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8 : 양철북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8
곽은우 글, 팽현준 그림, 손영운 기획, 귄터 그라스 원작 / 채우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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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키던 시절에 '나치'에 협력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탔다면 말이 된다고 보는가? 사실 독일인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마냥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무엇'이 옳은 일인지 판단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서 조국을 배신하고 국가권력에 대항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역할'이 자랑스럽지 못했고, 옳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일을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양철북>은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인들의 뒤늦은 뉘우침과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처절한 반성이 담긴 역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심지어 '나치'에 협력했었기에 더욱 생생한 증언과 잘못으로 얼룩진 과거를 정확하게 회고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임에 틀림없지만, 2차 세계대전 뒤에 '이념의 대결'이라는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마샬플랜)으로 인해 빠르게 회복한 뒤 거침없이 성장과 발전을 거듭한 나라다. 그럼에도 '유대인 학살'과 같은 과거의 짐이 발목을 잡히 않도록 확실한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서 '유럽공동체'의 리더를 맡을 정도로 신뢰를 얻는 나라로 거듭났다. 이는 '또 다른 전범국가'인 일본의 행보와 사뭇 다른 모습이라 일제의 피해당사국인 우리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암튼, 그런 독일의 '과거사죄와 반성'의 일환을 배경으로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인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쓰인 '전후문학' 가운데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은 '사회고발'이라는 의도와는 다르게 야한 소설, 혹은 불륜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기도 하다. 이는 영화 <양철북>의 상영이후 '그런 부분'만을 부각시켜 영상화한 탓도 있지만, 소설속에서도 다분히 그런 내용이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난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소설속에 담겨진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 큰데, 독일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은 폴란드의 비극, 나치 독일의 탄압으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유대인과 유대계 유럽인들, 그리고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폭력인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나치협력자들과 무도한 권력이 저지르는 폭력이 두려워 알고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나치부역자들, 그리고 그러한 나치에 끝까지 저항하던 이들과 그들을 응원하지만 끝내 '표면화'하지 못하고 그저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벅차서 우물쭈물하던 평범한 독일인들까지 모두 그 '상징성'에 담겨 서술되고 있기에 난해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징성을 '모범답안'처럼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만이 가장 바람직한 독서법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오직 '하나의 정답'만을 이해하기 위해서 강조하는 독서법이 학창시절에는 '높은 성적'을 얻기 위해 당위성을 갖출 수 있을지언정, 정답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문학을 오랫동안 널리 읽고 읽히는 까닭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고 '새로운 감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면 <양철북> 또한, 그렇게 읽혀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도 '자유'롭게 읽어야 할 것이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난쟁이를 '보는 시선'에 따라 얼마든지 색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스카'는 스스로 성장하길 거부했다. 그리고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기도 싫었는데, 딱 하나 '양철북'을 선물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탄생을 '선택'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상징성이 가득한 이 소설의 관점에서 풀이하자면, 오스카는 '독일, 그 자체'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광기로 가득한 독재자가 다스리는 혼돈스러운 시대는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야만의 시절'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몰염치와 이기적인 모습을 그대로 대칭시켰던 것일테다. 다시 말해,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독재자의 광기를 아직 미성숙한 오스카의 겉모습을 통해 '비정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테다. 허나 오스카에겐 '양철북'이 있다. 당시 성숙한 독일 어른들이 일삼던 행위들도 얼마간 '정상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미쳐돌아가는 세상속에서 맹목적으로 '히틀러'를 따르던 이들도 바로 독일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오스카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양철북을 두드려 정화하려 들었다. 이를 테면, '사회고발'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던 오스카의 '양철북'만으론 나치라 불리던 폭주기관차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런 '폭주기관차'에 올라탄 수많은 독일인들은 타고 있자니 불안했고, 내리자니 그 또한 목숨을 걸어야할 판이었다. 어찌해야 좋을까? 오스카는 수차례 '찣어지고 망가진 양철북'을 대신할 '새 양철북'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회고발의 명맥'을 유지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만 펼쳐졌을 뿐이다. 한편, 독일이 전쟁을 한창 진행하던 중에 오스카는 첫사랑을 만난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오스카가 '정상적인 사랑'을 할 수는 없었다. 사랑이란 '정신적 성숙'뿐만 아니라 '육체적 성숙'도 함께여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카에게 '육체적 성숙'은 아직 일렀다. 오스카의 성장은 '독일의 성숙'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독일은 미쳐돌아가고 있었고,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스카는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자신의 첫사랑을 아버지 마체라트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독일의 패망 직전 소련군의 침공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아버지를 '나치'라고 고발하며 소련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만들고, 그의 무덤에 '양철북'도 함께 묻으며 '성장'을 결심한다. '사회고발'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무뎌지고 만 것일까?

