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로널드 B.토비아스 지음, 김석만 옮김 / 풀빛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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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플롯에 대해 확실히 오해하고 있었다. 난 플롯이란 '뼈대' 라고 생각했다. 등장인물과 스토리와는 완벽히 별개로서, 플롯이라는 이야기의 흐름에 등장인물과 스토리를 끼워 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몸뚱아리가 단순히 뼈와 근육, 피부로 되어있다고 가정한다면, 뼈는 플롯, 근육은 스토리, 피부는 등장인물, 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문장은 옷이었을테지.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공식' 이라고 생각했다. 인수분해 공식처럼, 가속도를 구하거나 에너지를 구하는 공식처럼. 등장인물과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공식. 가장 깔끔하고 예쁘게 답이 툭 튀어나오는 그런 '흐름의 공식'

 

아마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흔히 "플롯이 빈약해" 라고 평을 내리는 작품들을 보면, 그 작품의 어디가 어떻게 약한지 정확히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지만, 대충 '이야기의 흐름이 빈약해' 라고 이해하지 않는가.  

 

이 책의 도입부분은 일단 플롯에 대한 정의를 확실히 내려준다.

마치 내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는 듯,

 

"플롯이란 이야기를 공식에 따라 짜 맞추는 액세서리 같은 도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플롯은 코드만 꽂으면 작동하는 전자제품이 아니다. 플롯은 유기적인 작업 과정이다. 이는 작가의 의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창작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p. 23

 

"플롯은 이야기의 요소들을 걸어놓는 옷걸이가 아니다. 플롯은 구조로 작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요소들을 섞어준다. 플롯을 뼈대에 비유하는 표현에는 플롯의 이러한 역할이 빠져있다. 플롯은 작품의 모든 원자에 스며들어간다.(...) 플롯은 모든 페이지, 문장, 단어에 고여있는 힘이다. 뼈대보다 더 좋은 플롯에 대한 비유는 전자기장에 대한 비유다. 이는 이야기의 모든 요소를 함께 엮는 힘이라는 뜻이다. 플롯은 이미지, 사건, 등장인물을 서로 연결시킨다." p. 26

 

이라고 바로잡아주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간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작가가 플롯에 대해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한 <숨이 막힌 도베르만> 이라는 아주 짧은 이야기만으로 보고도 책의 값어치를 다 했다고 평하곤 한다.

 

책에 실린 두 이야기를 인용하겠다.

 

<고래와 어부>

 한 어부가 이상한 고기를 잡아다 아내에게 요리를 하라고 주었다.

어부의 아내는 일을 마친 후 바다에 나가 손을 씻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을 잡아먹는 고래가 나타나 여자를 잡아가 버렸다.

고래는 어부의 아내를 바다 밑의 자기 집으로 데려가 종으로 삼고 일을 시켰다.

어부는 친구인 상어의도움을 받아 고래를 쫓아 아내를 구하러 내려갔다.

상어는 꾀를 내 고래의 집에 켜져 있던 불을 꺼버리고 어부의 아내를 구했다.

p. 35

 

북서태평양 연안의 인디언들에게 인기 있었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다음은, 책의 서두를 장식했던 <숨이 막힌 도베르만> 이다.

 

<숨이 막힌 도베르만>

어느 날 한 아주머니가 장을 보고 돌아와보니 집에서 기르는 도베르만이 목에 뭔가 걸려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개를 동물병원에 맡기고 집에 돌아오자 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조금 전 다녀온 동물병원의 수의사였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당장 집 밖으로 나가세요!!"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제 말대로 하시고 당장 옆집에 가 계세요. 곧 갈게요."

수의사는 아주머니의 질문에는 대답을 않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지 놀랍고 궁금했지만 수의사가 시키는 대로 이웃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경찰차4대가 달려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집 앞에 섰다. 경찰들이 권총을 뽑아들고 차에서 내리더니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녀는 겁에 질린 채 밖으로 나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수의사가 도착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가 도베르만의 목구멍을 검사해보니 거기에 사람 손가락 두 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도베르만이 도둑을 놀라게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은 곧 피 흘리는 손을 움켜쥐고 공포에 질린 채 옷장에 숨어 있던 도둑을 잡아냈다.

p. 21

 

 

 

자, 이 두 이야기의 차이점을 알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플롯의 힘이 작용한 이야기와 그렇지 못한 이야기의 차이점이다.

작가는 플롯이 이야기와 등장인물 전체를 잡아끄는 파워풀한 역동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플롯이 없는 이야기에는 의문도, 긴장감도, 감정과 정서도 없다.

결국 플롯은 인간의 이야기 하고 듣는 본능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우리도 항상 이야기를 할때 이렇게 마무리 하곤 하지 않는가?

"그래서 어떻게 됐게???"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이 "어떻게 됐는데?? 뜸 들이지 말고 빨랑 얘기해~" 라고 묻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 또한,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뻔하면 화를 내며 "야! 너무 뻔하잖아!" 라고 말한다. 자신들을 절묘하게 속여 넘기는 이야기에 열광하고, 깜짝 놀랄만한 반전에 찬사를 보낸다. 플롯이란 바로 그런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이야기 그 자체인 것이다. 수많은 설정들과 등장인물들, 성격들, 모든 인과관계들, 그리고 반전과 결말들.

