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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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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 솔직히 무척 좋아한다는 말은 못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듣지도 않는다는 것 또한 아니다. 나에게도 꽤 여러장의 클래식 CD가 있고, 몇몇 플레이어의 목록에도 클래식들이 들어있다.  

 음악이란 '취향' 이다. 가볍게 대중적인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조화를 이루는 밴드의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있으며, 귀청을 찢을듯한 메탈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보컬리스트의 세련된 음색과 풍부한 음량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고, 조화로운 화음과 세련된 코드의 진행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으며, 기타의 유려한 선율, 베이시스트의 중후한 음, 드럼의 탄력적인 소리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작곡가를 눈여겨 보는 사람도 있고, 세션들을 눈여겨 보는 사람도 있으며, 싱어를 눈여겨 보는 사람도 있다. 이 모두가 즐기는 방식이다. 

 클래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독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협연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칸타타를 좋아하는 사람도있고, 오페레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오케스트라라면 그 조화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악단의 실력을 따지는 사람도 있다. 악단의 지휘자를 좇아 악단을 고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작곡가를 따르는 사람도 있다.  

 최근 [슈퍼스타K]가 촉발시킨 오디션 플롯의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나 [불후의 명곡]을 통해 우리는 가수와 세션, 편곡에 의해 달라지는 수많은 변주들을 즐길 수 있다. 음악은 작곡자를 떠나 연주자를 통해 그 느낌이 완전하게 달라진다. 창법과 연주법이 약간만 달라져도 완벽하게 다른 음악으로 들리기도 한다. 클래식은 그 폭이 훨씬 더 넓다. 지휘자의 악보 해석에 따라, 그리고 오케스트라 단원의 실력과 조화에 따라 그 느낌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은 [베토벤 바이러스] 나 [노다메 칸타빌레] 와 같은 드라마에서도 충분히 알려졌을터다.  

 이 책은 우선 '작곡가' 에 집중한 책이다. 음악도 문학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처했던 '작품외' 의 현실상황이 작풍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문학이나 그림이 언어와 붓질로 작가의 내면이 투영된다면, 음악은 오선지의 음표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음악은 문학이나 그림보다 더 표현의 폭이 넓다고 생각한다. 즉, 작품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파악하기에 보다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다. 팝의 경우엔 작곡가와 작사자가 같은 경우 가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지만, 이 당시 음악의 경우엔 음악의 용도도 있고, 때로는 원작 이야기를 작가가 재해석해서 음악으로 풀어내는 경우도 있다.  

 차이콥스키. 고등학교때 음악수업을 제정신으로 한번만 들었어도 기억할 이름이다. 호두까기 인형, 비창 등은 음을 들으면 쉽게 기억해낼 만 하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차이콥스키의 삶이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여러 편지와 그의 생전 글들이 인용되며, 평전보다는 전기문에 가깝다. 문장들은 담백하고, 최대한 있었던 일들만이 담겨있다. 저자의 추측이나 상상이 들어있긴 하지만 최대한 배제되어 있지만, 챕터 사이사이 '간주곡' 이라는 짧은 단락은 꽤나 신랄하고 철저하게 차이콥스키의 삶과 음악을 비평하고 있다.  꽤나 독특한 구성이다. 차이콥스키의 일생을 챕터별로 나누고, 챕터 안에서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삶과 음악을 돌아보고, 매 챕터의 말미에 작은 '간주곡' 이라는 꼭지에는 삶과 작품을 주관적으로 비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책 말미의 '서플먼트' 가 맘에든다. 먼저 책에 동봉되어있는 두 장의 CD에 실려있는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CD엔 각각 12곡씩, 총 24곡이 실려있는데, 전곡이 실려있는 곡은 거의 없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들이 요즘 음악들에 비하면 굉장히 길기 때문인데, 차이코프스키의 작품 전반을 개괄적으로 감상할 수 있기때문에 입문용으로는 더없이 좋은 선물이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전곡을 들어볼 수 있게 유도되어 있고, 책을 구입한 사람들은 홈페이지에서도 무료로 전곡을 감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풍성한 서플먼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개성적인 연표가 맘에 든다. 시기별로 문화 예술사 - 세계사 - 차이코프스키의 일생 이렇게 구성되어 주지할만한 일들이 나열되는데, 보기도 쉽고, 굉장히 실용적이다.  

