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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과연 인간에게 '객관적인 시각' 이라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들 중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싶어하는 것만 본다.' 나 역시 이 말에 상당히 동의한다. 그나마 이 세상에 가장 객관적인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학일 것이다. 자연현상은 물론 사람의 마음까지도 '숫자' 라는 변하지 않는 값을 통해 추론하고자 하는 학문. 수학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텅 빈 상태인 '0' 을 만들 수 있지만, 현실에서 완전히 텅 빈 공간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현실은 화학과 물리학, 철학까지 혼돈스럽게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수학이란 단지 현실을 약간 더 단순하게 객관화 하기 위해 고안된 학문인 셈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아주 약간이라도 더 쉽게 살기 위한 것이다.
세상을 숫자로 풀이하듯, 문학에서도 인간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시도는 꾸준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위치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터다. 우선, 인간의 몇가지 특성들이 배재되어있는 존재를 만들어 보면 된다. '영양소' 대신 다른 것들을 섭취하면서 생명을 유지한다던지, 노화되지 않는다던지, 필멸이 아닌 영원의 존재라던지, 육체가 없이 정신만 있다던지, 입을 열어 공기의 떨림으로 의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텔레파시 같은 의식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다던지. 그런 관점에서 작품의 주인공인 '차상문' 은 인간과 인간 사회를 객관화 시키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차상문은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귀가 길고, 다리가 팔보다 훨씬 길고, 꼬리가 달렸고, 털도 있을 뿐. 아, 훨씬 뛰어난 이해력과 지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는, 아주 예민하고, 아주 똑똑하고, 아주 생각이 많으며, 외모가 다른 인간이다. 그렇게 딱히 차별점이 없었기에, 차상문이 우리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점이 큰 설득력을 얻는다. 만약 그에게 지능말고 인간보다 우월한 점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레푸스 사피엔스' 토끼 영장류들은 아마도 인간 사회에서 완벽하게 축출당했을 것이다. 차상문의 모습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지식층' 의 삶을 닮아있다. 우리가 역시 아주 잘 아는 말 중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아는 만큼 보인다." 차상문은 뛰어난 지능과 기억력을 통해 수많은 서적들을 접했고, 그 안에 녹아있는 수많은 지식들을 갈무리 할 수 있었다. 아는 것이 많아진 그의 눈에는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들, 인간들간에 행하는 비이성 비도덕적 행위들. 결국 스스로 자멸케하는 파괴적인 행동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찬란한 것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70~90년대의 한국 사회. 보이는 것을 못 본 척 하고,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해야만 했던.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할때,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할때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 시기에, 차상문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어떤 말을 했을까.
작가는 시종일관 위트넘치는 필체와 흡인력있는 문장으로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솔직히 김남일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해 보았는데, '아니, 내가 왜 이런 작가를 이제 처음 읽었지?' 싶었다. 시간과 사건, 인물들을 조각냈다가 다시 조립하는 능력이 정말 엄청나다. 개인적으로 이런 느낌은 천명관 작가의 '고래' 를 보고 처음 느꼈었는데, 여기저기 막 집어 던진 조각들이 어느새 큰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는 느낌이다. 아마 이런 기법에도 뭔가 이름이 있을것도 같은데...무지해서 잘 모르겠다..ㅋㅋㅋ 개인적으로 '작가' 의 재능이란 이런 것인 듯 하다. 사건, 시간, 장소, 인물. 이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구분해내는 능력.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의 큰 틀속에서 맞춰나가는 능력.
그러니까...
한 10000피스짜리 퍼즐 더미 속에서 아무 조각이나 하나 집어도, 그게 어디에 들어가는 조각인지 알아채는 능력이랄까.
'천재토끼 차상문' 의 도입부분이 그런 느낌이다. 10000피스짜리 퍼즐을 시작하는 듯 한 느낌. 뭔가 조각을 들긴 들었어. 거기 그림이 있긴 있어.
