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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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챕터는 총 세개로 이루어져 있다.

"1996" 과 "1997". 그리고 에필로그인 "그 후" 이다. 하지만, 마치 이 작품은 앞의 챕터들에 비해서는 얇디얇은 몇 페이지 "그 후" 를 위해 쓰여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마지막에 던지는 파문은 상당하다. 


소설은 1996년 8월, 마지막까지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화자" 가 컬럼비아 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 오리엔테이션에서 "빌리" 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을 설명하는 몇 문장들과 빛과 공기마저 느껴질만큼 디테일한 분위기 묘사가 순식간에 나를 잡아끌었다. 

화자가 빌리와 함께 수강하는 과목은 창작과 합평으로 이뤄진 워크숍으로 소수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창작물에 비평을 하고, 함께 뒤풀이를 하며 교류하는 순서로 이뤄진다.

이런 형태는 국내의 문예창작 수업에서도 자주 이뤄진다고 알고 있다. 문창과 출신의 지인들로부터 이 과정의 잔혹함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고, 분야는 다르지만 나 역시 창작에 살짝 발을 담궜던 사람으로써 비슷한 과정을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마치 발가벗겨져 몸의 구석구석을 평가받는 느낌. 나아가 X-ray 나 CT, MRI로 피부 아래, 근육 아래, 뼈와 장기들까지 샅샅히 드러나는 느낌.

그것은 도무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과정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리라고 생각한다. 

빌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화자를 변호해줬던 인물이었다. 

이는 이후 화자가 빌리에게 품게되는 막연한 호의, 또는 호감에 대해 높은 설득력을 부여함으로써 이후에 전개되는 소소한 대화들과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든다.

작가는 이렇게 능숙하게 화자와 독자들에게 빌리를 소개하고, 동시에 순식간에 매료되게 만든다.  

곱씹어보면 뜨악한 일이지만, 화자가 안지 2주밖에 안된 빌리에게 홈 쉐어링을 제안하는 부분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화자와 빌리가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첫눈에 반해서 시작하게 되는 연인관계와 비슷하고, 홈 쉐어링을 시작하면서 전개해 나가는 에피소드 역시 그러했다.

호감에서 시작된 무조건적인 호의와 정기적으로 갖는 둘만의 시간, 자연스러운 집안일 분담과 그로인해 시작되는 갈등, 그렇게 쌓이는 오해와 악감정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전형적인 퀴어 로맨스로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화자는 빌리의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매일 바에 출근해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돈을 벌어 생활비를 벌고, 학비를 벌어야 했던 빌리는 심지어 바 지하 창고에 딸린 다목적 룸에서 살아야 했지만, 화자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자녀로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부모님이 지원해 주셨고, 좁은 침대와 리놀륨 바닥으로 대표되는 대학 기숙사조차도 마다할 수 있었다. 지옥같은 뉴욕의 집세를 무시하고 대고모가 거주하던 좋은 아파트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비는 일리노이주와 보스턴주라는 서로의 고향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빌리는 "블루칼라", 화자는 "화이트 칼라" 를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노골적인 전형성을 가지고 있다.

이후에 드러나는 빌리의 정치적인 성향, 자유로운 성생활, 인종적 편견과 추구하는 지향점 등이 이러한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어준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므로, 저자는 독자에게 빌리의 감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오롯하게 화자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데, 우리는 화자처럼 오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빌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애정을 갖게 된다.

사실, 빌리는 엄청나게 전형적인 인물이다.

특히 문학 등 예술을 소재로 다루는 작품에서는 여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의감 있고, 압도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지만, 겸손하기까지 할 뿐 아니라, 리더쉽까지 있는 인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만화에 등장할 법한 인물이다.

이 작품의 시점상 화자가 보지 않는 동안 빌리가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화자의 눈을 통해 전달되는 빌리의 전형성(과 그로 인한 변화) 때문에 빌리는 갈수록 매력이 떨어져갔고, 반대로 화자의 감정에 더욱 이입하게 되면서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화자가 저지르는 행동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사족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진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마지막 챕터로 향한다.

고작 몇 페이지에 불과한 이 부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좋아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싫어하게 될 터이다.


책을 덮은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필립 로스의 [울분] 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필립 로스는 불가해한 삶의 불공정성, 결코 "올바른 선택" 이란 것이 없는 수많은 삶의 갈림길에 대한 웃기지 않은 농담같은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다. 삶을 뒤바꾸는 농담 같은 선택. 화자 역시 그런 선택을 한다.


화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리한 여러가지 배경을 갖고 태어났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갈구하는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고, 빌리는 그 반대였다. 

빌리는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히며 사고를 넓혀가는 한편, 화자는 자신만의 아파트먼트 안에서 안온함을 누리며 더 단단한 껍질 안으로 침잠한다.

어쩌면 "창작" 이라는 욕구는 화자가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유일한 비상구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챕터는 그가 그 비상구의 문을 완벽히 닫은 후의 이야기였다.

빌리의 삶과 업적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내심 평가절하 하는 모습은 거대한 자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 그려지기도 했다.

정말 많은 부분, 콕콕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빌리가 되고 싶지만, 화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창작의 꿈은 갖고 있지만, 재능은 타고나지 못한.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필멸하는 존재로서 가장 근원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지점은,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라는 잣대는 언제나 시대와 상황이 결정한다는 부분이며, 사람들 사이에 재능이라는 차별점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재능이란 것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상황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박형서 작가의 "신의 아이들" 이라는 작품에서는 소설에 대한 엄청난 재능이 있지만,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으로부터 재능을 발견했지만, 개인의 고집이라는,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상황이 벌어진다.


위대한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으로 간섭할 수 없는 '적절함' 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아무리 적절해도 또 바뀌기도 한다. 한때는 모든 대중을 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던 작품도, 어느샌가 성차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로 바뀌어 파쇄기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모두가 절대라고 믿는 정의나 도덕, 윤리관은 이념과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파쇄기 안으로 들어갔던 작품들이 언젠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다시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추앙받는 작품들도 미래의 어느땐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스러질 수도 있다.

