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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평점 :
정치풍자는 꼭 해야만 한다. 특히 '정치 권력'을 향한 뼈를 때리는 농담은 '살아있는 권력'에 싱싱함을 더해주기 때문에, 권력자는 풍자에 귀를 기울어야 하고 때로는 잘 받아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풍자를 하다가는 종종 생명를 위협받기 일쑤다. 부정한 권력일수록 권력을 제대로 쓰기는커녕 그저 맹목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잘하라'는 의미의 풍자에도 화들짝 놀라 '무능한 권력'이 들통날새라 벌벌 떨며 잡아다 족치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러니 정치풍자는 부정한 권력 뿐만 아니라 무능한 권력까지 걸려주는 청정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한다. 이렇게나 유용한 정치풍자를 왜 못하게 막는가?
<걸리버 여행기>는 그런 정치풍자를 담은 대표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한때는 '아동용 소설'로 포장해서 '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만 편집해서 신기한 모험담을 소설로 통용시켰던 적도 있다. 허나 오래지 않아 '나머지 세 나라의 이야기'도 수록된 [완역본]이 선보이면서 정치풍자의 진수를 담은 진정한 어른들의 소설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책이 우리 나라의 90년대에 출간되었던 [첫 번째 완역본]으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엄청나게 다양한 출판사에 출간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걸리버 여행기>가 출판되었던 18세기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영국의 역사'의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네 나라를 돌아다녔던 걸리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풍자의 대상'이 바로 영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풍자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효율이 극대화될 수 없기에, 풍자를 걷어낸 채 읽는 <걸리버 여행기>는 그저 그런 이상한 나라를 돌아다니는 '모험소설'로 이해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단편적이나마 <걸리버 여행기>가 담고 있는 풍자의 '대상'에 대해 언급해보도록 하자.
첫 번째 모험에서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걸리버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사람들이 달걀을 깨는 방향 때문에 서로 갈라져서 전쟁까지 일삼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고작 그런 시시한 이유로 전쟁까지 불사하는 모습을 보고 걸리버는 무엇을 느꼈을까? 바로 '영국의회'가 바로 그런 시시한 이유로 다투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당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당으로 갈라져 서로를 신랄하게 비난하며 다퉜지만, 정작 조국인 영국은 뒷전으로 미루고 서로의 잇속만을 챙기기 위해서만 목숨걸고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모험에서는 '큰 사람들의 나라'에 도착하는데, 여기선 걸리버가 정반대의 처지가 되고 만다. 큰 사람들의 왕 앞에서 걸리버의 조국 영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 자랑을 늘어놓지만 큰 사람들의 왕은 도리어 걸리버처럼 작은 사람들이 무얼 할 수 있겠냐며 비아냥만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걸리버는 큰 사람들의 왕에게 '영국의 지혜'를 알려주겠다며 간신을 구별하는 방법이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법을 자랑삼아 귀띔해주었다. 그러자 큰 사람들의 왕은 너처럼 작은 사람들의 심보가 너무나도 비열하고 잔악하다면서 우리 나라에는 '영국의 지혜' 같은 것은 필요없다며 거절하고 만다. 이는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대영제국에게 일침을 놓는 꾸중이었다. 영국이 아무리 강한 나라라고 뽐내지만 세상에는 영국보다 더 강하고 영국보다 더 위대한 생각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는 나라가 있을 수 있다면서 대영제국에게 겸손을 운운한 셈이다. 게다가 대영제국의 위대함의 밑바탕에는 '부정한 정치세력'과 '식민통치를 함에 있어 너무나도 악랄하고 잔혹한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담아 놓았다. 이는 당시 스위프트가 거주하고 있던 아일랜드 사람들이 느끼는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한 불만을 담아놓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세 번째 모험은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에 방문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위대한(?) 사색에 빠진 탓에 일상생활조차 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멍청이들을 지도자로 섬기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그런 위대한 지도자의 정책결정들이 얼토당토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그저 순응(?)하거나 관망(?)하고만 있는 일반 주민들까지 싸잡아서 비판을 한 셈이다. 이런 무능한 라퓨타 사람들은 '첨단과학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반면에 라퓨타의 식민통치를 받는 나라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인들이 영국에 반기를 드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영국인들은 '문명인'인 자신들이 '미개인'인 식민지에 문명의 혜택으로 '문명화'시켜준다고 자신들의 우월함을 뽐내지만, 그런 '문명화의 헤택'이란 것이 고작해야 수탈과 압제일 뿐이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명의 위대함'을 앞세워 꼰대짓밖에는 할줄 모르는 대영제국에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이다. 그 꼰대짓마저도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굴복시키려 라퓨타를 이동시켜 '햇빛'을 가리거나 '짓눌려버린다'는 위협만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짓눌려버리는 짓을 한다면 두 번 다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을 지경에 빠져버리는 허약한(?) 대영제국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모험은 '말들이 사는 나라'인데, 이곳에서 걸리버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갖춘 '휴이넘(말)을 만나 '야후(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진정한 휴이넘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이는 인간 자체가 지닌 '추악한 본성'에 대한 부정을 명백히 드러내며 인간사회가 구축해놓은 모든 것이 끝내는 '짐승'보다 못한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나 추악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신랄하게 까발린 스위프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인류가 문명이라 이름 붙인 '야만'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처절한 반성을 통해 거듭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굵직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이처럼 저자인 조나단 스위프트는 걸리버를 통해 인간사회를 비판하였고, 때로는 걸리버를 통해 인류에게 희망을 선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희망'이란 절망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고문'처럼 이룰 수 없는 일을 하염없이 욕망하게 만드는 끔찍한 형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과연 스위프트는 어떤 의미의 '희망'을 선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결코 선한 본성을 일깨울 수 없는 '나쁜 인간'들의 향연을 그저 묵묵히 견디라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걸리버가 휴이넘의 나라에서 추방된 뒤에 지독한 '자기혐오'속에서도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에게 '휴이넘의 이상'을 가르치고 '휴이넘'을 닮은 인간으로 거듭나려 애썼기 때문이다. 비록 검은 잉크속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테지만, 그렇게 한 방울씩 깨어난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면 결국 '검은색'을 몰아내고 맑고 투명한 물로 잉크병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담았으리라 짐작한다. 허나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맑고 투명한 물은 쉬이 검은 잉크에 '물들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물 한 방울'이 아니라 '물 한 컵'을 붓는 방식이어야 하고, 때로는 수도꼭지를 틀 듯 '콸콸' 쏟아부어야 깨끗해진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걸리버가 되어야 한다. 야후에서 벗어나 휴이넘의 이상을 꿈꾸는 걸리버가 되어 실천해야만 한다. 한사람 한사람의 걸리버는 서로 다를 지라도 우리가 꿈꾸는 바람직한 이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걸리버'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