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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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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 지나지 않던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정립한 것은 그다지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기원전 3000년 경에 4대 문명이 발달된 것으로 추측되니, 사회와 국가라는 것이 원시적으로나마 체계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으로 보면 될 듯 하다. 그리고 수천년의 시간동안 인간사회는 거듭 발달해 왔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정신도 점차 깨어나기 시작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다.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거대한 자연의 광포함 앞에서 인간 개개인은 먼지나 모래알. 혹은 개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필연적으로 인간들은 공동체를 이루었으나, 인간은 또한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문명이 발상한 그 무렵부터,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이 이기적인 동물들의 집단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 공동체가 더 안전하고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을까??

그 결과 국가와 사회, 체제가 생겨났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집단을 가장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공포' 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공포는 바로 '죽음' 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길래야 이길 수 없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태생적인 감정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이 근원적인 공포를 가장 잘 활용하는 인간이 인간사회를 통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종교' 였다. 죽음을 담보로 생을 손에 쥐고 있는 '신' 의 존재는 인간을 옴쭉달싹 할 수 없게 옭아맬 수 있었다. 고대 문명의 통치자는 제사장이었다. 중세 문명의 통치자 역시, 왕보다 높은 교황이었고, 그들의 권력은 현대문명까지도 이어져 내려온다.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이르게 만드는 거대한 폭력이다. 폭력에 대한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닿아있다. 폭력적인 사람에게는 권력이 있다. 종교와 폭력은, 그렇기에 뗄레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공포와 함께 활용되는 또다른 수단은 바로 '욕망' 이다.

인간이 아무리 지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인간 또한 동물이기에 본능을 거스를 수 없다. 본능적인 욕망 중 가장 강렬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식욕과 성욕, 그리고 권력욕일 것이다. 식욕과 성욕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지배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권력욕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컷 원숭이들은 우두머리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권력이 있어야만 안정적으로 식욕과 성욕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의 정점에 선 인간은 사회를 통치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식욕과 성욕을 제공하고, 권력욕을 억제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돈' 이다.

 

'1984' 의 세계는 철저하게 공포로 대중들을 통치하고 있는 사회이다.

'오세아니아' 국가 정부는 대중들을 조종하기 위해 온갖 것들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공포를 주입시킨다. 그리고 통치자인 '빅브라더' 를 신격화 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한다. '신' 이 언제나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공포와 적들이 끊임없이 국가를 위협하고 있다는 공포. 이 두가지의 거대한 공포가 대중들을 마비시킨다. 이 공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정부는 끊임없이 언론을 조작하고, 역사를 날조한다. 대중들을 선동하고, 정보를 차단한다.

 

1984에 등장하는 세계는 크게 세 덩어리로 나뉘어 있다. 먼저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는 '런던'. '영국 사회주의' 를 기반으로 성장한 '오세아니아'.

그리고 '동아시아' 와 '유라시아' 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두 나라 역시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로서 통치 방식은 오세아니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84가 그려내는 세계관은 너무나 설득력 있어서 소름이 쫙 끼칠 정도이다. 작품을 잘 읽어보면 동아시아는 중공 시절의 중국이 아시아를 통일했다면 가능했을 터고, 유라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이 세를 확장하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내전이 공산주의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품속의 오세아니아 정부가 인민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우리가 이곳 저곳을 통해 들어온 북한의 모습과 지나치게 닮아있지 않은가.

 

인간은 그다지 대단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고통에 약하고, 공포에 약하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싶은 것만 본다. 믿기 무서운 것은 믿지 못하고, 보고싶지 않은 것은 못 본 것으로 해버린다. 작품속에서 등장하는 '이중 사고' 는 실제로 우리도 우리 세상에서 똑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진실을 거짓이라고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한 통로만을 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수백개의 통로를 낸다. 거짓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통로 한개만 있든, 거짓과 진실이 뒤섞여 있는 수백개의 통로가 있든, 예나 지금이나, 작품속의 세계나 현실 세계나 대중들은 기만당한다.

윈스턴 또한 희망과 의지, 사랑까지 포기하게 된다. 고통. 그리고 공포. 그 앞에서 인간의 신념이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만도 못하다. 끊임없는 고통과 공포 앞에서 두개가 세개로 보이는 세뇌의 순간을 경험한다. 

