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스팬스 : 깨어난 괴물 1 익스팬스 시리즈
제임스 S. A. 코리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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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음




제목만 보면 유치함에 피식,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되지만, 어쩔수가 없다.

레비아단, 혹은 리바이어던을 괴물이라는 단어 말고는 어울릴만한 단어가 한국어에는 없는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익스팬스' 는 명백한 타이틀로서 정관사가 붙어 고유명사로 쓰였으니, 그렇다 쳐도 부제목인 '레비아단 웨이크스' 까지 한글로 독음을 적어놓기도 그렇다.

게다가 '왕좌의 게임' 이란 드라마의 원작인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저자 J.R 마틴 옹의 추천서까지 뒷면에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으니 표지는 그야말로 유치찬란의 향연이다. 거기에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활자체의 큼직한 타이틀까지. 커버아트는 세련되긴 했지만, 보통보다 약간 작은 판형까지, "장르소설!!!!!!" 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장르소설의 오랜 팬으로서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뽑아들기 좋은 첫인상이 아니었음은 꼭 짚고싶었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에 비교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같은 장르소설이고, 비슷하게 드라마화도 됐지만 말이다.


그 약간의 장벽을 넘어 본격적으로 책을 펴들면 이야기는 순식간에 수백년 후의 미래로 날아간다. 

지구가 화성에 무사히 안착한지 몇백년이 흐른 세상. 

인류의 생활권은 화성과 지구 너머 소행성대까지 뻗어 있었다. 곳곳헤 우주 스테이션이 건설되어 소행성대의 막대한 자원을 화성과 지구로 실어 나르고 있었고, 우주에서 살게 된 인류는 낮은 중력에서의 변화를 일으켜 2m에 가까운 키에 툭툭 튀어나온 관절을 가진 새로운 종족으로 변화했다. 화성과 우주 스테이션에서 나고 자란 세대들은 같은 조상을 가졌지만 겉모습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어떤 의미로서는 "외계인" 이 된 것이다. 


이야기는 홀던이 부선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물 수송선 '캔터베리호' 로부터 시작된다. 

평소와 다름없이 소행성대에서 얼음을 채취해 외행성계와 내행성계 사이의 가장 큰 항구인 세레스 스테이션으로 향하던 캔터베리호는 긴급구조신호를 듣게 된다. 망망한 우주에서 구조신호를 무시하는 뱃사람은 없다. 홀던은 선장의 명령에 따라 벨트인인 나오미와 화성인 알렉스, 자신과 같은 지구 출신인 에이모스와 쉐리로 구성된 구조팀을 꾸려 셔틀을 타고 구조신호의 발생지로 향한다. 구조신호는 '스코풀라이호' 라는 우주선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승무원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빈 상태였고, 핵융합 반응로 엔진은 꺼져있는 상태. 그리고 반응로 엔진 주변에는 정체모를 까만 필라멘트 같은 촉수와 액체 덩어리들이 가득 널려있었다. 그리고 탈출용 포드가 한 척 비어있는 상태였다. 같은 시각, 캔터베리호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스텔스 우주전함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홀던은 무선 통신을 통해 선장과 동료들이 미사일의 착탄을 카운터하는 소리를 들으며 절망한다.

 한편, 세레스 스테이션 태생의 벨트인 밀러는 한때는 무척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세레스 치안대 형사였다. 지금은 알콜 의존증에 모두가 파트너 되기를 기피하는 한물간 형사지만, 그의 경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세레스 치안대의 대장은 밀러에게 '줄리 마오' 라는 여성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줄리 마오는 지구 최대 갑부의 딸로 현재는 가출하여 소행성대 행성 연합(OPA)의 과격분자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단서를 잡아낸다. 그리고 줄리 마오가 세레스 스테이션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은 "스코풀라이호" 라는 우주선에 취업했다는 것.

 캔터베리호의 격침 사건으로 팽팽한 긴장 상태였던 화성과 지구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OPA의 과격분자들까지 끼어들면서 태양계는 전쟁의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홀던이 있었고, 줄리 마오가 있었다.

 

   

일단 설정이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외계에서 외계인이 쳐들어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우주로 진출해서 외계인이 되었다. 이러한 개념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던 세계를 팡, 깨뜨려주었달까. 엄청나게 설득력이 있었다. 이 밖에 평생 돔에서만 사는 화성인들의 정신세계과 평생 스테이션에서만 사는 벨트인들의 정신세계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우주를 항해하는 초고속 우주선 안에서의 중력 가속도를 견디기 위해 사용하는 수많은 약물이라던가 충격을 이기기 위해 사용하는 중력 쿠션, 우주를 뚫고 정확한 통신을 보내기 위해 사용하는 광선 통신, 통신을 주고받는데 생기는 시차들까지 상당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확실히 니븐의 '링월드' 이후로는, '스페이스 오페라' 라 하더라도 어느정도의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설정이 대세인 것 같다. 특히 중력등의 물리력은 대충넘어갔다가는 큰코다치는 시대인 것 같다. 스테이션의 회전부터 도킹까지 허투루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섬세하고 설득력 있는 설정도 설정이지만, 화성과 지구라는 초강대세력의 미묘한 경계를 잡아내고 표현하는 작가들의 역량도 대단하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세력을 세워보려는 소행성대 연합의 고군분투까지. 정치적인 흐름을 잘 알고 있달까, 최상위 권력자들의 힘겨루기를 그려내는 통찰이 돋보인다. 

