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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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비약, 빈곤, 어설픔, 필력 부족, 오탈자, 통계 및 검색오류, 스압 주의 





쇼군 해임, 막부철폐, 사실상 왕정복고. 

메이지 연호 발표, 도쿄 천도 - 1868

서남(세이난) 전쟁- 1877(메이지 '유신'의 끝)

헌법발표 - 1889 

청일전쟁 - 1894년(~1895)

러일전쟁 - 1904년(~1905)

을사늑약 - 1905년 

진주만 공습 - 1941년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 일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이 작품은 대략 1908년쯤부터 정확히 1912년까지, 몇 년 동안 교류한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화자인 주인공은 도쿄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고향에서부터 막 상경한 참이다.

해수욕장에서 한가롭게 바다를 즐기던 중, 서양인이 눈에 띄었고, 그 옆에 있던 '선생님' 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시 일본에서도 서양인을 구경하기란 그렇게 흔치만은 않았을터다.

그렇게, 서양인에게 눈을 빼앗기고, 그 옆에 서 있는 선생님을 발견했다. (아...이 이미지의 함의도 이제 알겠다. 밑에 설명하겠다.)

주인공은 마치 영혼의 동반자인마냥, 정해있던 인연이었던 것처럼, 이유없이 호감을 느꼈고, 맹목적인 경애를 느낀다.


화자와 선생님과의 교류 과정은, 일방적으로 구애하고, 거절하는 듯하게 흘러간다.

연애물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밀고 당기는 과정을 통해 '나' 는 결국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를 받는 관계에까지 이른다.


선생님은 고학력자임에도 현실을 등진 인물이다.

그 이유를 줄곧, '나는 저열한 인간입니다' 류의 이유로 설명한다.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지금의 열정은 언젠가 사그라들 것이다. 나를 존경한다며 좇지만, 언젠가는 등지게 될 것이다.  

도쿄 대학 출신에 수많은 책을 섭렵하고 온갖 지식으로 꽉꽉 채웠지만, 그는, 한마디로 '한량' 이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재산으로 한가롭게 산책을 하고, 해수욕을 하고, 독서를 하며 지낸다.

세상으로 나갈 이유는 없다.

인간은 원래 믿을 수 없는 존재이고, 선생님 자신 역시 그러하기 때문. 선생님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시대가 생명을 소흘히 여기곤 한다.

수많은 역사가 '대의' 라는 실체 없는 정신 하에 수많은 젊은이들을 불쏘시개처럼 전쟁터에 쏟아부었고, 지금도 여전히 쏟아지고 있다. 애국, 애족, 신앙...어떤 단어도 좋다. 모두 실체 없는 '정신' 을 위해, '실체' 를 쏟아붓는다.

제 2차 세계대전은 단순추산으로 5천만명 이상이 죽었다. 몇 년 간 한국 국민 전체가 다 죽었다. 

이것은 단순추산이라, 전쟁 후 그로 인한 후유증은 아무것도 집계되지 않았다. 전쟁 후 외상이나, 전쟁 중 부상의 후유증 등은 아무것도 집계되지 않은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후로 집을 잃고, 고향을 잃어 빈곤 속에서 아사하고, 동사했다. 전쟁 고아들은 대부분 죽었다. 특히 원자폭탄을 직격당한 일본 국민들의 후유증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뿐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은 단순히 추축국과 연합군의 협정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중동을 안정시키고 이스라엘의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영국은 조약들을 남발했다. 결국 터키와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통해 중동 분쟁의 불씨를 제공했고, 일본이 철수한 뒤의 만주를 둘러싼 중국과 소련의 영토분쟁, 나아가 중국 내부의 국공 분열에 영국과 미국이 깊숙히 개입했다. 결국 한국전쟁의 가장 큰 빌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뿐 아니다. 프랑스가 약해진 틈을 타 베트남의 독립전쟁이 시작됐고,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에 소련과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의 단초도, 흐름으로 보면 제 2차 세계대전이다. 넓게 보면1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이기도 하므로, 이 모든 비극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이다. 

 쥐가 발가락을 파먹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참호 안에서 젊은이들이 어이없이 죽어갔다. 

실제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병사의 절반은 진창으로 걸쭉해진 참호의 바닥을 통한 수인성 전염병이나 작은 부상으로 인한 패혈증과 같은 합병증이었다. 아군의 어이없는 폭격으로 사망했고,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자국의 젊은이들의 머리에 아낌없이 총탄을 쏟아부었다. 자국의 귀족들이. 소위 '지도층' 들이. 


 총과 대포가 아닌, 칼과 창 같은 냉병기의 시대에도 전쟁터는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로마에서 첫번째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다음 번 징집때 십부장(1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대장)으로 승진했다. 그 전투에서도 살아남아 다음번에 또 징집되면 백부장(10명의 십부장을 지휘하는 대장)으로, 그 다음번엔 천부장(10명의 백부장을 지휘하는 대장) 으로, 그 다음번엔 만부장(10명의 천부장을 지휘하는 대장) 으로 징집됐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보면, '그러면 부대에는 천부장 만부장이 신병만큼 많겠다!!' 고 생각하지만, 그렇게까지 승진하는 베테랑 병사는 거의 없었다. 백부장에 이르기 전에 모두 죽었다. 지난 전쟁에서 우리집 아들이 죽었으면, 이번엔 우리집 아들이 죽을 차례였다. 그 시대엔 모든 평민들이 그렇게 받아들였다.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였다. 그 시대의 종교는 오로지 전쟁터에서 죽는 영혼들을 위한 종교였다.

