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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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있음. 





 옛날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바로 그 작품을 드디어 만나봤다. 

무려....1965년작이다.

처음 접하면 그 볼륨감에 압도될 수도 있지만, 비견되는 [반지의 제왕]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두꺼운 정도이고, [왕좌의 게임] 이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에 비하면 가벼운 분량이다. 


내용과 감상에 들어가기 전에, 이 소설의 장르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SF장르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하위 장르들을 가지고 있는데, 일단은 크게 "하드SF" 와 "소프트SF" 로 나뉜다.

"하드SF" 는 이름처럼 제법 엄격한 공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기술들을 묘사하는데 치중한다. 어떤 우주선이 등장한다고 했을때, 그 디자인이나 연료, 대기권을 돌파하는 모습 등등이 실제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 묘사된다. 사회의 모습이나 환경, 등장인물들의 직업도 모두 과학적, 공학적 정합성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허술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 카테고리에 작품을 둔 작가들 중엔 실제 공학박사나 석사 학위가 있는 경우가 많다. 

먼 예로는 클래식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부터 가까이는 [마션]의 엔디 위어 등을 들 수 있다. 

"소프트SF" 는 공학적으로 정교한 기술보다 인류,사회학적-혹은, 문학적 완성도에 치중한 작품들을 포함시키는데, 하드SF 만 엄격하게 나누고, 그 나머지 전체를 소프트SF 라고 통칭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지 오웰의 [1984] 나 브래드 버리의 [화성연대기], 어슐러 르 귄의 [헤인 연대기] 등이 이에 속한다.


즉,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하위 장르는 '소프트 SF'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체역사, 시간여행, 돌연변이, 외계인, 초능력, 포스트 아포칼립스, 우주여행, 우주전쟁 등등 수많은 소재들로 카테고리가 나뉜다. 

그 중 "우주" 를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스페이스 오페라" 쪽에 포함된다.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내용에 따라 "스페이스 어드밴처" 물과 "스페이스 로망스" 물로 나뉘는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문학이 아닌 영화와 드라마를 예로 든다면, 전자는 [스타트렉] 후자는 [스타워즈] 를 상상하면 된다.

스페이스 어드밴처는 단어 그대로 주 내용이 우주 곳곳을 여행하며 갖가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생산해내고, 많은 드라마가 "우주선 내부" 에서 벌어진다. 

반면, 스페이스 로망스는 특정한 환경을 가진 행성 안에서 고전적인 서사를 풀어낸다.

우주선과 외계행성을 빼면, 판타지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서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스페이스 어드밴처와 로망스는 다소 비하의 뉘앙스로 사용되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라는 용어를 대체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하드SF 가 엄격한 과학적 근거에 매달리는 사이, 문학적-또는 대중적- 완성도에 집중하며 빠르게 장르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특히, 어슐러 르 귄 같은 작가가 그려내는 외계 행성 문명에 대한 묘사는 인류, 사회학적 정합도가 무척 뛰어나고, 앤 레키의 '라드츠 제국 시리즈' 에 등장하는 AI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은 하드SF와의 경계마저도 모호하게 만들었다. 래리 니븐의 [링 월드] 시리즈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참전해 "이 작품이 하드SF인지에 관해" 아직까지도 치열하게 논쟁 중이기도 하다. 실제 공학자들이 작품 속 등장하는 구조물들을 정교한 물리 엔진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을 정도. (역시 덕 중 덕은 양덕....ㄷㄷㄷ) 



 [듄] 은 이러한 스페이스 로망스의 특징들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러개의 항성으로 이루어진 항성계 제국 "페디샤".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파이스" 라는 자원으로, 섭취하면 노화를 멈추게 해주는 특별한 광물이다.

페디샤 세계는 전제 군주제의 형태로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최고자대표회의" 라는, 마치 프랑스 혁명기의 3부 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귀족, 군주, 기업의 연합체에 묶여있었다. 심지어 제 아무리 황제라도 함선을 이용한 우주 여행도 "우주조합" 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서로를 견제하는 권력 구조는 오직 스파이스를 둘러싼 치열한 이권다툼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스파이스의 유통 구조야말로 페디샤 우주를 지탱하는 권력의 원천이었다.  

가장 순도가 높은 스파이스 중의 스파이스, "멜란지"가 매장되어있는 사막의 행성 "아라키스".

페디샤의 81대 황제 샤담 4세가 블라디미르 하코넨 가문이 맡고 있던 아라키스 행성을 레토 아트레이데스 공작에게 맡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는 레토 공작에게는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코넨과 아트레이데스는 대를 이은 원수 중의 원수였기 때문. 

제아무리 황제의 명령이라지만, 블라디미르가 레토에게 자신의 노른자위 영지를 순순히 내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고지식한 레토 공작은 기꺼이 그 함정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레토 공작의 아들, 폴.

