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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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 이상해 / 문학세계사 (2015) [원제: Acide Sulfurique(2005)]

[My Review MMCXC / 문학세계사 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아홉 번째 리뷰책은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황산>이다. 뜬금없는 제목이다. 황산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3대 강산(强酸)'인 염산, 질산, 황산 가운데 하나인 그 황산이 맞단 말인가? 그런데 맞았다. 원제를 다시 확인해보니 딱 맞다. 그래서 줄거리에 '화학공정'이 나오거나 공간적 배경으로 '화학공장'이 나오는가 싶어서 읽었더니 작품 배경은 난데 없는 '집단수용소'였다. 그것도 21세기에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운영하던 그 집단수용소와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작가 '아멜리 노통브'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사실 아멜리 노통브의 데뷔작인 <살인자의 건강법>(1992)을 읽었을 때만해도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재작가의 등장'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발한 발상이 독자들로 하여금 '식상함'을 눈녹듯 사그라들게 만들었고, 책을 읽는 내내 '반전에반전에반전'을 거듭하는 놀라운 필치에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매장 당해도 마땅할 '살인자'가 오래오래 장수할 비법이라도 터득한 듯 '건강법'이란 제목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뒤를 잇는 그녀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발칙'했고, 너무도 '발칙'했기 때문에 '괘씸'했다. 게다가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을 넘어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아니 독자들을 한껏 욕보이고 조롱하는 것을 맘껏 즐기면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기분 나빠할 독자들의 지갑조차 탈탈 털어서 제 것으로 만들려는 '오만'함마저 엿보이는 순간. 결국 그녀의 소설을 '중독'된 듯 읽기를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은 재밌다. 아주 기발하다 못해 독창적이라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재밌는 소설을 읽으면서 기분까지 나빠지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을 꾸준히 읽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그녀의 소설에서 마주할 수 있는 '불편함'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장치로 뒤집어 생각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녀의 소설이 아주 쓰레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단지 재미와 함께 불편함을 동시에 주기 때문에 솔직히 칭찬만 해주기 싫은 감정이 들 뿐이다. 그럼 '황산'의 줄거리 속으로 풍덩 들어가보자.

<황산> 관점 포인트 : 이야기는 느닷없이 사람들을 '집단수용소'라는 곳에 강제 이주시켜 자유를 빼앗고 억압하며 노동까지 시켰다. 집단수용소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함께 수용했으며, 이들 가운데 자신이 '이곳'에 끌려온 이유를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사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끌려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단수용소'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운영했던 방식과 똑같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처럼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처럼 그냥 끌고와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곳이 나치 수용소와 다른 점은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TV'에 생중계 되고 있으며, 수많은 시청자들이 이곳에서 감금 당하고 노역을 하며 심지어 고문 당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았다. 왜냐면 이 '집단수용소'라는 제목으로 방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시청률 1위'를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청률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소재(!)를 방송하고 있었을 뿐이고, 시청률 1위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집단수용소'에 감금하고 폭행하며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다시 말해, 시청률을 높이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매일매일 '처형'을 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채우고 죽여버리는 짓을 계속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시청률'로 인한 '방송국의 이득'을 위해서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에 항거하는 영웅이 등장하게 된다. 집단수용소에는 자유를 박탈 당하고 끌려온 '죄수'도 있었지만, 이들을 감독하고 채찍을 때리며 통제하는 '간수(이들을 '카포'라고 부른다. 독일 나치에서도 똑같은 명칭이었단다)'도 함께 있다. 이곳에 카포로 취직(?)한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쉽게 말해 '방송국 직원'으로 채용된 사람들일 뿐이며,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사람을 강제하고, 억압하고, 학대(!) 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뽑힐 수 있었다. 그래서 카포들은 죄수로 잡혀온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대하고, 때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걸 TV화면으로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카포들이 죄수들을 차지게 잘 때리고 교묘하게 학대하는 장면에 열광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카포들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죄수가 등장했다. 이름은 CKZ 114다. 감옥이라는 곳이 늘 그렇듯 이곳에서 '본명'이 아닌 '번호'로 불릴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게 시청자들에게 소름 돋을 정도로 '관심'을 끈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예쁜데다 당찬 모습에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녀가 매질을 당하는 것이다. 예쁜 여자의 맑은 피부에 핏자국이 생기고, 상처가 늘어나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사그라질 때까지 때리고 또 때리는 '가학적 변태 성욕(일명 '사디즘')'을 채우는 것 뿐이었다. 그 일을 대신 하는 것은 '카포'이고 말이다. 그 가운데 CKZ 114를 맡은 카포는 '즈데나'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녀는 시청자들이 원하는대로 그녀를 때리고 또 때렸다. 그리고 즐겼다.

