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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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챕터는 총 세개로 이루어져 있다.

"1996" 과 "1997". 그리고 에필로그인 "그 후" 이다. 하지만, 마치 이 작품은 앞의 챕터들에 비해서는 얇디얇은 몇 페이지 "그 후" 를 위해 쓰여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마지막에 던지는 파문은 상당하다. 


소설은 1996년 8월, 마지막까지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화자" 가 컬럼비아 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 오리엔테이션에서 "빌리" 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을 설명하는 몇 문장들과 빛과 공기마저 느껴질만큼 디테일한 분위기 묘사가 순식간에 나를 잡아끌었다. 

화자가 빌리와 함께 수강하는 과목은 창작과 합평으로 이뤄진 워크숍으로 소수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창작물에 비평을 하고, 함께 뒤풀이를 하며 교류하는 순서로 이뤄진다.

이런 형태는 국내의 문예창작 수업에서도 자주 이뤄진다고 알고 있다. 문창과 출신의 지인들로부터 이 과정의 잔혹함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고, 분야는 다르지만 나 역시 창작에 살짝 발을 담궜던 사람으로써 비슷한 과정을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마치 발가벗겨져 몸의 구석구석을 평가받는 느낌. 나아가 X-ray 나 CT, MRI로 피부 아래, 근육 아래, 뼈와 장기들까지 샅샅히 드러나는 느낌.

그것은 도무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과정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리라고 생각한다. 

빌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화자를 변호해줬던 인물이었다. 

이는 이후 화자가 빌리에게 품게되는 막연한 호의, 또는 호감에 대해 높은 설득력을 부여함으로써 이후에 전개되는 소소한 대화들과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든다.

작가는 이렇게 능숙하게 화자와 독자들에게 빌리를 소개하고, 동시에 순식간에 매료되게 만든다.  

곱씹어보면 뜨악한 일이지만, 화자가 안지 2주밖에 안된 빌리에게 홈 쉐어링을 제안하는 부분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화자와 빌리가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첫눈에 반해서 시작하게 되는 연인관계와 비슷하고, 홈 쉐어링을 시작하면서 전개해 나가는 에피소드 역시 그러했다.

호감에서 시작된 무조건적인 호의와 정기적으로 갖는 둘만의 시간, 자연스러운 집안일 분담과 그로인해 시작되는 갈등, 그렇게 쌓이는 오해와 악감정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전형적인 퀴어 로맨스로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화자는 빌리의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매일 바에 출근해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돈을 벌어 생활비를 벌고, 학비를 벌어야 했던 빌리는 심지어 바 지하 창고에 딸린 다목적 룸에서 살아야 했지만, 화자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자녀로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부모님이 지원해 주셨고, 좁은 침대와 리놀륨 바닥으로 대표되는 대학 기숙사조차도 마다할 수 있었다. 지옥같은 뉴욕의 집세를 무시하고 대고모가 거주하던 좋은 아파트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비는 일리노이주와 보스턴주라는 서로의 고향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빌리는 "블루칼라", 화자는 "화이트 칼라" 를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노골적인 전형성을 가지고 있다.

이후에 드러나는 빌리의 정치적인 성향, 자유로운 성생활, 인종적 편견과 추구하는 지향점 등이 이러한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어준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므로, 저자는 독자에게 빌리의 감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오롯하게 화자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데, 우리는 화자처럼 오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빌리에 대해 무조건적인 애정을 갖게 된다.

사실, 빌리는 엄청나게 전형적인 인물이다.

특히 문학 등 예술을 소재로 다루는 작품에서는 여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의감 있고, 압도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지만, 겸손하기까지 할 뿐 아니라, 리더쉽까지 있는 인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만화에 등장할 법한 인물이다.

이 작품의 시점상 화자가 보지 않는 동안 빌리가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화자의 눈을 통해 전달되는 빌리의 전형성(과 그로 인한 변화) 때문에 빌리는 갈수록 매력이 떨어져갔고, 반대로 화자의 감정에 더욱 이입하게 되면서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화자가 저지르는 행동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사족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진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마지막 챕터로 향한다.

고작 몇 페이지에 불과한 이 부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좋아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싫어하게 될 터이다.


책을 덮은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필립 로스의 [울분] 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필립 로스는 불가해한 삶의 불공정성, 결코 "올바른 선택" 이란 것이 없는 수많은 삶의 갈림길에 대한 웃기지 않은 농담같은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다. 삶을 뒤바꾸는 농담 같은 선택. 화자 역시 그런 선택을 한다.


화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리한 여러가지 배경을 갖고 태어났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갈구하는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고, 빌리는 그 반대였다. 

빌리는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히며 사고를 넓혀가는 한편, 화자는 자신만의 아파트먼트 안에서 안온함을 누리며 더 단단한 껍질 안으로 침잠한다.

어쩌면 "창작" 이라는 욕구는 화자가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유일한 비상구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챕터는 그가 그 비상구의 문을 완벽히 닫은 후의 이야기였다.

빌리의 삶과 업적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내심 평가절하 하는 모습은 거대한 자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 그려지기도 했다.