이 모든 것들을 이끄는 힘이 바로 플롯인 것이다.

 

그렇다면, 플롯은 몇가지나 있을까??

플롯에 관한 이야기는 나 역시 이 책을 통하지 않고서도 여러번 들어본 적이 있다.

[정글북] 의 노벨상 수상자 키플링은 예순 몇가지라고 그랬었고, 희곡의 할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로 딱 두가지라는 주장도 사랑받고 있다. 반면, 어떤 책에서는 셀수없을 정도로 많다고 했다.  하지만, 이 리뷰만 봐도 알겠지만, 플롯이란 그 개념이 모호해서 수를 헤아릴 수는 없다. 플롯이 섞이고 섞인 작품들도 있고, 아예 없는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섞이고 섞였다고 하더라도, 파헤쳐보면 마스터 플롯과 서브 플롯을 구분할 수 있으며, 플롯이 없다고 해도, 그것이 새로운 플롯으로 정립될 수도 있다. 무한대일 수도 있고, 키플링의 말처럼 예순 아홉개일 수도 있고, 카를로 고치의 주장처럼 서른 여섯개일 수도 있고, 두가지일수도 있다.

 

저자는 일단 플롯의 공공재로서의 개념을 먼저 짚어준다. 플롯이라는 것이 아무리 많고,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활용하는 작가들의 성향이 너무나 다르다. <숨이 막힌 도베르만> 이야기만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작가들에 따라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도둑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도 있다.

 

각종 장비를 이용해, 문을 열고 의기양양하게 집안으로 들어간 도둑.

귀금속과 패물을 챙기는데, 시커먼 어둠속에서 두개의 눈빛이 번득인다.

그리고, 낮게 으르릉거리는 무시무시한 소리. 지옥에서 온 케르베로스 같은 괴물같이 커다란 도베르만이 송곳니 사이로 침을 흘리고 있다.

도둑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수의사의 시점에서 풀어나갈 수도 있다.

 

숨이 막혀 컥컥대는 도베르만을 불쌍하게 내려다보는 수의사.

하얀 동물 수술대 위에 도베르만을 올려놓는다. 푸르스름한 형광등 빛이 하얀 수술실 안에 깔려있고, 잠을 자다 나온 의사는 잠옷 위에 수술 가운을 걸친다.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달려있는 주사기에 마취액을 넣어, 부드러운 도베르만의 허벅지에 찌른다. 곧, 새근새근 잠드는 도베르만.

개구기를 도베르만의 입 안에 넣고 개의 식도를 살피는 의사.

곧, 의사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내가 적어놓은 이 두 도입부만 해도,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나가지만, 책이 언급된 플롯의 힘을 확실하게 이용했다.

역동성, 의구심, 수수깨끼. 모두 적용되어있다. 이처럼, 플롯이란 작가 개개인마다 개성이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플롯들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어떤 성격의 등장인물이, 또다른 어떤 성격의 등장인물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연유로 얽히며, 그것들이 어떤 감정과 정서를 낳고, 어떤 식으로 인과관계를 맺어가며, 결국 이러한 결말을 맺는다... 는 식의 규칙 말이다. 이런 구조는 수백년 동안 수천번이 반복되어왔지만, 꾸준히 새로운 세대에게 공통적으로 사랑받는다.  여기서 우리가 "클리셰" 라고 부르는 '벽' 이 탄생한 것이다. 가장 효과적이고 재미있게, 그리고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조 말이다.

 

좋은 플롯이 가지고 있는 여덟가지 원칙을 시작으로

 

돈키호테로 대표되는 "추구"

여행을 떠나는 인물들의 "모험"

도망자의 뒤를 쫓는 "추적"

희생자를 둘러싼 대결을 다룬 "구출"

처절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탈출"

범죄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복수"

치밀하게 짜여진 미스테리 "수수깨끼"

갈등과 경쟁구도의 "라이벌"

고통스러운 현실의 보상을 원하는 "희생자"

치명적인 "유혹"

감정에 의해 인격이 변화하는 인물을 보여주는 "변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사건 "변모"

수많은 시험을 통해 맞게되는 "성숙"

시련과 역경을 겪으며 얻게되는 "사랑"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금지된 사랑"

인간의 가장 숭고한 선택 "희생"

인생을 바꿔놓는 순간 "발견"

몰락을 부르는 사소한 성격적 결함이 발견되는 "지독한 행위"

한 인간의 성공에서 실패까지, 혹은 실패에서 성공까지 "상승과 몰락"

 

이렇게 스무가지의 플롯이 파헤쳐진다.

