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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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병원은 이인시里仁市에 존재하는 단 두개의 종합병원 중 하나였다. 이인시는 한때 거대한 조선 단지가 조성되어 있던 곳으로 조선 사업의 위기와 함께 빠르게 해체되었다. 선도병원 역시 조선소와 명운을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사이. 조선소가 가동 중단을 결정하고, 근처의 산업 단지들이 폐업하고, 외지에서 온 근로자들이 도시를 떠나고, 노동자들의 숙소였던 원룸 주택단지는 거대한 공동이 되었다. 호황시에 불야성을 이루었던 상가들은 무덤처럼 조용해졌고, 고작 1년사이에 벌어진 이 쇠락을 '이석' 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인시에서 70여년을 살아온 이석은 선도병원의 터줏대감 같은 이였다. 간호조무사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관리직까지 두루 섭렵한 이석에겐 불치병에 걸린 아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병원에 출근해서, 가장 늦게 병원을 떠나는 이석의 모든 삶은 서울 대형병원에서 실낱같은 희망과 함께 아들의 숨줄을 붙들기 위해 소비되고 있었다. 그의 부인마저도. 

 '무주' 는 서울의 한 종합병원 직원이었으나, 병원에서 일어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일했던 과장의 소개로 도망치듯 이인시 선도병원 관리부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석은 무주를 곧잘 챙겨주었다. 그 덕에 무주는 빠르게 선도병원의 일에 적응해서, 맡은 바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더불어, 서울에서 잘 다니던 출판사도 그만두고 자신을 따라 이인시로 함께 와 준 아내의 임신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주는 너무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PIN시리즈는 얼마전 이영도 작가님의 신작 [시하와 칸타의 장-마트퀸 이야기] 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세로가 좀 더 길쭉한 문고본 같은 특이한 판형에, 공들인 티가 역력한 하드커버는 6편씩 묶인 작가진을 보면 시리즈의 야심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6권씩 묶여있다는게 재미있는 포인트다. 맨 뒷커버의 안쪽에 적혀있는 PIN시리즈 설명에는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 로 큐레이션된 것이다." 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시리즈의 1번인 [죽은 자로 하여금] 은 이후, 출간된 [당신의 노후(박형서)], [거울 보는 남자(김경욱)],[첫 문장(윤성희)],[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욥기43장(이기호)], 6번인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정이현)] 과 한 시리즈라는 뜻이다.


나는 이 시리즈의 최근간인 25번 [시하와 칸타의 장-마트퀸 이야기(이영도)] 와 26번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듀나)] 를 먼저 읽고, 시리즈 전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이렇게 1번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오이 가든] 부터 꾸준히 팔로우 하는, 내겐 몇 안되는 케이스의 작가이긴 하지만, 새삼스럽게도, 편혜영 작가의 장편과는 첫 만남이다. 편혜영 작가의 작품은 최근 몇년동안 최소한 1년에 한편 정도는 어떤 식으로든 만났던 것 같다. [몬순] 이후 다양한 문학상을 받아오기도 했고, 매년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런 작품들이 묶인 소설집들이 다양하게 출간되기도 했으므로. 하지만, 희안하게도 장편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편혜영 작가의 글은 언제나 서늘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냉정하리만큼 관조적인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의 폐부를 가차없이 찌른다. 그 찔림은 오롯히 독자인 나에게 작용한다. 

수족 중 어딘가를 잃은 인물들에게도 냉정하고, 모든걸 다 가진 것 같은 인물들에게도 냉정하다. 그의 묘사는 언제나 적확하고 명료하다. 내가 주로 읽었던 작품들은 대부분 단편이었으므로 그런 장점들이 뚜렷하게 도드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로테스크하고 우중충한 세계관이 단숨에 다가오고, 진흙같은 삶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들의 감정 또한 순식간에 덮친다. 


핀 시리즈의 소설들은 장편이라지만, 분량으로 따지면 중편과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기에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장점들은 여지없이 도드라진다. 

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소재-대형 병원의 비리라는 그 자체는 그다지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일어나는 사건들도 뉴스 언저리에서 들었을만한 일들이고,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들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선택과 감정선이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등장인물에 이입되어 읽다보면, 작가의 서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니, 이거 왜 이러셔, 작가 당신이 나한테 이런걸 시킨거잖아!!! 근데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셔!!!!'

랄까. ㅋㅋㅋㅋㅋ 


등장인물들은 독자인 나의 예상대로 흘러간다. 그도 그럴것이, 작가는 냉정하고 명료한 단어로 외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줄줄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도달하고, 그제서야 큰 한숨을 몰아쉬게 된다. 


솔직히, 편혜영 작가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게 비틀린 세계관을 좋아했던 나에겐 [몬순] 즈음부터 시작된 현실과의 융합이 마뜩찮았다. 이처럼 독특하고 신선한 장르적 감각을 지닌 작가가 결국은 그 세계를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나의 오해였고, 착각이었다.

단지 이제는 그러한 그로테스크하게 비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장르적 눈이 확장되어, 현실과 마주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바를 가장 압축해서 설명하자면, 한때 조직의 생리 안에서 상사의 비리를 보위하기 위해 동조자가 되었던 젊은 직원이 조직 전체의 비리를 축소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쓰여 한직으로 밀려났고, 그 밀려난 공간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터줏대감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자신이 꿰어차 들어앉은 그 자리는, 그 비리와 함께 하지 못해 잘려나간 인물의 빈자리였던 것이고. 