물론 그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우리의 두 주인공. 홀던과 밀러의 매력과 케미스트리도 빼놓아선 안되겠고.

홀던의 선원들인 기관사 나오미, 조종사 알렉스, 정비공 에이모스의 합도 끝내준다. (특히 에이모스. 너무 좋다.ㅋㅋㅋㅋ) 

모든 캐릭터들이 매력적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대사 하나,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까지도 철저하게 계산되어 사용된다. 설정도 좋고, 스토리도 좋지만, 무엇보다 캐릭터가 가장 좋다. 

홀던은 얼핏 서양식 히어로, 예를들어 서부극에 등장하는 카우보이처럼 정의로운 히어로의 스테레오타입처럼 보이지만, 대단히 입체적이다. 사실 홀던의 반대편에 서있는 인물인 밀러가 보다 전형적이다. 홀던은 정의롭고 고귀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타입의 인간이다. 이게 옳은가, 옳지 않은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판단하고 결정한다. 반면, 밀러는 오랜 형사 생활 때문인지 사건에 접근하는 사고방식은 체계적이지만, 주로 몸에 각인된 것들을 기반해서 움직인다. 직감에 따라 반응되는대로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인다. 이러한 두 인물, 홀던과 밀러의 조합이 주는 기묘한 위화감이 이야기와 어우러지며 꽤나 신선한 케미스트리가 발생된다. 서로를 존중하고, 좋아하지만, 결코 융화될 수 없는 두 남자. (이러한 페어의 구성도 버디무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시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느낌이 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좀 더 파고들어야 할 듯 하다.)


음모의 핵심에는 '프로토분자' 라는 미지의 존재가 등장한다.

이것은 아주 옛날부터 태양계를 떠도는 혹성들 중 하나였다. 아니, 운석 파편에 가까웠을터다. 태양계를 방문하는 수많은 돌덩이들 중 하나로 인식됐으나, 이 안에는 원시 생명체로 추정되는 세포가 붙어 있었다. 무려 20억년정도 된 것이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이들은 "프로토분자" 라는 이름을 붙였고,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의문의 원시세포를 생물무기로 활용할 계획을 세운다.

화성과 지구의 전쟁 위기 뒤쪽에는 프로토분자의 연구를 감추기 위한 태양계 최고 권력과 최고 갑부의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

이 프로토분자라는 정체불명의 물질도 그렇고, 이를 둘러싼 이중삼중의 내막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여기서 다시 캐릭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프로토분자를 둘러싸고 엄청나게 많은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과 리액션도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자꾸 설득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장르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설득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이라는 매체 자체가 '구라' 이기 때문에 독자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특히 장르소설은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구라가 아닐수도 있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야!!' 라고 소리치고 시작하는 이야기라면, 장르소설은 '여러분 이거 다 구라인거 아시죠?' 라고 크게 외치고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작품 안에서 논리적 인관관계가 설득력을 잃는 순간 흥미를 잃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기꺼이 속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너무 뻔한 거짓말에는 속고 싶지 않을터다! 때문에 장르소설은 독자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세계관의 설정에도 섬세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익스팬스는 그런 나의 기준에서는 완벽하게 잘 만들어진 장르소설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홀던' 과 '밀러' 라는 두 챕터가 번갈아 계속 등장한다.

마치 마틴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가 등장인물들의 챕터로 이루어진 것 처럼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홀던과 밀러의 시점으로 각각 그려진다. 해서 가끔 홀던과 밀러의 시간대가 겹치는 경우가 있는데, 같은 이야기를 해도 말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마음이 다른 경우를 볼 수 있어서 은근한 재미가 있었다. 더 재미있는 점은, 두 명의 작가가 각각 한 인물을 담당해서 썼다는 점이다. 홀던의 파트가 끝나면, 밀러의 파트를 맡은 작가가 홀던의 파트를 살짝 수정해서 밀러의 이야기를 쓰고, 끝나면 다시 홀던의 파트를 맡은 작가가 밀러의 파트를 살짝 수정해서 홀던의 이야기를 쓰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홀던이 밀러를 이해한 방식, 밀러가 홀던을 이해한 방식이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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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끝 2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0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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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분단과 함께 시작된다. 

