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관 1~3 세트 - 전3권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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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역사 소설을 꽤나 좋아하는 30대 남자로써 '로마' 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스의 뒤를 이어 유럽 문화의 뿌리가 된 로마 문명.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집정관과 호민관, 원로원이 어우러진 초기 공화정과 제국으로의 변모, 그리고 거대한 대제국. 다신교 문화에서 피어난 유일신교의 씨앗. 그리고 극적인 역전 등, 수박 겉핥기만으로도 충분히 달달한 이야기들이 죽죽 흘러 내린다. 나처럼 어설프게 아는 독자들도 '시저'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영어로는 줄리우스 시저, 원래 발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리고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리고 '부르투스 너도냐!' 까지. 실제로는 했네, 안 했네, 원래는 이런 말이었네, 저런 말이었네 말도 많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일 것이다. 키케르와 클레오파트라까지 덤으로. 


[로마의 일인자] 는 바로 그 '시저' 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이름의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노회한 정치가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눈에 무관 출신의 노숙한 정치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들어온다.


이 두 이름을 보는 순간 이미 가슴이 쿵쾅쿵쾅.

로마 공화정 말기의 이른바 '100년 내전 은 로마사에 아주 약간의 관심만 있는 사람이라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동맹시들의 이탈과 반란, 로마 내부의 정쟁, 평민들의 불만과 궐기, 그리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대표되는 평민파와 술라로 대표되는 귀족파의 본격적인 충돌.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출현과 삼두정치, 그리고 루비콘강에서의 회군.

역시, 바로 그 시기의 이야기로구나!!!!   


어느 왕국이나 멸망 직전이 가장 화려한 법이다.

우리역사만 봐도 삼국시대가 삼국 모두가 그랬고, 통일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다. 특히 고려말~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교체기는 로마의 공화정말기~제정초기와 상당히 닮아있다. 조금 나가 중국 역사만 봐도 수많은 나라들이 멸망 직전에 가장 빛난다. 복잡복잡한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아주 작은 불씨 하나로 어마어마하게 타오른다. 


1권 초반에서부터 이야기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작품 속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미 40세를 훌쩍 넘은데다가 로마의 귀족 혈통도 아니라 집정관이 될 수 없는 처지로 등장한다.

'어라, 이럴리가? 아니, 이럴수가?' 게다가 작품의 1/3쯤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술라는 애인에게 얹혀사는 기둥서방과 다름없는 건달처럼 보인다. 게다가 양성애자!! 로마 공화정 말기,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처지였다니!! 

멀리서 봤던 숲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겉핥기만 했던 수박을 쪼개보니, 진짜가 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각 챕터가 당 해 연도로 되어 있다. 기원전 110년. 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본격적으로 붙기까지는 아직 수십년 더 지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시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나려면 아직 10년은 더 있어야 한다. 

서두를 장식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시저의 할아버지인 것이다.


1부 [로마의 일인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정치적 기반을 다져가는 과정이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상황 묘사로 정말 재미있게 펼쳐진다. 당시 로마의 정치상황에 대한 설명도 간결하기 이를 데 없고,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인물들의 선택에 대한 이해가 충분할 정도로 주어진다. 특히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되던 당시 로마정을 가감없이 묘사하고 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혈통과 돈이 필요하고, 권력을 얻으면 혈통과 돈을 그러모아야 한다. 정치의 이유는 오롯하게 자신의 욕망이며 정치 활동 자체도 피호민을 모아 세를 넓히기 위해서일 뿐이다. 권력의 분립과 견제, 그리고 균형을 모토로 발전해온 공화정은 이미 시궁창 고인물이 되어 썩은내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타고난 군인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돈만 많고 혈통이 별로라 중앙 정계에 들었음에도 좀처럼 로마 정치권력의 정점인 집정관에는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의 준동과 끊임없는 북방 이민족들의 위협으로 '타고난 군인' 인 마리우스는 지속적인 기회를 잡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몇차례나 로마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지만 계속된 원정으로 해외와 지방에 있는 사이, 정작 로마는 사투르니누스의 쿠데타를 경험하게 된다.


2부 [풀잎관] 에서는 뜻하지 않았던 병과 사투르니누스의 의회 전복 사건 이후 모처럼 찾아온 평화의 시기를 맞아 더이상 권력을 붙들고 있을 수 없어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좀처럼 큰 찬스를 잡지 못하고 있는 술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관계는 예전만큼 친밀하지는 않아보였으나 서로에 대한 존중과 우정은 여전했고, 로마의 중앙 정계 또한 좀처럼 변할 줄 몰랐다.

마치 고인물처럼 로마 정계는 썩을대로 썩어있었고, 권력을 지닌 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재산을 불릴 마음 뿐이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몇 대 가 쌓은 어마어마한 황금과 번듯한 혈통이 필요했다. 권력을 잡은 뒤에는 자신이 그동안 투자한 금액을 몇배로 되돌려 받고자 노력했고, 자식들에게 권좌를 물려주기 위해 모으고 더 모아야 했다. 권력의 밖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착취당했고, 권력의 안에 있는 자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그것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애 쓸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와 북방민족의 전쟁위협을 통해 권력을 잡았듯, 술라는 이탈리아 속주의 반란과 아시아 속주의 군사적 위협을 통해 집정관위에 오르게 된다. 술라가 아시아 속주를 평정하고, 이탈리아 속주의 반란도 진압, 잔당을 정리하는 사이 로마 중앙 정계에서는 이제 반 은퇴상태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마지막 기회를 잡아 다시 한 번 집정관이 오를 계략을 세우게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의 정면대결. 집정관에 의한 첫번째 로마 시내 침공이 벌어지게 되고, 서두에 언급했던 '시저'.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격적으로 활약을 예고한다.  



1부 [로마의 일인자]와 2부[풀잎관] 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역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이다. 