 

  전쟁이 끝나고 오스카도 '성장'을 한 뒤라 '한 사람의 몫'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 특히, 사랑하는 마리아와 그녀의 아들의 생계를 책임지려는 모습에서 안타까움마저 느낄 정도다. 그러다 미술대학 교수의 의례로 '누드모델'을 하면서 엄연한 가장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 발가벗겨진 몸도 '독일,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뒤늦은 성장으로 '꼽추'가 되어 버렸지만, 전쟁의 상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독일의 기형적인 성장'을 한 몸에 보여준다는 일념에 돈벌이는 쏠쏠해진다. 그러나 끝내 '사랑'은 이루지 못하고 만다. 마리아에게 청혼을 하지만 마리아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리아와 헤어진 뒤, 오스카는 음악적 성공으로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다. '양파주점'에서 '북 연주가'로 데뷔해 독일인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허나 간호사 도로테아를 사랑하게 되면서 오스카에겐 '새로운 삶'을 살아갈 계기가 된다. 과연 그 삶은 어떤 모습일까? 깨끗한 반성과 뉘우침으로 '성장을 부정했던 잘못'을 씻고 아름답고 찬란한 행복을 꾸리며 살아가게 될까? 아니면 성장하려 노력했으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좌절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광기'가 탄생해버리게 될까?

 

  어쩌면 <양철북>은 미성숙한 사람들이 벌인 끔찍한 일들을 나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양태의 '미성숙함'을 보며 자신에게 딱 맞는 '미성숙'을 발견하고 관찰하며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궁극적으로 '나치의 만행'에 대한 고발을 하면서, 그런 부정함과 부도덕함에 알게 모르게 동참했던 사람들을 비판하는 소설이지만, 그러한 '독일'과 아무런 연관도 없고, 배경지식도 없는 독자들마저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바로 '미성숙'이란 말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성장'이 얼마나 힘들며,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점에서 개개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어야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걸작이라는 말도 된다. 과연 우리사회는 개개인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개인 스스로도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 갖춰야 할 조건들을 얼마나 충족시키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른다. 중요한 것은 반성과 성찰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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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피스톨 스토리 - 권총으로 꿰뚫는 역사적 순간들 한빛비즈 교양툰 26
푸르공 지음, 이세환 감수 / 한빛비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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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은 '총기소지'가 불법인 나라이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들은 합법적으로 '군대'를 경험하였기에 총을 다루는 것에 매우 능숙(?)한 편이다. 물론 소총과 같은 '소화기'에 한해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처럼 '주특기'를 경험한 이들은 박격포 급 이상의 '중화기'를 경험한 이들도 꽤나 있을테다. 그러나 군대를 경험했더라도 대한민국 군인..특히 사병은 '권총(피스톨)'은 구경조차 못해본 이들이 꽤나 많다. 그래서 권총에 대한 묘한 동경심 같은 것을 같고 있기도 하고, 총기소지나 사격훈련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로 여행을 가서 '사격연습'을 여행코스에 넣는 분들도 꽤나 많다고 들은 바 있다. 그런 경험조차 없는 나는 그저 '비비탄'이나 쫌 쏴봤을 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명중률'로 따지자면 권총은 소총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사격훈련을 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이 '권총'의 슬픈 현실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명사수' 장면은 거의 대부분 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는데, 그 까닭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가 이 책 <피스톨 스토리>를 읽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까닭인 즉슨, 총신이 짧기 때문에 '가늠자와 가늠쇠'로 정교한 조준을 하고서 쏴봤자 제대로 날아가는 것이 드물고, 총알이 발사된 뒤에 전해지는 충격과 반동으로 인해 총을 쥔 손이 올려지게 되고 겨냥이 틀어지게 되어 '목표물(표적)'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리는 것이 당연지사라고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사격술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하며, 올바른 '파지법'으로 사격을 해야 부상도 줄이고 정교한 사격이 가능해진다고 하니...어찌보면 이 때문에 더욱 '권총'에 대한 호기심이 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맛'이 덕질 중에 덕질이니까 말이다.

