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테크리스타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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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 백선희 / 문학세계사 (2022) [원제 : Ante`christa]

[My Review MMCXCIII / 문학세계사 7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스물두 번째 리뷰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앙테크리스타>다. 먼저 '표지그림'을 보고 살짝 실망을 했다. 원래 예전의 표지에는 아멜리 노통브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는데 말이다. 새로 '개정판'의 표지는 완전 내 취향이 아니어서 많이 실망을 했다. 애초에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의 등장인물은 대개 성격은 둘째치고서라도 '외모'만큼은 절세미인으로 그려놓았으니 책표지도 그에 걸맞게 매혹적으로 그려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등장인물의 나이가 '미성년'에 해당하는 열여섯 소녀들일지라도 '매혹적인 외모'로 그렸어야 했는데 아쉽다는 말을 먼저 꺼낸다. 뭐, 취향에 해당하는 부분이니 '개정판의 표지'가 훨씬 더 마음에 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 다짜고짜 책 내용으로 풍덩 빠져들어 보자.

<앙테크리스타> 관점 포인트 : 주인공은 열여섯 살 대학생 소녀로 이름은 '블랑슈'다. 열여섯 살에 벌써 대학생이라니 대단히 공부를 잘한 모양이다. 공간적 배경이 '벨기에'이므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학점이수제' 같은 방식으로 조기 대학입학이 가능한 모양이다. 암튼 열여섯 살에 대학입학이 그리 드문 편은 아닌 모양이다. 주인공인 블랑슈 말고도 '크리스타'라는 열여섯 살 소녀도 같은 학교에서 같은 강의를 듣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소설의 시작은 두 학생의 첫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악연'이었다. 크리스타가 블랑슈에게 들러붙더니 끝내 블랑슈네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블랑슈의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타겟이 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블랑슈의 부모님'이었다. 크리스타는 매혹적인 외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여느 부모님이라면 듣기에 너무 달콤한 말들을 선사하며 '블랑슈 부모님의 마음'을 매혹시켰고, 더 나아가서 친딸인 블랑슈의 '진실된 말'보다 크리스타의 '거짓된 말'을 더 믿고 신뢰할 지경에 이르렀다. 블랑슈도 그제서야 자신이 지독한 '함정'에 빠졌고, 크나큰 '실수'를 했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크리스타에게 '헌납'하듯 빼앗겨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그 둘의 기묘하고 거북한 동거가 시작한다. 아참, 크리스타의 집이 학교에서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이를 불쌍히 여긴 블랑슈가 '인생 첫 친구'를 사귀게 된다는 기쁨에 들떠서 부모님을 설득해서 크리스타와 함께 살고 싶다고 부탁을 했고, 크리스타와 첫 만남 이후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진 블랑슈의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동거를 하게 되면서 블랑슈는 점점 '불편한 일'만 겪게 된다. 애초에는 '처음 사귀게 된 친구'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어서 한껏 들뜬 마음이었지만, 블랑슈는 크리스타의 말과 행동 때문에 자기 부모님에게 '못난 딸'로 전락했고, 자기 방에 있던 '침대'마저 빼앗겨 '간이침대'로 쫓겨났고, 학교에서는 '크리스타의 단짝'이라는 소개만 받았을 뿐, 제대로 사귈 수 있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뻘쭘하게 크리스타와 그녀의 친구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블랑슈는 여전히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신세였던 셈이다. 애초부터 크리스타는 블랑슈를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었지. 블랑슈의 찐친이 되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편한 일상이 학교에서만 일어났다면 블랑슈도 그저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더욱 불편하게 만든 것은 블랑슈의 집에서조차 '크리스타'가 블랑슈가 당연히 받아 마땅한 사랑과 인정조차 다 앗아가버리고 블랑슈를 내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면, 크리스타가 블랑슈의 부모님과 마주 할 때마다 '점수'를 따내고, 블랑슈를 그야말로 '찐따'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속상한 것은 블랑슈의 부모님조차 그런 크리스타의 '계략(?)'에 넘어가서 크리스타를 친딸처럼 살갑게 대하고, 블랑슈를 어디서 데리고 온 보릿자루 마냥 푸대접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푸념까지 늘어놓기 일쑤라는 점이다. 이쯤되면 독자들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불쌍해서 도와주려 했는데 그런 '좋은 마음'을 악용(!)해서 저 혼자만 '점수'를 따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철저한 외톨이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멜리 노통브 소설의 '전형적인 패턴 전개 방식'이다. 이런 식의 전개방식을 하도 읽어재끼다보니 이젠 식상할 정도가 되었다. <살인자의 건강법>을 읽을 때만해도 '천재적'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후 네 시>를 읽으면서 그 지독한 답답함에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물론 이때까지만해도 아멜리 노통브라는 작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서 읽게 된 <로베르 인명사전>, <사랑의 파괴>,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적의 화장법>까지 읽어내려가니 뭔가 진부함을 느꼈다. 미치도록 답답했고 정의는 언제쯤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 점점 분노게이지를 차오르게 만들었다. 왜 이 작가는 이토록 '적'을 만드는데 고심을 하고 애꿎은 '희생자'를 만들어 괴롭히는 것일까 하고 의문이 들 정도였다.

