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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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내딛는다.
온 삶의 과정은, 달리 말하면 죽음의 여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도 살면서 죽음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누구나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죽지 않을거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하루 하루를 이겨낸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동전의 앞 뒷면처럼 서로 등을 맞대고 있지만, 결코 입을 맞출 수는 없는 관계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의 삶은 지난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몸도 마음도 연약한 존재라서 외로움에 취약하다. 그래서, 지난하기 짝이없는 인간의 삶은 외로움과의 치열한 싸움의 기록이기도 하다. 작품속의 주인공인 '조연주' 는 외로움이라는 상태를 잘 이해하거나 체득하지 못하는 편이라고 했으나, 그녀 또한 사람과 말을 섞고 마음을 섞을 수록 외로움을 이해하고 체득해 갈 것이다. 사람은, '본래 그러한 것이라서 외롭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이해하거나 체득하지 못하는 편인 조연주는 민통선 안쪽, 북한에 가장 가까운 그곳에 위치한 수목원에 계약직으로 취직하게 된다. 뇌물죄로 징역 삼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아 복역중인 공무원 아버지와 홀로 계신 어머니를 뒤로 하고 고립무원의 세계로 넘어온다. 모든 생명들이 서로 굳게 연관하고 있는 광활한 숲. 그리고, 그 안에 들어앉아 있는 수목원의 연구실장인 안요한과 그 아들 시우. 조연주와 안요한, 그리고 시우는 모두 외로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폐증세가 있는 시우와 그의 아버지인 안요한 역시 비슷한 성정이고, 아이 엄마와는 이미 이혼한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뒤에 두고 온 연주. 각각 자신들의 등에 '가족' 이라는 거대한 베낭을 짊어매고 있고, 그것은 세상 누구나 지고 있는 짐이다. 연주는 가족이라는 짐의 무거움을 스스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매일 밤마다 들려오는 어머니의 넋두리를 통해 가족이라는 짐을 이해하고 체득한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안실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실장과 이혼한 부인, 그리고 캥거루가 제 새끼를 배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듯 좀체 떨어질 줄 모르는 아들 시우. 안실장과 시우는 서로에게 짐인 동시에 위안이 되고 이유가 된다.

 

 연주의 아버지는 딸인 연주와 부인이 삶의 이유이자, 범죄의 이유였다. 느낌은 많이 다르지만, 연주의 가족에서 정이현 작가의 [너는 모른다] 의 김상호와 진영옥 부부가 떠올랐다. 야심이나 명예는 남자에게 삶의 이유이자 목표가 된다. 권력과 욕망을 위해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남자들은 가족들을 위해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들이다. 가족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은 김상호나 연주의 아버지나 별반 다르지 않아보인다. 그리고, 그 안사람들은 어떠한가. 김상호의 부인인 진영옥은 자신의 남편이 뭔가 께름칙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만 구태여 파고들지 않고, 모른 척 한다. 아마 연주의 어머니도 그러했으리라. 자식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면, 돈의 출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이다.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는, 일단 '어떻게' 먹고 사는지를 해결해야만 따져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결국 그것들 또한 짐에 되어 어깨 위에 켜켜히 쌓이게 된다.

 

작품은 시종일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려진다.

김훈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는 여전히 감정이 절제 되어 있다. 대한민국 제일의 리얼리즘 작가라고 칭송받아 마땅한 그의 문장들은 감정은 절제되어 있지만,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연상시키듯 주관적인 인상 또한 녹아있다. 등장하는 주인공의 직업이 세밀화가여서 문장들을 자연스럽게 세밀화와 비교하게 되었지만, 그의 글속에서 난 세밀화보다는 모네와 마네, 그리고 비슷한 사조의 영향을 받은 바르비종파의 밀레나 테오도르 루소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인상을 화폭에 담기를 갈구했다. 수련잎에 반사되는 찬란한 햇빛, 거대한 숲을 휘몰아 나가는 연무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잡아 화폭에 옮기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의 문장들 또한 다르지 않다. 이번 작품 속에서 작가는 뛰어난 감각으로 자연을 묘사해낸다. 애초에 그림작가와 글작가의 지상과제는 동일하기 때문일까? 그가 묘사해내는 자연의 인상에는 사람의 감정들이 함께 휘몰아친다. 자음 하나 모음 하나에도 누군가가 숨쉬고 있는 듯 하다. 삶의 호흡. 삶의 무게. 삶의 의미. 질문들. 해답들. 또 질문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변화무쌍한 자연과 변화 없이 풍화되어가는 유해의 이미지는 서로 반대편에서 꿈틀대며 삶과 죽음을 가르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 나무나 꽃. 자연은 혼자 고고하지 않다. 우리의 눈에는 언덕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가 제 혼자 고고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뿌리는 언덕 밑 땅속을 굳게 쥐고 있고, 수많은 곤충들을 품고 있으며, 주변의 수많은 수목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꽃이건 나무건 풀이건, 그들 또한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품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그것들도 때가 되면 죽어서 주저앉고, 결국은 흙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흙을 붙들고 또다른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주저앉아 흙이 된다. 살아있음은 수많은 기회이다. 색을 낼 수도 있고, 쟁쟁쟁 하는 소리도 낼 수 있으며, 상추쌈도 먹을 수 있다.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고립을 선택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명함을 내밀수도 있고, 그것을 받아 갈무리 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볼 것이고, 나의 죽음을 보여줄 누군가를 만나기도 할 터다. 단한번의 우회전으로 고립된 세상을 만날수도 있고, 수많은 교차로투성이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상을 만날 수도 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수많은 생각들이 나타나고 사라졌으며, 질문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인간이 외로움을 타는 이유는, 인간이 원래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인간은 원래 홀로 고독하게 태어났으며, 그 고독함이 외로움이라는 태생적인 감정을 야기한다고 여겨왔다. 