1부인 [거인들의 몰락] 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된 원인을 심도 깊은 통찰력으로 절묘하게 간추려 소개했던 역량이 그대로 발휘된다. 소련과 미국이 일제의 패망 이후 남한과 북한을 갈라 놓았듯이 독일도 연합국과 소련이 승전국으로써 독일을 둘로 나누었다. 한동안 동독과 서독은 쉽게 왕래할 수 있었지만, 소련과 미국의 냉전체제가 가속화 되면서 장벽이 생겨나고 자유가 사라지는 과정이 모드의 손녀인 레베카와 발터를 통해 그려진다. 

케네디 정부의 이야기와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은 레프의 아들 그레그가 결혼 전에 관계를 가졌던 흑인 여가수 재키 제이크스(2부 '세계의 겨울' 참조) 사이에서 얻은 아들 조지 재이크스를 통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특히 케네디 형제의 불운한 퇴장과 베트남 전쟁, 닉슨과 워터게이트 사건, FBI와 정치 공작 등 예민한 이슈들이 담백하고 읽기 쉽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버스 안타기 운동' 으로 시작되는 미국 흑인들의 오랜 인권운동의 역사가 인상적이다.

이 책을 읽을 때 마침 국내에서도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시위가 한창이었다. 그와 관련해서 닉슨과 워터게이트, 국민들의 운동과 흑인 인권 운동이 많이 비견되곤 했는데, 마침 이 책에 특히나 그런 부분들이 상세하게 그려져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영원의 끝]은 그 두터운 볼륨만큼 엄청나게 많은 이슈들을 다루고 있지만, 아주아주 단순하게 간추려본다면, "재스퍼 머리" 를 통해 미국 언론의 발달사를, "조지 제이크스"를 통해 미국 사회 내의 흑인 인권의 변화를, "레베카 호프만" 을 통해 분단 독일과 그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상황을, "딤카" 와 "타냐 드보르킨" 남매를 통해 당시 소련의 중심이었던 러시아의 정치, 경제상황을 보여준다고 압축시킬 수 있다. 

"대지의 기둥" 때도 느꼈지만, 켄 폴릿은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해내는 이야기를 너무나 잘 쓴다.

지방을 떠돌며 돌을 깎던 평범한 사람이 단지 "살아남기 위해" 했던 일들이 역사의 흐름을 타고 평탄한 길에서 밀려나는 과정. 험준한 길에서 평탄한 길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떠밀리고, 떠밀리고, 또 떠밀리다보니 그가 지나온 길들이 하나의 지표가 되는 과정의 이야기 말이다.

위에 언급했던 인물들도 살아남기 위한 길을 찾아 헤매이다가 결국 뒤따라올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를 하나씩 남긴다.

목적지는 모두 같다.

"자유"


시리즈 3부작을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에설 윌리엄스" 일 것이다.

1919년. 웨일즈 에버로언에서 피츠허버트 백작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백작가의 하녀 에설은 미혼모로써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투사였고, 결국 노동당의 하원의원, 나아가 상원의원이 되어 여성의 참정권과 복지, 무상의료 그리고 이제는 박해받는 동성애자를 위해 싸웠다. 작은 몸짓이 그녀의 조국을 바꾸는 큰 동력이 되었고, 결국 해냈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참정의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해진 순간에도 손자 데이비드의 경애어린 시선 앞에서 금박이 입힌 상원의사당으로 들어가 동성애자를 위한 사안에 표를 행사한다. 

1부의 첫장을 열었던 그녀는 3부에서도 화려하게 등장해 자신의 삶을 훌륭하게 매조지한다.

장르의 특성상 1,2부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데, 그 때마다 가슴이 울컥울컥 했다. 

실존 인물도 아니고, 가상 인물인데. 그렇게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역사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아니겠는가.

그리고, 인류의 진보란, 결국,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처음 밟아나간 길을 다져가는 과정 아니겠는가. 

아직도 수많은 곳에서 어리석은 짓들이 반복되고 있지만, 그리고, 때로는 유턴을 하기도 하지만, 더디더라도 계속 전진하고 있다고 믿는다.



또하나, 켄 폴릿의 20세기 3부작은 오롯히 근대를 버텨온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 영민했지만 백작가 하녀가 된 에설부터, 적국인 독일 남자를 사랑했고, 전쟁통에도 첩보물 같은 결실을 맺었던 모드. 딱 한번 어리석은 선택을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폭탄이 떨어지는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엠뷸런스를 몰았던 데이지, 소련군들에게 강간당할 뻔 한 생면부지의 어린 유대인 소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졌던 모드의 딸 카를라. 그리고 카를라에게 구해졌던 그 소녀 레베카는 카를라에게 입양되어 동독의 외무부 공무원이 되어 통일에 힘을 보탠다. 

