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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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 

p.7


첫 문장이 아주 강렬했다. 너무나 신랄하고 발랄하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상황을 '까는' 이 문장에 실제로 소리내서 웃으며 크게 공감했다. '벤야멘타 학원' 자리에, 내가 나온 학교들을 넣어도 될 것 같았다. 거의 100여년 전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주 재미난 풍자소설임을 짐작케 했다. 원 제목이자 작중 화자인'야콥 폰 군텐'은 유력한 집안의 자식이다. 대대로 공직을 맡아온 귀족 가문 태생이다. 하지만, 야콥은 큰 돈을 내면서 '하인학교' 에 입학했다. 벤야멘타 남매가 운영하는 이 하인학교는 원생 수도 얼마 없는데다가 가르치는 것도 거의 없는, 직업 훈련소라고 부르기에도 미미한 학교다. 


비교적 흥미로운 도입부와는 달리, 읽을수록 지쳐갔다. 하인학교의 동료들인 하인리히, 샤흐트, 크라우스와 학교의 원장인 미스터 엔 미스 벤야멘타에 관한 다소 장황한 인평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자의 심리가 두서없이 나열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건도 없고, 일관되기 주지되는 메시지도 없다.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이랄까. 중심된 이야기가 없이, 화자의 일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큰 흐름 없이 시종일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주변인물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가득한 이 작품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일기와도 같다. 

주인공의 심리는 일관성 없이 수시로 바뀌고, 그 변화에 개연성이란 없다.


사람의 감정은 불안정하다. 인간이 사고활동을 시작했을 때 부터,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안정함은 즉 감정의 동요, 이것은 종교와 예술의 기반이 된다. 때문에, 시시각각 이유없이 변화하는 화자 야콥은 무척이나 인간적인 캐릭터지만, '소설의 화자' 로서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작품을 읽다보면 수많은 '왜?? ' '읭?!' 같은 감탄사가 끊이질 않는데, 이 작품은 수많은 '왜?' 를 던져주지만, 그 대답은 '그게 왜 궁금해?' 라는 답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읭?!' 하게 되는 것.


개인적으로 독서는 일종의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간접경험' 이라는 용어로 종종 표현되어 왔는데, 글자를 읽으며 펑펑 울고, 크게 웃는다면 이미 그것은 '간접' 보다는 더 직접적인, 체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내게 꽤나 신선한, 그리고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체험이었다. 

야콥이 학교 안에서 만나는 주변 인물들; 벤야멘타  원장과 부원장 남매와 몇분의 선생님들,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소수의 동료들, 그리고 예술가인 형 요한- 과 만나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 이야기에 대한 야콥의 심상들이 장황하게 나열된다. 

그리고, 그게 계속 반복된다. 

야콥이 주변인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은 -비록 통찰력은 느껴지지만- 통일성도, 일관성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소소한' 이야기들. 그러다 갑자기 벤야멘타양과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현실인지 몽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을 겪게 되고, 학교의 부원장인 벤탸멘타 양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학교가 사실상 폐쇄되고, 야콥은 벤야멘타 원장과 사막으로 떠나면서 소설이 끝나버린다.


 이렇게 한번 읽고 나서부터 이 책을 조금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소설은 당대를 주름잡던 모든 주류를 비트는 소설이다.

과거엔 지주였고, 현재엔 시의원을 지낸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야콥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가장 '미미한 존재' 가 되고자 하인학교에 들어갔다. 기본적으로 '하인' 의 일을 '배우는' 학교라는 장소부터가 지독한 역설이다. 유럽사회에서 학교는 크게 두 부류였다. 지금도 그런식으로 운영되는데, 한 갈래는 학문을 위한 기초를 닦는 방향이고, 다른 한 방향은 직업 기술을 익히는 방향이다. 애초에 학교라는 것이 국가의 공공정책으로 발전하기 전,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순종적으로 반복노동을 하는 직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장에 딸린 기숙식 고등학교가 많았던 이유다. 책의 첫 문장에 쓰인것처럼 학교에서 행하는 교육이란 자신의 계급과 신분에 맞는 역할을 주입시키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태생에 따라 가늠되는 전통적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명징하고, 거기에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분-부르주아와 프롤레타이아-까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과 신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부조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적응해서 어떻게든 살아냈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부조리를 깨닫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체념과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시기. 


 야콥이 원했던 '미미한 존재' 는 사실 그 사회의 가장 다수를 차지하며, 사회라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굴러가게 하는 기반이다. 하지만, 사회의 시스템의 보호에서 가장 먼 계층이기도 하다. 야콥은 어머니와 하녀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기화로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는다. 그 순간은 마치 번개처럼, 번득하는 순간이었다. 왕자였던 싯달타가 그 이후 가장 낮은 자들 사이에서 고행하며 구도자의 길을 걸어 열반에 올랐듯, 예수가 문둥병자와 교회 밖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듯, 야콥은 하인학교에 들어간다.