 

이 책은 애초에 공부하기 위해 샀던 책이라 매일 매일 일정 부분씩 최대한 정독을 하며 읽었다. 중요한 부분에 줄도 치고, 한 문단을 몇번이나 읽기도 했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플롯이 나올것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한 본능적인 추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본능적인 능력을 보다 효과적이고 짜임새있게 발휘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가도 강조하지만, 플롯은 공공재이다. 또한, 뼈대나 아이빔 같은 고정된 사물이 아니다. 이야기란 정답을 써내는 수학문제가 아니다. 플롯이란 정답을 도출해내는 공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는 플롯이란 공작용 점토라고 비유한다. 플롯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위한 플롯이 되어야 한다. 이 책에 등장한 스무가지 플롯에 자신의 작품을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이 스무가지 플롯은 물론 흥미롭고 모범적이며,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던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얽매일 필요는 없다. 부디 이 책이, 창작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길 바란다.

물론 나에게도 말이다.

 

"무엇을 쓰든지 어떻게 쓰든지 플롯의 노예는 되지 말아야 한다.

작가는 플롯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플롯이 작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플롯이 작가를 돕게 하라."

p.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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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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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덜 성숙되었다는 뜻의 이 명칭을 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법적인 성인에 도달하지 못한 나이' 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미성년' 이라는 말은 언제나 '미성숙' 이나 '미완성' 을 떠오르게 하는데,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전한 성숙에 이를수가 있기는 있단 말인가??  이 작품은 이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은희경 작가가 자녀들을 위해 쓴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법적으로 성인에 도달하지 못한,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 라고 불리우기도 하고, '2차 성징' 이라는 것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아, 요즘 아이들을 훨씬 더 빠르니, 이건 패스. 평범한 남녀공학 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등장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전형적인 인물 중심의 플롯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애초에 그리 많은 등장인물이 필요하지 않다.

주인공인 연우. 마치 은희경 작가의 페르소나처럼 느껴지는 이혼녀인 연우의 엄마 민아. 민아의 애인인 재욱과 연우의 절친이 되는 태수. 태수의 1살터울 여동생 마리. 그리고, 작품의 가장 큰 축을 떠맡고 있는 동급생 채영.

인물 중심의 작품답게 작품속에 등장하는 인물 한명, 한명은 작가의 고심과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평범하지만 섬세한 연우. 미국에서 거친 방황의 시기를 보냈던 태수. 전형적인 모범생 마리. 그리고 일본 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채영.

 

솔직히 소감을 딱 한마디로 말하면, '기대 이하' 라고 잘라 말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진심이다.

이 작품을 개인적으로 '기대 이하' 라고 자른 이유는 이야기의 가장 큰 축을 맡고 있는 연우와 채영이라는 캐릭터의 진부함과 전형성 때문일터다.

이 두 캐릭터는 위에 언급한대로 최근의 일본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은희경 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의 라이트 노벨 느낌이다.

여기서 채영의 캐릭터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인물은 '츤데레' 의 모습을 꼭 닮아있다. 한편, 매사에 의욕없고 연약한 연우의 모습은 역시 일본에서 유행하는 초식남의 그것을 꼭 닮아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숱한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번득여서 작품에 몰입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물론 연우라는 캐릭터는 또렷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태수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었고, 채영과 삼각관계를 이루는 마리의 성격도 확실했다. 하지만, 너무 정련된 캐릭터들로 인해 정말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고등학생의 탈을 쓴 어른들 같아 보였달까. 연우는 지나치게 사색적이었고, 태수는 지나치게 오버스러웠으며, 마리는 지나치게 똑 부러졌고, 채영은 지나치게 신비로웠다. 연우를 둘러싸고 있는 채영, 마리, 태수와의 관계는 일본만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딱 그정도 였다.

 

한마디로, 연우와 연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것들이 지나치게 정리되어 있는 느낌이었고, 클라이맥스까지는 완만하고 서서하게 움직이다가 정작 클라이맥스에선 지나치게 휙휙 지나가버리고, 뭉뚱그러져서 성급하게 마무리지었다는 느낌이었다. 연우가 채영과의 관계에서 겪는 아픔과 혼란은 십수페이지를 할애해 묘사하면서,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태수와의 결말에서 겪는 수많은 혼란들은 고작 몇페이지에 불과한 부분이 특히 그랬다. 작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참 많이 아쉬운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은희경 작가는 예전부터 사색이나 고뇌, 혼란들을 탁월하게 묘사해내는 작가였다.

이 작품 역시 연우의 혼란 뿐 아니라, 연우의 엄마, 그리고 엄마의 연인 재욱의 이야기들을 보면 그런 탁월하고 세련된 묘사들이 절묘하게 그려지고 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오는 분절성과 그로 인한 소외감. 고독함, 외로움, 혼란, 고통. 그런 것들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또한, 연우가 겪는 생애 첫 감정들 또한 혼란과 여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그런 혼란과 여백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그려져셔 감정의 이입을 방해하지만, 묘사만 놓고 보면 세련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개인적으로는 은희경 작가가 '남자 고등학생' 의 시절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섬세하고 감성적인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남고생이 느끼는 세상의 첫 감정들은 보다 거칠고 둔탁하며 투박하다.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거나, 받아들이고 다시 발산해 나가는 과정들은 여고생들의 그것과는 완벽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자신의 약함, 사랑이라는 감정, 어른들의 생각이나 조언들 모두 말이다. 연우가 그것들을 받아들여가는 과정은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포용적이어서, 나름 조숙했고 섬세하고도 사색적인 남고생활(?)을 겪은 나로서도 몰입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인물 위주의 작품이다.