나 자신 또한 외로움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외로움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고립과 고독을 갈구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짐스러웠고, 사람들과 섞는 말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주거나, 나에게 남기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상처받고, 그 상처 역시 사람을 통해 치유된다면, 애초에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치유받을 일도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 원래 외롭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고독하지 않게 태어났다.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모른 채 태어난다.

살아있는 누군가의 몸 속에서 10여개월동안 함께 먹고, 싸고, 숨쉬고, 웃고, 울고, 움직이다가 어미의 뼈를 부수며 태어나는데, 어찌 인간이 태생적으로 외로울 수 있단말인가?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되지 않아도, 그것은 고독과 외로움의 원초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나무가 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못 위의 수련이 소금쟁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살아가듯이 말이다.

 

그렇기때문에 누군가는 자신이 고독하지만 고독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외롭지만 외롭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 혼란과 혼돈은 입을 닫게 하고, 눈을 돌리게 한다. 점점 더 스스로의 안으로 파고들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알 수 없는 감정에 단지 외로움이나 고독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였을 뿐이다. 서어나무가 홀로 서어나무 될 수 없고, 패랭이 꽃이 홀로 패랭이 꽃이 될 수 없듯, 사람은 홀로 사람일 수 없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사람은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고독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꽃에 각각의 고유한 색이 있는 이유는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주변 색과 전혀 다른, 어디서나 한눈에 띌 수 있는 색을 몸 안에서 끌어내어, 쟁쟁쟁 하고 세상에 내뿜는 이유는 바로 그것일 터다. 외로워 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색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이면 된다. 누군가 나의 소리를 들을터다. 색이 바래지고 줄기에서 떨어져서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요동치는 감정들을 갈무리 하여 켜켜히 쌓아 색을 만들어내면 된다.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그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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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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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인간에게 '객관적인 시각' 이라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들 중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싶어하는 것만 본다.' 나 역시 이 말에 상당히 동의한다. 그나마 이 세상에 가장 객관적인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학일 것이다. 자연현상은 물론 사람의 마음까지도 '숫자' 라는 변하지 않는 값을 통해 추론하고자 하는 학문. 수학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텅 빈 상태인 '0' 을 만들 수 있지만, 현실에서 완전히 텅 빈 공간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현실은 화학과 물리학, 철학까지 혼돈스럽게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수학이란 단지 현실을 약간 더 단순하게 객관화 하기 위해 고안된 학문인 셈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아주 약간이라도 더 쉽게 살기 위한 것이다.

 

세상을 숫자로 풀이하듯, 문학에서도 인간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시도는 꾸준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위치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터다. 우선, 인간의 몇가지 특성들이 배재되어있는 존재를 만들어 보면 된다. '영양소' 대신 다른 것들을 섭취하면서 생명을 유지한다던지, 노화되지 않는다던지, 필멸이 아닌 영원의 존재라던지, 육체가 없이 정신만 있다던지, 입을 열어 공기의 떨림으로 의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텔레파시 같은 의식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다던지. 그런 관점에서 작품의 주인공인 '차상문' 은 인간과 인간 사회를 객관화 시키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차상문은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귀가 길고, 다리가 팔보다 훨씬 길고, 꼬리가 달렸고, 털도 있을 뿐. 아, 훨씬 뛰어난 이해력과 지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는, 아주 예민하고, 아주 똑똑하고, 아주 생각이 많으며, 외모가 다른 인간이다. 그렇게 딱히 차별점이 없었기에, 차상문이 우리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점이 큰 설득력을 얻는다. 만약 그에게 지능말고 인간보다 우월한 점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레푸스 사피엔스' 토끼 영장류들은 아마도 인간 사회에서 완벽하게 축출당했을 것이다. 차상문의 모습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지식층' 의 삶을 닮아있다. 우리가 역시 아주 잘 아는 말 중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아는 만큼 보인다." 차상문은 뛰어난 지능과 기억력을 통해 수많은 서적들을 접했고, 그 안에 녹아있는 수많은 지식들을 갈무리 할 수 있었다. 아는 것이 많아진 그의 눈에는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들, 인간들간에 행하는 비이성 비도덕적 행위들. 결국 스스로 자멸케하는 파괴적인 행동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찬란한 것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70~90년대의 한국 사회. 보이는 것을 못 본 척 하고,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해야만 했던.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할때,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할때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 시기에, 차상문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어떤 말을 했을까. 