더구나 매혹적인 적이 등장해서 선량한 희생자를 괴롭히는 장면을 몰아부치는 대목을 읽을 때면 매우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적이 없는 삶은 허무와 권태의 구렁텅이, 가혹한 시련이 아니겠는가? 그런 고로 적이야말로 구세주다'라는 변명을 했다. 한마디로 궤변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적이란 분명 지옥 같은 고난을 안겨주는 존재지만, 고난이야말로 희생자에게 새로운 탄생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생의 패러독스 아니겠는가'라면서 사이코패스적인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이런 '도그사운드'를 듣기 위해서 그녀의 소설을 읽어갈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나가는 글 :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궤변'이 먹혀들어가는 점이 없지 않다. 그건 바로 '재밌다'는 것이다. 무슨 변태가학적인 헛소리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랬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재밌는 편이다. 단지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불쌍한 '희생자'가 겪고 있는 불행을 엿보고 싶지 않다는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이 들 뿐이다. 어차피 허구의 세계를 그린 소설일 뿐이니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재미를 느낀다면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이 없고, 꺼릴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내 양심이 이런 '악질적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는 등장인물(악당, 또는 적)을 가만 두고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궤변도 궤변 나름이고, 악행도 악행 나름이다. 적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른 당사자가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 정의가 구현되거나, 그런 정의의 심판조차 교묘히 빠져나갈 정도로 악질적인 등장인물이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천벌'이라도 당연한 듯 받아야 속이라도 시원할텐데, 아멜리 노통브 소설에서는 그런 '정의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솔직히 큰 실망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더는 '재미'라는 것을 느끼면 안 되겠다는 반성까지 해야 마땅한 것이라 '정색'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이 소설의 제목이 <앙테크리스타>다. 프랑스어라서 '뜻'이 잘 전달이 안 되겠지만 영어로 표현하면 '안티 크리스트'가 될 것이고, 우리 말로 풀어 쓰면 '적 그리스도'다. 사탄보다 더 무섭다는 '거짓 예언자'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적' 크리스타가 바로 '거짓'에 능통한 인물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소설이 '종교적 박해'를 주장하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거짓'을 일삼는 생을 살아가는 소녀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리스도'라는 뜻의 '크리스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굳이 종교적 해석을 가미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목에서 전체 줄거리가 어떤 전개를 거칠 것인지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수는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크리스타의 거짓이 너무 불편했다. 자신의 거짓으로 너희들에게 '이득'이 되었다면 거짓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설령, 그런 행위로 인해 크리스타가 '개인적인 이득'을 챙겼더라도 그건 오로지 널 위해서였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장면이 되풀이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화딱지가 날 정도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도 갖다붙이지만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서 철저히 이용했다는 사실이 끝내 밝혀지게 된다. 그런데도 반성과 사과는커녕 도리어 순순히 '이용' 당하지 않았다고 되려 발끈하고 성질을 내는 꼬락서니까지 지켜볼즈음에는 열불이 터지고 말았다.

이토록 불편함 심정이라면 더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읽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전부'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란 '직감'이 들었단 말이다. 그래서 기왕 읽기 시작했으니 '전작주의'까지는 아닐지라도 남은 소설들을 다 까발려주겠다는 심정으로 읽어보려 한다. 최근에 <리틀 아멜리>(원작소설 :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도 개봉했다지 않은가? 분명 내가 보지 못한 '재미'가 남겨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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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수학의 땅, 툴리아 2 : 기묘한 여름 방학 - 중학교 수학 1-2 개념이 담긴 흥미진진한 이야기 신비한 수학의 땅 툴리아 2
권혁진 지음, 신지혜 그림, 김애희 감수 / 유아이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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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수학의 땅, 툴리아 2 : 기묘한 여름 방학> 권혁진 / 김애희 / 유아이북스 (2020)

[My Review MMCXCII / 유아이북스 2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스물한 번째 리뷰는 중등수학의 개념을 재밌는 소설로 다잡을 수 있는 <신비한 수학의 땅, 툴리아 2>다. '툴리아 1'에서는 중등수학 1학년 1학기에 배울 내용을 탐구했다면, 이번 '툴리아 2'에서는 2학기에 배울 내용이 간추려져 있다. 사실 초등수학에서 중등수학으로 넘어오면서 유념해야 할 것은 '탄탄한 개념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공부가 '탄탄한 기초'가 필요한 법이지만, 수학에서 말하는 기초는 두 말하면 입 아플 지경일 것이다. 이런 조언은 이미 초등시절에도 많이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등수학을 잘못 학습한 학생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중등수학은 개념도 잡아보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까닭으로 상당수의 학생들이 제대로 수학공부를 시작도 하기 전에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가 되고 만다. 그럼 '수포자'가 왜 중등 1학년 때 많이 발생하는지부터 살펴보자.