주인공인 연우의 관점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기에, 사건 자체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실제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예측만 할 뿐, 어떠한 확신도 얻을 수 없듯, 작품 안의 연우 또한 그 누구의 마음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게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참 답답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클라이맥스의 태수나 채영의 마음이나 기분, 행동의 동기 등등은 작품 내의 그 누구도 알 수 없듯, 독자들 또한 알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연우가 전해듣는 이야기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연우가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은 사건들은 단지 그 뿐이다. 이런 철저한 객관성이 이 독특한 성장이야기에 리얼함을 부여한다. 정말 여러가지 사건과 감정들이 연우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지만, 일관된 연우의 시각에서 함께 겪어볼 수 있는 것이다.  연우의 섬세한 감정선의 묘사나 엄마와 재욱간에 겪는 여러가지 갈등과 해소의 과정들이 정말 주옥같은 문장과 사색들로 펼쳐져 나간다.

물론 태수와 채영, 마리와 겪는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들도 은희경 작가만의 섬세함이 아주 잘 살아있다.

 

모든 소년, 소녀들은 여러가지 사건들을 겪고, 그 안에서 여러가지 감정들을 배우고 갈무리 하며 성장해 나간다.

우정, 사랑, 스킨쉽, 폭력, 경험, 목격, 획득과 상실, 탄생과 죽음 등. 생애 처음 겪는 수많은 것들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그렇게 한번 배운것도 되풀이 되면, 마치 처음이었던 것 처럼 받아들인다. 실수를 되풀이하고, 상처도 되풀이 된다. 아마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그대로 고교시절로 되돌아 간다고 해도, 난 여전히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것이고, 비슷한 상처를 경험한 뒤에, 지금과 별 다르지 않은 30대를 맞이할 것이다. 

 

운동을 오래 해서 근육을 잔뜩 키운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턱걸이를 10개 하던 사람이 20개를 할 정도로 힘이 세 졌다고 해도, 턱걸이 10개째에 느끼는 고통은 똑같다는 말이다.

전에는 11개째의 고통을 이겨낼 능력이 없었지만, 이젠 11개째는 물론 20개째까지 그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해진다는 의미이다.

 

작품속에서 연우는 마라톤을 한다.

마라톤 역시 그렇다.

10km를 달리던 사람이 40km를 달리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10km째에 느끼는 고통은 동일하다.

그 고통을 이겨내고 30km를 더 달릴 수 있느냐, 아니면 주저 앉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아마 영원히. 죽는 순간까지 실수를 되풀이하고, 상처를 되풀이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영원한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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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랜턴 Green Lantern : 시크릿 오리진 Secret Origin 시공그래픽노블
제프 존스 지음, 이규원 옮김, 이반 레이스.오클에어 알버트 그림 / 시공사(만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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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미국의 히어로가 찾아든 것은 헐리웃 영화를 통해서 였다.

"슈퍼맨" "배트맨" 과 같은 히어로들은 지금 보면 조악하기 짝이없지만, 당시에는 컬쳐 쇼크에 가까울 정도의 영상기술로 스크린 안에서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악당들을 응징했다. 파란 타이즈에 빨간 팬티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슈퍼맨이나 박쥐 마스크를 쓰고 시커먼 망또를 둘러맨 배트맨의 외견은 유치해 보였으나, 그 스토리는 전혀 유치하지 않았다. 신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듯한 슈퍼맨은 끊임없이 정체성을 의심하는 사람이었고, 배트맨은 자신의 마음속 깊이에 위치해 있는 죄책감과 공포감을 이겨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이었다.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영상 기술은 보다 더 발전했고, 우리는 보다 많은 슈퍼 히어로들을 스크린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발 맞춰서 미국 문화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 문화의 본질, 슈퍼 히어로의 코믹북과 그래픽 노블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생소한 슈퍼 히어로인 '그린 랜턴' 은 슈퍼맨과 배트맨의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는 DC 코믹스의 간판 캐릭터이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과 그린랜턴은 DC 코믹스의 대표 캐릭터인 동시에, 그린랜턴은 슈퍼맨, DC의 경쟁사인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 등 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국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린랜턴: 시크릿 오리진' 은 그린 랜턴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군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그린랜턴인 '할 조던' 이 어떻게 그린랜턴이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작품이다.

 

눈 앞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하는 아버지를 목격했던 할 조던.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동경했던 하늘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공군에 입대해 조종사가 되지만, 남편을 잃게 한 하늘과 공군을 그의 어머니는 좋아할 리 없었다. 할 조던은 어머니와 형, 동생과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군에서 불명예 제대하게 된 할 조던은 가족들에게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작은 지역 항공사에 취직하게 되고, 항공사의 여 사장이자 소꼽친구이기도 한 '캐롤 패리스' 와 대립하게 된다.

