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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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브리튼 마을의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힘들게 촌장의 허락을 구해 아들이 사는 옆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모든 관절이 쑤시고 몸 성한 곳이 거의 없지만, 부부간의 사랑은 그 어느때보다 깊은 부부는 가장 가까운 색슨족 마을에서 위스턴이라는 색슨족 전사를 만나게 되고, 용에게 상처를 입은 에드윈이라는 소년까지 함께 동행하게 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에게 향하는 여정을 계속하기 전에, 색슨족 마을 인근 수도원을 방문하기로 한다.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수도원장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최근 과거의 기억을 거의 다 잃었다. 둘의 젊은시절조차 떠오르지 않고, 아들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아들이 왜 다른 마을로 떠났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어떤 기억들은 사라졌고, 어떤 장면들은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억 상실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나이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으나, 일대의 모든 마을에서 비슷한 일들이 남녀노소를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었다. 치매와 같은 현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원으로 향하는 도중 아서왕의 조카인 늙은 기사 가웨인을 만나게 된다.

가웨인은 오래 전, 아서왕의 명령에 따라 이 지역 어딘가에 잠자고 있는 암용 케리그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기사였다. 

색슨족 전사인 위스턴 역시 자신의 왕의 명령에 따라 암용을 죽이기 위해 이 지역에 파견된 참이었으나, 가웨인은 그와 협력하기는 커녕, 자신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어서 떠나라는 말만 반복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이 과정 속에서 최근 이 일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적인 기억 상실 현상이 암용 케리그가 잠자면서 내뿜고 있는 입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 중 두번째로 읽어본 작품이다.

[나를 떠나지 마] 도 굉장히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는데, 이 작품 역시 대단하다.

고작 두 작품만으로 딱 잘라 평할 순 없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서정적인 묘사에 굉장히 뛰어난 작가인 것 같다. [나를 떠나지 마] 에서도 주인공들이 머물고 있는 학교와 주변 광경들, 병원이 위치한 장소의 풍광들과 인물들에 대한 정적인 묘사가 인상깊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정적이면서도 농밀한 묘사들이 돋보였다. 빽빽한 나무와 바위, 산, 안개로 가득찬 대기에 대한 느낌이 문장 속에서 꿈틀거린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상당히 박력있는 액션들이 많은데도 정적이면서도 고요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나를 떠나지 마] 에서도 그랬다. 내용면에서 상당히 감정적인 동요가 큰 반전이 있었음에도, 그것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서술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렇다.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들인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이라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중요한 이미지들은 눕거나 앉아있는 장면들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 단편적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 안개로 가득찬 당시 영국의 풍광들에 대한 묘사들은 무척 춥고, 눅진하고, 답답하다.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서로의 손을 감싸쥐고, 어깨를 감싸고, 챙겨주는 장면들이 한결 따뜻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장을 덮으니, 눈물이 왈칵 났다.

사무치는 회한과 아쉬움, 안타까움...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대체, 이 감정은 뭐지? 몇페이지의 마지막 장면을 몇번이고 되읽었다. 똑같이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동안 가끔 그 마지막 페이지가 불쑥불쑥 되살아났다. 


사람의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젊은이는 내일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느낌이었다.

앞부분보다, 뒷부분 노인에 대한 부분이 더 또렷하게 남아있다. 거의 정확할 것이다. 

남자들은 나이 먹을수록 "왕년에 내가~" 라는 말을 많이 하기 마련이다. 추억이야말로 노인의 허세이자, 본질이다. 

사람의 삶은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좋은 기억은 더 좋게, 나쁜 기억은 덜 나쁘게, '추억보정' 이 되어 서랍 안에 쌓여진다. 

젊은이는 서랍의 빈 공간에 채울 수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노인은 꽉 채워진 추억들을 끄집어 살피며 하루를 지새운다. 

 

 그렇다면, 일제치하를 경험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아버지, 어머니들의 기억 속에는 어떤 것들이 녹아있을까?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당했던 그분들의 마음 속에는.


지구에 비하면 도저히 길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의 역사책은 동족들의 피로 칠갑이 되어있다.

인류는 끊임없이 서로를 죽이면서 성장해왔다. 오로지 피에는 피로, 살육에는 살육으로 맞서왔다. 이러한 피와 증오의 굴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교활함과 야비함에 기인한다. 날카로운 이빨도, 강인한 손발톱도 없이 진화한 인간에게는 오로지 뇌 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뒤통수를 찌르고, 목을 벤다. 인류의 과학은 언제나 효과적인 살육을 위해 진보했고, 인간의 역사는 시체로 시체를 쌓아온 과정이다. 

위스턴은 같은 색슨족 소년인 에드윈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브리튼족을 증오하거라. " 

친절하고 다정한 브리튼족이었던 액슬에 대한 경애를 품기도 하지만, 그것이 동족과 부모를 학살한 브리튼족들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않는다. 위스턴은 다시 대지를 피로 적시기를 원한다. 그것은 복수의 피가 될 것이다. 진실을 망각 뒤에 숨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색슨족이 원하는 평화는 더더욱 아니다.   

가웨인은 살육의 범죄를 기억의 저편에 묻히기를 원했다. 정복자 아서왕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마법사 멀린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뭔가 중요한 사실을 잊은 것 같은데...'

이 대지에 사는 모든 브리튼족과 색슨족은 끊임없는 망각에 시달리며 불안하고도 평화로운 삶을 이어간다.  

단순히 누가 옳고 그른가를 떠나 이것이 인류 문명의 발자취였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른 가장 첫번째 장면은 얼마전 큰 이슈가 되었던 미얀마 로힝야 족의 대학살극이었다. 그것을 묻고 평화의 지도자로 우뚝 선 아웅산 수치 여사였다. 더 전으로 돌아가볼까. 영국의 수많은 식민지 총독들은 어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천만을 학살하고, 실제로 손발을 잘랐을 뿐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거대한 인종분리 정책은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버금갔다. 미국은 역사책의 첫 페이지가 학살이다. 미국 원주민들은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밀려나 망각을 강요당하고 있다. 


암용의 망각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색슨족인 위스턴은 증오와 고통, 슬픔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색슨족의 왕에게 선택받았고, 거짓 평화를 깨뜨릴 임무를 부여받았다. 

거짓 평화를 깨뜨리려는 위스턴과, 거짓 평화를 지키려는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 

망각의 입김 안에서 과거의 상처를 다스리며 거짓 평화 속에서 안주하는 액슬. 


과연 거짓된 평화도 평화인가. 결국 그렇게 완전히 잊을 때 까지 참고, 기다리고, 또 참고, 또 기다리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마지막 장을 덮으면 책 내용이 싹 잊혀지는 책이 있다. 내가 이렇게 읽은 책의 모든 리뷰를 남기고자 했던 이유이다.

줄거리를 적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적고,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을 적어낸다.

반면, 마지막 장을 덮어도 며칠동안이나 머릿속에 뭔가가 왕왕 울리는 책이 있다. 

이 작품은 정말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이 책을 다 읽은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사실 그 왕왕 울리는 뭔가를, 정리할 수 없어서 이 글을 마무리 할 수가 없었다. 

이라크 군대가 IS의 근거지를 함락시켰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기 테러가 일어났다. 할로윈을 맞은 뉴욕의 한 거리에서 총기 테러가 일어났고, 텍사스의 교회에서도 테러가 일어났다.