 

'1984' 는 절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물 속에서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는 처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그 이야기는 그야말로 너무나 현실적인 동시에, 너무나 끔찍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힘들 정도이다. 무료함, 권태로움,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상실, 배신, 그리고 또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이런 것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와 자유, 시간들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 누리고 있는 작은 자유. 수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자유. 그것들은 우리가 누리고 지켜가야 할 소중한 것들임을 알려준다.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1984의 빅브라더 체제의 오세아니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단순한 신상정보 뿐 아니라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투를 쓰는지, 어떤 친구들과 친한지 클릭 몇번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정부나 해커들 뿐 아니라, 보이스 피싱으로 사기를 치고 물건을 팔고, 매춘을 하려는 무리들에게 까지 낱낱히 공개 되어있다.

게다가 우리는 실제로 북한과 전쟁중이지 않은가?? 정부는 보다 더 수월하게 대중을 조종하고 기만할 수 있다. 끊임없이 미국의 911 테러 조작설이나 천안함 피폭사건 조작설이 흘러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정 자유로운 국가라면 대중들이 정부에 대해 끊임없이 요구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요구에 최선을 다해 부응해야 한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결국 사회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이유는 촘스키 같은 살아있는 양심의 발언을 가로막지 않고, 그런 촘스키의 국외 추방을 주장하는 또다른 시민단체의 활동 또한 가로막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대통령을 비난한다고 사법기관의 힘을 동원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1984' 의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빅브라더의 영국 사회주의나, 대한민국 MB민주주의의 본질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자유는, 바로 '비판' 의 자유이다.

옳고 그름을 신념에 따라 구분해서, 그것에 맞게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세상을 통찰하는 능력.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

 

눈을 뜨고, 귀를 열고. 거짓들 속에서 진실을 구분하는 능력. 정부와 언론에 기만당하지 않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수만가지의 정보들 중 진실은 1%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사회를.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는 바로 그것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아 그래 난 자유로워~ 난 그냥 이렇게 거짓은 거짓이라고 믿고, 하루는 하루대로 즐기며 살꺼야~' 라고 해도 된다.

그것 또한 당신과 나의 자유일테니.

하지만, 그런 자유를 선택한다면 빅 브라더에게 감시당하는 삶을 사는 윈스턴의 하루와 다를 것이 없을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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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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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먼저 개인적으로 정신없이 이야기를 줄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미스테리나 스펙타클한 장르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는 점을 명시해야 하겠다. 특히 최근 유행하는 기욤 뮈소 작가 풍의 헐리웃 식 간결하고 빠른 묘사, 이야기가 주로 주인공의 행동과 대화만으로 진행되어 나가는 작품들은 더더욱 피하고 있다. 물론 일본 장르문학도 마찬가지. 한 때는 정신없이 심취한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작가가 '자, 나만 따라와!' 라는 느낌의 작품들에 치였다고 할까, 지쳤다고 할까, 질렸다고 할까.

 

[언노운] 은 위에 언급한 모든것들의 총 합이다.

작가는 마치 작정한 듯, 독자들을 정신없이 자신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이런 류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미덕은 '흡인력' 일 것이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사건들,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물들, 실마리들. 대화, 혼잣말, 대화, 혼잣말.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책을 손에 드는 순간 좀처럼 내려놓지 못 할 것이다. 두께도 200페이지 정도이기에 부담없이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길 수 있을것이다.

 

일단, 이 작품의 스토리나 인물, 반전 등에 대해서는 딱히 트집잡을 만 한 구석이 없다. 이미 영화로도 나왔듯이, 이 작품은 아주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뛰어난 발상으로 절묘하게 서사를 뒤틀고 식물에 관한 최신 과학을 소재로 버무려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영상보다는 글과 상상력이 조화되어야 더욱 큰 즐거움을 줄 터이다.

 

이야기는 무척이나 황당한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큰사고를 당하고, 코마의 세계를 헤맸던 우리의 주인공 마틴 해리스. 마틴은 간신히 혼수상태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로 찾아간다. 하지만, 그 곳에서 자신이 '마틴 해리스' 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사내를 만나게 된다. 신분증도 없고, 아내조차 자신을 모른 체 하는 상황.

마치 몰래 카메라인 듯 한 이런 엉뚱한 상황속에서, 마틴은 자신이 '진짜 마틴' 임을 증명해야 한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

실존과 실증. 이것은 분명한 서양 철학의 기본이다. 동양 철학에서 '나' 는 꼭 '나' 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동양 철학에서 자아란 무의미한 것이다. 자아는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다르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을 뚜렷히 구분하기를 바랬고, 그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자아였다. 동양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그저 스스로 그러할 뿐이었지만, 서양에서는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찾아야 했고, 증명해야 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증명할 필요성을 재미있게도, '종교' 때문에 느끼게 되었다. 난 모태신앙 크리스천이다. 어렸을 때 죽은 사람은 모두 천국에 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궁금증은 '그럼 그 사람의 외모는?' 이었다. 할아버지는 늙어서 돌아가셨고, 나는 어린 아이인데, 죽으면 어떤 모습으로 천국에 갈까? 만약 모두 젊은 모습으로 간다면. 나는 본 적도 없는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젊은 모습을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였다. 그리고, 과연 그들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

나중에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금씩 의문은 확장되어 갔다.

