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궤도 세트 - 전2권 신의 궤도
배명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엄청 길어서 죄송합니다 ^^;; 읽기 싫으신 분은 그냥 제 팬픽이나 보고 가셔요.ㅋㅋㅋ

http://blog.naver.com/fireflag/150118811415 

 

 

 

SF란 무엇일까??
Science- Fiction. 우리는 이런 단어로 부르지만, 그 아래 카테고리에 Space Opera 라는 항목이 추가되면서 SF 는 Science- Fantasy라 불러도 무방하게 되었다. 실제로 최근의 흐름은 SF와 Fantasy를 큰 범주 안에서 함께 묶는 경우가 많고 어슐러 K 르귄이나 로저 젤라즈니 같은 2세대 SF작가들은 실제로 SF 소설과 Fantasy 소설을 모두 써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스티븐 킹이나 리처드 매드슨과 같은 소위 '장르소설 전문' 스토리 텔러들도 SF경향을 가진 Fantasy 혹은 Fantasy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SF를 쓰곤 했다. 완벽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의 특성상 SF는 Fantasy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일례로 장르 문학쪽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인 '휴고상' 은 SF와 Fantasy를 크게 나누지 않고 후보군을 선정하곤 한다.  그렇다고 애써 그 둘을 분류하려는 이들을 반대하거나 타박할 생각은 없다. 장르는 단순히 구분,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향 자체가 현실과 상상을 자유로이 오가고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어내며 장르의 파괴를 넘어선 장르간의 융합이라는 색채가 뚜렷하기 때문에, 애초에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아져 버렸다. 이런 와중에 틀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서 SF와 Fantasy를 끼워 맞추는 식의 구분이나 분류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같은 작품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다는 설정은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갑자기 좀비가 된다는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와 어떤 틀과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구분해 낼 것인가? 모든 사람이 장님이 되는 바이러스와 모든 사람이 좀비가 되는 바이러스? 눈이 머는 것과 좀비가 되는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눈 먼 자들의 도시] 는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인간 사회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 중심이고, [나는 전설이다] 또한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본질을 찾아내려 하는 것이다. 눈이 머는것과 좀비가 되는 것은 작가가 자신이 진짜 하고픈 이야기를 하기 위한 무대와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작 스토리 텔러들은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 를 할 뿐이다. 독자들은 그것을 즐기면 될 뿐. 한국 작가들의 SF는 어쩌고, Fantasy는 어쩌고, 블라블라 떠드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작가가 자신의 과학적 상상력을 얼마나 조화롭고 설득력있게 이야기속에 녹여내는지, 그리고 그 속에 진짜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 물론, 이야기가 아닌 곁가지, 작가가 어떤 발상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지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과정 또한 상당히 재미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 은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일종의 텔레포트 포털 같은 것이 존재한다. 거대한 저택에 문들이 있는데, 그 문들은 모두 각각 다른 은하계, 다른 행성의 별장과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이 텔레포트 포털의 문을 유지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작가는 자신의 무한한 상상력을 구체화 시키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를 상상해낸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을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물론 [히페리온] 의 이야기 속에서 이 문이 뭔가 큰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아니, 은하계를 넘나드는 포털도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구체적인 상상의 세계를 찾아내고, 작가가 설정해 놓은 나름의 원리를 깨닫고,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회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엄청난 즐거움이다.

 

 자, 그리고.

과연 이 작가는 왜 이런 세상속에서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현실을 놔두고, 현실이 투영된 가상세계를 그려야 했을까? 과거, 혹은 미래. 과학이 엄청나게 진보하거나, 혹은 알 수 없는 사건으로 문명이 엄청나게 퇴보하거나. 필립 k 딕은 왜 핵전쟁으로 멸망하여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를 그려야 했을까? 어슐러 르 귄은 왜 황량한 행성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공동체를 그려야 했을까? 왜 꼭 우주일까? 왜 꼭 미래일까? 왜 복제인간? 왜 안드로이드? 왜 꼭 외계인?  