그런 기사를 접할 때 마다 이 책이 떠올랐다.

망각속에, 역사의 뒤안길에 잘못을 떠넘긴 사람들이 떠올랐다. 

히틀러와 그 부역자들이 떠올랐고,학살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떠올랐다.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이 떠올랐다.클린턴이 떠올랐고, 오바마도 떠올랐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떠올랐고,히로부미와 하토야마, 아베가 떠올랐다. 

베트남, 남아공, 로힝야, 미얀마, 아웅산, 남아공, 콩고, 토고,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수니파, 시아파, 아우슈비츠, 게토, 킬링필드, 보도연맹, 티벳, 인도,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중국 그리고 미국. 

모든게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이 책이 떠올랐다.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가 떠올랐다.

망각의 시대에 증오를 전래하는 위스턴이 떠올랐다.

어이없이 죽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떠올랐고,어이없이 죽어가는 아들과 딸들이 떠올랐다.    

그 모든 생명들이 중요한가?

그 모든 생명들이 하찮은가? 


죽은 사람들은 죽었으니 끝인가?


그래. 맞다.


죽으면 끝이다. 

내가 죽으면 나의 모든 감정들은 사라질터다. 마치 이 세상에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처럼.

이영도 작가는 인간의 삶,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삶을 "그림자 자국" 이라고 통칭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그림자의 자국.모든 삶은 대지위에 흩뿌려진 그림자 자국에 불과하다.

그 흔적은 불과 몇십년이면 사라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남아도 남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야비한 가해자들은 언제나 피해자들의 '망각' 을 꾀한다.

다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 논하지 말자고, '비가역적' 약속을 강요한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 일관하며 모른체한다.

영국이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민족들에게, 러시아가 소련시절 독립을 꾀하던 소수민족들을 학살한 사실들을, 미국이 무기를 제공하며 내전을 부추겼던 중동의 많은 민족들에게, 일본이 침략하여 강제 징용한 조선인들과 위안부 여성들에게,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때 학살한 베트남인들에게, 군부 독재 정권과 그 부역자들이 자신들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선량한 국민들에게.


거짓과 기만으로 눈을 가리고, 평화라는 단어를 악용하며 망각을 기다린다.


죽으면 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와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든다.

이것은,

허무는 아니다.

농밀하고 강력하다.

세상을 뒤덮는 안개처럼.

쫓고 쫓아, 부모의 가죽을 벗긴 불구대천의 원수를 마주한 아들의 심장처럼. 

잔뜩 부풀어 쉼 없이 펄떡댄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잊으면 일본과 더 가까워질까? 

창씨개명을 당한 할아버지를 잊으면 일본가 더 가까워질까? 



우리는 진정한 답을 알고 있다.

독일의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었던 독일은 자성의 목소리부터 시작했다.

지도자의 목소리에 좌우되지 않는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교육 일성으로 삼았다. 과거를 적확히 기술하고, 아우슈비츠에 자신들의 악행을 남김없이 기록해, 후대를 위해 남겼다.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 여러번 사과하고, 전후에 성실하게 쌓은 국부를 유럽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유럽을 전화로 몰아넣었던 독일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고, 가장 부유한 국가로 우뚝 섰다.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에 피해국들은 충분히 납득했고, 용서했다. 


진정한 사과는 어려운법이다.

사람과 사람간에도 한없이 어려운 것이 사과다.

하물며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라면. 


그렇게 위무하며, 이런 거짓 평화를 누리는 것이 최선인걸까? 

망각속으로 묻어놓고, 오늘만 살아도, 되는걸까? 


이러한 우리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바로 언론의 일이다.

[파묻힌 거인] 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암용 케리그의 입김에 영향을 받아 과거를 망각했고, 여전히 망각 중이지만, 색슨족 전사 위스턴만은 그 입김에 면역성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암용을 죽이는 전사로 선택된 이유였다. 그는 색슨족 소년 에드윈에게 망각한 과거를 알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증오' 도 전한다. 단순한 사실이나 역사에 '증오' 를 얹어준다. 아니, 어쩌면 현대의 언론도 잘 하는 짓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양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언론은 때로 자신들이 설정한 선악과 피아의 잣대를 대중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한다. 언론 공정성이 중요한 이유다. 

암용 케리그의 입김은 정복자이자 학살자인 아서가 대중을 호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것도 언로言路의 한 방향이다. 로마 황제처럼, 전두환처럼 스포츠와 섹스, 영화와 드라마등의 유희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기만했다. 사람들은 웃고 즐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북한 간첩으로 호도당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운 선량한 시민들들을 잊었다. 그 바통을 넘겨받은 노태우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그 시기를 거쳐온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도 기만당해온 삶을 진정한 삶이었다고 우기며 늙어가고 있다.


오랜 암흑, 잠깐의 빛, 다시 고단한 어둠, 그리고 또 잠깐의 빛.

예수는 로마의 부역자들 아래에서 고통받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고 말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암용을 죽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기억을 찾아줄 위스턴을 기쁘게 맞이한다. 하지만, 이윽고 액슬을 알아채게 된다. 암용이 죽고 나면 피를 피로 갚는 잔혹한 셈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것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끈끈한 부부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었다. 현재만을 바라보는 액슬과 비어트리스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었다. 그리워할 젊은 시절도 없었고, 고통과 회한으로 가득찬 과거도 없었다. 서로에게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던 기억들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실망감으로 절망에 빠져 서로를 외면했던 기억들도 없었다. 오로지 지금, 내 옆에서 내 손을 잡아주는 서로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사적인 영역에서, 망각은 신의 선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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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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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년대 중반. 부유하지만 프란체스카 수도회의 교리에 따라 엄격한 금욕생활을 지키고 있는 미망인 이네스 데 토리몰리노스가 피렌체의 산 가브리엘 대수도원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네스는 부유한 남편의 포도밭과 성城 등의 재산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으나, 남편의 성姓을 잇지는 못했다. 딸만 셋을 나은 것이다. 

 한편, 베네치아에서 가장 비싼 곳이자 서양 전체에서 가장 호화로운 집창촌인 파우노 로소 유곽에 베니치아에서 가장 비싼 창녀 모나 소피아가 있었고, 파도바 대학에서 가장 저명한 외과의사이자 해부학자인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는 대학의 자기 방에 유폐되어 종교재판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이 종교재판은 사실상 결과가 정해졌고, 절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파도바 대학의 학장 알레산드로 데 레냐노에게 콜롬보는 눈엣가시 같은 인간이었다. 콜롬보는 명성과 의사로서의 뛰어난 역량, 경력으로 자신이 학장으로 있는 대학에 큰 명예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질투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콜롬보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콜롬보가 '여성의 사랑을 지배하는 기관', 스스로 "비너스의 사랑" 이라 이름붙인 여성 고유의 신체기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발견은 위험했다. 비너스의 사랑이라는 기관은 '항상 모호한 여자의 자유의지를 지배할 힘을 가진 진정한 도구' 였기 때문이다.

 그의 발견에 "만일 악마의 군대가 죄의 대상인 여자를 장악해버린다면, 기독교가 어떤 불행을 겪게 될지 알겠습니까?" 라며 가톨릭교회의 의사들이 분개했다. "가난한 곱사등이라도 가장 비싼 고급 창녀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매춘이 돈 버는 사업이 될 수 있을까요?" 라고 유곽 주인들이 물었고, "여성들이 자신들의 가랑이 사이에 천국의 열쇠와 지옥의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비너스의 사랑' -클리토리스의 발견은 해부학적이었지만, 동시에 이단적이었다. 클리토리스는 여성들의 것이었지만,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여성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여성이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성과 예술의 시대였지만, 여성들에게는 암흑의 시대였다. 