내용 자체만 보면, [하얀 거탑] 같은 드라마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엘리트 계층이 아니라, 그 아래. 종합병원의 행정을 관리하는 소위 "원무과" 의 비리라는, 보다 익숙한 소재가 등장한다는 점이 다를터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부조리하고, 가장 불합리한 건 무엇일까?

인간관계? 사건, 사고? 불치병? 자연재해? 

다 맞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원래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며, 비이성적인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 점을 설파해왔고, 편혜영 작가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그 점을 설파해왔는데, 현실과 몽상의 경계에서 초월적 공포를 통해 그려냈던 방식에서 살짝 내려와, 현실에 안착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다.

나는 편혜영 작가가 한국의 스티븐 킹, 나아가 러브 크래프트가 될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더 섬뜩하고, 더 현실적이며, 더 우주적인.

아직도 나는 믿는다.

이 작품의 끈적한 클라이맥스 때문이다.

무주는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기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결말을 택한 편혜영작가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아마 어떤 사람들을 욕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뭐냐고.

하지만, 원래 무주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비리를 온통 자신에게 덮어 씌우고 "한직에  가서 고생하고 와. 나중에 진정되면 불러줄게 (나 대신 몇년 빵에 갔다오라, 는 조폭 같은) " 라고 했던 전 상사를 찾아가고, 왕따시키는 팀원들에게 "내가 더 큰거 다 알고 있어" 라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점이나, 결국 그 발언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데, 그걸 겨우 허장성세였다고 고백하고, 이석의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끝끝내 확인하고 마는, 그리고 그 결과에 그렇게 반응하는, 그런.

순수하고, 순박해서 여기저기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소시민. 
평범한 당신과, 나같은 사람.

우리들에게 진정한 코즈믹 호러는 우주에 있지 않다.

내 옆에 있지. 

편혜영 작가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이 무섭다. 무섭지만 재밌지. 어쨌든 나는 주인공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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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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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업작가로 세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화자는 현재 대학교수인 남편과 별거중이다. 영국에서 만난 남편과 함께 귀국해 제법 고난한 시간을 보냈고, 둘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보육원에 갈 나이쯤이 되자 대학 교수로 제법 탄탄한 기반 위에 올라선 남편은 마치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화자의 작품 활동을 위해 시간도, 장소도 아낌없이 제공했다.
 영국으로 떠난 남편과 별거하며 자연스레 그 기반들을 잃은 화자는 번역 작업을 주로 하며 근근히 아이를 살피며 삶을 이어가던 중, 자신이 2003년 문창과를 졸업하며 자비출판했던 소설 "난파선" 이 신문지상에 실린 것을 보게 된다. 게다가 작가의 이름은 자신이 아닌 "이유상" 이라는 이름이었고, 이 소설의 작가를 찾는다는 광고 문구를 발견한다.
 자신의 작품을 도난당했다는 불쾌감에 화자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광고를 실었다는 여성, "선우진" 과 만나 "이유상" 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선우진의 남편 이유상.
그는 사실 "이유미"라는 여성이었다.  

남장여성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설화들 중 하나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뮬란" 같은 작품이나, 조선시대 "방한림전" 같은 고전문학속에도 등장하고, 그리스, 로마, 이집트 신화속에도 등장한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적, 직업적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어 구별되어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으로 분장한다면, 여성들은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성으로 분장한다.
이는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그리기에 매우 적절한 장치인 동시에, 사회의 맹점을 드러내기에 매우 효율적이다.

 최근 몇년의 한국 문단은 바야흐로 여성문학, 특히 피해문학의 시대로 봐도 무방하다.
수많은 미투 폭로가 쏟아지며 이른바 "젠더권력" 의 추가 급격히 기우뚱거리기 시작했고, 문단도 그에 따라가기 시작했다. 최근 몇년간 이름난 문학상의 수상작들은 대부분 여성들의 피해를 다룬 소설들이고, 사이사이 퀴어 소설이 들어있다. 화제성이 있으면 우르르 몰려가는게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면 특징일텐데, 부디 이번엔 후르륵 끓고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보글보글 끓어 좋은 국물이 우러났으면 좋겠다.
문학은 더이상 대중을 선도하거나 사회를 앞서갈 수는 없다. 정보의 바다는 매일매일 업데이트되고, 대중은 실시간으로 그것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시점에서 재해석되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한박자 늦게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이제 문학의 가장 큰 역할은 문제를 발견하고, 대중들이 알기 쉽게 인식토록 하는 것이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양한 계층이 동감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 최근 한국 문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기조는 그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친밀한 이방인]은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이러한 최근 한국 문학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있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를 거의 배제하고, 피해의식도 거의 발현시키지도 않고, 딱히 여성들의 연대 같은 의식적 고양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충실히 그려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의 오래된 차별은 단순히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이 남성을 이긴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어느날 하루 아침에 모든 남성이 싹 사라진다고 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성 '대결 구도'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인습적으로 규정해온 성역할은 오롯히 동물적인 분류에서 시작됐다.
체격, 근육량, 생리, 임신 등등의 신체적 특징들에 더해 정신이나 의식까지 싸잡아 "여성의 정의" 라는 프레임에 가두었다. 다른 수많은 차별들과 마찬가지로. 사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남녀의 신체적 특징들은 거의 다 상쇄되었다. 물론, 아직도 신체적 특징이 유리하게 작용되는 면이 있지만, 그런 부분들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반 동물적', 즉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남녀간의 성대결이 아니라, 소통과 타협,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하는데, 아직은 서로가 등을 돌리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친밀한 이방인] 은 매우 훌륭한 통역사와 같다.
이 작품 안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고, 서로를 돕는 동시에 상처를 준다. 남성, 여성의 차이는 없다. 오직 사회와 삶 자체가 부조리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선사하며, 그 안에서 순응할지, 극복할지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다.
 