너무나 불공정하고, 너무나 불가해하고, 너무나 괴롭지만, 중독적이고, 또 중독적이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지만,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창작의 기술은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훈련하고 쌓아간다. 

이는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히고, 엄마에게 "안먹었어요." 라고 하는 순간 시작된다. 태어나면서 하는 숱한 거짓말들과,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기만들, 좋아하는 이성에게 어필하기 위한 메시지와 동갑내기 사이에서 돋보이기 위한 행위들, 장난감을 갖고 노는 동안 하는 수많은 공상들과 책과 드라마, 영화, 만화를 보며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창작" 의 기술들이다. 

누군가는 이 과정 속에서 창작자로의 꿈을 꾸게 된다.

마치 물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신의 숨결을 느껴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그것을 보고 자연현상에 궁금함을 느껴 과학에 투신하는 사람이 있듯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 빌리와 화자,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같은 인물들이다.

이렇게 탄생한 창작 지망생들은 더 많은 기술을 익히고, 수준 높은 창작물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알아가게 된다.

어느정도 학습을 한 지망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자기혐오에 빠지는 쪽과, 자기애에 빠지는 쪽이다.


이 작품이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었던 이유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와 빌리가 이미 대학 4년 이상의 학업을 마치고 심화 단계인 대학원생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이미 이 벽을 넘어선 단계이다. 화자가 친한 친구들 중엔 데뷔한 친구들이 아예 없고, 화자 자신도 교열하는 일을 파트타임으로 꽤 해본 인물이다.

전업작가가 되기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학업중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화자도, 빌리도 아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친구들은 아니다.

다만 빌리는 서너기수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재능을 타고난 건 맞지만, 동 세대 미국을 통틀어보면 그다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사실 그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화자의 자기혐오는 곤란한 상황이면 어김없이 터지는 땀샘으로 표현된다.

그는 스스로의 역량을 알았고, 재능이 없음을 알았다. 재능이 없는 이들은 기술에 집중한다. 그리고, 사실 기술은 재능의 부족을 상당히 보완한다.

작품 안에서 지속적으로 화자는 플롯과 구성이 탄탄한 작품을 만든다는 평을 듣는다. 

거기에 "뭔가" 가 결여되었다는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기술로 보완되지 않는 "뭔가". 사실 그것은 재능의 영역일 것이다.

세상에... 창작하는 이로써 가장 괴로운, 그리고 어려운 과제인 셈이다.

애초에 갖고 있지 않은걸, 작품 안에 녹여야 한다고 하는 셈이니, 이보다 더 무책임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빌리는 그 "뭔가" 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화자는 빌리가 수정해준 원고로 작은 승리를 한번 맛봤고, 그 뒤로 그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빌리는 자기혐오와는 달과 태양처럼 동떨어진 존재다. 외모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이 작품 안에서 유일하게 아름답게 형용되는 외모도 한 몫 했을테고, 장학금을 받는걸 기본으로 생각할 만큼 어느정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화자는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쇠처럼 그에게 끌렸을터다.

그리고, 결국은 그에게서도 듣게되는 "뭔가" 의 "결여".

아마 화자에게는 그 지적이 쐐기처럼 깊게 박혀있었을터다.

책 속엔 나오지 않지만, 대학때에도, 어쩌면 그 전부터도.

그리고 그 쐐기를 빌리가 내려치는 순간, 그 울림이 어딘가로 폭발한 것이었을 것이다.

화자가 머물던 아파트먼트는 자기혐오를 막아주는 유일한 둥지였다. 비록, 대학원시절 한정이었겠지만, 그 안에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던.

그리고, 그 둥지가 뭉개지는 순간, 화자는 자기혐오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삶이라는 연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지만, 빌리를 통해 잠깐 가질 수 있었던 "뭔가"와 결별하고, 창작이라는 세상과의 소통마저 포기하고.


나는, 화자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빌리가 마지막에 외쳤던,

"여기서 평생 살 생각이냐" 는 말이 귓가에 쟁쟁 울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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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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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있음. 





 옛날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바로 그 작품을 드디어 만나봤다. 

무려....1965년작이다.

처음 접하면 그 볼륨감에 압도될 수도 있지만, 비견되는 [반지의 제왕]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두꺼운 정도이고, [왕좌의 게임] 이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에 비하면 가벼운 분량이다. 


내용과 감상에 들어가기 전에, 이 소설의 장르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SF장르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하위 장르들을 가지고 있는데, 일단은 크게 "하드SF" 와 "소프트SF" 로 나뉜다.

"하드SF" 는 이름처럼 제법 엄격한 공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기술들을 묘사하는데 치중한다. 어떤 우주선이 등장한다고 했을때, 그 디자인이나 연료, 대기권을 돌파하는 모습 등등이 실제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 묘사된다. 사회의 모습이나 환경, 등장인물들의 직업도 모두 과학적, 공학적 정합성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허술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 카테고리에 작품을 둔 작가들 중엔 실제 공학박사나 석사 학위가 있는 경우가 많다. 

먼 예로는 클래식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부터 가까이는 [마션]의 엔디 위어 등을 들 수 있다. 

"소프트SF" 는 공학적으로 정교한 기술보다 인류,사회학적-혹은, 문학적 완성도에 치중한 작품들을 포함시키는데, 하드SF 만 엄격하게 나누고, 그 나머지 전체를 소프트SF 라고 통칭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지 오웰의 [1984] 나 브래드 버리의 [화성연대기], 어슐러 르 귄의 [헤인 연대기] 등이 이에 속한다.


즉,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하위 장르는 '소프트 SF'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체역사, 시간여행, 돌연변이, 외계인, 초능력, 포스트 아포칼립스, 우주여행, 우주전쟁 등등 수많은 소재들로 카테고리가 나뉜다. 