 

작가는 시종일관 위트넘치는 필체와 흡인력있는 문장으로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솔직히 김남일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해 보았는데, '아니, 내가 왜 이런 작가를 이제 처음 읽었지?' 싶었다. 시간과 사건, 인물들을 조각냈다가 다시 조립하는 능력이 정말 엄청나다. 개인적으로 이런 느낌은 천명관 작가의 '고래' 를 보고 처음 느꼈었는데, 여기저기 막 집어 던진 조각들이 어느새 큰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는 느낌이다. 아마 이런 기법에도 뭔가 이름이 있을것도 같은데...무지해서 잘 모르겠다..ㅋㅋㅋ  개인적으로 '작가' 의 재능이란 이런 것인 듯 하다. 사건, 시간, 장소, 인물. 이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구분해내는 능력.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의 큰 틀속에서 맞춰나가는 능력.

그러니까...

한 10000피스짜리 퍼즐 더미 속에서 아무 조각이나 하나 집어도, 그게 어디에 들어가는 조각인지 알아채는 능력이랄까.

'천재토끼 차상문' 의 도입부분이 그런 느낌이다. 10000피스짜리 퍼즐을 시작하는 듯 한 느낌. 뭔가 조각을 들긴 들었어. 거기 그림이 있긴 있어.

그래서 '아, 이거 퍼즐이구나' 한 기분. 앞으로가 기대되고, 완성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두근두근. 그런 느낌.

게다가 작가의 필력도 정말 엄청나다. 이 말장난이라고 해야하나, 글장난이라고 해야하나, 무튼 인과 관계의 고리 안에서 단어와 단어를 이어내고 거기에 사건과 감정을 담아 독자들의 마음은 물론, 호흡도 빼앗아, 심지어 문장을 읽다가 헐떡거리게 만드는, 이 엄청난 필력... 그럼에도 그 안에 미사여구나 불필요한 잡 단어가 거의 없이, 명료하게 저자의 메시지가 들어있다는게 더 신기할 정도였다. 이 문장 읽는 맛도 엄청 쏠쏠해서, 이야기의 흐름이나 서사 따위는 다 버리고 문장에만 집중하고 싶을 정도였다. 위트 넘치고, 풍자와 은유가 세련되게 들어있는 멋진 문장들.

 

역시 혼란스러운 차상문은, 하지만 자연스럽게 시절을 살아간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거대한 시간의 흐름. 역사 속에서 한 명의 인간은 무력하다. 무능하다. 아무리 천재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한명의 개인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천재적인 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도 전쟁 속에서 무지한 병사에 의해 죽어갔고, 천재적이었던 시인 이상도 식민치하에서 무력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 뿐이랴. 나치 게쉬타포가 살해한 유태인들 중 그러한 천재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일본 731부대가 인체실험의 재료로 쓴 사람들 중에는 없을까. 911테러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미국이 쏟아부은 폭탄들 밑에서 죽어간 수많은 아프가스탄, 이라크, 사람들. 죽고 죽이기를 그치지 않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북한군이 입원실에 모아놓고 살육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있던 수많은 환자들. 광주의 그 날, 죽임을 당한 광주 지서의 경찰들, 그리고 도청 앞에 모여있는 수많은 시민들. 군부독재를 타도하자고 소리지르던 대학생 얼굴로 날아든 최루탄, 그리고 무수한 총알들. 외침들. 비명들. 피들.

 

'역사' 라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개인은 그렇게나 무력하다. 보도블럭 사이를 흐르는 피의 강에 작은 몇방울의 피를 보태는 수밖에.

 

지구에 '민주주의' 라는 시스템이 자리잡은건 얼마나 되었을까?

소위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시스템의 한계에 부닥쳤다. 유럽 서구사회는 누구나 보기에도 한 눈에 확연한 계급을 완성했다. 소위 민주주의라고 하는 정부는 이 계급사회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바닥에 깔려있는 계급은 그 계급대로,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윗 계급으로 상승하려는 욕구 자체를 제한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민주주의 시스템이 인류에게 호응받은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그 자체에 충실했던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 자체를 철저하게 제한하고 제어하려는 시스템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유물론과 사회주의 시스템이야말로 아이러니하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음은 타당할지도 모른다. 허나, 인간은 욕망을 제어할 수 없다. 모든 인간에게서 욕구라는 부분을 거세시키지 않는 한 말이다.

 

'어슐러 르 귄' 이라는 유명한 작가는 '빼앗긴 자들' 이라는 작품을 통해 사회주의가 완벽하게 작용하는 세계를 그려낸 적이 있다.

추구할 수 있는 욕망과 추구해서는 안되는 욕망이 철저하게 제한되어있는 세상. 그 세상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자리잡은 우리 사회보다 훨씬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어슐러 르 귄 역시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싸워서 쟁취할 수 있는  권리' 일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싸움을 걸 수 있는 자유' 가 있다.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가 그것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결합될 때 가장 큰 시너지를 발휘한다. 싸워서 돈을 쟁취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뭐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

일견, 민주주의란 결국 원시시대랑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결국 '약육강식' 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보다 원시적이고 비 이성적이며, 비 도덕적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버릴 수 없다. 영원히 버리지 못할 것이다. 군국주의나 사회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구는, 인류는 결코 한 체제 안에서 공존할 수 없을 것이다.

 

차상문이 결국은 토굴 안에 들어가고, 그 입구를 벽돌로 발라버린 것은 결국 '인류는, 세상은 변할 수 없다' 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상문이 토굴 안에 들어가면서 입구를 벽돌로 발라버리는 장면은, 비록 차상문은 불교적인 단어를 입에 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린 뒤 굴 무덤안으로 인도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보였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거대한 돌문으로 막힐 토굴 안에 매장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근심하며 스스로 벽돌로 쌓아 막은 토굴 안에 들어간 차상문. 둘 모두 인류를 걱정했다는 점만이 같지만 말이다. 묘하게 연상되었다.