태생부터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 혈통이 아니었던 그는 뛰어난 능력에 비해 지지 세력이 전무했다. 숱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많은 돈을 모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이 혈통이었기에, 가이우스는 바로 한 발 앞에 있는 최고 권력의 의자에 다가설 수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로마 시민들에 대한 책임감과 충성심이 있었지만, 원로원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때문에, 극적으로 최고 권력을 차지한 이후부터는 원로원이 정한 원칙들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인의 권력으로 원칙을 깨뜨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공화정의 의미는 퇴색된다. 이후 벌어진 사투르니누스의 의회 전복 시도와 술라가 집정관위에 오른 뒤 행했던 행동들 모두 가이우스 마리우스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의 반목은 훗날 공화정에 종말을 고하게 되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옥타비아누스)의 반목과 굉장히 닮아있다. 무엇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와의 관계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와의 관계와 무척 닮아있기도 하다. 비슷한 두 인물에 의해 로마 공화정은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아마, 콜린 매컬로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장대한 시리즈의 서막을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통해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역사소설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등장인물들이 정말 그 시대 사람처럼 생각하는가?' 이다. 물론 그건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 다른 계급을 대하는 태도, 옷차림과 습관, 말투나 리액션 등 개별적인 것들이 묘사하고 있는 그 시대에 맞는 것들이냐는 것인데, 의아함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원로원의 의원들을 통해 보여지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로마인들과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아우렐리아로 대표되는 새롭고 혁신적인 로마인들의 끝없는 대립을 바라보며, 우리 역사가 떠올랐고, 또 현재의 대한민국이 떠올랐다. 

고대사회에서는 시간은 둥근 순환 고리와 같아서 쇠퇴와 발전의 사이클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생각하는 순환적 시간감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반면 직선의 시간축 위에서 연속적으로 발전한다는 발상은 신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으로 인류의 시작과 끝이 명확한 기독교의 직선적 시간감각에 의해 태어났으며, 진보사상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17세기 말에 고대인과 근대인 논쟁이 펼쳐진 이래 여전한 논쟁거리인 모양이다.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p.183 참조)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를 읽으며,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며 발전과 쇠퇴를 거듭한다는 순환적 시간감각 쪽에 마음이 더 갔다. 이처럼 대를 이어 긴 역사를 서술하는 시리즈는 보다 넓고 긴 호흡으로 삶을 조명할 수 있게 해 주는데, 왕정으로 시작해 공화정을 거쳐 제정으로 마무리되고, 결국 거대한 서구 역사의 바탕이 되는 로마의 역사 뿐 아니라,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 드루수스의 한 인생만 보아도 정체기가 있을지언정 연속적으로 발전한다는 개념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대하 역사소설은 호불호가 명확한 장르이다.

기본적으로 서사가 사건이 아닌 인물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사건 전후의 논리적 인과관계가 한 눈에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대부분 분량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건들이 끊임없이 중첩되며 인물들이 쉼없이 꼬여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과서가 스포일러' 라는 말이 있듯 기록이 이미 사건의 결과를 알려줄 뿐 아니라,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끝' 과 같은 엔딩이 없다는 점이다. 그 어떤 찬란한 업적은 세운 인물이 주인공이라 해도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이며, 그 업적들 또한 먼지처럼 사라져 한줄의 글로 기억될 뿐이다. 박경리의 [토지] 나  이문열의 [변경] 그리고 콜린 매컬로의 이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처럼 몇대에 걸친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식과 땅, 국가를 위해 인생을 다 쏟지만 결말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하 역사소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특히 작가적 상상력의 극치와 편집증적인 사료조사를 통해 작가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완벽한 '그 시대적 사고'를 종이 위에 구현해 낸 콜린 매컬로에 경외를 보낸다. 특히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족적이 비교적 뚜렷한 인물들을 다루는 대담함에 찬사를 보낸다. 뿐만 아니라, 이미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충분히 알고 있으나, 너무너무 읽고 싶어지는 재미를 주고 있으니, 약간의 시샘이 섞인 거대한 존경과 애정을 보낸다. 

부디 7부까지 무사히 완간되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삶 전체를 즐길 수 있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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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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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 유명한 테드 창을 드디어 만나봤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바빌론의 탑] 부터 그야말로 쑤욱 빨려들어갔다.

무엇보다 원시적인 기술로 거대한 탑을 쌓아가는 공정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그들만의 작은 세계에 관한 통찰력이 돋보였다. 

현실인듯 아닌듯, 오묘한 세계관도 맘에 들었고, "인간은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결국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으로 대변되는 주제의식도 새롭고 신선했다.

대부분의 SF소설들은 인류의 미래에 관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는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으로 대표되는 인류 진보의 정점에 관한 축이 한 편을 담당한다. 

인류의 '진보' 라는 개념은 기독교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운명에 '시작' 과 '끝' 이라는 직선의 계획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극히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다. '끝' 에 다다를 때 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신에 가까워질 ;진보할 것이라는 신념이 기저에 깔려있다.  

반면 힌두교와 불교의 개념에 진보는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행을 반복하며 동식물을 넘나드는 광대한 윤회의 고리에 갇혀있고, 인간의 삶이란 단순히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행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 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인류 공통의 과제라기보다 개개인의 영혼에 관한 문제이다. 

때문에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명백해 보이는 이야기속에서 주인공이 결국 깨닫게 되는 진리는 지극히 동양적이어서 많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두번째 [이해] 는 21세기 들어 영화와 만화로 가장 많이 다뤄진 소재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역시 현재의 과학 세계관 안에서 인류가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을지 그려내고 있다.

[바빌론의 탑] 에서 인간들이 신에 가까워지기 위한 방법으로 서로가 연대하며 바닥에서부터 돌을 한장씩 쌓아 올라가는 것이라면, [이해]에서는 화학 약물을 통해 뇌의 기능을 급속도로 높여내는 방법으로 다루었다. 

한편의 서스펜스 스릴러처럼 초장부터 종장까지 쉴 틈 없이 거침없이 내달린다. 

영화 [루시]와 [트렌센던스]가 떠올랐다. 약물을 통해 인간의 신체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소재는 넘쳐났지만, 뇌의 처리속도를 통해 감각으로 와닿는 정보들을 모두 종합해 순식간에 계산해내고, 귀에 들리는 소리, 시각정보의 패턴, 호르몬의 분비 등을 통해 상황을 조립하고, 결국 그걸 이용해 누군가와 대결까지 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숨막힐 정도였다.