가장 어두울 때, 빛이 가장 잘 보이는 법. 여성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바로 이 때 발현되었다.

그로부터 수백년. 지난한 세월동안 여성들은 스스로 빛을 밝혀가고 있다.


 사유를 시작한 이래 인간의 지성은 크게 나아졌을까?

근력은 확실히 약해졌다. 두뇌학자들은 기억력도 상당히 쇠퇴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실제로, 기록들을 보면 중세의 사람들은 책 너댓권쯤은 거뜬히 외운 것으로 보인다. 기억력이 생존에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자와 각종 기록장치가 발달한 현대엔 기억력이 생존과 크게 관련이 없다. 그 대신, 응용력은 엄청 발달했을 것이다. 맥락을 파악하는 통찰력도 나아졌으리라. 

 하지만, '지성', 생각하는 힘 그 자체를 논한다면, 문명사회를 시작한 인류의 지성은 그 단계에서 이미 최고점을 찍은 상태였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인간의 지성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인간들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고, 지금도 역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인류의 지성 그 자체는, 지구에 머무는 한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지성을 바탕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인류의 역사로 따지면 인간 한명 한명의 수명은 짧다면 짧지, 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짧은 기간동안 개별적으로 쌓은 지식을 정리하여 기록한다. 그 개별 기록들을 한데 모아서 또 정리하고, 또 기록한다. 그 과정 안에서 여러 기술들이 파생되고, 산업으로 발전한다. 지식의 축적이 정체되는 시기는 없었다.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특출난 인간이 태어났다. 이들은 수많은 지식들 속에서도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으며 지식의 결손부위를 찾아내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범인들은 하지 못할 시도로 놀라운 발견을 해냈으며, 참신한 가설을 통해 논리 전개 방식들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지식은, 안타깝게도 '지배' 혹은 '정복' 이라는 단어와 연관될 때 시너지를 일으킨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강력하게. 


 90년대 중반에 발표된 이 작품은, 책 말미를 통해 역자가 소개하듯 안다아시의 모국에서는 출간 자체가 안 될 정도로 논란을 낳은 작품이다. 특히 가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 암투와 시기, 질투로 얼룩진 14세기의 종교재판과 여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낳은 성서의 오독, 또는 몰이해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와 희롱이 가득한 이 작품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을터다.

처음 읽었을 때는, '무슨 이런 작품이 세계문학씩이나!' 라고 느꼈었지만, 두번째 읽고 난 뒤에는 작품의 여러 부분들이 마음속에서 웅웅 울려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첫 문장부터 조롱으로 가득찬 한편의 풍자극이다. 풍자의 대상은 위에 언급했듯 당대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 지도층과 지식층이다.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이 신랄한 풍자에서 비롯된다. 그 당시에는 결코 쓸 수 없었을 내용들이다.

 당시에 가장 강력한 권력은 무엇이었을까?

돈? 명예?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권력은 '지식' 으로부터 파생됐다.

당시 세상의 진리는 성서였다. 평범한 사람들을 성서로 '지배' 했다. 성경에 관련된 지식들이 힘이었다. 라틴어로 쓰여진 성서는 결코 대중들의 문자로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은 커녕 모사조차 할 수 없었다. 라틴어를 배운 일부 성직자만이 성서를 읽을 수 있었고, 성서의 내용은 종교인들만 공유했다. 해석에 이견은 달 수 없었다. 성서의 내용 그 자체가 신의 말씀이었으므로, 평범한 대중들의 일상은 성서의 문장에 따라 재단됐다. 상황에 따른 해석은 오로지 교황만이 할 수 있었다. 일부는 주교들이 했다. 때로는 수도원장이나 작은 교구의 교구장이 하기도 했다.

역사, 문화, 윤리는 물론 일반 법도 모두 성서에 기반했다. 종교 지도자들이 관장했던 것이다.

수많은 왜곡들이 서양 역사를 지배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 에 관한 내용이었다.

성서에서 여성은 남성의 뼈에서 '추출' 된 일부이자, 사탄의 꾀에 빠진 어리석은 존재이자, 그로 인해 인류가 '원죄' 를 짓게 한 원흉이다. 지성과 지식이 뛰어난 여성들은 마녀로 매도당했다. 가톨릭 세계관에서 여성은 욕망에 좌우되는 동물, 남성들을 죄의 길로 이끄는 연약한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동화같은 일화로 여성들은 서양사에서 영영 낙오되고, 그 여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재까지도 가열차게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인류의 역사에 암울한 한 획을 그은 왜곡된 지식의 시대, 특히 가톨릭. 그 전체에 대한 조롱이자 비하, 희화화인 것이다.

서슬 퍼렇던 당대에는 결코 할 수 없었을, 현대에만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가톨릭이 국교나 다름없는 작가의 모국, 아르헨티나에서는 출간을 거절당했고,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을 때에도 비평가들의 강력한 반대에 시달려야 했다.



바야흐로 젠더 감수성의 시대이다.

굳이 '젠더' 라는 외래어와 '감수성' 이라는 한자어가 섞인 이 묘한 조어는 최근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화두이기도 하다. 

이것은 아마도 '미소지니misogyny' 라는 단어를 '여성혐오' 라고밖에 치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일터다. 우리사회에서는 지금까지 여성 차별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조차 시도된 적이 없었으니까. 미소지니처럼 넓은 의미를 지닌 단어를 적절하게 번역할 단어조차 없을 것이고, '젠더 센서빌리티Gender Sensibility' 를 대처할 단어는 물론 개념조차 없었을 터다. 

남성이 보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해부학자] 가 젠더 감수성이나 여성혐오라는 측면에서 자유로운 작품은 아니다. 이는 셰익스피어와 그 시대의 작품 전반에 대한 재평가와 맥을 함께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남성이 여성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다름을 인정하듯이, 남성 작가의 작품에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것 역시 '젠더 감수성'의 본질일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남녀 갈등이 엄혹한 시기에는 날카로운 비평과 지적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모든 가치들을 거세시키고, 한 목소리로 비난해야 한다는 주장, 나아가 그 '가치'의 '잣대'가 남성 중심 사고에서 비롯된 잣대이므로 모두 왜곡되었기에 무의미하다는 주장 역시 지나친 비약이다.

이것은 혐오에는 혐오로, 비약에는 비약으로 맞선다는 주장과 다름없다. 왜곡을 다른 방향에서 왜곡한다고 정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또다른 왜곡일 뿐이다.  

또한, 지나치게 저자와 화자를 동일시 함으로 인해 저자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이야기나 메시지 전체를 곡해하는 일 역시 피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작품 역시 저자가 나름대로 성별에 대해 균형적 시각을 견지하려 노력한 대목들이 있고, 여성문제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와 메시지가 존재한다. '여성혐오' 로 단순히 뭉개기엔 아까울 정도이다. 


 물론, 나 역시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 했던 부분은 지나치게 남성 중심의 시각 때문이었다.

두번째 읽을 때엔 보다 많은 것들이 읽혔고, 곱씹다보니, 또 다른 것들이 텍스트 위쪽으로 떠올랐다. 