쿠바와 체코에서 격동의 순간을 체험했던 그리고리의 손녀 타냐는 목숨을 걸고 소련의 작가가 체제 비판적인 자신의 소설을 국외로 빼돌릴 수 있게 돕고, 애나 머리가 그 편집을 담당해서 세계에 알린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유신" 이라는 책을 통해 "한국의 근대화와 발전을 이뤄낸 것은 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우리의 누나들" 이라고 말했다. 악덕한 사장이 화장실도 제때 보내주지 않아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던, 그럼에도 남자들의 1/3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았던, 그리고 그렇게 번 돈 역시 모두 부모님과 남동생을 위해 바쳤던 누나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토로했다.

역사는 언제나 의도적으로 여성들을 배제시켜 "히He"스토리를 만들었고, 켄 폴릿은 그에 반박하듯 "허Her"스토리로 풀어냈다.

누나들과 어머니들을 결코 잊지 않았고, 역사라는 지맥에 굳게 새겨진 그녀들의 활약상 역시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2017년 5월 18일이다. (글을 시작한 것은 한참 전이긴 하지만...ㅋㅋ)

옆길로 새기도 했고, 유턴을 하기도 했지만, 36년 전에 형과 누나들이 밟아 놓았던 길에 다시 안착했다. 

갈 길이 멀지만, 사람의 삶은 유한하고, 이 길은 무한하다. 

하루하루, 살아가고, 근근히 살아낸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삶이다.

그뿐이다.


그런 삶들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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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기슭 새벽의 하늘 십이국기 8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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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의 세계는 답답할 정도로 정체되어 있다.

영원불멸의, 말 그대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이 된 인간이 통치하는 세계.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아니, 해서도 안된다. 

마치 과일처럼 나무에서 태어나는 인간들은 부모의 신분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고, 불로불사의 삶을 사는 '상류층' 인간들은 아이를 가질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막막한 세상인가.

왕이 실정을 해서 대지가 피폐해지고 재해가 몰아쳐도 선적에 들어있는 상류층의 삶은 굳건하다. 

평민들만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재해가 멈추고 풍요로운 날들이 시작된다.

여전히 선적에 들어있는 상류층은 배부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원불멸의 왕이지만, 인간. 실수를 한다. 신의 화신인 기린이라는 영특한 존재가 옆에서 보좌하지만, 기린은 정에 치우친 존재.

기린이 왕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기린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가여이 여긴다. 우리가 바라는 진짜 신의 자애로움이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에 휩쓸리면 안된다. 

병에도 걸리지 않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이정도면 사실 사사로운 욕망이 생길 수 없을 터다.

원한다면, 가족, 친지들을 선적에 올려 함께 영생을 누릴 수도 있다. 자녀에게 물려줄 재산을 축적할 필요도 없고, 가족 비리에 휩쓸릴 염려도 없다.

걸림돌이 있다면, 바로 조정 대신들이다.

왕이 실정을 해서 죽음에 이르면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동안 풍수해와 요마의 습격이 끊이지 않을 수 있다.

이 풍요로운 시기에 조금이라도 곳간을 채워 놓아야 하는 것이다.

왕이 바뀌어도 이 대신들은 거의 대부분 그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그리고,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왕의 실정은 오로지 왕의 잘못만이 아닐진대, 그 책임은 오롯하게 왕이 진다.

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깨달은 자가 있었다. 

대국의 왕 태왕 교소였다. 그는 왕에 등극함과 동시에 고관 대작들을 단숨에 갈아엎고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세제를 개편하고 혁신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지방관들을 새로 임명하고, 선적에 들었던 자들을 선적에서 지우고 새로운 인물들을 올렸다.

풍수해와 요마의 침탈은 잦아들었고, 이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겉보기엔 그럴 듯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실무자들이 단숨에 빠져나가자 행정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눈 앞의 불안이 해소된 백성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중앙정부의 명령이 지방까지 충실히 전달되지 못했고, 근시안적인 미봉책이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부족했다. 교왕의 주변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있었으나 수가 너무 적었다.

언제나 격무에 시달렸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교왕의 심중에 상처를 만들었다.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 뿐 아니었다. 간신히 숙청의 칼날을 피한 대신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또다른 칼을 품었다.

결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경왕 요코 역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갑자기 등극해, 가장 중요한 왕실의 예법을 혁파하는 취임 일성을 선보였던 요코는 지방의 반란을 한차례 진압하고 안정세에 접어드나 했지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기존의 대신들은 여전히 요코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고, 그녀의 시책들을 매번 꼬투리 잡고 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대국 리사이가 반란 진압 중 행방불명 된 태왕 교소를 찾아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타국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신의 명령을 받들고 있는 십이국기 세계에서 경왕 요코는 다시 한번 큰 갈등의 순간을 경험한다. 


