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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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그 순간들은 대부분 명확한 두갈래의 길로 갈려져 있다. 때론 세갈랫길, 혹은 네갈랫길로 보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선택의 여지가 둘 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 두 길의 대부분은 '안정' 과 '도전' 인 경우가 많다. 때론 안정 자체가 도전이고, 도전 자체가 안정인 경우도 있지만, 다시 말하면 '현실' 과 '이상' 이란 뜻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보수적이 되기 마련이다. 육체는 약해져서 쉬이 피로를 느끼게 되고, 그동안 쌓아서 깔아둔 바닥에서 쉬이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현실에 안주하고, 조금 나쁘게 말하면 현실과 타협한다.

 

하지만, 삶은 때로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곤 한다.

'남들이 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 는 선택 말고, '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반드시 해야한다' 는 선택을 말한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굴지의 로펌에서 엄청난 연봉을 받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미국의 중상위층 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

그는 처음부터 현실을 선택해오던 사람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배경들을 업고, 역시 자신도 그 배경 안으로 걸어 들어간 전형적인 미국 부유층의 외아들. 그런 그에게도 사진사라는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다. '안정' 과 도전'. '현실' 과 '이상'. 그런 상황에서 '도전' 을 택하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도전' 을 택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의 달콤한 '안정' 을 산산히 깨부수고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벤은 도전이 주는 불안정함, 그리고 불안정함이 주는 고통과 괴로움에 맞설 용기가 아주 조금 부족했다.

그렇게,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오던 벤에게 엄청난,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된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외길뿐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이 작품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누구나 꿈꿀만한 부와 가정을 이뤄낸 한 남자의 이야기. 하지만, 세상에 언제나 '만족할만한' 삶이라는 것은 없다. 세상엔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항상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벤 브래드포드는 현실을 위해 이상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의 아내 베스 또한 그랬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남편과 현실을 포기하게 된다.

벤 브래드포드와 그의 아내 베스의 불화가 처음부터 아주 대놓고 등장한다.

미드 '위기의 주부들' 이나 'O.C' 등을 떠올리게 하는 부유한 거리에서 부족함 없이 지내는 벤의 가족. 하지만, 그 전반에 깔려있는 불협화음와 위화감. 그것들이 아주 리얼한 필체로 그려져 나간다. 꿈을 포기한 댓가로 얻은 현실. 아내의 꿈을 포기하게 만든 댓가로 얻은 현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기반으로 다시 꿈을 향한 삶을 살고 싶지만, 그게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현실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약들을 물처럼 마시며 사는 현대인의 단면.

 

2부와 3부는 벤이 예기치 않은 큰 사건을 겪으면서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내용이다.

이제야말로 벤의 인생은 외길이 되어버렸다.

1부에 등장하는 벤의 삶과 2,3부에 등장하는 벤의 삶의 큰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선택, 그리고 결과. 많은 일들이 좀 어이없을 정도로 벤의 의도대로 풀려나가는 것 같다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긴장감을 많이 떨어뜨렸지만,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이나 꼼꼼한 심리묘사가 돋보였다. 사실, 사건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작품 자체의 이야기는 밋밋하기 짝이 없다. 긴장이나 갈등을 조성할 수 있는 요소가 중간중간 굉장히 많이 등장하지만, 그 장치들을 거의 활용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작가는 환경적인 갈등이나 긴장감을 불어넣기보다 주인공 내면의 긴장과 갈등에 집중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감이 떨어지고, 클라이맥스는 지지부진하다.

차라리 초반에 보여졌던 가정, 현실, 사회와의 치열한 갈등들이 훨씬 좋았다고 느껴진다.

1부는 드라마, 2부는 스릴러, 3부는 로드무비 - 그런 느낌이다.

분위기도, 느낌도, 이야기의 구조도 모두 별개의 것이 되어 꽤 신선한 느낌을 주지만,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완성도를 많이 떨어뜨리게 되지 않았나 싶다. 후반부는 너무 주인공의 의도대로, 그리고 너무나 뚜렷한 인과관계대로 밋밋하게 흘러간 점이 너무너무 아쉽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내러티브를 이끌어낼 요소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작가가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것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많은 이야기적 재미의 요소들을 포기한 것 같아 대단히 아쉽다. 

 

한 사람이,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예로부터 많은 철인들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들을 사색해 왔다. 아주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말도 있고, '네 자신을 알라' 라는 말도 있다. 수많은 장르 소설가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이용해 인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봇, 안드로이드, 사이보그 등등. 신이 아닌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들. 그는 스스로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인간사회는 몇가지 단순한 표식들을 이용해 타인을 증명한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운전면허증, 자격증, 여권, 주민등록등본, 인감, 사인, 필체, 지문, 치과기록,동공 등등. 피나 유전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래, 그렇게 사람은 스스로를 뭔가 표식을 통해 증명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인생' 이 나의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

당신.

우리는 정말 우리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부모님의 인생, 선생님의 인생, 아내와 자녀의 인생, 사회의 부품으로서의 인생. 마지못해 살아지는 인생.

그것들이 온전히 나의것. 당신의 것.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어떤 절대적인 자가, 당신에게 '너의 인생이 너의 것임을 증명해 보아라.' 라고 한다면 과연 증명해낼 수 있을까?

