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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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 리쿠의 작품을 펼칠 때는 언제나 마음이 편하다. 

그녀는 사람들을 참 좋아하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긍정이 묻어나고, 작품 안에는 그 어떤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마저 단어로 감싸안는다. 문장으로 포옹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동안 일본 미스테리 문학계에서 손꼽히는 장인이다.

살인도, 납치도 없이 순수하게 '미스테리' 만으로 강렬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에는 허망한 허무주의도, 죽음에 대한 자기파괴적인 동경도 없다. 

삶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지혜, 충실한 즐거움.  

'인간의 상상력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는 명제에 충실한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는 상상력으로 인한 오해와 거짓말, 추측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이 온통 미스테리와 수수깨끼 투성이인 이유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모든 미스테리와 수수깨끼가 풀리는 이유 역시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온다 리쿠는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활용하는 작가이다.

물론 그녀가 장르소설 작가인 것은 확실하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범인, 형사처럼 쫓는자와 쫓기는 자가 만들어진다. 비밀을 숨기려는 자와 파헤치는 자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명백한 장르적 장치들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들을 활용하는 방법은 여타 미스테리 스릴러들과 전혀 다르다. 


 온다 리쿠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는 "대화" 와 "추억(기억)" 그리고 "성장" 이다. 

일정한 수의 인물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는 설정 역시 장르적 장치이지만, 등장인물들이 모여있는 공간 안에서는 어떠한 살인도, 폭력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오손도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화제는 굉장히 다양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얽혀 있는 질기고도 진득한 과거의 기억에 관한 내용으로 수렴된다. 이 과정 안에 심리적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등장하고, 비밀을 갖고 있는 자와 그것을 파헤치는 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여 힌트를 찾아내듯이, 서로가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고, 대화 안에 일종의 함정들을 만들고, 때로는 과거의 단초를 찾아 비밀들을 끄집어낸다. 

'그때,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리고 그 때 나의 행동이 그녀에게 어떤 결과를 미쳤나?'

마치 나비효과처럼, 내가 과거에 했던 사소한 선택이 현재의 그를 엄청나게 바꾸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등줄기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에, 내가 했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선택. 

온다 리쿠가 일본 팬들 사이에서 "노스탤지어의 전령사" 라고 불리우는 이유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을 읽으면 여지없이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당시에 했던 선택들과, 내게 미쳤던 여러 결과들. 

그것들을 생각하면, 금새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고, 곧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시절에 대한 깊은 향수에 젖는다.

그래서 그녀는 노스탤지어의 전령사인 것이다. 국내에선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고 번역되지만, 그 명칭만큼은 일본식이 좋다.  


[꿀벌과 천둥]은 온다 리쿠의 이러한 특징들이 모두 녹아있는 작품이지만, 한가지, '무서운 상상력' 은 빠져있다.

이 작품은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라는 피아노 경연대회(?)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룬 이야기이다.

미스테리의 여왕이, 미스테리를 버렸다. 그 사실만으로 깜짝 놀랐더랬다.

판타지나 미스테리 잡지가 아니라, 음악 잡지에 기고되었던 소설이 묶여 나왔더랬다.

신박한 음주 이야기나 여행 이야기가 에세이로 묶여 나온 적은 있었지만, 소설은 언제나 미스테리와 판타지의 대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는데. 음악소설이라니.


이야기는 이미 저명한 피아니스트인 미에코로부터 시작된다.

역사는 짧지만, 수상자가 일약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성장하면서 함께 명성을 얻은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 에 참여할 경연자들을 뽑는 오디션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자리였다.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의 오디션은 모스크바, 파리, 밀라노, 뉴욕 그리고 일본 요시가에에서 열리고 있었고, 서류 심사를 통과한 연주자들이 각지에서 펼쳐지는 오디션을 거쳐야 콩쿠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파리 심사를 맡은 미에코와 오랜 동료들은 그 자리에서 깜짝 놀랄만한 재능을 만나게 된다.


"엄청난 재능을 목격한다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p.37

 

 각지에서 오디션을 통과한 피아니스트들이 일본 요시가에로 모여들어 국제 콩쿠르의 예심이 시작된다.

이야기가 주목하는 인물은 총 네명.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는 천재 피아니스트였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난 뒤 연주에 대한 흥미를 잃고 무대를 무단으로 이탈하고 수년 째 평범한 학창생활을 해나가던 소녀 에이덴 아야.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프로 솔로 연주자로서 시니어 무대에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피아노를 너무 사랑했지만, 생업으로 삼지 못하고 악기점 매니저로 평범한 삶을 이어가는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음악의 신이 내려보낸 것과 같은 천재소년 가자마 진.

이 네명의 인물이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에서 수많은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서로의 음악을 겨룬다.

  

온다 리쿠의 소설답게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서로에게 얽혀 풍성한 드라마를 펼쳐내는데, 그들의 이야기도 정말 너무 재미있지만,  작품 전반에 펼쳐지는 장대한 음악과 연주에 대한 묘사가 정말이지 '끝내준다'!!!  

다시 말하지만, 온다 리쿠는 인간의 "상상력" 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상력" 으로 인한 사건을 겪고, "상상력" 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690여 페이지가 넘는 볼륨 안에 수많은 피아노 곡과 연주가 묘사되어 있는데, 당연하게도 음악과 연주는 모두 '텍스트' 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

이번 작품에서도 온다 리쿠는 인간의 "상상력" 을 가장 큰 무기로 삼았다.

바로 우리들. 독자들의 상상력이다. 


 음악과 연주에 관한 수많은 묘사들 중 진부하거나 중복되는 표현이 거의 없다.

음악에 대한 묘사를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오감을 자극하는' 문장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장문과 단문, 은유와 직유, 비교와 비유. 그야말로 수사법의 백과사전이다. 그리고, 상상력의 보고이다.

