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니가 보고 싶어 tam, 난다의 탐나는 이야기 1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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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재화' 는 3년간 몇편의 단편소설을 낸 소설가이다. 

3년이라는 시간, 작품수가 많아도 중견작가라고 부르기에는 짧은 시간. 신출내기, 신인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잘 어울릴터다. 그녀의 작품들은 소위 '장르' 그러니까, 그녀가 만난 문단 소설가의 입을 빌리자면 "부적절한 주제에 대해 모나게 쓴 이야기' 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위치는 '등단했다' 고 하기도 뭐하고, '등단도 못했다' 고 하기도 뭐한, 대체적으로 뭐~한 포지션인 셈이다. 그리고 그녀는 전남친인 '용기' 의 입을 빌리자면, '안고 있을 때도 안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만지고 있을 때에도 만져지지 않던' 게다가 '피스타치오인지 피스타키오인지 그런 알 수 없는 초록색 맛' 도 날 뿐더러, 표정까지도 '떨떠름한 초록색', '미로' 같은 심지어 '부비 트랩이 가득한 미로' 같은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쓰는 소설들에는 용도 나오고, 차원 이동 포탈이 등장할 뿐 아니라, 늑대족, 로봇, 얼음여왕, 물고기 왕자, 공주 등등 온갖 판타지스러운, 아니 그러니까 '장르 문학' 스러운 - 아니, 장르 소설가가 맞으니, '장르 문학에 걸맞는' 캐릭터들이 한가득 등장하고, 그에 걸맞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런 그녀에게는 '용기' 라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회사 동료였다가 절친한 사이로 발전한 '선이' 가 소개시켜 주었던 용기는 재화와 헤어진 뒤 발랄하고 어린 여자친구와 함께 재미나게 연애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럭비선수 출신이기도 했던 그는 지금은 사설 경비업체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빡빡한 근무환경 속에서도 무던한 성격의 충실한 연인이었고, 착한 남친이었다.


 이야기는 여주인공인 재화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재화' 챕터와 남주인공인 용기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용기' 챕터가 교차되며 등장한다. 재화의 이야기는 재화 주변의 이야기들과 함께 자신이 쓴 단편소설이 소개되며 마무리된다. 즉, '재화' 챕터는 모두 동일하게 재화가 하룻동안 겪는 일들이 나오고, 결국엔 자신이 쓴 단편소설을 교정하면서 마무리 되는 플롯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재화가 쓴 단편들의 주인공들은  모두 전남친 '용기' 이기 때문이고, 재화는 소설속에서 전남친 용기를 대부분 죽였기 때문이다.



 

 작품속의 '재화' 라는 인물은 그 독특한 개성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잘 이입되는 편이다. 재화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주변 일들의 세세함과 디테일함이 충분히 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재화를 독촉하는 선배 편집자, 작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주는 명품조연 선이, 그리고 그녀가 써내려가는 소설의 내용이나 말투, 대사들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다. 인물 자체의 매력이 충분히 발산된다.

 반면, '용기' 라는 캐릭터는 시종일관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느낌이다. 그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가 마치 가상인물처럼 허공에 붕 떠있는 느낌이다. 특히 용기와 친밀한 관계인,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여자친구' 는 더더욱 그렇다. 마치 모니터속의 애인같은 느낌이랄까. 용기와 '여자친구' 의 관계는 디테일함이나 세세함이 재화와 주변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들의 반의 반도 못미친다. 때문에 용기와 여자친구가 헤어지는 장면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고, 헤어지게 되는 이유까지도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다. 이 둘의 관계과 그 어그러짐이 너무 단편적이고 이차원적인 느낌이다. 

 때문에, 용기의 행동과 생각, 인과관계까지 모두다 조금씩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예를 들면, 재화의 성격이나 특이점들이 주변인물들과의 관계, 일과 행동등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용기의 일상이나 마음은 주로 용기 자신의 독백을 통해 나타난다는 점을 짚어볼 수 있다. 용기의 일상과 용기라는 인물 자체가 재화에게 있어서는 가상의 존재, 꿈속의 존재와 같은 느낌이다.  


이 작품은 재화-용기, 용기-여자친구 의 두 관계가 가장 중심이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명의 관계를 일종의 삼각관계처럼 풀었어야 했는데, 용기와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단순하게 접근함으로서 균형을 잃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부분들이 재화와 용기 사이의 관계까지도 조금씩 무너뜨려서,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줘야 할 클라이맥스가 밍밍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만약, 이런 장치가 작가의 의도였을수도 있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장르적 특성' 상, '재화' 챕터의 느낌과 '용기' 챕터의 느낌을 의도적으로 이질적으로 가지고 갔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외려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재화' 라는 인물을 묘사하는데 있어 자기 자신과 주변환경, 인물들을 적절히 활용한 데 반해 '용기' 라는 인물을 묘사하는데는 거의 대부분을 상상과 간접경험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단점은 여성독자들에게는 큰 무리가 없겠지만, 남성독자들에게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지점이 될 터이다. 


 이 작품속의 볼거리는 용기와 재화의 이야기 말고도 재화의 챕터에만 들어있는 재화의 단편소설들도 큰 몫을 한다. 이 단편은 재화와 용기 모두에게 적용시켜 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재화가 썼다는 점에서 재화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너무나 통통튀는 여덟편의 작품들은 판타지, SF, 동화와 우화를 넘나들며 재화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전 남자친구' 용기의 모습과 그 종말을 그려낸다. 