한편, 지구를 포함한 우주 구역을 수호하는 전사인 그린랜턴 '아빈 수르' 는 우주선에 악당인 '아트로시터스' 를 태우고 지구로 향하고 있었다. 불길한 예언을 접하고 그 악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이었다. 지구에 다다랐을 무렵, 아트로시터스는 아빈수르를 공격하여 우주선을 탈출하고, 아빈 수르는 심각한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우주선이 사람이 없는 황무지에 추락시키기 위해 남은 생명력을 짜낸다. 우주를 수호해야 하는 그린랜턴은 한시도 공석이 되면 안되기 때문에, 의지가 있는 그린랜턴의 반지는 임무를 물려받을 지성체를 찾아나서고, 그 대상으로 할 조던이 선택된다.

할 조던은 아빈 수르의 임무를 넘겨받아 그린랜턴이 되기로 하고, 우주 어딘가에 있는 그린랜턴의 훈련소에서 짧은 훈련을 마친 뒤 지구로 복귀한다.

지구로 돌아온 할 조던은 아빈수르의 제자이자 다른 우주 구역을 수호하는 그린랜턴인 '시네스트로' 를 만나게 된다.

 

 

'그린랜턴: 시크릿 오리진'은 2009~2010 미국 DC의 메인 이벤트인 '가장 어두운 밤(Blackest Night)' 의 중심 캐릭터인 그린랜턴의 기원에 대한 내용으로서 '가장 어두운 밤' 시리즈를 위한 미드의 파일럿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인 아빈수르의 지구행에 바로 그 '가장 어두운 밤' 에 대한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 조던이 그린랜턴이 된 원인이 바로 그 '가장 어두운 밤' 에 대한 예언이었고, 이 작품 '시크릿 오리진' 에서 '가장 어두운 밤' 을 이끌어 내는 복선들이 등장한다. (이 부분들은 미국 만화의 시스템을 모르시는 분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린랜턴은 올해 6월, 미국에서 영화가 개봉된다. 아마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될 것이고, 이 작품 '그린랜턴: 시크릿 오리진' 은 영화를 보기 전에 한번쯤 봐두면 좋을 듯한 작품이다. 아마 영화에서도 특히 '그린랜턴: 시크릿 오리진' 의 내용을 많이 차용해서 각본을 썼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그린 랜턴이라는 캐릭터와 할 조던이라는 인물의 아이덴티티를 명료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다른 슈퍼 히어로들과 달리 우주적인 스케일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각종 외계의 다른 그린랜턴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국 히어로들과 그린랜턴이 생소한 독자들에게도 충분한 재미를 줄 수 있는 '그린랜턴: 시크릿 오리진'.

강추!

 

 

 
 
무엇보다 번역이 참 좋다. 화면에 잘 안보이지만, 이렇게 칸 아랫부분에 작품에 관련된 여러가지 해설들이 적혀있다.
그린랜턴을 전혀 모르는 독자들, 미국 만화 자체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매끄러운 번역은 물론, 미국 만화를 즐길 수 있게 해주려는 번역자님의 센스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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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2011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공지영 작가는 수상작이었던 "맨발로 글목을 돌다" 에서 작가 자신이기도 한 작품속의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이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꿔놓는 일을 저는 가장 증오하고 있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이런 메시지는 이미 전작인 "도가니" 를 통해 먼저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꿔놓는 일"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인 "도가니" 에서는 장애아동들을 학대하는 보육원이 등장하였고, "맨발로 글목을 돌다" 는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일제 시대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H, 그리고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유태인들이 등장한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바다위의 낙엽같은 생生.

 

한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꾸는 일은 그런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들에게만 허락된 능력은 아니다.

당신도, 나도, 아주 쉽게 한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꿀 수 있다.

 

작품 속에는 그렇게 너무도 쉽게 생 전체가 폭력으로 뒤바뀐 두 남녀가 등장한다.

 

'따뜻한 콩' 이라는 의미의 '온두' 는 대형 유아용품 전문백화점인 '베이비앤마미' 의 1층 유모차 판매장에서 근무하는 여성 판매사원이다.

시크하고 냉정하지만 번득이는 통찰력과 논리정연한 소개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는 뛰어난 사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한가지 비밀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슬트모' 의 회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슬트모가 뭐냐고?? 슬트모는 '슬'리핑 '트'렁크 족의 '모' 임 의 줄임말이다. 슬리핑 트렁크. 말 그대로 자동차 트렁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잠잘 시간이 되면 수면용품이 든 백을 들고 공터에 주차해 놓은 자신의 자가용으로 간다. 그리고, 잠자기 좋게 각종 도구들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 트렁크 안으로 들어가서 아침까지 자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차 옆에 또다른 슬리핑 트렁크족이 자리잡는데, 그 남자의 이름은 '이름' 이었다.

온두와 이름은 왜 자신의 집, 방 안의 침대를 장식용 가구로 만들면서 굳이 좁디 좁은 트렁크 안에 지친 몸을 누이는 것일까??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도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트렁크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

'트렁커' 라는 제목과 재미있는 일러스트의 표지처럼 작품의 초반은 가볍고 경쾌하다.