문장들이 상상력을 엄청나게 자극한다!!   

그래선지, 오히려 음악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감동을 준다.(정작 음악을 찾아 들으면 졸립....쿨럭.)

독자들의 머릿속을 열고, 상상의 피아노를 연주한다. 

텍스트가 움직이는대로 머리속에 빛이 팡팡 터지며, 들어본 적 없는, 들을 수 없는 음악들이 연주된다.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책 전체를 옮기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지금 막 넘기면서 눈에 띄는 구절을 몇구절만 옮겨보겠다. 


"베토벤의 곡이 가진 독특한 벡터가 소년의 손가락 끝에서 화살처럼 홀을 향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p.37


"객석 전체가 하나의 귀가 되고 눈이 되어 달아오르고 있다. 무대 위의 청년은 그 열기에 지거나 눌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관객의 추파를 받아들이며 그에 응하고 있다. (...)

 한 음, 한 음이 깊고 풍부하다. 그대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벨벳으로 감싼 것 같다. 그런데 간결하면서도 조금 냉소적인 바로크읭 ㅜㄹ림이 뚜렷이 드러난다.

음, 장식음이 아름답네. 아야는 혀를 내둘렀다."  p.188


"뭐야, 이 소리는. 어떻게 내고 있는 거지?

마치 빗방울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내리는 듯한....(...)

조율만으로 소리가 이렇게 달라질 리 없다. 이 아이 전에 나온 참가자도 같은 피아노로 연주했다.

어째서 이런, 하늘에서 소리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멀리서, 또 가까이서, 마치 피아노가 혼자 노래하는 것처럼 주선율이 차례로 떠올라 여러 연주자가 연주하는 음악을 스테레오 사운드로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렇다. 소리가 기가 막힐 정도로 입체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p218-219


"모차르트 본연의 시원스러운 지고한 멜로디. 진흙 속에서 순백의 꽃망울을 틔운 탐스러운 연꽃처럼, 아무런 주저도 의심도 없다.

쏟아지는 빛을 당연하게 두 손 가득 받아들일 뿐이다.

이 아이, 앉았을 때부터 계속 웃고 있다.

아카시는 눈치채고 있었다. 건반을 전혀 쳐다보지 않는다. 소년이 피아노를 연주한다기보다 피아노가 소년을 연주로 이끄는 것 같았다.

그가 피아노를 부르면 피아노가 기거이 그에게 화답하는 듯한."

p. 220


"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 음악을 드넓은 곳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요? 

소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가만히 선생님에게 속삭였다.

언젠가 반드시 선생님과 약속한 대로, 음악을 데리고 나가겠어요."

p.310




 결국 이 작품은 '기프트'; 재능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이야기이다.

아니, 재능을 받은 자들 중에서, 좀 더 좋은 행운을 만난 자들의 이야기랄까. 

안타깝게도, 예술적 재능은 사람마다 크나큰 격차가 존재한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루브르 미술관 문턱에서 좌절하며 돌아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 옛날 사람들의 기예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 책에는 정확한 타이밍에,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찾아내, 그것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붓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심사위원, 경연에 참여한 피아니스트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피아노 조율사는 물론 주인공들의 가족, 친구들까지 대충 보아 넘길 사람들이 없다. 한명한명이 다 다정하고, 상냥하다.

 하지만, 상냥하고 다정하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작품의 중심 소재는 "콩쿠르". 인생과 자존심을 건 경연인 것이다.

인물들은 상냥할지언정, 평가는 날카롭고 매정하다. 연주가 끝날 때 마다 연주는 냉철하게 평가되고, 반응은 그 즉시 나타난다. 

그렇기에 음악에 대한 묘사를 읽는 즐거움도 상당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카자마 진, 마사루, 아야, 아카시 중 누가 우승하게 될지, 그 결과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네명의 뜨거운 각축전이 [꿀벌과 천둥]의 가장 강력한 서스펜스 요소인 것이다.

온다 리쿠는 무척 노련하게 독자들과 밀당하며 이 네 명의 대결을 무척 흥미롭게 펼쳐놓는다.

끈끈하게 이어진 인물들의 드라마만큼 승부의 결과에 대한 긴장감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인물들에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승부가 심장 쫄깃하게 펼쳐진다.  


 그와 동시에,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카르텔에 새로운 세대들이 비집고 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젊은 세대를 착취하고 기만하기에 바쁜 기성세대에게 날리는 통렬한 일침이고, 위대한 재능을 눈 앞에 두고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까봐 노심초사하는 어른들을 향한 일갈이다.


"말 그대로 그는 '기프트' 이다.

아마도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시험받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이자 여러분이다.

그를 '체험' 하면 알겠지만, 그는 결코 달콤한 은총이 아니다.

그는 극약이다.

(...)

그를 진정한 '기프트' 로 삶을 것인지, 아니면 '재앙' 으로 삼을 것인지는 여러분, 아니 우리에게 달려있다."

p.41



 클래식. 

이 얼마나 고루한 단어일까.

하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예술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는 너무나 중요한 그 일부이다.

수백년 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삶답게 만들어준 단어인 것이다.

인터넷 세상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축복은 누구나 많은 클래식들을 집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일터다.

물론, 직접 가서 듣는 것 보다는 떨어지고, 엄청난 가격을 호가하는 장비들과 싸구려 스피커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클래식은 불과 200여년 전만 해도 선택받은 소수의 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으나, 아무나 다다를 수 없는 경지.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아무나 알아볼 수 없는 능력.

누구나 꿀 수 있으나,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꿈.

누구나 받았지만, 아무나 일깨울 수 없는 재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선사하는 이들의 이야기.

[꿀벌과 천둥] 

참 좋았다. 