이 작품속에서 집중해 보아야 할 부분은 차상문의 삶이 아니라, 차상문을 겪어간 사람들의 삶이다.

천재적이며 세상 모든것을 걱정하는 토끼 영장류의 주변에서 위성처럼 돌다 간 평범한 사람들.

그들이 보는 차상문은 어떤 사람, 아니 어떤 토끼였을까??

 

 

아무리 걱정하고, 조심하고 아낀다고 하더라도, 글쎄. 인간. 인류. 언젠간 멸종하지 않을까??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니까.

공룡이 멸종하고, 세상에 빙하기가 오듯, 지구상의 모든 자연과 동물들을 절멸시키고 결국엔 인류 또한 멸종할 것이다. 뭐, 2012년에 외계인이 처들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땅이 뒤집히거나, 바다가 대지를 뒤엎거나 등등.

하지만, 지구는 여전할 것이다. 몇천만년? 몇억년?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황폐화된 지구는 또다시 생명들이 창생하는 푸른 별로 변할 것이고, 수많은 생명체들 중에 또다시 인류와 같은 지성체가 등장할 것이다. 그들은 지구 위에서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배겨낼 수 있을까? 만년? 이만년? 그들은 또 그렇게 똑같은 일을 영원히 되풀이할 것이다. 어쩌면, 다른 행성으로 건너갈 수도 있겠지만, 그 행성에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인간의 생은 고작해야 100년이다. 지구의 역사를 생각할 필요도 없고, 지구의 미래를 생각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지금 우리의 생. 우리 자식들의 생. 우리 자식의 자식들. 딱 삼대 정도만 생각해봐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비슷한 시기에 터진 구제역 파동을 보며 가슴 한켠이 쓰라렸다. 생매장되는 동물들, 지하수에서 솟아나온다는 핏물들.

조류독감의 창궐, 광우병의 습격. '암' 이나 '에이즈' 가 인간이 '진화' 하는 과정에 생긴 병이라면,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광우병 역시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병이다. 사냥해서 먹는것도 모자라서 그들을 죽이는 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이. 다른 종족을 말살시키는 병을 만들어냈다.

 

이제 정말 인간은 '이 동물만도 못한 놈아' 라는 욕을 들어먹을 만한 정도가 되었다.

어떤 부모들은 키우는 고양이나 개를 자식보다 더 사랑한다.

과연, 무엇이 인간다운 것이며, 어떤 삶이 인간다운 삶일까?

 

고민 고민 하다 결국,

"우주 생성의 비밀과 만유의 모순을 끝도 없이 파헤치다 최후의 순간까지 사라져가는 생물종에 대해 안타까운 관심을 거두지 못한 한 토끼 영장류에 대해 새삼 극진한 경외감을 표하게 되는 것이지만, 남북이 엄연히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배들이 불러 별 희떠운 소리도 다한다며 어디 한번 쫄쫄 배를 곯아보면 그 소리가 나오겠냐며 비판하는 이들도 수두룩하니, 한갓 가담한설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다." p. 369 [천재토끼 차상문]김남일, (2010) 

는 작가의 의견에 박수치며 동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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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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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망각. 잊는다는게 왜 선물일까? 이 질문은 '죽음' 이란 축복일까, 저주일까 라는 질문과 상통하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상황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모든 것은 비교를 통해야만 인식이 가능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 무의미할 것이다. 영원히 사는데, 오늘이 무에 소중할까? 시간의 개념도 나이의 개념도 불필요 할 것이다.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산 위의 바위와 다를 바 없어질 것이다. 기억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언젠가 사라지기에 소중하다. '글' 이란 애초에 망각 때문에 만들어 졌지 않은가? 인간에게 영원한 기억력이 있었다면, 글이란, 문장이란 애초부터 태어나지도 않았을 터다.
죽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고, 망각하기 때문에 기억은 아름답다. 세상에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를들면, 이런 상황. 죽어서 저승사자를 만났는데, 저승사자가 이렇게 물어보는 거다.
"이승에서의 기억들 중 단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뭘 가져갈래?? "
(뭐, 그렇게 말한다면, 그 기억이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가져갈 수 있는건지,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인지, 여러사람의 기억인건지,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는 않는지 등등....꼬치꼬치 따져보겠지만, 그냥 가정이니까 너무 디테일하게 따져보지는 말자.)
작가의 자전적 느낌이 물씬 드는 '7번 국도' 는 그 질문에 대한 답과도 같다.
 
'나' 와 '재현' 그리고 '세희' 에게 얽혀있는 청춘의 이야기.
삶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거치는 시절에 대한 이야기.
삶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짐작도 못할 시절, 삶이라는 유리병을 무언가로든 채우기 위해 안달을 하던 시기의 이야기.
그 안을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던 그 시절의 이야기.
 