<신비한 수학의 땅 툴리아 2> 관점 포인트 : 수포자가 된 학생들도 초등시절에는 수학 성적이 우수했던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째서 중등수학을 공부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성적이 곤두박질 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잘못된 방식'으로 수학공부를 해왔기 때문이다. 초등시절에 '영수 학원'을 다니거나 '보습 학원'을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심지어 집에서는 '방문학습'까지 하며 '문제집'도 십수 권을 풀고 또 푸는 수학공부를 해왔을 것이다. 이유는 뻔하다. 수학이 그만큼 중요한 과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초등시절을 보내고 나면 중등수학을 굉장히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발생하고 만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초등수학 만점의 비결 때문이다. 사실 초등학교 수학시험의 출제난이도는 '교사 재량'이기 때문에 담임선생님을 누굴 만났느냐에 따라 성적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초등생들은 대부분 '사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초등수학 성적은 거의 '만점'을 받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수한 수학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중등수학'을 만나면 딱 절반으로 나뉘게 된다. 고득점 학생과 문제에 손도 대지 못하고 찍는 학생으로 말이다. 그리고 찍어서 시험을 망친 학생들은 부랴부랴 '수학학원'을 뺑뺑이 돌지만 영 신통치 않은 성적을 받으며 성적이 잘 오르지 않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왜일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하나다. 잘못된 방법으로 수학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기초를 탄탄히 하지 않고 '족보(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은행)'에 의지해서 '시험에 나올 문제 유형'만 주야장천 풀고 또 풀어서 '만점'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초등수학 시험문제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초등생일지라도 맘만 먹으면 그 모든 분량을 다 풀어재끼고 시험을 치를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수학성적을 유지한 학생들은 그야말로 '문제를 풀고 또 풀어재끼는 공부'만 해왔다. 이런 방식으로도 초등수학은 고득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등수학에서도 이 방법이 통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먼저 문제의 총량이 너무 많다. 그리고 같은 문제유형이라도 '스타일'이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모든 유형을 다 마스터할 수는 없다. 그 까닭을 말하자면, 일단 초등교과서는 '딱 1종'으로 전국 공통이지만 중등부터는 여러 종류의 교과서 가운데 하나를 학교재량으로 지정해서 교과서로 삼는다. 이게 뭘 의미할까? 공부해야 할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초등시절부터 수학문제집 십수 권 분량의 문제를 풀이했을 것이다. 그러니 중등때에도 십수 권 분량의 문제풀이에 지칠 리는 없다. 그런데 왜 수학성적이 향상되지 않을까? '기초 개념'만 확실히 깨우쳤다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가 출제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 '기초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문제 유형'만 익혀서 정답을 외우는 방식으로 초등수학 성적을 높였던 학생들이 바로 '수포자의 주인공'인 셈이다. 다시 말해, 수학공부를 잘못된 방식으로 배웠기 때문에 '중등수학의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무작정 문제풀이부터 하려 들고, '수학공식'만 달달 외워서 답만 맞추려 드는 습관만 있기 때문에, 결국 중등수학 정도의 난이도조차 풀지 못하는 학생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학생들을 고액의 '종합학원'을 보내서 밤10시까지 옴쭉달싹하지 못하게 공부를 시킨다고 수학성적이 만족할 만큼 향상될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차리리 이 책 <신비한 수학의 땅 1, 2>을 읽히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왜냐고? 재미난 이야기를 읽었을 뿐인데 '중등수학의 개념'이 저절로 잡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가장 좋은 공부는 '재밌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해'하기도 쉽고, 굳이 '암기'하려 들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질테니 말이다. 그리고 '반복학습'이 필요할수록 재미난 방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야 학습부담도 덜고 하고 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다음에 본격적인 '문제풀이'에 들어가고 '시험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초 개념이 머릿속에 새겨져 있을테니 여러 가지 '문제유형'을 만나도 알맞은 '키워드'를 찾아내서 쉽게 풀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공부란 모름지기 그렇게 해야 한다. 명강으로 유명한 선생님이나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어보라.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쉽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정말 재미나게 강의하지 않느냔 말이다. 공부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네 초등수학교실은 그렇지 못하다. 목표한 점수에 도달할 때까지 풀고 또 풀도록 강요하는 방식으로 더럽게 재미없게 가르친다. 물론 사교육선생들도 풀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억지로 앉혀 놓고 학부모들이 만족할 때까지 풀고 또 풀려야 하기 때문에 곤혹을 치루고 있다. 이분들이 괜히 재미없게 공부시키는게 아니다. 그렇게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니면 아예 문제풀이를 하려 들지 않고, 공부하기를 즐기려 들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나가는 글 : 중등 1학년 2학기가 되면 '기하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도형' 파트를 배운다. 이것을 쉽게 배우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에 나처럼 어렵게 배우는 학생들도 분명히 있다. 나도 이공계로 진학해서 각종 '역학'을 전공했지만, 유독 '도형 파트'는 힘들어 했다. 특히, 원과 접선 문제 유형만 나오면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기하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초등시절의 '도형'을 제대로 배운 경험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도형문제를 풀 때에도 '숫자'만 보고서 들입다 '연산'을 해내서 풀어대는 잘못된 습관으로 학습을 한 탓에 중등수학부터 '기하학 문제'는 거의 손도 대지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풀이하던 기억만 떠오른다. 당시에는 한 반에 60명이 넘었고, 과외교육도 금지되었기에 누구에게 체계적으로 배울 경황이 없었다. 어찌어찌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수학의 정석>으로 학원강의를 듣곤 했지만, 여전히 도형문제만 나오면 헤매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책 '툴리아 2권'이 더욱 반가웠다. 읽기만 해도 저절로 이해가 되는 쉬운 설명을 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인지 참 속상할 따름이다.

참고로 초등수학에서 배우는 5가지 개념은 '수와 연산', '도형', '측정', '표와 그래프', '확률과 통계'다. 이건 중등수학에도 그대로 연계된 학습을 진행하며 중등 1학년 1학기에는 '수와 연산'에 이은 '대수학의 기초'를 학습했다면, 2학기에 접어들면 '도형', '측정'이 심화된 '기하학의 기초'를 배우고, '히스토그램'과 '도수분포표' 같은 단원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니 초등수학의 기초에 충실히 개념 파악했다면 중등수학에서도 그닥 어렵지 않게 '개념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러니 무턱대고 겁부터 먹을 까닭이 전혀 없다.