시크한 온두라는 캐릭터도 얄밉지만 안타깝고 꽤나 매력적이다. 귀엽고 작아서 보듬어주고 싶은 의미의 '사랑스러움' 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로 '사랑스러운' 캐릭터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여린 속살 밖에 날카로운 가시를 돋우고 있는 고슴도치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름이라는 청년 또한 사랑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역시나 어딘가 무심하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왠지 따뜻할것만 같은 그런 남자.

전형적인 로맨스물의 캐릭터들 같다. 작품의 초반을 읽어 나가면서 '이거 그냥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아냐?' 싶어서 책을 편 것을 후회했더랬다.

웅진 "뿔" 블로그에서 리뷰어에 당첨되었으나, 어찌 된 이유에선지 한달이나 늦게 책을 받기도 했었고. 유쾌한 마음으로 펴든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게다가 달달한 로맨스 소설 따위, 난 보고싶지 않아고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가슴이 턱턱 막히는 부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리뷰의 서두에 언급했던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바꿔내는" 장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온두와 이름이 트렁크에서 잠을 자게 된 이유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이 엄청난 사건들은 말 그대로 가슴이 턱턱 막힌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누군가의 인생을 폭력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폭력에 가장 무방비하며, 인생 전체를 저당잡을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 옆에 항상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아이들이다.

나의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의 자식이 될 수도있는.

누군가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

바로 어린 아이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변이 세상의 전부라고 인식한다.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의 주변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그들은 세상 전부가 어그러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세상 전체가 어그러지는 충격. 그 충격은 단순히 잊어넘길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이 되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세상에서의 숨을 다 하는 순간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각인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 엄청난 사건에 대항할 신체적, 정신적인 능력도 부족하다. 

그렇기에, 세상의 법은 미성년에게 저지른 죄는 몇배로 강하게 처벌한다. 아, 국내에서는 예외로 하겠다.

지구상에서 한국을 제외한 모든 법치국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저지르는 범죄, 특히 폭력에 대한 범죄는 최소한 몇배의 처벌을 받고, 많게는 몇십배까지도 처벌의 수위를 높인다.

 

하지만, 그만큼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르는 범죄는 세상의 법을 피해갈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아동 보호시설이나,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더더욱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폭력을 잘못된 것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동 보호시설의 경우엔 인지력과 나이, 신체적 특징이 비슷한 처지의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시에 폭력을 당하기 때문에, '원래 이렇구나' 라고 인지하게 된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저항하고 대항할 능력이 없음을 인지하고 세상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때문에 그것을 법에 호소하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먹여주고 살려주는 어른을 놓친다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기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한다.

그냥 그 폐쇄된 세상 속에서 평생을 '사육' 당하는 것이다.

 

가정 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가정 또한 하나의 사회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더더욱 폐쇄된 공간이다.

우리는 옆집에서 자식을 패는 소리를 듣더라도, '가정교육' 이라고 치부하기 일쑤이다. 우리나라는 '우리' 문화가 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정교육을 중시하고, 아이들을 교육하는데는 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전통도 있어왔 때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비인격적인 폭행이나 폭언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많고, 특히 어렸을때부터 그렇게 자라온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들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연옥이자, 헤어날 수 없는 거미줄이며, 끈질긴 물귀신과도 같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있고, 가끔은 즐거움과 행복도 있으며, 때로는 의지가 되기도 하고 최후의 도피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주인공들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나 더 좁은 공간으로 숨어들어간다.

자신의 몸에 딱 맞는 공간을 좋아하는 고양이처럼 말이다. 고양이과의 동물들 중 가장 강한 동물인 호랑이는 언제나 사방이 탁 틔이고 높은 곳을 좋아한다. 동물 사파리에 가보면 호랑이 무리의 두목이 자리잡는 곳은 언제나 그런 곳이다. 누구에게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 말이다. 반면, 고양이과의 가장 약한 동물인 고양이는 자신의 몸 하나만 딱 들어갈 수있는 좁은 공간을 좋아한다. 벽과 벽의 사이, 자동차의 뒷바퀴와 자체 사이, 보일러의 연통 안, 벽에 세워진 매트리스 사이 같이 말이다. 옆과 뒤가 모두 막혀있어서 정면에서 다가오는 적을 가장 빨리 보고 도망갈 수 있고, 대적하더라도 뒤와 옆에서 협공받을 수 없는 그런 곳 말이다.

작품안에 등장하는 '트렁크' 는 주인공들에게 딱 그런 장소인 셈이다.

최후의 도피처. 가족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각종 감정으로부터.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있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작가는 시종일관 시공간을 베베 틀면서 혼란스럽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책의 대부분을 지하철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읽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음악을 끄고 정신을 집중해서 앞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이야깃속의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고, 단편적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연두의 과거와 이름의 과거가 규칙없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꽤 혼란을 주기도 한다. 

작가가 독자들을 잡아 당기는 흡인력의 부분에서는 선정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지나치지 않은 선을 적당히 유지하면서 정서적으로 큰 거부감을 주지는 않는다. 작품 전체적으로 행동묘사가 굉장히 적은데, 역겹거나 잔인한 장면들을 디테일하지 않게 넘어가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며 완성도를 높인 작가의 좋은 의도였다고 보여진다.  독자의 상상력에 적절히 기대면서도 이야기의 맥을 짚어내는 작가의 기술이 상당히 돋보인다.  