*참고로 작품에 등장하는 연주곡들의 선집 음반이 발매되었다.

http://music.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5686825

노다메 칸타빌레 앨범도 여러장 있는 걸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귀로 즐기는 것보다 온다 리쿠의 텍스트만으로 즐기는 것도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음악 듣고 온다 리쿠의 텍스트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궁...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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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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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속죄] 이후 두번째였다.

영미문학에서는 이미 지울 수 없는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고, [속죄] 역시 굉장히 푹 빠져 읽었었는데, 왠지 그의 전작들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엄청 하드코어하다는 소문도 알고 있었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아함과 고상함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넛셸]은 솔직히 다 읽은 뒤,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물론 훌륭한 작품이고, 보기드문 소재를 대가다운 빼어난 능숙함으로 잘 버무렸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폐부를 파고드는 느낌은 없었다. 

'햄릿' 을 모티프로 했다지만, 나는 비교비평의 '교' 자로 모르는 사람이기에, 굳이 견주어 보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직전에 '햄릿' 을 읽었기에, 조금 의식한 정도.

전지적 '태아'시점이라는 스토리 텔링의 접근방식은 대단히 신선하고 흥미로웠지만, 정작 스토리 자체가 새로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진부한 스토리를 바라보는 접근법은 사실 국내외의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시도하는 것들이고, [넛셸] 이 보여준 그것도 크게 신선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북쉐어링 모임에서 들었던 이언 매큐언의 토크쇼 동영상이 떠올랐고, 유튜브를 찾아 들어가봤다.

이언 매큐언의 풀네임을 영어로 검색하니 수많은 동영상이 떴다. 영어 일자무식자이지만, 유튜브 번역 자막을 켜서 단어들을 유추해가며 영상들을 몇 편 찾아봤다. 

물론, 전작을 고작 한편 읽고, 유튜브로 영상 몇 편 찾아보고, 씨알도 안먹힐 작가주의비평의 흉내를 내려는 것은 아니다.

역시 나는 비평의 '평' 자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단지 그의 눈빛과, 목소리, 인터뷰어를 대하는 태도 등을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얼마전, 나는 [넛셸]을 읽는 새로운 키워드가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공 태아는 기본적으로 모든 등장인물들을 얕잡아 보고 있다.

태아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볼 수가 없다. 양수를 통해 전달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어머니가 듣는 소리들, 뱃가죽을 뚫고 들어오는 소리들을 통해 단지 '추측' 할 뿐이다. 그는 실재하는 것들을 그 어떤방식으로도 실증할 수 없는 상태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잣대로 가치 판단을 하고 평가한다. 심지어 팟캐스트나 뉴스 등의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인류와 문명의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는데, 태아가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의 일부 '지배층'과 대부분의 '지식층'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탁상공론만 늘어놓는 지도자들, 실천하지 않는 지식층,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다지 인과관계가 없는 낙관론들, 대안 없는 비판과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이론들.  끝 모를 데 없는 오만과 교만, 편견으로 가득 찬 시각.

그리고, 결코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주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한 수 아래' 로 보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존재가 실재하는 모든 것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독한 아이러니를 이야기 전체에 관통시키자 [넛셸]의 문장들에서 새로운 느낌들이 생겨났다.


어쩌면, 이언 매큐언은 인류 전체에 대해 영국식 유머를 가득 담은 블랙 코미디 한편을 선사한게 아닐까.

풍자의 대상은 인류 문명 그 자체이자, 지독한 낙관론, 그 자체인 것이다.

엄마 뱃속에서 풀어내는 철학이나 예측, 낙관론에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 태아는 '태어나지 못할 수' 도 있다. 실제로 이 주인공은 유산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공포스러워한다.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보다 절망적인 쪽으로 이끌어가는데, 어쩌면 이것은 이언 매큐언이 생각하는, '1%의 양심'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결단으로 바닥에 고인 피와 양수 안에서 태아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어머니의 외모' 이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 비하나 외모 비하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성,심지어 어머니의 '외모'에 관심을 빼앗기는 인간 남성-특히 엘리트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젊고 예쁜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올려보면ㅋㅋ- 에 대한 풍자이자 조롱이다. 

주인공 태아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집단에 대한 메타포로 읽었더니, 이 엔딩이 [넛셸] 이라는 한편의 우화가 갖는 엄청난 완성도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물론 내 해석들이 모두 곡해이고, 지나친 독법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책은 독자들의 것이고, 독서의 열매는 각자 알아서 따먹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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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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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무엇에 홀린듯 단박에 빠져들었다. 


 화자가 '나' 가 아니라 '당신' 이다. 
그 낯섦에 흠칫 놀라 경계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굳은 마음으로 몇 페이지 더 넘기다보니, 작품 안으로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저자의 의도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당신'-그러니까 책을 읽는 나我라면서 낯선 여행지에서 겪는 불안함과 현지의 사정으로 겪게되는 불편에 대한 투덜거림을 '강요'한다. 

 고작 열페이지 남짓한 첫 챕터; '첫번째 바퀴' 를 다 읽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명확하게 메타소설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독자가 함께 여행을 해야 이야기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 떨어질 수는 있다. 독자를 작품 속 화자로 이입시키려는 작가의 의도 쯤이야, 무시하면 되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당신' 으로 지칭했다고 여기면 된다. 
 나는 작가의 의도에 적극 동조하지 않기로 했다. 저자가 아무리 나를 '당신' 이라고 우겨도, 나는 '아닌데~!' 하기로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를 한명 상상했다. 나 역시 저자처럼, '당신' 을 관찰하기로 했다. 