그런데 한창 그 일을 즐기면서 즈데나 카포는 의문이 생겼다. 보통의 죄수들은 이쯤 맞았으면 항복을 하고 더 때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거나 살려달라고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인데, 그녀는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때리면 때릴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는 듯 싶었다. 처음엔 그 빛을 꺼꾸러뜨리기 위해서 더욱 매질을 가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저항을 하는 그녀에게 더욱 애가 닳고 궁금증이 이는 것은 오히려 즈데나 카포였다. 그러자 그녀의 이름(본명)이 궁금해졌다. 이곳에 끌여온 이유 따윈 애초에 없지만 그녀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서는 살살 구슬렸다. 이름을 말하면 때리지 않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조건'을 단칼에 거절했다. 즈데나 카포는 이름을 말할 때까지 더 때리고 또 때렸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주위의 카포들이 즈데나 카포를 말릴 정도가 되었다. 매일 같이 심한 매질을 가하고 이름을 말하라고, 그러면 때리지 않겠다고, 먹을 것도 주겠다고 '유혹'을 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럼 그럴수록 시청률은 올랐고 방송사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TV화면이 그녀의 모습을 잡을 때면 '시청률'도 함께 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창 줄다리기를 하며 그녀와 카포 사이에 뭔가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겼다. 먼저 즈데나에게서 '변화'가 보였다. 어느날 평소처럼 채찍으로 맞았는데 고통이 몰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알고 보니 즈데나 카포가 '맞아도 전혀 아프지 않은' 가짜 채찍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메말라가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아무도 몰래 그녀의 주머니에 '초콜릿'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폭언을 일삼고 매질을 서슴없이 했지만 말이다. 그녀도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차츰 '즈데나 카포'가 주는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이름을 말해주지도 않았다. 간간히 즈데나 카포는 그녀에게 이름을 말하라고 구스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다 다른 죄수를 죽을 정도로 매질하고 '즉결처형'을 하려던 순간 그녀가 나서서 '즈데나 카포'를 만류하고, 처형을 모면하게 해주었다. "내 이름은 파노니크예요"라는 한마디로 말이다. 영웅 탄생의 순간이다.

나가는 글 : 그 뒤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되며 '시청률의 노예'가 된 방송사와 '자극적인 소재'에만 관심을 보이는 시청자의 '관음증'을 비판하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아멜리 노통브의 그럴 듯한 '훈계'가 찌끄러진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한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감히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붙이며 불편함을 선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너희들도 다 똑같아! 라면서 말이다. 도대체 이런 '발칙한 작가'를 꾸준히 사랑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녀의 '비판의식'은 날카롭다. 품위도 없고 교양도 없는 '시청자'들의 수준을 고려해서 '방송사'들은 사활을 걸며 자극적인 소재들로 영상을 가득 채우는 저질스런 풍토를 지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재미를 위해서는 '출연자'들을 망가뜨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고, '비도덕적'인 소재를 방영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런 저질 방송을 즐기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하면서 '저질 방송'만을 찾아 채널을 요리조리 틀어댈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증거들은 '시청률'로 다 드러나고 만다.

이걸 아멜리 노통브는 '관음증'이라면서 시청자들의 몰지각한 면모를 여지없이 비난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청률의 노예'가 된 방송사들도 싸잡아서 비난의 대열에 동등하게 올려놓았다. 이런 환자와 노예 들은 비난받아도 마땅하다면서 일장 훈계를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딴에는 수긍이 가면서도 그녀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불편한 속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아멜로 노통브가 쏘아 올린 '비난의 화살'이 향하는 표적이 바로 독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다 똑같아! 이러면서 말이다.

정녕 이토록 발칙한 소설가를 사랑해줘야 한단 말인가? 감히 이처럼 독자를 우롱하고 조롱거리로 삼는 소설가의 책을 끝가지 읽어줘야 하느냔 말이다. 이게 <황산>을 읽은 독자들이 내놓는 대부분의 목소리다. 여기까지 리뷰를 하면서도 '황산'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이 참으로 뜬금 없다는 것이다. 사실 '황산'은 이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다. 모든 것을 다 녹여서 없애버릴 정도의 강한 산성 용액의 등장이 이 소설의 '하일라이트'에 속한다. 그러니 '황산'에 대해 궁금증이 인다면 직접 읽어보셔도 좋다. 한편 염산이나 질산도 아닌 '황산'을 고집한 까닭도 강렬한 악취가 나는 용액이기 때문에 간택(?) 받은 듯 싶다. 색깔은 황홀할 정도로 밝은 노란색을 띄지만, 그 냄새를 맡은 코는 자기 손으로 직접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황산'을 말이다. 너희들이 딱 그래! 코를 막고 싶은 정도의 악취를 풍기면서도 젠채하는 너희들이 딱 그정도의 수준이야! 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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