모든 늙은이들이 젊은이의 죽음을 찬양했고, 선동했다. 

천부장, 만부장은 거의 귀족 자제들이 내리 꽂혔다. 이런 낙하산 인사들이 뜻밖의 지휘력을 발휘해 백부장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풀잎관을 받았다. 이런 사례도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귀족 자제들은 백부장들 덕분에 목숨을 구제하곤 했다. 처음 소집되어 훈련받고 배치된 신병들은 베테랑 병사 뒤쪽 열에 위치했음에도 대부분 그 전투에서 사망했다. 


 총과 대포의 시대에는 그 규모가 훨씬 커진다.  

러일전쟁, 특히 그 시작점인 뤼순 전투는 '20세기 첫 전쟁, 첫 전투' 로도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노기' 장군이 출전한 그 전투다. 10개월간 '5만 9천명' 의 일본군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뤼순 항구는 러시아의 몇 안되는 부동항이었다. 일년 내내 쓸 수 있는 부동항구는 바다까지 얼어붙는 혹한의 러시아에서 정말 중요한 항구였고, 러시아와 일본군들은 이 항구를 두고 지리한 소모전을 펼쳤다. 뤼순 항 부근에는 전략상 중요한 고지가 있었고, 러시아는 이 곳에 단단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노기장군은 지리한 소모전 끝에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무모한 돌격 작전을 시도했고, 엄청나게 많은 병사들이 거의 맨몸으로 달려들어 이 고지를 손에 넣었다. 그 과정 속에 노기 장군은 자신의 두 아들을 잃었고, 성공은 했지만, 무리한 작전을 감행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할복 하려 했으나, 메이지 일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쟁의 광증 속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니, 당대에 도쿄 대학을 나온 지식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도쿄 대학은 일본 유일의 제국대학이었다. 거의 아시아 유일의 근대 대학이었다. 일본은 서양 문물과 지식을 통해 '근대' 를 이룩하고자 했다. 지식들을 닥치는대로 수집했다.

이런 사실들에 누구보다 밝았을 그들은, 오히려 무력감에 휩싸이지 않았을까?

지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학문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세상은 전쟁의 시대였다. 


일본은 실제로 전쟁으로 이루어진 국가다.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 을 통해 일본인을 '누구나 칼을 지니고 다니는 늑대같은 호전성을 가진 민족' 이라고 표현했다. 

막부 말기, 일본 사회에서 무사계급은 신분상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상급 무사가 길을 걸을 때, 하급무사는 길 아래, 논이나 밭으로 내려가 상급 무사가 지나갈 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

농민들은 고개를 조아려야 했고, 상급 무사는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는 마음대로 베어 죽일 수도 있었다. 사무라이 정신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고, 칼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이 계급 구조는 오히려 공고해지고 있었다. 사실상 일본의 모든 권력이 모든 사무라이들의 사무라이인 '막부' 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막부의 수장인 쇼군은 관직상 왕 밑이었지만, 모든 군사력을 틀어쥐며 사실상 백여년간 일본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의한 신분제로 이루어진 사회 구조에 분노한 대표적인 인물이 조슈 번의 하급 무사 '사카모토 료마' 였다. 메이지 유신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인 사카모토 료마는 혁신적인 개혁을 통해 정부 형태의 변화에 크게 기여한다.

 비록 일본 전체가 막부파와 일왕파로 나뉘어 치열한 내전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탁월한 책략가이자 실용주의자였던 사카모토 료마의 활약으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왕파에 의해 막부는 해체되고, 쇼군이란 관직 자체를 없에는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의 첫 장을 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메이지 정신' 이라고 부르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메이지 정신이란 '일본식 근대화' 라고 할 수 있겠다.

왕정 복고를 어떻게 근대화와 연결시키는지, 왕을 천황으로 칭하는 신격화가 어째서 근대화와 맥이 닿는지 명확히는 모르겠지만, 전제 군주를 넘어 신격화된 왕을 섬기며,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유행했던 일본식 근대화의 표면적인 모습이었다. (이것을 '화혼양재' 라는 논리로 설명하기도 하더라. 화혼, 즉 일본의 혼과, 양재, 서양의 재산이 양립, 조화를 이룬다는 논리이다. 고로, 천황을 신처럼 섬기며 충의를 다하고, 서양의 문물과 지식들을 흡수하는 것이 일본의 메이지 정신의 거친 요약이다. )

이러한 지식들은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몰아가고, 국부는 서양 무기를 수집하는데 쓰였다.

지식은 무기를 개량하는데 쓰였고, 국력은 오로지 조선을 병합하고, 청나라로 향하는 길을 뚫는 것에 쏠렸다. 

결국,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하며 조선을 흡수했고, 중국 대륙에 만주국을 세웠다.