 '멀티미디어 전기' 정말 훌륭한 기획이다.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음률을 글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을 비평하거나 설명할 수 있을 뿐일터다. 음악은 듣는 사람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컨텐츠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책이 나올 줄 알았다. 만약 이 책이 E-book 으로 구성된다면 훨씬 쉽게 글과 음악을 접할 수 있을터다. 소장가치가 충분한 유익한 서적!! 이 책들을 통해 클래식의 세계 속으로 더욱 재미있게 빠져들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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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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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을 파헤치다 보면 어렴풋히 한 장면이 떠오른다.

거대하고 광활한 허연 동산. 그래, 딱 책의 표지와 같은, 허연 덩어리의 거대한 군락이 멀찌감치 보이고, 흔들거림과 버스냄새 사이로 어른들은 재빨리 창문을 닫는다. 창문을 닫았어도 시큼하고 지독한 쓰레기 썪는 냄새는 어디선가 스며들어왔고, 내 멀미는 지독하게 심해졌더랬다. 엄마는 거기가 바로 '난지도' 라고 말해주었고, 난지도가 어떤 동네인지는 조금더 후에 '난지도 아이들'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던 청소년 문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병에 걸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난지도 동네 사람들. 어마어마한 쓰레기 동네 난지도. 지금은 거대한 인공 산으로 덮여있고, 콘크리트와 벽돌을 부어 만든 커다란 축구 경기장과 보기 좋은 공원들, 빌딩등지가 들어서 있는 그 곳은 이제 그 이름 '난지도' 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게 그 곳이 서울과 수도권의 각종 쓰레기들이 모여들던 초대형 쓰레기통이었다는 사실을 잊어갔다. 당연히, 그 곳에서 살던 사람들도 잊혀져 갔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책 좀 읽는다는 문학소년들 사이에서 황석영 작가는 빨갱이라더라~ 는 소문을 주워들었다. 당시에는 진보와 보수의 명확한 의미조차 알지 못했고,  황석영 작가가 법을 어기고 북한에 갔던건 사실이었으니까, '아, 정말 그런가보다, 황석영 작가의 책은 읽으면 안되나보다...' 라고 막연하게 받아들였다.  북한에서 김일성이랑 건배를 하고 왔다더라, 만세를 부르고 왔다더라, 김일성 찬양을 하고 왔다더라 라는 소문들이 바로 그 근원지였다. 황석영 작가가 평양을 방문했던 일은 내가 '국민'학생 시절이였지만, 10여년이 지난 그 시점까지도 정말 그런 행동들이 무시무시한 - 그래, 거의 반역에 가까운 끔찍한 행동이라고 받아들였다. 난 얼마나 생각없는 고교생이었단 말인가. 무튼, 그런 편견은 대학 들어가서, 황석영 작가의 [오래된 정원] 을 읽고 나서야 깰 수 있었으니, 언론의 세뇌란, 그리고 획일적 교육이란 이렇듯 무서운 법이다.

 

 황석영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잊어버렸던 것들을 떠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의 무언가를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다. 때로는 자연히 잊힌 것들이, 때로는 억지로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린 것들 말이다. 인간은 좋은 것만 기억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습성이다. 언제나 우리가 지난날을 추억하며, '아 그 땐 좋았지' 라고 말하지 않는가? 분명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들, 행복하고 기쁜 것들의 총 합은 비슷 할 터인데, 희안하게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하다. 당연하다. 추한 것들은 자연스러운 방어기제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륵 지워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황석영 작가의 작품들은 가장 깊숙한 곳, 이중 삼중으로 콘크리트를 덮고 덮은 그 안의 것들을 퍼올린다.