위에 언급한 '지적질' 은 개인적으로 저자에게 느끼는 아쉬운 부분이라면, 사실 그 밖의 부분은 대부분 칭찬하고 박수치고 싶은 것들임은 사실이다. 특히 재화와 용기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적인 관계 그 자체에 대한 메타포를 담고있는 '환상적인 기현상' 은 그야말로 상상초월이랄 수 있다. 재화가 쓴 단편들 또한 간단하게 시놉시스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그 각각의 작품들 모두 충분한 완성도와 역시 통통 튀는 상상력들이 기발하게 들어가있다. 재화와 용기뿐 아니라 주변인물들까지, 각각의 인물 자체가 갖고있는 매력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환상적인 기현상과 미스테리에 스릴러까지 넘나드는 다채로운 내러티브들도 정말 참신하다. 도저히 지루할 새가 없이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면서도, 재치넘치고 유머 가득한 따뜻한 문체도 책에서 손을 못 떼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소이다. 

 정말ㄹ '재미있다!'  


 우리의 인생은 어쩌면 순수문학보다는 장르문학에 가까울터다.

아니, 그 둘을 나눈게 대체 누구이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톨스토이' 와 '아이작 아시모프' 의 차이를 나는 도통 정리할 수가 없다.

우리의 삶 속에는 얼마나 신비한 일들이, 판타스틱한 일들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법같은 일들이 얼마나 가득한가?

미스테리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명의 신비! 우리 엄마와 아빠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까지 얼마나 많은 마법같은 일들과, 드라마같은 반전에 반전들이 거듭되었을 것인가? 


 '덧니가 보고싶어' 는 올 해에 내가 만난 가장 유쾌하고 발랄한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최근 한국 순수문학은 지나치게 무거운 감이 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많이 무겁고, 고통스럽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작품들이 지나치게 현실의 어두운 부분들만을 디테일하고 깊이있게 파고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는 것은 더 큰 고난과 더 큰 고통이 아니잖은가? 

 

절망을 이겨내는 것은, 바로 유머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되는 유쾌하고 발랄한 이야기!! 

재화와 용기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울함을 극뽁!!!! 하기를 바래본다.


한가지 또 아쉬운 점은, 책의 디자인과 가격이다. 

작은 판형에, 가벼운 무게에, 두꺼운 도화지 한장뿐인 앞뒷표지...

출판사에서 가격을 책정하는 과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문고판에 가까운 이 책이 무려 11000원 이라는 점은, 

솔직히 아주, 아주아주 아쉽다.ㅠㅠ 

그래서 별 하나 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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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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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라는 종족은 스스로를 자각하면서부터 끊임없이 '탈脫동물' 을 표방했다. 인간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과, 인간사회가 켜켜히 쌓아놓은 장구한 역사 기록들은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가 여타 수많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종족임을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 친 흔적이다. 우리 인간종족은 동물과의 차별성을 끊임없이 스스로 되뇌이고 되뇌인다. 그것은 단순히 개와 고양이를 비교하는 정도의, 예를 들어 외모, 습성, 내장기관, 뇌의 용적, 사회구성 방법등의 표면적인 비교를 떠나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와, 인간이 아는 모든 종족들을 아우르는 차이점을 비교하는 초거대 프로젝트이다. 이 거대한 지구와, 지구의 수십억년에 이르는 엄청난 역사 안에서 '인간은 우월, 나머지는 모두 쩌리' 라는 전제 하에 시도되온 것으로, 그것은 인간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인간의 '우월성' 은 인간의 '존엄성' 으로 묘사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태어난다. 모두 '하늘' 혹은 '신' 이 특별히 '인간' 종족에게만 내려준 불가침의 영역으로서, 이 점이 인간이라는 종족을 지구의 주인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기본적인 이념과 개념들은 모두 이 '존엄성' 에 기인한다. 

 허나, 이 존엄성이란 육체의 고통 앞에서는 모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존엄성으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인간적인' 개념들은 자기 몸뚱이의 어딘가를 휘둘러대는 타인 앞에서, 광대뼈를 으스러뜨리는 오동나무 앞에서, 내장을 후비는 쇠鐵의 앞에서 속절없이 무시된다. 심지어 고통 앞에서 인간은 직립보행을 버리고, 네발로 기기도 한다. 존엄성이 무시되는 인간은 더이상 인간일 수 없다. 존엄성인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차별성이 사라진 인간은, 인간 종족 전체가 쌓아올린 '동물과의 차별성' 전체를 일거에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 '폭력' 이란 그렇듯 단순하게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파괴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치명적인 무기이다. 때문에, 인간을 동물처럼 부릴때는 폭력을 사용하는 편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존엄성을 무시해버리면 된다. 자존감, 자립심을 포함한 '존엄성' 에 기반한 모든 것을 일거에 무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인 폭력. 즉, 타인에게 폭력을 행한다는 것은 [그 타인을 동물처럼 부리고 싶다] 는 의중이 깔려있는 것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인간들과, 인간을 동물처럼 부리고 싶어하던 인간들이 가장 뚜렷하게 양분되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는 단순했다. 그들은 몽둥이와 총을 들고 아무에게나 휘둘러댔으니까. 한번에 보였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교묘해졌다.  

그들은 돈과 언론을 이용해 자신들이 휘둘러대는 몽둥이와 총, 칼을 숨긴다.  

쌍용사태의 가해자들은 돈을 주고 용역을 고용해 노조원들을 폭행하고, 돈을 이용해 정치인들을 매수하고, 정치인들은 권력을 통해 법조인들을 조종해 가해자를 피해자로 바꾸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바꾸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와 결탁한 수많은 언론들은 끊임없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케 하는 기사들을 써보내고, 진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무시하는데 여념이 없다. 

 주가를 조작해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피땀흘려 모은 돈을 착복하고, 자살하게 만든다. 자살은 스스로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 세상에서, 이 사회에서 도저히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을때. 존엄성을 잃고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 뿐일때 택하는 마지막 선택지이다. 
 부산에서는 아직도 한 여인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그 여인과, 그 여인을 지지하는 사람들 위에 쏟아지는 수많은 유형, 무형의 폭력들.  