정말 많은 부분, 콕콕 찔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빌리가 되고 싶지만, 화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창작의 꿈은 갖고 있지만, 재능은 타고나지 못한.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필멸하는 존재로서 가장 근원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지점은,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라는 잣대는 언제나 시대와 상황이 결정한다는 부분이며, 사람들 사이에 재능이라는 차별점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재능이란 것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상황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박형서 작가의 "신의 아이들" 이라는 작품에서는 소설에 대한 엄청난 재능이 있지만,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으로부터 재능을 발견했지만, 개인의 고집이라는, 불가해하고 불공정한 상황이 벌어진다.


위대한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으로 간섭할 수 없는 '적절함' 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아무리 적절해도 또 바뀌기도 한다. 한때는 모든 대중을 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던 작품도, 어느샌가 성차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로 바뀌어 파쇄기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모두가 절대라고 믿는 정의나 도덕, 윤리관은 이념과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파쇄기 안으로 들어갔던 작품들이 언젠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다시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추앙받는 작품들도 미래의 어느땐가 다른 평가를 받으며 스러질 수도 있다.

너무나 불공정하고, 너무나 불가해하고, 너무나 괴롭지만, 중독적이고, 또 중독적이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지만, 창작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다.

창작의 기술은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훈련하고 쌓아간다. 

이는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히고, 엄마에게 "안먹었어요." 라고 하는 순간 시작된다. 태어나면서 하는 숱한 거짓말들과,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기만들, 좋아하는 이성에게 어필하기 위한 메시지와 동갑내기 사이에서 돋보이기 위한 행위들, 장난감을 갖고 노는 동안 하는 수많은 공상들과 책과 드라마, 영화, 만화를 보며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창작" 의 기술들이다. 

누군가는 이 과정 속에서 창작자로의 꿈을 꾸게 된다.

마치 물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신의 숨결을 느껴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그것을 보고 자연현상에 궁금함을 느껴 과학에 투신하는 사람이 있듯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 빌리와 화자,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같은 인물들이다.

이렇게 탄생한 창작 지망생들은 더 많은 기술을 익히고, 수준 높은 창작물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알아가게 된다.

어느정도 학습을 한 지망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자기혐오에 빠지는 쪽과, 자기애에 빠지는 쪽이다.


이 작품이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었던 이유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와 빌리가 이미 대학 4년 이상의 학업을 마치고 심화 단계인 대학원생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이미 이 벽을 넘어선 단계이다. 화자가 친한 친구들 중엔 데뷔한 친구들이 아예 없고, 화자 자신도 교열하는 일을 파트타임으로 꽤 해본 인물이다.

전업작가가 되기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학업중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화자도, 빌리도 아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친구들은 아니다.

다만 빌리는 서너기수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재능을 타고난 건 맞지만, 동 세대 미국을 통틀어보면 그다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사실 그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화자의 자기혐오는 곤란한 상황이면 어김없이 터지는 땀샘으로 표현된다.

그는 스스로의 역량을 알았고, 재능이 없음을 알았다. 재능이 없는 이들은 기술에 집중한다. 그리고, 사실 기술은 재능의 부족을 상당히 보완한다.

작품 안에서 지속적으로 화자는 플롯과 구성이 탄탄한 작품을 만든다는 평을 듣는다. 

거기에 "뭔가" 가 결여되었다는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기술로 보완되지 않는 "뭔가". 사실 그것은 재능의 영역일 것이다.

세상에... 창작하는 이로써 가장 괴로운, 그리고 어려운 과제인 셈이다.

애초에 갖고 있지 않은걸, 작품 안에 녹여야 한다고 하는 셈이니, 이보다 더 무책임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빌리는 그 "뭔가" 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화자는 빌리가 수정해준 원고로 작은 승리를 한번 맛봤고, 그 뒤로 그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빌리는 자기혐오와는 달과 태양처럼 동떨어진 존재다. 외모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이 작품 안에서 유일하게 아름답게 형용되는 외모도 한 몫 했을테고, 장학금을 받는걸 기본으로 생각할 만큼 어느정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화자는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쇠처럼 그에게 끌렸을터다.

그리고, 결국은 그에게서도 듣게되는 "뭔가" 의 "결여".

아마 화자에게는 그 지적이 쐐기처럼 깊게 박혀있었을터다.

책 속엔 나오지 않지만, 대학때에도, 어쩌면 그 전부터도.

그리고 그 쐐기를 빌리가 내려치는 순간, 그 울림이 어딘가로 폭발한 것이었을 것이다.

화자가 머물던 아파트먼트는 자기혐오를 막아주는 유일한 둥지였다. 비록, 대학원시절 한정이었겠지만, 그 안에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던.

그리고, 그 둥지가 뭉개지는 순간, 화자는 자기혐오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삶이라는 연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지만, 빌리를 통해 잠깐 가질 수 있었던 "뭔가"와 결별하고, 창작이라는 세상과의 소통마저 포기하고.


나는, 화자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빌리가 마지막에 외쳤던,

"여기서 평생 살 생각이냐" 는 말이 귓가에 쟁쟁 울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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