 

 [바리데기] 를 읽으면서는, '아, 맞다. 북한 주민들도 우리 동포들이었지. 저 흙파먹고 살고, 풀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 다 우리 동족이었지.' 같은 것들이 불쑥 불쑥 솟아올랐다. 솔직히 잊고있었다. 군대에서 배운, 북한은 그냥 적敵이었으니까,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의 일 따윈 빨리 잊어버려야 했다. 전쟁이 나면 우리가 총칼을 겨눠야 할 북한 군인들의 부모들, 자녀들, 자식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만 기억해야 했다. [오래된 정원] 에서는 어땠는가.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소위 '민주투사' 들. 일부는 변절에 변절을 거듭하며 정치인으로 나서기도 하지만, 전과자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변두리에서 떠돌다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개밥바라기 별] 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겪었던 길거나 짧은 방황의 터널. 내가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어? 라며 살고 있고, 자녀들에게 혹은 아랫세대들을 조소의 눈길로 바라보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지 않았는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린. 잊혀버린. 잊으려고 잊으려고 애썼던 것들. '향수' 라는 단어로 포장하기엔 좀 더 과격하고, 고통스러우며, 처절하고, 더러운 것들.

 [장길산] 같은 대하 역사소설이나 [강남몽] 등 다른 작품들을 더 예로 삼지 않아도, 황석영 작가는 언제나 우리 사회의 치부를 향해 비수를 던져왔다. 근대화의 과정속에, 국가의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그늘 아래, 애국심이라는 이름 안에 가리운 수많은 고난들, 고통들, 핍박들. 그것들을 마치 눈 앞에 그려내듯 생생하게 펼쳐낸다. 그가 그려내는 사건와 인간 군상들은 지나칠정도로 리얼하다.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그 리얼리즘으로 인해 대부분의 독자들은 불편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찬탄해 마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그의 비수는 언제나 잔뜩 벼려져 있었고, 그 시퍼런 비수의 끝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정확했으니까.

 

 몇 년 전,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형과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또 하나의 미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곳은 모든 음식들이 많고 컸다. 1인분이라고 믿겨지지 않은 만큼 엄청난 크기의 스테이크와 피자, 그리고 감자튀김들. 난 먹다 먹다 남아서 어떻게든 포장해서 가지고 가려 했지만, 그 곳에서는 남는 음식을 포장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조금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미군들, 혹은 그의 미국인 가족들은 남은 음식들은 아낌없이 버리고 있었다. 형은 그것이 바로 '미국식 소비문화' 라고 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아니 부모님들만 해도 물건이란 최대한 오래 쓰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옷 한 자락, 소쿠리 하나까지도 정성들여 만들고, 알뜰하게 사용했다. 대를 이어 넘겨받을 정도로. 돌리고 돌려서 사용하고, 수명이 다 해도 그 재료를 다시 사용할 수 있을정도로. 하지만, 최근의 우리는 어떠한가?? 가장 빠른 속도로 버려지는 것들 중 대표적인 물건을 꼽으라면 휴대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 서랍 안에도 네대의 휴대폰이 잠자고 있다. 2000년에 처음 손에 쥐었던 핸드폰. 군대 다녀와서 바꾼 휴대폰, 그 뒤에 바꾼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바로 구입한 중고 휴대폰.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번호와 통신사를 옮기기 위해 해지한 휴대폰. 잃어버린 폰까지 결과적으로는 5대의 휴대폰을 10년 남짓한 시간동안 소비해버린 셈이다. 군대에 있던 시절엔 휴대폰을 쓰지 않았으니, 휴대폰 한대당 2년도 채 쓰지 못했다. 

 연간 음식물 쓰레기 양도 어마어마하다. 뿐인가, 컴퓨터, TV, MP3 플레이어, 전자수첩, PMP 등 엄청난 전자기기들이 수명을 반도 채우지 못한채 '쓰레기' 라는 딱지를 붙이고 쏟아져 나온다. 하루 석유 소비량은 또 얼마나 대단할까? 사람들은 일신의 편함을 위해 수많은 것들을 소비하고 있다. 바야흐로, 진정한 소비사회. 바로 자본주의의 화신이자, 분신이자, 본질이다.