 한창훈 작가는 책의 끄트머리에 한 꼭지를 빌려 '미움의 힘' 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에게는 부정의 힘과 긍정의 힘이 공존하고 있다. 한 때 우리 사회에는 긍정의 힘에 대한 열풍이 몰아친 적이 있다. 사회가 그런대로 평안할 때는 긍정의 힘이 각광받는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하의 우리 사회에서 유행한 책들은 긍정의 힘이나 화내지 않는 법에 대한 책들이었다. 그것은 그 사회가 나름대로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부정의 힘이 맞다고 본다. 쉽게 용서하지 말 것, 눈에 보이는대로 믿지 말 것, 귀에 들리는 것만 듣지 말 것. 그 안에. 그 이면에. 수많은 음모들을 기억할 것. 

미워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쉽게 용서하지 말 것.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를 좋아하는 것 만큼, 미워하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좋아하는 대상은 눈에 딱 들어오지만, 미워하는 것은 그 대상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 작품은 우리가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다. 어린 소년을 구타한 다른 소년들? 경찰서와 군청에 난입한 시위대들?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짓밟은 군인과 경찰들? 군인들과 경찰들에게 명령을 내린 통치자? 도시의 실상을 알리려고 했던 기자들의 입을 폭력으로 막은 윗선들? 죽어가는 친구들을 버리고 도망간 이웃들? 

어쨌든, '폭력' 그 자체는 우리가 반드시 미워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이 만연하게 한 본질적인 사회의 구조. 어쩌면 우리는 대한민국 자체를 미워해야 할지도 모른다.우리는 너무나 쉽게 용서하고, 너무 쉽게 잊는다. 너무 쉽게 용서하고, 너무 쉽게 잊는 것도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사랑해야 할 것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우리가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는 이유는 미워해야 할 것을 정확히 찾이 위함이고, 미워해야할 것을 찾는 이유는 사랑해야할 것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행위들은 단연, 현재와 미래를 살아내기 위함이다. 

미워하는 데에 함몰되면 과거에 파묻힌다. 누군가를 , 혹은 무언가를 미워하려면 이미 나에게 어떤 행위를 저지른 뒤여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오지도 않은 것을 미리부터 미워할 수는 없다.  결국 미움의 힘이란 과거에서 온다. 그렇기에, 미움에 힘에 함몰되면, 과거에 함몰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와 미래에, 사랑해야 할 것들을 놓쳐서는 안된다. 예를들어, 우리가 만들어낼 후손들. 자식들. 그들이 만들어갈 세상들.  미워하는 힘은 결국 사랑하기 위함일 터.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확실히 미워하고, 확실히 응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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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1초들 - 곽재구 산문집
곽재구 지음 / 톨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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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참 이상하다. 언제나 안정을 추구하지만, 안정 속에서는 금새 권태를 느낀다. 이런 아이러니한 감정들 덕에 한 사람의 일생은 각자 모두가 다이내믹하고, 파란만장하게 된다. 밖에서 보기에는 아주 평탄하고 심심해 보일 정도로 변화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끊임없는 싸움에 만신창이가 되어있을 확률이 높다. 그 싸움의 주체들은 당연히 '안정' 과 '변혁' 이다. 
 

 시인이란 어쩌면, 그 치열한 내면의 싸움을 '초' 단위로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끊임없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도 치열하게 안정과 변혁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 필연적으로 내면의 촉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터다. 안정을 포기하고 변혁을 선택할 과감성. 다음의 변혁을 위해 현재의 안정을 택하는 현실성. 이 두 가지를 본능적으로 잡아내는 능력. 게다가 그 순간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안정을 택했을 때는 변혁의 시점을 기다리며 안정을 만끽하고, 변혁을 택했을 때는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변혁 자체를 만끽하는 사람. 안정의 순간에도 오감의 촉이 꼿꼿히 세워져 있고, 변혁의 순간에는 오히려 오감의 촉이 부드럽게 누워 있는 그런 사람.
 

 [우리가 사랑한 1초들] 의 문장속에서는 변혁의 순간 속에서 만끽하는 여유가 한없이 느껴졌다. 문장문장마다 '만끽'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간이란 강제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재화이다. 유량이 정해져 있는 탱크에 붙어있는 절대로 잠글 수 없는 수도꼭지와 같다. 내가 아무리 재빠르고, 물을 받을 수 있는 양동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사용처와 사용법은 제한적이다. 다른 탱크에 옮겨 담을 수도 없다.  

유량이 정해져 있는 탱크와, 그 앞에 작은 양동이를 들고 있는 나. 그리고, 대부분의 물은 바닥에 흘리고 만다.

양동이 한 가득 물을 담아도 수도꼭지에서 물을 여전히 콸콸 흘러나온다. 아직 양동이 수십개, 혹은 수백개를 채우고도 남을 물이 탱크안에 남아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양동이는 딱 하나뿐이고, 그건 이미 꽉 차서 넘치고 있다.  결국 인생이란, 양동이 한개를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얼마전 타계한 스티브 잡스는 '단순' 과 '집중' 을 강조했다. 잡스의 방식에 따르면 이렇다. 양동이가 다 차기 전에 재빨리 물을 써버린다.짧은 시간동안 빨리 써야하기 때문에, 한 두 가지 일을 단순하게 선택해서, 집중해서 쏟아붓는 것이다. 물이 차는 동안 밭을 일구고, 물이 차면 빨리 그 밭에 부어버리고. 다시 물을 채우는 동안 밭을 일구고. 다시 그 밭에 빨리 붓고. 그렇게.  단순하게 선택하여 강렬하게 집중하는 것이다. 밭에서 곡물이 자라면, 그 사이에 빨리 다른 밭을 또 일군다.
 