물론, 펼쳐내는 지식의 양이 너무 방대해서 어떤 부분은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음 작품인 [영으로 나누면] 은 그 이해 되지 않음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수학의 결정적 오류를 깨달은 수학자의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아주아주 어렸을 적에 수학을 포기했던 한 사람이지만, 수학의 가치와 논리적 즐거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발견한 수학의 오류와, 그것을 설명하는 내용은 도통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명징하게 와닿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난 방금 수학 대부분이 오류라는 것을 증명했어. 이젠 그것들 모두가 무의미해진 거야." 

수학자들은 수학이야말로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숫자와 등식으로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세계.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숫자로 치환하고 풀이한다. 그리고 그것들 대부분은 정말로 진리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은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여성 수학자 레네와, 그 수학자보다 재능은 떨어지지만 동료 수학자이자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 칼의 이야기이다. 수학의 중대한 오류를 이해하고 증명한 레네는 조금씩 히스테릭해져가고 칼은 그와 함께 자신의 결혼생활도 조금씩 파괴되어 감을 느낀다. 

이론 세계의 파괴와 현실 세계의 파괴가 서서히 닿아가는 과정이 절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무엇보다, 도통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저자의 수학에 대한 사랑과 깊이에 대해 잘 느낄 수 있었다.


네번째 작품은 표제작이자, 드디어 테드 창에게 네뷸러 프라이즈를 안겨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다. 

이 작품은 아주아주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

우주에서 외계인이 내려왔는데, 중력과 대기를 포함, 살아온 환경이 다른 것은 물론 신체의 크기와 특징, 구조 자체가 다르다. 

바디랭귀지도 통하지 않고, 아무리 관찰해도 서로의 습성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과연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해낼 것인가? 

뭔가 문자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뭔가 비교할 사물이 있긴 있는데, 그 사물이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거다. 외계인들이 그 사물로 뭔가 하긴 하는데, 뭘 하는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대뜸 뭔가 때려부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호전적인 종족은 아닌 것 같고, 대화를 하고 싶어하긴 하는 듯 한데, 도무지 방법이 없다. 

각지에서 뛰어난 언어학자와 수학자, 물리학자들이 동원되어 커뮤니케이션 창구를 개설한다. 

그것은, 외계인들이 개설해 준 것이긴 하지만, 인간들은 그들을 '헵타포드' 라고 칭하며 대화를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들이 과연 인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언젠가 공격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여행을 위한 어마어마한 기술을 사사해 줄 것인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쓴다. 이 작품에서 역시 수학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그나마 이 작품은 언어와 문자에 대한 작품이었어서 전작보다는 술술 이해됐다. 특히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에 관한 부분은 언듯 한글과 비슷한 개념이 등장해서 외려 이해하기 쉬웠다. 이 작품은 단편만 발표했던 테드 창이 6년만에 낸 작품이라던데, 그동안 문자에 관한 자료를 얼마나 많이 수집했을까, 싶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이 담겨있었다. 

학술적인 이야기들 속에서도 남녀의 묘한 케미스트리나 감정, 정서적인 묘사들이 양념처럼 얼마나 잘 들어가 있는지, 이야기꾼의 면모가 느껴졌다. 

또한, 새삼 언어와 문장이 인간의 사물인식에 관한 사고방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섯번째 작품 역시 문자, 언어에 관련된 작품이다.

[일흔 두 글자] 는 과학 소설이라기보다 판타지 소설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골렘' 을 소재로 삼고 있다. 

진흙인형에 특별한 문자를 적어 넣으면 살아 움직인다는 아이디어가 돋보였는데,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언령言聆마법을 떠오르게 했다. 그와 함께 진흙 인형이 일종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골렘을 움직이는 키워드가 마치 프로그램 코딩으로 읽히기도 했다. 골렘을 디자인하는 과학자들과 골렘을 신의 영역으로 여기는 카발리스트의 대립이 서스펜스를 불어 넣으며 결국 생명의 근원이라는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줄기의 이야기 전체를 긴장감 넘치게 이끌어갔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독자들의 호흡을 쥐락펴락하는 스토리텔링 센스가 무척이나 돋보였다. 이 세계관 안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싶을 정도로 내게도 꽤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자동인형에 관한 아이디어도 그리 신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접붙여진 아주 작은 신선함과 탁월한 스토리텔링 기술이 만나 완전히 새로운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테드 창이라는 젊은 작가가 왜 이렇게 큰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수긍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은 그 다음의 [지옥은 신의 부재] 라는 작품이다.

주인공 닐 휘트먼이 몸 담고 있는 세상은 때때로 천사가 강림하는 세상이다. 천사는 랜덤하게 지상에 강림했고, 대기와 지면에 물리적인 충격을 가져왔다. 강림의 순간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때로 불가피한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고, 불치병이나 장애가 낫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강림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천사의 빛에 의지해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향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도 있었고, 천사는 때떄로 '주의 힘을 보라' 따위를 외쳤기 때문에 신의 존재가 명명백백히 드러나는 세상이었다.

강림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천국이나 지옥의 단편을 볼 수도 있었는데, 지옥은 이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똑같이 생긴 세상이었지만, 그 곳에는 신이 부재한 세상이었다. 강림이 일어나지도 않고 기적도 없는, 신의 숨결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세상이었다. 

닐은 그러한 세상에서도 신의 의지를 크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의 존재는 확실했지만, 신이 인간에게 어떠한 목표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 역시 단순히 우연일 뿐이고, 천사의 강림이나 그로 인해 사고를 당하거나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오롯히 우연의 산물이라 믿었다. 그는 신을 사랑하거나 비난할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 일어났던 천사 나다니엘의 강림때 휘몰아치는 불길의 장막에 산산조각 난 카페의 창문에 직격당해 사랑하는 아내인 사라가 즉사하면서 닐의 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종교'를 다룬 소설은 많지만 이토록 신선하고 충격으로 다가온 작품은 없었다.