 

  암튼, 그런 까닭에 '권총'은 공격용으론 적당한 무기가 아니고 '호신용(방어용)' 무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원거리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기에 말이다. 하지만 '초근접'에서 써야할 상황이 펼쳐진다면 어떨까? 물론 '칼'이라는 정답이 있긴 하지만, 스파이들의 낭만은 '권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007 영화> 시리즈에 등장하는 제임스 본드 덕분에 생겨났다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실제로도 국가간 첩보전이나 암살, 경호를 할 때 '무기'를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으니 몸에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딱 적당한 크기의 무기'로도 권총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평소에는 품 안에 '은닉'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딱' 꺼내서 쏜 뒤에 유유히 사라지는 명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 낭만(?)이 가득한 '권총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 바로 <만화로 보는 피스톨 스토리>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작가에 의해서 쓰였기에 '우리 역사의 에피소드'가 담겼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미국과 독일 같은 '제조국의 관점'으로 쓰여진 책들은 대부분 권총에 관한 '제원'이나 '부품소재', '살상력(분당속도, 파괴력 등)' 등과 같은 정보만 나열하기 십상이지만, 아직까지 권총에 관해서 이렇다할 생산을 하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이기에 '하드웨어'나 '피지컬' 쪽의 서술방식이 아닌 '소프트웨어'나 '쏘울' 쪽의...아무튼 권총에 대한 정신적인 면의 접근 양상을 선보이는 서술방식이 꽤나 맘에 들었다.

 

  이를 테면, 안중근과 김상옥이 일제의 침략과 야욕에 항거하기 위해 '정의의 방아쇠'를 당긴 이야기로 권총에 대한 스토리를 풀어나간 점이다. 그리고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도 선보인 에피소드였던 '신미양요 씬'은 총에 관한 우리의 정서를 담뿍 담은 역사적인 사건이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비록 권총이 아닌 '화승총'이긴 했지만 '총잡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 '조선의 산포수(호랑이사냥꾼)'가 단연 최고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화승총의 유효사거리는 고작해야 50미터 정도였으니 호랑이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가 운동장 절반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올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그 정도의 거리라면 호랑이가 대여섯 발자국 뛰면 사냥꾼에게 닿을 거리였고 실제로 산포수들은 호랑이를 단 한 방에 쏘아 죽이기 위해서 호랑이가 마지막 일격을 위해 몸을 띄워 달려들 때까지...다시 말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호랑이의 머리 한가운데를 정확히 맞춰서 잡았다고 한다. 화승총은 연달아 쏠 수 없고 다시 재장전한 뒤에 쏘기까지 1분가냥 소요가 된다고 하니 단 한발로 승부를 보지 못하면 그야말로 저세상 구경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정신자세'로 무장한 산포수들이 신미양요 당시 남북전쟁에서 활약한 군인들과 맞서 싸웠고, 비록 승패는 '3 대 344'라는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는 명백한 패배였지만, 미국측 기록에는 "학살에 가까운 일방적인 전투에도 조선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리며 전장을 지켰다"라고 남겼다고 한다. 어쩌면 신미양요를 이후 미국은조선을 향한 제국주의 침략의욕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여야 할까? 2023년 현재,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팔레스타인 vs 이스라엘 '두 개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마당에 한갓지게 '무기예찬'이나 늘어놓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총은 다른 무기에 비해 '살상력'이 작다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무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화'를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는 무기를 우리 곁에서 될수록 멀리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당연하다는 데에 한표를 던질 것이다. 아무리 '방어수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또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표하는 바다. 그렇지만 적들의 무차별 침공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총'을 드는 것까지 반대해야 하는 걸까? 적에 비해 우리의 화력이 현저히 낮아지면 적들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마구 대하는 것에도 '무기력'으로 대응하며 우리쪽의 피해만 커지게 방치해야 하는 걸까?