 

 [낯익은 세상] 은 그 모든 불편한 진실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열네살이지만 열여섯이라고 나이를 불려 말해도 통할법한 덩치에, 말썽꾸러기이기도 해서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별명을 얻은 '딱부리' 는 엄마와 함께 '꽃섬' 이라고 불리우는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남편을 둔 홀어머니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어느 국가, 어느 시대건 머리가 굵기 시작한 아들을 엄마 혼자 키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딱부리의 엄마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고,  딱부리가 '아수라 반장' 이라고 부르는 옛 동무의 제안은 달콤했을터다. 아수라 반장을 따라 둥지를 틀게 된 '꽃섬' 은 다름아닌 거대 쓰레기 매립지였다. '분리수거' 라는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 정확히 어느 지역에 있었던 매립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종 산업 폐기물과 공업 폐기물이 함께 흘러드는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 꽃섬'. 그 쓰레기 더미 위에 삶의 터전을 세우고, 쓰레기를 뒤지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생존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쓰레기를 뒤지는 권리조차 돈으로 사고팔던 시절, 아수라 반장은 제법 큰 구역을 가지고 있는 조폭의 보스같은 '반장' 이었고, 그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딱부리의 엄마는 어렵지 않게 꽃섬에 터를 틀게 된다. 아수라 반장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머리에 화상을 입어 쭈글쭈글한 흉터가 있는 열한살의 아이는 약간 모자라 보였고, 이름은 '땜통' 이라고 했다. 아수라 반장의 아내는 땜통을 낳고, 결국 그들과 꽃섬을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갔다.

 그리고, 그 자리는 딱부리의 엄마가 차지하게 되었고, 딱부리와 땜통은 형제처럼 어울리게 된다.

 

 '꽃섬' 은 '난지도' 와 닮아있다. 수많은 쓰레기들이 무차별적으로 매립되던 곳이라는 점도 그렇고, 쓰레기가 쌓이기 전에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점도 그렇다. 꽃섬은 지금은 어마어마한 쓰레기로 뒤덮인 쓰레기 산이지만, 그 전에는 강이 흐르고 모래밭 포구와 한들거리는 수수밭, 줄지어 서있는 버드나무들이 있었고, 풀꽃이 가득 피어난 강가에는 어미소와 송아지들이 풀을 뜯고, 오리가 날아앉거나 물장구를 치는 모습들이 익숙한 아름다운 동네였다. 필경, 그러한 아름답던 광경들이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들로 뒤덮인 것은 부근에 생긴 도심 때문일 터다. 건물들을 세우며 생기는 수많은 건축 폐기물들을 도시 변두리 강 건너편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도시에서 나오는 각종 생활 폐기물들을 쌓아내기 시작했을터다. 

 작품 안에서 꽃섬과 연결되는 공간은 바로 근처 도시의 '백화점' 이다. 백화점은 자본주의 소비지향의 상징과도 같다. 욕망을 자극하는 곳인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곳. 매대에 진열되어있는 수많은 '소비재' 들. 백화점 직원들은 '맛깔나게' 상품을 진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보석은 더욱 반짝거리게, 옷은 더욱 아름답게, 음식은 더욱 맛있어 보이게. 가라앉아 있던 온갖 욕구를 퍼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욕구를 충족시킨 소비재들은 당연하게도 쓰레기가 되어 꽃섬으로 향한다. 도시 사람들의 뒷간인 셈이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 도시 안에서 치열한 돈의 경쟁을 이겨낼 수 없는 사람들. 그들 또한 필연적으로 도시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살아남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꽃섬으로 향한다. 그들이 먹고 사는 것은 쓰레기가 아닌, 충족되고 버려진 욕망의 찌꺼기이다.