훗날 무앗딥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어린 소년이 아라키스의 척박한 모래 위에 발을 내딛는다.



 서사 구조 자체는 무척 전형적인 영웅서사이다. 

어린 소년이 부모를 잃고, 여러 고난을 거치며 성장하여,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

심지어, 아라키스라는 "행성" 과 작품의 스펙타클을 책임질 우주 강습만 없으면,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과학" 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토대를 구성하고 있는 설정들이 매우 디테일하고, 무척 설득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고난과 성장과정이 외면보다 내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와 함께 아라키스 행성의 원 거주민인 "프레멘" , 페디샤 우주의 여성 종교집단 "베네 게세리트", 냉철한 판단력과 높은 전투력을 지닌 용병집단 "멘타트", 그리고 베네 게세리트의 궁극적 지향점인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 "퀴사츠 헤더락" 등 다양한 설정들역시 잘 맞아 떨어지며 작가가 창조해낸 하나의 세계에 깊은 설득력을 안겨준다.

스파이스라는 자원과 이를 둘러싼 이권 다툼, 권력을 둘러싼 치밀한 음모도 재미있지만, 스파이스의 최대 매장지이자 우주 최강의 괴물이라 해도 무방할 '모래벌레'가 서식하는 아라키스 행성의 생태계는 물론 각각의 문화나 환경들이 무척이나 짜임새가 있다. 이러한 환경 생태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1960년대 당시에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고 하던데, 지금 봐도 놀랍고 매혹적일 정도로 정교하다.

 프레멘은 척박한 사막행성에 사는 종족으로, 이들의 물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몸에서 발생되는 모든 수분을 모아 음용하는 기술이 발달했고, 종족의 문화적 색채 또한 물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 대다수다. 속담이나 용어, 삶의 방식들 -예를들어, 누군가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 '남을 위해 자신의 물을 내줬다' 며 감격스러워 한다거나,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액체를 회수해서 공동체가 나눈다는 등의-이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금새 프레멘들의 삶의 방식에 빠져들게 된다.

이는 폴이 무앗딥이라는 이름으로 이 종족에 녹아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려지는데, 그 덕에 아주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것은 폴의 내면적 성장이다. 아라키스의 생태에 대한 묘사가 무척이나 구체적인 반면, 폴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무척 형이상학적이다.

숨쉴 틈 없이 도입부가 지나간 뒤 펼쳐지는 폴의 각성은 매우 급진적이고, 폭발적이다. 몇 페이지 전까지는, 잠재력은 있고, 영민하지만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폴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이 곳과 우주 너머를 동시에 보는 능력을 통해 거만하고 오만한 청년으로 훌쩍 뛰어오른다. 워낙에 고위 귀족 자제라 되바라진 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오만하거나 교만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성장의 나머지 내용들은 그가 거만함과 오만함을 버리고,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나는 과정들이다.

 그리고, 그런 폴을 바라보는 어머니 제시카의 변화도 무척이나 흥미로울 뿐 아니라, 폴과 사랑을 나누는 차니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듯, 설정과 세계관 뿐 아니라, 폴과 제시카를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도 매우 매력적이다. 

물론, 이들 역시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이지만, 그 전형성에도 개연성이 충분하다.

레토 아트레이데스 공작 뿐 아니라, 그 휘하의 가신들, 거니 할렉과 던컨 아이다호도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유에 박사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특히 강력한 최종빌런, 블라디미르 하코넨 남작의 무게감도 빼놓을 수 없고, 2권에서 활약할 것으로 보이는, 사막에서 태어나는 여동생 엘리아 아트레이데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걸 깨달은 애어른이라, 정말정말 흥미로웠다. 과연 폴 무앗딥의 조력자가 될 것인지, 억제기가 될 것인지, 너무너무 궁금하다.

모든 인물들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군더더기가 없이 빠르고 효과적인 전개가 이 두꺼운 책을 얇게 만들어버린다.

왜 이 시리즈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는지, 수많은 매니아들이 '아직도' 생겨나고 있는지 납득이 갔다.


 폴은 어느순간,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야를 얻게 된다.

이는 너무나 완벽한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 더 중요해지는 경지다.

자신의 움직임이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고, 그 모든 경우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폴 무앗딥에 궁극적으로 바라본 광경은 페디샤 전체가 전쟁의 광기에 빠져들어 온통 불타는 우주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중심에는 자신의 이름, '무앗딥' 을 외치는 광신도들이 있었다.

그 광경이 보인 뒤로부터 폴은 자신이 그 어떤 경우의 수를 예측해도 그 미래를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자신에게 그토록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그 미래는 전혀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폴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놀라운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

아직 수천페이지의 "아트레이데스 사가"가 저 앞에 펼쳐져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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