주인행세를 하는 꼴이 우스울지경이지만, 그 문제의 심각성은 너무나 끔찍할 정도다. 우리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기술자도 그런 푸대접을 받지 않았느냔 말이다. 저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려고 막대한 투자금과 기술력으로 '공장'을 세워주고, 그 공장의 기계를 관리할 수 있는 '고급 기술교육'까지 시전하려 간 우리 국민인데 말이다. 고마워하기는커녕 '범죄자 취급'을 하며 쇠사슬로 묶고 강제연행한 뒤에 인권보장조차 하지 않고 구타와 모욕 따위를 함부로 사용하며 굴욕감을 주었다. 이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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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와서, 평범한 아빠와 엄마 고양이에게서 '날개'를 달고 태어난 새끼고양이 네 마리가 있었다. 아니 아빠 고양이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으니 뭔가 특별한 능력을 갖춘 고양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 고양이에게는 '날개'가 없다. 그렇게 평범한 엄마고양이는 네 마리의 새끼를 애지중지 키웠지만, 스스로 날 수 있을만큼 자란 새끼들에게 이제 엄마 곁을 떠나서 너희들의 능력을 발휘하여 살도록 하라며 이야기한다. 엄마는 날개가 없으니 따라갈 수 없다면서 말이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한다. 이웃에 살고 있는 숫고양이와 '재혼'해서 살테니 엄마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면서 말이다. 네 마리 새끼고양이는 엄마와 헤어져야 하는 현실에 울먹이지만 더는 엄마를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날지 못하는 '날개 달린 새끼 네 마리'를 홀로 키우느라 얼마나 힘든 고생을 했겠느냔 말이다. 가장 힘겨운 것은 '다른 고양이들의 편견어린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 품을 훌쩍 떠나서 한적한 시골마을에 무사히 정착하는 이야기가 첫 번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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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는 엄마와 헤어져서 그리움에 사무친 새끼고양이들이 어느덧 '어른 고양이'가 되어 다시 엄마를 찾아 도시의 쓰레기통 곁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처음 그 도시를 떠날 때에는 아직 나는 법이 서툴러서 힘들게 고생했는데, 그동안 훌쩍 성장한 날고양이들은 아주 멋진 비행으로 엄마곁으로 날아간 것이다. 물론 네 마리 전부는 아니었다. 두 마리만 모험을 떠난 것이었는데, 그렇게 다시 돌아와 만난 고양이는 엄마가 아니라 아주 귀여운 깜장 새끼고양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귀여운 고양이에게도 날개가 있었다. 아직 너무 어려서 훨훨 날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새끼고양이는 혼자였다. 그리고 덩치도 작고 굶주림에 지쳐 곧 죽을 것 같았다. 곁에 있던 '시궁쥐'가 더 커보일 정도로 말이다. 두 날고양이는 깜장이를 정성껏 돌봐주어 함께 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시킨 뒤에 엄마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찾아낸 엄마는 맘씨 좋은 할머니와 함께 편안히 살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깜장이는 엄마의 새끼였다. 다시 말해, 날고양이들의 '씨 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엄마는 깜장이를 오빠와 언니에게 맡기며 잘 돌봐달라고 전한다. 여전히 도시에서는 날고양이들이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고양이 식구는 다섯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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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야기는 '날개 없는'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이야기다. 모험심 많은 새끼고양이였지만 처음으로 집 나간 모험에 거대한 트럭에 쫓기고 무시무시한 강아지에게 쫓겨 나무꼭대기로 도망가는데 성공해 겨우 목숨은 살아났지만, '내려가는 방법'을 알지 못해 꼭대기에서 벌벌 떨다가 하늘을 훨훨 날아서 온 깜장이와 만나서 무사히 나무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지만, 너무 멀리 나온 뒤에 정신 없이 쫓기고 쫓긴 탓에 집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깜장이와 함께 날고양이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 이야기였다. '날개가 있든 없든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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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는 깜장이의 모험 이야기다. 깜장이도 어른 고양이가 되자 집 주변에서만 남 몰래 날아다니는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멀리 자유롭게 날아가는 꿈을 꾸게 된다. 물론 지금도 만족스런 삶이지만 말이다. 언니 오빠들이 있고, 사랑하는 '날개 없는' 고양이도 함께 있는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깜장이는 자신이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하늘을 훨훨 날아 모험을 떠난다. 더 자유롭게 말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은 시골이 아니라 도시였기 때문에 '도시의 삶'이 더 안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도시에 도착하니 깜장이는 너무 기뻤다. 그리고 도시의 고층 빌딩 사이에 '열린 창문'을 통해서 우아하게 착지한 다음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는 공격적이지도 위협을 가하지도 않고 깜장이를 예뻐하면서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먼 거리를 날아온 터라 고되고 지쳤는데 잘 돌봐주는 남자에게 고마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깜장이의 마음에 쏙든 남자는 깜장이를 하늘에서 날아온 천사소녀라며 추켜세우고 가볍게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고 맛난 음식을 계속 챙겨주었다. 그리고 남자는 깜장이에게 어울리는 예쁜 목걸이를 채워주고 '열린 창문'을 꼭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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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삶은 TV에 출연한 연예인 아이돌 못지 않았다. 번쩍번쩍 사진을 찍어대고 고리 같은 것을 던지며 날아서 통과해보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그걸 성공하면 엄청난 박수소리에 깜짝 놀랐고, 그 뒤에는 맛난 음식을 제공받고 편안한 잠자리를 돌봐주는 남자의 배려가 뒤따랐다. 어느날 TV 화면에 '날개 달린 고양이'가 등장했다. 깜장이는 언니 오빠인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자세히 보니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곡예를 펼치는 날고양이라는 소개와 함께 말이다. 깜장이는 이런 삶이 싫증났다. 너무 안락하고 편안한 삶이었지만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창문 단속'을 하면서 깜장이가 탈출하지 못하게 꼼꼼하게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몰랐다. 