거기서, 내가 졸업한 학교의 졸업장들이나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나 속해있는 팀의 구성원이라는 자격증을 내민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돈을 모아온 통장을 내밀어서 거기 찍혀있는 숫자들을 내보이면, 역시 증명할 수 있을까???

 

삶을 살면서, 인생을 바쳐 하고픈 일을 찾기도 쉽지 않지만, 설령 찾았다고 한들 그 일에 인생을 바치기도 쉽지 않다.

우리의 눈에 삶은 언제나 외길인 듯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택의 기회들 속에서 우리는 매번 한 길만을 보게 된다. 그게 도전이든, 혹은 안정이든.

나는 잘 모르겠다.

아마,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모를것이다.

난 제대로 선택했을까?

내가 선택한 이 길의 끝엔 과연 뭐가 있을까?

삶의 끝은 당연히 죽음이다.

그래, 그렇다면, 내 삶의 끝엔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난 삶이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일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이 작품을 생각이 달라진 뒤에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삶이란 단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죽음 자체를 배재시키기 때문이다.

삶이란, 영원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 누구도 내일 당장 죽을거라고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지 않는다.

삶은 영원하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된다.

이런 영원한 삶을 , 난 하고픈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내일 한다고?

 

오, 하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내일의 삶은 내일부터이다.

어쩌면, 당신의 삶 속에서 '선택' 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지금 뿐일 수도 있다.

때로 삶이란, 운명이란, 당신의 눈 앞에 정말 외길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딱 하나의 외길.

벤 브래드포드에게 그랬듯 말이다.

 

어쩌면 삶이란, 인간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어느것도 선택하지 못했으면서, 선택했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삶이라는 단어에 '나의' 라는 건방진 소유격을 써서는 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생각보다 엄청나게 길고,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며, 엄청나게 많은 다른 삶들과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살아있어서 좋다.

아마, 벤 브래드포드도, 결국은 그렇게 되뇌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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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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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설마 '섹스' 나 '정사' 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고 청소년 유해 게시물, 19금 딱지가 붙는건 아니겠지....

 

 

 

 

한 때 소설속에 등장하는 정사장면은 사랑과 화합의 상징이었다.

겉돌던 두 남녀가 결국 소통에 극적으로 성공하고, 마음이 서로에게 맞닿아있다는 증거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했다.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수많은 창조적인 메타포들로 도배되다 싶이 했었다. 이제는 클리셰에 가깝지만, 너울너울 나부끼는 얇은 실크 커텐이나 솜털같은 침대, 귓가에 울린다는 종소리나 뜨거운 불기둥 같은 묘사는 오히려 직유에 가까울 정도였으니. 당연하게도, 그런 메타포들은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가 완벽하게 그 궤를 달리했다. 공격적이고 일방적이며 보다 욕구에 충실한 남성 작가들의 메타포는 울렁거릴정도로 선정적이었고, 여성 작가들의 메타포는 보다 은밀하고 포용적이었으며 아름다웠더랬다.

 

문화가 더욱 개방되며,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의 작품들을 접했을땐,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더랬다.

일본 소설들은 보다 적나라한 시각적 묘사들로 정사장면을 그려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메타포란 불필요했다. 애초에 정사장면을 메타포로 그려내려고 했던 적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농밀하고 디테일한 묘사는 거의 야동을 보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인터넷만 틀면 헐벗은 여자들의 정사장면을 가림 없이 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던, 나의 고교시절엔 그런 일본 소설들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포르노와 함께 손에 손을 타고 옮겨다니곤했다. 일본 소설에 등장하는 정사장면들은 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당시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지만, 어느정도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런 자극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그 장면들이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어느정도는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마신다. 섹스또한 그러하다. 우리보다 일찍 개방적인 성문화를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섹스란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쌀을 씻어서 솥에 앉히고, 뜸을 들인 뒤, 반찬을 조리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숟갈로 떠먹는 장면을 묘사할땐 메타포가 불필요한 것 처럼, 섹스 또한 그랬던 것이다. 굳이 메타포로 아름답게 승화시킬 필요도 없고, 상징적인 의미를 애써 부여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이런 성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찾아오면서 최근 한국의 현대문학에서도 거침없고 가감없는 정사장면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유교관념에 의해 혼전순결이 중시되던 풍조는 사라진지 오래고, 성경험 시기도 10대 중후반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이 세대는 우리 이전 세대보다 섹스가 보다 친숙하고 쉽다. 생명의 잉태, 가족의 탄생, 사랑의 결실, 소통과 조화의 증거. 이런 단어들은 섹스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관점에서 나의 세대는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10대때와 20대때. 그리고 30대에 접어든 이 시기에 섹스에 관한 사회적 분위기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성을 만나, 보다 쉽게 하룻밤을 함께한다. 만난지 몇시간만에 키스...이런전 이제 구시대의 질문에 불과하고, 만난지 얼마만에 모텔이나 러브호텔로 가느냐...가 더 설득력있는 질문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런 과도기 시대에 섹스에 대한 관념이 변하고, 문학작품 속에서 그 역할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개인적인 성 관념을 떠나 한명의 독자로서 대단히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비교적 유연하게 흐름을 타며 작품들을 즐겨왔지만, [제리] 에 등장하는 정사장면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문화 충격에 가까울 정도였다. 뭐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포르노에 등장하는 오럴섹스를 보았을때의 느낌이랄까. 뒷골이 저릿 할 정도의 강렬한 불쾌감. 성적인 흥분은 훨씬 뒤에 찾아드는, 역겨움. 위화감. 내가 [제리] 의 정사장면에서 그런 위화감과 역함을 느낀건 단지 그 묘사가 디테일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디테일한 묘사는 위에 언급한 무라카미 류나 하루키와 비슷한 정도. 글로 정사장면을 묘사할때 메타포를 배재한다면, 그저 도색사진이나 포르노를 보는 그대로 묘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내가 [제리] 의 정사장면에서 위화감과 역함을 느낀건, 작가가 '섹스' 라는 행위 자체를 '단절' 과 '불협화음' 의 메타포, 은유이자 상징으로 사용하기 있기 때문이다. 단절과 불협화음은 언제나 지극한 고통을 가지고 온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 는 섹스를 통해 순전히 고통만을 느낀다. 그녀가 고통을 어느정도까지 즐기는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육체의 고통을 이기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인간의 뇌는 때때로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인공인 '나' 는 그정도는 아닌 듯 하다. 그녀는 단순히 '그냥' 고통을 참아내고, 섹스를 한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오히려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모습을 닮아있다. 작품속에서 '내' 가 '나눈다' 고 서술하는 '섹스' 는 단순히 폭력에 가깝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섹스장면을 모조리 신체적, 물리적 폭행으로 치환시켜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주인공 '나' 는 끝까지 그런 섹스는 '나눈다' 고 서술하는데, 그런 점이 오히려 그녀가 '당하고 있는' 지독한 폭행을 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내가 작품을 읽으면서 위화감과 역함을 느꼈던 건 아마 이렇게 읽었기 때문이리라.