너무나 인상적이고, 여운이 길게 남아서 좀처럼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꽤나 오랫동안 기독교에 심취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때에도 나는 신이 자애롭거나 사랑이 많다는 표현을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성경을 기록한 자들의 해석일 뿐, 하나님이 인간에게 한 행동 자체를 보면 그것이 과연 '사랑' 일까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 인간에게 뭔가 거대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힘들었고, 인간 한명 한명을 지켜본다는 것도 무책임한 해석이라고 여겼다. 신에 대한 믿음의 크기로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짓는다는 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졸속적이었고, 예수를 걸고 갖가지 구원론을 갖다 붙이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사후세계조차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20대를 열심히 바쳤던 교회를 미련없이 떠났다.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한 종교가 내린 신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지옥은 신의 부재] 는 1차원적으로 완벽하게 느낄 수 있는 '신' 을 내세워서 '신의 존재' 가 아닌 '신앙심' 그 자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신이 눈에 보인다고 사랑할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숨을 쉴 수 있게 해 준다고 대기를 사랑하지는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신앙심' 이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기를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듯 하다. 대기는 나에게 완벽하게 무관심하다. 우연의 산물로 내가 호흡할 수 있는 기체들이 모여 있을 뿐이고, 내가 대기를 사랑한다고, 대기가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지는 않는다. 신앙심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두터운 책의 마지막 챕터를 장식하고 있는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는 제목 그대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칼리그노시아' 라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실인증' 이라는 병이 있다. 사람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병인데, 이걸 접목시켜 사람의 얼굴에 대한 미추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미증(칼리그노시아)' 이라는 조어를 만든 것이다.  

외모지상주의를 대놓고 풍자한 이 작품은 시종일관 해학이 흘러 넘쳐 보는 내내 키들거리게 된다. 한편 실제로 얼굴의 생김새가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돌아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정말 어디서 본 듯 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진부' 와 '진보' 는 한 끗 차이라는 금언을 되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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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남의 날개 십이국기 6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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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왕 슈쇼는 십이국기 세계관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린 왕이다.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에서 잠깐 등장하길래 '다음편은 공왕이나 공국 기린 이야기가 나오겠군' 했더니 역시나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십이국기 시리즈는 요코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이 다음 연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경국의 요코가 왕이 되는 이야기(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는 모험 활극에 가깝고, 태국의 기린 다이키를 통해 전해지는 태왕 교소의 이야기(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는 신화나 전설, 안국의 연왕의 이야기(동의 해신 서의 창해)는 대하 역사물 느낌이라면, 공왕 슈쇼의 이야기는 버디 무비풍의 이야기이다. 


왕이 없어져버린 공국은 날로 피폐해지고 있었지만, 슈쇼는 워낙 부잣집에서 자라 여전히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 하지만, 슈쇼는 그 안에서 상당한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주위의 이웃들은 날이 다르게 수척해져가고, 요마의 습격에 빈번하게 죽어나가지만 자신과 가족들은 부유하고 안전하다. 이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가 아닌 어른들의 세계. 부조리함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어른들은 무책임하다. 자기 자신의 몸 하나만, 가족들만, 울타리 안에서만 안전하고 부유하면 만족하는 부모님을, 어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슈쇼는 스스로 온실을 박차고 나와 대체 어른들은 이런 세상에서 뭣하고 자빠졌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왕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봉산에 도착해 간큐와 함께 산행을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슈쇼는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

'도남의 날개' 또한 십이국기 시리즈 중 '히쇼의 새' 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게 된 작품인데, 재독 삼독을 해도 재미있었다. 

경왕 요코가 엉겁결에 왕으로 선택받고, 수동적인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왕도王道를 따라 걷는다면, 슈쇼는 스스로 왕이 되기를 결정하고 적극적으로, 그야말로 패기 넘치게 왕좌로 향한다. 

왕이 되는 길. 기린에게 선택받기 위한 지원자들이 스스로의 능력과 운을 시험받기 위한 봉산행은 그 시작부터 녹록치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인간들의 인육과 피를 잔뜩 먹을 수 있는 봉산의 요마들에게는 성찬의 날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산행에서 오만에 가까운 자기애로 무장하고, 어린아이 다운 천진함으로 생각하는 바를 서슴치 않고 내지르던 슈쇼는 간큐와의 산행을 통해 진정한 리더쉽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게 된다.  


요코 이야기는 아예 왕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소녀가 왕으로 성장하는 내용이라면, 슈쇼 이야기는 이론과 사상으로 무장된 소녀가 경험을 통해 성숙되는 내용이었다. 요코 이야기가 전형적인 성장의 플롯이라면 슈쇼 이야기는 역시 전형적인 성숙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슈쇼는 스스로 택한 고난과 고통스러운 경험들 속에서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의지를 다듬고, 심지를 굳건히 한다.

경청을 배우고, 사과를 배우며, 포용을 배운다. 



제아무리 훌륭한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다 한들, 현실과는 다르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삶은 텍스트가 아니다. 슈쇼는 올곧은 생각을 가지고 당당하게 걸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벽을 맞닥뜨릴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마지막 대사 한방으로 슈쇼와 공국에 대한 걱정을 상당히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 어째서 내가 태어났을 때 오지 않았어, 이 멍청아!"






+덧: 조금 거슬렸던 부분은, 슈쇼는 전형적인 금수저라는 점이었다. 

금수저로 태어나긴 했으나, 누리기 전에 다 빼앗기고 맨몸으로 흙바닥에서 굴러 왕이 되는 이야기가 요코 스토리였다면, 금수저로 태어나 그 모든 것들을 풍족하게 다 누리며 최고의 길잡이들까지 얻어 왕이 되는 이야기.... 이긴 한데, 그냥 이 책을 읽던 시기에 내 심사가 좀 뒤틀려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아하는 타이틀이라니까.ㅎㅎ

전형적인 금수저 마인드가 얄밉기도 했지만, 어른들 틈에서 무시당하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했고, 말수가 적은 간큐가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 것도 얄미웠으니, 밉상 둘이 어우러져 한 편의 재미난 버디무비를 이끌어 냈으니, 좋은 점수를 줄 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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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형적이나 역시 전형적이다 ...라는 말에 지극한 동감!^^
 
히쇼의 새 십이국기 5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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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는 십이국기 세계관의 단편집이다. 


십이국기는 기본적으로 장편은 왕과 기린 등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사건이 펼쳐지고, 단편들을 통해 세계관 내의 다양한 인종과 계층들을 보여주곤 한다.