실로 오래간만에 접한 십이국기 장편이었다. 실제 일본에서 이 작품이 출간된 것은 2001년이다.

그렇다. 십이국기 장편은 16년째 나오지 않는 중이다. )2001년 이후 발표된 몇몇 단편들은 바로 전에 출간된 [화서의 꿈]에 포함되어 묶였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십이국기 세계관 내에서 왕과 기린의 사례를 더이상 할 필요성이 없다고 느껴진다. 

나는 십이국기의 장편들보다 단편을 특히 좋아하는데, [히쇼의 새] 같은 경우는 정말 큰 인상을 받아서 읽고 읽고 또 읽었더랬다.

찰나의 순간 깨져 사라져버릴 도자기 새를 만들기 위해 영원의 시간을 소비하는 예술가라니...

그게 과연 지옥일까, 천국일까. 

십이국기 세계에서 공직자들 역시 선적에 들어 불사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영원히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작품집에 있었던 영원히 죄인을 재판해야 하는 법사계 공직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낙조의 옥], 영원히 나무의 병충해를 쫓아다니는 [풍신] 같은 단편들도 너무너무 좋았다. 


십이국기 세계관에 대해서 몇번 언급한 적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은 깊이 들여다보면 허술한 면이 적지 않다.

타국을 침략하지 않는 시대의 군인의 역할이나 필요성, 그에 비해 너무 많은 숫자, 너무 적은 국민, 비정기적이지만 끊임없이 닥치는 환란, 그럼에도 구휼시설이 구비되지 않는 무능함, 구비 되더라도 왕의 실정과 함께 너무 쉽게 무너져버리는 시스템 등등.

하지만, 역시 좀 더 파보면, 작품의 세계관 내에서 어느정도 설득력 있는 결론을 얻어낼 수도 있다. 

십이국기의 세계관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허술하고, 구멍이 뻥뻥 뚫려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허술함과 구멍들이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야기의 전개를 유연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십이국기의 세계에 깊이 빠진 이유도 아마 이 부분 때문인 것 같다.

고민하고, 상상하고, 세계관 안에서 합당한 결론을 내리고. 

이러한 부분은 작가인 오노 후유미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처음부터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완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출발한 것이다. 

작가는 이 답답한 세계 안에 현실의 인간, 요코를 던져 놓으면서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편들을 통해 이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구멍들을 차근차근 메꿔나가고 있다. 

위에 살짝 언급했지만, 십이국기의 장편으로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와 맥을 함께 한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정체되어 있던 이 세계에 돌 하나를 던졌다.

이 돌이 어떠한 파문을 일으킬지, [황혼의 기슭 새벽의 하늘] 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요코는 아직 왕이 아니던 시절, 연왕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됐다.

그리고 경왕이 된 지금, 타국인 대국의 왕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 답답해 하고 있다.

그녀는 이 '정체' 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고, 납득할 수도 없다. 

그녀가 이 답보의 세계에서 함께 정체될지, 아니면 미답의 영역에 할 발 딛게 될지.

시시콜콜 작가가 다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궁금은 하겠지.

그럴 땐 단편의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 슬쩍 흘려주면 될 일.

왕과 기린보다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십이국기의 세계관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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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1~3 세트 - 전3권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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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는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문란하다 싶을 정도로 성적으로 개방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기독교 세계관이 정착되기 전의 서구 사회는 현대적 윤리의 관점에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성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당연하게도 그러한 자유는 남성에게만 허락되었다. 


하지만, 로마 사회에서 여성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로마 사회가 혈통을 중시하는 사회였기 때문이고, 필연적으로 정계는 혈연으로 그물처럼 얽힌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권력가들이 힘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동맹은 혈연 동맹이었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이라면 어느 정도 재산 상속권이 인정되었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계약 시스템도 인권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상당히 합리적이어서 이혼당한 여성의 삶을 보장하는 시스템도 존재했다. 

물론 이 작품이 다루는 주요 인물들이 사회의 최상위 계층이기에 그렇지, 평민 여성의 삶은 더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이 작품이 크게 다루는 여성은 유력자의 딸이거나 그녀의 노예들뿐이니까. 

로마 권력의 핵심층에서 여성은 단순히 가장의 재산에 불과했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여성들에게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사실 많은 남성들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다. 여성은 가문의 '재산'이었고, '결혼'은 가문 간의 '계약'이었다. 

유력한 혈통의 딸들은 언젠가 자신에게 주어질 의무 -가문을 위해 어떤 남자에게 시집가서 헌신해야 한다는 내용의 -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고, 그것은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의 4부인 "카이사르의 여자들" 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의 이야기와 함께 시작된다.