 영화 [인셉션] 에서는 꿈 속 세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타인의 꿈 속 세계에 들어가보면, 꿈을 꾸는 사람의 무의식이 구현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무의식은 통제할 수 없다. 수많은 인종, 다양한 연령대, 남녀구분 없이 수많은 '사람' 들이 등장한다. 인셉션이 그려낸 누군가의 꿈 속 세계는 한 명의 작가가 그려내는 소설과 닮아있다. 작가의 내면 속에서 재구성된 수많은 사람들. 작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투영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거대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런 그들이 왜 현실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낯선 세상에 던져져야 했을까?

 작가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했을까?

 

 [신의 궤도] 는 그런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리며 읽으면 훨씬 즐겁게 읽어낼 수 있다.

이 작품은 고전적으로 활용되오던 수많은 클리셰들의 집합인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시도이다. 셰익스피어때부터 되풀이 되어 온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 왕좌를 노리는 치열한 암투, 그리고 신에 대한 갈망과 현실에서의 탈출은 물론, 조선시대 김만중의 '구운몽' 과 워쇼스키의 영화 '매트릭스' 까지 망라한다. 물론 '라 파이예트' 와 '스타워즈' 를 능가하는 화려한 공중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을 연상케하는 전쟁과정 또한 매우 디테일하고 심도깊다. 책의 반 정도는 공중전을 그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수많은 전투기들의 기동이 솔직히 머릿속에 그렇게 잘 그려지지는 않는다. 워낙 많은 수의 전투기들과 편대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마치 저자의 단편인 [변신합체 리바이어던] 이 떠오른다. (여담이지만 확실히 배명훈 작가는 '어마어마한 숫자' 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저자인 배명훈 작가도 '자신이 재미있을 만한 모든 소재를 넣었다' 고 했는데, 과언이 아니다. 그래, 현존하는 좋은 플롯들의 총 합인 동시에 완벽한 해체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대단히 통속적이면서도 황당할 정도로 신선하고, 엄청나게 쉽게 읽히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작품의 프롤로그라고 할만한 첫 챕터부터 통속적이고 신선하다.

인공위성 사업을 하는 거대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주의 서자인 김은경. 적자인 경라에게 살해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지는 비행. 바로 하늘이었다. 비행기 조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은경. 하지만, 경라의 음모로 그녀는 동면되어버리고, 이야기는 순식간에 십오만년 뒤로 점프한다.

 동면된 은경이 십오만년뒤에 눈을 뜨면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휴양행성 '나니예' 에서 일어난 몇 달 간의 일. 그것은 거대한 전쟁이었다. 수천대의 전투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행성의 운명을 바꿔놓은 거대한 두 세력의 충돌.

 그리고 그 안에서 전쟁의 키가 된 두 명의 주인공. 김은경과 나물수사.

결국 이 이야기는 신을 좇는 이야기인 동시에, 인물들이 치열한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와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 여기서부터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작가가 '나니예' 라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여주인공 은경을 무려 15만년의 시간을 점프시키고, 수많은 SF적 상상력을 쏟아부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전쟁' 이 필요했던 것이다. 행성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 이 거대한 전쟁속에서 타의에 의해 윤회를 거듭하는 '은경' 과 신의 목소리를 듣는 운명을 타고난 '나물' 수사. 이 두 인물들의 관계는 참으로 안타깝고 눈물겹다. 

 

 일단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제목에 등장하는 '신' 에 주안점을 두고 읽었다.