십이국기의 세계 자체가 작가가 단편을 한편씩 완성해 나가며 아이디어를 확장시키고, 논리를 맞추어 나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는 장편보다 단편을 좀 더 높이 평가하고, 장편보다 단편을 좀 더 좋아한다.

지난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편을 리뷰하면서 전체적인 세계관을 정리했었는데, [히쇼의 새] 에서는 십이국기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하급 관리들의 이야기가 소소하게 펼쳐지며 세계관을 두텁게 만들어 간다. 

표제작인 '히쇼의 새' 를 필두로 '낙조의 옥', '청조란' ,'풍신' 이렇게 네 편의 단편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히쇼의 새' 에서는 요코가 까메오처럼 등장해서 당시 일본의 팬들에게는 마치 선물과도 같았으리라 생각된다.(띠지에 적혀있듯 히쇼의 새는 오노 후유미의 12년만에 발표된 십이국기 제목을 달고 나온 작품이었으니!!.)


'히쇼의 새' 는 궁전의 큰 행사때 사용되는 일종의 제의를 관장하는 하급 실무 관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도자기로 만든 새를 날려 화살로 맞춰 부수는 일종의 쇼인데, 죽지도 않고 영원히 그 일만 해야한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 지기도 하지만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죽지도 않고 영원히 뭔가를 만들어내고 보여주는 일을 한다는 건 꽤나 행복할 수도 있겠다 싶다. 특히 히쇼의 경우처럼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알아봐주는 이를 만난다면 더더욱. 


작품 속에 등장하는 히쇼는 마치 오노 후유미 본인처럼 느껴진다. 

십이국기라는 방대한 세계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 나가는 일 말이다. '십이국기' 는 한 이름을 가진 거대한 시리즈이지만 면밀히 따져보면 연작이라 부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매 작품들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다. 

창작자에게 창작물은 언제나 찰나의 산물이다.

그것은 문학이든 미술이든 마찬가지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품에 따라 감상할 때 마다 느낌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것은 엄연히 독자의 입장에서의 해석의 자유일 뿐, 창작자에게는 창작하는 순간의 찰나에 불과하다. 나 역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써 한번 그린 그림은 결코 두 번 다시 똑같이 그릴 수 없다. 디지털의 시대로 넘어와 복사+붙이기라는 신공이 있지만, 복사해서 붙여넣은 그림은 창조가 아니라 복제일 뿐이다. 같은 종이 위에 같은 붓으로 같은 터치를 했다고 해도 순간에 불과하다.

히쇼가 날리는 도자기 새 역시 마찬가지. 깨뜨리기 위해 만드는 도자기라니.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의미하지만, 예술이란 관점에 따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다. 

히쇼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찰나를 영위하기 위한 영생이라니. 그 역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의미하지만, 인생이란 관점에 따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다.  

도자기가 만든 새가 하늘로 날아올라 화살에 맞아 조각나는 순간 히쇼는 끝났다고 말했지만, 요코는 시작이라고 말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보는 군주를 위해 죽는다지만, 예술은 자신을 알아보고 즐기는 이를 통해 살아난다.

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예술이라 불리지도 못하고 너무 쉽게 '쓰레기' 라 이름 붙여져 재가 되어 사라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했으며,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못한 채 사라졌을까.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단 한 작품도 인정받지 못한 채 괴로움 속에서 굶어 죽어갔을까? 

창작자의 입장에서 타인에게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새삼재삼 통감하는 요즘이기에 정말 깊이 와닿았던 작품이다.

한시간 사이에 서너번을 다시 읽고, 또 다시 읽고, 또 생각에 잠겼던 작품이다.

앞으로도 여러번 되 읽어 보게 될 것 같다. 


'낙조의 옥', '청조란' ,'풍신' 역시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직급의 관리들이 등장한다. 

현대의 공무원들이 관리직부터 기술직까지 다양하게 있듯 십이국기의 세계 안에서도 다양한 일을 하는 관리들이 등장한다.

관리가 되어 선적에 들어가면 평범한 이전의 삶과 일별해야 한다. 가족들과 동반해서 선적에 들 수도 있지만, 모두가 영생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뿐 아니라 영원히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권태로운 일. 관리도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영생을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유쾌한 일은 아닌 듯, 남편을 버리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일도 잦은 듯 하다. 

비교적 한직에 머무는 하급 기술 관리들의 삶도 꽤나 흥미로웠다. '풍신' 은 나라의 수목을 관리는 기술직 관리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십이국기 세계에서 선적에 든 관리들은 어지간하면 나무만큼 오래 산다. 나무가 돌처럼 단단히 굳어버리는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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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 상 십이국기 4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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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스크롤 압박, 논리적 비약, 비문 주의. 







 수 년 전, 십이국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야기 자체보다는 십이국기 세계관의 정치형태에 큰 흥미를 느꼈었다.

'천황' 이라는 시스템과 사방이 막힌 섬나라 민족 일본인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인상은 지극히 중국적이고, 사회 시스템도 중국의 것을 많이 따왔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설정 자체가 대단히 일본적이라고 느껴졌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여점의 난립과 함께 소위 '킬링타임용' 판타지 소설이 판치던 시기였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판타지 소설의 홍수 속에서 '마계마인전(로도스도 전기)', '반지전쟁(반지의 제왕)', '얼음과 불의 노래' 등 해외의 명작 판타지 문학은 물론, '퇴마록(이우혁)', '드래곤 라자(이영도)', '비상하는 매(홍정훈)' 등 문학성을 인정 받을 만한 한국 판타지 소설들도 주머니속의 송곳처럼 솟아 올랐더랬다. 


 '십이국기'는 그러한 한국 판타지 문학 시장의 양적인 팽창의 거품이 잦아들고 안정기를 향해 서서히 하락하던 즈음에 국내에 찾아왔는데, 애니메이션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오랜 기간동안 꾸준히 출간되었다. 나는 2000년대 초반, 군대에서 전역한 뒤, 우연히 애니메이션을 접하고 난 뒤에야 원작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국내에 출간 되었던 원작 소설이 절판된 상황이어서 별 수 없이 여기저기 대여점과 인터넷 중고 서점을 기웃거려야 했다. 