깜장이가 '날개'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깜장이는 남자가 손님과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정신 없을 때 감시가 소홀한 '현관문'을 통해서 다른 남자가 문을 나설 때 함께 나가 멀리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시 곳곳을 다니며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엄마고양이도 잘 살고 계셨다. 그리고 깜장이는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갔다는 이야기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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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다시 '다름'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자신과 '다른 존재'와는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가? 솔직히 불편하기는 할 것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면 서로 배려하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배척하고 공격할 이유가 있을까? 나와 달라서 불편한 것만으로도 힘든데, '능력'도 출중해서 늘 비교 당하고 무시 당하는 일이 생기면,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상대적 박탈감'만 생겨도 함께 어울려 살기에는 너무 불편한 '다름'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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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미국 사회를 드려다보자. 미국에 살고 있는 '백인'들이 왜 뿔이 났을까? 그들은 왜 피부색이 '다른' 이민자를 배척하고 공격하며, 심지어 범죄자로 낙인 찍어 '강제추방'까지 서슴지 않는 것일까? 가장 단순한 이유로는 '그들이 내 일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저들이 '내 밥그릇'까지 빼앗아 간다고 철떡 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이민자를 강제추방하는 일은 잘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미국 주류 사회에 살고 있는 '백인들'은 그런 이민자들을 강제추방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 것이 다수다. 오히려 '백인'인데도 비주류 사회에 살고 있는 가난한 서민들이 강제추방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이민자들이 오지 않았어도 저들은 비주류로 밀려나서 먹고 살기 힘든 삶을 살 운명(?)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능력이 없어서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니 '애먼 화살'을 돌려서 피부색이 다른 이민자들에게 쏴버린 것이다. 이게 본질적으로 '다름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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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고양이들도 '날개 달린 고양이들'을 시샘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심지어 아직 날지 못하는 새끼일 때 '날개를 꺾어버리자'고 선동하는 고양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니 엄마고양이가 새끼를 품에 안지 못하고 서둘러 떠나보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평범한 고양이들이 날개 달린 고양이들 때문에 '손해'보는 것이 뭐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엄마고양이는 새끼를 떠나보내는 결정을 서둘러 내린다. 이렇게 도심 한복판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날고양이들에게 닥칠 어려움은 '고양이들' 뿐만 아니다. 마지막 이야기에서도 선보였지만 '욕심 많은 인간들'에게 자유를 빼앗기고 '배부른 돼지'처럼 날개를 꺾고 길들임을 당할 우려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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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다름'은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없게 하고 심지어 '자유'조차 빼앗아버리는 무시무시한 형벌처럼 다가온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다름'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는 '존재가치'를 손상시키는 무관심이기 때문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다름'이 존재하는데 애써 안본척, 못본척, 없는척 하면 그건 '무시'라는 더 큰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 그러니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그냥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이 가져올 '긍정적인 면'을 찾아나서는 것이 가장 현명한 해결책일 것이다. 단순하고 쉬운 해결법 같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긍정'보다 '부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른 존재'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많이, 더 빨리 부각시키며 좋지 않은 결말을 가져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부정적인 면을 찾았다하더라도 긍정적인 면을 더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 해결법에도 문제는 있다. 바로 '피로감'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면을 열심히 찾으려 노력하다 지쳐버리면 '반감'이 더 크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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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진정한 해결법은 무엇일까?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소한의 문제'로 축소시켜 애써 갈등을 축소하고 봉합하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다. 너무 철저히 '다름의 문제'를 인지하고 발본색원하는 마음가짐으로 사사건건 시시콜콜 문제를 삼으면 도리어 역효과만 불러올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다르다고? 그게 무슨 큰 문제가 있나?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어쩌라고? 너랑 나랑 겉모습은 달라도 모두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잖아. 설마 너랑 다르면 난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지 말고, 넌 저걸 잘하고 난 이걸 잘하니 서로 힘을 합해서 잘 해보자" 이런 정도의 마인드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정 불편하면 마주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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