 

 사실 그 이후 야콥의 생활은 싯달타나 예수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아마 저자인 로베르트 발저는 자신의 페르소나인 야콥을 당대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 치환시켰던 듯 하다.

사회의 부조리를 알아챘으나, 깨달음이나 구원과는 거리가 먼 보통 사람. 

그럼에도 야콥은 그의 형인 요한에 비해 '행동하는' 사람이긴 했다. 요한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동생인 야콥에게는 제법 훌륭하게 들리는 조언을 건넨다. 예술과 대중, 부유함과 근검함, 자유와 자본주의에 대해. 요한의 말은 마치 중근세의 귀족층들이, 나아가 근현대 부르주아들이 서발턴(어제 배운 단어를 이렇게 써먹어본다)에게 강요했던 의식들과 일맥상통한다. 단지 그들을 '제어' 하고 '다스리기' 위한 공허한 가치들. 


 이 작품 전체를 당시의 시대와 사회에 저항했던, 일종의 '반감' 을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한 글이라고 이해하면 작품 전반에 느껴지는 유머러스함과 다소 히스테릭한 감정변화가 어느정도 이해된다. (특히, 로베르트 발저의 연보를 읽고 나니, 조금 더 이해되는 면이 있다.)

마치 매일매일의 일기 같은 형식의 짧은 내러티브들이 정신없이 나열된다. 

때로는 시간을 넘나들고, 몽상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기도 하기때문에,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원장, 부원장과 여러 친구들이 혹시 발터의 상상 속 인물은 아닐까? 아니면, 벤야멘타 하인학교가 아니라, 사실은 벤야멘타 정신병원은 아닐까? 벤야멘타 원장과 부원장 남매는 의사들, 여러 친구들은 발터와 함께 입원한 환자들은 아니었을까?


 매일매일의 감정과 일과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생을 이룬다. 

한 인간의 삶은 그가 태어난 혈통과 교육받은것들로부터 골격을 이룬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오직 그것만을 바탕으로 구별되고, 차별된다. 혈통은 선택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지만, 교육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아들이었던 발터는 과연 하인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이뤄낼 것인가?

아니, 아마도 발터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기 위해 하인학교에 갔을터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 위해 사막으로 떠났을터다.

삶은 그저, 매일매일이 모인 것에 불과하니까. 

그리 대단한 것도, 의미있는 것도 아니며, 그리 대단할 이유도, 의미있을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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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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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장르소설 작가들은 대단히 두터운 필모그래피를 자랑하곤 한다.

[십이국기] 로 유명한 오노 후유미는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시귀] 시리즈로 더 먼저 알려졌고, [모방범] 과 [화차] 의 미야베 미유키는 [브레이브 스토리] 라는 판타지 시리즈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미스테리 작가인 온다 리쿠 역시 [도코노 시리즈] 라는 현대 배경의 판타지 시리즈를 보유하고 있고, 여행 에세이는 물론, 나오키 상을 받은 [꿀벌과 천둥] 이라는 순문학까지 이름이 닿아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편지] 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같은 미스테리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도 꽤 있다. (워낙 다작이기도 하셔서)
이런 필모그래피를 보면 너무 쉽게, 한 작가의 작품 한두 편만 읽고 그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섣불리 단정해 온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나에게 '요네자와 호노부' 라는 이름은 출세작인 [빙과]로 인해 비교적 '소프트한 미스테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꽤 많은 작품들이 고등학생과 학교를 배경으로 삼는다 해도 집단 괴롭힘, 자살, 살인, 성폭력, 감금, 가정폭력, 존속살인, 원한 등 성인 범죄를 능가하는 잔혹한 테마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빙과' 의 학교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하드코어한 사건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었다. 

[야경] 에 실려있는 총 여섯편의 작품은 그런 나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뜨려 주었다.

이는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 먼저 읽고 단편집인 [도서관의 바다]를 읽었을 때의 경험과 비슷했다.

기 이야기꾼의 진정한 면모.

표제작인 '야경' 부터, '사인숙', '석류' , '만등', '문지기', '만원' 까지 비슷한 작품이 한편도 없다.