그곳은 영혼의 세계라서 외모가 없다고 하더라. 그리고, 과거의 기억도 없다고 한다. 고통과 미움, 분노, 슬픔같이 마이너한 감정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잠깐. 근데. 그럼. 그게 나야? 외모도 없고, 과거의 기억도 없고, 내가 느끼는 감정들도 일부분만 남아있는데. 그걸 정말 '나' 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불교의 윤회사상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내 영혼이 만약 윤회해서 다시 사람이나 동물로 환생한다고 쳐도, 내 지금의 삶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싹싹 지워지는 것이다.

즉, 다음 생에 태어나는 '나' 는 절대로 '나' 가 아닌 것이다. 내생의 '나' 가 현세의 '나' 라는 증명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완벽히 다른 개체가 되는 것이다. 과연  그것을 '환생' 이라고 말할 수 있는건가? 내가 지금 이 생에서 좋은 선업을 쌓아도, 결국 남 좋은일 하는거다. 아니,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그럼 저기 저 아기가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말? 아니, 저 고양이가, 아니 저 바퀴벌레가, 아니 저 하루살이가.  

 

결국 나에겐 사후세계도, 윤회도 모두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의 나?

지금은. 솔직히 천국 가는 것도, 다음 생에 태어나는 것도 모두 무無 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마틴 해리스가 맞닥뜨린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사회와 시스템에 대한 의심은 굳건한 자기신뢰를 바탕해야만 가능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마틴 해리스' 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해야하는 과제는 그 확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마치 수학공식을 증명하는 것처럼, 여러가지 변수들을 집어넣고 수학적 지식을 총 동원해서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공식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의심, 명제 자체가 거짓이라는 의심을 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해리스는 쓰나미와도 같은  거대한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이 작품의 백미는 바로 그 부분이다.

마틴 해리스가 세상의 시스템에 대한 의심에서 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넘어오는 부분.

작품속에서 그 부분은 복잡다단한 뇌에 대한 과학적인 정보들과 각종 식물학적 정보들이 뒤엉키는데, 정말 이해하기 쉽게 풀어 있으며, 이야기 자체에 대한 흥미는 물론 제공하는 정보 자체에 대한 흥미도 잡아끈다. 이 책을 읽고 '뇌' 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그만큼 이야기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꽤나 방대하고 딱딱한 정보들이 유연하게 녹아들어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 마틴 해리스의 심리에 대한 묘사도 뚜렷하다. 과학, 초자연, 심리가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의 스릴을 제공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 이후 찾아오는 클라이맥스가 오히려 좀 편안할 정도였다.

 

모두가 입을 다물어야 할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클라이맥스 대목만 떼놓고 봐도 완성도가 높을 정도로 대단히 다듬어져 있다.

아마 이 작품을 읽으신 독자들은 책의 나머지 5분의2. 즉, 절정을 지나 위기-결말로 이어지는 두 단락에 작가가 모든 심혈을 기울였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봐도 대단히 공들였음이 느껴지는 완벽한 클라이맥스. 충분히 박수 받을만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간만에 만나본 심리 스릴러.

유럽의 장르소설은 확실히 헐리웃의 장점을 현명하게 끌어내 상당한 시너지를 만들어 냈음은 분명하다.

유럽문학 특유의 미장센이 듬뿍 녹아들어있는 문장에 적당히 녹여내는 철학과 전문적인 정보들. 덧붙여 헐리웃 식의 스피디하고 박력 넘치는 묘사는, 인물 자체에 대한 묘사에 수십페이지를 할애하며 '캐릭터 정립' 에 공들이던 지루함을 효과적으로 무장해제시켰다. 개인적으로는 보다 디테일 해도 되었을 부분들. 즉, 분량을 더 길게 가도 좋았을 부분들이 많이 보였다.

최근의 유럽 장르문학은 지나치게 스피디하고, 간결하다. 마치 일본 장르문학을 보는 듯 할 정도이다.