난 폭력이 정말 싫다. 베고 썰고 하는 게임도 전혀 좋아하지 않고, 설사 한다고 해도 만화풍의 느낌이 완연한 게임을 하지, 리얼하게 팔다리가 뜯겨져 나가고 시뻘건 선혈이 낭자한 장면들엔 얼굴을 찌푸린다. 누가 눈 앞에서 뺨을 얻어맞는 장면만 봐도 화가 치밀정도로(아이러니 하지만) 싫어한다. 영화도 물론 잔인한 슬래셔 무비는 전혀 안보고, 심지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안(이라고 쓰고 못 이라고 읽어도 된다) 봤을 정도다. 이런 나이니, 섹스가 폭력으로 읽혔고, 책 전체가 그것으로 도배되어있다시피 했기때문에, 작품을 읽는 내내 상당히 힘들었다. 뭐, 아직 나에게 섹스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이 충분히 남아있음 또한 한 몫 했을 것이고. 이 작품이 섹스를 다루는 방식은 그야말로, 거식증 환자가 음식책을 만드는 수준이었으니.

 

이 작품은 그렇게 힘겹게 충분히 책장을 넘길 가치는 충분했다.

내가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통 단절의시대, 불협화음과 계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시대 청춘들의 단상은 명확히 와닿았다. 한때는 사랑의 결실, 증거와도 같았던 섹스가 욕망의 배출구도 아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가까울 정도인 현대의 젊은. 아니, 어린 청춘들. 우유부단하고, 자신이 당하는 폭력의 의미와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한채 수도권 2년제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는 여자인 '나' 는 '88만원 세대' 라고 불리기도 하는 98%의 젊은이들의 일그러진 단상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선택받은 2%를 바라볼 수도, 쳐다볼 수도 없는 대부분의 젊은이들. 충분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가 늪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가련하고 안타까운 꿈을 잃은 세대들. 우리 세대는 세대간의 경쟁에서는 애초부터 게임이 안되고, 세대 안에서의 경쟁조차 할 수 없는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야말로 계급사회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셈이다.

 

그런 이 세대의 일그러진 단상을 이렇게 직접적이고 디테일하게 들이민 작가가 지금껏 있었던가.

언제나 우회적으로 윗세대 탓을 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자학적이고 자조적이었지 않았는가. 가까운 일본에서는 그것이 니힐리즘이 가득한 공허한 작품 투성이가 되었다가, 이제는 이런 상황을 유희적으로 받아들이는 낙천주의가 퍼져있는 듯 하다. 우리 문학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작품을 보고는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후 재벌 중심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폭발적인 성장을 했고, 그런 버블경제가 일거에 무너지며 오랜 경제 침체기를 겪고있는 일본은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 문학 사조의 유행 또한 엇비슷하게 나아가고 있으며,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 민족성은 일본과는 많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대륙과 머리를 마주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와,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받아왔던 민족성엔 '한' 뿐 아니라 '저항정신' 이 뿌리깊이 박혀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북한이라는 시한폭탄을 머리에 이고 있는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저항정신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미 여러 현대의 한국문학들은 니힐리즘이나 낙천주의 같은 '이즘' 을 뛰어넘는 독특한 느낌의 현실주의적인 작품들이 눈에 띄고 있다.