화혼양재란 결국 일왕을 충심으로 섬기고, 서양식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이었다.

오직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는 것만이 근대국가 일본, 일등국가 일본의 모토였다. 당시 일본의 권력층은 오직 그것을 위해 똘똘 뭉쳤다.



당대 일본인 지식인들이 '모두' 이러한 불합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외국의 지식을 흡수한 지식인들이라면, 시민의식과, 민주의식, 전체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커다란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예민한 지식층, 문인들이라면 더욱 그러했을터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생님' 은 어떤 포지션이었을까??

무력감에 빠진 지식인의 모습 속에 넣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노기장군과 병렬로 세운다면, 더 볼만하다. 무력감에 빠진 당대 지식인의 모습과, 성과를 이루었으나 죄책감에 사로잡힌 삶을 산 군인. K는 무력감 속에서 무력하게 희생된 평범한 사람들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생님과 노기 장군을 실체 없는 '근대성', 메이지 '정신'의 아이콘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양인' '옆'에 서 있었던 '선생님' 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 경우에도 K는 무력한 희생자다.

작품의 화자인 주인공 역시 선생님의 희생자로 전락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앞에서 메이지 일왕의 죽음과 함께 메이지 정신이 끝장난다.

메이지 일왕과 노기장군, 선생님의 죽음을 일렬로 세우면 설득력이 생긴다.

실체 없는 근대성, 전쟁터로 내몰린 군국주의, 가장 일본적인 혼인 '천황' 이라는 개념. 이 모두를 동시에 죽인다. 수명을 다한 죽음, 자살, 그리고 할복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죽음과, 부자연스러운 죽음, 그리고 오로지 일본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인 할복을 통해서.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나쓰메 소세키가 가장 그리고 싶었던 엔딩이었을터다.

자신의 눈 앞에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메이지 정신을 끝장내고 싶었던게 아닐까.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에는, 모든 이미지들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한참을 멍~ 하니 있었다. 

일본 작가는 자신의 사회를 무조건 찬양했으리란 고정관념 때문이었을까??

일본인들이 사랑하면, 오직 일본을 찬양했을거라고 생각했던걸까?

심지어 추리 소설에서도 '사회파 추리물' 이라는 사회 비판적인 장르를 개척한게 일본인데. 왜 그런걸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문장이 아름다워서였을까?? 

어느 사회에서도 자국에 대해 찬양 일변도인 작가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아무래도 난, 지독하게 편협한 관점으로 이 작품을 접했나보다.


하지만, 독서모임에서 어떤 분이 '이 선생님의 행동과 모습들이 역겨웠다' 는 표현을 아주 직설적으로 해주시더라.

그 말씀을 듣는순간, '맞아, 나도 그랬는데' 라고 퍼뜩 떠올랐다.

그리고, 사실 그 모임 안에서도, 선생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만 있었지, 그 선생님에 대한 '자신의 인상' 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선생님이라는 인물은 표리부동하고, 일관성이 없는 인물이다.

사교적이지 않다면서 외국인과 해수욕을 즐기고, 사람을 믿지 않는다면서, 아내의 핀잔을 듣고 싶지 않아 노심초사하는 인물이다.

재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서, 재산을 빼돌린 친지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고, 그 친지에 대한 미움을 전 인류에 대한 미움으로 확대 해석한, 일종의 과대망상적 사고에 빠져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자신의 지식은 쓸모없다면서, '나' 에게 훈계를 끊임없이 하고, 자신은 저열한 인간이니 '찾지 마' 라면서도 '찾아주어 기쁩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굳이 사양하는 K를 자신의 하숙집에 데리고 온 인물인 동시에, K를 죽게 만든 인물이다. 

이 행동들이 역겹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표리부동하고, 불합리한 인간을 그렸다.

그리고, 그런 인간에게 불가해하게 빠져드는 '나' 를 그렸다. 


그것이 '정신' 의 허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배웠다' 는 식자층은 훨씬 더 쉽게 '허상' 에 빠져든다.

게다가 그 '배움' 이 타인과의 교류를 배재한 채 스스로에게 집중한, 편협한 배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누구나 아는 만큼 보기 마련이다.

이 책을 새롭게 읽은 나 역시 그렇다.


나쓰메 소세키는 당시의 시대를 통렬하게 비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그린 '선생님' 은 가장 선생님이여서는 안되는 선생님이었다. 그게 작가의 의도였다.

그 시대 전체가, 그렇게 선생님이여서는 안되는 선생님을 받들어 모시고,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시대였다.

결국 그 시대는, 수십년을 이어져 하와이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폭탄을 얻어맞을 때 까지 지속됐다. 

나쓰메 소세키는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그 시대에 대한 경종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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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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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 10년만에 다시 읽었다.

2008년 1월 8일에 쓴 감상문에서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다. 

10년 전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니, 안타깝게도....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하기는 힘들다.

난 참, 무의미하게 10년을 보냈구나, 싶다가, 10년동안 블로그에 적은 글과 그림들을 살펴봤다.

그렇게 무의미하지도 않았구나, 싶기도 하다.

통장의 숫자가 내 삶을 평가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자위나 정신승리, 라고 해도, 어쩔거야. 내 삶인데. 