 반면, 이 책은 완벽히 다른 접근이다. 물이 넘치건, 흐르건, 쏟건, 버리건, 쓰건.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다. 양동이. 그리고 ,물.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물이 양동이에 받아지며 내는 찰랑거림, 빛이 반사되는 반짝거림. 졸졸졸 하는 물소리. 넘쳐 흐르며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들. 흐르는 물들이 발가락 사이를 흘러가는 간지러움.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굳이 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물과 양동이. 그 자체로 충분히 즐기는 것이다. 밭을 열심히 일굴 필요도, 빨리 다른 밭을 일굴 필요도 없다. 
 

 현대인들은 양동이에 차는 물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다. 양동이에 물이 반쯤 차면, 뭐에 쫓기듯 미친듯이 곡괭이질을 한다. 내가 왜 밭을 일구는지도 잊어버린다. 밭에서 나는 곡물들을 맛보지도 못한다. 곡물을 수확하지도 못한다. 수확하는 사이에 양동이는 가득 차 넘쳐 흐를것이  뻔하고, 추수가 끝난 밭에는 물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가득 차있는 물들은 버리거나, 넘치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간에 쫓기며 산다.
 

 사람의 삶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1분 1초를 아쉬워 해 봤자, 밥먹고, 응가하고, 쉬하고, 잠자고, 잡담하고, 멍때리는 시간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한다. 깃털처럼 가볍고, 먼지처럼 하찮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 일생이라는 커다랗고 중요한 탑을 쌓아낸다.

 너무나 하찮고 가벼운 1초. 그 1초들이 모여 1분을 만들고, 1시간을 만들고, 100년을 만든다.  

주변을 돌아보고,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생각하고, 나의 자리를 생각하고. 내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받은 것들을 돌려줄 방법을 생각하며 보내는 1초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군가에게 강탈이라도 해서 소유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1시간보다 가치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첫 휴가나왔을때를 기억한다.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엄청나게 짧다. 매 시간별로 계획을 세워, 시간에 헐레벌떡 쫓긴다. 여자친구를 만나고, 쉬지않고 손을 만지작대고, 1초라도 붙어있으려고 하고, 영화를 한편이라도 더 보려고, 심야 영화를 보고, 잠을 안자고, 피자를 미친듯이 쑤셔넣고, 술을 쉴새없이 들이붓는다. 하지만, 말년휴가 쯤은 완전히 다르다. 일주일정도 받은 말년휴가는 잠자고, 빈둥대고, 컴퓨터 게임하고, 채팅하고, 여자친구 만나기도 귀찮아진다.  하지만, 난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첫 휴가 나오던 고속버스안의 기름냄새, 덜컹거리는 흔들거림 속에서 두근대는 심장, 수양록 뒤편에 빼곡히 적어내던 '휴가나가서 꼭 해야할 것들' 목록, 휴가나오기 전날 밤, 밤샘 근무를 하며 떠올렸던 계획들, 군복을 입고 처음으로 들어가보는 집. 현관에서 군화끈을 풀어내던 순간, 4개월만에 맡아보던 내 방, 내 이불, 내 옷에서 나던 먼지냄새와 새제냄새 속의 내 냄새. 엄마냄새. 아빠냄새.  


군대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년 6개월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이키 미쓸의 크기, 그 거대함, 산속 깊숙히 점점히 박혀있던 미쓸 조립공장들의 모습들, 우거진 계곡들과, 아침마다 눈 아래 펼쳐지던 거대한 운해. 콧속으로 파고들던 안개와도 같던 구름의 맛. 엄청났던 추위, 바람에 휩쓸린 눈 알갱이들이 볼속을 파고들던 고통. 쏟아질듯 가득한 별빛 아래 이마를 파고들던 철모의 무게와 어깨를 파고들던 M-16소총의 무게. 단단한 군화 바닥에 밟히던 이름모를 풀들과, 그 풀들의 냄새. 한없이 쌓이던 눈과, 그 눈속에 강아지처럼 뒹굴었을때의 느낌. 그리고 함께 생활했던 전우들과 나눴던 증오, 분노, 미움, 고마움, 우정, 따뜻함, 날카로움, 욕설들, 칭찬들. 
 지금 이 순간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의 삶은 단순하게 되풀이 되는 것 같지만, 분 단위, 초 단위로 쪼개보면 절대로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쉼없이 변화하는 순간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곽재구 시인은 바로 그러한,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처럼 적어내려갔다.

작품은 전체가 아주 정중한 문체로 쓰여져 있다. 처음에 몇 페이지 읽었을때는, 아니, 왜 이렇게 정중한 문체야?? 좀 불편하다. 라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갈수록, 이런 정중한 태도가 곽재구 작가가 세상과 삶에 갖고 있는 자세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타고르의 시와 인도의 풍경들은 소중함을 증폭시켜주는 장치이다. 곽재구 작가는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을 인도로 이끈 타고르라는 시인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러한 존경하는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그 순간들이 한없이 감사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타인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 독자들. 이런 모든 순간들에 정중한 감사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자. 

사랑이라면 더 좋겠지만, 분노나 증오, 미움이어도 좋다.  지금 이 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감사히 만끽하자. 삶의 영광을.  눈 감는 그 순간까지. 

"삶의 영광이여. 이 모든 게 내가 받은 축복의 선물입니다.

지상에서 내 지친 여행이 끝나면 나는 한 차례 이 세상을 뒤돌아보고

내 생명의 신께 한 차례 손을 흔듭니다

안녕, 우리 또 봐요."

'안녕, 우리 또 봐요'(Farewell) 중에서...