이 작품은 여러 분야에서 아주 논쟁적일 수 있는 소재들을 과감하게 활용했다. 국가, 인종, 성별을 떠나 인류를 지배한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그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이 작품은 여성들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인류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보면 가장 화려하고, 지성이 폭발하던 시기였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절반 이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역사였다. 성별 차별 뿐 아니라 인종차별도 극도로 심했던 시기다. 화려함과 지성은 1%의 백인 남성들에게만 해당된 시기였을터다.

인류의 문명과 역사라고 부르는 대부분은 사실 그들의 기록일뿐이고, 이 작품에 그에 대한 거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암흑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헐리우드를 지배하던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이 조금씩 파괴될 조짐이 보인다.

평소에 행실이 안좋던 '지배적인' 남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죄, 자신의 권력으로 약자들을 희롱한 죄의 댓가를, 미미하지만 받기 시작했다. 여성의 참정권은 우리 사회의 공동체 중 가장 마지막에서야 허가됐다.

제 2차 세계대전동안 남성이 전쟁터로 끌려간 사회를 지킨건 여성들이었고, 광기에 휘어잡힌 남성들을 추스른 것도 결국은 여성들이었다.

영국 사회는 이를 통해 가까스로 여성이 우리 구성원의 가장 중요한 일원임을 받아들였고, 여성을 하원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유리천장은 단단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직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좋은 기회가 한번 있었으나,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다행히 찬스 뒤에 또다른 찬스가 와서, 가장 중요한 외교안보 분야에 정말 훌륭한 여성 리더가 자리잡았다.  유리천장은 힘으로 부술 수 없다. 여성들의 힘만으로는 가능할리 없다. 사회 구성원 전체를 아우르는 설득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설득이 혐오로 가능할 리 없다. 비약으로 가능할 리 없다. 왜곡으로 가능할 리 없다. 

1500년대까지 여성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오죽하면 클리토리스가 남성의 음경과 비슷한 매커니즘이라는 표면적 관찰의 결과를 주장한 것 만으로 콜롬보는 공식적인 사형선고를 받을 뻔 했다. (물론, 이 작품은 픽션이지만, 콜롬보가 클리토리스의 해부학적 역할에 중대한 발견을 한 부분만은 역사적 기록이다.)  

  

결국 돌고 돌아 인류의 지성만이 이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것이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사유하고. 좋은 논리를 개발하고, 방법을 찾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남성 중심의 사회가 저지르는 실수들을 그대로 밟을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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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저블 서커스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시간은 깡패다." 라고 일갈했던 제니퍼 이건의 첫 소설이 시간을 거슬러 내 앞에 찾아왔다. 

제니퍼 이건은 [깡패단의 방문] 을 통해 시간 앞에서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의 비애를 담담하게, 하지만 결코 우울하지 않게 그려냈다. 당시에 느꼈던 인상은 필립 로스의 적통, 그 자체였다. 필립 로스가 미처 그릴 수 없었던 미국의 딸들에 대해, 그리고 미국의 딸들이 바라보는 미국 사회와 그 안의 남자들에 대해, 그리고 여성들의 애정과 욕망을 그려내고 있었다. 

필립 로스는 [에브리맨] 에서 "그냥 오는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라고 말했다.

운명의 불가역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순응한다. 그것이 '아버지' 의 자세였다. 그것이 아버지가 세상을 버텨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대다수의 평범한 남자들은 이 방법을 택한다.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가장 잘 할 수 있게 된다. 필립 로스의 작품 세계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남자들은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미국의 목가]의 시모어도 그랬고, [네메시스]의 버키도 그랬다. 주커먼 시리즈의 주인공 주커먼 역시 그랬다.    

제니퍼 이건은 [깡패단의 방문] 을 통해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라고 되묻는다. 

이 두 문장이, 필립 로스의 세대와 제니퍼 이건의 세대를 연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필립 로스의 '받아들여' 라는 메시지가 순종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말하는 '오는' 것들에는 운명의 어깃장 같은 싸움거리들이 대부분이다. 필립 로스는 그런 싸움들까지 모두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피하거나 도망가지 말고, 오는대로, 버티고 서서 받아들인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도 받아들인다. 얻어터지고 깨지고 부서져도 그 자리에 서서 버틴다. 그 세대의 남자들은 그래야만했다. 등뒤에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도 오는대로 한껏 맞받아친다. 그리고 장렬하게 전사하면 아버지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제니퍼 이건의 [인비저블 서커스]는 그렇게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간 아버지와 그 뒤에 남은 가족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피비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아이와 성인의 경계를 막 넘어온 터다. 열여덟살인 피비는 여덟살 무렵에 아버지를 잃었고, 열살 무렵에 언니인 페이스를 잃었다.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어머니와 IT 관련 사업으로 실리콘밸리에서 승승장구중인 오빠가 있고, 피비는 버클리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 역시 IBM에서 일했기에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1978년. 미국이 풍요의 정점을 찍었던 시기다.     

피비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세 자녀들에게 2천달러씩을 남겼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면 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를 통해 조치해둔 것이다. 세 자녀 중 장남인 배리는 그 돈을 종잣돈 삼아 작은 사업(훗날 대박이 터질)을 시작했고,  둘째인 페이스는 남자친구인 울프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페이스는 그 여행에서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온다. 

 피비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엄마와 크게 다툰 뒤, 충동적으로 비행기에 올라 유럽으로 떠나고, 여행지에서 아버지의 변호사를 통해 자신에게도 똑같이 남긴 돈을 수령해 페이스가 유럽에서 보내왔던 엽서의 주소를 따라 유럽 각지를 누비기 시작한다. 페이스가 죽기 전 밟았던 곳들을 하나하나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피비는 페이스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가 독일에 안착해 살고 있는 울프와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페이스의 최후에 대한 숨겨진 비밀들을 듣게 된다.


정말 정신없이 읽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도 높았고, 흡인력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유려한 묘사들이 인상적이었다. 심상을 이미지화 시키는 제니퍼 이건의 발상은 정말이지 '천재적' 이라는 진부한 표현 말고는 딱히 상찬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특히 이번 작품은 개인의 의식으로 침잠하는 과정들이 유럽 각지의 구체적인 이미지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장면들을 '문장으로' 펼쳐낸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의 호흡 조절에는 약간 실패한 지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게 작가 경력을 시작하는 첫 작품이었다니...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나기도 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오롯하게 관통하는 심상은 단연, "고독" 이다.

모더니즘이 개인의 의식, 그 자체에 천착하면서 절대적 고독이라는 화두를 던졌고, 개개인으로의 분화와 독자성, 형식과 구조의 파괴를 받아들였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보다 다층적인, 다채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과제와 재조합, 재창조; 융화로 번져나갔다. 어떠한 흐름 속에서도 가장 뚜렷한 심상은 여전히 절대적인 고독, 외로움이다. 고독은 인간이 자아를 가지면서 획득한 감정이다. '내'가 '나' 임을 자각하는 순간, 고독이 잉태된다. '나' 는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 뿐이라는 절대적인 진실. 그것이 고독의 본질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각하고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어쩌면 이 수 많은 사람들 중,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결된'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기대가 '외로움' 을 잉태한다. 

인간은 홀로 태어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은 스스로를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하지만, 잉태부터 타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인의 유전자를 지닌 세포를 받아, 타인의 몸 속에서 만들어져서, 타인의 골반뼈를 부수고 나온다. 타인에 의해 보호되고, 양육되어 자라난다. 타인에 의해 생명을 얻지만, 타인에 의해 생명을 잃기도 한다.