[제리] 또한 그 연장선으로, 보다 은밀한 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졌던 '섹스' 의 리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듯 하다.

 

작품을 종결짓는 마지막 챕터 몇 페이지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 나 ' 인셉션' 혹은 우리의 고전인 '구운몽'이나 장자의 '호접몽' 등을 떠오르게 했다.

불이 꺼진 캄캄한 복도를 걷는 '나' . 사방에 불꺼진 방들이 가득하지만, 결국 '나' 는 푸르스름하게 퍼져나오는 빛을 향해 걸어간다.

온통 까만 실내에서 유일하게 빛이 있는 사각형의 수조. '내' 가 수조안의 열대어를 바라보는 것인가, 수조안의 열대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현실과 환상이 모호한 속에서도 '나' 는 결국 빛을 향해 나아간다.

 

'나' 나 '제리' 의 삶이 내일 당장 변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녀나 그는 내일도, 모레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김혜나 작가는 이렇게 충격적인 데뷔작을 통해 화려하게 등단했다. 나보다 딱 한살 어린 여류작가의 모습은 마치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를 떠올리게 한다. 나에겐 그정도의 충격이었다. [제리] 라는 작품은. 자, 이제 김혜나 작가는 현대 문학에 강렬한 현실주의를 던져 질문을 던졌다.

이런 황폐한 세상속에서, 대한민국의 여자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나' 는 그리고, '제리' 는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해답에 도달할 것인가??

아마 우리가, 큰 사고없이 제 수명대로 잘 살아간다면, 언젠가 난 그녀가 내놓는 해답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리고 애정을 담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난 인생은 경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경쟁이라면, 태어날때부터 장애를 안고 있거나, 남들과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물주는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아 ---- 조물주는 변명따위 안하려나?? ㅋㅋㅋ

삶은 흐르는 강물이고, 표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다. 누구보다 먼저 바다에 도달하고, 누구보다 먼저 표적을 꿰뚫어서 뭐를 할것인가??

인생이란 거대한 트랙 안에서, 나 아닌 남을 앞질러서 뭐를 더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수명이나, 인생을 얻어올 수 있는가??

짜디짠 바닷물을 더 많이 마시고, 화살을 쏜 사람에게 다시 수합되거, 활에 걸릴 것인가??

 

우리는 이미 아주 중요한 격언을 하나 알고 있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만약 내가 [제리] 의 '나' 나 '제리'를 만난다면 그렇게 말해줄 것이다.

너무...

생각없어 보이나?????ㅋㅋㅋ

 

 

 

 

+덧:  예기치 않게 비슷한 나이의 여류 작가들의 작품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장은진 작가, 김희진 작가, 그리고, 김혜나 작가. (우연찮게도 다 김씨다, 역시 한국엔 김씨가 젤 많아~!)

애정을 듬뿍듬뿍 담아, 좋은 작품 앞으로도 쭉쭉, 부탁~~~~~~~~~~~~해요~~~~~~~~

아니, 좋은작품 아니어도 좋으니, 다작해주시길. 에쿠니 가오리 한창때만큼은 해줘야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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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호텔
김희진 지음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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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해본적이 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고, 나에 대해 깊이있는 질문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굉장한 위화감이 있었다.

'카메라가 나를 내려보고 있었고, 한쪽편에 앉은 인터뷰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황 자체가 대단한 위화감이 있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나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꺼낸다는건,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다.

하물며, 뭔가를 숨기고 있다면 어떨까. 게다가 깊은 마음의 상처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잡지 기자인 '강인한' 은 인터뷰 하기 어려운 인터뷰이들을 전문으로 하는베테랑 인터뷰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여러가지 스킬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리는 사람들의 마음의 빗장을 풀게 만들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전문가이다. 강인한이 이번에 타겟으로 삼은 여자는 '고요다' 라는 필명을 가진 신인 작가이다.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공모전의 대상을 거머쥐고, 그 작품을 통해 엄청난 인세를 받아내고 있는 묘령의 여작가. 하지만, 완벽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어서 신상에 대한 것은 터럭 한 올 만큼도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쌓인 사람. 강인한은 그녀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간다. 외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성채와도 같은 3층짜리 대저택에 혼자 살고있는 '고요다'. 대문 안으로 한 발짝도 들여보내주지 않는 고요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강인한은 필사의 작전을 구사한다.

 

인류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 수천만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고가는 바이러스??

 

아마도, 외로움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 여기 있어요' 라고 외치고 다닌다. '누가 내 말 좀 들어주세요' 라는 말도 함께 외친다. 가장 큰 공포는 지극한 외로움이다. 함께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고, 내 자신을 인정해줄 타인이 없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공포일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타인을 '선택' 한다. 그리고, '선택 받음' 을 갈구한다. 어쩌면 '결혼' 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싹트게 된 계기도 그 부분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넌 이 사람을 선택했어, 또는 선택 받았어. 그러니까 죽을 때 까지 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을거야.' 라는 약속을 통해 남은 생을 위안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잠깐이고, 그 약속 하나를 통해 남은 전 생애를 그래도 평안하게 마무리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종족번식의 과제를 열심히 이행하면서 말이다.