작가의 지식과, 그 지식을 현실에 대입시키는 통찰력, 지식인 특유의 허영과 과시욕, 동시에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희망 등이 물씬 느껴진다.

10년만에 읽어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은 그대로지만, 진지함과 해학을 오가는 정서들도 그대로였다. 

르네는 여전히 고독 속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희구하며 만끽하고 있었고, 팔로마는 여전히 풍요로움 속에서 감성을 말려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책의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주 여러개로 쪼개져있는 각각의 챕터마다 주제의식이 명확했고, 그것들을 풀어내는 사유의 방식, 치열한 관찰을 수반하고 차곡차곡 쌓아온 지식에 기반한 사색을 통한 통찰 등이 워낙 잘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서, 가장 가까운 한 챕터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였다. 서사의 줄기를 따라가기 위해 애쓰기보다 매 페이지, 모든 문장들이 소중했고, 아름다웠다.

특히, 하위문화(서브 컬쳐)랄 수 있는 일본의 망가부터 고급문화랄 수 있는 클래식 오페라까지 망라하는 르네의(작가의) 문화적 소양이 부럽고, 흥미로왔다. 때문에, 후반부에 펼쳐지는 르네와 팔로마의 드라마는 덜 극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역시 다시 읽으니, 각 인물들의 드라마가 새롭게 다가왔다.

당시에는 르네의 삶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새삼 내 나이때의 르네를 생각하니, 글쎄, 그렇게 안쓰럽지도 않더라.

르네는 비록 초졸이지만, 독학을 통해 많은 문화와 예술을 접했고, 타고난 재능으로 그것들을 '습득' 해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은 단순히 '감상' 하는것 만으로는 소양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는다.

피아노를 쳐본 사람이 듣는 피아노 독주와, 피아노를 전혀 쳐보지 않은 사람이 듣는 피아노 독주는 감상의 단계가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다. 회화나 문학도 마찬가지다. 직접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술 너머 작가의 심상이 존재한다. 컨텍스트가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분야가 있을까?

어떤 분야에서든 간접경험은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독학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아는만큼 보이고, 들리기에. 

우리에게 선생님과 선배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르네는 선생님과 선배님이 없이 오로지, 스스로 찾아서 들리고 보이는대로 빨아들였다. 관련된 지식은 책을 통해서 접했을 것이다.

우리는 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책' 이 그대로 '지식'으로 체화되지 않는다. 어디 책 뿐이랴. 수학 공식을 외웠다고, 단숨에 수학 점수가 늘지 않듯, 철학책을 읽었다고, 이기론과 이원론으로 세상을 볼 수 없듯,  단지 보고, 듣고, 읽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의 지적 수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올바른 책 읽기에 대한 책도 있다!!  

그렇다고 르네가 아주 치열하게 공부를 한 것도 아닐터다.

그런 르네가 그정도의 철학적 사유와 문화적 소양을 쌓았다는 것은, 르네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는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집안일을 도왔고, 일을 했다.

뿐만 아니다. 홀로 독신으로 살 각오를 했는데, 갑자기 동반자도 생겼다.

그녀가 한 노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집안일을 도왔을 뿐이었다. 외모에 신경도 1도 안쓰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인데, 그냥, 어떤 남자가 왔다.

 

 헌데, 이 남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르네의 외양 속에 숨겨진 현명함을 알아챈 남자다. 가정적이고, 조용하며, 사교성도 좋았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지식이 아주 떨어지지 않았고, 지식이 곧 지혜와 동의어가 아님을 보여준 남자다. 손재주도 좋았고, 직업정신도 뛰어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바람도 피지 않았던 것 같다. (ㅡ,.ㅡ;;;;) 

르네가 보다 폭넓은 지식과 문화를 향유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을 것이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간들.

특히, 그 남자는 르네가 일하는 것도 싫어했다. 게다가, 이 두 부부 사이에 아이도 없었던 것 같으니, 르네에겐 여가시간이 엄청나게 많았을터다.

(게다가...적당히 살다, 적당할 때에 가주신다....쿨럭....)


그....

이정도 삶이면, 내가보기엔 그....

에....

모르겠다.

지금 다시 읽는 르네의 삶이, 난, 그냥 부럽다. ㅋㅋㅋㅋ


여튼, 다시 읽으니, 저자와 부딪히는 지점들도 꽤 읽혔다. 지나치게 현학적인 단어들은 일견, 허영과 허세처럼 느껴졌다.

일본문화에 대한 상찬이나, 지나친 미화는 물론이고, 르네와 팔로마가 다른 사람들을 제 멋대로 평가하고 단정짓는 장면들도 상당히 불편했다. 사실 르네가 마뉘엘라, 팔로마와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은 '뒷담화' 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는 성적인 욕망이 지나치게 배제되어 있다. '질 낮은 농담' 정도로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저자의 의도였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 작품을 전반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꼈던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고정관념을 쌓고, 편견을 가지고 누군가를 대한다.

그것은 진실이고, 진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잣대를 가지고 자라난다.

국가, 언어, 가족, 친구 등 수많은 외부요인과, 선천적인 요인들이 모여 뚜렷한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이 틀을 결코 부술 수 없다.