'야경' 은 제목 그대로 밤에 순찰을 도는 직업을 가진 사람, 즉 경찰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총기 소지가 불법인 국가에서 경찰의 총기 사용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어지간한 흉악범과 대치중이라도 총기를 사용한다면 대부분 과잉진압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조금 과한 감도 없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그런 경계심이 총기 사용에 대해 법보다 더 강력하게 총기 규제의 정서를 환기시킨다는 사실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화자인 '나' 는 파출소 소장이다. 경찰대를 졸업하면 바로 간부 계급인 경위로 부임하는데, 9급 경찰 공무원으로 응시해서 붙으면 경찰학교(경찰대와는 다름)에서 일련의 훈련과정을 겪은 뒤 순경으로 일선 현장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 와 가지이, 가와토는 모두 경찰 공무원, 순경으로 시작한 경찰들로 보인다. 특히, '나' 는 이십 년 경력의 베테랑으로 묘사되는데, 어떤 동기는 과장까지 된 걸 보면, 승진의 '테크트리' 에서는 꽤나 벗어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나' 는 신입인 가와토를 사실 '경찰에 맞지 않는' 유형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전에 그렇게 판단했던 부하 직원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경험 -승진의 테크트리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로 보인다- 이 있어서 이번엔 결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마음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신입 순경 가와토의 장례식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와토는 흉기를 든 '다자와' 라는 인물과 대치중에 총기를 사용했으나,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가와토가 쏜 총알은 다자와에게 정확히 명중했으나, 다자와도 죽음의 순간에 최후의 일격을 뻗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차근차근 과거로 되짚어간다. 가와토가 '나' 에게 배속되던 시기부터, 경찰서를 찾아온 민원인들을 상대하고, 경찰서 앞 공사장에서 어떤 일이 생기고, 총기를 수령하는 그 날 아침까지. 

지속적으로 '총기' 와 '총알' 을 강조하며 독자들을 이끈다. 아주 훌륭한 떡밥에, 아주 완벽한 수거!!! 

군더더기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과 적절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 내러티브가 풍성한 캐릭터까지 아주 좋았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리얼리티가 훌륭해서,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뒤의 작품들도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했다.

상대적으로 '사인숙' 이 가장 평범했고, '석류' 는 에로틱한 애착관계에 관한 소시오패스적 접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때 인터넷에 떠돌았던 '소시오패스 이야기' (아버지 장례식장에 찾아온 남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엄마를 살해한다는 딸의 이야기)의 다른 변주처럼 읽혔다. '만등' 은 해외 자원 개발 공사를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회사원의 끔찍한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잘못된 하나의 선택이 또 다른 극단적 선택으로 인도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와 상관없이 주인공의 운명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문지기' 는 자동차 추락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언덕에 관한 취재를 하는 프리랜서 기자의 이야기이고, 마지막, '만원' 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으로 유명해진 '감성 스릴러' 라는 하위 장르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겠다.

 

모든 작품들이 짜임새가 훌륭했고, 깔끔한 구성과 적재 적소에서 복선을 훌륭하게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허투루 버린 떡밥이 없는, 뿌린 떡밥은 반드시 회수하고야 마는 딱 떨어지는 완결성이 돋보였다. 모든 작품들을 그대로 연극 무대에 올리거나 영화로 만든다면 그대로 각색하면 될 정도로 공간의 이해와 적용, 그에 걸맞는 직업인에 대한 철저한 취재와 활용이 돋보였다.

단편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최소화된 공간에, 뚜렷한 캐릭터를 올려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이끄는 재주가 무척이나 능란하게 느껴졌다. 


각각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모든 직업들이 다 다르고, 전문직인 데다 묘사가 무척이나 훌륭하다.

'야경' 의 경찰, '사인숙' 의 온천장 직원, '만등' 의 자원 개발 회사의 해외 파견 사원, '문지기' 의 기자, '만원' 의 변호사까지, 직업의 전문성과 성격, 말투 등을 아주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취재력도 취재력이지만, 직업과 직종, 그 직종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특수성을 짚어내는 통찰력을 읽을 수 있었다.


'야경' 다음으로는 '만등' 이 너무 좋았다. 그 자리에서 두 번이나 다시 읽고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빙빙 맴돌았다.

'악의 평범성' 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악해지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관계 없이, '악' 을 평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만 제공된다면 누구나 끔찍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만등' 의 주인공 역시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만다. 

악은 반드시 처벌받고, 선은 반드시 상찬 받는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선, 반드시 그러기를 바란다.

적어도, '정의' 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모두가 이상주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만등' 의 주인공이 명백한 악이고, 기발한 방법으로 심판을 코앞에 두었다면, '문지기' 는 악도 모호하고, 정의의 실현도 모호하다.

나는 삶에 대해 운명론적 시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우연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적당한 운명; 필연과 적당한 우연. 그런 것들이 랜덤하게 얽혀가는 게 삶이라고 생각한다.

'행운' 과 '불운'. '필연' 과 '우연'. 그리고, 삶과 운명. 

두 작품의 화자들은 모두 안타까울 정도의 운명을 맞이한다.  

'만등' 과 '문지기' 는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가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 사회성, 그리고 운명에 관한 상반된 시각을 보여준다.

이 두 편 만으로 선과 악도, 정의와 불의도 나눌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의 삶에 대해 한번쯤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 나눔의 기준이 명백히 '상대적'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행위도 어떤 경우엔 선, 정의이고, 또 다른 어떤 경우엔 악, 불의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토록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겠지... 