(이 작품을 다른 관점, 은경과 나물수사를 둘러싼 관리사무소와 천문교측의 '전쟁' 에 주안점을 둔다면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인물들간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읽어도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엄청나게 풍부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신' 을 중심으로. 즉 '신앙'을 중심으로 읽어보면 은경은 마치 크리스트교의 예수와 닮아있다. 창조주의 아들 예수처럼 나니예의 창조주의 딸인 은경은 부활을 반복하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뚜렷한 삶의 지향점을 가지고 존재한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에 등장하는 '네오' 와 닮은 것은 그렇기에 필연이다. 'ONE' 이라는 단어의 재조합인 NEO 또한 예수를 모티프로 태어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물수사가 믿고 있는 '신' 이 사실은 '신' 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은경도 나물수사도 각자의 눈은 또렷하게 '신' 을 향해있다. 아니, 그들의 영혼이 온전히 '신' 이라는 어떤 존재를 향해있다. 은경은 하늘에서 공전하는 천체를 '태초의 무기' 라고 인식하고 있는 행성관리사무소의 대표인 셈이고, 나물수사는 하늘을 공전하며 인간들을 보살피는 조물주라고 인식하고 있는 천문교의 대표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현실속, 무신론자와 개신교, 가톨릭, 성공회, 유태교, 이슬람교 등 유일신을 믿는 모든 기독교인의 투영이다. 신을 과학적 소산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체계와 질서를 파악하고 따르는 편과 신이 인격적 존재로서 정신적, 물질적 교감을 추구하는 편인 것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천문교 안에서도 신에 대한 접근법이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나니예에서는 실제로 신의 존재가 눈으로 확인되던 시절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실제 현실에서의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과학적, 학문적으로 해석하고 구약에 나오던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고자 하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고, 신학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다.  

 

 '신앙' 이란 존재의의이다.

지금 우리 세상에는 인격을 가지고 있는 유일신이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그 신을 믿는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그 신을 믿는 이유는 아주아주 간단하다.

 그는 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지?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존재하지?" 라는 인류 태고의 질문에 가장 또렷한 답이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나를 위해 존재하는거지." 라는 답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인간의 존재의의에는 '신' 이 필연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문명이 시작된 이래 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는 연구 결과가 보여주듯, 인간에게 '생각' 이 있는 한, 모든 행동과 동기, 근원적 갈증의 가장 쉽고 모범적인 답안인 '신' 을 포기할 수 없을터다.

 

 타인에게 '네가 믿는 신은 신아니 아니야.' 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은 물론 존재의의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때로는 자신의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하려 하고, 다른 신을 믿는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타종교와의 갈등도 비롯한다. 내가 정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만이 정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둘일 수는 없다. 반드시 세상에 나를 있게한 나의 신. 그 존재 단 하나여야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정답. 그것이 바로 '신'이다. 그런 절대적인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섣불리 자신의 신의 존재증명을 꺼리게 된다. 만약 그 증명에서 실패한다면 스스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김어준 식으로 말하면 그레이트 빅 엿을 스스로 쳐먹는 꼴이 되기에, 현실 종교에서 과학적,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신비' 로 넘겨버린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천문교는 두 종파로 나뉘어 있다.

태초에 나니예의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신 관찰기록에 의존해 신이 나니예를 공전하는 궤도를 계산하는 이론신학회와 그 공식을 대입해 천체 망원경으로 신을 눈으로 확인코저 하는 관측신학회가 그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공식들을 대입해 보고 관측해봐도 신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이론 신학회는 관념론을 대두시킨다. 신은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닌 관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천문교내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관측신학회는 유물론적 신앙관을 유지하고자 하고, 이론 신학회는 관념론적 신앙관을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그런 와중에 신의 존재를 귀울림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예언자들. 그 중 마지막 예언자인 나물수사는 이론신학회에 있어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우주 왕복선을 이용해 신에게 날아가려는 김은경의 존재 역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신앙관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인류의 '항성화' 이다. 인류는 십오만년이라는 엄청난 시간동안 육체를 버리고 별이 된다! 그것도 태양과 같은 항성으로 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태양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자, 과연 항성에게는 종교가 있을까? 항성의 존재의의는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자신의 주위를 공전하는 천체들? 아니, 그 천체들의 입장에선 항성이 신일 것이다. 신에게도 신이 있을까? 신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일전에 배명훈 작가는 [안녕, 인공존재] 라는 작품을 통해서 존재 자체에 대한 고찰과 '존재 폭발' 이라는 신선한 개념을 선보인 바 있다.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단편들 속에서 장편의 모티프를 얻어내는데, [신의 궤도] 의 모티프는 단연 [안녕, 인공존재] 일 것이다. 무의미하게 우주를 도는 천체. 하지만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를 되뇌이는 천체.