안녕, 우리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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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궤도 세트 - 전2권 신의 궤도
배명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엄청 길어서 죄송합니다 ^^;; 읽기 싫으신 분은 그냥 제 팬픽이나 보고 가셔요.ㅋㅋㅋ

http://blog.naver.com/fireflag/150118811415 

 

 

 

SF란 무엇일까??
Science- Fiction. 우리는 이런 단어로 부르지만, 그 아래 카테고리에 Space Opera 라는 항목이 추가되면서 SF 는 Science- Fantasy라 불러도 무방하게 되었다. 실제로 최근의 흐름은 SF와 Fantasy를 큰 범주 안에서 함께 묶는 경우가 많고 어슐러 K 르귄이나 로저 젤라즈니 같은 2세대 SF작가들은 실제로 SF 소설과 Fantasy 소설을 모두 써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스티븐 킹이나 리처드 매드슨과 같은 소위 '장르소설 전문' 스토리 텔러들도 SF경향을 가진 Fantasy 혹은 Fantasy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SF를 쓰곤 했다. 완벽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의 특성상 SF는 Fantasy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일례로 장르 문학쪽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인 '휴고상' 은 SF와 Fantasy를 크게 나누지 않고 후보군을 선정하곤 한다.  그렇다고 애써 그 둘을 분류하려는 이들을 반대하거나 타박할 생각은 없다. 장르는 단순히 구분,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향 자체가 현실과 상상을 자유로이 오가고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어내며 장르의 파괴를 넘어선 장르간의 융합이라는 색채가 뚜렷하기 때문에, 애초에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아져 버렸다. 이런 와중에 틀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서 SF와 Fantasy를 끼워 맞추는 식의 구분이나 분류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같은 작품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다는 설정은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갑자기 좀비가 된다는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와 어떤 틀과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구분해 낼 것인가? 모든 사람이 장님이 되는 바이러스와 모든 사람이 좀비가 되는 바이러스? 눈이 머는 것과 좀비가 되는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눈 먼 자들의 도시] 는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인간 사회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 중심이고, [나는 전설이다] 또한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본질을 찾아내려 하는 것이다. 눈이 머는것과 좀비가 되는 것은 작가가 자신이 진짜 하고픈 이야기를 하기 위한 무대와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작 스토리 텔러들은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 를 할 뿐이다. 독자들은 그것을 즐기면 될 뿐. 한국 작가들의 SF는 어쩌고, Fantasy는 어쩌고, 블라블라 떠드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작가가 자신의 과학적 상상력을 얼마나 조화롭고 설득력있게 이야기속에 녹여내는지, 그리고 그 속에 진짜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 물론, 이야기가 아닌 곁가지, 작가가 어떤 발상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지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과정 또한 상당히 재미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 은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일종의 텔레포트 포털 같은 것이 존재한다. 거대한 저택에 문들이 있는데, 그 문들은 모두 각각 다른 은하계, 다른 행성의 별장과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이 텔레포트 포털의 문을 유지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작가는 자신의 무한한 상상력을 구체화 시키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를 상상해낸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을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물론 [히페리온] 의 이야기 속에서 이 문이 뭔가 큰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아니, 은하계를 넘나드는 포털도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구체적인 상상의 세계를 찾아내고, 작가가 설정해 놓은 나름의 원리를 깨닫고,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회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엄청난 즐거움이다.

 

 자, 그리고.

과연 이 작가는 왜 이런 세상속에서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현실을 놔두고, 현실이 투영된 가상세계를 그려야 했을까? 과거, 혹은 미래. 과학이 엄청나게 진보하거나, 혹은 알 수 없는 사건으로 문명이 엄청나게 퇴보하거나. 필립 k 딕은 왜 핵전쟁으로 멸망하여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를 그려야 했을까? 어슐러 르 귄은 왜 황량한 행성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공동체를 그려야 했을까? 왜 꼭 우주일까? 왜 꼭 미래일까? 왜 복제인간? 왜 안드로이드? 왜 꼭 외계인?  

 영화 [인셉션] 에서는 꿈 속 세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타인의 꿈 속 세계에 들어가보면, 꿈을 꾸는 사람의 무의식이 구현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무의식은 통제할 수 없다. 수많은 인종, 다양한 연령대, 남녀구분 없이 수많은 '사람' 들이 등장한다. 인셉션이 그려낸 누군가의 꿈 속 세계는 한 명의 작가가 그려내는 소설과 닮아있다. 작가의 내면 속에서 재구성된 수많은 사람들. 작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투영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거대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런 그들이 왜 현실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낯선 세상에 던져져야 했을까?

 작가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했을까?

 

 [신의 궤도] 는 그런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리며 읽으면 훨씬 즐겁게 읽어낼 수 있다.

이 작품은 고전적으로 활용되오던 수많은 클리셰들의 집합인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시도이다. 셰익스피어때부터 되풀이 되어 온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 왕좌를 노리는 치열한 암투, 그리고 신에 대한 갈망과 현실에서의 탈출은 물론, 조선시대 김만중의 '구운몽' 과 워쇼스키의 영화 '매트릭스' 까지 망라한다. 물론 '라 파이예트' 와 '스타워즈' 를 능가하는 화려한 공중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을 연상케하는 전쟁과정 또한 매우 디테일하고 심도깊다. 책의 반 정도는 공중전을 그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수많은 전투기들의 기동이 솔직히 머릿속에 그렇게 잘 그려지지는 않는다. 워낙 많은 수의 전투기들과 편대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마치 저자의 단편인 [변신합체 리바이어던] 이 떠오른다. (여담이지만 확실히 배명훈 작가는 '어마어마한 숫자' 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저자인 배명훈 작가도 '자신이 재미있을 만한 모든 소재를 넣었다' 고 했는데, 과언이 아니다. 그래, 현존하는 좋은 플롯들의 총 합인 동시에 완벽한 해체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대단히 통속적이면서도 황당할 정도로 신선하고, 엄청나게 쉽게 읽히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작품의 프롤로그라고 할만한 첫 챕터부터 통속적이고 신선하다.

인공위성 사업을 하는 거대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주의 서자인 김은경. 적자인 경라에게 살해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지는 비행. 바로 하늘이었다. 비행기 조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은경. 하지만, 경라의 음모로 그녀는 동면되어버리고, 이야기는 순식간에 십오만년 뒤로 점프한다.