 [친밀한 이방인] 은 작가인 화자가 쫓는 이유미, 또는 이유상의 다채로운 인생역경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면을 날카롭고도 충실하게 담아낸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제법 정교해 보이는 인간의 공동체의 얄팍함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꽤나 부유한 축에 속하는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이유미는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사회의 변두리로 점차 밀려나기 시작한다. 부족할 것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고교 졸업 후부터 삶이 수렁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한다.
대학에 떨어졌지만, 붙었다는 거짓말을 시작으로 이유미의 삶은 거짓에 거짓이 붙어 한없이 부풀기 시작한다. 두 번의 결혼과 파혼이 있었고, 큐레이터부터 간호조무사, 의사, 작가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커리어는 의사라는 엘리트 직업에까지 이르렀고, 남편들과의 결혼생활들은 이유미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순간마다 박살났다.
하지만, 이유미는 쉽게 낙망하지 않는다. 끝끝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또 새로운 서류로, 신분증으로, 명함으로 마치 변검의 배우처럼 자유롭게 탈을 바꿔 쓰며 삶을 살아낸다. 이 모습에서 나는 꽤나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은 대단히 치밀하게 짜여져있다.
적절한 생략과 압축이 매우 효율적이고 적재적소에서 활용되어서, 전체적인 볼륨이 작은 작품이지만, 내러티브가 매우 풍성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유미의 삶을 쫓는 화자가 이유미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물론 이런 기법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남발되면 오히려 이야기가 산만해지고,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어려워진다. 때로는 작위적이기까지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매우 잘 활용되었다. 이유미의 탈이 주변 인물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과연 "나" 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작가의 통찰력이 느껴졌다.
많은 거짓들을 스스로 쌓아간 이유미이지만, 뜻밖에, 마지막 거짓말은 선우진의 오해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소설적으로 매우 휼륭한 접근이라고 느껴졌다.  

인간이 얼마나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애초에 '주도적' 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 조차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살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 아니냐, 고 반문할 수 있지만, 나는 자살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사회에 의해, 혹은 마음의 병으로 인해 타살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점심 메뉴도,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설계된 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뿐이다. 책상이나 돌멩이를 점심메뉴로 선택할 수는 없잖은가.
지극히 동물적인 틀 안에서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제 아무리 주도적인 선택을 한다 한들, 자연재해나 전염병 한방에 모두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중,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주도적인 삶일까??
이토록 수동적인 삶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친밀한 이방인] 은 이에 대한 작가의 물음으로 읽혔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때론 이성적으로 유리한 것들을 취하며 카멜레온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던 이유미의 삶은 언듯 주도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선택은 수동적으로 읽힌다.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와 남편, 아이를 위해 떠밀리고 떠밀리다가 불륜이라는 선택을 하고, 이혼위기를 맞이한 화자는 수동적으로 쫓기듯 살아갔지만, 마지막 선택은 주도적으로 읽혔다.
마지막으로, 이유미에 얽힌 하나의 반전과, 내 예상을 살짝 빗나간 화자의 마지막 선택이 이 질문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두 인물의 결말이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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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도시 이야기
최정화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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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시에 이 전염병이 발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동휘는 시의 하급 보안/정보 공무원으로, 이 병에 관해 중앙 정부에서 주관한 집체 교육에 참가했더랬다.

병의 이름은 '다기조' 병. 피부가 하얗게 말라붙는다 해서 '다기'(daggi 동물의 보호용 껍질) 발병한 뒤, 병증이 진행되고 말기 증상까지 이겨낸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옮기 뒤에야 완치가 된다고 해서 '이조'(izo, 스스로 소멸되지 않고 이동함으로써 숙주를 떠나는 전염의 방식)라는 이름이 붙었다. 

 진행과정은 나름 정연했고, 병의 진행과정은 거의 동일했다.

불규칙한 과호흡 -> 가벼운 건망 증세 -> 갈증 -> 기침 -> 단기 기억상실, 허언증 -> 이상 음성 -> 신체 말단 근육 소실 -> 청색증 -> 자기 인식 불능 -> 신체 말단 부위의 각질화.  

 전염 과정은 불명확했다. 병자와의 접촉이 전염 요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으나, 어떻게든 전염된다는 사실 역시 확실했다.

병은 대체적으로 신체 말단 부위가 각질화 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끝났다. 걸리면, 신체 말단 부위를 반드시 잃게 되는 무서운 전염병. 남는 것은 '영구한 기억 손상'과 그에 따른 일종의 '현실 재인식'.

그 어떤 대책도 속수 무책이었고, 결국 중앙 정부는 병의 진원지라고 판단한 L시를 봉쇄하기에 이른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갈증과 기침 단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티가 났다. 그리고, 결국 L도시는 기억을 잃은 사람들과 하얀 각질로 뒤덮인 사람들로 가득 차다가, 결국 신체 말단 - 주로 손 - 을 잃은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동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딸을 잃고, 뒤이어 다기조에 걸린 아내가 손을 잃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전에- 이혼을 하게 되고, 결국은 동휘 역시 다기조에 걸려 하얀 석고처럼 손목에서 떨어져내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의 중요한 테마는 두가지다.