작품의 화자인 '당신'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확하지 않다. 
'바퀴' 라는 이름이 붙은 열 세 챕터를 통해 수많은 국가를 오가는데, 성별과 직업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각 챕터에 등장하는 모든 '당신' 이 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 또한 저자의 의도일터.
전통적 서사에 맞춰 주인공의 성별과 나이, 직업과 각 챕터의 시간 순서를 맞춰보려던 나는 어느새 그런 시도들을 모두 포기하고 여행담을 즐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을 관찰하겠다는 의지도 무너져, 어둑한 야간열차 안에서 나는 수많은 외국인들의 냄새와 텁텁한 공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들을 상상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체험감을 높이기 위해 구글링을 해서 각 챕터에 맞는 지명과 야간열차들을 알아보고, 그 지역 사람들이 적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적힌 블로그를 보고(구글 번역 만세), 슬라브어나 폴란드어, 러시아어, 산스크리스트어 등의 포합어의 발음들을 재생시켰다.    
화자가 상상하는 것들을 함께 상상하고, 잠에서 덜 깬 채 요의를 느껴 화장실을 갈까 말까 함께 고민하고, 내 좌석까지 오줌으로 적신 옆자리 꼬마에게 눈을 흘기는 동안 백 몇 페이지가 후딱 지나갔다.
무려 열 세 챕터라지만, 제일 긴 꼭지가 열두페이지 쯤 되고, 대부분 열페이지 안팎이다. 
소설만 따지면 딱 131페이지. 
 
 마음만 먹으면 한두시간이면 읽을 분량이지만, 저자인 다자이 요코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 가벼운 에세이처럼 느껴지면서도 자아성찰적인 부분들이 묵직하게 다가오고, 과거와 현재는 기본,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판타지의 색채까지 갖고 있다. 
정체성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지만, 자아를 부정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고, 변화를 추앙하는 듯 하지만, 그다지 즐기지는 않는 것도 같다. 

 책을 덮고, 거의 작품의 1/3정도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주제에 더럽게 어려운) 해설에서 저자의 약력을 찾아보니 그러한 성향이 조금은 이이해가 됐다.
이 책의 저자인 다와다 요코는 와세다 대학 어학연구소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문학부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독일의 서적 수출입회사에 입사하면서 독일로 이주하게 되고, 거기서 독일어로 시산문을 출간하고(?!) 함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뒤로 독일어와 일본어로 양쪽에서 각기 다른 작품들을 내며 양국가에서 여러 문학상들을 쓸어담는다.(헐...ㄷㄷㄷ)
솔직히 나는 소설보다 이 다와다 요코의 약력이 더 픽션같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20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저자가 독일어를 배워서, 독일문학상을 받는다?? 번역소설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독일어로 독일에서 데뷔했다. 
정말로 인간의 정신은 언어에 의해 '많이' 좌우되는걸까? 
와 같은 생각을 할 때 즈음 TVN에서 방영되는 "알뜰신잡"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허균' 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에게 '홍길동전' 으로 잘 알려진 허균의 작품은 한문으로 쓰인 작품과 한글로 쓰인 작품이 있는데, 두 작품의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완전히 상반된다는 내용이었다.
패널로 등장하는 김영하 작가님은 "한글이라는 글 안에서 자유롭고 호방한 작가적 기질이 가감없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셨고, 그와 함께 바로 이 작품과 다와다 요코가 떠올랐다.
 "용의자의 야간열차" 는 다와다 요코의 모국어이자, 20대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언어인 일본어로 쓰여진 작품이다.
그렇다면, 문학가로서의 길을 열어주고 더 넓은 세계로의 문을 열어준 독일어로 쓰여진 작품은 어떨까?
생활언어로써 '습득' 한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과, 사교언어로써 '학습' 한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최근엔 반론도 많아진 것 같긴 하지만, 언어결정론은 정설처럼 퍼졌던 주요한 이론이었다. 정말로 사고思考 와 언어에 특별한 연관이 있을까? 감수성이 특별한 '작가'라면, 시와 산문, 소설에 정통한 예술가라면 그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주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텍스트는 텍스트 안에서 오롯하게 소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텍스트 밖의 상황을 대입하는 컨텍스트context의 개념이나 작가가 처한 상황과 밟아온 경력을 대입하는 작가주의 비평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는다.
만해 한용운의 개인적 삶과, 시를 짓던 당시 시대상황이 '님' 이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에 영향을 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다. 내 나름대로 작품 속에 녹아들 1의 여지도 주지 않았던 그 빌어먹을 고등학교 수업과 수능시험이 싫다. 알퐁스 도데의 '별' 과 황순원의 '소나기' 를 한 방향으로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고소감 아닌가?! (ㅋㅋ)
비평가의 해설은 읽어도 작가의 인터뷰는 읽지 않고, 독자모임은 찾아가도 작가대담은 찾지 않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만큼은 컨텍스트가 작품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큰 영향을 줬다. 
우리는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진, 아니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 인류가 수백년 더 유지된다면, 인류의 역사기록에 19~22세기는 국가와 민족, 인종과 문화의 경계가 (격렬하게)허물어지는 시기였다고 기록 될 것이다. 그 중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완벽히 허물어지기 직전에 그 모든 경계들이 수면 위로 부상한 시기라고 여기고 있다. 모든 탐욕스러운 이데올로기들이 정점에 다가서고 있다. 모든 민족과 인종들은 서로에게서 각자의 벽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이 정점에서 인류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각 국가의 정치 상황들을 보니 지난 세기처럼 쉽사리 화마속으로 던져넣지는 않을 것 같다. 브렉시트 이후 언듯 우경화의 일로를 걸을 것만 같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의미있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고, 우파일색이던 일본도 도쿄지방선거부터 무너져가고 있다. 아시아의 화약고인 북한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에 극보수주의자가 집권하자, 세계 각지가 진보의 길을 택했다. 불과 지난 세기만 해도, 이런 상황이었다면 전 세계의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도 빠르게 보수화, 폐쇄화를 택했을터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의 발달은 어떻게든 균형을 찾아내고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처럼,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의 경계를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결혼하는 장면을 100년 전에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아니, 다 떠나서,
백인과 흑인이 결혼할 수 없었고 심지어 화장실과 버스좌석도 나눈다는 '법'이 실제로 미국에 있었던 시기다!!!
그 뿐 아니다.
남녀는? 동등한 직업선택의 권리와 참정권은 요원한 시기였다. 여자가 남성에게 종속되던 시기였다.
간신히 폐기된 대한민국의 '호주제'는 실제로 10대 꼬마에게 집안의 모든 여성들이 법적으로 경제권이 종속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나라에서 여성은 남성의 재산이다. 특히 이슬람국가에서는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 소설이 당대 유럽의 강대국으로 재도약하던 시기의 독일에 이주한 극동아시아 여성의 작품이라고 설명해야 옳을까? 
그런 여성을 문단에 데뷔시켜주고 상까지 준 독일 문단의 열린 마음(?)을 극찬해야 옳을까? 
아니면, '고작 컨텍스트'라고 해놓고 그런걸 상상하는 내 상상력의 편협함을 욕해야 맞을까? 