삶이라는 거대한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족은 언제나 이 비극의 주연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자,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짐이다. 반드시 필요한 타인들. '내'가 살아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집단. 그리고 가장 강력한 집단, 살아 숨쉬는 동안에도, 어쩌면 죽음 이후에도 벗어날 수 없는, 최소한의 공동체. 

가족이라는 행복한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부모는 자녀와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자녀는 부모와 단절되기를 기대한다. 부모는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자녀가 헤아려주기를 기대하고, 자녀는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부모가 헤아려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흔히 '내리사랑' 이라고 부르는 일방적인 기대의 흐름. 가족이 비극인 이유다. 부모와 자녀는 언젠가는 반드시 단절되기 마련이다. 

반면, '또래집단' 인 형제, 자매는 타인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라이벌이자 친구이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물어뜯고, 상처를 치료해준다. 작은것도 나누고, 작은것까지 빼앗고, 사지로 몰아넣고, 사지에서 구해준다. 영원한 비교대상. 누군가에겐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고, 누군가에겐 가장 골칫덩이이고, 누군가에겐 가장 증오스럽고, 누군가에겐 가장 사랑스러운. 버릴 수 있지만, 버릴 수 없고, 죽일 수 있지만, 죽일 수 없는.

형제, 자매는 가족이라는 비극 안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를 담당한다.


피비와 페이스의 관계 역시 그랬다.

사랑스러운 소녀로 태어났지만, 태어나보니, 이미 '사랑스러운 딸' 시상대의 위층을 선점한 사람이 있었다. 피비는 세번째 자녀였다. 첫째인 오빠 배리는 경쟁에서 이미 한참 밀려난 상태였고, 아빠의 눈은 언제나 둘째인 페이스를 향해 있었다. 피비는 페이스를 향한 질시와 부러움, 동경을 동시에 느끼며 자라났고, 아빠에 대한 사랑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끼며 자라났을터다. 배리도 피비도 각자 아빠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지만, 그는 페이스만을 바라봤다.  

이 작품은 시점은 3인칭으로 전지적이지만, 화자는 작품 안에 있는 피비이다. 때문에, 피비에 대해 서술할 때에는 전지적으로 작동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관찰자의 시점으로 작동된다. 피비가 보는 방식으로 피비의 주변 인물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이 피비의 심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페이스의 행로를 똑같이 밟아가며 피비는 페이스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것은 즉 언니인 페이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아빠와 언니의 상실로 인한 상처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피비는 자신도 모르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처럼 가족의 상실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고, 그것은 아마 페이스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피비는 언니가 남긴 엽서를 지도삼아 언니의 행로를 밟으며 언니의 숨결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 그 대부분은 착각에 불과했을 것이다. 착각에 불과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면은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온다. 실제 트라우마의 심리치료 과정들 중에는,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켰던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법도 있다. 피비가 여행도중 느끼는 신체적인 고통은 마음의 고통의 표출이었고, 그녀는 끝끝내 고통을 주는 실체 그 자체에 다가서게 된다. 

 

 작가들은 대부분, 시대에 천착한다.

자신이 자라온 시대,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 할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시대. 앞으로 살아갈 시대와, 어쩌면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시대까지. 어떤 작가들은 시대상을 그려내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기도 한다. 문학이 갖고 있는 많은 가치들 중, 기록으로서의 가치는 그들 덕분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대, 아버지와 어머니, 배리와 페이스, 피비까지 격동의 시대, 피비의 말을 빌리면 "뭔가가 변화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사실 배리가 선택한 IT산업과 부와 풍요, 페이스가 선택한 모험과 변화, 파괴는 노골적일 정도로 쉽게 읽히는 상징들이다. 그것들은 역동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누구나 만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갈림길에서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마력에 사로잡힌 필연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배리와 페이스, 피비를 각자의 세대를 은유하는 메타포로 읽고싶지는 않다. 

이 이야기는 가족과 남매의 이야기이다. 서로의 고독을 보듬어주고, 외로움을 채워주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끔찍한 독설을 내뱉기도 하고, 따뜻한 치유의 온정을 나누기도 하는, 가족과 남매의 이야기다. 



 "어쨌거나." 그가 말했다. "네가 돌아오서 기쁘다. 그냥 나는 그렇다고."

  "이유를 모르겠는데, 베어."

 그는 놀란 눈치였다. "왜 이래. 넌 내 동생이잖아." 그가 말했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물기 어린 앞유리를 응시했다. 이따금 흰 연기 아래 타오르는 석탄처럼 안개 너머에서 불빛 무리가 확 밝아졌다. "오빠도 무서웠어?" 피비가 말했다. "내가 거기 가 있는 동안?"

 "그래." 배리가 말했다.(...)

 그가 말했다. "어쨌거나, 그러면서도 네가 괜찮을 거란 감은 늘 있었어. 그 감이 더 셌지, 아마도. 결국에는."

 "허. " 그녀는 실망했다.

 "그렇다고 내가 마음을 놓았다는 게 아니라-"

 "그 말이 맞는데 뭐." 피비가 말했다. "오빠 말이 맞아. 난 한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인가봐" 어쩐 이유인지 그녀는 웃었다.

 "넌 생존자야." 배리가 간단히 말했다. 진부한 말이지만 그의 진심이 담기니 뜻밖에도 진실로 다가왔다. "넌 딱 그래. 너도 나도 둘 다." 

p.496~7



상실을 극복하고, 과거로 향했던 시선을 가까스로 현실로 옮긴, 

살아남기로 한 이의 이야기다. 


이토록 고독하고 고단한 삶에,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아야 할 이유는 알 것 같다.

이 질문을, 내일도 던지기 위해서다. 

그 정답을, 내일도 찾아 헤매기 위해서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무서워 할 사람들과 함께. 


우린 생존자니까. 내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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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야상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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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도착한 주인공은 일부러 허름한 모텔에 투숙한다.

좋은 호텔로 안내하겠다는 택시에서 문을 박차고 내려, 가난하고 더러운 골목으로 찾아든다. 

허름한 벽에는 눌러죽인 벌레의 흔적들이 가득한, 좁고 더러운 방 안에서 매춘부를 부르는데, 특정한 이름을 언급한다. 주인이 다른 여자를 권하지만, 몇시간이고 기다리겠다며 그 여자만을 원한다. 

여자가 도착하자, 당연한 행위는 등장하지 않고, 주인공은 그녀에게 어떤 남자의 이름을 말한다.

그 매춘부도 알고, 주인공도 아는 바로 그 남자.

주인공은 연락이 끊긴 친구를 찾아 인도에 왔다. 

결코 찾을 수 없는 남자를.



 참 묘한 작품이었다.

두께는 굉장히 얇지만, 내러티브가 엄청나게 쌓여있는 느낌이다.

챕터는 12개로 나뉘어 있는데, 한 챕터 한 챕터가 엽편에 가까울 정도로 적은 분량이다.

시간의 흐름, 서사가 명확하지 않아서 챕터의 순서가 의미가 없다. 1챕터가 12챕터보다 뒤인 것 같기도 하고, 2챕터가 맨 앞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어떤 챕터를 다른 챕터의 앞이나 뒤에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모든 챕터에 등장하는 화자가 모두 동일인이라는 보장도 없고, 같은 인물을 찾아다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이 남자는 주인공의 친구라지만, 그 어떠한 일화도 들려주지 않는다. 친구인지도 확실치 않다. 