아, 조금 수정해야겠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서, 스스로 가지게 된 이 틀을, '자기 혼자서는' 결코 부술 수 없다.

이 작품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역시 오해와 편견, 고정관념이 어떻게 파훼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온전히 '타인' 에 의해 분쇄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도 오해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르네, 당신은, 당신 언니가 아니에요."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깨뜨려주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누군가를,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맞이한 그 순간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오해한 것도 모른채, 오해 속에서, 오해하며 죽어갈 것이다.

어쩌겠나.

그 또한 인생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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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들판 - 완결편 견인 도시 연대기 4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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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한참을 반추했다.


톰과 헤스터가 처음 만나 아웃 랜드에 떨어져 광야를 헤맸던 그 순간부터 생사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그 사건들을.

한쪽 눈도 어그러지고, 반만 남은 코도 그나마 거의 뭉개지고, 크고 끔찍한 흉터를 갖고 평생을 살았던 트라우마와 컴플렉스 덩어리인 헤스터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톰의 삶을. 

눈 앞에서 부모님을 잃고, 죽었다가 기계로 되살아난 스토커와 함께 고철 폐기물 더미를 뒤지며 살았던 헤스터의 증오 가득했던 삶을.


견인도시 연대기의 전반부 두권이 간결하고 계획적으로 쌓아올린 서사였다면, 후반부 두권은 다층적이고 복잡한 사건의 중첩이었다.

전반부 동안 잘 쌓아올린 캐릭터들이 생명을 얻어 후반부는 제 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달까. 

3,4권은 1,2권보다 훨씬 활력 넘치고 정신없이 여기저기서 사건들이 터져댄다.

물론, 톰과 헤스터의 딸인 렌의 등장으로 인물 자체가 늘어났고, 견인도시들과 반 견인도시 주의자들의 전쟁이 과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정, 증오, 집착, 애착, 모성애, 부성애, 트라우마와 컴플렉스, 거기에 과거의 사건까지 수면위로 드러나며 감정의 화산들이 정신없이 터져댄다. 


이 책들이, 어쩔 수 없게도 뒤로 갈수록 점점 볼륨이 두꺼워지는데, 4권은 대강 봐도 1권의 두배는 된다. 

그만큼 다양한 사건들이 담겨있고, 중요한 인물과 사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과연 영화화가 4권까지 된다면...

4권만 세편은 만들 수 있겠더라.

피터 잭슨이 워낙 긴 러닝타임의 영화를 즐겨 만들기는 하지만...이 시리즈는 순수하게 볼륨만으로 봐도 반지의 제왕보다 많을텐데...



3권에서 주역으로 등장했던 렌과 테오를 보며, 이제 이야기의 축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나 싶었는데, 그래도 역시 중심엔 톰과 헤스터가 있었다. 슈라이크도 다시 등장하고, 나가 장군과 위논 제로(나가 부인), 페니로얄과 피쉬케익까지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한다. 

안나-스토커 팽도 마찬가지. 


필립 리브가 이 세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깊은 애정이 있었음은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참 팔불출 딸바보 아저씨 같은 작가이다.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결코 숨기는 법이 없다. 

인물들이 아파하는 장면들을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고른 티가 역력하다.

그래서, 마지막 권을 맞아, 작가로서 감내해야했을 고통들이 느껴져서, 뭐랄까, 참 좋았다고 해야할까. 복받쳤다고 해야할까.


1권의 첫문장과 이어지는, 4권의 클라이맥스는, 아주 예상치 못한 바도 아니었고, 신선하지도 않았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시리즈의 대단원에 정말이지, 완벽한 마무리였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와,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기의 조화는 2권을 넘어서면 신선함을 잃지만, 3권부터는 인물들이 그 간극을 충실히 메꿔낸다. 예측 가능한 전개를, 예측 불가한 미로속에 적절히 잘 넣어서, 뻔한 사건도 뻔하지 않게 만드는 스토리 텔링의 센스 역시, 엄밀히 따지면 '익숙한 것을 낯설게하기' 와 맥이 닿아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센스 역시 1,2권보다는 3,4권에 빛을 발하는데, 생동감이 더해지니 전형적인 인물들조차 입체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등장인물들에 이렇게 깊이 이입한 책도 정말 오랜만이었던 듯.

이제 톰과 헤스터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안타깝고, 벌써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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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털 엔진 견인 도시 연대기 1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랫동안 눈 안에 넣어두었던 '모털엔진' 드디어 읽었다.

'견인도시' 라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상상력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시대배경은 대략 수천년 후이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60분 전쟁' 이라고 불리우는 세계대전으로 모든 문명이 파괴되었다. 지구 궤도에서 발사되는 수많은 원자탄과,'60분 전쟁' 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생화학 무기들이 지구 곳곳에 투하됐다.

 그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살아남은 사람들은 쿼크라는 사람이 주창한 '도시진화론'을 철학삼아 거대한 캐터필러 위에 도시를 '얹기' 시작했다. 오염된 대지는 더이상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강한 도시는 약한 도시를 잡아먹으며 끊임없이 성장한다' 를 모토로, 크고 작은 견인도시(Traction City)들이 황폐해진 대륙 위를 기어다녔다. 