바야흐로 '월드 와이드'의 시대가 열리면서 모든 경계는 희미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더욱 견고해졌다.
누군가는 진보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상당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아직도 '피하는' 인종이다. 단지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말이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은 어떤가.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국의 역사와 영토를 물고 늘어지며 그 안에서 보호무역과 민족주의는 외려 강해지고 있다. 사실 이럴바엔 중국이 공정을 펴는대로 중국의 일원이거나, 뉴라이트 어거지들이 지껄이는대로 일본의 식민지로 쭉 남았으면 마음만은 얼마나 편했을까, 싶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정서의 경계는 강해지는 것 같다. 인터넷은 '월드 와이드' 의 시대를 열었다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뚜렷한 경계를 직시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러한 경계선을 견지하는 화자의 정신을 경험했다.
이야기를 읽어가는 과정은 즐겁기 짝이 없었지만, 이야기가 묘사하는 장면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유는, 저자가 끊임없이 우리의 '경계선' 을 인식시켜주기 때문이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기차' 는, 밖에서 보면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있지만, 안에 있는 승객들에겐 밀폐된 공간이다.
게다가 야간 열차 안에는 마치 관과도 같은 침대들이 꽉 차있고, 승객들은 유사 죽음과도 같은 잠에 깊이 빠져있다. 
그 사이에 관과 시신을 실은 거대한 강철상자는 엄청난 속도로 국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가뿐히 넘어간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나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드글그글한 동네에 동그마니 떨어진다. 
'나'를 정의하는 수많은 정체성들 중 '국가, 민족, 모국어' 등이 송곳처럼 툭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그렇다.
'정체성'. 화자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성별, 직업, 모국. 아무것도 적확하게 묘사하지 않고, 언제나 두루뭉술, 모호하게 풀어낸다. 나의 근원적 불편함은 거기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당신' 이라는 인칭은 '나' 보다 훨씬 더 경계를 뚜렷하게 느끼게 한다. 챕터를 읽어 나가면서, 진짜 '나' 라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할지 떠올리게 됐다. 
옛 슬라브 지역에 동그마니 떨어져 낯선 언어들의 틈바구니에서, 광활한 시베리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몇박의 지루한 여행에서, 낯선 향신료의 냄새가 섞인 사람들의 냄새 속에서, 낯선 언어, 낯선 얼굴이지만, 어디에서나 보았음직한 행동들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 호기심의 눈초리, 불쾌의 눈초리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나' 란 과연 어떤 '나' 일까? 
저자는 '당신' 이란 호칭을 통해 독자인 '나' 와 명백한 선긋기를 시도한다.
이 독특한 체험이 '독서' 라는 간접체험의 '체험'을 보다 농밀한 경지로 밀어올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을 오해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날카로운 손발톱도, 질긴 털가죽도 없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해야 한다. 심지어 넓은 시각과 깊은 후각을 갖고 있지도 않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까지 와야 그나마 피아식별 정도를 할 수 있다. 빠르게 판단해서, 빠르게 대비해야 한다. 그나마 상대방이 먼저 밝은 낯으로 빈 손을 내밀면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다. '적은 아니구나,' 라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극도로 제한적인 시간 안에서, 극도로 제한된 정보를 통해, 극도로 제한된 판단을 내린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터득한 오랜 경험이다. 쉽게 다가가지 말고, 쉽게 손 내밀지 말고. 상대방의 '정체' 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야간열차는 밖에서 보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검고 긴 줄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인간의 자아 역시 마찬가지일터.
단단하고 두꺼운 철판 안에 수많은 정체성을 싣고 빠르게 질주한다. 
밖에서 볼 때는 그냥 하나의 길고 검은 덩어리. 너무 빨라 창문이 몇개인지, 객실이 몇개인지 알아볼 수도 없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굳이 정체성을 찾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자아라는 것은 그리 단순화, 간략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더 이상 고민하지 말라고. 찾으려 애쓰지도 말라고. 

"자는 동안에는 우린 모두 혼자잖아요.(...)
우리는 애당초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요. (...)
한 사람 한 사람 다 달라요, 발밑에서 땅을 빼앗기는 속도가.
아무도 내릴 필요 없어요.
모두 여기 있으면서 여기 없는 채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 달려가는 거예요."
p.140

그리고, '당신' 의 정체를 단단한 외피속에 굳이 가둬두지 말라고.
그게 인종이든, 성별이든, 나이든, 국가든, 언어든, 그 어떤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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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1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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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도 모니터 요원에 당첨되어 출간 전 가제본을 미리 받아 읽었다.

 4부와 5부 사이에 살짝 생략된 부분이 있다. 