 동면된 은경이 십오만년뒤에 눈을 뜨면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휴양행성 '나니예' 에서 일어난 몇 달 간의 일. 그것은 거대한 전쟁이었다. 수천대의 전투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행성의 운명을 바꿔놓은 거대한 두 세력의 충돌.

 그리고 그 안에서 전쟁의 키가 된 두 명의 주인공. 김은경과 나물수사.

결국 이 이야기는 신을 좇는 이야기인 동시에, 인물들이 치열한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와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 여기서부터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작가가 '나니예' 라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여주인공 은경을 무려 15만년의 시간을 점프시키고, 수많은 SF적 상상력을 쏟아부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전쟁' 이 필요했던 것이다. 행성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 이 거대한 전쟁속에서 타의에 의해 윤회를 거듭하는 '은경' 과 신의 목소리를 듣는 운명을 타고난 '나물' 수사. 이 두 인물들의 관계는 참으로 안타깝고 눈물겹다. 

 

 일단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제목에 등장하는 '신' 에 주안점을 두고 읽었다.

(이 작품을 다른 관점, 은경과 나물수사를 둘러싼 관리사무소와 천문교측의 '전쟁' 에 주안점을 둔다면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인물들간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읽어도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엄청나게 풍부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신' 을 중심으로. 즉 '신앙'을 중심으로 읽어보면 은경은 마치 크리스트교의 예수와 닮아있다. 창조주의 아들 예수처럼 나니예의 창조주의 딸인 은경은 부활을 반복하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뚜렷한 삶의 지향점을 가지고 존재한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에 등장하는 '네오' 와 닮은 것은 그렇기에 필연이다. 'ONE' 이라는 단어의 재조합인 NEO 또한 예수를 모티프로 태어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물수사가 믿고 있는 '신' 이 사실은 '신' 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은경도 나물수사도 각자의 눈은 또렷하게 '신' 을 향해있다. 아니, 그들의 영혼이 온전히 '신' 이라는 어떤 존재를 향해있다. 은경은 하늘에서 공전하는 천체를 '태초의 무기' 라고 인식하고 있는 행성관리사무소의 대표인 셈이고, 나물수사는 하늘을 공전하며 인간들을 보살피는 조물주라고 인식하고 있는 천문교의 대표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현실속, 무신론자와 개신교, 가톨릭, 성공회, 유태교, 이슬람교 등 유일신을 믿는 모든 기독교인의 투영이다. 신을 과학적 소산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체계와 질서를 파악하고 따르는 편과 신이 인격적 존재로서 정신적, 물질적 교감을 추구하는 편인 것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천문교 안에서도 신에 대한 접근법이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나니예에서는 실제로 신의 존재가 눈으로 확인되던 시절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실제 현실에서의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과학적, 학문적으로 해석하고 구약에 나오던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고자 하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고, 신학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다.  

 

 '신앙' 이란 존재의의이다.

지금 우리 세상에는 인격을 가지고 있는 유일신이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그 신을 믿는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그 신을 믿는 이유는 아주아주 간단하다.

 그는 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지?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존재하지?" 라는 인류 태고의 질문에 가장 또렷한 답이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나를 위해 존재하는거지." 라는 답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인간의 존재의의에는 '신' 이 필연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문명이 시작된 이래 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는 연구 결과가 보여주듯, 인간에게 '생각' 이 있는 한, 모든 행동과 동기, 근원적 갈증의 가장 쉽고 모범적인 답안인 '신' 을 포기할 수 없을터다.

 

 타인에게 '네가 믿는 신은 신아니 아니야.' 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은 물론 존재의의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때로는 자신의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하려 하고, 다른 신을 믿는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타종교와의 갈등도 비롯한다. 내가 정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만이 정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둘일 수는 없다. 반드시 세상에 나를 있게한 나의 신. 그 존재 단 하나여야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정답. 그것이 바로 '신'이다. 그런 절대적인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섣불리 자신의 신의 존재증명을 꺼리게 된다. 만약 그 증명에서 실패한다면 스스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김어준 식으로 말하면 그레이트 빅 엿을 스스로 쳐먹는 꼴이 되기에, 현실 종교에서 과학적,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신비' 로 넘겨버린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천문교는 두 종파로 나뉘어 있다.

태초에 나니예의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신 관찰기록에 의존해 신이 나니예를 공전하는 궤도를 계산하는 이론신학회와 그 공식을 대입해 천체 망원경으로 신을 눈으로 확인코저 하는 관측신학회가 그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공식들을 대입해 보고 관측해봐도 신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이론 신학회는 관념론을 대두시킨다. 신은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닌 관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천문교내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관측신학회는 유물론적 신앙관을 유지하고자 하고, 이론 신학회는 관념론적 신앙관을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그런 와중에 신의 존재를 귀울림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예언자들. 그 중 마지막 예언자인 나물수사는 이론신학회에 있어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우주 왕복선을 이용해 신에게 날아가려는 김은경의 존재 역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신앙관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인류의 '항성화' 이다. 인류는 십오만년이라는 엄청난 시간동안 육체를 버리고 별이 된다! 그것도 태양과 같은 항성으로 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태양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자, 과연 항성에게는 종교가 있을까? 항성의 존재의의는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자신의 주위를 공전하는 천체들? 아니, 그 천체들의 입장에선 항성이 신일 것이다. 신에게도 신이 있을까? 신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일전에 배명훈 작가는 [안녕, 인공존재] 라는 작품을 통해서 존재 자체에 대한 고찰과 '존재 폭발' 이라는 신선한 개념을 선보인 바 있다.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단편들 속에서 장편의 모티프를 얻어내는데, [신의 궤도] 의 모티프는 단연 [안녕, 인공존재] 일 것이다. 무의미하게 우주를 도는 천체. 하지만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를 되뇌이는 천체.