오히려 최근엔 미국쪽 장르문학이 훨씬 더 하드한 느낌이다. 국내에 그런 작품들만 소개되서 그런걸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무튼, 이런 점들은 완벽하게 개인적은 취향이고. 이 작품은 정말 잘 읽히는 작품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별점은 서두에 언급했던 개인 취향 때문이니 참고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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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마음 2011-03-0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노운 리뷰를 보다 서재까지 와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서재에서 몇 권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공감하는 부분이 참 많네요.^^

열혈명호 2011-03-15 23:56   좋아요 0 | URL
와~ 감사합니다. ^^
리뷰를 보고 그 내용에 공감이 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되게 반갑죠!!
제 서재는 참 방문자들이 없는 편인데, 작은마음님의 댓글에 마음이 포근해지네요. 작은마음이지만 따뜻하시군요.
 
꿈의 도시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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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공중그네' 등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오쿠다 히데오는 사실 정통 리얼리즘 작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그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코믹한 캐릭터인 '이라부' 의 강렬한 인상과 시덥지않은 글빨로 진정한 오쿠다 매니아들에게만 읽히는 몇몇 에세이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가볍고 코믹할 뿐, 그의 단편들이나 근작인 '올림픽의 몸값' 만 봐도 그가 일본에서도 보기 드물정도로 정통적인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작가임을 알 수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사실 출판 마케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일례로 '마돈나' 같은 작품집의 작품들을 봐도 그의 작품속은 현대의 일본사회를 살아가는 인본인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꿈의 도시' 는 제목에서 풍기는 환상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너무나 평범하고 리얼한 현실 그 자체가 녹아들어 있다.

작품은 유메노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명의 등장인물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30대의 이혼남 '아이하라 도모노리'. 유메노시의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국가 보조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도시 빈민층을 상대로 보조금을 타러 오는 사람들의 서류를 심사하고 상담을 하며 그들이 보조금을 받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일을 하는 하급 공무원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구보 후미에'. 부모님과 남동생이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고, '가토 유야' 라는 전직 폭주족 출신의 20대의 세일즈맨이 그 다음으로 등장한다. 유야 역시 이혼남으로 전처가 자신의 아들을 키우고 있다.

'호리베 다에코' 는 유메노시 유일의 대형 마트인 '드림 타운' 에서 일하는 사설 경호업체의 파견직원이고, 40대의 독신여성이다. '사슈카이'라는 종교에 빠져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야마모토 준이치'. 2대째 유메노시를 터전으로 사업과 정치를 하고 있는 유지로서 자신도 2대째 시의원을 해먹고 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가 있으며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야쿠자 출신 형제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0대부터 50대까지, 유메노시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다.

나이도 직업도 주변 인물들 마저도 상이한 이 5명의 인물들이 맺고 있는 거미줄과 같은 인맥은 정말 절묘하고 촘촘하게 짜여져 있어서, 전혀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배치가 절묘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연관되어 있지 않은 듯 해 보이지만, 이 5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지나쳐 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리얼함은 현대 사회의 수많은 문제점들을 적확하게 잡아서 이야기 속으로 완벽하게 녹여낸 부분일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인물들의 직업처럼, 이 작품은 도시 빈민층 문제, 교육문제, 청년 실업과 심각한 정경유착과 불륜과 매춘 등 성도덕 불감증 등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점들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일찍부터 지방자치가 발달한 일본이 안고 있는 지역 경제 침체의 고착화, 종교의 천국이라는 별명답게 여기저기 판치고 있는 사이비 종교에 관련된 문제, 유독 솔로, 싱글문화가 발달하여 프리터,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등 일본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도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것들이 너무 리얼하고 효과적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문제라면 문제랄까.

유메노시의 겨울 한 계절동안 일어나는 이들의 어두운 일상들이 가슴 깊이 내려앉는다.

 

지난 '올림픽의 몸값' 에서는 작품 안에서도 유독 많이 나왔던 '진흙' 이라는 단어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였다면, 이번 '꿈의 도시' 에서는 '추위' 이다. 마침 한국에서도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데, 작품속 도시인 유메노시 역시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치는 중이다. 기록적인 추위와 눈 속에서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메마르게 얼어붙는다.

 

전에 다른 작품의 감상문을 통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자본주의, 자유주의는 가장 인간의 욕망에 부합하는 사상이었다. 효율적이냐 아니냐는 차후의 문제이고, 인간의 욕망에 가장 부합되는 사상이었기에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인 것 뿐이다. 자본주의과 자유주의가 인류사회에 뿌리 내린지 고작 몇백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는 어느덧 슬슬 한계에 접어들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주주의 선진국인 유럽사회는 계급의 고착화가 이루어져 봉건사회와 다를 바 없는 구조가 여전히 이뤄지고 있고, 우리 사회에서 윗 계층으로 올라간다는 건 그때만큼이나 꿈과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부는 혈연을 따라 고스란히 세습되고, 가난 역시 그대로 세습된다. 자본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의 말로는 이런 것이다. 경제성장은 둔화되어 한계를 보이고 있다.