 견고했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삼두연합은 크라수스가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균열이 생기지만, 카이사르가 미리 내다보고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킴으로써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삼두연합을 통해 정치적인 방어막을 마련한 카이사르는 장발의 갈리아족 속주와 브리타니아 속주를 평정하면서 오랜 시간동안 부와 명예를 차근차근 쌓아올렸다. 

 내가 로마에 대한 관심을 최초로 가졌던 BBC의 역사 드라마 'ROME' 에서 '시저(카이사르의 영어식 발음)'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보에누스' 와 '풀로' 가 전공을 본격적으로 쌓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10년 이상 군대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자연스럽게 십인장 - 백인장이 된다. 이 당시의 로마군은 생존이 곧 실력이었다. 

 여하튼, 드디어 나도 조금은 아는 내용과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당연히 보에누스와 풀로는 안나온다.^^;;)

 때문에,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벌써 5부니까, 이 시리즈를 이미 12권이나 읽었고, 13권째를 다 읽은 참이다. 

등장인물 한사람 한사람에게 일일히 신경쓰다가는 이 방대한 이야기의 맥을 놓치기 십상이다. 콜린 매컬로는 친절하게도 주요 인물들은 등장할 때 마다 중요한 사건들을 되짚어준다.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팁이라면, 팁!!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관계인지 일단은 기억하려 애쓸 필요 없다는 뜻이다. 

 5부 [카이사르]의 1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클라우디오' 라는 인물이다. 남매간인 '클라우디아' 와 그렇고 그런 근친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한 인물이고, 여인들의 신인 '보나 데아' 에게 바치는 축제를 망친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이 친절하게 소개된다. 

그래, 그러고 보니 전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질투심과 시기심도 강할 뿐더러 원한도 결코 잊지 않는 인물이었다. 보나 데아의 신관 한명을 곯려주려다 오히려 크게 창피를 당하고, 그걸 복수하겠다고 남자들은 결코 참여해서는 안되는 여신의 축제에 여장을 하고 들어가 신을 모욕했다는 악평을 들은 인물. 

 

  카이사르의 삶은 그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두 여인의 죽음과 함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동시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속주에서 딸 율리아와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다. 비로소 카이사르에겐 로마에 직계 가족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 이로써,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로마' 라는 공간과 심적으로 완벽하게 동떨어지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훗날 카이사르가 로마를 향해 군대를 진군시키는 결정을 내릴 때 마음의 부담을 줄여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카이사르의 삶에서도, 로마 공화정 말기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포인트인 '클라우디오의 죽음' 은 장인과 사위로 이어졌던 폼페이우스와의 관계가 율리아의 죽음으로 인해 삐걱대면서 시작된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가 쌓은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폼페이우스의 곁에 율리아가 있었던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로마의 일인자라는 자긍심과 군인으로서의 전투본능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카이사르가 그 누구보다 강대한 적이 될 수도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우선 로마 정계를 한손에 넣기 위해 임기가 다해가는 집정관직을 유지해야 했다.

 마침, 클라우디오가 발의할 법안은 로마 정계에 큰 논쟁거리였으며, 다음 집정관이 유력한 밀로는 껄끄러운 상대였다. 선거가 치러지는 것 자체를 막아야 했다. 그는 밀로와 클라우디오를 배제시킬 거미줄을 자아내기 시작하고, 밀로를 이용해 클라우디오를 죽음으로 이끌면서 로마에 거대한 혼란을 촉발시킨다.  카이사르에게 오랜 원한을 품고 있는 보니파의 카토와 비불루스는 기회를 틈타 폼페이우스를 자기들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모략을 짜내기 시작하고, 카이사르의 정부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자 카토의 조카인 브루투스도 속주에서 충분히 경력을 쌓고 로마로 복귀해 원로원에 입성한다.  


 로마 역사를 간략하게 읽다보면 당대 최강의 권력자였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반목하게 된 계기가 단순히 혈연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기 쉬운데, 당시의 권력구조와 캐릭터를 섬세하게 다룬 이 책을 읽다보니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 같다.

 폼페이우스는 여러모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닮아있는 인물이다.

전쟁의 천재였지만, 로마 중심에서 벗어난 변방 출신으로 혈통상 집정관에 오르기 힘든 존재였다. 사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게르만족의 침공이 아니었으면 집정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젊은 시절부터 술라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썼고, 마리우스의 게르만족 퇴치만큼 큰 업적을 쌓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갔다. 모든 로마인들이 칭송하는 와중에도 고귀한 파트리키 혈통의 아내를 얻어서 혈통의 정당성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자긍심이 큰 만큼 혈통에 대한 열등감도 컸다.

 그렇게 보면 카이사르는 술라와 닮아있다. 매력적인 외모도 그렇지만, 훗날 카이사르는 술라처럼 군홧발로 로마 시내를 짓밟을것이고, 술라가 자신에게 한 것 처럼 유능한 재능을 유피테르 대신관으로 묶어 놓을터다. 

 폼페이우스보다 조금 늦게 경력을 시작했지만, 카이사르는 순식간에 폼페이우스의 명성을 따라잡았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에게 사로잡혀 잘 보지 못했지만, 몇 년 사이에 로마인들이 칭송하는 대상은 폼페이우스에서 카이사르로 바뀌어 있었다. 심지어 카이사르는 수부라지구의 하층민들에게까지 인기가 많았다. 현명한 어머니 덕에 카이사르가 수부라지구에서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떠한 열등감도 없이 자라났다. 자기보다 혈통이 비천한 자들에게 충성과 사랑을 얻어내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으며 늙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수발을 들며 전쟁에 관한 수많은 노하우들을 익혔고, 그 모든 것들을 실전에서 통달해 나갔다. 

 율리아의 죽음과 함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라는 거대한 위협을 목도한다. 

