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1초들 - 곽재구 산문집
곽재구 지음 / 톨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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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참 이상하다. 언제나 안정을 추구하지만, 안정 속에서는 금새 권태를 느낀다. 이런 아이러니한 감정들 덕에 한 사람의 일생은 각자 모두가 다이내믹하고, 파란만장하게 된다. 밖에서 보기에는 아주 평탄하고 심심해 보일 정도로 변화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끊임없는 싸움에 만신창이가 되어있을 확률이 높다. 그 싸움의 주체들은 당연히 '안정' 과 '변혁' 이다. 
 

 시인이란 어쩌면, 그 치열한 내면의 싸움을 '초' 단위로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끊임없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도 치열하게 안정과 변혁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 필연적으로 내면의 촉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터다. 안정을 포기하고 변혁을 선택할 과감성. 다음의 변혁을 위해 현재의 안정을 택하는 현실성. 이 두 가지를 본능적으로 잡아내는 능력. 게다가 그 순간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안정을 택했을 때는 변혁의 시점을 기다리며 안정을 만끽하고, 변혁을 택했을 때는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변혁 자체를 만끽하는 사람. 안정의 순간에도 오감의 촉이 꼿꼿히 세워져 있고, 변혁의 순간에는 오히려 오감의 촉이 부드럽게 누워 있는 그런 사람.
 

 [우리가 사랑한 1초들] 의 문장속에서는 변혁의 순간 속에서 만끽하는 여유가 한없이 느껴졌다. 문장문장마다 '만끽'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간이란 강제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재화이다. 유량이 정해져 있는 탱크에 붙어있는 절대로 잠글 수 없는 수도꼭지와 같다. 내가 아무리 재빠르고, 물을 받을 수 있는 양동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사용처와 사용법은 제한적이다. 다른 탱크에 옮겨 담을 수도 없다.  

유량이 정해져 있는 탱크와, 그 앞에 작은 양동이를 들고 있는 나. 그리고, 대부분의 물은 바닥에 흘리고 만다.

양동이 한 가득 물을 담아도 수도꼭지에서 물을 여전히 콸콸 흘러나온다. 아직 양동이 수십개, 혹은 수백개를 채우고도 남을 물이 탱크안에 남아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양동이는 딱 하나뿐이고, 그건 이미 꽉 차서 넘치고 있다.  결국 인생이란, 양동이 한개를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얼마전 타계한 스티브 잡스는 '단순' 과 '집중' 을 강조했다. 잡스의 방식에 따르면 이렇다. 양동이가 다 차기 전에 재빨리 물을 써버린다.짧은 시간동안 빨리 써야하기 때문에, 한 두 가지 일을 단순하게 선택해서, 집중해서 쏟아붓는 것이다. 물이 차는 동안 밭을 일구고, 물이 차면 빨리 그 밭에 부어버리고. 다시 물을 채우는 동안 밭을 일구고. 다시 그 밭에 빨리 붓고. 그렇게.  단순하게 선택하여 강렬하게 집중하는 것이다. 밭에서 곡물이 자라면, 그 사이에 빨리 다른 밭을 또 일군다.
 

 반면, 이 책은 완벽히 다른 접근이다. 물이 넘치건, 흐르건, 쏟건, 버리건, 쓰건.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다. 양동이. 그리고 ,물.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물이 양동이에 받아지며 내는 찰랑거림, 빛이 반사되는 반짝거림. 졸졸졸 하는 물소리. 넘쳐 흐르며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들. 흐르는 물들이 발가락 사이를 흘러가는 간지러움.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굳이 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물과 양동이. 그 자체로 충분히 즐기는 것이다. 밭을 열심히 일굴 필요도, 빨리 다른 밭을 일굴 필요도 없다. 
 

 현대인들은 양동이에 차는 물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다. 양동이에 물이 반쯤 차면, 뭐에 쫓기듯 미친듯이 곡괭이질을 한다. 내가 왜 밭을 일구는지도 잊어버린다. 밭에서 나는 곡물들을 맛보지도 못한다. 곡물을 수확하지도 못한다. 수확하는 사이에 양동이는 가득 차 넘쳐 흐를것이  뻔하고, 추수가 끝난 밭에는 물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가득 차있는 물들은 버리거나, 넘치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간에 쫓기며 산다.
 