그 중 "우주" 를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스페이스 오페라" 쪽에 포함된다.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내용에 따라 "스페이스 어드밴처" 물과 "스페이스 로망스" 물로 나뉘는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문학이 아닌 영화와 드라마를 예로 든다면, 전자는 [스타트렉] 후자는 [스타워즈] 를 상상하면 된다.

스페이스 어드밴처는 단어 그대로 주 내용이 우주 곳곳을 여행하며 갖가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생산해내고, 많은 드라마가 "우주선 내부" 에서 벌어진다. 

반면, 스페이스 로망스는 특정한 환경을 가진 행성 안에서 고전적인 서사를 풀어낸다.

우주선과 외계행성을 빼면, 판타지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서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스페이스 어드밴처와 로망스는 다소 비하의 뉘앙스로 사용되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라는 용어를 대체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하드SF 가 엄격한 과학적 근거에 매달리는 사이, 문학적-또는 대중적- 완성도에 집중하며 빠르게 장르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특히, 어슐러 르 귄 같은 작가가 그려내는 외계 행성 문명에 대한 묘사는 인류, 사회학적 정합도가 무척 뛰어나고, 앤 레키의 '라드츠 제국 시리즈' 에 등장하는 AI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은 하드SF와의 경계마저도 모호하게 만들었다. 래리 니븐의 [링 월드] 시리즈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참전해 "이 작품이 하드SF인지에 관해" 아직까지도 치열하게 논쟁 중이기도 하다. 실제 공학자들이 작품 속 등장하는 구조물들을 정교한 물리 엔진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을 정도. (역시 덕 중 덕은 양덕....ㄷㄷㄷ) 



 [듄] 은 이러한 스페이스 로망스의 특징들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러개의 항성으로 이루어진 항성계 제국 "페디샤".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파이스" 라는 자원으로, 섭취하면 노화를 멈추게 해주는 특별한 광물이다.

페디샤 세계는 전제 군주제의 형태로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최고자대표회의" 라는, 마치 프랑스 혁명기의 3부 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귀족, 군주, 기업의 연합체에 묶여있었다. 심지어 제 아무리 황제라도 함선을 이용한 우주 여행도 "우주조합" 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서로를 견제하는 권력 구조는 오직 스파이스를 둘러싼 치열한 이권다툼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스파이스의 유통 구조야말로 페디샤 우주를 지탱하는 권력의 원천이었다.  

가장 순도가 높은 스파이스 중의 스파이스, "멜란지"가 매장되어있는 사막의 행성 "아라키스".

페디샤의 81대 황제 샤담 4세가 블라디미르 하코넨 가문이 맡고 있던 아라키스 행성을 레토 아트레이데스 공작에게 맡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는 레토 공작에게는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코넨과 아트레이데스는 대를 이은 원수 중의 원수였기 때문. 

제아무리 황제의 명령이라지만, 블라디미르가 레토에게 자신의 노른자위 영지를 순순히 내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고지식한 레토 공작은 기꺼이 그 함정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레토 공작의 아들, 폴.

훗날 무앗딥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어린 소년이 아라키스의 척박한 모래 위에 발을 내딛는다.



 서사 구조 자체는 무척 전형적인 영웅서사이다. 

어린 소년이 부모를 잃고, 여러 고난을 거치며 성장하여,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

심지어, 아라키스라는 "행성" 과 작품의 스펙타클을 책임질 우주 강습만 없으면,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과학" 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토대를 구성하고 있는 설정들이 매우 디테일하고, 무척 설득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고난과 성장과정이 외면보다 내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와 함께 아라키스 행성의 원 거주민인 "프레멘" , 페디샤 우주의 여성 종교집단 "베네 게세리트", 냉철한 판단력과 높은 전투력을 지닌 용병집단 "멘타트", 그리고 베네 게세리트의 궁극적 지향점인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 "퀴사츠 헤더락" 등 다양한 설정들역시 잘 맞아 떨어지며 작가가 창조해낸 하나의 세계에 깊은 설득력을 안겨준다.

스파이스라는 자원과 이를 둘러싼 이권 다툼, 권력을 둘러싼 치밀한 음모도 재미있지만, 스파이스의 최대 매장지이자 우주 최강의 괴물이라 해도 무방할 '모래벌레'가 서식하는 아라키스 행성의 생태계는 물론 각각의 문화나 환경들이 무척이나 짜임새가 있다. 이러한 환경 생태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1960년대 당시에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고 하던데, 지금 봐도 놀랍고 매혹적일 정도로 정교하다.

 프레멘은 척박한 사막행성에 사는 종족으로, 이들의 물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몸에서 발생되는 모든 수분을 모아 음용하는 기술이 발달했고, 종족의 문화적 색채 또한 물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 대다수다. 속담이나 용어, 삶의 방식들 -예를들어, 누군가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 '남을 위해 자신의 물을 내줬다' 며 감격스러워 한다거나,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액체를 회수해서 공동체가 나눈다는 등의-이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금새 프레멘들의 삶의 방식에 빠져들게 된다.

이는 폴이 무앗딥이라는 이름으로 이 종족에 녹아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려지는데, 그 덕에 아주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것은 폴의 내면적 성장이다. 아라키스의 생태에 대한 묘사가 무척이나 구체적인 반면, 폴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무척 형이상학적이다.

숨쉴 틈 없이 도입부가 지나간 뒤 펼쳐지는 폴의 각성은 매우 급진적이고, 폭발적이다. 몇 페이지 전까지는, 잠재력은 있고, 영민하지만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폴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이 곳과 우주 너머를 동시에 보는 능력을 통해 거만하고 오만한 청년으로 훌쩍 뛰어오른다. 워낙에 고위 귀족 자제라 되바라진 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오만하거나 교만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성장의 나머지 내용들은 그가 거만함과 오만함을 버리고,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나는 과정들이다.

 그리고, 그런 폴을 바라보는 어머니 제시카의 변화도 무척이나 흥미로울 뿐 아니라, 폴과 사랑을 나누는 차니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듯, 설정과 세계관 뿐 아니라, 폴과 제시카를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도 매우 매력적이다. 