작품 안에서 아티쿠스는 "폼페이우스는 누구를 속이려 할 때 스스로 거미줄 속에 뒤엉키네. 그래, 그가 거미줄들을 잘 다루기는 하지. 그래도 거미줄은 거미줄이야. 그에 반해 카이사르는 태피스트리를 짜지." (p. 350) 라고 평한다. 

폼페이우스가 드디어 카이사르를 옭아맬 거미줄을 쳤다. 

우리가 잘 알듯이 칼과 피로 마감되는 그 거미줄이다.

과연 얼마나 복잡하게 뒤엉킨 거미줄이 어떤 무늬의 태피스트리와 만날까. 

그리고 카이사르는 어떤 과정 속에서 주사위를 던지고,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될까.

다음권이 엄청나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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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0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꾸준하게 읽으신 모양입니다.

전 읽다 말다 거듭해서 매 시리즈마다 첫번째
권만 읽은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이번에야말로 완독에 도전을 해야 싶네요.

열혈명호 2017-06-07 19:00   좋아요 0 | URL
넵. 저는 이렇게 긴 장편은 모아놓으면 읽을 확률이 낮아서, 가급적 나오는 족족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리뷰를 쓰는 이유도 사실 까먹지 않기 위해서죠!! ㅋㅋㅋㅋㅋㅋ
 
사냥개 탐정 2 - 사이드킥
다니구치 지로 지음, 정은서 옮김, 이나미 이츠라 원작 / 애니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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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구치 지로의 별세 소식과 추모 리뷰대회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내가 소장하고 있는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들을 들춰봤다. [고독한 미식가] 부터 [아버지], [선생님의 가방], [에도산책] 그리고 [사냥개 탐정]. 국내에 발간된 책들을 꼼꼼히 수집한 것은 아니지만,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 색깔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은 없었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연 [사냥개 탐정] 이다.

무엇보다 동물들이 많이 나와서 즐겁고, 전혀 생소한 직업을 체험하는 느낌이라서 더욱 즐겁다.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 전반적으로 그다지 '특별한' 직업이 다뤄지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은 더욱 특별한 느낌이 든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작화가(그림 담당)와 원작자(이야기 담당)가 또렷하게 분리되어 있는 일본 망가판에서도 다니구치 지로 작가는 특별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그가 담당하는 원작은 항상 이미 출간된 도서라는 점이다. 물론 원소스 멀티유즈가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한 곳이 일본이지만, 다니구치 지로에게 제안되는 원작은 거의 대부분 문학성을 인정받는 작품이다. 

물론 인터뷰에도 언급된 적이 있지만, 다니구치 지로 작가 본인이 그런 작품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기획을 담당하는 실무자가 권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다니구치 지로 작가가 원작을 최대한 깊이 숙지하고, 원작자를 최대한 배려하는 자세가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대사 하나, 지문 하나도 원작의 흐름을 확실히 이해하고, 가급적 크게 변형하지 않은 상태로 컨버전을 시도한다. 때로는 원작에 있는 지문 전체를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다.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르지만 지문은 최소화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일본 만화임에도 말이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를 시각화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만화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정적인 내러티브를 그림을 통해 아주 조금 더 동적으로 만들어주지만, TV드라마나 영화에 비하면 아주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결국 텍스트가 다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만화는 글과 그림이 공존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에서는 특히나 작화가와 원작자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작화가는 원작의 독자이기 이전에 또 한명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원작자가 글을 쓰면서 상상했던 이미지와 작가가 글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이미지가 같을 리가 없다. 대사나 지문 역시 마찬가지다. 원작자가 쓸 때는 완벽했지만, 만화로 옮길 때는 불완전할 수 있다. 수많은 작화가와 원작자가 실제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대판 싸우고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욕설과 주먹, 고소가 오고가기도 한다. 책이 출간된 원작이 아니라, 시나리오만 있는 원작에서도 그런 일이 잦은데, 작품성과 문학성까지 인정받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면 훨씬 더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을터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방] 뒷면에 원작자와 작화가가 동석한 대담을 보면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이 원작자 자신의 이미지와 달랐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다니구치 지로의 작화가 안정적이고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작을 그만큼 잘 이해하고, 원작자의 의도 역시도 충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냥개 탐정]은 장르적인 특성에서도 무척 훌륭한 작품이다.

아마 원작 소설도 정말 재미있었을 것 같다.

주인공 '타쿠'는 단서들을 수집해 흔적을 찾고, 목표를 추적한다. 하지만, 목표물이 사람이 아니라 '개' 이다. 그는 산에서 잃어버린 개만을 찾아주는 '사냥개' 전문 탐정이다. 때문에, 사람의 추리력으로 수집할 수 있는 흔적은 극히 제한적이다. 사냥개 탐정 타쿠는 '늑대개' '조' 의 도움을 받는다. 사람과 개의 페어. 

 이 콤비가 이 작품의 첫번째 즐거움이다. 

타쿠는 조의 능력을 이용해 개의 습성을 따라잡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개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성격과 인간과의 관계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집 안에만 갇혀 사는 애완용 개들은 대부분 본성을 거세당한 상태로 길러진다. 하지만,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사냥개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조상이 가지고 있던 사냥에 대한 본능을 마음껏 떨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부여된다. 좀 더 야생성이 살아있다.

이러한 개들을 통해 우리가 평소 만나보지 못한 '개' 의 다른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다.     