 

 [낯익은 세상] 속에 등장하는 '쓰레기' 는 바로 '욕구' 의 메타포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욕구'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기반 에너지이다.  인간의 욕구란 그 포장을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쓰고 나면 더럽고 추해진다. 악취를 풍기고,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게 되는 쓰레기가 된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맞물리며 인류에게 최악의 결과물을 끊임없이 내보이고 있다. 그렇다, 바로 '쓰레기' 이다. 인간들은 결국은 쓰레기가 되어버릴 것들을 위해 아둥바둥 거리며 삶을 소비하고 있다. 자연을 파괴하고, 우리 스스로가 지켜내야 할 존엄성과 인간성을 부숴버리고 있는 셈이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꽃섬의 사람들 역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한 단상이다. 욕구 충족을 위한 끊임없는 경쟁. 그 안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동물과도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꽃섬의 사람들은 결혼의 개념도 없고, 정조나 의리의 개념도 없다. 딱부리의 엄마와 아수라 반장처럼 꽃섬 안의 남녀들은 쉽게 파트너를 바꿔가며 욕망의 한 부분을 채워가며, 쓰레기를 뒤적이는 삶을 산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욕구의 충족을 위해 자연을 파괴할 것은 물론, 인류가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전통 가치관의 파괴 또한 종용한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불꽃을 부채질 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광고한다. 백화점에 진열되어있는 상품들처럼, 여성을 진열하고, 남성을 진열한다. 사랑을 팔아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한다. 우정을 팔아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한다. 윤리를 팔아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한다. 그렇다. 욕구, 욕망을 위해 인간성을 팔라고 종용한다. 결국은 쓰레기가 되어버릴 것들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버리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팔지 않고 지키려는 사람들은 도태되고 밀려난다. 마치 작품속에 등장하는 신들린 여자 '빼빼엄마' 처럼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밀려가 버리는 것이다. 지금은 도깨비가 되어버린 꽃섬의 원래 주민들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쫓겨나고 만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도깨비들. 그것은 우리가 이 알량한 소비사회, 욕구충족이 최우선인 세상속에서 밀어내고 지워내고 무시하고 묻어버린 수 많은 우리의 전통 가치관과 윤리의식들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을 묻어버렸다는 사실까지 잊고자 한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런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수 많은 자연들을 파괴하고 건설한 도시들은 마치 자기들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이 위용을 뽐내며 서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났을때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를 입었던 후쿠시마 원전이 멜트다운에 가까워 졌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응용화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담수 프로젝트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절친이 멜트다운의 위험성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었다. 아주 간단히, 동북아 멸망에 가까운 시나리오였다. 인류는 물론 자연까지 엄청난 방사능 피해를 입히며 절대 예측이 불가능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방사능은 인간은 물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무시무시한 독성 물질이다.

 작품 말미에 황석영 작가는 덧붙이는 말을 통해 "도깨비가 사라진 것은 전기가 들어오면서 부터" 라는 문구가 있다. 인류가 무한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발견과 발명은 바로 '전기' 일 터. 그리고 원자력 발전은 인류가 가장 높은 효율로 '전기' 를 양껏 취할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발견이자 발명이 아닌가? 인류 역사상 무시무시한 원자력 사고들이 있어왔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에너지를 마음껏,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은 그리 쉽사리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닐터다. 지금 내가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는것, 그리고 그 리뷰를 적을 수 있는 것 모두 전기 덕 아니던가?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없다면, 우린 엄청나게 많은 욕구 충족의 기회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자본주의 세상의 원동력이 욕구라면, 전기는 욕구의 원동력이나 다름없다. 엄청난 위험을 안고 있으며, 얻기위해 많은 것들을 파괴해야 하는 '에너지'.

 

 자본주의는 아마 인류의 멸망, 그 순간까지 유지될 것이다.

욕구충족이라는 달콤한 맛을 본 인류는 이 위대한 체제를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황석영 작가가 덧붙임을 통해 쓴 문구처럼, 우리는 호랑이 꼬리를 잡고 달리는 소금장수 신세인 것이다. 꿈 같은 인생이고, 돌고 도는 인생이다.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평등한 욕구충족의 기회를 제공한다지만, 그것은 그 시작부터 궤변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욕구충족은 자본의 우위에 있는 자들만이 가능하고,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시작은 자본의 우위에 있는 자들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딱부리와 딱부리의 엄마가 결국은 꽃섬으로 되돌아 갔듯, 한 번 밀려난 자들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

 

씁쓸하고, 안타깝지만, 지금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꽃섬.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남들처럼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 역시 자라서,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을터다.