시대는 또다시 흐르고 흘러, 견인도시의 시대도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었다. 

견인도시들의 수가 급감하여, 대도시들은 건기의 초원을 배회하는 맹수들처럼 굶주려 있었고, 약해져 있었다.

한때 대도시로 난폭한 사냥솜씨를 뽐냈던 '런던' 역시 과거의 영화는 잃고 각종 맹수들이 난립하는 '대사냥터' 에서 밀려나 사냥감이 적은 변두리를 떠돌고 있었다. 

주인공 '톰 내츠워디' 는 런던 역사길드의 3등 견습생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고, 도시 진화론을 맹신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하지만 고아인 청년이었다. 

톰은 런던이 작은 도시를 사냥했던 날, 런던 역사길드의 수장이자 당대 최고의 탐험가인 '밸런타인' 을 타겟으로 한 '헤스터 쇼' 의 테러에 휘말리게 되고, 밸런타인에 의해 런던 밖으로 떨어지고 만다.

움직이는 도시 위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온 톰이 처음으로 밟은 '대지'.

톰은 대지를 처음 밟은 충격과, 경애했고, 목숨을 바쳐 지키려고 했던 밸런타인이 자신을 도시 밖으로 밀어버렸다는 사실에 공황에 가까운 상태에 빠지지만, 테러범 '헤스터 쇼' 와 동행하게 되면서 자신이 몰랐던 세상의 진실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오랜만에 정말 푹 빠져 읽었다. 

이정도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를 제대로 느낀 SF 소설은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SF나 판타지 장르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와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기' 로 볼 수 있다. 

예를들면, 스타 워즈 시리즈의 '포스' 와 '광선검' 이나 배명훈 작가의 '고고심령학자'는 '낯선 것을 익숙케 하기'의 정석에 가깝다면, 캐터필러 위에 8층으로 얹혀져 대지를 돌아다니는 런던 시내의 풍광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의 정석에 가까울 것이다. 마치 해리포터의 킹스크로스역 9 3/4 승강장 처럼 말이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이 두가지가 적절하게 섞여있다. 요는 세계관의 핵심이 어디에 더 가깝느냐, 는 정도일 터다.) 

 

이 작품이 사실 새로운 것들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했듯, 이 작품은 새로운 것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보다 '익숙한 것' 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삶을 보여준다.

예를들어, 우리는 CD를 저장장치로 사용하지만, 컴퓨터가 없는 이 세계에서 CD는 굉장히 좋은 장식용 도구이다. 조각을 엮어서 목걸이를 만든다던지, 인테리어 장식 도구로 활용한다. 벽시계를 역사박물관에 전시하고, '취급 주의' 같은 단어가 특별한 고유명사로 쓰인다. 

흔하디 흔한 것들을 '다르게' 사용하는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대단히 신선하게 느껴지게 한다. 


단순히 그것만이었으면 끝이었겠지만, 이 작품의 서사구조 자체도 대단히 흥미롭다.

주인공 톰처럼 견인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진화론' 의 맹신자로써 땅에서 사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땅에 사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반 견인도시 연맹' 이다. 이들은 전쟁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자정작용으로 인간이 살만해진 대지에 정착했다. 농사가 가능한 땅도 있어서, 농지도 경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견인도시의 거대한 캐터필러들은 대지에 사는 사람이나 마을을 전혀 거리낌없이 밟아댄다. 결국 정착민들은 산이나 절벽등지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견인도시에 대한 증오를 키워나갔다. 가스로 공중에 띄우고, 과거의 유물 엔진들을 수리해 단 비행정들이 등장했다. 견인도시의 주 교통수단도 그것이다. 

 견인도시는 기본적으로 큰 도시가 작은 도시들을 잡아먹는 적자생존의 토대에 세워진 이론이지만, 사냥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도시들도 있다. 이 '비사냥 견인도시' 들은 주로 무역으로 생존한다. 비행선을 탄 수많은 무역인들이 고대 유물에서 채집한 '올드 테크' 기기들을 사고판다. 사냥당해 잔해만 남은 도시들을 수색해 쓸만한 부품이나 고철들을 수집하기도 한다.  

그런 설정들이 모두 새로운 것들은 아니지만,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디테일함 때문이다.

올드 테크에 적혀있는 글자들이 그 도시의 유행어가 된다던지, 그런 용어들을 활용한 이름들이 붙는다던지 하는 것들이다. 


견인도시의 엔지니어 길드와 역사학자 길드의 반목도 재미있고, 그럴듯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덜컹대는 도시 안에서 유물들을 지키는 역사학자 길드와, 엔진을 개량하고 개발하는 엔지니어 길드의 반목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엔지니어 길드 놈들이 엔진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이 진동을 좀 보라고!! 도자기가 다 깨지겠어!!' 등등의 불평이 정말 재미있었다. 도시의 경로를 결정하는 '내비게이터 길드' 도 있다.ㅋㅋ 정말 재미있었다.

도시마다 공화정과 민주정, 왕정을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2권에서는 왕정 견인도시가 등장한다. 이 묘사도 정말 깨알같고 재미있다.