'7번국도' 로 대변되는 길은 결국 삶이라는 긴 길이다.
우리는 삶의 길을 따라가며 동반자를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잊는다. 미워하고 미움을 잊고, 기뻐하고 기쁨을 잊고.
길은 수갈래로 갈라지기도 하고, 다른 길과 모여지기도 한다. 수많은 교차로들이 있고, 이정표들도 있다. 포장이 덜 된 곳도 있고, 길 양 옆으로 너른 아스팔트 대지가 펼쳐져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해안이 보이기도 하고, 가끔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하고 떨어진 동전이나 지폐를 줍는 횡재를 하기도 한다.
지루하고 고된 삶의 길을 걷다 보면 의미도 잃고 이유도 잃어버리게 된다. 사실 삶의 대부분이 그렇다. 인간은 고통은 오래 간직하고 행복은 쉬이 망각하기 때문에 삶 대부분은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럴때, 우리는 과거를 양분삼는다. 추억이란 이름의 연료를 태우며, 오늘이라는 현재를 살아갈 힘을 얻고, 희망을 되새김질 한다. 그것이 아름다운 추억이든, 고통스러운 추억이든, 그것들은 '다 지나갔다' 는 사실만으로 삶의 원동력이 되고 희망이 된다.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란 작품을 통해서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이나 청소년을 위한 고전선집, 노벨상 문학전집들 중 재밌어 보이는, 그리고 잘 읽힐 것 같은 책들을 주로 골라 읽었더랬고, 한국 소설은 주로 변경, 태백산맥, 아리랑, 광개토 대제, 대륙의 한...등과 같은 대하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물론 만화책을 훨씬 더 많이 봤고. 대학때는 만화책을 공부하듯 읽어제끼던 시절이었고, 손에는 책보다 크로키북이 들려있었다. 군 전역후, 만화과로 복학했을땐 시나리오 작법서나 영화연출서적, 각종 만화기법 책들을 끼고 살았고, 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베스트 셀러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일본 장르소설 작가가 지겨워 졌을때 폴 오스터 작가 와 김연수 작가를 동시에 만나게 되었다.
 
평소, 책 두권 정도를 동시에 시작하는 버릇 탓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은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 과 '뉴욕 삼부작' 사이에 걸쳐서 읽었더랬다. 그래서인지 난 언제나 '김연수' 라는 세 글자에 '폴 오스터' 라는 이름이 겹쳐친다. 두 작가분의 스타일도 통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서술과 결국은 이러한 여러 이야기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생동감 넘치는 플롯의 구성능력 또한 엄청나지 않은가. 섬세하고 감정이 풍부한 문장들도 두 작가의 장점이기도 하다. 김연수 작가의 책을 두세권 더 읽고 나서야, 비로소 '오- 좋다!' 라고 외치게 되었더랬다.
 
'7번 국도' 는 김연수 작가의 초기작 답게 뒤에 다른 작품들을 통해 다시 발현되는 장면들이 눈에 띄어 즐거웠다.
또한 위에도 언급했던 시간과 공간의 사이를 비집고 뒤틀고 엎어치면서 이야기의 중심을 유지하는 균형감각은 역시 그냥 타고난거였구나, 싶기도 했다.
책을 앞으로 넘겼다, 다시 원래 읽던 자리로 돌아갔다를 반복하면서 그 읽는 맛도 상당히 즐거웠다.
 
나의 이십대를 추억해보면, 아둥바둥 아둥바둥, 필씅!! 입대를 명 받고,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필씅! 공모전, 떨어지고, 졸업하고, 또 떨어지고.
여자친구, 사귀자마자 채이다니, 이게 뭔일인고, 하기도 전에 컬러리스트의 세계로 빠져들어 일하고 또 일하고, 고료 체납되다 떼어먹히고, 일 있다가 없어서 단돈 몇만원으로 한두달 버티고, 그나마 요즘은 간신히 제대로 받기 시작하고. 자리 좀 잡아서 고료도 좀 오르고, 일도 꾸준히 들어오고.
그래도, 나도 언제나 사랑했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든, 짝사랑이라도 했다. 헤어진 연인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기도 했고, 내내 좋아하다가 고백 타이밍을 못 맞추고 잊기도 했고, 고백했다가 채이기도 하고, 어떻게든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사랑할 거리를 만들어서 반하곤 했다.
 
작품 말미에 있는 '고양이 킬러' 의 이야기가 그래서 더욱, 더욱 더욱 더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는 단 하나의 희망을 가지기 위해 사랑했다...지금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단 하나의 희망을 위해 서로 사랑할 것이며, 당신이 다시 복수를 시작한다고 해도 그 단 하나의 희망을 위해 서로 사랑할 것이다. 거기 의미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다. "  -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2010) p. 203~4 -
 
앞길이 막막했고, 고난과 좌절뿐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했다.
하지만, 사랑할수록 스스로는 더 고통스러워졌고, 현실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짝사랑만 하기로 했다.
나의 20대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더 고통스러운 짝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고통들을 양분삼아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단절시키고, 나의 마음은 내 안쪽으로 더욱 갈무리 했으며, 넓은 체육관에 앉아 묵직한 쇳덩어리로 육체를 혹사시키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고립. 단절. 짝사랑은 그 증거이자 방법이었다. 상처 받지 않기위해 혼자 사랑했고, 상처 주지 않기 위해 혼자 사랑하려 했다.
하지만, 고립되고 단절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난 내 자신을 믿지 못했다. 내 현실을 믿지 못했다.
 