 

삶은 끊임없는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외로움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연인이 없을 때 보다, 있을때 외로움은 더 강렬하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고요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처음 혼자가 되었을땐 외로움의 고통이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생존을 위해 방을 빌려주면서 외로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정들 만하면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 싫었더든요. 한 사람씩 떠날 때마다 공허해지는 순간들도 싫었고요.

차라리 아무도 없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뭐든 애초에 없었던 걸로 쓸쓸해하진 않으니까요."

"이해해요. 더 외로운 건 남겨진 쪽이니까요..."  p. 178 中 고요다와 강인한의 대화.

 

강인한과 고요다의 대화를 보면,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내보이고, 약점을 내보인다. 감정의 가장 깊숙한 곳, 그 곳에 아직 시뻘겋게 벌어져있는 상처를 내보인다.

약점을 보듬어주고, 상처를 핥아주며 둘은 서서히 친밀감을 갖게 된다.

또한, 연애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남녀들은 이성의 마음을 열어내기 위해 거짓을 꾸며내곤 한다.

약점을 토로하도록, 깊은 곳을 드러내도록, 살살 꼬드기고, 협박하고, 회유한다. 그렇게 알아낸 약점과 깊은곳을 찾아서 만져주고 핥아줘서 선심을 얻어내고자 한다. 연애란 일종의 수싸움과도 같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이다.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 같던 초 중반을 지나, 후반부가 되면 이야기는 보다 관념적으로 선회한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하 편의 후반부를 읽는 느낌이었다.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사건들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작가의 메시지는 보다 어지럽게 얽혀든다.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이 모두 고양이로 변했고, 그런 고양이들을 데려다 키우며, 타인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상처투성이의 여류 작가. 과연 이 복잡다단한 장치들을 둘둘 감은 고요다는 어떤 메타포인가? 아이러니의 복합체인 고요다를 통해 저자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남자인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기 짝이없는 여자들만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일까??

자신을 사랑했던 수많은 남자들의 속에서. 도저히 '대화' 가 통하지 않는 수많은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 였던 고양이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외로운 사람 '고요다'. 뻑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들때문에 짜증났던 '고요다'?  자뻑도 이런 자뻑이 없고, 공주병도 이런 공주병이 없다.

 

하지만, 남자로서 주인공 고요다는 몰라도, 고양이들은 이해가 된다. 나도, 쉽게 쉽게 홀랑홀랑 빠져드는 성격이니까. 그렇게 한번 빠져들면 몸도 맘도 재산도 다 훌훌 갖다 바치는 남자니까. 고양이가 되서라도, 그 사람 곁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남자니까. 그 여자의 마음은. 일단,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남자니까. 나 역시 고요다를 사랑했다면, 그녀가 주기적으로 불러들이는 섹스 파트너보다는, 그녀의 고양이가 되고싶으니까.

결국 난 고양이가 되겠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이 빠져드는 것. 그 무엇보다 위험한 사랑이다.

 

고요다는 마치 블로그나 트위터 스타의 모습과 닮아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쌓여 있지만, 그들에겐 껍데기의 모습만 보여주고, 깊은 이야기는 철저하게 숨기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주위에 가득한. 사람들은 많으나, 정작 소통을 부족한 현대인들의 모습. 현대인들은 주변에 들끓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보다 강렬한 외로움을 느끼고, 그 외로움을 해갈하기 위해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보다 강렬한 외로움을 느끼고,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때론 애완동물에 심취하지만, 그들 또한 외로움을 완전히 해갈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외로움을 해갈해주는 건 무엇일까??

저자는 일단 결론을 유보한 듯 하다. 저자의 페르소나일 주인공 '고요다'는 자신의 세계속으로 들어간다.

창작. '소설' 을 쓰기로 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필명을 사용하는 극중 주인공 '고요다' 의 본명 또한 저자와 이름이 같다.

 

마지막 장에서, 고요다는 강인한 기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고양이로 변하지 않은 그를 확인하게 된다.

과연 그때 고요다의 마음은 어땠을까?

정말, 고양이로 변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을까??

자신과 완벽하게 소통을 했음에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고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을까??

여기에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고요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꺼내 보였을지 몰라도, 강인한은 거짓만을 말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언제나 '솔직함' 을 전제할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더 이상 세상은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일터다.

사랑하고 고양이가 될 것인가, 사랑하지 않고 거짓말쟁이 사람이 될 것인가?

 

 

 

 

+덧
 

또 하나 재미있는건, 이 작품의 저자인 김희진 작가의 쌍둥이 자매인 장은진 작가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를 통해, 결국 해답은 '사람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먼저 아주아주 감명깊게 읽었고, 김희진 작가가 그녀의 쌍둥이 자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두 작품의 차이점을 은근히 의식하면서 작품을 읽어내렸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겠다.

두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상당히 비슷하다.

가족들을 다 잃은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깊숙한 외로움을 끄집어내기 위해 불청객들이 난입한다는 점도 같다. 그 불청객들이 엄청난 철면피에 뻔뻔하기 그지없으며 상당한 능력자들이라는 점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미스테리한 기법으로 다소 쇼킹한 반전에 다다른다는 점 또한 닮아있다.