물론, 이들 역시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이지만, 그 전형성에도 개연성이 충분하다.

레토 아트레이데스 공작 뿐 아니라, 그 휘하의 가신들, 거니 할렉과 던컨 아이다호도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유에 박사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특히 강력한 최종빌런, 블라디미르 하코넨 남작의 무게감도 빼놓을 수 없고, 2권에서 활약할 것으로 보이는, 사막에서 태어나는 여동생 엘리아 아트레이데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걸 깨달은 애어른이라, 정말정말 흥미로웠다. 과연 폴 무앗딥의 조력자가 될 것인지, 억제기가 될 것인지, 너무너무 궁금하다.

모든 인물들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군더더기가 없이 빠르고 효과적인 전개가 이 두꺼운 책을 얇게 만들어버린다.

왜 이 시리즈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는지, 수많은 매니아들이 '아직도' 생겨나고 있는지 납득이 갔다.


 폴은 어느순간,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야를 얻게 된다.

이는 너무나 완벽한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 더 중요해지는 경지다.

자신의 움직임이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고, 그 모든 경우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폴 무앗딥에 궁극적으로 바라본 광경은 페디샤 전체가 전쟁의 광기에 빠져들어 온통 불타는 우주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중심에는 자신의 이름, '무앗딥' 을 외치는 광신도들이 있었다.

그 광경이 보인 뒤로부터 폴은 자신이 그 어떤 경우의 수를 예측해도 그 미래를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자신에게 그토록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그 미래는 전혀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폴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놀라운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

아직 수천페이지의 "아트레이데스 사가"가 저 앞에 펼쳐져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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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블랙아웃 1~2 세트 - 전2권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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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북] 으로부터 몇년 뒤. 2060년 4월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

네트 전문가인 바드리는 여전히 바쁘게 학생들의 강하작업을 계산하고 있고, 던워디 교수는 보다 활발해진 역사학도들의 강하를 관리, 감독하며 "과잉보호" 라는 소리를 듣고 있으며, [둠즈데이북] 으로 10대때 불법적인 첫 강하를 경험했던 콜린은 지겹도록 던워디 교수를 쫓아다니며 다음 강하를 졸라왔고, 부외자는 절대 강하할 수 없다는 던워디 교수의 룰에 의해 번번히 쫓겨났다. 그리고, 아마도 그 와중에 학부생인 폴리를 만나, 짝사랑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폴리를 비롯해, 베일리얼 칼리지의 역사학부생인 메로피, 마이클, 이 세 청춘이 이번 작품의 주인공들이다.

메로피는 에일린이란 이름으로 1940년 3월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인 워릭셔에서 귀족인 케롤라인 부인의 하녀로, 마이클은 마이크라는 이름으로 1940년 5월 도버항에서 멀지 않은 작은 부둣가 마을 살트램-온 시에서 미국 출신 기자로, 폴리는 성만 바꾼 본인의 이름 그대로 1940년 9월의 런던에 백화점 직원으로, 메리는 1944년 덜위치의 응급 간호사 부대 지부로 파견된 중위로 분해 역사학 과제를 수행중이거나, 막 수행하기 위해 도착했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엄청나게 어수선하다.

1980년대부터 이 이야기를 구상한 코니 윌리스가 상상한 2060년은 스마트폰도, 랩탑도 충분히 개발되기 전이라 시간여행까지는 도달했어도, 휴대용 기기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책 속 등장인물들은 임플란트 시술을 통해 사전 하나 분량의 지식을 머리 속에 담을 수 있고, 세포강화를 통해 각종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증진시킬 수 있으며, 억양, 말투 등 조건반사적 행동까지도 조정할 수 있으나, 휴대폰이 없고, 인터넷도 와이파이도, 랩탑도 없다. 

때문에, [둠즈데이북] 에서도 등장했던 엇갈림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과제 종료를 일주일 앞둔 메로피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강하지점을 통해 일단 1940년에서 2060년으로 복귀한다. 

2060년의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에서는 던워디 교수가 강하 예정인 학생들의 스케줄을 급히 변경시킨 탓에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스케줄이 앞당겨진 폴리는 1940년의 의복을 찾기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었고, 마이클 역시 강하 순서가 변경되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해야 했다. 에일린은 2060년에 하루 머무르고, 다시 1940년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 사이에 1940년식 자동차의 운전법을 배워야 했다.

1940년의 하녀는 운전할 줄 몰랐지만, 때는 전시. 여차할 때 응급차를 몰아야 했기 때문에, 에일린은 시간여행의 장점을 이용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유로 던워디 교수를 만나러 왔다가, 만나게 되어 환담을 나누고, 결국 던워디 교수와는 만나지도 못한채 각자의 슨케줄로 돌아간다.

이 초반 도입부가 진짜 정신없다.

휴대폰 하나만 있었으면 모든게 해결될 것 같았던 에피소드들이 정신없이 겹쳐있을 뿐 아니라, 시간여행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다.

[둠즈데이북] 에서도 드러났던 어수선하고 산만하지만, 꽤 재미있는 좌충우돌 도입부는 이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임무를 앞둔, 그리고 그 임무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더불어, 자칫하면 강하가 취소될 수도 있다는 불안함들이 엉키고 설켜 깊은 몰입도를 준다.



에일린은 이미 강하지점이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적당히 "외출 정도의 시간" 에 맞춰 돌아갔으나, 처음 강하지점으로 도착한 폴리와 마이클은 그렇지 않았다.

강하의 오차범위는 최소 몇시간에서 최대 2~3일 정도, 그리고 반경 몇 킬로미터 내외였을텐데, 오차범위 두시간 예상이었던 에일린은 무려 나흘 반 늦게, 마이클은 예정보다 사흘 늦게, 게다가 임무지에서 무려 10km떨어진 곳에 도착하게 된다. 

예상과 다른 시간대, 장소에 도착한 이들의 황망함 역시 매우 잘 그려져 있다.