더구나 '문제풀이'를 서술하는 방식에서 초등수학보다 중등수학이 훨씬 더 간결하기 때문에 초등수학 성적이 좀 떨어진 학생이라도 중등수학부터 반전을 보이며 높은 성적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학생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보통 성인이 되어서도 '초등수학 방식'으로 문제풀이를 하기보다는 '중등수학 방식'으로 연산을 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중등수학도 개념만 잘 잡아주면 초등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학습성과를 올리는 학생들이 참 많다.

그러므로 중등수학을 공부하겠다고 '고액과외'만 알아보기 전에 '재미난 소설책'부터 권해주는 것도 결코 손해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공부 좀 해본 학생들도 억지로 꾸역꾸역 한 공부는 힘들어 하지만, 재밌고 즐거운 공부는 하지 말라고 해도 찾아서 하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기 마련이다. 지루하고 따분한 수학공부를 하다가 잠깐 짬을 내서 읽기에도 좋은 책이다. 심지어 이 책을 읽고 있을 때에는 '딴짓'을 하고 있는데도 '수학공부', 그것도 아주 중요한 '중등수학의 기초 개념'을 탄탄하게 만들어주지 않는가 말이다. 그야말로 마당 쓸고 돈 줍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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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독서평설 2026.1 독서평설 2026년 1월호
지학사 편집부 지음 / 지학사(잡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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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독서평설 2026년 1월호> 지학사 편집부 / 지학사 (2025)

[My Review MMCXCI / 지학사 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스무 번째 리뷰는 '고교 독서평설 2026년 1월호'다. 워낙 유명한 잡지이니 다른 소개는 하지 않겠다. 수많은 잡지들 가운데 대한민국 학생들이 꼭 하나만 읽으면 좋을 잡지를 꼽자면 바로 '독서평설'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개를 할 수 있는 까닭은 내가 바로 '독서논술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잡지를 통해서 '최신정보'도 얻고 '신간도서'도 소개 받고, '최근이슈'와 함께 '깊이읽기'를 할 수 있는 유용한 잡지이라서 그렇다. 그런 까닭에 많은 '독서논술쌤'이 이 잡지를 '교재' 삼아서 논술수업을 하기도 한다. 나도 올해는 이 잡지로 고교생 수업을 진행할 계획을 잡았다. 그럼 '독서평설'의 진면목을 살펴보자.

<고교 독서평설 2026년 1월호> 관점 포인트 : <독서평설>로 '논술지도'를 받든, 개인적인 '독학'으로 읽든, 가장 중요한 학습 포인트는 '하루 10분, 독서 플래너'를 꼭 활용하라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짜여 있는 '독서 플래너'를 참고하면 한 달치 학습 분량이 저절로 짜여지게 된다. 요즘 학생들 스케쥴이 좀 바쁜가. 학교를 파하고 나면 학원에 가야 하고, 학원을 마치고 나면 집에 가서 그날 숙제와 공부를 하면서 마무리해야 한다. 특히 '고교생' 같은 경우에는 밤늦게 학원을 마치고 나면 집에서 그저 늘어져 쉬고만 싶은 것이 굴뚝일 것이다. 거기다 침대에 누워서 너튜브와 숏츠를 넘기면서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눈을 감고 다시 뜨면 아침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바쁜 나날들을 보내다보면 '하루 10분'을 투자해서 <독서평설>의 한 꼭지를 읽을 시간도 없기 마련이다.

그럴 때 '짜투리 독서'를 하면서 학교에서나, 학원에서 <독서평설>을 읽는 것을 실천하면 좋겠다. 잡지 한 권을 온전히 들고다니는 것이 힘들다면 '하루 분량의 꼭지'를 몇 장 뜯어서 쉬는 시간이나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짬에 틈틈히 펼쳐서 읽고 밑줄을 그어가며 '요약'하면서 읽어도 무방하다. 애초에 '잡지'라는 것이 천년만년 소장할 것도 아니고 많은 독자분들이 '화장실'에 응가를 누면서 보는 용도로 쓰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잡지를 소중히 여기는 애독자가 아니라면 바쁜 일상을 살면서 자켓이나 청바지 '주머니'에 쏙 넣고 있다가 틈날 때 읽을 수 있을 분량만 들고 다니며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독서평설>의 글 내용은 수준 높고 교양 갖춘 '좋은글'이 가득하다. 더구나 학생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배경지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26년 1월호에서 눈여겨 볼만한 주제도 참 많다. 가장 먼저 '입시정보'로는 경희대학교 미래정보디스플레이학부가 소개되어 있다. 올해 새로 개정된 내용으로는 앞서 입시정보를 담아 놓은 '입시력' 코너가 있고, '문화력', '독서력', '문학력' 코너가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맨 앞에는 '특집' 코너로 '한국 핵잠수함 보유'로 자주국방의 시대를 맞았다는 최신 이슈로 글을 열고 있다.