그래서 '아, 이거 퍼즐이구나' 한 기분. 앞으로가 기대되고, 완성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두근두근. 그런 느낌.
게다가 작가의 필력도 정말 엄청나다. 이 말장난이라고 해야하나, 글장난이라고 해야하나, 무튼 인과 관계의 고리 안에서 단어와 단어를 이어내고 거기에 사건과 감정을 담아 독자들의 마음은 물론, 호흡도 빼앗아, 심지어 문장을 읽다가 헐떡거리게 만드는, 이 엄청난 필력... 그럼에도 그 안에 미사여구나 불필요한 잡 단어가 거의 없이, 명료하게 저자의 메시지가 들어있다는게 더 신기할 정도였다. 이 문장 읽는 맛도 엄청 쏠쏠해서, 이야기의 흐름이나 서사 따위는 다 버리고 문장에만 집중하고 싶을 정도였다. 위트 넘치고, 풍자와 은유가 세련되게 들어있는 멋진 문장들.
역시 혼란스러운 차상문은, 하지만 자연스럽게 시절을 살아간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거대한 시간의 흐름. 역사 속에서 한 명의 인간은 무력하다. 무능하다. 아무리 천재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한명의 개인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천재적인 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도 전쟁 속에서 무지한 병사에 의해 죽어갔고, 천재적이었던 시인 이상도 식민치하에서 무력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 뿐이랴. 나치 게쉬타포가 살해한 유태인들 중 그러한 천재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일본 731부대가 인체실험의 재료로 쓴 사람들 중에는 없을까. 911테러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미국이 쏟아부은 폭탄들 밑에서 죽어간 수많은 아프가스탄, 이라크, 사람들. 죽고 죽이기를 그치지 않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북한군이 입원실에 모아놓고 살육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있던 수많은 환자들. 광주의 그 날, 죽임을 당한 광주 지서의 경찰들, 그리고 도청 앞에 모여있는 수많은 시민들. 군부독재를 타도하자고 소리지르던 대학생 얼굴로 날아든 최루탄, 그리고 무수한 총알들. 외침들. 비명들. 피들.
'역사' 라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개인은 그렇게나 무력하다. 보도블럭 사이를 흐르는 피의 강에 작은 몇방울의 피를 보태는 수밖에.
지구에 '민주주의' 라는 시스템이 자리잡은건 얼마나 되었을까?
소위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시스템의 한계에 부닥쳤다. 유럽 서구사회는 누구나 보기에도 한 눈에 확연한 계급을 완성했다. 소위 민주주의라고 하는 정부는 이 계급사회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바닥에 깔려있는 계급은 그 계급대로,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윗 계급으로 상승하려는 욕구 자체를 제한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민주주의 시스템이 인류에게 호응받은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그 자체에 충실했던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 자체를 철저하게 제한하고 제어하려는 시스템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유물론과 사회주의 시스템이야말로 아이러니하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음은 타당할지도 모른다. 허나, 인간은 욕망을 제어할 수 없다. 모든 인간에게서 욕구라는 부분을 거세시키지 않는 한 말이다.
'어슐러 르 귄' 이라는 유명한 작가는 '빼앗긴 자들' 이라는 작품을 통해 사회주의가 완벽하게 작용하는 세계를 그려낸 적이 있다.
추구할 수 있는 욕망과 추구해서는 안되는 욕망이 철저하게 제한되어있는 세상. 그 세상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자리잡은 우리 사회보다 훨씬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어슐러 르 귄 역시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싸워서 쟁취할 수 있는 권리' 일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싸움을 걸 수 있는 자유' 가 있다.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가 그것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결합될 때 가장 큰 시너지를 발휘한다. 싸워서 돈을 쟁취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뭐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
일견, 민주주의란 결국 원시시대랑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결국 '약육강식' 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보다 원시적이고 비 이성적이며, 비 도덕적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버릴 수 없다. 영원히 버리지 못할 것이다. 군국주의나 사회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구는, 인류는 결코 한 체제 안에서 공존할 수 없을 것이다.