일전에 읽었던 다자와 요코의 [용의자의 야간열차]가 살짝 떠올랐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좀 더 혼란스럽다. 

문장은 간결하고, 묘사는 명징하다. 

단어 사용도 적확해서, 묘사되는 모든 것들이 또렷한데, 주인공이 흐릿하다. 목표가 흐릿하다. 목적지도 흐릿하다.

주인공이 찾아다니는 남자가 흐릿하다. 

무엇을 찾아다니고 있는가? 

매 챕터마다 수수깨끼 같은 사람이 등장해, 수수깨끼 같은 말을 던진다. 


 친구를 찾아다니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마지막 챕터에 엄청난 반전을 던진다.

어쩌면, 1챕터부터 11챕터까지의 이야기가 현실이 아닐 수도 있고,  주인공이 찾아다니는 그 인물이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으리란 여지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과연 이 주인공은 누굴 찾아다니는거지?" 

그리고, 

"과연 주인공이 찾고자 하는 이 사람은 주인공과 어떤 관계인거지?"

라는 생각을 하며 서사를 쫓아가던 나에게 엄청난 혼란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찾기 위한 여정을 그린 작품인 동시에, 

'내' 가 누구인지, 내가 찾는 '누군가' 는 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얇디얇은 이 책의 말미에 자리잡고 있는 12챕터는 독자들에게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1부터 10 이라는 챕터의 어느 자리에 넣어도 새로운 서사를 펼쳐낼 수 있을 정도다. 

사실은 처음엔 좀 화도 났다.

"아니, 이 사람이 장난하나!!!! 내가 이렇게 열심히 당신의 페이지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는데, 이게 말이요 당나귀요!!" 

마지막 챕터에는 픽션을 일종의 메타픽션으로 바꿀 수 있는 신박한 키워드를 지니고 있다. 

나도 언젠가 어디선가 써먹어보고 싶은,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아닌 반전이다.


'선생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한 제자가 부처에게 물었다.  

부처는 제자의 질문에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이 많은 시장에서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날아온 독화살이 그 남자의 허벅지를 뚫었다.

시장에 있던 주변 사람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진 남자에게 달려가 안위를 살피며 의원에게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화살에 맞은 남자는 치명적인 독이 퍼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날 쏜 놈 누구야!! 그 놈 보기 전엔 난 이 곳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을거요!!

날 부축하지 말고, 어서 그 놈이나 찾아봐요!! 도망가기 전에!!!"

라며 바락바락 성질을 부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네가 그 남자와 같다.' 


이 이야기뿐 아니다.

파랑새를 쫓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이야기도 있고, 무지개를 쫓는 나막신장수의 이야기도 있다. 

조금 더 신경써서 찾으면, 찾을 수 없는 것들을 찾아 짧디 짧은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멀리서 엄한 것 찾다가 평생 다 보내지 말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라는 교훈으로 귀결된다.

윗 단락에 인용한 부처의 이야기도 그렇다.

이 세상에서 평범한 삶으로는 찾을 수 없는 대답이다. 시장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형이하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형이상의 세계에 투신한다 해도 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답이다.

설사 찾아낸다 해도 그 어떤 보상도 없는 문제다.

전세계 어디에서건 이런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모든 시대에, 모든 문명에 얼마든지 널려있다.

전설이나 신화 뿐 아니라, 이렇게 근현대에도.

심지어, 이제는 다른 해석도 종종 엿볼 수 있다.

무지개를 찾아다니는 나막신장수는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종종 끝없이 도전하는 인간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산과 싸우던 남자는 비록 수명에 패했지만, 그 자손이 대를 이어 도전한 끝에 결국은 승리해 평지로 만들고 만다. 


그렇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런 인간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지만, 사고思考는 글을 통해 무한히 전래되지 않던가.

의문을 갖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그야말로 생뚱맞은 것에 의문을 가진 몇몇 인간들 덕분에 우리의 사고력을 그만큼 넓어졌다.

불에 손을 대보고, 번개를 맞아보고, 바닷속에 들어가고, 풀과 과일들을 맛보고, 동물을 해부하고, 사람을 해부하고.


이 책의 각 챕터들은 각각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의문과 그 답을 찾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마치 헤라의 시험을 통과하는 허큘리스처럼.

그리고 그 모든 시험과정이 담겼던 이야기들처럼.

인도는 신의 나라이다. 그래서, 더더욱, 신들과 만나는 이야기들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처음 만난 택시 운전수와 모텔 직원부터 기차 안에서 만난 이상한 형제와 식당에서 대화한 여인까지.


인류의 문명은 오롯하게 정답이 없는(것 같이 느껴지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발전했다. 

그 질문이 엉뚱하고 어리석을수록 정답의 가치는 높아진다.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사람은 왜 죽는가?'

와 같은 질문은, 사실, 지금도 여전히 거대한 화두이다.

이 질문들에 대해 쉽게 대답한다면, 당신은 신이거나, 아직, 좆도 모르는 그냥 인간이다.


어떻게 살것인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그렇게 묻고 있다.

너무나 얇고, 가벼웠지만, 도저히 쉽게,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나의 모든 생은 누군가에겐 단 한 문장일 수도 있다.


"모년 모월 모일 사망"



그래. 

그것이 인생이다.

중하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다른 누구에게도 무겁지 않다. 

오직 '나'에게만 무거운 법이다.