브루투스는 세르빌리아의 아들로 세르빌리아는 2부 [풀잎관] 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드루수스의 여동생인 리비아 드루사의 딸이다. 독자들은 기억하시겠지만, 리비아 드루사는 카이피오의 부인이었지만 불륜으로 이혼당한다. 어린 세르빌리아는 잔혹할 정도로 날카롭게 엄마인 드루사의 부정을 비난하고, 자신을 거부하는 친아버지 카이피오에게 인정받기 위해 큰아버지인 드루수스의 정보를 훔치는 등 그야말로 악녀에 가까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였었다. 특히 엄마인 리비아 드루사가 카이피오에게 이혼당한 뒤 결혼한 카토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부형제 카토를 끔찍하게 싫어했다.('카토'는 정말 너무 많다...ㅠㅠ) 세르빌리아는 지독한 혈통주의자였고, 대단한 야심가인 동시에 정치를 보는 안목도 뛰어났다. 그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 브루투스가 도무지 눈에 차지 않았다. 용모도, 체형도, 지적 능력도, 성격도 모두 부족해 보였기에, 그것들을 채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들이 대부분이 상당한 부작용을 일으켰음을 알아챌 수는 없었다.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를 쭉 따라온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콜린 매컬로는 종이를 낭비하지 않는다. 한 두 권 안에 죽어 없어질 인물이라면, 아예 등장시키지도 않는다. 가뜩이나 길고 어려운 이름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부자, 모녀, 형제, 자매 간에 이름이 완벽하게 똑같아서 '작다' '크다' 등의 수식어를 앞이나 뒤에 붙이거나 로마식 닉네임이랄 수 있는 코그노멘으로라도 일단 등장했다면, 이야기의 흐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특히 '카이사르의 여자들'에서는 지금까지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 같아서, 3권께에서는 사실 이름 기억하기를 포기하기도 했다. 1~3부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손주뻘들이 등장해서 작가가 친절하게 누구의 아들이나 누구의 조카 등등을 소개해 주긴 하지만, 일일이 기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해서, 카이사르의 여자들을 원활히 즐기기 위해서는 딱 두 가지만 구분하면 된다.

카이사르의 아군인가, 적군인가 - 정도. 


'포르투나의 선택' 에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를 오가며 균형 잡힌 활약을 펼치던 카이사르는 어마어마한 빚을 청산하기 위해 반드시 권력의 정점으로 다가가야 했다. 당시 로마의 중앙 정계의 수구세력이라 할 수 있는 '보니파' 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연상시키는 변방 출신의 신진세력인 폼페이우스의 발호를 경계했고, 로마의 최대 갑부인 크라수스가 정계를 기웃거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보니파에게 있어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사이를 오가며 이 둘의 중앙 정계 진출을 도왔을 뿐 아니라, 보니파의 중심축 중 한 명인 비불루스에게 오래된 원한까지 있는 카이사르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심지어 하층민들의 주거지인 수부라에 살며 계급을 넘나드는 그의 어마어마한 인기 역시 계급과 혈통을 중시하는 보니파에게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카이사르 역시 보니파를 적으로 인식했다. 일찌감치 그들의 속성과 약점을 알아챘고, 보니파 의원의 부인들을 유혹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곯려먹기에 바빴다. 보니파 의원들의 지속적인 방해해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최고 신관 자리에 당선되고, 역시 어마어마한 권력 다툼 끝에 집정관에 당선되는 이야기가 숨막히게 펼쳐진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두 번째 삼두 연합을 하기도 하고, 이혼과 결혼을 되풀이하며, 카이사르가 숨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세르빌리아와 불륜으로 쌓아나갈 애증의 역사를 시작하기도 한다. 


전쟁에 관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 중 가장 강력한 서스펜스를 느꼈다.

권력 다툼이란 실제 칼과 창을 들고 뒹구는 전쟁만큼 치열하고 잔혹하다. 카이사르의 행보는, 비록 그의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내 뒤통수가 근질거리며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로 과감하고 대담하다. 

거침없는 그의 행보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명확한 비전과 인간에 대한 철학에서 기인한다. 인간과 권력에 대한 그의 통찰은 비록 어딘가 비뚤어져 있음에도 당시의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시대의 흐름과 로마의 발전에 대한 인상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로마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혈통과 로마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있었지만, 로마라는 거대하게 팽창한 국가가 더이상 계급과 지역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사실 역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존의 수구 세력들에게 그의 비전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고,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땅 전체를 뒤집으려는 시도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 카이사르를 이해할 수 있었던 자가 정계에 아무런 욕심이 없었던 크라수스라는 점이 참 재미있게 다가왔다. 크라수스는 오로지 돈의 흐름을 뒤쫓는 자였다. 어쩌면 크라수스는 변화하는 돈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나아가 카이사르가 제시하는 비전을 일부나마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크라수스가 일부나마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동료였다면,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사용해야 할 날카로운 창이었고 넓고 튼튼한 우산이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유용성을 일찌감치 인지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래에서 힘을 키운 술라, 그리고 술라를 등에 업고 힘을 키운 폼페이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우산 아래 들어가야 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딸을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키고 그가 경계를 푼 사이 동방에서 엄청난 부와 힘을 쌓을 터다. 


