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테크리스타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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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 백선희 / 문학세계사 (2022) [원제 : Ante`christa]

[My Review MMCXCIII / 문학세계사 7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스물두 번째 리뷰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앙테크리스타>다. 먼저 '표지그림'을 보고 살짝 실망을 했다. 원래 예전의 표지에는 아멜리 노통브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는데 말이다. 새로 '개정판'의 표지는 완전 내 취향이 아니어서 많이 실망을 했다. 애초에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의 등장인물은 대개 성격은 둘째치고서라도 '외모'만큼은 절세미인으로 그려놓았으니 책표지도 그에 걸맞게 매혹적으로 그려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등장인물의 나이가 '미성년'에 해당하는 열여섯 소녀들일지라도 '매혹적인 외모'로 그렸어야 했는데 아쉽다는 말을 먼저 꺼낸다. 뭐, 취향에 해당하는 부분이니 '개정판의 표지'가 훨씬 더 마음에 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 다짜고짜 책 내용으로 풍덩 빠져들어 보자.

<앙테크리스타> 관점 포인트 : 주인공은 열여섯 살 대학생 소녀로 이름은 '블랑슈'다. 열여섯 살에 벌써 대학생이라니 대단히 공부를 잘한 모양이다. 공간적 배경이 '벨기에'이므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학점이수제' 같은 방식으로 조기 대학입학이 가능한 모양이다. 암튼 열여섯 살에 대학입학이 그리 드문 편은 아닌 모양이다. 주인공인 블랑슈 말고도 '크리스타'라는 열여섯 살 소녀도 같은 학교에서 같은 강의를 듣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소설의 시작은 두 학생의 첫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악연'이었다. 크리스타가 블랑슈에게 들러붙더니 끝내 블랑슈네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블랑슈의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타겟이 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블랑슈의 부모님'이었다. 크리스타는 매혹적인 외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여느 부모님이라면 듣기에 너무 달콤한 말들을 선사하며 '블랑슈 부모님의 마음'을 매혹시켰고, 더 나아가서 친딸인 블랑슈의 '진실된 말'보다 크리스타의 '거짓된 말'을 더 믿고 신뢰할 지경에 이르렀다. 블랑슈도 그제서야 자신이 지독한 '함정'에 빠졌고, 크나큰 '실수'를 했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크리스타에게 '헌납'하듯 빼앗겨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그 둘의 기묘하고 거북한 동거가 시작한다. 아참, 크리스타의 집이 학교에서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이를 불쌍히 여긴 블랑슈가 '인생 첫 친구'를 사귀게 된다는 기쁨에 들떠서 부모님을 설득해서 크리스타와 함께 살고 싶다고 부탁을 했고, 크리스타와 첫 만남 이후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진 블랑슈의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동거를 하게 되면서 블랑슈는 점점 '불편한 일'만 겪게 된다. 애초에는 '처음 사귀게 된 친구'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어서 한껏 들뜬 마음이었지만, 블랑슈는 크리스타의 말과 행동 때문에 자기 부모님에게 '못난 딸'로 전락했고, 자기 방에 있던 '침대'마저 빼앗겨 '간이침대'로 쫓겨났고, 학교에서는 '크리스타의 단짝'이라는 소개만 받았을 뿐, 제대로 사귈 수 있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뻘쭘하게 크리스타와 그녀의 친구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블랑슈는 여전히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신세였던 셈이다. 애초부터 크리스타는 블랑슈를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었지. 블랑슈의 찐친이 되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편한 일상이 학교에서만 일어났다면 블랑슈도 그저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더욱 불편하게 만든 것은 블랑슈의 집에서조차 '크리스타'가 블랑슈가 당연히 받아 마땅한 사랑과 인정조차 다 앗아가버리고 블랑슈를 내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면, 크리스타가 블랑슈의 부모님과 마주 할 때마다 '점수'를 따내고, 블랑슈를 그야말로 '찐따'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속상한 것은 블랑슈의 부모님조차 그런 크리스타의 '계략(?)'에 넘어가서 크리스타를 친딸처럼 살갑게 대하고, 블랑슈를 어디서 데리고 온 보릿자루 마냥 푸대접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푸념까지 늘어놓기 일쑤라는 점이다. 이쯤되면 독자들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불쌍해서 도와주려 했는데 그런 '좋은 마음'을 악용(!)해서 저 혼자만 '점수'를 따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철저한 외톨이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멜리 노통브 소설의 '전형적인 패턴 전개 방식'이다. 이런 식의 전개방식을 하도 읽어재끼다보니 이젠 식상할 정도가 되었다. <살인자의 건강법>을 읽을 때만해도 '천재적'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후 네 시>를 읽으면서 그 지독한 답답함에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물론 이때까지만해도 아멜리 노통브라는 작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서 읽게 된 <로베르 인명사전>, <사랑의 파괴>,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적의 화장법>까지 읽어내려가니 뭔가 진부함을 느꼈다. 미치도록 답답했고 정의는 언제쯤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 점점 분노게이지를 차오르게 만들었다. 왜 이 작가는 이토록 '적'을 만드는데 고심을 하고 애꿎은 '희생자'를 만들어 괴롭히는 것일까 하고 의문이 들 정도였다.