뿐만 아니라, 톰과 헤스터의 심리묘사와, 갈등도 재미있다. 톰도, 헤스터도 각자의 찌질함을 정말 잘 표현했고(ㅋㅋ), 평생 견인도시 위에서 살아온 견인도시 주의자가 겪는 내적 갈등, 윤리관의 충돌이 설득력 있고, 섬세하다. 


서사도 사실 대단히 훌륭하다. 정말 짜임새있고 스펙터클하다. 특히 후반 클라이맥스에 슈라이크 - 아참, 그래, 세계관 안에서 '60분 전쟁' 으로 현대 문명이 일거에 무너진 뒤에, 문명이 두차례 더 있었다고 한다. 슈라이크는 기계 부활 인간이다. '60분 전쟁' 이전 세계는 사이보그를 부릴 정도로 발전한 문명이었고, 그 뒤의 문명이 그 기술을 발굴해서 재사용했다. 죽은 자를 기계로 부활시킨 사이보그. 이들을 '스토커' 라고 불렀고, 헤스터 쇼는 스토커인 '슈라이크' 와 함께 아웃 랜드(세계관 내에서 황무지를 일컫는 말)를 떠돌며 고대의 쓰레기들을 수집하며 살았었다. - 와의 대결부터 런던 공격까지 숨막힐 정도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물론, 그 결말도 크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재미있었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무려 피터잭슨이 영화화 한 '모털 엔진' 의 예고편이 공개됐다!!! 

발렌타인 박사를 휴고 위빙이 연기하는구나!! 정말 기대된다. 

공개된 출연진들을 보니, 어떤 스토리가 잘려나가고, 어떤 스토리를 중심으로 각색했는지 조금은 감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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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정민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노벨상 작가 이전에 페미니스트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것도 조금 생소한 "비관적 페미니즘" 의 신봉자이다.
'이정도는 남성 혐오 수준 아니야?' 싶을 정도로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엄청나게 핍박받고, 고통받는다. 남성의 손길을 역겨워하고, 성행위를 고통스러워하며, 아들을, 아이를 혐오한다. 비록 내가 읽은 그녀의 작품은  이 작품까지 총 세권에 지나지 않지만, 작품 속 여성들의 삶은 남자와 관련된 그 어떤 것으로도 위안받지 못한다.
 [욕망] 은 그러한 그녀의 작품들 중 가장 '부유한' 여성이 등장한다. 전쟁이나 가뭄, 기아와도 관계가 없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편, 좋은 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내키면 비싼 옷을 살수도 있고, 동네 여자들은 그런 그녀를 부러워하며, 가끔 그런 시선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야말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이 작품은 매 챕터마다 그녀가 남편과 나누는 성행위 장면이 묘사되는데, 엄청나게 직관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 사용된다. 포르노를 연상시킬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려지는데, 이것은 사랑으로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권력에 의한 착취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제지회사 공장장인 남편은 안락한 침대와 따뜻한 음식, 화려한 옷을 제공하고, 그녀는 그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굽힌다는 등의 묘사이다. 권력관계에 의한 착취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겐 어떠한 권한도, 선택의 폭도 없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이 원하는대로 몸을 대주고, 아이를 낳아주고, 음식을 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살고 있는 사회의 법과도 같다. 이윽고 그녀는 아들조차 혐오하게 된다. 아들 역시 남자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영악하게 남자로 자라나고 있으며, 그녀가 낳았지만, 낳는 순간부터 그녀보다 사회적 우위에 있는 존재였다. 그녀의 남편처럼 아들도 그녀를 착취하고 있다.
이러한 절망적인 서사를 통해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이 사회에 뿌리깊은 남성 중심의 구조, 여성 스스로는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공고한 시스템의 부조리를 강변한다.
 [욕망] 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감정이 전혀 없는 욕망의 덩어리로 그려진다. 패거리를 짓고 회사를 통해 누리는 사회적 지위에 탐닉하고, 그로 인해 따먹는 달콤한 열매들은 자신의 집에서도 고스란히 연결되어야 한다. 그녀는 공장장인 남편이 회사에서 부리는 직원들과 다를바 없다. 그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고, 그가 원하는대로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녀는 남편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와 그것으로 벌어들이는 돈의 그늘 안에서 명줄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의 허벅지는 공장장, 그 끔찍한 승객만을 위해 끓고 있는 그의 욕구에 튀겨져 벌려져야 한다. 그러면 그는 바쁘게 움직여 그녀의 진입로에 몸을 떨며 짐을 내려놓고 그 대가로 그녀에게 브로치나 금속 팔찌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 일은 곧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자유롭다.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이웃을 비웃던 이전에 비하면 훨씬 풍요롭다. 당신은 이러한 모습을 구경하라고 초대된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이 신사가 샴페인을 들고 당신 집 대문을 소란스레 두드려도 당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 여자는 즐거워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는 그 자신을 상자에 넣고 포장할 것이다! 푸른 하늘은 경치를 진풍경이 되게 한다.
사업은 잘된다."
p.183