'카이사르의 여자들' 까지 읽고 보니 새삼 BBC의 역사드라마 "ROME" 가 콜린 매컬로의 작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카이사르의 심복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훗날 카이사르의 이름을 쟁취하고 왕좌에 오르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떻게 묘사될지 너무너무 궁금해진다. 


주로 로마의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 "카이사르의 여자들" 은 현실 정치와 맞물려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권력욕과 성욕의 적나라한 묘사들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와 진부한 표현이지만 "책을 덮을 수 없었다!!" 

진보세력과 수구세력의 이전투구도 그렇지만, 세력 안에서도 명예를 지키는 자들과 명예를 저버리는 자들의 대립이나, 법안을 통해 상대방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과정, 수많은 민중들이 관람하는 원로원 연설에서 특정 의원을 선동가라고 공격하는 장면도 포퓰리스트라 공격하는 현실 어딘가의 누군가와 무척 닮아있다. 

저자도 밝히지만, 이 즈음의 이야기는 실제 보존되어 있는 사료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부터야말로 진정한 실재와 상상이 견고하게 맞아떨어지는 지점일 터.  


일단, 뒷권들을 기다리는 사이 다시 1권을 펴봐야겠다.

이번에는 카이사르 말고 다른 인물들을 중심으로 읽어봐야지. 참고로 이번 작품에는 키케로의 분량도 대단하다. 사투르니누스의 국가 전복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으니, 1부 "로마의 일인자" 의 3권을 다시 읽어 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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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1~3 세트 - 전3권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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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까지도 인류 역사상 최고의 군사 전문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 로마의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첫 장을 연 "마스터즈 오브 로마; 로마의 일인자'들의 이야기는, 술라의 역사적인 로마 침공과 더불어 로마 공화정의 종장을 향해 치닫는다.

로마 공화정은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름과 함께 막을 내리지만, 사가史家에 따라 그보다 이전, 카이사르의 독재관 등극이나 술라의 로마 침공을 공화정 종장의 첫 문장으로 꼽는 이들도 있다. 

이는 로마의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이 실재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라는 의문과 맥을 함께 하는데, 이 작품의 저자인 콜린 매컬로는 이 거대한 이야기의 첫 주인공을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점찍은 것으로 보아, 그의 독재관 등극을 그 시점으로 본 것 같다.


지난 2부까지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세상이 펼쳐지고, 술라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이 그려졌다면, 3부에서는 술라의 로마에 대해 상세하게 그려진다. 사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독재관으로 집권하는 동안 로마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워야 했다. 사실상 그는 로마의 통치에 신경 쓸 겨를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술라가 법제들을 재정비하고, 원로원을 장악하고, 도시를 재건하는 장면들로 시작하는 3부 '포르투나의 선택' 은 전 권들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특히 많은 로마 역사 '덕후' 들이 신처럼 사랑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저자의 애정도 느낄 수 있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는 부분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쩌면 그 사랑의 근원이 콜린 매컬로에서부터 시작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이 문장마다 충실히 느껴진다.

어떤 인물이라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1부 1권부터 등장하며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살살 긁던 얄미운 새끼 똥돼지 메텔루스 피우스가 끝끝내 살아남아 노련한 전략으로 그간의 모든 평을 뒤엎을만한 대 활약을 펼치는 부분에서는 나 역시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꽤나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살짝 놀라기도 했다. 

사실, 1부 1권부터 꾸준히 등장했던, 장수한 인물들에게는 대부분 알게 모르게 애정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술라는 물론이고, 그의 오랜 연인 메트로비오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이자 술라의 오랜 여사친 아우렐리아, 카이사르의 고모뻘이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내인 율리아, 카이사르에겐 외종조부이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오랜 친구였던 루푸스까지.(심지어 루푸스는 장수하고 또 장수해서 카이사르와 재회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포르투나의 선택' 이 이전의 작품들보다 놀라웠던 것은 전투에 대한 묘사였다.

보병과 기병의 전략, 전술적 효용과 편제는 물론이고 지형, 지물에 따른 논리적 군사배치(진형), 역할, 상성 등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대의 전투를 섬세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군인들이 서로 부딪히는 전선의 상황 뿐 아니라 보급품 확보와 보급로 구성 등 그 배후의 이야기들까지 상세하게 그려내면서 실제 로마 군대의 군인들이 어떻게 전쟁을 치뤘을지 완벽하게 그려낸다!!!