이런 다양한 '글'을 가지고 논술수업을 진행하게 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우리 나라 '정시'와 '수시' 논술은 지문제시형 논술을 진행한다. 대개 1000자 분량의 글쓰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각각 서론-본론-결론에 해당하는 분량을 따로 요구하기도 하지만, 결국 전체적으로 논술시험을 보는 학생들에게 주어진 지문을 참고해서 '논제'로 주어진 내용에 걸맞는 글을 '1000자 내외'로 찬성이나 반대로 결론을 정리해서 서술할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평가하곤 한다. 그때 어떤 요령이 필요할까? 먼저, 지문분석에 철저해야 한다. 왜냐면 지문분석을 통해서 결론에 딱맞는 정확한 근거를 찾아내야 '주어진 분량'에 맞게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지문 분석에 실패하면 분량이 모자라거나 넘치는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1000자의 분량은 보통 서론 1문단, 본론 3문단, 결론 1문단으로 나누어 쓰길 요구하며, 각 문단의 분량은 약 200자(원고지 1매 분량) 정도를 서술하면 좋다. 이때 하나의 문단에는 '중심 문장 1문장'과 '뒷받침 문장 2~3 문장'을 서술하면 된다. 그럼 모두 5문단이므로 5개의 중심 문장만 잘 나열해도 한 눈에 딱 보기 좋은 '모범답안'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독서평설>로 연습을 해보자. 독서평설의 글들을 잘 살펴보면, '서론'에 해당하는 문단과 '본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문단을 찾을 수 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겠지만, '한 문단마다 하나의 중심 문장'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면 어렵지 않게 각 문단의 중심 문장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그 중심 문장에 '형광펜' 같은 것으로 눈에 확 들어오게 밑줄을 그어보자. 그럼 자연스럽게 '중심 문장'과 그 문장을 보충 설명하는 '뒷받침 문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각 문단의 중심 문장만 따로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본문 요약'도 가능해진다. 그 문장을 '개요짜기' 삼아서 자신만의 요약글로 새로 쓸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요령으로 '글쓰기 훈련'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제별 논술쓰기' 연습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직접 쓴 글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틈날 때마다 '읽어보면서 퇴고 작업'을 실시하면 점점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은 혼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므로 <독서평설>을 활용해서 논술대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가는 글 : 좋은 글을 쓰기까지의 관건은 꾸준함이다. 고등학생 논술 과외비는 상당히 쎈 편이다. 그런데 그 비싼 돈을 들여서 고교 3년 내내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췄으면 모를까 왠지 '낭비'한다는 느낌이 강할 것이다. 실제로 논술과외는 '입시 1달 전'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싼 과외비를 내면서도 논술수업의 내용은 거의 '첨삭'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짧고 강렬한 '고액과외'이다보니 학부모들은 과외 선생의 '학벌'을 따지고, '경력'을 따지며 나름 꼼꼼하다고 자부하는 분들도 계신데, 가장 좋은 논술선생은 학생의 성향에 따라서 '원포인트'로 콕 짚어서 글쓰기 요령을 지도하는 분이 최고다. 뭐, 논술입시 최신정보를 원한다면 '대형논술학원'에 등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만, 논술글쓰기의 기본을 다지는데에는 고액과외보다 '꾸준한 글쓰기 연습'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면 좋겠다. 그러기에 딱 좋은 교재도 바로 <독서평설> 같은 좋은 글과 최신 정보가 알차게 담겨 있는 책을 고르는 것이 좋고 말이다.

기왕이면 초등시절부터 꾸준히 글쓰기 연습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아무리 AI시대가 되어 '직접 쓰기'보다 '검색'이 훨씬 더 편하고 정확한 시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직접 글을 쓰는 학습'은 필수적인 학습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야 AI가 내놓은 결과물이 '좋은 결과물'인지 '나쁜 결과물'인지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인재만이 AI시대에서도 재능을 인정받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평생 'AI가 떠먹여주는 정보의 노예'가 되어 자기결정권조차 AI에게 통제받는 것이 편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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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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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 이상해 / 문학세계사 (2015) [원제: Acide Sulfurique(2005)]

[My Review MMCXC / 문학세계사 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아홉 번째 리뷰책은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황산>이다. 뜬금없는 제목이다. 황산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3대 강산(强酸)'인 염산, 질산, 황산 가운데 하나인 그 황산이 맞단 말인가? 그런데 맞았다. 원제를 다시 확인해보니 딱 맞다. 그래서 줄거리에 '화학공정'이 나오거나 공간적 배경으로 '화학공장'이 나오는가 싶어서 읽었더니 작품 배경은 난데 없는 '집단수용소'였다. 그것도 21세기에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운영하던 그 집단수용소와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작가 '아멜리 노통브'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사실 아멜리 노통브의 데뷔작인 <살인자의 건강법>(1992)을 읽었을 때만해도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재작가의 등장'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발한 발상이 독자들로 하여금 '식상함'을 눈녹듯 사그라들게 만들었고, 책을 읽는 내내 '반전에반전에반전'을 거듭하는 놀라운 필치에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매장 당해도 마땅할 '살인자'가 오래오래 장수할 비법이라도 터득한 듯 '건강법'이란 제목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뒤를 잇는 그녀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발칙'했고, 너무도 '발칙'했기 때문에 '괘씸'했다. 게다가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을 넘어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아니 독자들을 한껏 욕보이고 조롱하는 것을 맘껏 즐기면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기분 나빠할 독자들의 지갑조차 탈탈 털어서 제 것으로 만들려는 '오만'함마저 엿보이는 순간. 결국 그녀의 소설을 '중독'된 듯 읽기를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은 재밌다. 아주 기발하다 못해 독창적이라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재밌는 소설을 읽으면서 기분까지 나빠지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을 꾸준히 읽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그녀의 소설에서 마주할 수 있는 '불편함'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장치로 뒤집어 생각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녀의 소설이 아주 쓰레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단지 재미와 함께 불편함을 동시에 주기 때문에 솔직히 칭찬만 해주기 싫은 감정이 들 뿐이다. 그럼 '황산'의 줄거리 속으로 풍덩 들어가보자.