 당시에 십이국기를 읽다가, '아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 라고 느꼈던 시점이 6,7권 즈음(구판 기준)이었는데, 부제가 바로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이었다. 재미가 있다 없다를 떠나, 나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었던 흥미요소가 십이국기만의 독특한 세계관 때문이었는데, 6, 7권에 이르자 저자가 하고자 했던 말들을 다 들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세계관의 허점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며 전반적인 호기심이 줄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번에 다시 읽으며, 다음권에 대한 기대감이 엄청나게 부풀었다.

그 때와 다른 것들이 읽혔기 때문이다.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은 십이국기 시리즈의 1부인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를 통해 경국의 왕이 된 요코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왕이 되었지만 자신이 살던 현대의 일본과는 너무나 달라 경국의 정치상황은 커녕, 기본적인 생활상식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요코는 덜컥 주어진 무거운 책임들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 한 두 해 집중적으로 생고생을 했다지만, 평범한 여고생 아니던가. 자고로 군왕이란 조기교육을 통해 키워지는 법이다. 어쨌든, 진짜 왕이 등극하며 경국에는 기나긴 자연 재해가 끝나고 황폐해진 대지가 빠르게 수복되고 있었지만, 정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탓에 경왕 요코의 눈길이 닿지 않는 각 지방의 봉건 제후들의 악행은 끊이지 않았고, 그동안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앉았던 고관 대작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어린 새 여왕의 눈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러한 탓에 이 세계에 대한 상식도 부족한 경왕 요코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경국의 기린 게이키는 선문답을 내뱉으며 요코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행동파 요코는 자신의 성격에 맞게 직접 민생을 살피기 위해 게이키에게 일체의 정무를 일임한 뒤 변복을 하고 하계의 평민들 사이로 녹아든다. 십이국기 세계에서 왕은 나이를 먹지 않는 불멸의 존재. 요코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시간을 들이고 발품을 들여 바닥부터 차근차근 살피기로 한 것이다.    




-여기부터 스포일러 있음 -



전체적인 구성은 오노 후유미 답게 짜임새도, 리듬도, 특히 캐릭터의 묘사까지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요코와 함께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스즈와 쇼케이의 삼각 연출은 참 좋았다. 세 캐릭터는 자신의 위치에서 능란하게 역할을 수행해내는데, 특히 환경과 주변 사람들에 영향을 받아 입체적으로 변화해가는 심리 묘사는 정말정말 훌륭했다. 

 

 반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전투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완성도가 떨어진다. 

요코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부분도 극의 흐름에 맞지 않게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고, 그녀가 갖고 있는 능력 자체가 먼치킨이나 데우스 엑스마키나라 불러도 될 정도로 무적이라 전투 장면의 긴장감이 엄청나게 떨어진다. 게다가, 이번 타이틀의 오프닝은 다른 왕국의 왕이 허무하게 척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지라, 넘사벽인 요코의 무력은 전체적인 완성도를 위협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클라이맥스를 완성하는 금군과의 대치 장면에서는 단순히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수습되는 등, 조금만 신경 썼으면 엄청난 서스펜스와 카타르시스를 주었을 장치들을 너무 어이없이 허비해버린다. 

힘껏 잡아당긴 고무줄을 탁 하고 놓았는데, 정작 고무줄의 탄성이 없어져 그냥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져 버린 느낌이랄까. 

 오노 후유미라는 작가가 갖고 있는 '전투' 와 '전쟁'에 대한 연구와 상상력의 빈약함이 드러나는데, 왜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편에서 요코가 가짜 왕을 물리치고 진정한 왕이 되는 과정을 단 한 문장으로 마무리 했는지 이해했다. 

4/5 지점까지는 90점에 가까웠던 이야기가 마지막 1/5는 30점을 주기에도 아까운 완성도를 보이며 무척 특별했던 마지막 페이지의 감동을 쑥쑥 갉아먹었다. 

 지금까지 읽어온 [십이국기] 시리즈 중 가장 극적인 엔딩을 갖고 있는 작품이지만, 직전의 한 발자욱 때문에 그 효과가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특히 스즈와 쇼케이, 요코가 같은 공간 안에서 공공의 적을 향해 발을 맞추게 되는 과정이 마치 작은 블럭을 쌓아나가듯, 뚜렷한 인과관계 안에서 차근차근 완성된 것이라 특히 더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판타지 소설의 완성도를 따지는 가장 큰 기준은 세계관의 설득력이다.

예를들어, 날개가 있는 지적인 종족이 존재하는 세계라면 그 세계의 문명은 우리와 참 다를 것이다. 

우리의 신화처럼 눈에 보이는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나, 드래곤 같은 지적인 포식자가 존재하는 세계의 인류 문명도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과 사회구조의 차이점, 사상과 개념들이 무한한 상상력과 현실적인 통찰력이 만나 합치되는 지점이야말로 판타지 문학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낯선 것이 익숙함이 되는 순간, 비일상이 일상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판타지를 읽을 필요도, 사랑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어쩌면 고작 이야기의 배경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세계관을 왜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냐고 묻는다면, 위에 언급한 판타지 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특정점인 동시에 저자의 '사상' 과 '철학'이 가장 짙게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어슐러 르 귄은 우주의 외딴 행성에 살고 있는 외계인들을 창조했다. 

이 외계인들은 성의 구별이 없다. 후손을 잇는 방법도 다르고, 가족의 개념과 형태도 다르다. 당연히 사회의 구조와 정치도 다르다. 어슐러 르 귄은 이 외계인들의 사회구조와 풍습, 종교 등을 통해 현실의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 역할 구분의 불합리와 성 차별의 폭력성을 직관적으로 그려냈다. 

이영도는 눈에 보이는 시간축을 가진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흐른다' 고 표현하는 시간개념을 전복시키며 매 순간 시간에 얽매여 사는 우리의 삶을 우회적으로 비꼬았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특별한 창조물 역시 세계관의 논리적 인과성 안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앤 라이스는 뱀파이어가 우리와 함께 살아 숨쉬는 세계를 창조해냈다. 얼마나 은밀하게 인간들의 눈을 속여가며 어둠속에서 살아가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조앤 롤링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현실에 마법사들을 우겨 넣은 것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을 꼼꼼히 살펴보면 저자가 갖고 있는 철학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주제의식에 보다 깊이 다가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판타지 세계의 세계관을 꼼꼼히 살펴보며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애쓴다. 