일단 '현대인의 풍요로운 듯 하지만 굉장히 빈곤한 소통' 을 다루고 있다는 점 역시 같지만, 그걸 해석한 결론은 꽤나 다르다. 둘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가 완벽히 다르며, 각자의 작품이 내뿜고 있는 색채 또한 완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김희진 작가는 장은진 작가에 비해 보다 냉정한 느낌이랄까. 불쌍한 고요다에게 접근했던 강인한이 거짓을 무기로 고요다의 마음 깊숙한 것들을 끄집어내게 만들었다는 점이 김희진 작가가 냉정하게 바라보는 현실을 대변하는 듯 했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즐거움은 정말 굉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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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킬링 조크 BATMAN The Killing Joke : 디럭스 에디션 The Deluxe Edition (양장) 세미콜론 배트맨 시리즈
앨런 무어 지음, 박중서 옮김, 브라이언 볼런드 그림 / 세미콜론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흔히 '코믹스 ' ,'코믹 이슈' , '코믹북' 정도로 불리웠던 미국의 만화가 '그래픽 노블' 이라는 고급스러운 명칭을 얻은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의 만화는 주로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발전해 나갔다.

글과 그림의 조합이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할때 훨씬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입각한 실용주의의 서양식 사고방식다운 접근이다. 광고선전물과 교육자료등으로 발전한 미국의 만화는 그 틀 안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붐을 일으켰던 '슈퍼 히어로' 들의 등장도 그 안에서 멤돌았던 것이다.

망토를 입은 초능력자들은 말 그대로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담고있는 무적의 사나이들이었고, 만화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어야 했다.

 

1980년대 말기, 프랭크 밀러, 앨런 무어, 존 히긴스등으로 대표되는 몇몇 천재적인 스토리 텔러들이 등장했다.

미국 대중문화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온갖 경의를 담아 '미치광이'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정도로 보통 작가들이 상상할 수 없는 관점으로 '문학예술' 의 범주 안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조망했던 것이다.

 앨런 무어는 일찌감치 'V 포 벤데타' '왓치맨' 등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직유에 가깝게 만화에 담아내는데 성공했고, 프랭크 밀러가 재창조해낸 배트맨은 망또를 걸친 강력한 사나이에서 어렸을때의 트라우마와 인간적인 고뇌를 안은 남자로 재창조 되었다.

이를 통해, 수많은 독자들은 현실을 그대로 담아놓은 도시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하는 슈퍼 히어로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배트맨' 은 미국 내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기있는 캐릭터이다.

아니, 캐릭터라기 보다 '인물' 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위인' . 즉 '히어로' 인 것이다.

배트맨과 슈퍼맨은 미국 안에서는 단순히 캐릭터의 가치를 넘어서서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메타포이자, 심볼이다.

 

1980년대의 스토리 텔러들은 배트맨의 이중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검은 가면을 쓴 냉혹하고 강력한 징벌자이지만, 가면을 벗으면 그는 브루스 웨인이라는 부잣집 도련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검은 가면은 그의 정체를 가려줌과 동시에 연약함을 가려주는 장치가 된다.

그런 그의 이중성은 인간다움 그 자체였다. 익명성에 가려 악당들을 처단하지만, 검은 마스크가 대변하는 그 익명성이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안에 내재되어있는 악마성을 불어 일으키는 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브루스 웨인' 으로서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는 분노와 증오를 잉태하고, 그것은 당연히 폭력을 낳는다.

'배트맨' 이 가지고 있는 정의감으로 간신히 분노와 증오를 어느정도 제어하고 있지만, 이 균형은 언제나 위태롭다.

 

프랭크 밀러는 배트맨의 이중성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의 탄생에 집중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중성이 있고, 그 감정의 분화에는 마땅한 인과관계가 필요하다.

브루스 웨인이 평탄한 인생을 버리고, 마스크를 쓴 두얼굴의 사나이로 살며, 밤마다 온 몸이 상처와 멍투성이가 되며 악당들을 사냥하는데는 보다 설득력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배트맨 '이어 원Year One' 이라는 작품이 탄생했고, 비로소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고, 현실성을 획득하기 시작한다.

그 작품 안에서 마스크를 쓴지 얼마 안된 초기의 배트맨은 밤마다 악당들에게 쥐어 터지고, 칼에 찔리고, 총에 맞으며 아슬아슬한 시간들을 보낸다. 이런 배트맨의 인간적인 모습에 수많은 팬들은 실망했지만, 또다른 수많은 팬들이 생겨났다.

또한, 늙고 은퇴한 배트맨의 모습을 그려낸 ' 다크나이트 리턴즈' 와 '다크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 같은 작품들을 통해 보다 더 현실적인 배트맨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시도가 한 발 나아간 작품이 바로 이 작품, '킬링 조크' 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트맨' 의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조커' 이다.

놀란감독의 '다크 나이트' 에서 히스레저가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 열연했던 바로 그 하얀 얼굴의 광대.

조커는 배트맨의 이중성 중, 악마성이 현신한 듯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배트맨이 지키는 '선line' 은 '살생' 이다. 그는 아무리 증오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라고 할 지라도 절대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는다.