 존재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에서 시작된 배명훈 작가의 존재에 대한 거대담론은 [신의 궤도] 를 통해 조금은 발전한 듯 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 하고 있다. 심지어 프로그램과 메뉴얼들도 '존재' 한다.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서 생각하지 않는 개체는 비행기들 뿐이다. 하지만, 최후의 존재폭발로 인해 비행기들 또한 '존재' 하게 되었을 듯 하다.

 

 존재의 의의. 삶의 의미. 운명과 목표. 그것이 신이어도 좋고, 신이 아니어도 좋다. 나물수사는 신이라고 불렀던 그것. 은경은 신이 아니라고 불렀던 그것. 은경과 나물수사는 서로 다른 시각으로 '신' 이라는 그 천체를 바라보지만, 그들 사이에 갈등은 없다. 둘 모두에게 그것은 삶의 목표이자, 자신의 존재의의였으며, 끊임없이 추구하는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은경은 하늘에 떠있는 인공천체를 신이라고 숭배하는 나물수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나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나물수사는 그런 신비로운 증명이 있음에도, 자신이 숭배하는 신을 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은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둘 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신을 품에 안은 순간.

 은경은 신을 숭배하며 살았던 나물수사의 삶의 궤적을 이해하고, 나물수사 또한 궤도 비행사로 살아온 은경의 삶의 궤적을 이해한다.

신의 궤적은 은경과 나물수사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었던 것이다.

 

 

 글이 참 두서없이 길기만 하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수만가지 상념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이게 대체 무엇일까. 이건 또 뭔가. 이게 무슨소리야. 그런 느낌이다, 솔직히. 이 비슷한 감정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 와 [솔라리스] 를 읽었을때와 비슷하다. 우주적으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어처구니 없는 경지. 이것은 뭐랄까. 생각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심심할때 꺼내보는것과 비슷하달까?

 

엄청 통속적이고, 그만큼 낭만적이기도 한, 게다가 관념적이고, 공상과학적이면서 재기발랄하고, 뭔가 틀을 깨는 이야기속에 들어있는 [존재] 에 대한 우주적인 고찰. 치열한 전쟁 속에서 그것들을 찾아나가는 은경과 나물의 행보가 애틋하기만 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생생했고, 이해되었으며, 사랑스러웠다. 특히, 수십년을 관통해서 지난, 나물과 엮여가는 은경의 윤회의 이야기에는 가슴이 짠했다. 정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서, 2권이라는 분량이 짧게 느껴졌고, 너무 금방 끝나버렸다는게 아쉬웠다. 은경과 나물의 이야기가 더 많이 보고싶었다. 나니예에서의 생활들이 더 보고싶었다.

 조지 R.R 마틴 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 처럼 엄청나게 하드하게 그려주었어도 좋았을 듯 싶다.

뭐 물론, 우리나라의 장르문학 시장에선 그랬다간 출판사도 망하게 하고, 작가 본인도 굶어죽기에 딱 좋겠지만 말이다. ^^

 

저자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는 또 얼마나 우주적인 이야기를,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깃속에 담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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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9-2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톤』때문에 들어왔다가, 글이 너무 길어서ㅡ.,ㅡ
펜픽이나 보고 갑니다. ^^ 재밌어서 서재 즐찾했어요.
여기서두 펜픽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안되나요?

열혈명호 2011-09-22 20: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너무 길죠?? ㅋㅋ 제 리뷰는 솔직히 왠만해선 남들 보라고 쓰는 리뷰가 아니라 재미도 없고 길기도 길죠 ^^;;
팬픽, 여기에도 올려보려고 했는데, 요기는 아무래도 텍스트에 특화된 사이트라 그림 올리기가 만만찮네요~ 그림 사이즈를 많이 줄여야 해서요~ 네이버 블로그 자주 놀러와주세요^^

미르하이 2011-09-3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