1944년의 메리와 1944년의 어니스트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역사학자 등 정상적으로 도착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떡밥처럼 툭툭 흐트러진 가운데 메로피 , 폴리, 마이클의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진행된다.

강하 지점은 시간여행자들이 들킬 수 없는 지역에 만들어져서, 시간여행자들은 정기적으로 현재로 돌아와 보고를 해야 했다.

바드리는 시간여행자들의 스케줄에 따라 정기적으로 강하지점을 열어서 보고를 듣고, 상황에 따라서는 일시적으로 귀환을 시키거나, 과제를 종료시키기도 한다.


4주동안 런던 교외의 시골 귀족의 저택에서 피난민 아이들을 돌보며 지칠대로 지친 에일린은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과제 종료일을 맞이했으나, 아이들 사이에 홍역이 돌면서 저택이 격리되고 만다. 

면역 강화 시술을 받은지라 홍역에 걸릴 위험은 없었지만, 몇주 더 발이 묶이고, 그 뒤엔 저택이 군인들의 사격 연습장 베이스로 지정되며 강하지점이 활성화 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누구에게든 현 시간대의 사람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면, 네트는 그 강하지점을 결코 다시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제 종료일이 5월이었으나 10월까지 이 시대에 붙잡혀 있던 에일린은 폴리가 1940년의 런던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런던으로 가 폴리의 강하지점을 사용할 계획을 잡는다.


한편, 1940년 5월에 도착한 폴리는 등화관제로 칠흑처럼 새까만 런던 시내 어딘가에서 필사적으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피고 있었다.

강하지점을 기억해야만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터였다. 가까스로 어둠에 적응해 몇몇 표식을 기억하고, 전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가까운 교회 지하에 마련된 방공호에 도착한 폴리는 생각보다 익숙하게 대피해서 나름대로 빈 시간을 활용하고 있는 시민들을 보며 자신이 의도했던 시기보다 며칠 뒤의 시간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에게 며칠의 시간은 치명적으로 아까운 시간이었다. 2~4주 정도의 기간만 머물 수 있기에, 관찰할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폴리는 독일 간첩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그리고 시간여행자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런던에서의 일상생활을 위해 거처와 직업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머릿속에 심은 폴리였지만, 실제로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고, 어제와 오늘 건물의 모습이 달라지고, 배려와 감시가 엇갈리는 전시 대도시의 생활은 녹록찮았다.

원래는 사는 곳과 직업을 구한 뒤 즉시 강하장소를 통해 현실로 귀환해 보고해야 했으나, 폴리는 첫번째 정기강하를 놓치고, 다음 정기강하때 강하장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강하지의 옆 건물이 폭격으로 무너지며, 강하지까지 여파가 있었는지, 정기 강하 시간에 되어도 네트는 열리지 않았다.


1940년 8월에 살트렘-온 시에 도착한 마이클은 등화관제로 칠흑처럼 시커먼 해변가에 도착한다.

마이클은 폴리와 달리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도버해협의 깎아지는듯한 절벽들을 떠올리며 별 수 없이 동 틀 때까지 해변가에 앉아있어야 했다. 

네트는 시간여행자들을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는 '분기점'으로 결코 보내지 않았다. 이는 '네트' 의 성격에 기인한다.

작품 안에서 시간여행은 인간들이 만든 특수한 기술이라기보다, 사람을 과거로 보낼 수 있는 특정한 "현상" 을 발견했고, 그 현상을 이용하는 개념에 가깝다. "네트" 는 인간들이 만들었다기보다, 이러한 "현상"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절대적인 "룰" 이다.

인간은 이 현상을 이용해 과거로 강하할 수 있었고, 이러한 과거의 시간대를 조정하는 기술까지는 개발할 수 있었지만, 아직 모든 변수들을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수많은 오류들이 발생했고, 어떠한 방법을 써도 절대로 갈 수 없는 시간대와 장소가 존재했는데, 그걸 "분기점이기 때문' 이리고 예상하고, "네트" 라는 존재가 그걸 막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그리고, 1940년 8월의 됭케르크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현지인들에게 들킬 수도 있는 시간과 지점에도 네트는 결코 열리지 않았고, 8월의 됭케르크는 전체가 다 불가능한 장소였다.

그래서, 마이클은 도버 해협에서 이 구출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할 예정이었으나,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됭케르크에서 영국군들을 구출하는 행위에 참여하게 된다. 

그 와중에 심각한 다리부상까지 입게 되고, 몇주간이나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몇달 뒤에나 퇴원해서 강하 장소로 가보는데, 자신의 네트가 열릴 공간에 영국군의 방공포가 자리잡고 있었다.

결코 이 공간에 다시 네트가 열릴 일은 없을터였다. 전쟁이 끝나 방공포대가 해체되기 전까진.

1940년의 영국 런던에 강하하는 역사학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마이클은 런던으로 향한다.


폴리는 1940년의 런던에 적응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강하장소에 가보지만, 네트는 감감무소식이다.

심지어, 과제 종료일이 지나도 귀환하지 않는 여행자들을 위한 구조대조차도 파견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기록과 현실은 조금씩 오차가 있었고, 몇차례 공습 가까이에 휘말리면서 죽음의 위기까지 넘기면서 2060년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미래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게 10월이 되어, 폴리는 에일린, 마이클과 극적으로 재회한다.

하지만, 그 시점이 바로 셋 모두의 강하지점이 모두 먹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블랙아웃" 의 순간이었다.

자신이 됭케르크에서 군인들을 구함으로써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 생각한 마이클은 자책감에 못이겨 공황에 빠지고, 1940년에 가장 오래 있었던 에일린은 정신적인 피로감에 심하게 지쳐있었다. 폴리는 마이클이 역사에 큰 분기를 건드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 그런 모든 것들을 다 챙길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그 역시 옥스퍼드가 구조대를 파견할 수 없는 상황 - 이 모든 강하계획 스케줄을 조정한 던워디 교수의 죽음이라거나, 자신들을 타임라인에서 잃어버려서 어느 시점으로 구조대를 파견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등을 떠올리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작인 [둠즈데이북] 을 읽은 독자라면, 옥스퍼드의 네트 시스템이 얼마나 외부 환경에 취약한지 잘 알고 있을터다.


