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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기슭 새벽의 하늘 ㅣ 십이국기 8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12월
평점 :
십이국기의 세계는 답답할 정도로 정체되어 있다.
영원불멸의, 말 그대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이 된 인간이 통치하는 세계.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아니, 해서도 안된다.
마치 과일처럼 나무에서 태어나는 인간들은 부모의 신분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고, 불로불사의 삶을 사는 '상류층' 인간들은 아이를 가질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막막한 세상인가.
왕이 실정을 해서 대지가 피폐해지고 재해가 몰아쳐도 선적에 들어있는 상류층의 삶은 굳건하다.
평민들만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재해가 멈추고 풍요로운 날들이 시작된다.
여전히 선적에 들어있는 상류층은 배부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원불멸의 왕이지만, 인간. 실수를 한다. 신의 화신인 기린이라는 영특한 존재가 옆에서 보좌하지만, 기린은 정에 치우친 존재.
기린이 왕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기린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가여이 여긴다. 우리가 바라는 진짜 신의 자애로움이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에 휩쓸리면 안된다.
병에도 걸리지 않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이정도면 사실 사사로운 욕망이 생길 수 없을 터다.
원한다면, 가족, 친지들을 선적에 올려 함께 영생을 누릴 수도 있다. 자녀에게 물려줄 재산을 축적할 필요도 없고, 가족 비리에 휩쓸릴 염려도 없다.
걸림돌이 있다면, 바로 조정 대신들이다.
왕이 실정을 해서 죽음에 이르면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동안 풍수해와 요마의 습격이 끊이지 않을 수 있다.
이 풍요로운 시기에 조금이라도 곳간을 채워 놓아야 하는 것이다.
왕이 바뀌어도 이 대신들은 거의 대부분 그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그리고,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왕의 실정은 오로지 왕의 잘못만이 아닐진대, 그 책임은 오롯하게 왕이 진다.
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깨달은 자가 있었다.
대국의 왕 태왕 교소였다. 그는 왕에 등극함과 동시에 고관 대작들을 단숨에 갈아엎고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세제를 개편하고 혁신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지방관들을 새로 임명하고, 선적에 들었던 자들을 선적에서 지우고 새로운 인물들을 올렸다.
풍수해와 요마의 침탈은 잦아들었고, 이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겉보기엔 그럴 듯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실무자들이 단숨에 빠져나가자 행정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눈 앞의 불안이 해소된 백성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중앙정부의 명령이 지방까지 충실히 전달되지 못했고, 근시안적인 미봉책이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부족했다. 교왕의 주변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있었으나 수가 너무 적었다.
언제나 격무에 시달렸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교왕의 심중에 상처를 만들었다.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 뿐 아니었다. 간신히 숙청의 칼날을 피한 대신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또다른 칼을 품었다.
결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경왕 요코 역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갑자기 등극해, 가장 중요한 왕실의 예법을 혁파하는 취임 일성을 선보였던 요코는 지방의 반란을 한차례 진압하고 안정세에 접어드나 했지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기존의 대신들은 여전히 요코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고, 그녀의 시책들을 매번 꼬투리 잡고 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대국 리사이가 반란 진압 중 행방불명 된 태왕 교소를 찾아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타국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신의 명령을 받들고 있는 십이국기 세계에서 경왕 요코는 다시 한번 큰 갈등의 순간을 경험한다.
실로 오래간만에 접한 십이국기 장편이었다. 실제 일본에서 이 작품이 출간된 것은 2001년이다.
그렇다. 십이국기 장편은 16년째 나오지 않는 중이다. )2001년 이후 발표된 몇몇 단편들은 바로 전에 출간된 [화서의 꿈]에 포함되어 묶였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십이국기 세계관 내에서 왕과 기린의 사례를 더이상 할 필요성이 없다고 느껴진다.
나는 십이국기의 장편들보다 단편을 특히 좋아하는데, [히쇼의 새] 같은 경우는 정말 큰 인상을 받아서 읽고 읽고 또 읽었더랬다.
찰나의 순간 깨져 사라져버릴 도자기 새를 만들기 위해 영원의 시간을 소비하는 예술가라니...
그게 과연 지옥일까, 천국일까.
십이국기 세계에서 공직자들 역시 선적에 들어 불사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영원히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작품집에 있었던 영원히 죄인을 재판해야 하는 법사계 공직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낙조의 옥], 영원히 나무의 병충해를 쫓아다니는 [풍신] 같은 단편들도 너무너무 좋았다.
십이국기 세계관에 대해서 몇번 언급한 적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은 깊이 들여다보면 허술한 면이 적지 않다.
타국을 침략하지 않는 시대의 군인의 역할이나 필요성, 그에 비해 너무 많은 숫자, 너무 적은 국민, 비정기적이지만 끊임없이 닥치는 환란, 그럼에도 구휼시설이 구비되지 않는 무능함, 구비 되더라도 왕의 실정과 함께 너무 쉽게 무너져버리는 시스템 등등.
하지만, 역시 좀 더 파보면, 작품의 세계관 내에서 어느정도 설득력 있는 결론을 얻어낼 수도 있다.
십이국기의 세계관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허술하고, 구멍이 뻥뻥 뚫려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허술함과 구멍들이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야기의 전개를 유연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십이국기의 세계에 깊이 빠진 이유도 아마 이 부분 때문인 것 같다.
고민하고, 상상하고, 세계관 안에서 합당한 결론을 내리고.
이러한 부분은 작가인 오노 후유미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처음부터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완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출발한 것이다.
작가는 이 답답한 세계 안에 현실의 인간, 요코를 던져 놓으면서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편들을 통해 이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구멍들을 차근차근 메꿔나가고 있다.
위에 살짝 언급했지만, 십이국기의 장편으로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와 맥을 함께 한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정체되어 있던 이 세계에 돌 하나를 던졌다.
이 돌이 어떠한 파문을 일으킬지, [황혼의 기슭 새벽의 하늘] 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요코는 아직 왕이 아니던 시절, 연왕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됐다.
그리고 경왕이 된 지금, 타국인 대국의 왕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 답답해 하고 있다.
그녀는 이 '정체' 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고, 납득할 수도 없다.
그녀가 이 답보의 세계에서 함께 정체될지, 아니면 미답의 영역에 할 발 딛게 될지.
시시콜콜 작가가 다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궁금은 하겠지.
그럴 땐 단편의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 슬쩍 흘려주면 될 일.
왕과 기린보다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십이국기의 세계관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