 

  이처럼 '총'은 우리에게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를 선사하곤 한다. 비교적 총기에 관한 법률이 우리보다 자유로운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으로 '민병대'를 꼽고 있다. 당시 영국군보다 열세였던 미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으로 '미국시민들의 자발적 무장투쟁'을 꼽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외부의 적'이 침입했을 때 경찰이나 군대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자기 방어는 스스로 한다'는 정서가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집안에 '무기'를 갖추고 적극적인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한 까닭에 '총기사용'에 관대한 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총기사고'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뉴욕시에서는 '평균 1초마다 1명꼴'로 총기사고가 벌어지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일상의 평화와 안전'과 맞바꾼 '자유와 독립'이 자랑스러운 것인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해서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무기제작을 포기할 정도로 멍청한 짓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방어포기'가 아니라 '철저한 관리'가 중요할 것이다. 외적의 침략을 막고 자국의 안녕과 평화, 그리고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대량살상무기' 따위가 필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하더라도 그토록 '위험한 무기'를 적절히 관리하여 함부로 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다. 아울러 '최상의 무기'만 갖추는데 열을 올리기보다 '그 무기'를 다루는 사람의 정신적인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철저하게 운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총' 자체에는 선함도 악함도 없다. 오직 다루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평화가 위협받는 시기일수록 '아는 것이 힘'이라는 진리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밀리터리'에 관한 지식을 쌓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혜가 없는 지식'은 쓸데 없고, '반성과 성찰을 모르는 지혜'는 더 큰 희생을 불러오는 재앙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 '사실상, 저승사자'라는 점을 유념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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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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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풍자는 꼭 해야만 한다. 특히 '정치 권력'을 향한 뼈를 때리는 농담은 '살아있는 권력'에 싱싱함을 더해주기 때문에, 권력자는 풍자에 귀를 기울어야 하고 때로는 잘 받아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풍자를 하다가는 종종 생명를 위협받기 일쑤다. 부정한 권력일수록 권력을 제대로 쓰기는커녕 그저 맹목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잘하라'는 의미의 풍자에도 화들짝 놀라 '무능한 권력'이 들통날새라 벌벌 떨며 잡아다 족치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러니 정치풍자는 부정한 권력 뿐만 아니라 무능한 권력까지 걸려주는 청정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한다. 이렇게나 유용한 정치풍자를 왜 못하게 막는가?

 

  <걸리버 여행기>는 그런 정치풍자를 담은 대표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한때는 '아동용 소설'로 포장해서 '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만 편집해서 신기한 모험담을 소설로 통용시켰던 적도 있다. 허나 오래지 않아 '나머지 세 나라의 이야기'도 수록된 [완역본]이 선보이면서 정치풍자의 진수를 담은 진정한 어른들의 소설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책이 우리 나라의 90년대에 출간되었던 [첫 번째 완역본]으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엄청나게 다양한 출판사에 출간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걸리버 여행기>가 출판되었던 18세기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영국의 역사'의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네 나라를 돌아다녔던 걸리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풍자의 대상'이 바로 영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풍자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효율이 극대화될 수 없기에, 풍자를 걷어낸 채 읽는 <걸리버 여행기>는 그저 그런 이상한 나라를 돌아다니는 '모험소설'로 이해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단편적이나마 <걸리버 여행기>가 담고 있는 풍자의 '대상'에 대해 언급해보도록 하자. 

 