작품 안에서는 '아무 쓸모 없는 일을 하는' 우체부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7번국도를 여행하는 두 남자에게 '삶의 의미' 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뒷주머니에 손수건을 넣고 다니듯, 젊은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 하나 정도" 라며 풀어준 이야기가 바로 '고양이 킬러' 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제 나도 내 삶속에 희망을 품는다.
어제가 2010년이었고, 오늘이 2011년 이라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듯이 내 삶속에 희망이 들어온다고 뭔가가 당장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내 앞길은 여전히 막막할거고, 내 작품은 번번히 공모전에서 떨어질거고, 내 그림은 여전히 비례가 안 맞을테고, 내가 만드는 이야기들은 재미 대가리도 없을 터다. 또 누군가를 마음에 품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릴거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헬스장에서 에로틱한 소리를 내며 쇳덩이들을 애무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희망을 갖고,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고백하고, 채이면서 새로운 청춘을 맞이하련다.
 
"서로 연결되지 않는 길을 죽은 길이라고 말할 수 있듯이, 제아무리 숭고하다 한들 고립돼 있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라오."
-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2010) p. 144 -
 
 
P.S
근데,
책이 짧아서 아쉬웠다.
이 작품은 김연수 작가의 장편들 중 눈에 띄게 짧은것 같다. 책에 빈 공간도 많고. 얇잖아!!!!!! 글자가 적어!!!!!!!
여기 신작 하나 추가요!!! 플리즈!!! 하악하악!!! 기다리는 동안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을 또 펴들게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재현과 세희의 다른 버전 이야기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 아닐까 싶다.
은근히 연관성 있어보이는 장면들이 꽤 등장하니, 김연수 작가의 팬이라면 한번 찾아보는 것도 즐거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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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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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단편은 반드시 뚜렷한 기승전결이 압축되어 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있어야 했고, 살아있는 인물들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우러지는 간결한 이중 삼중의 플롯들이 겹쳐 있어야 했고, 뒷머리를 짜르르 울리는 반전도 있어야 했다. 문장은 주제와 메시지를 중심으로 응결되어 있되, 단어들은 적당하게 중의적이어야 했다. 플롯에 따른 인물들은 때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야 했고, 인물에 따른 플롯 또한 때론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야기는 완벽하게 닫혀야만 했다. 작품의 시작을 알리는 첫 글자에서부터, 끝을 알리는 마침표 하나까지. 군더더기가 없이 꽉 맞물려 있어야 했다.

내가 생각했던 단편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각기 다른 돌들이 마치 테트리스 게임처럼 완벽하게 계산된 틀 안에서 꽉꽉 맞물려진 모양.

장편이 긴 호흡의 자유로운 이야기라면, 단편은 순식간에 숨통을 틀어막는 일격 필살과도 같은 정련된 날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긴 여운도 괜찮았다. 이야기의 구조상으로는 정확하게 짜여있지만, 의도적으로 뒷문만 열어놓은 모양새. 결말까지 가는 인과관계가 차근차근 맞아떨어지며 결말에 가서는 보다 여러 의미로 재해석 될 수 있는 활짝 열린 결말.

 

하지만, 그런 편견들은 독서의 폭을 아주 약간 넓히는 순간 와장창 부서져 버렸다.

삶이란 언제나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래서 누가 어떻게 될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어떤것도 완결되지 않는다. 때론 그 어떤것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삶 자체가 종결되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종결일 뿐, 완결일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살면서 벌려놓은 수많은 일들은 대를 이어 어떤 누군가가 끊임없이 연결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다. 영원히 이어지고, 때론 영원히 되풀이 된다.

 

[로봇] 에서 수경은 자신이 '로봇' 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와 잠깐동안 만남을 갖는다. [로봇] 은 완전하게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복합적이며, 가장 혼란스러운 감정이다. 수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만큼의 사람을 사랑을 회피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젠가 누구에겐가 어떻게든 찾아든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로봇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사람을 위해 죽을 수도 있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삶 속에서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위험한 순간일수도 있다.

 

사랑은 때론 이유없는 집착을 불러오기도 한다. [여행] 에서 한선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둔 수진과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옛 연인이. 물론 꽤나 깊은 관계였던 남자이긴 하지만, 결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집요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한선은 인생에 중요한 무언가를 그녀가 가지고 갔다고 생각한다. 그 공허함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 연애란 자기 마음을 통째로 남에게 들이 미는것이다. 줘버리는 것이다. 오랫동안 연애를 못하는 남녀들은 대부분 자기 마음을 남에게 맡기기가 두려운 경우가 많다. '이 사람에게 내 마음을 줘도 될까? 내 마음을 받아줄까? 내 마음을 맡겨도 될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일까? 줬다가 다시 잘 찾아올 수 있을까??' 한 번 줘 버린 마음은 온전히 되찾아올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연애가 중간에 깨지고 다시 남남이 되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부부가 되든. 마음을 떼어 주는 순간, 삶은 더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때문에 사람은 사랑했던 대상에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집착하게 된다.