<황산> 관점 포인트 : 이야기는 느닷없이 사람들을 '집단수용소'라는 곳에 강제 이주시켜 자유를 빼앗고 억압하며 노동까지 시켰다. 집단수용소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함께 수용했으며, 이들 가운데 자신이 '이곳'에 끌려온 이유를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사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끌려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단수용소'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운영했던 방식과 똑같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처럼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처럼 그냥 끌고와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곳이 나치 수용소와 다른 점은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TV'에 생중계 되고 있으며, 수많은 시청자들이 이곳에서 감금 당하고 노역을 하며 심지어 고문 당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았다. 왜냐면 이 '집단수용소'라는 제목으로 방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시청률 1위'를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청률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소재(!)를 방송하고 있었을 뿐이고, 시청률 1위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집단수용소'에 감금하고 폭행하며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다시 말해, 시청률을 높이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매일매일 '처형'을 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채우고 죽여버리는 짓을 계속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시청률'로 인한 '방송국의 이득'을 위해서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에 항거하는 영웅이 등장하게 된다. 집단수용소에는 자유를 박탈 당하고 끌려온 '죄수'도 있었지만, 이들을 감독하고 채찍을 때리며 통제하는 '간수(이들을 '카포'라고 부른다. 독일 나치에서도 똑같은 명칭이었단다)'도 함께 있다. 이곳에 카포로 취직(?)한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쉽게 말해 '방송국 직원'으로 채용된 사람들일 뿐이며,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사람을 강제하고, 억압하고, 학대(!) 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뽑힐 수 있었다. 그래서 카포들은 죄수로 잡혀온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대하고, 때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걸 TV화면으로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카포들이 죄수들을 차지게 잘 때리고 교묘하게 학대하는 장면에 열광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카포들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죄수가 등장했다. 이름은 CKZ 114다. 감옥이라는 곳이 늘 그렇듯 이곳에서 '본명'이 아닌 '번호'로 불릴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게 시청자들에게 소름 돋을 정도로 '관심'을 끈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예쁜데다 당찬 모습에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녀가 매질을 당하는 것이다. 예쁜 여자의 맑은 피부에 핏자국이 생기고, 상처가 늘어나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사그라질 때까지 때리고 또 때리는 '가학적 변태 성욕(일명 '사디즘')'을 채우는 것 뿐이었다. 그 일을 대신 하는 것은 '카포'이고 말이다. 그 가운데 CKZ 114를 맡은 카포는 '즈데나'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녀는 시청자들이 원하는대로 그녀를 때리고 또 때렸다. 그리고 즐겼다.

그런데 한창 그 일을 즐기면서 즈데나 카포는 의문이 생겼다. 보통의 죄수들은 이쯤 맞았으면 항복을 하고 더 때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거나 살려달라고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인데, 그녀는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때리면 때릴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는 듯 싶었다. 처음엔 그 빛을 꺼꾸러뜨리기 위해서 더욱 매질을 가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저항을 하는 그녀에게 더욱 애가 닳고 궁금증이 이는 것은 오히려 즈데나 카포였다. 그러자 그녀의 이름(본명)이 궁금해졌다. 이곳에 끌여온 이유 따윈 애초에 없지만 그녀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서는 살살 구슬렸다. 이름을 말하면 때리지 않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조건'을 단칼에 거절했다. 즈데나 카포는 이름을 말할 때까지 더 때리고 또 때렸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주위의 카포들이 즈데나 카포를 말릴 정도가 되었다. 매일 같이 심한 매질을 가하고 이름을 말하라고, 그러면 때리지 않겠다고, 먹을 것도 주겠다고 '유혹'을 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럼 그럴수록 시청률은 올랐고 방송사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TV화면이 그녀의 모습을 잡을 때면 '시청률'도 함께 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창 줄다리기를 하며 그녀와 카포 사이에 뭔가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겼다. 먼저 즈데나에게서 '변화'가 보였다. 어느날 평소처럼 채찍으로 맞았는데 고통이 몰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알고 보니 즈데나 카포가 '맞아도 전혀 아프지 않은' 가짜 채찍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메말라가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아무도 몰래 그녀의 주머니에 '초콜릿'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폭언을 일삼고 매질을 서슴없이 했지만 말이다. 그녀도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차츰 '즈데나 카포'가 주는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이름을 말해주지도 않았다. 간간히 즈데나 카포는 그녀에게 이름을 말하라고 구스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다 다른 죄수를 죽을 정도로 매질하고 '즉결처형'을 하려던 순간 그녀가 나서서 '즈데나 카포'를 만류하고, 처형을 모면하게 해주었다. "내 이름은 파노니크예요"라는 한마디로 말이다. 영웅 탄생의 순간이다.

나가는 글 : 그 뒤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되며 '시청률의 노예'가 된 방송사와 '자극적인 소재'에만 관심을 보이는 시청자의 '관음증'을 비판하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아멜리 노통브의 그럴 듯한 '훈계'가 찌끄러진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한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감히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붙이며 불편함을 선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너희들도 다 똑같아! 라면서 말이다. 도대체 이런 '발칙한 작가'를 꾸준히 사랑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녀의 '비판의식'은 날카롭다. 품위도 없고 교양도 없는 '시청자'들의 수준을 고려해서 '방송사'들은 사활을 걸며 자극적인 소재들로 영상을 가득 채우는 저질스런 풍토를 지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재미를 위해서는 '출연자'들을 망가뜨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고, '비도덕적'인 소재를 방영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런 저질 방송을 즐기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하면서 '저질 방송'만을 찾아 채널을 요리조리 틀어댈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증거들은 '시청률'로 다 드러나고 만다.