  첫 번째 모험에서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걸리버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사람들이 달걀을 깨는 방향 때문에 서로 갈라져서 전쟁까지 일삼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고작 그런 시시한 이유로 전쟁까지 불사하는 모습을 보고 걸리버는 무엇을 느꼈을까? 바로 '영국의회'가 바로 그런 시시한 이유로 다투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당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당으로 갈라져 서로를 신랄하게 비난하며 다퉜지만, 정작 조국인 영국은 뒷전으로 미루고 서로의 잇속만을 챙기기 위해서만 목숨걸고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모험에서는 '큰 사람들의 나라'에 도착하는데, 여기선 걸리버가 정반대의 처지가 되고 만다. 큰 사람들의 왕 앞에서 걸리버의 조국 영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 자랑을 늘어놓지만 큰 사람들의 왕은 도리어 걸리버처럼 작은 사람들이 무얼 할 수 있겠냐며 비아냥만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걸리버는 큰 사람들의 왕에게 '영국의 지혜'를 알려주겠다며 간신을 구별하는 방법이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법을 자랑삼아 귀띔해주었다. 그러자 큰 사람들의 왕은 너처럼 작은 사람들의 심보가 너무나도 비열하고 잔악하다면서 우리 나라에는 '영국의 지혜' 같은 것은 필요없다며 거절하고 만다. 이는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대영제국에게 일침을 놓는 꾸중이었다. 영국이 아무리 강한 나라라고 뽐내지만 세상에는 영국보다 더 강하고 영국보다 더 위대한 생각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는 나라가 있을 수 있다면서 대영제국에게 겸손을 운운한 셈이다. 게다가 대영제국의 위대함의 밑바탕에는 '부정한 정치세력'과 '식민통치를 함에 있어 너무나도 악랄하고 잔혹한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담아 놓았다. 이는 당시 스위프트가 거주하고 있던 아일랜드 사람들이 느끼는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한 불만을 담아놓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세 번째 모험은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에 방문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위대한(?) 사색에 빠진 탓에 일상생활조차 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멍청이들을 지도자로 섬기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그런 위대한 지도자의 정책결정들이 얼토당토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그저 순응(?)하거나 관망(?)하고만 있는 일반 주민들까지 싸잡아서 비판을 한 셈이다. 이런 무능한 라퓨타 사람들은 '첨단과학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반면에 라퓨타의 식민통치를 받는 나라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인들이 영국에 반기를 드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영국인들은 '문명인'인 자신들이 '미개인'인 식민지에 문명의 혜택으로 '문명화'시켜준다고 자신들의 우월함을 뽐내지만, 그런 '문명화의 헤택'이란 것이 고작해야 수탈과 압제일 뿐이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명의 위대함'을 앞세워 꼰대짓밖에는 할줄 모르는 대영제국에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이다. 그 꼰대짓마저도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굴복시키려 라퓨타를 이동시켜 '햇빛'을 가리거나 '짓눌려버린다'는 위협만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짓눌려버리는 짓을 한다면 두 번 다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을 지경에 빠져버리는 허약한(?) 대영제국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모험은 '말들이 사는 나라'인데, 이곳에서 걸리버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갖춘 '휴이넘(말)을 만나 '야후(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진정한 휴이넘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이는 인간 자체가 지닌 '추악한 본성'에 대한 부정을 명백히 드러내며 인간사회가 구축해놓은 모든 것이 끝내는 '짐승'보다 못한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나 추악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신랄하게 까발린 스위프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인류가 문명이라 이름 붙인 '야만'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처절한 반성을 통해 거듭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굵직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이처럼 저자인 조나단 스위프트는 걸리버를 통해 인간사회를 비판하였고, 때로는 걸리버를 통해 인류에게 희망을 선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희망'이란 절망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고문'처럼 이룰 수 없는 일을 하염없이 욕망하게 만드는 끔찍한 형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과연 스위프트는 어떤 의미의 '희망'을 선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결코 선한 본성을 일깨울 수 없는 '나쁜 인간'들의 향연을 그저 묵묵히 견디라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걸리버가 휴이넘의 나라에서 추방된 뒤에 지독한 '자기혐오'속에서도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에게 '휴이넘의 이상'을 가르치고 '휴이넘'을 닮은 인간으로 거듭나려 애썼기 때문이다. 비록 검은 잉크속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테지만, 그렇게 한 방울씩 깨어난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면 결국 '검은색'을 몰아내고 맑고 투명한 물로 잉크병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담았으리라 짐작한다. 허나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맑고 투명한 물은 쉬이 검은 잉크에 '물들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물 한 방울'이 아니라 '물 한 컵'을 붓는 방식이어야 하고, 때로는 수도꼭지를 틀 듯 '콸콸' 쏟아부어야 깨끗해진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걸리버가 되어야 한다. 야후에서 벗어나 휴이넘의 이상을 꿈꾸는 걸리버가 되어 실천해야만 한다. 한사람 한사람의 걸리버는 서로 다를 지라도 우리가 꿈꾸는 바람직한 이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걸리버'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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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 -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원작 소설, 공식 출판작,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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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소설의 맛은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기에 앞서 미리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 추리소설을 섭렵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단서에서 사건을 유추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유추를 한 것을 '소설 속 탐정의 추리'와 비교하면서 사건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는 '나도 명탐정'이라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짜릿함을 만끽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소설속에서 던져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찾아낼 수 있도록 추리 프레임을을 아주 잘 짜아놓은 추리소설이어야만 한다. 그런 관점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꽤나 훌륭하다.

 

  흔히 '살인사건'의 범인은 '한 명'일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추리소설 마니아들도 등장인물이 내놓은 정황과 알리바이가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으레 범인에서 제외를 하고서는 엉뚱한 인물을 범죄자로 몰기 일쑤다. 하지만 어디에도 '범인은 오직 한 명'이라는 근거는 없다. 그래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의 범죄자를 찾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범인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인물의 특징이 '주홍색 잠옷 차림의 키가 작은 남자의 뒷모습에 여자처럼 가냘픈 목소리'의 소유자를 봤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으며, 심지어 탐정인 푸아로마저 그 인물을 직접 목격했기에 수사선에 살인용의자는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사람을 찾도록 수사의 혼선을 빚게 만들었다. 더구나 범행도구는 '칼'이었으며 피해자의 몸에는 이곳저곳에 칼에 찔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칼에 찔린 정도로 봤을 때, 힘쎈 남자가 찌른 듯 깊숙이 찔린 자국도 있었지만, 여자가 힘없이 찌른 것처럼 아주 얕게 찔린 흔적도 여럿 보였다. 여기서도 범인은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고 단서를 던져주었다.