사람이 사는 곳은 그 어디든 그럴터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는 한, 모든 곳은 낯익은 세상이다.

모두 보듬어야 할 '우리들'이다.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들판의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나 바람에 한들거리고,

그을린 나뭇가지 위의 여린 새잎도 억새의 새싹도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

p.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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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버스괴담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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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산부터 서울까지 가로지르는 직통버스. 지금은 광역버스라고 부르는 이 버스는 꽤나 깊은 밤까지 운행하곤 했다. 난 일산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 버스를 이용해본 적은 없지만, 친구들이 아주 유용하게 이용하던 기억이 난다. 술에 취한 손님들을 태우고, 야근에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손님들을 태우고, 늦은 시간에 몸을 뉘일 곳으로 향하는 각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을 태운 심야의 직행버스. 대체로 손님들이 버스 안에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이 버스는 차내 불을 꺼주는 경우가 많고, 손님들고 그것을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적막한 버스 안에서, 한 취객이 난동을 피우기 시작한다.

 아, 버스 노선은 조금 다르다. 내가 언급한 버스는 일산과 서울이었지만, 작품 안에 등장하는 버스는 분당 - 서울 강남을 오가는 시외직행버스였다. 그리고 준호가 본 장면은 쉰살쯤 된 취객이 버스기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서울에서 시외로 빠져나가는 자동차 전용도로는 고속도로와 비슷하다. 자동차 전용도로는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도로이기 때문에 러시 아워가 아닐땐 제한속도 가까이까지 엑셀을 꾹꾹 밟아댈 수 있고, 심야 시간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와중에 버스 기사를 집적대기 시작하는 취객. 버스 안에는 준호를 포함해 중년 남성 한명과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성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 중년의 여성이 있었다.

 위기를 느낀 준호는 취객을 말리기 시작했고, 중년 여성과 여대생이 합세하고, 그 와중에 뜻밖의 사고로 취객이 사망하고 만다.

 