다시 말하지만, 모든 작품이 참 좋았다.

어떤 작품에서는 목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번득이는 스릴을 선보이기도 했고,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는 추리소설만의 장르적 쾌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전적인 방식의 수수께끼 풀이, '오싹한 귀신 이야기' 풍의 기담 소개, 시간대를 쪼개 자유롭게 배치하는 현대적인 글쓰기와 캐릭터의 매력이 드러나는 감성적인 접근까지.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가 얼마나 다재다능한 이야기꾼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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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물고기 묘보설림 4
왕웨이롄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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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이벤트를 통해 만나보았다.


4편의 단편과, 한편의 중단편, 총 5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작품집이다.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책물고기' 

'아버지의 복수'

'걸림돌'

그리고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가장 첫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부터, 시각적 자극이 대단했다. 

거대한 소금사막에서 소금을 채취하는 인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항상 함께 술을 마시던 '자오' 형이 소금 사막 가운데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 있는 소금호수에서 익사한 뒤, '나'는 술을 거의 끊은 상태로 시작한다. 

온통 새하얀 소금의 대지와 붉은 노을, 옛 친구인 샤오딩의 그림과 샤오딩의 아내 진징까지, 작품에 묘사된 모든 것들이 시각적인 환상을 불러 일으켰다. 

자오형의 죽음과 '나' 와 고등학교 친구인 샤오딩의 과거가 거대한 소금 산지와 어우러지며 작품 후반까지 대단히 미묘한 위화감을 만들어낸다.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해 형식을 간략화 했지만, 마치 장편 한편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기승전결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었다. 

단편소설은 대체적로 간결한 편인데, 이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복잡한 느낌을 줬다.

혹시, 이게 뜻글자인 한자를 번역하는 과정에 생기는 미묘한 시너지일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책물고기' 는 작품 안에서 언급되듯 카프카의 '변신' 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중국은 신과 요괴의 고향이다. 온갖 상상도 못할 기기괴괴한 생명체들이 이야기가 수천년에 걸쳐 쌓여왔다. 그런 맥락에서 '책물고기' 는 가장 중국 다운 소설이었다.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아이디어가 전형적인 사건 해결의 플롯 안에서 펼쳐진다. 소재 자체는 재미있었으나, 첫 작품에 비해 아주 특별한 느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복수' 와 '걸림돌' 은 작가의 개인적인 일화를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장감이 느껴졌다. 

이 두 작품은 나란히 개제된 것이 편집자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비슷하면서 다르다. 두 작품 모두 정서가 아주 비슷해서 마치 한 작품의 서로 다른 목차처럼 느껴질 정도다. 

'아버지의 복수' 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북방의 고향을 떠나 남방 지역의 광저우에 정착한 인물이다.

중국은 정말 너무나 거대한 땅덩이를 갖고 있어서, 북방 민족과 남방 민족의 차이가 뚜렷하다. 이는 중국의 기나긴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흔히 중국의 북방민족은 고지식하고 우직한 성품을, 남방민족은 영리하고 유연한 성품을 지녔다는 편견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복수' 는 중국의 인종적 편견을 화두로 한 풍자극임을 알 수 있다. 

북방의 고향을 떠나 남방의 광저우에 정착해 세일즈나 택시운전 같은 전형적인 '남방인에 어울리는' 일을 하며 살아온 아버지. 아버지는 북방인이의 특징을 지우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지만, 결국엔 고집세고 아둔하다는 북방인의 편견과 딱 맞는 행동을 보이고 만다. 

'걸림돌' 은 화자가 기차 안에서 만난 '파란눈의 중국인' 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엄혹한 '유태인 사냥' 을 피해 중국으로 피난한 유럽인들이 아주 많았다. 할머니의 부모님도 그런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중국 대사관의 도움으로 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는 무사히 국경을 넘어 상해까지 도착했지만, 할머니의 아빠는 나치에 의해 중국 대사관이 몰수되면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고 말았다. 

어린시절 중국으로 넘어왔던 할머니는 중국에서 자라 교사로 정년까지 일하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중이었다. 할머니가 75년만에 고향으로 향하는 이유는 조부모님이 살던 집 앞에 '걸림돌' 을 놓기 위해서였다.

(각주를 통해 걸림돌에 대한 정보가 책에 적혀있긴 했지만, 마침 이 책을 읽던 중에, '알쓸신잡'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걸림돌' 에 대한 에피소드가 방영되어서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도중 나치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았던 집 앞에 황동으로 된 블럭을 끼워넣는 운동이 전 유럽에 걸쳐 진행됐다. 일반 보도블럭보다 아주 살짝, 1mm정도 튀어나오게 넣어서,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발밑에 툭 하고 걸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가던 사람이 바닥을 내려다보면, 손바닥만한 돌 위에 사람의 이름과 생몰년, 간략한 메시지가 적혀있는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과 과거에 살았던, 나치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당했던, 사람의 이름. 유태인 뿐 아니라, 성소수자, 장애인, 나치에 저항한 시민들 모두가 그렇게 황동판에 이름을 달고 자신이 살았던 집 앞에 걸림돌로 박혀있다.   