 

  더구나 범죄현장은 달리는 기차 안의 객실에서 벌어졌다. 때마침 눈보라가 치는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달리는 기차에서 범죄자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끝내 눈보라로 인해 기차는 역과 역사이의 중간에서 멈춰서게 되었고, 살인범은 멈춘 기차에서 내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너무나도 추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인자가 범죄현장을 떠났다면 기차 주변에 도망친 흔적이라도 발견이 되었을텐데, 그런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기차에 탑승한 인원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정리하면, 기차에 탑승한 인원이 달라진 것도 없었고, 멈춰진 기차에서 내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아직 '오리엔트 특급' 편 기차 안에 있는 것이다. 또 하나, 한밤중에 벌어진 사건이라 '객실칸-식당칸' 딱 두 개의 차량만 통행할 수 있었고, 모두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 '식당칸'으로 통하는 통로도 닫혀버렸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범행현장은 '객실칸'이 유일한 셈이다. 이른바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일까?

 

  객실칸에 탑승한 승객은 모두 열두 명이다. 탐정 푸아로도 '같은 칸'에 머물고 있었고, 살해된 피해자도 주검으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승객 열두 명 가운데 범인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열두 명의 승객은 살인현장에 가본 적도 없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할 근거로는 서로가 서로를 범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더구나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어준 열두 명의 승객들은 서로 일면식도 없는 모르는 사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범죄현장에는 '뚜렷한 단서'가 두 개 있었다. 알파벳 H가 수놓인 최고급 여성용 손수건과 고급 담배파이프 소제기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살인을 저지른 어둠속에서 범죄자가 떨어뜨리고 간 듯 했다. 그렇다면 범죄자는 여자인가? 남자인가? 아님, 범죄자는 두 명인걸까? 그도 아니면 그 이상인걸까?

 