이미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악당들을 징벌하는 배트맨은 스스로가 어둠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그는 악당과 영웅의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걷고있다. '사회' 의 시스템이 이미 모든 악을 처단할 수 없음을 인지한, 시스템 밖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한 발만 내딛으면, 더이상 그에게 악당과 영웅의 경계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것이다.

그리고 그 선이 바로 살생. 살인인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조커는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그 '선' 을 언제나 교묘하게 조종한다.

'나만 죽이면 1000명을 구할 수 있어!'

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조커는 배트맨으로 인해 점점 더 악랄한 범죄를 구상하게 된다.

배트맨은 항상 조커를 잡지만, 결국 죽이지 못한다.

그리고 조커는 언제나 법정에서는 정신분열을 이유로 사형이나 중형을 선고받지 못하고, 정신병원 수용 정도의 형량만 받는다.

천재적인 범죄자인 조커는 언제나처럼 정신병원을 탈출하여, 악랄한 범죄를 구상하고, 배트맨을 괴롭힌다.

 

50p에 지나지 않는 짤막한 이 작품은 그런 '조커' 의 탄생을 재해석하고 있다.

히어로가 등장하는 그래픽 노블 중에서도 보기 힘들정도의 단편이지만, '배트맨' 이라는 캐릭터를 언급할때 '꼭 읽어야 할 작품'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작중의 명작이다.

'조커' 라는 인물의 탄생을 그려냈다는 부분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코미디언인 지구상 최악의 악당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역사 뿐 아니라, '그래픽 노블' 이라는 장르 전체를 봐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만화 생산 시스템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식 망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어왔다.

그들은 '캐릭터' 가 가지고있는 상업성에 주목했다.

캐릭터의 탄생배경, 가지고 있는 특수능력, 디자인의 독창성, 이름등을 하나의 '상품' 으로 규정하고 회사가 소유했다.

그리고, 이 인물을 가지고 이야기들을 만들어 줄 작가들을 고용한 것이다.

물론 가장 처음에는 이야기와 인물이 함께 있었지만, 그 후부터는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위한 이야기가 구상되었던 것이다.

배트맨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도, 이야기를 쓰는 작가에 따라 배트맨은 항상 조금씩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가  ' 고담시에 사는 검은 마스크를 쓴 재벌 브루스 웨인 ' 이라는 설정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주변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커나 펭귄, 캣우먼, 포이즌 아이비, 하비 덴트 같은 익숙한 인물들이 모두 등장은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악당이 되었는지, 어떤 성격이며, 외모는 어떤지 매번 달라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첫번째 배트맨이 등장한지 십수년이 지나자, 수십종류의 배트맨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모두 고담시에 살고있었고, 박쥐모양의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스크를 벗으면 재벌인 브루스 웨인이었다.

결국 '배트맨' 이란 캐릭터를 소유한 회사는 이 세계관을 정리하고 하나로 묶을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주인공 캐릭터가 아닌 '악당 캐릭터' 의 정립 역시 시도된 셈이다.

 

미국의 히어로 만화에서 악당 캐릭터는 일회성이었다.

누구도 악당의 성격이 어땠는지, 그 기원이 어디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히어로에게 어떤 식의 고통을 주며, 결국은 어떤 방식으로 응징되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킬링 조크' 를 통해 악당들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와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처음의 조커는 별 다를 것 없는 아주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가 아내를 잃고, 우연한 사건에 어이없이 휘말리면서 내재된 악마성을 끄집어내는 과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사실적이다.

물론 앨런 무어의 뛰어난 시나리오도 좋지만, 최고의 작화가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브라이언 볼런드의 그림도 아주 기가 막히다.

그의 작화는 그야말로 그래픽 내러티브의 교과서적인 장면들을 그려낸다.

컷, 구도, 앵글. 그야말로 정석적인 화면연출을 구사하는데, 일본 만화와는 다른 '정련' 되고 '제련' 된 섬세한 장면들을 엿볼 수 있다.

 

최근 수많은 작품들이 '그래픽 노블' 이라는 이름을 달고 국내에 정식 발매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역동적이고 찰나적인 만화에 익숙해져있는 우리에겐 한 컷 한 컷을 세심하게 '읽어' 야 하는 그래픽 노블은 절대적인 매력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미 수십년동안 역사를 만들어온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일회성 프로젝트로는 그 매력을 충분히 읽어낼 수 조차 없다.

그런 관점들에서, 이 작품 '킬링 조크' 는 그래픽 노블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도 큰 즐거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 인물에 대한 몰입도 높은 묘사, 국내에도 어느정도 정보가 알려져있는 '조커' 라는 캐릭터성에 비춰, 진정한 의미로서의 그래픽 노블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굉장히 좋은 질의 종이와 완벽한 인쇄와 번역. 수준높은 대사들과 연출은 '명작' 이라는 수식어 앞에서는 당연히 뒤따르는 것들일테고 말이다.

부담없는 두께 또한 마찬가지일터.

 

히스 레저의 '조커' 가 인상적이었던 분들에게도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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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미사일
야마시타 타카미츠 지음, 김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종합 고등학교의 미술디자인과에 재학중인 여고생 '츠지오'는 점심시간을 틈타 미술 과제를 위해 옥상을 찾았다.

2층에 불과한 미술디자인과 건물이 아닌 보통과 학생들이 쓰는 4층 건물의 옥상이었다.