물론 사료가 있긴 했겠지만, 사료와 고대의 지도, 현재의 지형만 보고 수백, 수천, 수만의 장병들이 대오를 이루고 캠프를 구축하는 장면을 상상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 반도의 남, 북부의 산맥들과 동방의(서아시아) 고원과 황무지까지 수많은 군인들이 보급을 조달하고 전략을 세우고 전투를 치르는 장면들이 정말 리얼하게 펼쳐지는데,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카이사르는 가까스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씌워놓은 유피테르 대신관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동방의 전쟁에 참여하며 차근차근 업적을 세운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술라에 비하면 혈통 하나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 된 파트리키 가문 태생으로 적당히 주어진 의무만 다하면 에스컬레이터처럼 권력의 최상층까지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었다. 완벽한 혈통에, 뛰어난 지능, 거기에 매력적인 외모까지 갖춘 카이사르를, 그래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유피테르 대신관이라는 굴레를 씌워 영원히 봉인하려 했던 것이었다. 

 평생 제사나 주관하며 살 뻔 했던 카이사르는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뛰어난 기지 덕분에 집정관을 향한 에스컬레이터에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고, 전장을 찾아다니며 군적을 쌓는다.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며 활약한 결과 동료 병사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냈을 때 수여되는 '시민관' 을 일찌감치 획득하면서 이른 나이에 원로원에 입성하게 된다. 로마는 처음부터 군사 영웅에게 호의적인 시스템이었는데, 술라에 의해 더욱 공고해지게 된 덕이었다.

 로마로 복귀한 후에는 뛰어난 웅변을 바탕으로 뛰어난 변호인으로 자리잡는다. 당대 최고의 웅변가인 키케로와는 다른 방식의 웅변으로 시민들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어머니인 아우렐리아 덕에 로마 최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 지구에서 살아왔기에 최고의 혈통에도 불구하고 최하층민들까지 살피는 안목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엄청나게 사랑받는 인물이었다.  

완벽한 혈통에 뛰어난 지능, 매력적인 외모에 이제는 떡갈나무 잎으로 만들어진 관까지 쓰며 원로원에 입성하며 시민들에게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그런 그를 우러르는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뒤따르는 칭송만큼 많은 질시와 견제를 받아야 했다.

이미 청소년기 때 부터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받았듯이. 


한편, 카이사르가 차근차근 성장할 무렵, 로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이후 최고의 권력자였던 술라가 천명을 다한다. 

자신이 공언한대로 일정 임기를 마친 뒤 종신 독재관에서 내려온 그의 뒤를 이어 폼페이우스가 두각을 드러낸다. 세르토리우스와의 일전에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긴 했지만, 메텔루스피우스로 인해 큰 깨우침을 얻고 한단계 성장한 그는 해적들을 소탕하고 동방을 정벌하며 그야말로 로마의 일인자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로마 최고의 거부 크라수스 역시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매사에 잇속이 밝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가 장래에 얼마나 높은 인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었고, 카이사르 역시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지만,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돈벌이에 골몰하는 크라수스라는 인물을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서 한번 마주친다.

나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힘을 합쳐 스파르타쿠스의 세력을 물리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콜린 맥컬로가 알려준 실상은 약간 달랐다. 크라수스가 다 차려놓은 밥상을 폼페이우스가 낼름 받아간 느낌이랄까.ㅋㅋ 크라수스는 누가 공을 세우든 상관 없는 사람이었기에 재빨리 손익을 따져 손해보기 전에 알아서 적당히 빠져나갔다. 


'포르투나의 선택' 에서는 위에 언급했듯 전쟁에 대한 묘사도 대단하지만,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조율하는 카이사르의 처세술이 무엇보다 돋보였다.

카이사르는 원대한 야망을 갖고 있었지만, 아직 미미한 세력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어마어마한 재산과 공적을 바탕으로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처럼 변방 출신에 혈통도 조금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출신과 혈통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고, 그 때문에 로마 중심의 원로원 정치를 혐오했다. 그 혐오가 그의 최대 단점이었다.

크라수스는 로마 최대의 거부였지만, 정치 세력이 전혀 없었고, 정치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권력은 오로지 돈에서 나왔고, 카이사르는 어마어마한 빚에 쪼들리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오가며 여러 정치 공작을 펼치는데, 엄밀히 따지면 로마 공화정도 일종의 대의 민주주의와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기에, 원로원에서 벌어지는 여러 정치 공작들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그 정점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함께 집정관에 오르게 하는 장면인데, 진짜 엄청 재미있다. ㅋㅋㅋ

카이사르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 끔찍하게 싫어하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손을 잡게 만들고, 두 힘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뤄가는지 그야말로 기가 차다!!! 

꼭 책으로 확인하시길~! 


참고로, 4부 [카이사르의 여자들] 은 이러한 균형 외교(?), 처세의 정점을 보여준다.

삼두연합이 이렇게 탄생했구나, 싶은!!!  

참고로 4부는 책도 더 얇고, 재밌기는 훨씬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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