  사실, 사건이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논리적 오류'로 인해 범인색출에 난항을 겪게 되면 답은 뻔해진다. 그 뻔한 답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매력인 관계로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이미 100여 년전의 작품이라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분들이 많겠지만, 아직 책을 읽지도 않고 영화도 관람하지 않은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추리'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지금까지의 단서만으로도 대충 범인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한편,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는 살인자보다 피해자가 더 나쁜놈이라는 사실이 핵심이다. 기차 안에서 칼로 난도질을 당해 죽은 피해자가 다름아니라 '어린이유괴 연쇄살인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풀려나서 사업가로 성공해 부족할 것이 없는 넉넉한 삶을 살며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호사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나쁜놈을 찾아 칼빵을 놓고 단숨에 죽여버린 살인자는 다름아니라 이 나쁜놈에게 희생을 당한 가족에게 크나큰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린 자식이 비명횡사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온가족이 불행하게도 슬픔속에서 하나둘 죽고 말았고, 애꿎은 사람이 범인으로 대신 지목되어 살인자로 낙인이 찍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등 굉장히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살인사건은 '연쇄살인범'인데도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지 못하고 범죄자를 '증거불충분'으로 유유히 빠져나가게 하고,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더 큰 비극의 정점을 찍게 만든 '실제사건'을 모티브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이럴 때 '사사로운 복수'를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인가? 아니면 또다른 범죄일 뿐인가?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분명 벌을 받아 마땅한대도 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유죄판결을 받긴 받았는데 말도 안 될 정도로 '가벼운 형벌'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물론, 현실에서는 사법부의 결정을 존중해야만 하고, 사법정의가 명명백백하게 실현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사법부의 판단에 일일이 '불만'을 표하거나 '불신임'을 하게 된다면, 사법부의 독립이 지켜지지 않아 더욱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매우 신중하게 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내 딸을 죽인 살인범이 '무죄방면' 되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나 같아도 '너죽고 나죽자'는 심정으로 복수를 감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사사로운 처벌'이 용인된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고, 누가 보더라도 정당한 처벌처럼 보일지라도 '사사로운 처벌'을 용인하게 된다면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법 판결'은 무조건 존중하고 따라야만 하는 걸까? '유전무죄 무전유죄'처럼 사법부의 공정성이 심하게 훼손한 현대사회에서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편파적인 사법 판결', '불공정한 사법 판결'조차도 무조건 존중하고 따라야만 하는 걸까?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허구'로 만들어진 '소설'속에서 이런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너무 자주 등장하는 까닭에 제목조차 '어벤져스(복수자들)'라고 대놓고 복수를 정당하다고 짜놓은 극본이 연출되곤 한다. 또한 관객들도 그러한 '사사로운 복수'를 통쾌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말이다. 외계의 침공으로부터 지구를 지킨다는 명분까지 내세우면서 말이다. 여기에 사법/행정/입법 시스템 따위는 끼어들 틈마저 없다. 끼어들더라도 무능하고 무지할 따름이다. 그래서 '사사로운 복수'를 저지르는 개인은 '히어로(영웅)'이라 불리고, 더욱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빌런이 등장하자 '영웅들이 집단화'하여 쳐부수는 장면에 관객들은 더욱 열광하곤 한다. 과연 '사사로운 복수'는 매우 짜릿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다. 현실에서도 그럴까? 일상속에서 그런 빌런이 등장해선 안 되겠지만, 간혹 독재권력을 휘두르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빌런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빌런이 나를 비롯해서, 우리 가족, 우리 사회, 우리 나라, 우리 지구를 위협에 빠트리는 위험천만한 일을 저지르려고 할 때, 그때도 '사법/행정/입법' 시스템의 절차를 지켜가며 차분하게 하나씩 단계적으로 정의를 실현시켜 나가는 나약한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인걸까? 사사로운 복수에 대한 깊은 고찰은 이렇게나 거창하게(?) 나열할 수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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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바라보는 3가지 관점 - 덕의 정치, 사랑의 정치, 힘의 정치 홍성민 교수의 알기 쉬운 정치철학 강의 1
홍성민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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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정치는 '전쟁'이다. 어설픈 꼼수를 부린다거나 어리숙한 낭만적 감성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정치를 한다면 두 번 볼것도 없이 '걍 아웃'이다. 특히나 한국정치는 더하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죽여야 '우리'가 사는 약육강식의 '정글 정치'가 징글맞도록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인 홍성민 교수는 한국정치가 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까닭을 정치시스템이 성숙할 시간적 여유가 없이 '왕조정권'이 무너지자마자 '식민지배'를 당했고, '해방정국의 혼란'에 이어 '군사독재'를 넘어 '민주주의'가 이만큼이나 성장한 것만으로도 대견하긴 하지만, 성숙할 수 있는 '단계적 발전'을 이루기도 전에 급박하게 '강대강의 대결정치' 양상으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독립과 친일 등으로 파벌싸움만 일삼았기에 대한민국의 정치는 오직 '힘의 논리'로만 우열을 가르는 안타까운 모습만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한국정치는 이대로 괜찮은가? 정녕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아무리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도 무너뜨릴 방법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한국정치의 정상화'도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다. 그저 정치꾼을 정치인처럼 활동하도록 감시하는 수준 정도로 관심을 두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부터 차근차근 이해하게 되면 '정치꾼들의 꼼수'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고, '정치인들의 행보'도 낱낱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이 어지럽고 복잡한 '한국정치'를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아니 적어도 저들의 일가친척만 잇속을 챙기는 난장만큼은 일거에 근절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온국민이 '정치철학'에 깊이 관심을 두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 이 책도 지었다고 한다.

 