곧 우리 사회는 썪어가는 물이 될 것이다.

정경유착과 부패는 심화될 것이고 세계는 글로벌 기업이라고 불리우는 소수의 대기업에 의해 좌지우지 될 터다.

 

아마 마르크스는 이런 세상을 예측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사회 속에서 개인은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민주주의' 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는 사회의 모든 활동에 돈이 든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결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되어있는 우리 사회에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돈이 없으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행복추구의 권리는 물론 생존의 권리조차 돈이 없으면 아무렇지 않게 무시되는게 현대 사회이다.

한국과 일본의 사회 발전사는 쌍둥이 처럼 닮아있다. 지금 일본이 보여주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은 10년안에 우리도 동등하게 맞닥뜨린 문제들이란 의미이다. 한국은 일본이라는 거울이 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그대로 되풀이하며 그 부작용들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소위 '장르문학' 들은 이야기의 중심이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경우가 많다.

오쿠다 히데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등을 비롯한 일본문학들의 인기나 마이클 코넬리, 제프리 디버 등의 인기도 국내 독자 사이에 불고 있는 장르문학의 붐 덕택이기도 하다. 때문에,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손에 드는 독자들 대부분 또한 그런 속도감 있는 '사건 전개' 를 기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올림픽의 몸값' 에서 보여졌듯 그는 더이상 그런 엔터테인먼트 소설에 큰 관심을 두고있지 않다. '올림픽의 몸값'은 제목 그대로 테러범과 형사 사이에 벌어지는 서스펜스 스릴러 처럼 보여지지만 플롯이 사건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 위주로 그려진다. 사건 자체에도 일련의 트릭과 재미요소가 충분하지만, 지면의 대부분은 '왜' 테러범이 이런 테러를 하세 되는지 그 심경의 변화가 심도깊고 대단히 리얼하게 그려진다.  

이 작품 또한 '올림픽의 몸값' 의 연장선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건의 전개는 대단히 호흡이 느리다. 거의 한 인물의 한 챕터는 아주 소소하고 디테일하게 시간단위의 심경과 주변환경 묘사가 대부분이다. 그냥 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의 순간순간 이야기들이 펼쳐진다고 보면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국내 독자들에게 일본문학은 장르문학을 통해 전래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게 아니라면 에쿠니 가오리 식의 칙릿이나 만화적인 상상력이 가미된 '라이트 노벨' 부터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나쓰메 소세키등으로 일본문학을 접하는 사람들은 아주아주 일부분일 터다. 그래서 일본소설 = 장르문학 이라고 인식하는 독자들이 많고, 오쿠다 히데오 역시 '공중그네' 풍의 경쾌하고 위트있는 풍자로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일본 작가들은 대부분 굉장히 다작하는 편이다. 1년에 한권씩 꼬박꼬박 신작을 내는 것은 예사고, 1년에 2권의 신작을 내기도 한다. 그 덕분에 문단에 등단한 작가들은 굉장히 다양한 장르들을 시도할 수 있고, SF나 판타지 작가들이 미스테리 추리 소설을 집필하거나 로맨스물, 나아가 정통 현대문학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꽤 있는데, 이런 현상은 컨텐츠의 멀티유즈가 일반화된 일본 문화의 특징이랄수도 있다.

 

이 작품역시 그런 범주에서, 오쿠다 히데오라는 작가에게 흔히 기대하는 위트있는 풍자나 가볍고 경쾌한 필치를 생각하고 손에 들었다가는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우선 위에 언급했던 내용상의 무거움과 디테일하고 리얼하게, 있는 그대로 현실을 옮긴 부분들을 들 수 있다. 만화스러운 등장인물들이나 문제점을 짚어내는 작가의 친절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리얼리즘 문학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 중 하나인 열려있는 결말 또한 국내의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독, 드라마를 좋아하고, 언제나 딱 떨어지는 결말을 기대하지 않는가?

삶에는 언제나 완벽한 결말이란 없다.

그래서, 리얼리즘 문학들 또한 결말이 열려있거나, 흐리멍텅한 경우가 많다.

어차피 모든 삶은 힘들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고, 누구에게나 자신의 고통만이 고통이다. 남의 고통은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다.

 

오쿠다 히데오는 자신의 모든 재능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안타깝지만,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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