 존재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에서 시작된 배명훈 작가의 존재에 대한 거대담론은 [신의 궤도] 를 통해 조금은 발전한 듯 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 하고 있다. 심지어 프로그램과 메뉴얼들도 '존재' 한다.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서 생각하지 않는 개체는 비행기들 뿐이다. 하지만, 최후의 존재폭발로 인해 비행기들 또한 '존재' 하게 되었을 듯 하다.

 

 존재의 의의. 삶의 의미. 운명과 목표. 그것이 신이어도 좋고, 신이 아니어도 좋다. 나물수사는 신이라고 불렀던 그것. 은경은 신이 아니라고 불렀던 그것. 은경과 나물수사는 서로 다른 시각으로 '신' 이라는 그 천체를 바라보지만, 그들 사이에 갈등은 없다. 둘 모두에게 그것은 삶의 목표이자, 자신의 존재의의였으며, 끊임없이 추구하는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은경은 하늘에 떠있는 인공천체를 신이라고 숭배하는 나물수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나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나물수사는 그런 신비로운 증명이 있음에도, 자신이 숭배하는 신을 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은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둘 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신을 품에 안은 순간.

 은경은 신을 숭배하며 살았던 나물수사의 삶의 궤적을 이해하고, 나물수사 또한 궤도 비행사로 살아온 은경의 삶의 궤적을 이해한다.

신의 궤적은 은경과 나물수사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었던 것이다.

 

 

 글이 참 두서없이 길기만 하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수만가지 상념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이게 대체 무엇일까. 이건 또 뭔가. 이게 무슨소리야. 그런 느낌이다, 솔직히. 이 비슷한 감정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 와 [솔라리스] 를 읽었을때와 비슷하다. 우주적으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어처구니 없는 경지. 이것은 뭐랄까. 생각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심심할때 꺼내보는것과 비슷하달까?

 

엄청 통속적이고, 그만큼 낭만적이기도 한, 게다가 관념적이고, 공상과학적이면서 재기발랄하고, 뭔가 틀을 깨는 이야기속에 들어있는 [존재] 에 대한 우주적인 고찰. 치열한 전쟁 속에서 그것들을 찾아나가는 은경과 나물의 행보가 애틋하기만 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생생했고, 이해되었으며, 사랑스러웠다. 특히, 수십년을 관통해서 지난, 나물과 엮여가는 은경의 윤회의 이야기에는 가슴이 짠했다. 정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서, 2권이라는 분량이 짧게 느껴졌고, 너무 금방 끝나버렸다는게 아쉬웠다. 은경과 나물의 이야기가 더 많이 보고싶었다. 나니예에서의 생활들이 더 보고싶었다.

 조지 R.R 마틴 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 처럼 엄청나게 하드하게 그려주었어도 좋았을 듯 싶다.

뭐 물론, 우리나라의 장르문학 시장에선 그랬다간 출판사도 망하게 하고, 작가 본인도 굶어죽기에 딱 좋겠지만 말이다. ^^

 

저자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는 또 얼마나 우주적인 이야기를,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깃속에 담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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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9-2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톤』때문에 들어왔다가, 글이 너무 길어서ㅡ.,ㅡ
펜픽이나 보고 갑니다. ^^ 재밌어서 서재 즐찾했어요.
여기서두 펜픽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안되나요?

열혈명호 2011-09-22 20: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너무 길죠?? ㅋㅋ 제 리뷰는 솔직히 왠만해선 남들 보라고 쓰는 리뷰가 아니라 재미도 없고 길기도 길죠 ^^;;
팬픽, 여기에도 올려보려고 했는데, 요기는 아무래도 텍스트에 특화된 사이트라 그림 올리기가 만만찮네요~ 그림 사이즈를 많이 줄여야 해서요~ 네이버 블로그 자주 놀러와주세요^^

미르하이 2011-09-3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사금일기 - 모래알 속에서 찾아낸 금과 같은 일기
호연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웹툰] 이라는 장르는 어느날 갑자기 뿅 하고 솟아 올라왔다.

일본 문화 전면 개방과 맞물려 질적으로 양적으로 내리 꽂히던 일본 만화의 홍수 속에 한국 출판 만화계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만화는 한두시간만에 뚝딱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화가는 두명에서 수명의 어시스턴트를 두고 끼니도 제대로 못 떼우며 밤샘을 밥먹듯이 해야 일주일에 16~18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간신히 맞춰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한명의 한국 만화가를 발굴해서 키우는 비용보다 일본에서 흥행성이 검증된 새롭고 재미있는 만화들의 판권을 수입해서 찍어내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 게다가 간신히 발굴하고 지면을 할애해서 기껏 키워놓은 작가의 작품들이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만화 시장은 만화방이라 불리던 대본소 체제가 무너진 이후 반짝 했지만, 대여점이 등장하면서 다시 옛 시절로 돌아갔다. 만화는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닌 것. 그냥 빌려보거나 공짜로 보는 것이라는 인식은 대본소때로 돌아갔다.

 만화는 딱 대여점 수만큼 팔리는 시장이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단행본 한 권을 내는데 짧게는 6~8개월, 길게는 1년~1년반이 걸리는 한국 만화가보다 이미 수십권의 시리즈가 팔린 일본 만화의 판권을 사서 한달 단위로 시리즈 전체를 빨리 찍어서 빨리 팔아버리는 것이 자금 회수에 용이하고, 누적 판매로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당연한 규칙이다. 요즘도 꾸준히 출판 만화계에선 신인 만화가들이 가물에 콩나듯 등단하고 있지만, 그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여전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솟아나온 웹툰은 초기엔 출판 만화계에 등단하지 못한 만화가 지망생들과 아마추어, 혹은 취미로 만화를 그리던 네티즌들에 의해 탄생했다. 물론 웹툰이라는 장르는 말 그대로 '신생' 장르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한국 만화계의 범주 안에는 들어가겠지만, 출판 만화의 연장선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웹툰은 만화적인 문법은 사용되지만, 웹툰 그대로 새로운 컨텐츠인 것이다.