 

[악어] 는 '재능' 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술의 세계는 재능의 세계이다.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처럼 될 수 없다. 내가 하루에 한시간만 자고 미친듯이 수영을 한다고 해도 박태환을 따라잡을 수 없다. 사실 하루에 몇시간씩 만화를 그렸지만, 일찌감치 데뷔하는 만화작가들의 발 뒤꿈치에도 못 미친다. 예술은 분명 타고나는 사람의 세계이다. 재능이란 말 그대로 태어나면서 부터 갖게 되는 일종의 능력이다. 왜? 왜 나에겐 없고 그에겐 있을까? 어째서?? 하지만, 아무리 의문을 갖고 발버둥치고 노력을 해도 그들의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없다. 기술은 연습에 따라 능숙해질 수 있지만, 센스는 결코 연습할 수 없다. 예술의 세계는 언제나 소수의 천재들이 발전시켜 나간다. 아니, 어느 분야이든, 세상은 언제나 소수의 천재들이 발전시켜 나간다.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랑과 증오, 복수와 만남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김영하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도 리얼한 서술로 펼쳐진다.

위의 세 작품들 말고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조] 와 [퀴즈쇼], [오늘의 커피] 였다.

딱 한쪽(!!) 분량의 작품인 [명예살인] 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조] 의 경우는 김영하 작가의 장편들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관음적인 느낌을 주는 서술도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뒷통수 치는 반전에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인상도 마음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퀴즈쇼] 는 꽤 인위적인 장치들이 대단히 흥미롭게 맞물려 있었다. 마치 김영하 작가가 작정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보여질 정도! 게다가 꽤나 해피한 엔딩도 오히려 김영하 작가였어서 굉장히 신선했다. 소설속의 소설을 보는 느낌이랄까? 온통 리얼리즘으로 가득한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통속적인 드라마 한 편이 끼어있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소설들의 배치 또한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앞 뒤에 배치되어있는 '바다 이야기 2' 와 '오늘의 커피' 모두 그냥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 마냥 리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커피]  역시 짤막한 작품이었는데, 김영하 작가가 가지고 있는 플롯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에 감탄을 더할 수 밖에 없게 했다.

아니 어쩜,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재밌게 풀어낼 수 있지?? 할 정도.

아...역시...이래서 재능은 재능이구나... 하는 감탄만이 신음처럼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감상을 적어나가다 보니, 책에 수록되어있는 작품들을 다 언급할 것 같다.

 

최근 한국 문학의, 아니 개인적인 생각으로, 세계 문학의 흐름은 '판타지'이다. 누가 얼마나 더 절묘하게 비트느냐.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더 진짜같이 그려내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판타지리얼리즘' 이라는 애매모호한 합성단어로 표현하기도 하는 듯 하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얼마나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독자들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헛갈릴수록 좋다. 현실이 점점 더 싸이코틱해 지면서 이런 현대문학의 흐름도 점차 거세지고 있다. 끊임없이 팩션이 솟아나오고, 몇 년 간 발표되는 젊은 작품들은 문학성과 대중성, 거기에 참신한 발상까지 고루 갖춘 '판타지리얼리즘' 에 입각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확실한건, 그 모든 근간은 결국은 리얼리즘이라는 사실이다.

현실을 글로 녹여내지 못하는 작가는 결코 환상과의 사이에서 균형잡힌 줄타기를 할 수가 없다.

수많은 대가들이 여전히 정통 역사물에 사명을 갖고 있으며,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영하 작가는 내가 알기엔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작가군 중 한명이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가슴 깊숙히 묻어놓은 수많은 속물스러움들을 표면으로 어떻게든 끌어 올리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집도 여전하다. 한결 능란해진 유머와 위트, 그리고 리얼한 묘사들 사이로 바득바득 속물스러움들을 찾아낸다. 울렁거리는 목을 움켜잡지만, 꾸역꾸역 입 밖으로 쏟아낸다. 내가 쏟아낸 나의 본성들을 바라보며, 다행히 역겨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냥, 나도 사람이고, 결국 나도 속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작가와 함께,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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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불로문의 진실 - 다시 만난 기억 에세이 작가총서 331
박희선 지음 / 에세이퍼블리싱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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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궁인 동시에, 가장 한국다운 정원이 있는 곳이다.

빽빽하고 빡빡하게 우뚝우뚝 솟아있는 나무들 사이에 분명 인위적이지만,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는 길들이 나 있고, 아름다운 단청을 지닌 건물들이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확실히, 그곳은 공기부터 다르다. 창덕궁 주변만 가도 공기가 다르다. 무성한 수풀은 담장 위로도 거침없이 뻗어있고, 자동차의 매연이 느껴지지 않을정도로 청아한 공기를 내뿜는다.

한국에 고궁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디나 통일성을 해치는 듯 한 구조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수 세월동안 전쟁이나 재해로 소실된 부분을 증축하거나, 일제 강점기 일본의 만행으로 통째로 드러내지거나, 갖다 심어진 건물들도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불로문이나 청의정, 기암괴석들 처럼 의도적으로 세워진 건축물들도 있다.

 

이야기는 일제시대에서 시작된다.