 

작품은 초반의 가벼움과 경쾌함을 지나, 중반에는 정서적인 위화감과 감정의 폭발을 유발시킨다. 그러다가 후반에 접어들면 앞에 꼬아놓았던 새끼줄을 풀듯이 감정과 정서를 다시 차분하게 안정시켜 나간다. 정신없이 꼬여 없는듯한 플롯들이 그 정체를 드러내며 문장들과 더불어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배가시킨다. 확실히 정말 좋은 소설이다.

 

최근 한국문학, 특히 소설쪽에서는 신인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그녀들은 서사의 구조나 시공간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자재로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지면 위에 풀어내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더니즘의 작가주의적인 그것이라기 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중주의에 가깝다는 사실이 놀랍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관념적으로 풀어내면서도 대중들에게 지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작가들이 포스트 모던한 대중주의 자체에 뿌리내리고 성장한 덕택일 것이다. 그녀들의 작품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면서도 편협하지 않고, 자유롭다.

앞으로 한국 여성작가들은 더욱 더 많이 나올것이고, 21세기 한국 문학의 최고봉에는 언제나 여성 작가들이 서 있을 것 같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에 관여한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절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관여가 한 생을 폭력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고, 사랑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책을 덮으면서 아이가 키우고 싶어졌다.

폭력이 아닌 사랑과 기쁨에 익숙한 아이를 키워내고 싶어졌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과 기쁨에 익숙한 아이를 키워냈으면 한다.

자신뿐 아닌, 타인에게도 사랑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이 익숙한 아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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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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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이 무너져간 과정들은 드라마틱하기 짝이 없었다.

수천년간 한낱 '평민' 이었던 대다수의 백성들은, 역시 수천년간 자신들을 '지배' 해온 계급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동일한 계급 안에서 의지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왕이나 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인간이고, 단지 누구의 아들이냐, 딸이냐에 따라 삶 전체가 달라지는 것은 결코 '인간다운 일' 이 아님을 인지하고 받아들였다. 그 과정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서서히 수천년의 절대왕정이 무너졌다. 그리고 '왕' 을 잃어버린 국가들은 새로운 이념들을 받아들였다. 세계 최초의 공화정이 시행되고, 엄청난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새로운 이념을 정립시켰다. 누군가는 새로운 이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넓디 넓은 바다를 건너 신대륙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렇게 '민주주의' 라는 이념은 유럽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로 나눌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유럽식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시민들의 단결과 응집력, 그리고 투쟁을 떠올릴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을 싸워서 쟁취해낸 유럽의 시민들은 권력층을 견제할 수 있는 단일 세력으로 성장했다.

미국식 민주주의는 개개인에 대한 무한한 자유와 권리보장 그리고 자본주의를 떠올릴 수 있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가 발달한 것이다. 

유럽식이든 미국식이든, 그들의 민주주의는 최소한 100~200년의 시간동안 서서히 이루어져 왔으며,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던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얻어냈으며, 영위하게 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의 왕정은 일제의 침략과 강제병합, 그리고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군정의 신탁통치를 통해 무너졌다.

엊그제까지 평민이었던 백성들이 하루 아침에 국민이 된 셈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반상의 구별이 명확했는데, 아침에 그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사실 국민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어제 일본군의 앞잡이었던 경찰서장은, 오늘 대한민국의 경찰서장이 되었고, 일제의 비호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오늘 대한민국 정부의 비호를 받아 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웠던 이들은 빈민으로 전락했다. 세상이 바뀐걸 실감도 하기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로 인헤 미국의 신탁통치는 더욱 강력해 졌으며, 민족 차원에서 정치 수뇌부를 자정할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의 똥구멍을 핥으며 배를 채워온 부류는 미국의 똥구멍을 핥으며 여전히 권력의 상석을 차지했고, 허울좋은 '민주주의' 세상에서 돈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의 정부는 일제 침략기의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국민들은 대통령과 왕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고, 정치가와 양반들을 구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공무원과 벼슬아치들을 동일시했다. 수십년 뒤, 고등교육으로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스스로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고, 미군정의 신탁통치와 군사 쿠데타가 만들어낸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

화염병과 죽창을 들고 세상을 바꾼 이들. 우리는 이들을 386세대라고 부른다. 30대, 80년대 대학을 다닌, 60년대생들.

지금 그들은 40대일테니, 486세대로 명명하면 되겠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었지만, 자신들이 무너뜨린 그들과 똑같이 변해갔다.

물론, 세상이 그들이 원하는대로 바뀌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다. 정치 수뇌부들은 지나치게 촘촘히 얽혀있었고, 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있었으니 바로 '돈' 이었다. 일제를 등에 업고, 미국을 등에 업고 돈을 쓸어모았던 그들은 정권을 지배하고 있었고, 결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열의 맨 앞에서 죽창과 화염병을 들었던 그들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굴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싸웠지만, 진 사람이 없었고, 쟁취했지만, 얻은것이 없었으며, 변혁을 꿈꾸었지만, 바뀐것이 없었다.