이 책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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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2-03-17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 읽고 나서 이제야 마음놓고 다른 리뷰들을 읽고 있는데요 (스포일러가 있을까봐) 열혈명호님 리뷰가 너무 좋아서 댓글을 남기고 갑니다. 말이요 당나귀요!? ㅋㅋ 그래도 역시 그 반전이 싫지 않죠.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는데 열혈강호님이 이 작품의 매력을 너무 잘 정리해 주셔서 아 리뷰는 이렇게 쓰는구나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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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수많은 작품들 중 장편 소설만 6권 정도를 읽었다. 굳이 찾아 읽으려 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여기저기 그의 책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읽게 됐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20대 중반에 읽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다.
'건강하게 뚱뚱한 예쁜' 소녀(건강하게 살찐다는 개념 자체가 좋았다)가 길잡이로 등장해, 기묘한 동물이 사는 다른 의식의 세계로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의 현실판 같았다.
 [상실의 시대] 와 [어둠의 저편] 을 읽은 직후였어서 얼핏 동화같기도 한 판타지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댄스댄스댄스]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접한 나에게 그는 리얼리스트에 가까운 작가였는데, 이런 망상공상가였구나, 싶었다.
주인공의 직업도 독특했고, 세상에 대한 묘사도 이전의 작품들과는 궤가 달라서 처음엔 적응하기가 꽤나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초반 장벽만 조금 넘어서니, 그런 이질적인 느낌들이 참 좋았다.
리얼리스트가 그려내는 몽상의 세계. 
'현실처럼 뚜렷한 꿈' 이란 느낌.
꿈 속이지만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있는 느낌이 뚜렷했다. 
그래, 백일몽, 같달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한 낮에 길 위에서 문득 꾸게되는, 그런 꿈 같았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해변의 카프카] 이다.
본격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좋다고 느낀 책이었다. 외려 일부 골수팬들은 이 책을 기점으로 외면하게 된 듯도 하지만.
(어쩌면 좀 더 미래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 전반을 다룰 때, 이 책을 어떠한 기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지금 잠깐 했다.)  
 [해변의 카프카]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와 이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관의 공유'까지는 아니고, 망상공상의 범위는 현실에 가까웠지만, '비현실적인 현상이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일어나는 세계를 그린다' 는 연장선에 함께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속 판타지를 다루는 기술이 더 익숙해져서, 되도 않게 '판타지 리얼리즘' 이라는 역설같은 명칭이라도 붙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 연장선에는 당연히 [1Q84] 도 놓인다. 하지만, [1Q84] 는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던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판타지에 무게중심이 확 쏠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암살자와 종교단체가 등장하고, 패러렐월드가 차용되었으며, 책 속 인물들까지 현실에 등장하는 [1Q84]는 여러모로 장르적 장치들이 활용된 작품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여러모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물론, [1Q84]와 부모 자식처럼 닮아있다.
특히, [1Q84] 에서  후카에리의 소설 '공기번데기' 와 관련 있는 리틀피플들이 현실에 등장하는 부분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그림 속에서 이데아와 메타포가 현실에 구현되는 부분의 아이디어와 상당히 닮아있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꽤나 묘한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화가인 '나' 에게 얼굴없는 남자가 찾아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안개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는 남자이다. 화가로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고, 초상화가로서도 평판이 좋은 '나' 이지만, 이런 모델은 처음이다. 얼굴 없는 남자의 얼굴을 어떻게 그린단 말인가?!  '나'는 얼굴 없는 남자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겨우 돌려보낸다. 
책을 다 읽으면 알 수 있지만, 꽤나 오싹한 느낌을 주는 이 부분은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이다. 마치 순환구조처럼 작품의 맨 앞에도 어울리지만, 시간상으로는 작품의 가장 마지막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얼굴이 없는 남자의 방문을 받기 한참 전으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니 '나' 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뒤적여 봤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1인칭 작품에는 종종 화자의 이름이 등장하는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는 아내인 '유즈' 와 몇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이혼조정에 맞춰 별거에 들어간다. 집과 재산에 대한 처분은 일단 아내인 유즈에게 맡기고 몇주간 정처없이 홋카이도 지방을 떠돌다가 같은 미대 동기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오다와라 지역의 깊은 산골에 위치한 저택에 신세지게 된다. 이 저택은 아다마 마사히코의 아버지인 아다마 도모히코의 자택이자 작업실이었다. 마사히코는 90세가 넘은 고령에 중증 치매를 앓고 계신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면서 빈 집 관리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마침 대학 동기이자 전업 화가인 '나' 에게 선듯 내준 것이었다. 
 '나'는 집안 곳곳을 살피던 도중, 지붕으로 통하는 다락방 입구를 발견하게 되고, 그 곳에서 봉인된 듯 포장되어 먼지를 잔뜩 먹고 있던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아다마 도모히코의 그림으로 보이는 일본화로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이 그림을 찾은 뒤, 건너편 골짜기의 화려한 저택에 사는 '멘시키' 라는 인물과 인연을 맺게 되고, 한 밤 중에 정체모를 방울 소리를 듣게 된다. 멘시키의 도움으로 찾아낸 방울 소리의 근원지는 저택 뒤편 깊은 골짜기에 있는 커다란 우물과도 같은 깊은 석실이었고, 실제로 그 안에 방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뒤, 멘시키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마리에' 라는 소녀의 초상화를 그려주게 되고,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안에 있던 기사단장의 형체가 스스로를 '이데아' 라고 칭하며 '나'의 눈 앞에 나타나며 이야기는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구조적인 완성도나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정신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려고 보니 뚜렷한 중심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다닌다. 회수되지 않는 떡밥들의 잔치, 의도를 알 수 없는 맥거핀들의 향연, 비록 '나' 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내러티브들이 단지 '나' 의 주변을 멤돌 뿐, 명확히 수렴되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모더니즘 시대의 의식의 흐름에 기반한 작품들처럼 읽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다. 흡인력은 보장한다는 의미. 거침없는 아이디어 전개와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 특유의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정갈한 문장들은 여전하다.

 멘시키와 마리에, '나' 가 만들어내는 삼각 관계, 그리고 "나" 와 유즈, 그리고 불륜남과의 삼각관계, 그리고 "스바루의 남자" 등 인물관계의 설정이 굉장히 흥미롭다.
인물들이 서로 맞붙는 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재미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성적 긴장감을 표현하는 데에는 이제 명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대사 하나하나와 행동 하나하나가 직간접적으로 성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심지어 동성간의 관계에서도. 
 멘시키와 "나" 가 보여주는 케미스트리는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문화 전반에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한 재력가에, 미적인 안목도 뛰어난 멘시키는 그야말로 성을 막론한, 매력의 화신이다. 남자라면 닮고싶고, 여자라면 만나보고 싶은. "나" 가 멘시키와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나 내용, 자세와 행동에 대한 묘사들은 몇번씩 읽어도 재미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애착과 트라우마로 인한 폐소공포증이 있는 화자 "나" 의 캐릭터도 참 좋았다. 예술가다운 섬세한 성격을 드러내기에 좋은 장면들을 무척 설득력 있게 그려냈고, 표현들도 아주 세심해서 그의 삶 자체가 부러울 정도였다.
'스바루의 남자' 는 얼핏, 맥거핀처럼 보였다. 중심 서사의 주변에서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매우 잘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맥거핀이랄지, 떡밥이랄지, 그렇게 중심 스토리의 긴장감을 완화하거나, 가중하는 등 장치의 사용에 무척 능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정말 빛을 발한다. 

 내가 이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서사적으로 겉돈다고 느낀 부분은 이데아와 메타포, 그리고 그림 속 세계에 대한 부분이다.
이데아나 긴 얼굴의 남자(메타포) 같은건 집어 치우고, 인물들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었어도 굉장히 밀도 깊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됐을 것 같다.
 결론만 놓고 보면, 이데아와 메타포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과거를 서술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이들 존재가 '역사적 사건' 을 끌어내기 위해 다소 억지로 갖다붙인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절대적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서사 자체가 비틀리는 느낌이었다.
 
 소설에서 작위적인 설정이 과연 단점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 소설이 곧 작위적인 이야기 아닌가' 라고 대답할 것이다. 작위를 숨기는 것이 소설의 '기술' 일 수는 있겠지만, 그 기술의 수준으로 소설의 완성도나 의미를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이데아'와 '메타포'의 등장과 활용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다.
[1Q84]의 세계처럼 패러렐 월드를 상정한 것도 아니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처럼 "의식핵" 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데아의 등장은 정신분열처럼 불현듯 등장하고, 그 모습도 뜬금없다.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온다.

  물론 독자들에게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의도였을 수는 있으나, 비슷한 장치가 사용되는 [해변의 카프카] 같은 작품과 비교하면, 관념적이고 신화적인 피안의 존재들 피상의 세계로 불러오는 방법이 거칠고 투박하다.
 특히, 뭐든지 "모른다" 고 설정들을 얼버무리는 방식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이질적인 존재를 이 세계로 불러들이는 방식은 판타지 작가들도 잘 하지 않는 방식이다. 마법을 쓰거나 드래곤이 등장하는 데에도 세계관에 따른 명확한 개연성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이데아와 메타포의 등장은 뜬금없을정도로 개연성이 없고, 이들의 존재적 증명에 관해 이야기 안에 어떠한 힌트도 없다. 무슨 이유로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다른 세계와의 접점이 생겼으며, 이데아라는 자가 어떻게해서 현실에, 그것도 "나" 와 "도모히코" 에게만 보이는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또 그 세계가 지하 석실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그 어떤 인과관계도 제시되지 않는다. 단순히 "모른다" 고 얼버무릴 뿐이다.  
캐릭터의 등장과 활용에 비하면 허술하게 툭툭 던진 느낌인데, 이것이 의도적이라면, 어떤 의도였을지 감이 잘 안잡힌다.