이 운동은 독일의 예술가에서부터 시작됐고, 독일의 주 정부와 지방정부, 유럽 전역의 정부들과 폭넓은 공조를 이끌어냈다. 

일본인들이 소녀상으로 시비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할머니는 걸림돌을 놓고, 이스라엘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화자의 조부모님도 중국에서 홍콩을 향해 목숨을 건 도피를 했던 분들이었다.

할머니와 화자는 그런 부분들을 공유하며 짧고도 긴 길동무가 된다.

'걸림돌' 은 한편으론 지나치게 '올바른' 작품이라 조금 오글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아버지의 복수' 와 대칭점에 놓고 읽으면,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흥미로운 지점들을 읽을 수 있다.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은 분량으로 구분하면 단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워 보인다.

다른 세편을 더한 것과 비슷한 분량이다. 

이 작품은 읽는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연수, 김경욱 작가 같은 이름들이 떠올랐다. 

나에게 이 작가들은 현 세대 아시아 남성들의 연애감성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작가들이다. 

미화도 과장도 없이, 가장 적확한. 

한국, 중국, 일본은 모두 과도기를 겪고 있다.

중국은 그 광대한 영토 때문에 모든 변화가 느리고, 일본은 빠른 개항과 침략전쟁으로 인해 누구보다 먼저 변화를 모색했다. 

한국은 일제의 침략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변화했다.

모든 변화에는 반작용이 따른다. 모든 국가, 모든 민족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변화의 대가를 치른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연애' 와 '결혼' 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 전체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은 10년씩 쪼개도 모자랄 정도로 급격하게 변해왔다.

연애관, 결혼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부터 연인들이 가는 장소, 결혼을 치르는 공간, 결혼식의 행태, 연애의 행태. 윤리관, 이성관, 성과 욕망, 쾌락을 대하는 태도, 구애의 방식, 구애의 언어, 싸움의 방식, 싸움의 언어, 절차, 연인간에 일어나는 범죄의 종류, 법.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은 작품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3인칭으로 쓰여있다. 

단순히 1인칭을 3인칭으로 바꾼 정도의 주인공 시점이지만,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듯 건조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내밀하게 남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회한과 기대를 오간다. 

평이한 이야기를 절묘하게 나누어 배치해서 읽는 맛이 쏠쏠했다. 그래. 이건 홍콩 중국 로맨스 영화의 느낌이다. 첨밀밀이나 중경삼림 같은. 

오랜만에 아련한 마음을 잠시 맛봤다. 연인들의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매력이고 나발이고, 너무 길면 지겹다. 중편 정도가 딱 적당.


마지막 작가의 말도 인상에 남았다. 

'신비한 이야기가 사라졌다'.

이야기가 없는 시대. 이야기꾼들은 무엇은 이야기해야 하는가.  

모든 작가들의 영원한 숙제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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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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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은 미스테리다' 는 말은 바꿔말하면, 세상 모든 것이 서스펜스라는 의미기도 하다.

사실 너무 당연한 명제이기도 한데, 인간의 마음은 아주 연약해서 한없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불안함' 은 곧 서스펜스와 연결된다. 

예를들어, 아침에 분명히 챙겨나왔던 지갑이 점심시간 이후에 사라지고 말았다. 

한달치 용돈과 교통카드와 체크카드,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심지어 도장 한번 찍으면 런치세트가 무료인 단골 레스토랑의 적립식 카드까지 들어있는데!!!  

'내 지갑이 어디갔을까?' 

지갑의 행방에 관한 미스테리는 자신의 일상과 연관되기에 곧바로 서스펜스와 연결된다.


이처럼, 특정 이야기 안에서 서스펜스를 일으키는 방법은 결코 어렵지 않다.

독자에게 위화감을 줄 수만 있으면 된다. 

결국 어떤 방법을 통해, 어느 정도의 강도로,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길이로 유지시킬 수 있는지가 관건일터.

수없는 경험을 통해, 지갑이 언제나 큰 손해 없이 내 손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지갑을 분실하는 일 정도는 서스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특정 자극에 쉬이 무뎌지기도 한다.