우선, '기억' 이다. 다기조병에 걸린 환자들은 손을 내주고, 기억을 잃게된다. 다기조 환자들은 처음엔 자신이 아이를 어디에 두었는지 잃어버리고,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아이가 있었다는 기억조차 잃어버린다. 많은 아이들이 실제로 다기조로 사망한다. 그리고 부모들의 상실감 또한 다기조로 잊혀진다. 그렇다면, 이 병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소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는 설정들이 눈에 띄는데, 결국, 이 병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메타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다 상관 없게된다.

기억은 한 사람을 구성하는 기본이자 전부다. 타인은 언제나 나의 경험과 그로 인해 쌓은 기억이라는 필터를 통해 마음속에 저장된다. 그것이 편견이건, 오해건, 이해건, 나를 아는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100명의 마음 속 '나' 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정보-직업, 출신지, 출신학교, 토익, 토플성적, 연봉, 가족관계 등등- 와 어우러진다.  

결국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기조병을 앓고 난 사람들은 결국 이 모든 기억이 무의미해지므로, 종이에 기록된 정보를 통해 타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외부의 정보에 지극히 민감해지고, 언론과 대중매체에 쉽게 현혹되게 된다.

기억을 통해 쌓은 타인에 대한 경험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역시 저자가 은유하고자 한 대상이 어떤이들이었는지 제법 명확히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의 두번째 테마인 '상실' 이다.

우리의 기억에 가장 강렬히 남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상실' 이다.

어렸을 때 한번이라도 부모님 손을 놓쳐 길을 잃어 본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 경험은 굉장히 오래 남아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정도가 된다. 애완동물을 떠나보내거나 잃은 기억, 열심히 모은 용돈을 잃어버린 기억, 친한 친구와 헤어지거나, 사별한 기억....

사소한것부터 중요한것까지, 상실의 경험은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기조' 는 손이나 발을 대가로 기억을 앗아간다.

그리고 다기조병으로 아이를 잃은 L시의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다기조는 저주라기보다 축복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이 두 테마가 가장 극적으로 맞물리는 순간은 동휘가 병을 이겨내고 딸의 죽음을 기억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독자들에게 동휘의 상황을 명백히 알려줌에도, 이 장면에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지하철에서 읽다가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흔히, 가족을 잃는 경험을 '수족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 는 표현을 하곤 한다.

'다기조' 라는 병은 이 오랜 말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손발을 떼어주고, 아이를 잃은 기억을, 나아가 그 당시의 주변 인물들을 모조리 잊을 수 있다면, 많은 부모들은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 저자는 이 두가지 테마를 통해 '세월호' 를 끌어올린다. 

어느새 우리 사회가 잊어가는 참사와, 여전히 잊지 못하는 유가족들. 

어떻게든 수면 밑으로 끌어 내리려는 세력들과, 어떻게든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세력들.


 서사는 치밀하고 균일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맛이 상당하다. 

화자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과 잃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겹쳐지며 과거와 현재, 왜곡된 기억과 진정한 현실이 끈적하게 달라붙는데도, 서사가 치밀하다고 느낀 이유는 감정의 흐름이 일관적이고, 캐릭터의 변화가 체계적이기 때문이다. 

불규칙하게 들쭉날쭉하는 왜곡된 기억과 진실이 그물처럼 촘촘히 조직되어 있어서 잠깐 집중력을 놓치면, 바로 앞페이지의 내용과 뒷페이지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런 연결성의 단락들을 통해 화자의 정신적인 상황을 적확하게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게 된다. 

모든 인물의 변화에는 이유가 있고, 과정이 있어서 인과가 명확하다. 

이 때문에 인물들이 다소 리얼하지 않은 느낌-작위적이기까지 한-이 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에 통일성을 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고 나면 그 이유가 납득이 간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소재와,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화자의 왜곡된 기억 안에서는 평안하고 안온한 느낌을 주지만, 진실 앞에서는 불안하고 위화감을 준다.  

왜곡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달콤하고, 편안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언론의 말을 믿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지금도 그러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그게 '통합' 이라고. 무조건 자기들을 믿고, 자기들을 따르라며.

반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말하라고. 다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공평하고 평등하게 댓가를 치뤄야 한다고.

'통합' 을 외치는 쪽에서는 이걸 '분열을 조장한다' 며 비난한다.

이거 왠지, 중국 정부가 홍콩 프리, 를 외치는 이들을 탄압하고 압박하는 장면 같지만, 어느쪽이 더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지, 공산주의에 가까운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다 잊고, 묻자고. 좋은게 좋은거 아니냐고.

그러면, 모든게 편하고 안온해진다고.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파헤치며 들추는 이들에게 말한다.

일제 강점기도, 그 당시의 성노예와 육체노역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한국전쟁때 학살당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군홧발 아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람들과 자유를 외치다 머리가 터져 죽은 사람들, 참혹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스스로의 살갗을 불에 태운 사람들, 생떼같은 자식들을 바닷속에 수장시킨 부모들에게 말한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고. 좋은게 좋은거라고. 다 잊고, 묻으라고.

이제 그만 들추라고. 


진실은 언제나 시끄러운 법이다.

'인권' 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17세기다. 고작 400여년에 불과한 개념이다.

그 이후 계몽주의가 태동했고, 비로소 '평등' 과 '자유' 라는 이념이 등장했다.

절대왕정 시대, 인류는 얼마나 '통합' 되어 있었는가?

보통사람들은 얼마나 '닥치고' 살아왔는가??

인류가 그래도 나름 평등한 발언의 기회, 표현의 자유를 얻기까지 문명이 탄생하고 수천년이 지나서야 가능했고, 아직도 완벽히 자유롭진 못하다.