그리고, 1940년 9월에 런던에 도착한 또다른 시간여행자의 모습과 함께 [블랙아웃]1,2권은 마무리된다. 


진짜 미치도록 재밌어서, 2권은 밤새 읽어버렸다.

시간여행에 대한 개념은 [둠즈데이북] 에서보다 더 많이 구체화되고, 개념정리를 할 수 있을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시간여행이 개발된 것이 고작 40년 전이라는 사실과, 유태계 과학자의 발견이었다는 점 등이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 시간여행이 "기술" 보다는 "현상" 에 가깝다는 점과, 노하우가 쌓인지 얼마 안되었다는 점을 종합해보면, 등장인물들의 시간여행이 꼼꼼하지 않고, 대부분 급박하고 허술하게 이뤄진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다양한 화자들을 통해 전시 런던 곳곳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내는데, 특히 당대의 시대정신에 걸맞는 군상극을 매우 잘 그려내고 있다.

인류 문명사를 통틀어, 여성'들' 이 역사의 전면에 올라서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이 끝난 이유는 전쟁터에 나갈 남자가 없어져서" 라는 해석이 있을정도로 유럽 전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남자들이 죽어나갔다. 당연히 여성들이 산업현장에 뛰어들어야 했고, 남자들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바야흐로 노동인권과 여성인권이 혼합되는 시기다.

공고했던 계급,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고, 그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여성 인권이 떠올랐고, 아동 인권, 흑인 인권은 아직도 요원한 문제였다.

이 작품은 죽음이 일상화된 혼돈의 시기, 변화가 시작된 전시 런던의 도가니를 매우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간 세계대전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 "군인" 혹은 "전쟁 난민" 의 입장을 그려왔던 것과 대단히 다른 접근이다.

런던 교외의 귀족층부터 그 하인들, 지방 공동체를 단단히 붙잡아주던 교회와 성당의 사제들, 폭격 하의 도심지에서 아이들만을 피난시키고, 어떻게든 일자리를 받아 돈을 벌어야 했던 수많은 엄마들, 등화관제를 관리하며 방공호로 사람들을 안내하던 자원봉사자들, 평범한 백화점 직원들, 노인들  


현대의 관점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인지, 역시 다시 한번 섬세하게 조망한다.

종이 위에 텍스트로 기록된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살아 숨쉬던 "사람" 들이 만들어낸 진짜 역사.

인류의 문명이란,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지 다시한번 깊이 새길만한 장면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온다.

      

등장인물들이 뜻밖의 사건을 대하는 자세들, 그로 인해 변화하는 심경들과 전시 하의 런던에 적응하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처음 주인공들이 임무를 맡았을 때는 다들 자신만만했다.

이들은 자기가 가서 생활할 2주, 길게는 4주간 일어날 일들을 촘촘하게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신문, 잡지, 수기, 기밀로 묶여있던 전시 공식 기록들도 철저히 검토했을 뿐 아니라,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각종 질병에 대한 몇배의 면역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외과적 수술을 통해 백과사전 몇권 분량의 지식을 잠재기억속에 인위적으로 삽입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들은 과거에 도착해서도 현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네트는 정기적으로 열렸고, 한번 임무가 시작되면, 현재로 돌아와 하루이틀 시간을 보내고, 다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정도의 정교함도 기대할 수 있었다. 만약 사고가 생기면, 그 땐 현재에서 구조팀이 급파될 것이고, 자신들은 무사히 안전한 현재의 시간대로 되돌아올 수 있을테니 말이다. 

특히, 작품 초반, 총 4주간의 임무를 받아 이미 2주간 수행중이던 에일린은 전쟁과 다소 떨어져 있는 런던 교외에서 피난온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으므로 전시의 혼란함보다 임무의 고단함이 더 심했다. 

이랬던 이들이 오차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시간대에 떨어지면서 미리 준비했던 지식과 정보들이 쓸모없어지고 현재로 돌아갈 네트조차 열리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멘탈이 서서히 부서져 가는 과정들이 세련되고 예민하게 묘사되고 있다.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가 흥미로운 지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현대인들은 무심코 과거시대가 지금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과학과 의학 등 사회 문화적 수준이 지금보다 낮은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의 사람들의 지적수준이나 의식수준까지 낮은 건 결코 아니다. 인간 개개인의 신체적 조건이나 지성은 크게 변화가 없다.

인간 개개인에게 있어 축적된 지식이나 정보 따위는 큰 무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서 다소 '우월' 하리라고 여겨졌던 그러한 '미래적' 무기들은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등화관제로 칠흙같이 어두운 도버 해협의 자갈 해변 어딘가에 떨어진 마이클처럼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여타의 시간여행물과 코니 윌리스의 그것이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블랙아웃]의 최대 단점은 이 책이 애초에 2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올클리어]와 이어진다.

수많은 떡밥들이 흩뿌려진 채로, 그리고 마지막까지 큰 떡밥을 하나 던지면서 끝난다.

나는 이 시리즈가 모두 발간된 뒤에 읽기 시작했기에 망정이지...


아, 지식과 정보를 미리 알고 있다면, 이런 점은 확실히 유리하구나.

이 책을 실시간으로 접한 과거의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

[올클리어] 나올 때 까지 얼마나 기다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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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북 1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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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발표된 [둠즈데이북] 은 옥스퍼드 시간여행 연작 중 [화재감시원]의 뒤를 잇는 두번째 작품이자 첫 장편이라고 할 수 있다. 

데뷔작인 [화재감시원]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발표된 작품으로, 코니 윌리스의 작품세계 안에서는 비교적 초기작이라 할 수 있지만, [화재감시원]으로 씨를 뿌린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고, 작가로서의 역량도 농익으면서 "옥스퍼드 시간여행" 연작의 초석을 다졌다. 물론 어마어마하게 많이 읽혔다.