  그 첫 번째 책으로 <정치를 보는 3가지 관점>을 펴냈다. 그 세가지란 '덕의 정치', '사랑의 정치', '힘의 정치'라고 한다. 어려운 얘기는 빼고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정치를 함에 있어 '인덕'이 있어야 하고, 무릇 정치인이라면 마음씀씀이가 '(종교적 관점에서)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며, 승리하는 정치인이 되기 위해 과감한 결단, 다시 말해 '힘'을 적절히 발휘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는 시기적으로도 '고대의 정치'는 덕을 중요시 했고, '중세의 정치'는 사랑을 중요시 했으며, '근대의 정치'는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힘'만 갖추고 '덕'과 '사랑'이 부족해서는 올바른 정치를 이끌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인이라면 세 가지를 고루 갖춰야 매우 훌륭하다 할 수 있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정치철학에 관심을 두었다면 오늘날의 '정치판'이 위의 세 가지 중 어느 쪽에 치우쳤고, 어느 것이 절대 부족한지 파악하면서 살펴보면 틀림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그람시까지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살피며 덕의 정치에서 사랑의 정치를 거쳐 힘의 정치에 이르기까지 계보를 나열하며 설명하기도 했고, 동서양의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서로 비교분석하며 동서양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정치철학의 양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며 '균형잡힌 시각'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정치철학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올바르고 균형잡힌 정치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조선왕조까지는 '덕의 정치'를 중요시해왔다. 허나 급변하는 시기에 외세의 문물을 뒤늦게 받아들이면서 '사랑의 정치'를 펼쳐보기도 전에 '힘의 정치'를 받아들이기 급급해서 '정치적 미완성', 또는 '정치적 미성숙'한 상태로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양상을 띠게 되었단다. 다시 말해, 우리 정치의 역사는 몇몇 뛰어난 인물(지도자)가 등장해서 훌륭한 인품으로 백성을 덕으로 감싸는 정치를 오래도록 해왔으나, 이런 '덕의 정치'가 발전해 마음씀씀이를 베풀줄 아는 지도자와 백성들이 조화를 이루는 '사랑의 정치'를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왕조의 패망과 함께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를 받게 된 셈이다. 서구 유럽에서는 이 시기에 '종교(그리스도교) 혁명'이 일어나며 왕족과 귀족 뿐 아니라 민중들까지 종교적 영향력이 파고들어 한마음 한뜻으로 '사랑'을 떠받들며 지내온 경험을 축적해왔는데,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덕의 정치'를 마감해야 했고, '사랑의 정치'는 협소한 의미의 포교활동(?)만 해본 채, 승패에만 집착하는 '힘의 정치'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정치는 '지도자'에게만 '덕'을 갖추라고 요구할 뿐, 국민들 스스로 '덕'을 갖출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지도자(정치인)와 국민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씀씀이를 베풀 여력도 없이 오직 '이기는 정치'만을 위해 상대를 파멸시키거나 나락으로 내몰 궁리만 하는 저급한 정치풍토를 갖추게 되었다고 분석한 것이다. 얼추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게 해야 할 시급한 문제는 지도자와 국민들 모두 '덕'을 갖추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정치적 기본소양'을 닦는 일일 것이다. 만약 '나'는 덕을 갖추고 사랑을 베풀었는데 '남'은 그렇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혜택을 누리기만 하는 얌체짓을 하게 된다면, '정의의 심판'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정의론'에 해당하는 요소로 존 롤스나 마이클 샌델이 떠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덕과 사랑을 저절로 뿜어져 나올 정도로 닦지 않게 된다면 '공리주의'를 비롯한 공정과 공평, 형평을 따지는 일에 매몰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시콜콜 따지는 사회속에서는 '덕과 사랑의 정치'가 성장할 수는 없다. 물론, '정의론'을 배척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일일이 '정의'를 논하기 이전에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만큼 상대를 존중하고 이익을 챙겨줄만한 '넉넉한 마음씀씀이'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덕과 사랑'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힘의 정치'를 논한다면, 제 잇속만 챙기기 급급한 아귀다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릇 '힘의 정치'란 상대를 재끼고 '권력'을 쟁취하는데 목적을 두기는 하지만, '이런당'이 정권을 잡든 '저런당'이 정권을 잡든 심지어 '요런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힘을 겨루는 정치를 말한다. 이를 테면, 권모술수로 가득하다고 오명을 뒤집어 쓴 <군주론>도 실상은 마키아벨리가 조국 피렌체가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메디치가의 수장에게 바쳤던 정치철학책이었다. 비록 권력을 잡는 방법이 정당하지 않을지라도 '피렌체'가 다른 나라의 침략에도 끄떡하지 않고 나아가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권력'을 차지해야 한다고 조언한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의 정치'도 정권을 잡기 위해 때론 비겁한 수단을 이용할지라도 정권을 잡은 뒤에는 오직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은 덕, 사랑, 힘의 진정한 정치양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오직 저급한 정권투쟁만 일삼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들도 모두 수준이하는 절대 아니다. 덕과 사랑을 갖추고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정치인과 국민들이 반드시 있다. 비록 아직은 아주 미미한 '소수'일지라도 정치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면, 바로 그 '소수'가 비로소 제대로 활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치는 이제 시작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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