별로 오래 전 일도 아니다.

진정한 현실은 원래 시끄러운 법이고,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개념은 "표현의 자유" 다.


이 작품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잃고, 정부의 선전에 호도되어가는 사람들은 마치 나치 히틀러를 연호하는 군중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현상이 아니라, 그 상황과 현상을 자기 입맛대로 한두마디로 정리한 하나의 '의견' 에 수렴되는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아이콘은 언론이다.

전제군주 시대의 평민들처럼 언론들이 어떠한 한 집단, 한 단체에게 굽신거리게 된다면, 그 언론은 더이상 가치가 없어진다.


이 작품 속 다기조병 환자들처럼 말이다. 


대중도, 사람도, 언론도, 그리고 정부조차도 "모두 없었던 일" 로 치부해버린 일.

그 일을 기억하려는 사람을 도시 외곽으로 몰아내고, 격리시켜, 그 사람들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

우리 사회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가까운 일본만 봐라.

모든게 '오해' 라고 하지 않나.

엄청난 돈을 쏟아 피해자들을 왜곡하고,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우고 있다.

인간의 수명 앞에서 기억은 왜곡되고, 돈 앞에서 역사는 조작되는 법이다.


"역사는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 

우리가 함께 기억할때 가치를 지닙니다."

우토로 마을을 향한 아름다운재단의 홍보 문구다.


이 책은 결국 세월호를 향한 이야기이지만,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있다.

진실은 시끄럽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로운 법이다.

힘센 자 옆에 빌붙어 기생하며 호도하고, 왜곡하는 일은 쉽고, 배부르고, 안온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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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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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경주의자인 한아는 절친인 유리와 '환생' 이라는 공방겸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월세를 함께 내고 있지만, 분야는 서로 달랐다. 유리는 미술 관련된 작업을, 한아는 주로 옷 리폼 등 옷을 재활용 하는 작업을 하곤 했다. 기혼자인 유리는 오랫동안 한아와 연애중인 경민을 탐탁치 않아 했다. 유리의 눈에 경민은 절친인 한아가 마음 붙일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마음 내키면 지 멋대로 한아를 홀로 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경민은 누가 봐도 성실함과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한아 역시 반쯤은 정이었고, 반쯤은 관성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헤어질 정도로 마음이 식은 건 아니었다.  
 그 날도 경민은 캐나다 유성우를 보러 다녀오겠다며 연인인 한아에게 상의도 없이 혼자 여름휴가를 써서 훌쩍 떠났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헌데,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경민은 지금까지 한아가 알던 경민과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좀 더 다정다감해지고, 식성도 꽤 변했을 뿐 아니라, 한아가 강조했던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등 환경문제에도 제법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였다. 제법 말이 통하는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별했던 건, 입에서 정체모를 녹색 빛을 내뿜었다는 사실.


 

아서 클라크와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세례를 받고, 어슐러 르 귄과 필립 딕을 영접한 후, 엑스 파일과 맨 인 블랙, 닥터 후의 영향권 안에서 자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작품이었다.
곳곳에서 반짝이는 SF적 장치들이 이 영향권을 느끼게 해주었고, 이야기로 엮어내는 과정은 재기넘치진 않았지만, 발랄하게 통통 튀었다. 인물 한명 한명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고, 또렷하게 흘러나오는 메시지도 참 좋았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거의 모든 장면에서 서로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들을 배치한다.
자기 멋대로 훌쩍 떠나버리는 경민과 한 곳에 앉아서 옷을 수선하는 한아, 매사에 합리적이고 냉철한 유리와 우유부단하고 정이 많은 한아, 오직 한아만을 바라보는 달라진 경민과 경민을 의심하는 한아, 국정원 직원으로 룰에 얽매인 수동적인 엘리트 정규와 아이돌인 아폴로의 덕질로 일생을 보내는 열정적인 주영.
이 작품이 시종일관 통통 튀는 느낌을 주는 이유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캐릭터들이 다소 스테레오 타입이지만, 다채롭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서로 상반된 인물들을 꾸준히 한 장면 안에 담아내면서 끊임없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짧은 소설이지만, 풍성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캐릭터의 설정이 치밀해서 내러티브가 풍성하기도 하지만, 작가가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서 절제하지 못했다는 느낌도 있다. (작가 후기에서 그 이유가 다소 드러난다. ^^)
이야기가 치밀하게 직조되지 않았다고 썼지만, 인물들의 배치 만큼은 매우 영리했다.


나는 이 작품의 초반과, 후반을 매우 좋아한다. 중반은 ,'보통' 이었다.
몸의 일부가 광석으로 만들어진 외계인인 돌아온 경민은 물리적 법칙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다.
초반에 외계인 경민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고, 한아에게 다가서는 과정들은 재미있었지만, 외계인 경민과 한아가 본격적으로 연애하는 과정은 다소 김이 빠졌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그 능력을 이용해 지구에서의 부를 쌓아 생활에 편의를 더해주고, 나아가 우주 곳곳을 구경시켜주며, 부모님께 잘하고, 한아가 바라는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공유하는 등의 과정들은 딱히 외계인 완벽남이 아니라, 보통 로맨스물에서 등장하는 완벽남의 전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기사, 이 소설도 맥락은 로맨스 장르물이니까...
개인적으로는 육체가 있는 종족과 육체가 없는 종족의 컬쳐 쇼크급 갈등들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외려 더 완벽한 지구인 남자와의 연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지구에서 사는 동안 가지고 있어야 하는 보디슈트가 지구인형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상상력을 발휘할만한 부분이라고 느껴져서 이런 평이한 러브 스토리가 다소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이 부분에서 완벽한 부인을 만들어 낸다는 [스텝포드 와이프] 같은 작품이 연상되기도 했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 꿈꾸는 이성상은 결국 맥이 통하는 것일까, 싶기도.
각자가 다 자신에게 맞춰주는 이성을 꿈꾸는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오직 여성이 남성에 순종적일 것을 강요하는 사회였으니, 여성들이 그 반대를 꿈꾸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고.
결국 , 남성중심 사회인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그런 이성과의 만남은 '외계인이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꿈' 이라면, 납득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주영' 이란 인물이 그래서 이 작품 안에서 가장 특별한 요소이기도 하다. 외계에 광석 외계인 경민이 있으면, 지구엔 주영이 있다. 외계인 경민이 한아를 위해 2만광년을 날아왔다면, 지구인 주영은 아폴로를 위해 2만광년을 날아가는 여성이다.