 2000년에 출간되었던 '200X 살인사건' 의 개정판인 이 작품은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재익 작가의 유명세도 유명세였지만, 당시 이런 류의 장르소설이 지금만큼 널리 읽히지 않을 때였기 때문일터다. 이야기의 흐름은 빠르고 막히는 곳 없이 시원시원하게 뻥뻥 뚫린다. 이재익 작가는 '속필' 로 유명한데, 그의 그런 스타일과 기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물 위주로 주요한 포인트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사건들을 연달아 빠르게 터뜨린다. 200여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이야기가 순식간에 종장을 향해 치닫고, 조금은 뻔한 반전이 있지만, 꽤나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미덕은 역시,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일터다. 이재익 작가가 그려내는 평범하고 단조로운 캐릭터들이 한가지 의도를 담은 속도감 있는 이야기의 전개에는 더욱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보다 농밀했다면, 좀 더 디테일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두께가 얇은 감도 없지 않지만, 이야기의 전개가 지나치게 빠르고 생략적이어서 꽤나 아쉽다. 그 밖에도 말이 안되는 부분들이 여럿 띄긴 하지만, 즐기기 위한 소설로서는 크게 부족하지 않다.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사건과, 선택의 순간들이 있을까? 아마,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때론 삶의 방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건들과 선택의 순간들이 있을테지만, 때론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과 선택의 순간들이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과 그런 순간들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의도치 않은 방향에서 다가오는 경우가 대부분일터다. 우리 조상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라고 했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갑자기 찾아든 사건 앞에서 이성을 잃고 결국 그것이 그릇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릇된 선택의 대가는 생각보다 참혹하고 끔찍했으며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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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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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어떤 기사에서 우리 세대를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 라고 지칭한 것을 본 적이 있다. 20~30대 전체를 통칭하는 듯 한 그 묘사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역사상 평균 가방끈이 가장 긴 세대. 어마어마한 등록금으로 인해 수천만원의 빚을 지며 대학으로 대학으로 몰려들 수 밖에 없는 세대. 졸업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신음하며, 세대 구성원 대부분이 고시원으로 몰려들고, 종국에는 구직도, 연애도, 결혼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세대.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이지만, 역사상 가장 무기력하며, 먹고사는 일이 가장 큰 문제인 세대. 486 세대는 우리 세대를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며 무기력함을 질타하고, 우리 세대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온 그 세대를 욕한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나락으로 가라앉는 현실은, 끊임없는 비에 잠겨가는 김애란 작가의 [물속 골리앗] 의 세계처럼 거대한 자연재해와도 같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풍경. 20대의 지상목표는 구직이고, 30대의 지상목표는 그 직장에서 버티는 것이거나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출렁이는 흙탕물 뿐. 내 몸은 작고 약한 뗏목 위에서 잔뜩 긴장한 채 '버틸' 뿐이다. 언제 가라앉을지, 언제 부서질 지 모르는 한없이 나약한 판자떼기 위에 얹혀있는 나의 육체. 이 무시무시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이미 죽어버린 부모의 몸을 붙든다. '캥거루 세대' . 그것은 88만원 세대의 또다른 이름이다. 신체적으로는 장성했지만, 부모의 주머니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세대의 다른 단상. 살기 위해서는 붙들 수밖에 없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말초적인 유혹을 탐닉한다. 이성에 매달리고 하루이틀밤의 유희에 집착한다. 온라인 게임속으로 빠져 자신을 잊고, 현실을 잊는다.  그것은, 그래. 현실의 고통으로 인한 갈증을 풀어주는 미지근한 사이다와도 같다. 오늘 하루를 이겨내게 해주고, 내일에 대한 의욕을 잠시 불러 일으켜주는 유희. 그것들은 우리 세대에게 있어 밥보다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에게 있어 가장 절망적인 것은 동 세대 안에서의 치열한 경쟁이다. 우리는 애초에 우리 윗세대와는 경제적으로 대결을 펼칠 수 없는 구조 안에서 태어났다. 우리 윗 세대가 영화 '매트릭스' 의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머신이라면, 우리 세대는 그 머신이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체 에너지를 공급하는 캡슐 속에 잠들어있는 인간들이다. 한 세대에서 2%안에 들어있는 사람들만이 윗세대가 만들어놓은 단상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세대 안에서 그 2%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경쟁, 경쟁, 경쟁. 도태된 자들은 무능하기 때문이다. 사회와 구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도태된 내가 무능하기 때문인 것이라고 주입받는다. 수많은 고학력자들은 자신들이 사회가 원하는대로 최선을 다해 최상의 코스를 밟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직장도 얻지 못하고, 연인에게 버림받고, 부모의 집을 벗어나지 못했음에 큰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가 못나서" 라는 자괴로 잉태된다.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대출을 받아서 대학, 대학원, 유학까지 모두 밟았지만, 남는건 아르바이트 자리와 10년동안 갚아도 모자랄 어마어마한 대출금 뿐인 것이다. 당연히 우리 세대는 '내가 못났으니',  '당연히 도태되지', '나는 졌다' 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윗세대들의 "네가 못났으니" , "도태되는건 당연하다" ,"넌 졌다." 라는 차가운 대거리로 말미암는다. 결국 이 세대의 모든 꿈은 결국 '돈' 으로 모아질 수 밖에 없다. 그 돈은 당연히 '먹고 살기' 위함이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세대.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와 권력은 자기네들의 틀 안에서 고스란히 세습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하면 할수록 꼬여가고 가면 갈수록 절망스러워진다. 김사과 작가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처럼, 온통 절망속에서 분노만이 재생산된다. 사회에 대한 분노라기 보다는 자신에 대한 분노이다. 도태되고 나약하고 무기력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는 폭력성으로 드러나고 무기력한 세대는 가상 세계속에 자신의 화신을 만들어 분노를 폭력으로 발산한다. 각종 비디오 게임과 온라인 게임, 그리고 연예인들. 타인의 아바타를 깨부수고, 살을 뭉개고 쥐어 뜯는 날카로운 톱날같은 악플을 끊임없이 달아댄다. 문득 이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진다. 순간순간 스쳐가는 말초적인 유희는, 잠깐동안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을 부시게 하는 점멸하는 빛과 같다. 세상에 자욱한 어둠을 확실히 인지하게 만들고, 더 어둡게 만들듯 절망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만들어 준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다시 말초적이고 순간적인 유희에 목메고, 다시 절망한다. 세상이 파괴되어 가는 느낌이다.