서스펜스를 일으키는 기술은 쉽고 적확한 반면, 트릭은 한정적이고, 응용 방법도 제한적이기에 명확한 패턴이 만들어진다. 
패턴이 반복되면 독자들에게 꾸준히 흥미를 줄 수 없기에, 자칫하다가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방향으로 빠질수도 있고, 소위 '반전' 이라 불리는 전복의 플롯과 같은 특정 패턴에 매몰될 수도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동시대의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녹여내는 방법이 주로 활용되고 있다. 빈부격차, 이념, 난민, 종교, 성별, 인종갈등, 정치적, 경제적 이슈 등등을 활용해 '사회파' 라는 접두어를 탄생시켰고, SF, 판타지, 무협등 다른 서브 장르들과 조합되기도 한다.   


[빙과]는 오히려 그런 새로운 방식보다는 '정공법' 이랄 수 있는 고전 추리물의 방식을 따른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오레키 호타로는 만사를 귀찮아하는 성격이다.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 인간이다. 오랜 친구인 후쿠베 사토시는 그를 '회색' 이라고 말하며 '에너지 절약 주의자' 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사토시는 호타로의 정 반대 인간이다. 밝고 명랑한 에너지가 넘치는 부류. 가끔 여자로 오해받을 만큼 호리호리한 외모에 걸맞는 섬세한 취미를 갖고 있고, 수예부이기도 하다.

에너지 절약주의자 답게 고등학교에서도 어떠한 부활동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같은 학교를 졸업한 누나가 외국 여행 중 편지로 권한 '고전부' 에 가입한 호타로는 고전부의 부장격인 '지탄다 에루' 라는 동급생을 통해 고전부의 과거로 향하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 와중에 사토시가 고전부에 양다리를 걸치고, 초등학교때부터 친구였던 도서부원 이바라 마야카 역시 고전부에 이중 가입하면서 고전부의 33년 역사가 시작된 태초의 사건을 향한 미스테리의 여정에 뛰어든다.    

 

그 시작은 고전부의 전통인 '문집' 이었다.

그리고 33년전 고전부의 일원이었던 지탄다의 삼촌 세키타니 준과 관련된 어떠한 '사건'.

그 사건과 지탄다의 '신경쓰이는 일' - 고전부에 대해 삼촌에게 물어보고, 어떠한 대답을 들었는데, 자신은 울어버리고 말았던 - 과의 연관성을 깨닫고 지탄다와 호타로, 사토시와 이바라까지 고전부의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결과를 제시하고, 과정을 찾아나가는 방식.

답을 보여주고, 논리적인 추론으로 증명해가는 방식이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미스테리의 플롯이다.



이런 단순한 플롯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단연 '인물' 이다.
사건을 일으키는 인물,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 그 주변의 인물들.
미스테리와 서스펜스, 트릭은 익숙해지면 흥미가 반감된다.
하지만 잘 구축된 '캐릭터' 는 반복되는 패턴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매력을 쌓아갈 수 있다.
 
홈즈, 포와로, 마플, 콜롬보, 갈릴레오, 해리 보슈, 리스베트, 코난, 김전일 등...
형形만 놓고 보면 비슷한데, 인물들이 너무나도 다르다.
결국 미스테리의 본질 역시 '사람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말미에 놓여있는 '해설' 에도 친절하게 잘 나와있지만, [빙과] 는 셜록 홈즈 등 고전 추리 소설의 장점들을 고스란히 이식한 작품이다.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는 거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호타로가 얼마나 홈즈같은지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는 의미다.

마지막 '빙과' 의 트릭을 밝히는 장면이야말로 캐릭터성의 백미다.
회색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사실은 가장 공감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호타로의 추론은 논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감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범인이 감정적으로 폭발하며 일체의 범행을 자백하는 클리셰도 넘쳐나지만, '빙과' 의 클라이맥스는 정말이지, 인간적이면서 신선했다.

모든 미스테리는 사람의 마음.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아니, 그 반대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
사람의 마음이 미스테리의 근원이니, 세상 모든 일은 미스테리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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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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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기에 쟁취한 노벨 물리학상의 성과로 얻은 부와 명예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는 마이클 비어드는 다섯번째 결혼의 파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외모는 그다지 매력적인 편이 아니었지만, 다소 특정한 취향 -모성애를 자극하는 이성에게 끌리는- 의 미인들에게 불가해한 매력을 풍기는 남자였다. 비어드의 다섯번째 결혼 상태인 퍼트리스는 '더이상' 그에게 그런 매력을 느끼지는 못하는 듯 했다. '타킨' 이라는 젊은 배관 수리공과 바람피는 중이었으며 비어드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비어드는 사실 그런 상황에 개의치 않는 남자였다. 그 역시 여러번의 결혼생활 동안 많은 외도를 했었고, 그의 부인들이 그 사실을 알아챌 무렵은 서로에 대한 열정의 거의 사라진 뒤였기에, 자연스럽게 법적으로 헤어지는 절차를 밟으면 됐다. 

하지만, 퍼트리스에게만큼은 조금 달랐다.