이와 맞물려, 인간인 경민과 외계인인 경민이 대치하는 장면은 백미라고 보였다.
작품 안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기도 한데, 돌아오지 않기를 바랬던 한아, 최후의 최후에 봉착해 가장 '아쉬운 순간' 자신의 안식할 수 있는 인물에게 찾아온 인간 경민, 오직 한아만을 바랐고 모든걸 한아에 맞췄던 외계인 경민의 삼각 구도는 '인간' 와 '외계인' 의 테마가 가장 극명한 지점이었다.
마지막까지 인간 경민은 이기적인 남자였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외계인 경민은 그 누구보다 순애보적이고 이타적인 존재였다.

한편으론, 병들어 죽어가는 인간 경민을 보며, 인간이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어가니까.
외계인 경민은 광석으로서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평화로울 수 있을지도, 그렇게 이타적일 수 있을지도, 그렇게 완벽한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강렬한 클라이맥스는 사족처럼 붙어있지만, 이 다리를 통해 뱀은 도마뱀이 되었다.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 소설은 매우 다른 두 편의 소설이 된다. 어느 쪽이건 각자의 취향에 따르면 될 터.


에필로그는 마치 마블 영화의 쿠키영상처럼 붙어있다.
내용도 딱 그와 같다.
개인적으로는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최종 진화에 실패한 외계종족 오버로드의 도움으로 최종 진화의 대상으로 선택된 지구인 아이들이 무너져가는 지구에서 건져올려지는 장면. 이제는 내 아이도 아닌, 나아가 지구인도 아닌 아이들을, 최후의 지구인이 바라보는 그 마지막 장면.
한아는 유리와 유리 남편과 함께 광석 외계인 경민의 선택을 받았다.
아마 이제 한아는 경민의 진짜 이름을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육신을 벗고, 환생한다. 자신이 평생동안 환생시킨 옷들처럼,
아폴로가 노래하고, 주영이 덕질하는 그 영원한 우주에서.
오직 자신만을 영원히 사랑해줄 그와 함께.

 










덧: 이 작품은 절대 SF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사실, 본문에도 적었지만,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딱히 외계인이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외계인은 사실, 신에 가깝다. 그것도 항상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기독교의 신, 수호신, 수호천사 등등.

아주 오래전부터 마치 편재하듯 한아를 바라보고 있었고, 강림하듯 어느순간 갑자기 내려와 한아의 모든 고민을 일소해주고, 지구에서 완벽한 삶을 누리게 생활의 편의를 살펴준다. 

솔직히 대부분의 일들도 지구 안에서의 일이기에, 외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는 다소 떨어진다.

다만, 엔딩 부분의 구도와 에필로그에서 일종의 전화轉化(어쩌면 진화일지도 모르겠으나, 확실하진 않으므로)를 암시하는 장면에서야 외계인을 선택한 당위성을 얻는다. 

어쩌면 작가는 이 후의 이야기를 먼저 상상하고, 앞부분의 연애소설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고, 개인적 취향으로는 작가가 구체화하지 않은 이후의 삶이 훨씬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이 소설은 완벽한 존재와의 완벽한 연애 판타지를 그린 소설이지-특히 여성을 위한-,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다루는 SF의 작법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덧붙인다.

덧: 이 작품은 절대 SF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사실, 본문에도 적었지만,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딱히 외계인이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외계인은 사실, 신에 가깝다. 그것도 항상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기독교의 신, 수호신, 수호천사 등등.

아주 오래전부터 마치 편재하듯 한아를 바라보고 있었고, 강림하듯 어느순간 갑자기 내려와 한아의 모든 고민을 일소해주고, 지구에서 완벽한 삶을 누리게 생활의 편의를 살펴준다. 

솔직히 대부분의 일들도 지구 안에서의 일이기에, 외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는 다소 떨어진다.

다만, 엔딩 부분의 구도와 에필로그에서 일종의 전화轉化(어쩌면 진화일지도 모르겠으나, 확실하진 않으므로)를 암시하는 장면에서야 외계인을 선택한 당위성을 얻는다. 