  

 서기 2040년대의 잉글랜드.  

시간여행 기술, "네트"가 개발되고, 몇차례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초기 데이터들이 수합되고 있었다.

그 중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에서는 네트 기술을 역사학부와 연계시켰다. 역사학 교수와 학부생들은 시간대를 쪼개 위험도를 체크,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시간대를 골라 강하를 시도해 실제 중세를 체험하고, 역사적 기록과 가설을 크로스 체크할 수 있었다. 네트의 정밀한 시스템은 현대인들이 과거의 타임라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를 산정했고, 과거와 현재가 서로 간섭되지 않도록 제어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분기" 로는 강하가 결코 열리지 않았다.

 아직 이 기술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정확한 계산은 너무나 어려웠고, 강하 장소를 골라 네트를 여는 것 조차 계산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네트' 는 시간여행의 "기술" 이 아니라,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특별한 "현상" 을 "발견" 해서 응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예를들어, 1380년 7월 1일로 가고싶다고, 무조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타겟을 설정하고, 그 타겟을 중심으로 강하 지점이 열리는 지점을 계산하고, 또 계산해야 했으며, 그렇게 계산해서 강하 지점을 찾아도, 적게는 수시간에서, 많게는 수일, 가깝게는 수킬로미터에서 멀게는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강하하기도 했다.  


연말까지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연휴의 초입, 역사학과장이 장기 휴가를 떠나 대행을 맡게된 길크리스트 교수는 진취적이고 도전정신 강한 역사학부생 키브린을 1300년대로 강하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키브린의 집요한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차기 학과장을 노리는 길크리스트도 이 기회에 성공적인 강하 기록을 한 줄 채워넣고 싶었던 것이다. 

"강하" 의 1세대라 봐도 무방한 던워디 교수만이 이번 강하를 반대하고 있었지만, 길크리스트는 자신의 큰그림을 가로막는 그가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던워디 교수의 의견을 묵살하며, 길크리스트는 연휴에 소집한 수석연구원 바드리와 함께 키브린을 1320년의 옥스퍼드로 강하시킨다. 2주라는 기간동안 각종 병의 면역력 강화 시술을 받은 키브린은 흑사병이 유행하기 28년 전의 잉글랜드에서 중세인의 삶에 대한 생생한 자료들을 남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강하 직후, 키브린의 강하를 담당했던 네트 기술자 바드리는 "계산이 뭔가 잘못됐다" 는 메시지를 남기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로 쓰러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판단되어 옥스퍼드 전체가 셧다운 되고 만다. 던워디는 당장 네트를 다시 열고 키브린을 데려오고자 하지만, 길크리스트는 던워디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는 위기감에 네트 연구동을 폐쇄하고, 뒤이어 "전염병의 근원지가 과거, 즉 바이러스가 네트를 통해 넘어왔다" 는 낭설까지 퍼지게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던워디는 오랜 친구이자 의과 교수인 아렌스를 도와 옥스퍼드에 퍼진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게 된다.


 한편, 중세 잉글랜드로 강하한 키브린은 각종 병에 대한 예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드리와 같은 증상을 보이고, 열악한 중세 환경 속에서 로슈 신부의 도움을 받아 기욤 경의 장원에서 몸을 추스리게 된다.

병에 걸린 키브린을 돌봐준건 재판을 받기 위해 수도로 떠난 기욤경의 가솔들이었다. 기욤경의 아내인 엘로이즈, 큰 딸 로즈먼드와, 작은 딸 아그네스, 그리고 기욤 경의 어머니이자 엘로이즈의 시어머니인 이메인 부인과 함께 중세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현대(미래) 잉글랜드와 중세 잉글랜드가 끊임없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화재감시원] 에서 주인공 바솔로뮤의 동기이자 담당 교수인 '키브린' 과 '던워디 교수' 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시기로, 그 이야기보다는 앞선 시간대를 다룬다. 즉, [화재감시원]의 프리퀄인 셈이다. 


[둠즈데이북]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두개의 미스테리를 툭, 던져놓는다.

1. 키브린은 왜 계산과 크게 동떨어진 시간대에 떨어졌는가?

2. 과연 던워디 교수는 키브린을 구하러 갈 수 있을까?


첫번째 미스테리는 이 다음, 다음 시리즈를 위한 떡밥으로 작품 안에서 던워디 교수는 계산이 정확했으리라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의심을 하며 이야기의 현실 파트가 과거 파트와 유리되지 않는 강력한 접착제로 사용된다. 두번째 미스테리는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서스펜스의 핵심이다. 모든 장치가 구조들이 흠 잡을 곳 없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이 그리는 것은 시간여행자의 스펙터클이나 새로운 모험의 즐거움 따위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중세 체험" 을 위해 시간여행이라는 장르를 사용한 것에 가까워보인다.

시간여행자가 과거에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정신, 생각을 전파시킨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전개는 결코 없다.

나 역시 클리셰에 쪄들어서, 등장인물 중 시간대에 고립된 인물을 찾는다던지, 키브린이 짠 하고 미래의 기술을 선보이는 장면들을 기대했으나, 결코, 없었다.

아무리 미래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단 한 사람의 인간이 완전히 다른 시간대와 세상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순히 텍스트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과 공간 속에서.

그 끔찍한 냄새와, 낙후된 의료기술, 위생관념, 인권의 도가니 안에서, 키브린은 크게 다르지 않은 한명의 여성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옥의 도가니는 2040년대의 옥스퍼드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플루엔자가 옥스퍼드를 덮쳤고, 사람들은 쓰러졌다.

철저한 위생관념과 훌륭한 의료체계가 있었지만말이다.

2040년대의 지식으로 무장한 키브린이 장원의 가족들이 흑사병으로 쓰러져 가는 것을 막지 못했듯이, 2040년대의 사람들도 인플루엔자로 쓰러져간다.