인류의 미래에 대해 디스토피아적 전망과 유토피아적 전망이 있듯,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와 같은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엘프리에 옐리네크를 구글에 검색만 해보아도 수많은 문건들이 뜨는데, 그녀는 대표적인 회의론적 페미니스트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결코 남성의 지위를 빼앗을 수 없으리란 시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런 부분을 읽고([욕망]의 권말에 실려있는 해설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다.), 김영하 작가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인터넷에 검색만 해보면 김영하 작가가 비관적 현실주의자에 대해 강연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물론 그는 우리 '헬조선' 의 젊은이들을 향해 한 강연이지만,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김영하 작가의 그 자리에 그대로 끼워 넣으면 그녀의 생각이 더욱 또렷하게 전달된다. 여성들은 김영하 작가가 대상으로 삼은 그들보다 두배 세배는 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명확하게 설파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덤벼들었다가는 아무것도 못할껄'
그녀가 여성들의 디스토피아를 설파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위', 다시말해 '남성들의 카르텔' 에 도전하는 여성들은 황폐화된 황무지에 덩그러니 던져진 것이니까.
그녀에게 이 세상은 정글이다.
무려 잔디나 잡초, 심지어 흙조차도 자신보다 강한 적인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흙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땅속으로 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들' 이라는 족쇄에 묶여 '남편' 이라는 악마에게 '섹스' 라는 고문을 당하며 '가정' 이라는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여자' 에게 한없이 이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15개의 챕터로 나뉘어져있는데 위에 언급한 것 처럼 포르노 이상의 직설적인 성애가 묘사되어 있다.
아마 어떤 누군가는 상상도 못했을 각종 행위들이 묘사된다.
하지만, 그 어떤 묘사도 에로틱하거나 사랑스럽지 않다.
그녀는 남편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와 다름없고, 아들을 키우는 보모와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아들로부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남성들에게 읽힐만 하다. 특히나 중고딩 교과서에 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우리나라의 중고딩들은 부적절한 포르노로 물들어있으니까. 나도 그랬듯이.
페미니즘 교육의 1번은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이 작품의 두 챕터 정도(한 30페이지쯤)만 교과서에 실려도 10대 성범죄가 반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그 행위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사무칠정도로 묘사된다.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중인 "부부간, 혹은 연인간에 서로 합의되지 않은 섹스가 강간인 이유" 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공감되는 텍스트가 아닐까?

최악의 상황을 언제나 상정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에 치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 운동만이 아니다. 삶은 거의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법칙이다. 어깃장의 법칙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삶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어깃장을 놓는 법이다. 준비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관적" 이면서도 "현실적인" 시각을 갖는다면,  적어도 '여성이 아닌자, 여성의 삶을 이야기 하지 말라' 던가, '여성운동은 여성들만의 것이다' 와 같은 착오적인 주장은 피할 수 있을터다.
개인적으로 조금 더 덧붙이자면,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이념을 구분하는 방법도 필요한 것 같다. 
예를들어, 페미니즘 비평, 같은 부분이다. 비평에는 여러 기법들이 존재한다. 작품을 컨텍스트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오롯하게 텍스트 안에서만 파고들 수도 있다. 작가의 전작을 포함, 작품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작가 중심의 접근법도 있다면, 당연히 여성주의 시각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작품의 평가는 언제나 비평하는 모두의 것이고, 작품이 독자의 것이듯, 비평 또한 독자의 것이다.
주의해야 할 부분은 전문가의 비평과 독자의 리뷰가 난립하는 바야흐로 백만 네티즌의 시대라는 점 정도이리라.
전문 비평과 단순한 리뷰를 구분하는 역량 정도는 내 스스로가 배워야 할 터다.
적어도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작품' 이나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 차별적인 작품' 과 같은 평들을 구별해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지적받았다고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리스-로마 신화가 그렇듯이, 성경이 그렇듯이 말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그려진 작품에는 언제나 여성 차별, 여성 혐오의 시각이 들어가 있다!!
그 점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의 가치가 폄훼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월북 작가의 작품들을 폄훼하거나, 공산주의자들의 작품을 비하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친일 작가들의 작품을 혐오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터. 인간적인 취향과 작품의 성취는, 적어도 구별하는 삶을 살고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 작품은 남편과의 성생활과 아들 육아를 오로지 '고통' 만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도 평범한 남성들이나 여성, 혹은 일부 여성주의자들조차도 지나치게 과장되고 편향되게 표현된 여성의 성 역할에 읽기조차 힘들 수도 있다. 나 역시 수년 전, 처음 읽었을 땐 불과 몇 챕터 넘기지 못하고 덮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문학의 중요한 특징들 중 하나가 바로 '과장' 과 '편향' 이라 여긴다.
문학은 글을 통해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는 장르다. 세상의 모든 시간과 현상들이 작품의 주인공이나 화자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잠깐의 시간이 한정지을 수 없는 긴 시간으로 과장되고, 작은 감정의 편린이 수천배 수만배 늘어난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어떤 여성들이 겪고 있을수도 있는 고통, 그 자체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 위해 편향된 시각과 과장된 역할을 활용한 것 뿐이다. 애초에 문학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일어날 수도 있는 일'. '픽션'. 아닌가.
파괴적이고 절망적인, 과장과 편향으로 가득찬 글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오롯하게 이 책을 읽는 나의, 독자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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