어쩌면 작가는 이 후의 이야기를 먼저 상상하고, 앞부분의 연애소설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고, 개인적 취향으로는 작가가 구체화하지 않은 이후의 삶이 훨씬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이 소설은 완벽한 존재와의 완벽한 연애 판타지를 그린 소설이지-특히 여성을 위한-,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다루는 SF의 작법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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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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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출판사는 매년 데뷔 10년 이내의 작가들에게 이 상을 안긴다. 2010년, 처음 신설되었을 때는 김중혁, 편혜영, 배명훈 같은 작가들이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이 되었고, 이장욱 같이 새내기 작가는 이후로도 여러번 이 수상작품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후기를 통해 어떤 작가분은 일종의 '장학금' 처럼 받아들였다고 했다. 크게 이름을 떨치기 전, 많은 위안과 응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과 취지에 걸맞게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가들은 정력적으로 집필활동을 한다. 나도 한 3~4회정도 이 작품집을 읽은 것 같은데,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내게 '젊은작가상' 은 일종의 아방가르드와 같다. 최전방에서 앞만보고 질주하는 전위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적을 일격에 때려부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돌격, 또 돌격하는 선봉대. 때문에, 젊은작가상 수상작을 펼칠 때엔 조금은 다른 기대를 갖는다. 이번엔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쳐줄까? 

맨 앞에 실린 작품을 비롯해 인상적이었던 몇 작품의 감상만 옮겨보겠다.


여느 수상작품집들이 그렇듯, 첫 작품이 대상 작품이다.

다만, 젊은작가상은 모든 상의 상금이 같기에, 대상은 오직 대표성을 가질 뿐이다. 그럼에도 '대표' 하기 때문에 조금 더 엄격한 시각으로 보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방가르드한 이 수상 작품집의 맨 앞자리에 선 작품의 첫인상은 살짝 실망스러웠다.

박상영 작가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그 제목부터 너무 참신하고 전위적이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분량은 꽤 된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깝지만, 중편이라 하기엔 단편에 가깝다. 딱 그 중간 쯤의 분량. 

이미 암투병 전력이 있었던 엄마의 암 재발소식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는 상투적이었다. 그와 오버랩되는 과거 연인과의 이야기도, 꽤나 상투적이었다. 거의 띠동갑 정도 나는 연인과의 연애이야기. 화자는 회사를 때려치고 본격적으로 엄마의 병수발을 하는데, 동시에 과거의 연인에게서 몇년만에 연락이 오는 전개다. 설상가상. 엎친데 덮친. 

엄마와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연인과 화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교차되며 진행된다.엄마와의 일화는 화자가 섭섭했던 일들과 괴로웠던 일들, 고통의 기억만이 가득하고, 연인과의 일화는 '우럭 한 점' 처럼, 섭섭했던 일들을 사랑으로 꾹꾹 눌러낸 기억들이 가득하다. 대사나 문장들이 감정에 따라 생생하게 요동친다.

화자가 엄마에게 갖고 있는 미움은 미성년때, 유일한 가족이자 온 세상과 같은 엄마의 행위를 통해 받은 것이고, 화자가 연인에게 받은 감정들은 성인이 된 후,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 두 과거가 오버랩 되는데, 정서가 같을 순 없다. 작가는 그 지점을 명확히 판단하고, 밀도 높고 무거운 두 정서를 능숙하게 분리해냈다. 이는 세 덩어리의 시간대가 불규칙적으로 오가는 이야기의 형식과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정서를 분리시키고, 그걸 문장을 통해 명확히 표현해냈다. 소설적 장치뿐 아니라 문장 가득한 정서를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작가의 기술과 센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소재가 너무 진부한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그에 동의한다.

다만, 진부한 소재를 세련되게 꿰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로 압축해서 보면, 모두 다 진부해 보이기 마련이다. 소설이란 결국, 어딘가 '있을 법한' 이야기이니까. 

진부한 이야기를 진보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인물들이고, 이 작품의 특별한 지점 또한 그곳이다.


 이 이야기는 동성애자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엄마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던 순간, 엄마는 화자를 방학동안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사랑하는 연인 '형' 은 화자에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되묻는다.  낳아준 엄마에게도, 사랑하는 연인에게도 거부당하는 관계. 우리 사회의 관념상 동성애는 없는 개념이기에, 이론적으로 동성애자는 존재하는 않는다. 감정은 그 사람 자체이다. 끊임없이 감정을 거부당하는 삶. 존재를 부정당하는 삶. 하지만, 삶의 주인은 삶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모든 부정의 증거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삭혀야 한다. 그 와중에 정신은 물러지고, 곪아터진다.

가장 사랑했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부정당한 삶의 편린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 안에 녹아있다. 

BL에서나 보던 '퀴어' 가 순문학의 세계, 일상으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진부한 이야기가 진보한 이야기가 되는 지점이었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 속에서 그들이 겪었을 모든 부정.

취업, 직장 상사와의 소통, 엄마의 걱정과 잔소리, 연인과 나누는 대화, 주고받는 손길, 타액, 감정, 오해, 갈등, 편견. 그리고 또 편견. 또, 또 편견, 편견, 그리고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강고한 고정관념. 


엄마의 암 투병에 10살 정도 연상의 래디컬한한 운동권 출신-이라고 쓰고, 꼰대라고 읽는다- 연인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게이를 끼얹은 이야기. 엄마의 일방적인 애착관계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대한민국 누구에게나 짜증나는 법이고, 꼰대는 게이라도 그 근성이 변하지 않는 법이며, 나쁜남(여)자에게 끌리는 취향 역시 성별을 가리지 않는 법인지라 이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신선했고, 신선했지만 짜증났으며, 짜증났지만 읽는걸 멈출 수는 없었다.


현재에 있어 과거란 결코 벗어낼 수 없는 굴레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를 저당잡혀 오늘을 사는 법이다. 과거를 벗겨내는 일은, 모든 인간이 갈망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고, 그 갈망에 대한 모든 실패는 회한이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화자인 '영' 역시, 어머니의 병과 함께 과거의 상처들을 씻어내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화자가 갖고 있는 상처의 깊이는 망각이나 용서라는 개념과는 이미 멀어졌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선택에 회한이 따른다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체념, 밖에 없는 것일까? 