 사람의 삶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1분 1초를 아쉬워 해 봤자, 밥먹고, 응가하고, 쉬하고, 잠자고, 잡담하고, 멍때리는 시간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한다. 깃털처럼 가볍고, 먼지처럼 하찮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 일생이라는 커다랗고 중요한 탑을 쌓아낸다.

 너무나 하찮고 가벼운 1초. 그 1초들이 모여 1분을 만들고, 1시간을 만들고, 100년을 만든다.  

주변을 돌아보고,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생각하고, 나의 자리를 생각하고. 내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받은 것들을 돌려줄 방법을 생각하며 보내는 1초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군가에게 강탈이라도 해서 소유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1시간보다 가치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첫 휴가나왔을때를 기억한다.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엄청나게 짧다. 매 시간별로 계획을 세워, 시간에 헐레벌떡 쫓긴다. 여자친구를 만나고, 쉬지않고 손을 만지작대고, 1초라도 붙어있으려고 하고, 영화를 한편이라도 더 보려고, 심야 영화를 보고, 잠을 안자고, 피자를 미친듯이 쑤셔넣고, 술을 쉴새없이 들이붓는다. 하지만, 말년휴가 쯤은 완전히 다르다. 일주일정도 받은 말년휴가는 잠자고, 빈둥대고, 컴퓨터 게임하고, 채팅하고, 여자친구 만나기도 귀찮아진다.  하지만, 난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첫 휴가 나오던 고속버스안의 기름냄새, 덜컹거리는 흔들거림 속에서 두근대는 심장, 수양록 뒤편에 빼곡히 적어내던 '휴가나가서 꼭 해야할 것들' 목록, 휴가나오기 전날 밤, 밤샘 근무를 하며 떠올렸던 계획들, 군복을 입고 처음으로 들어가보는 집. 현관에서 군화끈을 풀어내던 순간, 4개월만에 맡아보던 내 방, 내 이불, 내 옷에서 나던 먼지냄새와 새제냄새 속의 내 냄새. 엄마냄새. 아빠냄새.  


군대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년 6개월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이키 미쓸의 크기, 그 거대함, 산속 깊숙히 점점히 박혀있던 미쓸 조립공장들의 모습들, 우거진 계곡들과, 아침마다 눈 아래 펼쳐지던 거대한 운해. 콧속으로 파고들던 안개와도 같던 구름의 맛. 엄청났던 추위, 바람에 휩쓸린 눈 알갱이들이 볼속을 파고들던 고통. 쏟아질듯 가득한 별빛 아래 이마를 파고들던 철모의 무게와 어깨를 파고들던 M-16소총의 무게. 단단한 군화 바닥에 밟히던 이름모를 풀들과, 그 풀들의 냄새. 한없이 쌓이던 눈과, 그 눈속에 강아지처럼 뒹굴었을때의 느낌. 그리고 함께 생활했던 전우들과 나눴던 증오, 분노, 미움, 고마움, 우정, 따뜻함, 날카로움, 욕설들, 칭찬들. 
 지금 이 순간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의 삶은 단순하게 되풀이 되는 것 같지만, 분 단위, 초 단위로 쪼개보면 절대로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쉼없이 변화하는 순간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곽재구 시인은 바로 그러한,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처럼 적어내려갔다.

작품은 전체가 아주 정중한 문체로 쓰여져 있다. 처음에 몇 페이지 읽었을때는, 아니, 왜 이렇게 정중한 문체야?? 좀 불편하다. 라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갈수록, 이런 정중한 태도가 곽재구 작가가 세상과 삶에 갖고 있는 자세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타고르의 시와 인도의 풍경들은 소중함을 증폭시켜주는 장치이다. 곽재구 작가는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을 인도로 이끈 타고르라는 시인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러한 존경하는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그 순간들이 한없이 감사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타인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 독자들. 이런 모든 순간들에 정중한 감사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자. 

사랑이라면 더 좋겠지만, 분노나 증오, 미움이어도 좋다.  지금 이 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감사히 만끽하자. 삶의 영광을.  눈 감는 그 순간까지. 

"삶의 영광이여. 이 모든 게 내가 받은 축복의 선물입니다.

지상에서 내 지친 여행이 끝나면 나는 한 차례 이 세상을 뒤돌아보고

내 생명의 신께 한 차례 손을 흔듭니다

안녕, 우리 또 봐요."

'안녕, 우리 또 봐요'(Farewell) 중에서...

안녕, 우리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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