 타쿠는 사냥개 탐정을 지향하지만, 항상 사냥개만 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개는 인간과 너무너무 밀접한 동물이라 어디를 둘러봐도 개가 있기 때문이다. 타쿠는 사냥개 탐정으로 이름을 조금씩 알리고 있지만, '개를 잘 찾는 사람' 은 정말 희귀한 직업이라, 개를 잃어버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두번째 즐거움이다.
산에서 잃어버린 사냥개나, 누군가 산에서 훔쳐간 사냥개를 찾아주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은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종류의 개들을 찾는 과정이다. 1권에서는 눈 먼 소녀의 길안내를 해주는 맹도견이 등장하고, 2권에서는 말 농장에서 기르는 개를 찾는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냥개는 야생의 상징이다. 산속에서 맷돼지 사냥을 하다가 복귀하지 못한 사냥개를 찾는 일과 도시에서 잃어버린 맹도견을 찾는 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작품의 구성도 사냥개를 찾는 일과 다른 개를 찾는 일이 교차되면서 서로 다른 분위기를 뚜렷하게 보여줌으써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흐름을 적절하게 밀고 당긴다. 이것은 아마 원작의 탄탄함 덕분일텐데, 다니구치 지로도 그 점을 간과하지 않고 훌륭하게 살려낸다. 

 작품의 완성도 자체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사람을 사랑하는 개와,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통하는 이야기도 물론 재미있지만, 사람과 동물이 통하는 이야기는 가슴 속 깊은 어딘가를 자극하는 원초적인 감동이 있다. 
 개와 사람은 본질적으로 완전하게 다른 존재이다. 
 무수한 통계를 들이밀고, 노하우를 들이밀며 서로의 마음을, 생각을 '짐작' 할 뿐이다. 개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표정을 통해 기분을 '짐작' 하고, 사람은 개의 반을릉 통해 역시 '짐작' 할 뿐이다. 내가 "손" 이라고 했을 때, 개가 앞발을 척 내미는 순간,  내가 "이리와" 했을 때, 천진한 눈동자로 도도도도 달려와서 품에 안기는 순간, '기다려' 했을 때, 몇시간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나를 기다리는 순간, 그러한 순간들을 맞이할 때 우리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는다. 이것은 단순한 소통의 증명이 아니라, 서로에게 들인 시간과 노력, 정성의 대가이자, 짐작과 기대가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와 날카롭지 않은 손발톱을 가진 인간이,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망망한 자연 속에서 처음으로 튼튼한 털가죽과 날카로운 손발톱을 가진 동료를 얻었을 때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유전자 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그 언젠가의 따뜻한 기억.  

 아니다. 역사적으로 개와 사람이 처음에 어떻게 함께 하게 됐는지, 이제는 별로 상관이 없다.
어쨌든 사람과 개는 이제 단순히 필요에 의해 공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또다른 가족으로 여겨지고 있으니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애완견을 '아기' 라고 말하고, 자신을 '엄마' 혹은 '아빠' 라고 말한다. 개들 역시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강아지 처럼 행동한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애정을 갈구하는 눈동자가 그 증거일터. 어떤 짓을 당해도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학대당한 개들의 눈동자는, 어떠한 짓을 당해도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는 학대당한 아이들의 눈동자와 닮아있다. 
두려움, 공포, 고통, 피로, 하지만 더 깊은 믿음. 

 하지만, 작품 안에서 다니구치 지로 작가는 동물들에 대한 감정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안정적인 구도에, 가급적 프레임 안에 동물의 얼굴과 표정을 풀샷으로 디테일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이것은 작가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생각' 또는 '마음' 을 섣불리 재단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니구치 지로의 작화는 굳이 나누자면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극화체에 가깝다. 현실에서 우리는 동물들의 표정을 알 수 없다. 단지, 사람의 표정과 비슷해 보일 때 제멋대로 동일시 하는 것일 뿐. 동물들과 동물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람 등장인물의 대사와 표정만을 통해 표현된다. 개를 사랑스럽게 끌어 안는다거나 함께 어우러져 뒹구는 등의 장면도 거의 없다. 그래서 오히려 류몬에게 개를 찾아달라고 의뢰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찾은 뒤의 감정이 깊이 있게 다가온다. 특히 1권의 말미를 장식하는 '세인트 메리'  에피소드에서 죽은 타로를 앞에 두고 독백처럼 읊조리는 리처드의 모습은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자네도 잘 알다시피 개는 사람에 비해 수명이 짧아. 계속해서 개를 기르다보면 여러 개들의 생과 사를 지켜보고 이별을 겪게 되지. 사람은 개의 빛나는 생명과 피하기 힘든 종언을 자신의 인생에 비춰 보면서 살게 되지. 사람은 개의 생과 사를 통해 배우는 것이 많아."
1권 p 220~221 

 어디 개 뿐일까. 굳이 고양이를 들먹이지 않아도,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은, 이제 아주 많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랬다지. 
'그 나라의 동물들이 받는 대우를 보면 국민들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라고. 
물론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가 가득한 말이긴 하지만,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진보란 단순히 '인간만' 진보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성별과 인종이 평등하게, 지구의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 속에서 함께 하는 다른 동물들과 조화롭게 발전해나가는 것일테니까. 지구가 멸망하고 자연이 파괴되고, 모든 동물들이 죽는다면 인류만 덩그러니 황무지 위에서 뭐하려고??(ㅋㅋ) 
 일본 만화 시스템에서 시작한 글이 인류의 진보에 다다랐다. 이제 그만 말(글)을 줄이라는 뜻일 터. 
[사냥개 탐정] 봐도봐도 좋은 만화였다. 다니구치 지로 작가가 그렇게 그려보길 염원했다던 '로보'가 등장하는 [시튼] 도 그렇겠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70생애동안 정말 많은 작품을 치열하게 그려냈고, 수많은 국가에서 사랑받았다.
이정도면, 다니구치 지로의 생도 찬란하달 수 있을 터다. 
 비슷한 업종에 있는 자로서 그의 빛나는 생에 존경과 부러움을 보내며 미숙한 글을 닫는다.
 그곳에서도, 실컷 그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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