이걸 아멜리 노통브는 '관음증'이라면서 시청자들의 몰지각한 면모를 여지없이 비난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청률의 노예'가 된 방송사들도 싸잡아서 비난의 대열에 동등하게 올려놓았다. 이런 환자와 노예 들은 비난받아도 마땅하다면서 일장 훈계를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딴에는 수긍이 가면서도 그녀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불편한 속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아멜로 노통브가 쏘아 올린 '비난의 화살'이 향하는 표적이 바로 독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다 똑같아! 이러면서 말이다.

정녕 이토록 발칙한 소설가를 사랑해줘야 한단 말인가? 감히 이처럼 독자를 우롱하고 조롱거리로 삼는 소설가의 책을 끝가지 읽어줘야 하느냔 말이다. 이게 <황산>을 읽은 독자들이 내놓는 대부분의 목소리다. 여기까지 리뷰를 하면서도 '황산'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이 참으로 뜬금 없다는 것이다. 사실 '황산'은 이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다. 모든 것을 다 녹여서 없애버릴 정도의 강한 산성 용액의 등장이 이 소설의 '하일라이트'에 속한다. 그러니 '황산'에 대해 궁금증이 인다면 직접 읽어보셔도 좋다. 한편 염산이나 질산도 아닌 '황산'을 고집한 까닭도 강렬한 악취가 나는 용액이기 때문에 간택(?) 받은 듯 싶다. 색깔은 황홀할 정도로 밝은 노란색을 띄지만, 그 냄새를 맡은 코는 자기 손으로 직접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황산'을 말이다. 너희들이 딱 그래! 코를 막고 싶은 정도의 악취를 풍기면서도 젠채하는 너희들이 딱 그정도의 수준이야! 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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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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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8)

[My Review MMCLXXXIX / 인물과사상사 33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여덟 번째 리뷰는 균형 잡힌 역사서술가 강준만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이다. 그를 균형 잡힌 역사서술가로 소개한 까닭은 그가 쓴 책들에서 '좌표'를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시선을 '날것 그대로' 담담하게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었을 뿐,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나름 '객관적인 서술자'로 남으려 무던하게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좋았다. 아무래도 '한 쪽의 관점'에 서게 되면 '다른 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는데, 강준만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그 양쪽의 관점을 모두 관찰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단 말이다. 거기에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한 해석'을 가미하고 있기에 조금 더 '객관적인 해석'으로 이해하기에도 무척 좋았다. 물론 이런 두루뭉술한 문장을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제 막 역사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경우에도 그랬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관점 포인트 :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는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부터 5권까지는 '개화기 시대'를 다루었고, 6권부터 10권까지는 '일제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6권은 흔히 '일제강점기'라 불리는 우리 역사가 암울했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일제시대는 크게 셋으로 나누곤 한다. '무단통치기', '문화통치기', 그리고 '민족말살기'로 말이다. 그 가운데 6권은 '한일 강제 병합'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약 10년 간을 다루고 있다. 바로 위에서 열거한 '무단통치기'에 해당한다.

'무단통치기'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속에 숨조차 제대로 살기 힘든 시기였다. 일제의 헌병과 순사 들은 조선인이라면 아무나 붙잡아 공개적으로 '태형'을 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조선인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 제맛(!)이라면서 문명인이 된 일본제국인이 미개한 조선인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쓰는데, 더럽고 어리석은 조선인은 일본인의 선심을 제대로 해야리지도 못하니 때려서라도 '문명개화'를 시켜주겠으니 감사히 쳐맞으라는 식이었다. 이런 무자비한 통치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만에 하나라도 조선인이 똘똘 뭉쳐서 저항이라도 할까봐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전체 인구수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1910년대 당시 한국은 여러 모로 일본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강제 병합을 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나라 잃은 처지'로 전락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러니 기가 죽어 있을 수밖에 없고 일본의 무단통치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 민중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제의 통치가 좋은 방식인지, 나쁜 방식인지조차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대다수의 민중들은 조선 때에도 '수탈' 당했고, 대한제국 때도 '수탈' 당했으며, 이제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수탈' 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교육이라도 제대로 받고 있었다면 '누구'에게 수탈을 당했고, 그렇게 수탈 당한만큼 '정책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배워서 알아서 분노라도 했겠지만, 그런 기본적인 권리조차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민중들에게 무엇에 대한 분노를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이놈에게 빼앗기나 저놈에게 빼앗기나 '빼앗긴 놈'은 그저 불쌍한 처지일 뿐,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일제가 악착같이 수탈해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우리 민중들도 뭔가 다른 것을 느끼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1919년 3월에 벌어진 '3·1 만세 혁명'이 그랬다. 인간 대접 받지 못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얻어 터지고, 기름 짜듯 쥐어짜이면서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가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우리 편이 뺏어갈 때와 남의 편이 뺏어갈 때의 차이를 느끼게 된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겪으며 배우는 통에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건 바로 '자존심'을 짓밟힌 것이다. 우리 편이 빼앗아갈 때는 나중에 또 빼앗아가기 위해서라도 자존심을 짓밟지 않았고 주위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이겨낼 '여력'이라도 남겨두고 빼앗아갔다. 그런데 일제가 '수탈'을 할 때에는 인정사정 봐주질 않았다. 그들은 늘 '합법'이라는 허울 좋은 말과 함께 토지와 쌀 등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탈탈 털어 갔고, 수탈 당한 민중이 죽든지 살아남든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저들의 목적 달성만을 위해 악착같이 빼앗아갔다.