 일단, 그렇다 치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이데아와 메타포를 매우 '뜬금없이' 등장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 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물고기 비가 내린 것 처럼(이것은 실제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뜬금없는 쪽으로 흐르게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데아" 였을까? 왜 하필 "메타포" 였을까?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하루키가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 부분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주인공 "나" 는 화가이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미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
미술을 손재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림은 사실 '손'의 재능보다 '눈'의 재능이 더 필요하다.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실제 스케일의 오브제들을 캔버스라는 제한된 공간안에 적정 배율로 축소시켜 집어넣는 과정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뇌에서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직관적으로 이뤄지는 속도가 '그림' 의 재능이다. 
 가끔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릴때 연필을 든 손을 쭉 뻗어 비율을 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렇게 정확하게 축소시킬 수 없다. 때문에 연필을 가늠자로 이용해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자신의 눈과의 거리에 따른 배율을 측정하여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의 일정 수준에는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 화가의 성격이나 재료의 사용법에 따라 약간 편차는 있지만, 시간을 들이면 누구나 대가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때문에 미술 작품의 완성도는 붓질이나 재료의 활용도로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정도로 과감한 사용법이나 활용도는 인정받지만, 연습하면 누구나 똑같이 따라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똑같은 붓과 물감, 종이를 주고, 똑같은 사과를 줘도, 100개의 완전히 다른 사과 그림이 나온다.
 눈은 뇌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배아가 태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뇌에서 더듬이처럼 두개의 줄기가 뻗어나와 눈이 되고, 꼬리처럼 줄기가 뻗어나와 중추신경이 된다. 중추신경은 뼈와 근육, 피부로 감싸지지만, 눈은 그렇지 않다.
 눈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돌출된 뇌'인 것이다.
화가들이 해부학을 공부하고, 산업디자이너들이 기계공학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무조건 뇌를 거친다. 그리고 화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것들로 필터링되어, 손을 통해 캔버스에 옮겨진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에서 나온 인물들의 이름이 "이데아" 이고, "메타포" 인 이유일 것이다.
화가의 그림속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어떠한 현실이 화가의 머릿속에서 분해되고 재구성되어 종이 위에 새로운 형상으로 재조합된다. '정신(이데아)' 과 결합되어 일종의 아이콘화, 혹은 도식화, 혹은 기호화, 혹은 이미지화(이 모든 것들을 '은유(메타포)' 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는 은 일종의 기록화이다. 과거에 오스트리아에서 겪었던 사건은 도모히코의 삶을, 삶에 대한 시각을 변모시켰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손을 통해 뇌 밖으로 흘러나와 캔버스 위에서 형체를 얻었다. 
다른 장르의 그림들보다 더더욱 정신과 은유와 관련이 깊다.

 그렇게 읽다보니, 얼핏 맥거핀처럼 사용된 "스바루의 남자" 가 "나" 에게는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사실이 읽혔다.
마리에의 감상이었던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다' 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을 터. "나"는 스바루의 남자를 그리면서 창작자로서의 '벽' 을 인지한다. 자신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한 '이데아' 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어쩌면, "나" 가 홋카이도를 여행했던 그 남자는 아직 그리지 않은 '스바루의 남자' 에서 튀어나온 이데아일수도 있다. 과격한 방식으로 성관계를 맺었던 여인은 역시, 아직 그리지 않은 그림에서 나온 '메타포' 였을수도 있고. 

자신의 창작물이, 생명을 얻고 형체를 얻는다는 것. 그림을 그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은 생명을 얻는다. 
"나"가 이혼중인 아내 유즈와 꿈속에서 관계를 맺었던 것 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아이가 잉태된 것 처럼.
 창작자들에게 창작물은 자식과도 같다.
애정과 정성을 쏟는 대상이고, 산고의 고통에 비한다는 창작의 고통도 있지만, 완성되어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순간이야말로 자식의 탄생과도 같다. 창작물들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순간, 아이가 부모의 의도와 상관 없이 독립된 인격체로 자라나듯이, 작품 역시 창작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으로 나름의 생명력을 얻기도 한다.

 어쩌면 도모히코에게 [기사단장 죽이기]는 '원치 않았던 자식' 같은 작품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지 말았어야 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나' 가 마리에의 조언으로 '스바루의 남자' 그리기를 멈춘 것 처럼, 도모히코도 '기사단장 죽이기' 그리기를 멈췄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도모히코가 [기사단장 죽이기] 를 그린 정확한 시점이 작품 속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일본화로 완전히 전향한 후가 아닌, 전향을 고려하던 '도중' 에 그렸을 것 같다.
 충분한 수련을 거치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전. 서양화가에서 일본화가로 전향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작품 발표를 하지 않는다고 화가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췄을 리는 없다.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 여러 이유로 일본화로 화풍을 바꾸는 동안 많은 습작을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사단장 죽이기] 는 마지막 습작이 아니었을까?
 도모히코가 공백기동안 몰두했던 그림은 온전히 자신의 치유를 위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도모히코는 일본화로부터 작은 치유를 경험했고, 전향의 계기가 마련됐을 것이다. 어쩌면 서양화의 본고장이나 다름없는 오스트리아에서 얻은 상처였으니, 서양화 자체가 상처를 들쑤시는 것이었을수도 있고.
여하튼, 도모히코는 과거의 것들을 떨쳐버리기 위한 그림을 그렸을터다. 그리고 그 와중에 과거의 기억을 은유하는 상징으로 가득찬 그림을 그려버린 것이다.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에 녹아든 심상(이데아)는 "죽음" 이다. 
  "나" 가 "얼굴 긴 남자; 메타포' 를 따라 방문했던 공간에 있던 거대한 강은 사후 세계로 건너가는 레테의 강이 연상된다. 도모히코는 그림 안에 "죽음" 이라는 이데아를 메타포로 투영했다. '기사단장'의 형태를 한 이데아의 죽음을 통해 메타포가 등장하고, 그 뒤의 일들이 벌어진 이유이다.
죽음이 죽는 역설.
어쩌면 그것이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여는 키였을지도 모른다.
이데아, 메타포, 그리고, 역설.  

 어쩌면 도모히코와 "나" 가 나누는 관계는 일본의 전쟁세대와 전후세대의 단절이나 소통, 뭐 그런 평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갈등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는 수많은 작품들에 넘치고 넘쳤으니, 특히나 사람 관계를 잘 그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굳이 중증 치매로 인해 말도 안통하는 노인을 전쟁세대의 메타포로 활용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예술 작품이 품고 있는 의미와 해석, 그것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과 가치는 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후대로 전달된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오히려 예술에 몰두한 예술가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예술가, 즉, 과거시대의 예술가와 현대시대의 예술가의 차이를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확실한 건, "나" 는 도모히코와 다른 아버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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