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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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라는 종족은 스스로를 자각하면서부터 끊임없이 '탈脫동물' 을 표방했다. 인간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과, 인간사회가 켜켜히 쌓아놓은 장구한 역사 기록들은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가 여타 수많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종족임을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 친 흔적이다. 우리 인간종족은 동물과의 차별성을 끊임없이 스스로 되뇌이고 되뇌인다. 그것은 단순히 개와 고양이를 비교하는 정도의, 예를 들어 외모, 습성, 내장기관, 뇌의 용적, 사회구성 방법등의 표면적인 비교를 떠나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와, 인간이 아는 모든 종족들을 아우르는 차이점을 비교하는 초거대 프로젝트이다. 이 거대한 지구와, 지구의 수십억년에 이르는 엄청난 역사 안에서 '인간은 우월, 나머지는 모두 쩌리' 라는 전제 하에 시도되온 것으로, 그것은 인간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인간의 '우월성' 은 인간의 '존엄성' 으로 묘사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태어난다. 모두 '하늘' 혹은 '신' 이 특별히 '인간' 종족에게만 내려준 불가침의 영역으로서, 이 점이 인간이라는 종족을 지구의 주인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기본적인 이념과 개념들은 모두 이 '존엄성' 에 기인한다. 

 허나, 이 존엄성이란 육체의 고통 앞에서는 모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존엄성으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인간적인' 개념들은 자기 몸뚱이의 어딘가를 휘둘러대는 타인 앞에서, 광대뼈를 으스러뜨리는 오동나무 앞에서, 내장을 후비는 쇠鐵의 앞에서 속절없이 무시된다. 심지어 고통 앞에서 인간은 직립보행을 버리고, 네발로 기기도 한다. 존엄성이 무시되는 인간은 더이상 인간일 수 없다. 존엄성인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차별성이 사라진 인간은, 인간 종족 전체가 쌓아올린 '동물과의 차별성' 전체를 일거에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 '폭력' 이란 그렇듯 단순하게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파괴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치명적인 무기이다. 때문에, 인간을 동물처럼 부릴때는 폭력을 사용하는 편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존엄성을 무시해버리면 된다. 자존감, 자립심을 포함한 '존엄성' 에 기반한 모든 것을 일거에 무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인 폭력. 즉, 타인에게 폭력을 행한다는 것은 [그 타인을 동물처럼 부리고 싶다] 는 의중이 깔려있는 것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인간들과, 인간을 동물처럼 부리고 싶어하던 인간들이 가장 뚜렷하게 양분되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는 단순했다. 그들은 몽둥이와 총을 들고 아무에게나 휘둘러댔으니까. 한번에 보였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교묘해졌다.  

그들은 돈과 언론을 이용해 자신들이 휘둘러대는 몽둥이와 총, 칼을 숨긴다.  

쌍용사태의 가해자들은 돈을 주고 용역을 고용해 노조원들을 폭행하고, 돈을 이용해 정치인들을 매수하고, 정치인들은 권력을 통해 법조인들을 조종해 가해자를 피해자로 바꾸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바꾸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와 결탁한 수많은 언론들은 끊임없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케 하는 기사들을 써보내고, 진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무시하는데 여념이 없다. 

 주가를 조작해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피땀흘려 모은 돈을 착복하고, 자살하게 만든다. 자살은 스스로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 세상에서, 이 사회에서 도저히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을때. 존엄성을 잃고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 뿐일때 택하는 마지막 선택지이다. 
 부산에서는 아직도 한 여인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그 여인과, 그 여인을 지지하는 사람들 위에 쏟아지는 수많은 유형, 무형의 폭력들.  

 한창훈 작가는 책의 끄트머리에 한 꼭지를 빌려 '미움의 힘' 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에게는 부정의 힘과 긍정의 힘이 공존하고 있다. 한 때 우리 사회에는 긍정의 힘에 대한 열풍이 몰아친 적이 있다. 사회가 그런대로 평안할 때는 긍정의 힘이 각광받는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하의 우리 사회에서 유행한 책들은 긍정의 힘이나 화내지 않는 법에 대한 책들이었다. 그것은 그 사회가 나름대로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부정의 힘이 맞다고 본다. 쉽게 용서하지 말 것, 눈에 보이는대로 믿지 말 것, 귀에 들리는 것만 듣지 말 것. 그 안에. 그 이면에. 수많은 음모들을 기억할 것. 

미워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쉽게 용서하지 말 것.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를 좋아하는 것 만큼, 미워하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좋아하는 대상은 눈에 딱 들어오지만, 미워하는 것은 그 대상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 작품은 우리가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다. 어린 소년을 구타한 다른 소년들? 경찰서와 군청에 난입한 시위대들?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짓밟은 군인과 경찰들? 군인들과 경찰들에게 명령을 내린 통치자? 도시의 실상을 알리려고 했던 기자들의 입을 폭력으로 막은 윗선들? 죽어가는 친구들을 버리고 도망간 이웃들? 

어쨌든, '폭력' 그 자체는 우리가 반드시 미워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이 만연하게 한 본질적인 사회의 구조. 어쩌면 우리는 대한민국 자체를 미워해야 할지도 모른다.우리는 너무나 쉽게 용서하고, 너무 쉽게 잊는다. 너무 쉽게 용서하고, 너무 쉽게 잊는 것도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사랑해야 할 것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우리가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는 이유는 미워해야 할 것을 정확히 찾이 위함이고, 미워해야할 것을 찾는 이유는 사랑해야할 것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행위들은 단연, 현재와 미래를 살아내기 위함이다. 

미워하는 데에 함몰되면 과거에 파묻힌다. 누군가를 , 혹은 무언가를 미워하려면 이미 나에게 어떤 행위를 저지른 뒤여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오지도 않은 것을 미리부터 미워할 수는 없다.  결국 미움의 힘이란 과거에서 온다. 그렇기에, 미움에 힘에 함몰되면, 과거에 함몰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와 미래에, 사랑해야 할 것들을 놓쳐서는 안된다. 예를들어, 우리가 만들어낼 후손들. 자식들. 그들이 만들어갈 세상들.  미워하는 힘은 결국 사랑하기 위함일 터.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확실히 미워하고, 확실히 응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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