 [십이국기] 역시 충분히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일단, 지금까지 출간된 작품들에서는 기린이 어떤 존재이고, 왕은 어떻게 선택되며, 기린과 왕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려졌다. 기린의 탄생과 왕의 탄생은 일종의 천부적 권리이다. 기린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린이고, 잘못된 환경에서 성장해도 타고난 재능을 잃지 않는다. 기린의 재능이란 왕을 알아보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모든 기린이 갖고 있는 능력이며, 기린은 한 국가에 단 한 명 만 존재한다. 

 기린이 동전의 한 면 이라면, 왕은 다른 한 면이다. 

기린은 탄생부터 명확하지만, 왕은 그렇지 않다. 왕기는 발현, 연마된다. 왕기 역시 한 국가에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데, 관점에 따라 선천적일수도, 후천적일수도 있다. 기린의 성정이 결코 변하지 않는 것에 반해, 왕이 갖고 있는 왕기는 변질된다. 왕기를 인정받고 기린에게 선택받아 영원불멸의 지배자가 되는 왕은 초기에는 선정을 펼치지만, 종국에는 폭정, 실정을 거듭하여 결국엔 왕기를 잃고 천벌을 받아 병들어 사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왕기가 절대적인 것이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고대 제정분리 사회의 제사장 역할을 기린이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 작품 안에서도 일반 사람들은 기린에게는 신비감을, 왕에게는 경외감을 갖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동의 해신 서의 창해]에서 왕과 기린을 통해 십이국기 세계관의 절대적인 '섭리' 를 선보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그러한 섭리 아래서 성립된 사회 시스템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십이국기 세계는 전제정인 동시에 선인(귀족)과 평민의 뚜렷한 계급사회이다.

왕은 어떠한 법에도 저촉받지 않는 불가침의 존재로써 시간의 흐름조차 구애받지 않는다. 

실정을 하면 병이들고 국가에 재난이 찾아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이므로, 사실상 왕의 행위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그 어떠한 것도 없다. 심지어 신의 대리인과 다름없는 기린조차도 왕에게는 절대 복종할 수 밖에 없기에 왕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으로써 국가 위에 군림한다. 재미있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왕이 정해지는 과정은 종교적이지만, 왕이 폐해지는 과정은 세속적이다.

 일반인들이 정치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선인이 되어야 가능하다. 추천은 다른 이도 할 수 있지만, 선적에 오르거나 지워지는 것은 오로지 왕만이 결정한다. 한 사람이 선적에 오르면 직계 가족들도 선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의 세습도 어느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선적에 오르는 순간 불사의 존재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세습은 단순히 물려받는 개념과는 다르다. 일반인들에 비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보다 쉬워진다는 의미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하지만, 고위 관료의 자식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지는 그려진 바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회라면, 선적에 오른 고위 관료의 자식은 정치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올바를 것 같다.) 현실 사회의 귀족들에게도 '급' 이 있는 것 처럼 선인들에게도 '급' 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의 갑을관계도 뚜렷하다. 

 왕은 누군가에게 불멸의 생명을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있는 유일한 존재인 셈이고, 바로 이 결정권을 통해 왕은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한 소리 했다가 왕의 미움을 사 선적에서 지워지기라도 하는 날엔 영원한 생명이 사라져버릴테니, 신하들은 쉽게 왕 앞에 나설 수 없고, 자기들만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신 앞에 선 인간들처럼, 왕 앞의 신하들은 더욱 더 소심하고 의기소침할 수 밖에 없다.  


왕은 제후를 선적에 등록시켜 영원한 삶을 약속하고 공과에 따라 다스릴 수 있는 봉토를 내린다. 

제후는 영원한 삶과 봉토의 대가로 복종을 약속하고 세금을 바친다. 

재미있는 부분은 왕과 제후 사이에 군사력이 배제된다는 사실이다. 

 실제 현실의 봉건사회에서 왕은 외국과의 외교관계에 책임을 지고, 관계가 파탄나서 전쟁으로 치달으면 제후들은 병력을 지원했다. 하지만 십이국기 사회에서 대외적인 외교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의 위정자들은 서로 '외국의 사정에 참견하지 않는다' 는 섭리에 의한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십이국기의 세계에서 모든 군권은 왕에게 있을 것이다. 

작품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유추할 수 있는 대목들은 존재한다. 작품 안에서는 지방 제후들에게 왕의 사자가 한명씩 파견되어 지방권력을 견제하는데, 각 지방의 치안을 책임지는 군사들 또한 왕의 사자가 관리했을 것이다. 우기의 치수권조차 왕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경직된 정치구조 아래에서 지방 제후들이 사사로이 병력을 거느릴 수 있었을 리 없다. 때문에 경국에서는 특정 지역의 병장기 대규모 거래만으로도 내란 음모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십이국기의 세계는 지극히 폐쇄적이고 변화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정체되어 있다.

어떤면에선 안정된 구조라고 볼 수 있겠지만, 발전이 불가능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선 백성들에게 국가의 개념이 희박하다.  

왕은 자연현상의 일부에 가깝다. 왕이 실정을 펼치거나 죽는다는 것은 곧 자연재해이다. 실제로 자연재해가 일어나기도 하고. 당연히 다른 나라로 옮겨 가는 것이 순리에 맞다. 

 문명의 발전은 자연현상을 탐구하고 이용하기 위한 연구에서 시작된다. 천체를 관찰하고, 생명들의 생몰을 관찰하고,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를 연구하며 과학이 발달하고, 철학이 발달한다. 평등사상이나 시민의식은 자연철학 속에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평범한 백성들은 자연현상을 탐구할 필요도 없고, 의문을 가질 이유도 없다. 

 자연재해는 오로지 왕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왕만 있으면 가물지도 않고 홍수도 나지 않는다. 때문에 왕이 없으면 백성들은 왕이 없는 현실을 한탄하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결국 다른 나라로 피난한다. 