상처만 주었고, 용서할 수도 없는 엄마지만, 화자는 엄마에 대한 미련을,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르는 그 감정을 놓아버릴 수 없다.

'용서하지 않았다' 는 사실을, 끝까지 감추는 것. 그것만이 엄마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작품은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이다. 

이 작품은 SF/판타지 장르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좀비물' '스페이스 오페라' 등과 함께 서브 장르로 자리매김한 '대체 역사물' 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장르는 '팩션' 보다는 거시적인 시각을 자랑한다. 역사의 한 인물과 에피소드를 뒤틀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 전반의 전복을 시도하는 장르다.     

이야기는 1882년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한 영국함의 수병들이 모래사장에서 축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한다. 축구공을 통통 튕기며 시작된 이 놀라운 이야기는 영국의 산업 전반을 강타한 아동노동착취와 세계 축구인들과 스포츠인들을 경악시킨 현대의 동남아 아동노동착취를 거쳐 세계인들의 미래상에 대한 충격을 몰고온 인공지능 무인화 공장까지 짚어간다.  

장르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현실웃음을 빵빵 터뜨릴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치 '포레스트 검프' 처럼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교묘하게 비트는 작가의 패기 넘치는 '뻥' 이 사랑스러울 정도로 능청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축구와 축구게임도 즐기는 나로서는 축구공의 역사와 디자인이 작품 안에서 언급될 때 마다, 머릿속에 공의 디자인들이 되살아나서 제법 풍성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었었다. 무엇보다 더 재미있었던 점은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의 특징인 매 작품 말미에 붙어있는 작가노트와 해설까지도 작품의 일부처럼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뻥' 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픽션' 의 정의 자체가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내 기준으로 훌륭한 작가는 독자를 잘 속여야 한다. 그런 내게 있어 김희선 작가의 [공의 기원] 은 정말 훌륭한 작가의, 신나는 소설이었다. 



책의 말미에 나란히 실려있는 김봉곤 작가의 [데이 포 나이트]와 이미상 작가의 [하긴]은 [우럭 한 점~] 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이 두 작품을 잘 섞으면 [우럭 한 점~] 의 등장인물들의 다른 일상처럼 보일 것 같았다. 

작품의 나열을 누가 했는지, 의도적이었던 것 같았고, 매우 좋았다.

[데이 포 나이트] 는 퀴어 커플의 자기파괴적인 연애담이다. 다만, 이 작품은 보다 '감정' 에 집중했다. 육체는 어떻게 감정을 지배하고, 감정은 어떻게 육체를 제어하며, 시간은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뭉뚱그리는가. 그리고, 작가는 그것들을 어떻게 분리하고, 어디에 담아내는가. 기억들 안에서 시간별로 카테고리를 만들고, 하나씩 분리해서, 감정들을 되살려낸다.

[우럭 한 점~] 과 통한다고 생각한 지점이 이 지점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회한으로 가득한 과거의 연애담을 넘어, 창작 그 자체에 대한 커다란 메타포처럼 읽히기도 했다. 


[하긴]은 자녀의 교육에 매달리는 한 부모의 이야기다. 

딸의 이름은 김보미나래. 이 이름을, 화자인 '나' 는 반대했지만, 아내가 밀어붙였다. 그렇듯, 딸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은 거의 아내에게 있었다. 화자는 아내의 길에 동참했다. 보미나래는 발달이 더뎠다. 화자와 화자의 아내는 대한민국 여느 부모들이 그렇듯 딸의 대학진학에 모든걸 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득하게도, 혼혈 손주였다. 


나는 작품집 전체에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가장 의미심장하며, 가장 단호하고, 가장 많은 것들을 맥락 사이에 숨겨두었다.

김중혁 작가는 소설에서 '무엇을 쓸까, 를 결정하는 것보다, 무엇을 쓰지 말까, 를 결정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으로서의 1인칭은 아내의 일생과 딸인 보미나래의 일생 전체를 뒤에 숨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작가가 쓰지 않은 것, '여백' 으로 남는다. 나는 이 탁월한 여백들을 무수한 상상들로 채워갔는데, 어쩌면, [우럭 한 점~] 이 이 여백들 중 한 칸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아, 문장들을 바라보고, 여백들을 상상하고, 또 문장들을 바라보고, 또 여백들을 상상했다. 

아내의 여백, 보미나래의 여백, 샘의 여백, 화자인 나의 여백. 




+

 그냥 지나치긴 아쉬우니, 언급하지 않은 작품들도 살짝씩 되새기자면, 

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 은 일상의 무료함과 결혼과 육아의 무의미함, 무상함을 되새기게 만들었고, 이주란 작가의 [넌 쉽게 말했지만]은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 의 다른 버전, 또는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 의 변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영수 작가의 [우리들] 은 대담한 불륜 커플에 관한 이야기로,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의 한국버전처럼 느껴졌는데, 파격적인 소재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일 정도로 안온한 엔딩이 조금 아쉬웠다.


++

재미있는 부분은 일곱 작품 중 네작품의 화자들이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들이었고, 여섯 작품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1인칭 시점의 소설들은 대체적으로 사소설의 형식을 띈 것들이 많았는데, 그래선지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한 사람이 차례대로 경험하는 일들처럼 읽히기도 했다. 동성애자들의 연애가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이 두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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