비어드는 아직 그녀를 사랑했다. 물론 이 다섯번째 결혼을 파국으로 치닫게 한 근본 원인도 비어드의 외도였지만, 퍼트리스의 '맞'외도를 알고도 비어드는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길 원했으나, 비어드의 심신은 피폐해져 있었고, 가뜩이나 볼품없던 외모는 세월의 직격탄과 폭음과 폭식, 운동부족으로 더욱 볼품없어진 터였다. 

 파탄난 결혼생활과는 별개로 마이클 비어드는 노벨상 수상자의 명성으로 대학 명예 교수직은 물론 왕립 과학자협회 등에서 변함없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마침 새로 신설된 기후 변화 문제를 대비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하는 기초과학 센터에 '간판' 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때는 2000년. 기후 변화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던 시기였는데, 비어드는 사실 기후변화의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센터의 활동도 그다지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별 상관 없었다. 그의 역할은 '간판' 으로서 센터가 주도하는 세미나에 얼굴을 비추거나 공공 사업 기금을 타내는 데에 집중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센터 소속의 젊은 과학자들 중 한명인 '톰 올더스' 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광자, 즉 태양 에너지의 가능성에 대해 깊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었고, 비효율적인 가정용 풍력 발전기 따위나 만들고 있는 센터의 활동에 실망하고 있는 참이었다. 톰 올더스는 센터장 그레이비보다 더 큰 사회적 위치와 힘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 비어드를 설득시키려 했지만, 비어드는 그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다섯번째 부인 퍼트리스와 그의 애인인 타킨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에너지야, 뭐 원자력 발전소를 더 지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온실효과는 주기적인 종말론처럼 부풀려진 괴담 정도로 생각하는 부류였으니까.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마이클 비어드는 마침내 톰 올더스의 모든 아이디어들을 훔치게 된다.    



[솔라]는 2000, 2005, 2009  시간을 훌쩍훌쩍 뛰어넘는 세 챕터를 통해 마이클 비어드라는 명망 높은 엘리트의 삶을 관조한다.

내게 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속죄]와 [넛셸] 이후 겨우 세번째이다. [넛셸]과 [솔라]를 통해서는 저자의 냉소주의와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의식을 읽을 수 있었다. ([넛셸]은 특히 '과학 엘리트'라는 특정 계층에 대한 냉소와 조소를 느낄 수 있었다.)

우연히도 내가 읽었던 [속죄], [넛셸], [솔라] 의 세작품은 모두 '거짓말' 이 서사의 핵심 키워드로 등장한다.

[속죄] 는 중심 화자가 독자들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화자가 독자들에게 풀어내는 이야기 전체가 거짓말이었기에, 클라이맥스에서 드러나는 진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솔라] 는 독자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거짓말을 하는 화자를 보여줌으로써 시한폭탄 하나를 휙 던져준다. 전자가 '독자를 속이는 것' 으로 흥미를 유발했다면, 후자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는 서스펜스를 부여한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엔 시한폭탄이 반드시 터지고야 말 것이며, 막대한 피해를 불러오리라는 것을.

하지만, 이번에도 이언 매큐언은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약올리기를 시전한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서사를 끝내버리는 것이다. 

시한폭탄에 달려있는 시계가 00.01 카운트가 되자 이야기를 확 끝내버린다.

나는 이 책을 헬스장 싸이클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당황해하며 페달을 멈추고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한편으론 '참 이언 매큐언 답다' 라며 만족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소재와 주제의 불편함과 난해함을 차치하고, 정말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마이클 비어드라는 한 남자가 거짓말을 이용해 어떻게 떠오르고, 결국 어떻게 추락하는지, 잘 짜여진 한편의 우화, 신화 같았다.

과학자의 입을 통해, 과학이라는 분야를 다루고 있지만, 과학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했어도 이야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뭐, 제자나 친구의 글을 훔쳐서 대박나는 이야기는 쌔고 쌨으니까.

한마디로, 소재와 주제가 아니었으면 그다지 신선한 서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수년을 훌쩍훌쩍 뛰어넘는 형식, 가장 핵심적인 갈등들을 회상으로 보여주는 대담함에서 노련한 이야깃꾼의 스토리 텔링 기술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중간중간 마이클 비어드가 맞닥뜨리는 논쟁들을 통해 이 노작가가 시대와 빚었던 갈등들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했다.

 초반, '북위 80도 세미나'에서 메러디스라는 소설가와 나눈, 마치 이과와 문과의 대결과도 같은 격렬한 논쟁은 '대중과학'에 관한 내용 같았고, 광자 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받기 위해 사보이 호텔에서 한 긴 연설은 에너지 산업의 미래를 둘러싼 논쟁들처럼 보였다. 그 직후 도시학-민속학자인 멜런과의 '이야기의 원형' 에 관한 대화는 마치 표절론, 창작론에 관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이 짧은 에피소드는 비어드가 갖고 있는 '거짓말' 의 핵심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해서, 이 이야기에 관한 저자의 본심을 일부 읽을 수도 있었다.
 