이런 경험을 강제로 당하면서 우리 민족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건 바로 '안간힘'이었다. 고통이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힘이었다. 일본놈들이 빼앗아가면서 무식해서 빼앗긴다고 하니 악착같이 학교에 가서 배우려 들었다. 미개해서 수탈을 당한다고 하면 그 잘난 문명이란 것을 배우려 들었다. 더러운 조센징이란 소리를 들으면 깨끗하고 청결하려 애썼다. 그렇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지닌 힘이었다. 오늘날 전세계가 주목하는 '한국문화에 관한 열풍'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것을 가지려는 악착같은 성정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우리 것'이 없더라도 언젠간 그것이 '우리 것'이 될 수 있도록 묵묵히 참고 이겨내며 결국 가질 수 있도록 안간힘을 발휘했다. 그렇기에 불과 100여 년 뒤에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고, 다른 이들을 이끌어갈 선도국가가 되었다.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저력이다.

나가는 글 : 사실 100년 전에도 일본은 한국의 이런 저력을 감지하고 있었다. 저들이 앞선 문명과 기술, 경제력을 내세워서 세계 침략을 하면서도 유독 '한국'을 악착같이 짓밟으려 했던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저들이 잘나서 '못한 한국인'을 함부로 죽이고 때리고 빼앗고 있는데도 한국인은 순순히 순응하기보다는 '저항'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지금 당장 '소의 힘줄(일명 '소좃매')' 끝에 납과 같은 무거운 추를 매달아 공공연한 장소에서 엉덩이를 발랑 까놓고 살점이 터져나가도록 매질을 하면서도 한국인들은 비명을 지르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당장은 무서움에 벌벌 떨고 두려움에 꽁꽁 숨었지만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어 떳떳하고 당당하니 저들이 나쁜 놈이다. 그러니 저들을 압도할 실력을 기르자.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자'하는 오기와 독기로 똘똘 뭉치게 만든 것이다. 비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상대와 대적하면서도 '도덕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하면서 말이다. 비겁한 반칙으로는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철저히 실력을 쌓으려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안간힘은 신통하게도 먹혀 들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인들도 의아했던 점이 있었단다. 덩치만 보면 일본인은 왜소하고, 한국인은 키도 크고 덩치도 큰데, 쬐끄만 일본인이 덩치 큰 한국인을 매질하고 수탈하는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더구나 외모적으로도 일본인은 꾀죄죄했고, 한국인은 새하얗고 준수했단다. 그런데도 일본인에게 억압 당하고 수탈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는 소회를 밝히는 이들도 많았단다. 하지만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에 성공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었다. 그런데 그들의 성정이 원래부터 '야만'스러운 탓에 잘난 자부심과 만나 '폭력적인 방식'의 통치 수단을 삼고 식민경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무단통치'가 한국인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저들이 '인류애'를 발휘하여 저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문명개화'를 우리에게 좋은 의도를 품고 친절하게 이끌어주었다면 우리는 더욱 잘 되어서 이웃나라 간에 더욱 시니지 효과를 발휘하며 전세계에 동아시아 문화를 널리 퍼뜨리는데 엄청난 성과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우리를 너무 만만히 봤고, 너무 함부로 대했으며, 우리가 가진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로 하여금 복수심에 불타는 '경쟁심'만 자극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곁눈질로만 배워서 저들이 자랑하는 문명을 따라잡을 위력을 갖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불과 100년 만에 우리는 따라잡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앞서 나갈 것이며, 저들은 왜 뒤쳐지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호되게 당할 일만 남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바는 '일제시대'를 암울하게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분명 그들은 우리를 억눌렀고 털었으며 짓밟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눌리고 털리고 밟히면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들여온 '신문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일본제국을 위해서 들여온 모든 것들을 '눈여겨' 보면서 무섭도록 배워갔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을 위한 학교를 만들었으면 일본 학생 100명 당 한국 학생 10명 뿐이었다고 해도, '전교 1등'은 한국 학생이었고, 일본인을 위한 기업을 만들었어도 일본 근로자 월급은 100원이었다면 한국 근로자는 60원만 받았어도, 그 돈을 알뜰살뜰하게 쓰며 '공부'하는데 썼고, '독립'하는데 썼다. 그렇게 못먹고 못살면서도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위해 투자하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차'가 들어오고, '영화관'이 들어오면 직접 타보고 관람하면서 흥을 내며 살아갔다. 단지 타고 보면서 즐기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은 '남의 것'이지만 결국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읽혔다.

그래서 앞으로 '일제시대'를 암울한 기분으로만 공부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친일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식한 한국을 깨우쳐주려 식민통치를 무릅쓴(?) 일본제국의 호의에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는 엉터리 해석을, 난 할 생각이 없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마디로 '빵점'이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야욕'만 가득 담은 못난 방식이었고, 자격지심에 더 삐뚫어진 탐욕으로 점철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벌어진 일들을 호평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일제의 억압과 수탈과 고문 속에서도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겪고 숱한 위기에 처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토록 빠른 시일에 '선진국'이 되고, '선도국가'가 되어 전세계인이 '한국문화'를 아낌없이 칭송하게 만든 위대한 발자취를 다시금 되돌아보기 위한 역사공부를 하려 한다. 이런 다짐을 하게 된 것도 역시 '균형 잡힌 역사서술자'의 도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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