고교 2학년생이 되어서야 생전 처음으로 옥상이라는 곳에 올라간 독특한 소녀, 츠지오.

그리고 그곳에서 불량배 기질이 다분하며, 온갖 악소문을 달고다니는 싸움꾼 '쿠니시게' 와 그의 절친인 '준노스케' 를 만나게 된다.

점심시간마다 햇빛을 즐기기라도 하듯 옥상을 찾는 쿠니시게. 그리고 준노스케는 점심시간마다 연모하는 운동부 여학생 '미야세' 의 달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옥상을 찾곤했다. 거의 매일 옥상을 찾게되는 삼인조. 거기에 자살시도를 하는 듯 보였던 1학년 '히라하라' 가 끼어들며 '옥상부' 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세계 정세는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괴 테러집단에 납치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군 부대를 방문중이었던 대통령과 함께 요새 전체가 테러집단에게 점령당한 상황.

그들은 미국의 우방국에 미사일을 날리겠다는 협박을 전세계에 날리고 있었다.

일본도 미사일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태.

 

언제 미사일이 날아들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속에서, 쿠니시게와 친구들은 변함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쿠니시게가 왠 권총 한자루와 죽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사진을 주워오면서 옥상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속에 휘말리게 된다.

 

 

 

 

 

※여기부터는 개인적인 감상이기에 작품을 읽기 전이시라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개성적인 인물들이 우루루 등장하는 전형적인 일본식 엔터테인먼트 소설.

만화를 보는 듯한 구체적인 시각적 묘사와 개성 뚜렷한 캐릭터들,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타넘는 사건설정도 대단히 흥미롭다.

언제라도 미사일이 날아들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속으로 밀어넣어진 독자들은 시종일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가지고 작품에 몰입된다.

그 덕분인지 별 거 아닌 사건들도 보다 크게 느껴지고, 복잡하지 않은 관계들이 보다 복잡하게 다가온다.

작가의 재치와 명민함이 돋보이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미국 대통령이 납치된 상황- 이라는 설정만 빼고 보면 이야기 자체는 크게 뛰어난 점은 없다.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어이없는 이유로 사건에 휘말리고, 그것들이 주변들과 얼키고 설켜 사건은 점점 더 애매모호한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결국은 누구누구가 배후였다더라!! 라는 식의 전형적인 추리물의 플롯을 아주 고지식할 정도로 단계적으로 밟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달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은 하나로 모아진다는 식의 전개 또한 너무나 많이 봐왔고, 뻔하지 않은가?

 

바로 그 점이 이 장르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결국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소설은 온전히 '재미' 에 초점을 맞춰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메시지나 성찰은 보다 원숙한 필력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의 메시지에 스스로 도취되거나 함몰되어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작품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한국 문학에서 오히려 더 많이 볼 수 있다.

일찌감치부터 재미를 위한 엔터테인먼트 장르문학이 잘 발달되어있는 일본에서는 왠만한 필력의 작가가 아니고서는 추리, 미스테리물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시도 따위는 애초에 하지도 않는다.

 

[옥상 미사일] 또한 그런 범주 안에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잘 풀어나간다.

언듯, 분위기를 깨는 - 거의 즉흥적으로 생각냈다고 보여지는 아이디어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러프하게 담겨있기도 한데, 그런 점들이 오히려 이 작품의 매력이 되기도 한다. (특히, 킬러의 이야기는 정말 어이없으면서도 재미있었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생생한 아이디어들이 어떤 모습으로 튀어나오는지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거기에, 정말 과도하지 않은 만큼의 사회적 메시지가 들어있다.

이 밸런스가 정말 절묘한데, 이야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해 가면서, 일본 내 교육, 사회, 문화 등을 꼬집는다.

거기에 미국과 테러집단과의 미묘한 신경전, 정말 '깬다' 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테러집단의 요구조건.

이런 무거운 주제들이 가볍고 경쾌한 이야깃속에 절묘하게 녹아들어 있다.

 

사실, 이런 미스테리, 추리물들은 어쩌면 삶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일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은 "왜 죽였을까? 어떻게 죽였을까?" 라는 의문에서부터 사건에 다가선다.

이것은 문득 수많은 철학서들이 '왜 태어났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과 닮아있다.

 

얼마전 우리에게는 연평도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왔다.

오늘(11월 28일) 부터는 서해에서 미국 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의 군사훈련이 진행된다.

이것은 분명 북한을 자극할 것이고, 중국 또한 자극받을 것이다.

바야흐로 일촉즉발의 시기는 이제부터인 셈이다.

이 상황이 바로 [옥상 미사일] 속에서 등장하는, 언제라도 도쿄에 미사일이 떨어질 수 있는 상황과 같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는 이런 대치상태가 북한과 남한의 본격적인 전면전쟁으로 발전하기를 원치는 않지만,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 필요는 없다.

내일 미사일이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오늘 눈 앞의 위기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 눈 앞의 즐거움과 사랑, 기쁨과 행복을 무시할 수도 없다는 뜻.

 

삶은, 언제나 일방통행이다.

가끔은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한번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내일 미사일이 날아온다면, 옥상에서 하늘을 한번 바라보지 못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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