 

작가는 바로 그런 386 세대. 특히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상위 10% 안에 드는 엘리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진정한 의미의 '사회 지도층' 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드라마나 작품들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상위계층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본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작년, 절찬리에 종영한 '자이언트' 라는 드라마에서도 정경유착의 단면과 한국에서 재벌이 부를 축적해가는 과정이 비교적 설득력있게 그려졌으며, 최근 역시 엄청난 인기속에 종영한 '시크릿 가든' 에서도 유명 백화점 VVIP 파티나 상속자의 생활상이 잠깐 보여졌었다.

이 작품 '허수아비 춤' 은 그런 드라마속 이야기의 리얼 버전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아리랑' '태백산맥' 에 이어 '한강' 까지, 한국사 100여년을 종이위에 고스란히 글로 녹여냈던 노작가는 '허수아비 춤' 을 통해 한국 근대사에 방점을 찍어낸다. 작품은 크게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작가가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훨씬 더 많다.

 

2~3년 전,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 라는 작품을 통해 386세대가 만든 세상에 살아가는 현대의 20대의 현실을 분석하여 큰 호응을 받았던 책이 있다. 그 작품에서도 20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싸울 줄  모른다' 는 점을 들었다. 독재정치와 군정에 화염병에 짱돌, 죽창을 들었던 세대들의 자식들로 자라난 20대는 당연하게도 투쟁심 자체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세대는 부조리 속에 있지만, 부조리 속에 있는 줄 모르고, 억압받고 있지만 억압받는 줄 모른다. '민주주의' 를 처음 맞닥뜨렸던 50년~60년대의 한국 국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386 세대가 굳건히 만들어 놓은 대한민국 자본주의 제국에서 살아남기만을 위해 노력한다. 대학은 더이상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보다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을 386세대에게 전가할 생각은 없다.

그들 또한 억압되고 부조리한 세상속에서 당당하게 맞섰고 자신들의 것을 쟁취한 선구자 들이다. 결국 노무현 정권과 참여정부라는 눈부신 성과를 이끌어 냈던 것은 그들이었고, 그런 정권을 MB 정권으로 망가뜨린 주역은 결국 우리 세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그들로부터 그런 점들을 배웠어야 했고, 끊임없이 사회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 윗세대의 실책만큼 우리 세대 자체의 실책이 있는것이다.  

 

조정래 작가는 '허수아비 춤' 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상위 2%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 세대는 분명,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시크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게 '쿨' 한거 아니냐며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놈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고 분에 차서 소리지르면, 우리 세대는 분명 '짜증나게 열폭하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해' 라고 말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세대는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상위 2%안에 못들어간 98%는 다 자신들이 잘못해서 그모양 그 꼴인 것이다.

상위 2%만 넉넉하고, 나머지 98%는 배고픈 사회의 시스템을 붙들고 늘어져야 겠다는 생각따위, 우리는 못한다.

그 시스템이 잘못된 시스템이라는 것. 우리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모두가 적들뿐이다. 이것을 세대 안에서의 싸움이라고 한다. 우리 세대는 세대 내 갈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뜻을 모을 수 없고, 공동의 전선을 펼칠 수 없다. 안타깝지만, 우석훈 교수와 여러 시민운동가들이 주창했던 '생협' 같은 세대간 연대는 너무나 힘들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터다.

작품 안에서도 언급는 '시민연대' 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반 시민들이 권력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에도 말이다.

 

아마, 우리 88만원 세대들은 영원히 가난과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식들에게도 이 가난과 절망은 고스란히 물려줄 터다.

우리 세대는 허수아비 세대이다.

짧디 짧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무능하고 가장 별 볼  일 없는 세대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의 88만원 세대. 우리들 말이다. X세대와 N세대 사이에 어설프게 걸쳐있는 어설프고 불쌍한 세대.

 

조정래 작가가 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들려준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그릇되었음' 을. 우리 사회의 구조가 '불합리함'을. 그리고, 이런 세상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게 잘못이 있는게 아니라, 우리 세대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잘못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짱돌을 집어들 수 는 없을것이다. 우린 너무나 나약하고 온순하며 무력하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 세대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88만원 세대' 라는 용어가 태동했을 즈음에 국내에서는 많은 촛불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위 안에는 당연하게도 88만원 세대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였다고 해도 일부였고, 대다수의 88만원 세대들은 그 와중에도 어디 도서관에 쳐박혀 취업준비에 열중이었고,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열중이었다. 물론 시위는 88만원 세대들과 386 세대 선배들이  10대~20대. 80년대 중후반~90년대생들이었다. 우리가 취업몰입교육에 물들어 있을때 그들은 수많은 대안학교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인터넷 세상의 무한한 정보를 통해 더 많은 것들을 흡수하기도 했다.

 

'허수아비 춤' 은 88만원 세대인 나에게는 정말 큰 과제처럼 다가왔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데 나는.

설마 내가.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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