더구나 매혹적인 적이 등장해서 선량한 희생자를 괴롭히는 장면을 몰아부치는 대목을 읽을 때면 매우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적이 없는 삶은 허무와 권태의 구렁텅이, 가혹한 시련이 아니겠는가? 그런 고로 적이야말로 구세주다'라는 변명을 했다. 한마디로 궤변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적이란 분명 지옥 같은 고난을 안겨주는 존재지만, 고난이야말로 희생자에게 새로운 탄생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생의 패러독스 아니겠는가'라면서 사이코패스적인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이런 '도그사운드'를 듣기 위해서 그녀의 소설을 읽어갈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나가는 글 :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궤변'이 먹혀들어가는 점이 없지 않다. 그건 바로 '재밌다'는 것이다. 무슨 변태가학적인 헛소리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랬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재밌는 편이다. 단지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불쌍한 '희생자'가 겪고 있는 불행을 엿보고 싶지 않다는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이 들 뿐이다. 어차피 허구의 세계를 그린 소설일 뿐이니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재미를 느낀다면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이 없고, 꺼릴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내 양심이 이런 '악질적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는 등장인물(악당, 또는 적)을 가만 두고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궤변도 궤변 나름이고, 악행도 악행 나름이다. 적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른 당사자가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 정의가 구현되거나, 그런 정의의 심판조차 교묘히 빠져나갈 정도로 악질적인 등장인물이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천벌'이라도 당연한 듯 받아야 속이라도 시원할텐데, 아멜리 노통브 소설에서는 그런 '정의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솔직히 큰 실망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더는 '재미'라는 것을 느끼면 안 되겠다는 반성까지 해야 마땅한 것이라 '정색'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이 소설의 제목이 <앙테크리스타>다. 프랑스어라서 '뜻'이 잘 전달이 안 되겠지만 영어로 표현하면 '안티 크리스트'가 될 것이고, 우리 말로 풀어 쓰면 '적 그리스도'다. 사탄보다 더 무섭다는 '거짓 예언자'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적' 크리스타가 바로 '거짓'에 능통한 인물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소설이 '종교적 박해'를 주장하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거짓'을 일삼는 생을 살아가는 소녀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리스도'라는 뜻의 '크리스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굳이 종교적 해석을 가미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목에서 전체 줄거리가 어떤 전개를 거칠 것인지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수는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크리스타의 거짓이 너무 불편했다. 자신의 거짓으로 너희들에게 '이득'이 되었다면 거짓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설령, 그런 행위로 인해 크리스타가 '개인적인 이득'을 챙겼더라도 그건 오로지 널 위해서였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장면이 되풀이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화딱지가 날 정도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도 갖다붙이지만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서 철저히 이용했다는 사실이 끝내 밝혀지게 된다. 그런데도 반성과 사과는커녕 도리어 순순히 '이용' 당하지 않았다고 되려 발끈하고 성질을 내는 꼬락서니까지 지켜볼즈음에는 열불이 터지고 말았다.

이토록 불편함 심정이라면 더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읽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전부'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란 '직감'이 들었단 말이다. 그래서 기왕 읽기 시작했으니 '전작주의'까지는 아닐지라도 남은 소설들을 다 까발려주겠다는 심정으로 읽어보려 한다. 최근에 <리틀 아멜리>(원작소설 :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도 개봉했다지 않은가? 분명 내가 보지 못한 '재미'가 남겨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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