차상문이 결국은 토굴 안에 들어가고, 그 입구를 벽돌로 발라버린 것은 결국 '인류는, 세상은 변할 수 없다' 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상문이 토굴 안에 들어가면서 입구를 벽돌로 발라버리는 장면은, 비록 차상문은 불교적인 단어를 입에 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린 뒤 굴 무덤안으로 인도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보였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거대한 돌문으로 막힐 토굴 안에 매장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근심하며 스스로 벽돌로 쌓아 막은 토굴 안에 들어간 차상문. 둘 모두 인류를 걱정했다는 점만이 같지만 말이다. 묘하게 연상되었다.
이 작품속에서 집중해 보아야 할 부분은 차상문의 삶이 아니라, 차상문을 겪어간 사람들의 삶이다.
천재적이며 세상 모든것을 걱정하는 토끼 영장류의 주변에서 위성처럼 돌다 간 평범한 사람들.
그들이 보는 차상문은 어떤 사람, 아니 어떤 토끼였을까??
아무리 걱정하고, 조심하고 아낀다고 하더라도, 글쎄. 인간. 인류. 언젠간 멸종하지 않을까??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니까.
공룡이 멸종하고, 세상에 빙하기가 오듯, 지구상의 모든 자연과 동물들을 절멸시키고 결국엔 인류 또한 멸종할 것이다. 뭐, 2012년에 외계인이 처들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땅이 뒤집히거나, 바다가 대지를 뒤엎거나 등등.
하지만, 지구는 여전할 것이다. 몇천만년? 몇억년?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황폐화된 지구는 또다시 생명들이 창생하는 푸른 별로 변할 것이고, 수많은 생명체들 중에 또다시 인류와 같은 지성체가 등장할 것이다. 그들은 지구 위에서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배겨낼 수 있을까? 만년? 이만년? 그들은 또 그렇게 똑같은 일을 영원히 되풀이할 것이다. 어쩌면, 다른 행성으로 건너갈 수도 있겠지만, 그 행성에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인간의 생은 고작해야 100년이다. 지구의 역사를 생각할 필요도 없고, 지구의 미래를 생각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지금 우리의 생. 우리 자식들의 생. 우리 자식의 자식들. 딱 삼대 정도만 생각해봐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비슷한 시기에 터진 구제역 파동을 보며 가슴 한켠이 쓰라렸다. 생매장되는 동물들, 지하수에서 솟아나온다는 핏물들.
조류독감의 창궐, 광우병의 습격. '암' 이나 '에이즈' 가 인간이 '진화' 하는 과정에 생긴 병이라면,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광우병 역시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병이다. 사냥해서 먹는것도 모자라서 그들을 죽이는 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이. 다른 종족을 말살시키는 병을 만들어냈다.
이제 정말 인간은 '이 동물만도 못한 놈아' 라는 욕을 들어먹을 만한 정도가 되었다.
어떤 부모들은 키우는 고양이나 개를 자식보다 더 사랑한다.
과연, 무엇이 인간다운 것이며, 어떤 삶이 인간다운 삶일까?
고민 고민 하다 결국,
"우주 생성의 비밀과 만유의 모순을 끝도 없이 파헤치다 최후의 순간까지 사라져가는 생물종에 대해 안타까운 관심을 거두지 못한 한 토끼 영장류에 대해 새삼 극진한 경외감을 표하게 되는 것이지만, 남북이 엄연히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배들이 불러 별 희떠운 소리도 다한다며 어디 한번 쫄쫄 배를 곯아보면 그 소리가 나오겠냐며 비판하는 이들도 수두룩하니, 한갓 가담한설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다." p. 369 [천재토끼 차상문]김남일, (2010)
는 작가의 의견에 박수치며 동의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