경성대학 법학부에 재학중이던 청년 시형은 우연히 일본 730부대의 대장 와타나베를 습격하는 독립군들을 목격하게 된다. 와타나베를 암살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서류가방을 빼앗는데 성공한 독립군 무리. 하지만, 시형은 수많은 일본군과 730부대의 부대장인 겐조에게 쫓기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시형은 일본군에게 쫓기던 독립군 중 한명이었던 인국과 마주치게 되고, 엉겁결에 시형은 인국이 가지고 있던 와타나베의 서류가방을 건네받게 된다. 서류 가방 안에는 오래된 고서인 '동굴궐지'  한 권과 괴이한 문양을 본뜬 탁본 한 장, 그리고 말라 비틀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의 뿌리가 들어있었다. 시형은 이렇게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마칠 퍼즐처럼 많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듯한 작품인 '불로문의 진실' 은 '다빈치 코드' 의 열풍 이후 우리나라를 휩씁고 지나갔던 '팩션' 이라는 장르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수 많은 작품들이 팩션이라는 이름 아래 솟아났다 사라졌지만, 개인적으로 다빈치 코드가 제시했던 '팩션' 의 정형에 가장 부합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과거와 역사를 아우르는 설정과 시간을 넘나드는 방대한 퍼즐, 얼키고 설킨 인간관계. 그리고 그것을 짜 맞춰 나가는 과정은  뛰어난 어드벤쳐 게임처럼 논리적이고 인과적으로잘 맞아 들어간다. 게다가 요소요소에 숨겨둔 캐릭터들 또한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그런 훌륭한 아이디어들이 적재적소에서 명민하게 활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먼저, 스토리 텔링의 문제를 거론해야 겠다.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작품은 플롯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단순하고 일관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보여준다. 솔직히, 그냥 긴 시놉시스라 봐도 무방하다. 중간중간 들어있는 과거의 장면들을 빼고 본다면, 메인 스토리 텔링은 그냥 '대화' 이다. 주인공이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또 다시 찾아가서 대화를 나눈다.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주인공의 행보나 심경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않는다. 사건의 흐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냥 퍼즐들이 평이하게 죽 하나하나 맞춰져 나간다. 극적인 효과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과거 일화들은 오히려 좀 낫다.

 

진시황대 서불의 이야기와 조선조 숙종의 이야기가 한 편씩 끼어 있는데, 서불과 숙종의 이야기엔 오히려 몰입감이 강하다.

그 작은 두 토막의 이야기들에는 확연히 플롯이 존재한다. 독자의 호흡을 빼앗고 흥미를 유발시킬만한 요소들이 잘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 또한 메인 스토리의 흐름에는 오히려 독이 된다.

이 이야기들을 주인공이 찾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난데없는 과거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주인공 시형과 그가 살아가는 일제 강점기의 이야기엔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설명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메인 스토리에 몰입되다가도 작가는 난데없이 독자들을 타임슬립 시키는 것이다. 독자들을 완벽하게 이야기에서 제외시켜 버림으로서 작품은 또 다시 흡인력을 잃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캐릭터는 독자를 안내하는 동시에, 독자를 이야기속으로 끌어 들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플롯이 빈약해도 캐릭터가 강렬하면 재미있는 작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플롯이 아무리 제 역할을 다 한다 해도 캐릭터가 빈약하면 작품은 그만큼 더 재미가 없어진다. 독자들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캐릭터를 통해 감정을 이입하고, 일종의 간접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로문의 진실] 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지, 이야기속으로 독자들을 끌어 들이는 데에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오히려 캐릭터들 또한 이야기에 밖에 머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떠한 갈등이나 고민없이 퍼즐들을 풀어나가고 있다. 그냥 누군가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답이 툭툭 나온다. 그 누군가를 찾아 나가는 과정도, 그냥 어떻게 알아서 간다. 가면, 거기 답을 잘 아는 사람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마치, 수학 문제집을 풀다가 막히면 바로 해답지를 보는 듯 하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과정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빈약한 캐릭터들은 빈약한 플롯과 만나 아무런 매력이 없어져 버린다. 갈등을 겪지 않는 캐릭터는 독자들에게 어필 할 수가 없는것이 당연하다.

이들의 성격조차 작가의 서술 한두마디로 설명되고 있다.

"시형은 어떠어떠한 성격의 어떤 인물이었다. 인한은 이런이런 성격이었다."

이렇게 말이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 반전들이 그다지 충격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캐릭터들에 이입이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기에 인물을 통한 반전이 독자들의 감정에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것이다.

차라리, 이야기 속에 짜투리로 등장하는 서불과 숙종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설정이 메인스토리가 되어버린 격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불로문의 진실] 이 가지고 있는 소재들은 [다빈치 코드] 의 그것보다 나으면 나았지 부족할 건 없었다.

건축물, 괴이한 문양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고궁인 창덕궁. 거기에 진시황과 숙종을 아우르는 폭넓은 역사. 불로초라는 매력적인 식물.

조금만 더 작가가 욕심을 부리고, 플롯과 캐릭터에 공을 들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한국형 팩션은 수 년 전 등장했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빈치 코드] 의 열풍보다도 훨씬 예전부터 우리의 작가들 또한 역사적인 픽션을 시도해 왔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 나라의 역사에든 미스테리가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이 '이상' 이라는 조금 매니악한 인물을 포커스에 맞추고 있었지만, [불로문의 진실] 은 위에도 언급했듯,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열광할만한 소재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쉽고, 또 아쉽다.

차라리 이 작품이 이렇게 단번에 책으로 출간되었을 게 아니라, 신춘문예나 여러 공모전을 통해 많은 심사위원들에 눈에 비춰지고, 그로 인해 다듬어질 기회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올해, 아니 최근 몇년간 내가 읽었던 몇 권 안되는 한국 문학들 중 가장 아쉬운 작품으로 꼽아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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