 

 초기 웹툰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단점은 수익 창출 구조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림의 완성도는 둘째 치더라도, 개성적인 연출과 매력적인 구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뛰어난 스토리의 작품들이 꽤 많았으나 여전히 독자들은 '만화는 공짜로 보는 것' 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웹툰을 사업적으로 받아들이던 대형 포털들 또한 네티즌들을 자사 포털에 묶어두기 위해 양질의 컨텐츠들을 무료로 공급해야만 했다. 웹툰 작가들은 출판 만화가보다 경제적으로 더욱 열악한 환경속에서 작품 활동을 해야 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화해갔다. 비로소 '이야기' 의 시대가 도래했고, 스토리의 중요성은 그 어느때보다 높아졌다. 웹툰들은 드라마나 영화의 원소스 역할을 하기도 했고, 출판사들과 직접 계약을 맺고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수익창출의 구조가 어느정도 해갈된 이상, 웹툰은 인터넷 인프라가 굳건한 이상 하나의 장르로서 쭉쭉 뻗어나갈 것이 자명하다.  

 

 호연 작가의 [사금일기] 는 웹툰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작품이다.  

아니, 인터넷이 없었으면 영원히 공책 안에 잠자고 있었을터다. [도자기] 라는 작품으로 사물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력과 그것을 이야기로 녹여내는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던 호연 작가는 꾸준히자신의 사이버 공간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3컷으로 그려넣고 있었다. 마치 일기를 쓰듯 꾸준히 그려넣던 이 이야기들은 작가가 밝혔듯 '그리고 싶을때 슥슥 그리던' 진짜 일기였던 셈이다. 일기를 돌려보는 사람은 없다. 만약 인터넷이 없었다면 이 일기는 빛바랜 공책으로 책장과 함께 먼지속에서 서서히 잊혀갔을터다. 하지만, 인터넷과 블로그가 있었기에 그녀의 일기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졌고, 결국 이렇게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위에 언급했지만, 호연 작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깊이있는 통찰력과 그것을 글이아닌 만화로 풀어내는 능력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한, 평범한 이야기들이 그녀의 붓끝을 통해 특별하고 중요한 것으로 재탄생한다.

무엇보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전작인 [도자기] 에서도 충분히 보여졌던 한국의 고고미술사학과 학생 시절 이야기부터 최근의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그녀의 페르소나인 '사금군' 을 통해서 전해오는 '삶' 의 이야기. 특히 호연작가가 몸이 아팠던 시기를 겪고 난 뒤 세상을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지게 된 부분도 느낄 수 있어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다.  

 

 



 

 



 

2008년까지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조금은 어둡고 지나치게 감상적인 이야기들도 많았다.
깨달음이나 통찰에 대한 부분은 여전했지만, 재기넘치고 발랄한 20대의 이야기라기엔 감상적이고 조금은 우울한 단상이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통찰력은 더 깊이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예민하고 날카롭게 상황들을 파악하고, 타인의 감정을 읽는다. 그것은 자신이 타인보다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상처를 더 많이, 더 자주 받고, 더 깊은 고통을 느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자연스레 그의 이야기들엔 보다 어둡고 농밀한 아픔이 있었다.

 

 



 

 

허나,  본인도 밝히듯, 2009년 이후의 이야기들은 보다 밝고 경쾌하며 따뜻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게 된다.


책을 넘기다 보면 등장하지만, 호연작가는 아팠던 시기가 있었다.

언제나 고통은 사람을 성숙케 한다.
육체적으로 건강했던 시기에 완성된 그의 작품 [도자기] 와 이 책의 초~중반부가 겹쳐지고, 육체적인 병마를 떨쳐낸 최근 네이버 연재작인 [단군 할배요!] 와 이 책의 중~ 후반부가 겹쳐진다.
[도자기] 는 일상툰에 가까운 옴니버스 작품이고, [단군할배요!] 는 보다 연결성이 강한 연속극의 작품이지만 충분히 비교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언제나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이긴 하지만, 확실히 최근의 그의 작품은 보다 더 따스하고 경쾌함을 느낄 수 있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달라진 시각이 작품에 그대로 녹아든다.

 그렇게 사금일기들을 천천히 넘기다 보면, 조금은 특이하다는 말을 들었던, 감수성이 풍부한 고고미술사학과 학생이 독자들에게 따뜻함을 전달해주는 작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보인다.

 

언듯, 삶이란 엄청 거창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생의 대부분을 잠자거나, 음식을 먹고, 그것을 소화시킨 뒤 배설하고, 멍때리거나, 낙서를 하거나 하며 보낸다. 이렇듯 엄청 작고, 소소하고, 가벼운 일상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이 된다.

꼭 거창한 것만이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래처럼 자잘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루를 이루고, 그런 하루들이 모여 삶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잘 살펴보면 그 모래들 속에 반짝이는 금들이 있다.
아니, 어쩌면, 그 모래들 전부가 반짝거리는 금들일지도 모른다.
한 번 들여다 보자.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일상들을, 나의 삶들을.
그 모두가 사금이리라.

 

 


 

 

요건 나의 첫 3컷 만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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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9-2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롸잇나우!
^^ 열혈명호님의 사금일기, 기대됩니다!!
나오면 꼭 사서 볼께요. 꼭이요^^

열혈명호 2011-09-22 20:13   좋아요 0 | URL
ㅋㅋ 넵 감사합니다. 그리 쉽게 책으로 나올 수 있을것 같지는 않지만, 정말 감사해요. ㅎㅎ 요 짦은 만화들도 여기에 올리긴 힘들어서 네이버 블로그에는 며칠 올린게 있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