 비어드가 첫번째 이혼에 이르는 과정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작품 속 시간으로는 60년대 중후반~ 70년대 초반으로 읽히는데, 여성들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부장제에 대해 눈을 뜨고 일련의 행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초기 페미니스트 운동의 정신과 형식을 관찰할 수 있는데, 수십년 뒤에 비어드의 첫번째 추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비어드는 페미니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내가 변화하는 과정 자체에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수식을 발전시키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비어드는 변화에 1도 적응하지 못했고, 애초에 적응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추락 안에서 벌어지는 언론과의 갈등, 대중들과의 갈등, 자국의 과학계와의 갈등도 대단히 격렬하고, 그만큼 흥미로웠다.        

그 밖에 수많은 정크푸드들과 술, 담배. 나이를 먹어가며 겪게되는 수많은 '유해한 것들' 과의 사투.

결국은 악성 반점(ㅋㅋ)과의 사투에, 톰 올더스의 연구를 훔칠 수 있게 만들었던 타핀과의 갈등까지.

게다가, 수많은 결혼들, 그를 통해 만난 여자들. 그녀들과 겪는 갈등, 그리고 딸과의 갈등. 

최후의 최후까지 타이머가 째깍째깍 움직인, 거짓말의 폭탄까지.



우리의 삶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것 만큼 우리의 사회도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한 발만 삐끗하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천상으로 날아오르기도 한다.

시대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한 사람의 삶은 지극히 작고 초라하며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그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누군가가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크게 변화한다. 

이 작품에서 양자역학을 주된 테마로 삼았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 지점이다.

내가 양자역학에 대해 아는건, 관찰하기 위해 빛을 쪼이는 것만으로도 성질이 변하는 소립자의 세계;  빛의 입자에 의해 영향을 받아 우리가 '상식' 이라 생각했던 물리학의 법칙이 통하지 않지만, 존재하기는 하는 그 세계, 라는 것 정도이다.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미시의 세계. 이론과 상상으로만 만나볼 수 없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세계. 

마치 '신' 과도 같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종교와 과학, 미신이 모두 합치되는 세계.  

어떤 입자를 관찰하기 위해 빛을 보낸 순간 그 입자는 빛의 영향을 받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반응한다. 

빛이 반사되어 인간에게 '관찰' 된 순간, 그 입자는 이미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특별한 성질을 지니게 된다.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아무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관찰한 결과는 이미 과거의 것.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하다. 

나와 아무 관계가 없었던 너. 하지만, 내가 너를 보고, 네가 나를 보는 순간, 우리의 삶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우리 서로가 단 한번도 상상한 적 없는 세계로 빠져든다. 마이클 비어드의 삶이 과학자들에게 관찰된 순간, 그의 삶은 크게 변화했고, 그가 다시 대중과 언론에게 관찰된 순간 또 크게 변화했다. 그의 삶은 이미 한참 달라졌지만, 대중과 언론은 그 왜곡된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만다. 


마이클 비어드는 마치 관찰하기 위해 빛을 쪼인 소립자와도 같아보인다. 

신의 지문과도 같은 과학 원리를 이용해 인류 역사에 남을만한 성과를 이뤄냈지만, 그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인 '거짓' 을 이용해 태양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만들었다. 그래, 어쩌면 그가 발견한 새로운 융합 이론은 신이 그를 관찰하기 위해 비쳤던 신의 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 과대해석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불확정원리 속에서 살아간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사실 분단위, 아니 시단위로 쪼개봐도 우리의 오늘은 어제와 완전히 다르다. 

한 사람의 삶은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마이클 비어드의 삶은 누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 

과연 우리 각자의 삶이, 이 세상에, 이 역사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지구는 퍼트리스와 마이클 비어드가 없어도 그만이다. 지구가 다른 인간까지 모두 떨궈낸다고 해도 생물권은 계속 존재할 것이며 천만 년만 지나면 낯설고 새로운 생명체로 들끓을 테고, 영장류처럼 영리한 생명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나 바흐, 아인슈타인, 비어드-아인슈타인 융합을 아무도 기억 못한다고 누가 안타까워하겠는가?"

p. 127


    

아니, 그렇다면 나는 반문한다.

꼭 어떤 가치가 있어야 하나?

꼭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하나? 

이는 모든 창작물에 대한 작가들의 질문이기도 하다.

꼭 모든 작품에 의미나 가치가 있어야하나?

어쩌면 세상에 그 어떤 것에도 의미도, 가치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은 오롯히 상대적인 것이니까.

거기 그저 그렇게 있지만, 누군가의 관찰을 통해, 필요에 의해 의미를 얻고 가치를 얻는다.

석유처럼, 바람처럼, 태양처럼.

그리고, 거짓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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