 외국과의 전쟁도 없다. 인류 문명의 가장 큰 발전은 대부분 전쟁을 통해 이룩했다. 

 하지만 십이국기의 세계에서는 전쟁이 없기 때문에 혁신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 십이국기의 세계에서 백성은 노예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오로지 왕과 제후에만 기댄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이번 작품에서 요코와 반란군들이 전투를 하는 과정 중에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세계관의 맹점 안에 작가인 오노 후유미가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변화가 불가능한 세계.

이 안에서 라크슌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변혁의 싹을 틔워내고, 요코를 통해 위로부터의 변혁을 시도한다.


 십이국기의 세계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오로지 '왕이 없는 상태' 이다. 

왕이 있는 한, 자연재해도 일어나지 않고, 경작할 땅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원시사회에서 해와 달을 섬기던 농경부족이 해와 달이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 십이국기의 세계에서는 절대 외국을 침략하지 않는다. 외세의 침입이 없다면, 군대가 필요없어진다. 

토지의 소유도 한시적이다. 부부와 가족의 개념도 마을 공동체의 개념보다 크게 강력하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혈연으로 이루어진 씨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혈연이 없는 사회 공동체라는 것이 솔직히 상상이 잘 안되지만, 상당히 진보적인 개념임은 확실하다. 사실 공동체의 개념을 살펴보면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배제시킨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와 비슷하다.  


 토지 시스템은 우리나라의 삼국, 고려시대의 균전제와 비슷하다.(애초에 균전제 자체가 당나라의 것을 바탕으로 했으니.) 우선 땅은 모두 왕의 것으로, 봉건 제후들이 우선적으로 봉토를 하사받고, 제후들은 그 땅을 백성들에게 국가적으로 정해진 역법을 통해 분배한다. 제후등의 귀족들은 왕에 의해 선적에 들어 선인이 되므로 굳이 후손을 가질 필요가 없고, 외적이 출몰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를 조직할 필요도 없다. 사회 치안을 위한 최소한의 병력은 중앙 정부로부터 내려온다. 사적인 재산을 축적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선인이 되면 죽지도 않고 병에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왕이 존재하는 한 삶에 불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왕이 없어진다 해도 제후까지 영향을 받는 일은 없다. 왕이 없어지면 요수나 요마가 출몰하고 자연재해가 시작되는데, 그를 대비한 제후들을 위한 독립적인 시스템이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왕이 없어진 뒤의 봉건 제후들은 영주민들에게 선행을 베풀수도 있고, 악행을 일삼을 수도 있다. 왕이 없는 기간동안 두각을 드러내 중앙정부를 장악하는 고위 관료도 생겨날 것이다. 


 이번 작품의 주 무대가 되는 경국의 경우에는 요코 전의 선대 여왕이 오랜시간 실정을 했고, 그 뒤에는 가왕이 통치했기 때문에 중앙권력의 체계가 많이 무너져 있었을 것이다. 지방 제후들은 닥치는대로 자치권을 하사받아 각 지역의 왕처럼 행사했을 것이고, 정치에서 멀어진 여왕은 중신 몇명에게 권한을 위임했을 것이다. 중앙 정부는 중신 몇명에게 좌우되며 지방 제후들 역시 자신의 이익을 좇아 편을 나누었을 것이다. 각 지방에 파견된 군사들 역시 자연스레 각 지방에 편입되었을 터다.


 1권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에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요코가 가왕으로부터 왕권을 되찾아 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외국의 사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깨준 연왕의 힘을 빌려 수도와 왕궁에서 꽤나 격렬한 전투가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결국 승리해서 요코가 정당한 왕권을 되찾았지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요코로서는 중앙정부를 일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와 북한의 해방정부가 친일파들을 숙청할 수 없었던 사정과 같다.

경국은 오랜 시간동안 중앙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지방 제후들이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지방 제후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중앙 관료들을 일거에 숙청할 수는 없다. 요코는 아직 제대로 군권을 장악하지 못했을테니, 만약 그렇게 했다면 각 지방에서 일거에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자비로운 기린의 종족 특성 상 게이키가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을 것이고. 요코는 우선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전에 중앙 정부를 안정화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가왕과 관련된 과거를 불문에 부치고 모두 포용하는 정책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왕 편이었던 중신들과 끝까지 가왕에게 반대했던 중신들은 반목할 수 밖에 없다. 이번 작품 안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정치적 이슈가 바로 이 부분이다. 


 

 이렇게 폐쇄적이고 안정적인 시스템 안에서 원인이 불분명한 현상은 오직 단 한가지, '식' 이다.

식으로 인해 기린이 열린 열매가 봉래로 넘어가기도 하고, 봉래의 평범한 사람들이 허해를 건너 십이국기의 세계로 넘어오기도 한다.

십이국기 세계의 정체된 역사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불특정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십이국기의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 힘들다.

[동의 해신 서의 창해] 에서 보였듯, 기린은 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들의 종족적 특성 자체가 안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라면 어떨까? 

왕은 기린과 다른 '인간'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안정한 존재.

세계관 안에서 절대적인 힘을 지녔으면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왕' 이라는 요소를 '식' 을 통한 변수로 집어넣은 것이다.


 이렇게 세계관을 이해하고 읽으면 요코와 스즈, 쇼케이가 맡고 있는 역할을 보다 극적으로 읽을 수 있다.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끔찍할 정도로 정체되어있는 사회이지만, 요코가 등장한 시기에 십이국기의 세계 전반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지방 제후들의 악행이 이어지며 백성들의 의식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진보적인 사상가로서의 길을 걸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라크슌 같은 인물이 바로 그런 이다. 가까운 국가에서는 실정을 거듭하고 있는 왕을 지방 제후가 세를 규합해 척살하고 마는, 성공한 쿠데타의 사례까지 등장했다. 

 요코와 스즈, 쇼케이의 만남은 아래로부터의 변화와 위로부터의 변화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요코의 첫번째 칙령은 십이국기 세계관 전체의 변혁을 이끌어낼 것이 분명하다.

과연, 십이국기의 세계에서 또 어떤 일들이 더 일어날까??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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