심지어, "이 병이 네트를 통해 과거에서 왔다" 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까지 하며.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전염병의 양상은 새삼, 코비드-19가 덮친 현대의 지구촌을 떠올리게 한다.

격리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병마와 싸우기 위해 하루종일 방호복을 입고 있는 의료진들. 이기적인 사람들과, 헌신적인 사람들.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짜증나는 사람들. 

그리고, 지옥처럼 덮쳐오는 병마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우연과 타이밍의 악마들. 

이 작품이 1992년에 발표된 것을 떠올려보면, 팬더믹을 그려낸 코니 윌리스의 통찰력엔 감탄하고 또 감탄할 따름이다.


중세를 그려낸 작품들은 아주 많고, 나는 역사소설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정말 많이 읽어왔지만, 이 작품만큼 생생한 중세를 그려낸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너무나 입체적이고, 전형적으로 보이는 인물들 모두가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쉽게 공감된다.

인물들을 포함한 소설적 장치들이 모두 적재적소에서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사용된다. 

역사는, 과거는 단지 텍스트가 아니고, 모두가 살아 숨쉬던 사람 한명 한명의 숨길임을 설파하듯.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스토리텔링도 정말 놀랍고 탁월하다.

"수다SF"라는 장르의 창시자라는 위명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듯, 맺고, 끊고, 모으고, 터뜨리고, 뻥치고, 살살 달래고. 

아주 농락당하는 느낌으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더 농락당할 것이 분명하다.

이 시리즈는 아직 두 편이 남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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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 개정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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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SF-판타지 장르에서 코니 윌리스는 명실상부, 80년대를 통째로 집어삼킨 작가이다.

지금 우리가 테드 창에 열광하듯, 80년대는 오롯하게 코니 윌리스 여사의 시대였다. 특히, 과작-그것도 단편-인 테드 창에 비해 코니 윌리스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작가로, 80년대에 펴낸 책들은 대부분 장편이고, 대부분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았다. 휴고상은 전문 심사위원들이, 네뷸러는 팬 심사위원들이 주를 이루는 것을 떠올려보면,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는 증거다.

그 중 "옥스퍼드 시간여행" 연작은 코니 윌리스의 대표적인 시리즈이자 시간여행 소설들이 가져왔던 클리셰들을 산산히 부숴버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코니 윌리스의 10번째 작품이자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화재감시원] 은 1982년에 발표되어 1983년, 휴고상과 네뷸라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첫 단편이다. 이후 독자들에게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 라 불리며 큰 사랑을 받게 될 장대한 시리즈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여러모로 '코니 윌리스' 라는 작품 세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작품으로, [둠즈데이북] 으로 이 세계에 발을 디딘 나로서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 작품집엔 총 다섯편의 작품이 실려있고, "코니 윌리스 걸작선" 이라는 이름에 맞게 유려한 중단편들만 모여있지만, 이 공간에는 "화재감시원" 만 기록하기로 하겠다.


이야기는 1940년 9월 20일, 바솔로뮤가 세인트폴 대성당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웨일즈에서 파견나온 사제로서, 바솔로뮤는 화재감시원으로 자원봉사를 나온 것으로 '설정' 되어있었다. 

바솔로뮤는 2060년대에서 194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역사학도로서 역사에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전쟁통의 사람들과 약 두달간 뒤엉키게 된다.


이야기는 수기와 같은 기록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이 공습당할때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 아무리 철저한 준비를 했다지만, 과거에서 상상치 못한 일들을 맞닥뜨린 바솔로뮤의 황망함과 전시의 혼란스러움, 그 안에서 역사학도이자 미래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전시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의 충돌, 그리고 과거인들과의 갈등 등 다양한 내러티브들이 겹겹이 포개져있다.


이 작품은 "시간여행" 을 다룬 작품이지만, 그동안 수많은 시간여행 작품에서 등장한 클리셰들이 하나도 없다.

대신, 엄청나게 공들인 고증이 자리잡고 있다.

코니 윌리스가 시간여행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과거를 직시" 하는 자세다.

바솔로뮤는 런던 대공습이 시작된 1940년 대성당에서 나치의 스파이를 감시하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미래에서 온 인물" 로 보이지 않고 자연스레 녹아들어 2주라는 짧은 시간동안 매일 밤 대성당 지붕위에 떨어지는 소이탄들을 수거하고, 모래로 덮는 "화재감시원" 자원봉사를 하며 장구하게 흐르는 시간 앞에 한명의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최대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바라보려 하지만, 그 전쟁 난리통 속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함께 발버둥치다보면, 결코 방관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바솔로뮤는 미래에서 온 인물로, 그가 함께 숨쉬며 발버둥치는 그 사람들은 바솔로뮤의 입장에선 이미 모두 죽은 사람들인 것이다. 

바솔로뮤는 자신에게 호감을 표했던 상냥한 아가씨 앞에서 그 사실만을 절절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오늘 밤 폭격당할 지하철 역에서 잠자리에 들 그들을 구할 방법은 없다는 사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며, 그 모든 사건들은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라는 사실.


아주 단순한 플롯이지만, 내러티브들이 차곡차곡 포개지며, 깊이있는 울림이 여기저기서 푹푹 솟아나온다. 얼핏, "이 이야기는 대체 왜 있는거야? " 싶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상황들조차 결국엔 몇배의 울림으로 수렴된다. 특히, 인물간의 구성을 통한 이야기의 연출이 대단히 세련되서, 충분히 연구를 해봐도 좋을 법한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모든 인물과 소품, 장소와 고양이까지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역할을 120% 수행해낸다. 군더더기란 1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전개가 돋보이고,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고증" 에 대한 부분을 얼마나 많이 신경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코니 윌리스의 초기 단편들이고, 여러 상을 휩쓴 "걸작선" 이라곤 하지만, 사실 작품마다 퀄리티의 편차가 좀 있다. 

그러나, [화재감시원] 이 단편만큼은 작가로서의 재능과 이야기를 구축해내는 그만의 센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클래식" 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데에 주저없이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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