 

 수많은 가치관과 개념들이 변해간다. 김이환 작가의 [너의 변신] 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관과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절망적인 삶과 절묘하게 맞물린다. 결국 '자본주의' 란 욕망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욕망이 제 1순위이다. 자신의 정체성까지도 욕망에 따라 바꿀 수 있다. '돈' 만 있으면. 삶의 모든 가치는 '돈' 이다. 황석영 작가는 '낯익은 세상' 의 후기를 통해 "호랑이 꼬리를 잡고 달리는 소금장수 신세" 에 비유했다. '생명' 조차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 아니, 사람 그 자체를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 돈이란 욕망이고, 인간이란 욕망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개념속에서 사람은 욕망을 제어함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욕망의 제어, 욕구의 제어는 인간성의 제 1 원칙이나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욕망과 욕구는 추구해야 할 제1의 원칙이다.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세대는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욕망은 제어하는 것이라는 것조차 배우지 못했다. 그저 '돈' 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는것. 그래. 그것이라고 배웠다. 결국 인간은 욕망의 노예, 그리고 돈의 노예가 되었다. 우린 이미 그런 세계 속에서 태어났고, 배워왔으며, 자라왔다. 

 

 우리가 지켜왔던 전통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세계는 김성중 작가의 [허공의 아이들] 에 등장하는 세계처럼 허공으로 분해되어 가고 있다. 속수무책이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킬 생각도 없다.  그렇다. [물속 골리앗] 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끊임없이 물속으로 침잠하는 세상과 끊임없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세상. 이 두 작품은 이 작품집 안에서 가장 닮아있다. 마치 쌍둥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가장 또렷한 이미지로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헤쳐나가는 과정 또한 닮아있다. [물속 골리앗] 의 화자는 어머니와 함께 외딴 방에 고립되었다가 흙탕물이 넘실대는 위태로운 '바깥세상' 으로 나아간다. 어머니의 시체를 뗏목에 단단히 묶고,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절망적인 순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계속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으로 삼는다. [허공의 아이들] 역시 비슷하다. 소년과 소녀 역시 종국에는 망망한 허공을 떠다니는 집 안에 고립된다. 그리고, 아마 소년 또한 소녀와의 기억을 삶에 원동력으로 삼아내리라.

 

 작품집은 비교적 어둡고 파괴적이다. 혹자는 '아니 뭐야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본단 말이야?'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세대로서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대단히 크게 공감된다. 이 작품집에 실린 작가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나이대이다. 지난해까지 작품들의 메시지가 주로 '소통' 이었던 것에 비해 확실히 최근에는 보다 농밀하고 직접적으로 현실의 암담함을 그리기에 주력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에 맞물려, 보다 대중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많이 포함된다. 작가들의 문장은 지나치게 꾸며지지도, 절제되지도 않은 담백하고 담담한 경우가 많으며, 확실하게 공간과 사물, 관념과 이미지가 혼재된 속에서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느낌이다. 작가들이 그려내는 세상은 관념적이긴 하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작품들 모두가 애매하거나 모호한 느낌이 전혀 없다. 위에 언급한 두 작품인 [물 속 골리앗] 이나 [허공의 아이들] 의 경우엔 상당히 SF적인 설정과 세계관이 보여지지만 대단히 현실적이다. 김사과 작가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의 흐름을 표현한 작품이지만, 그것들이 눈에 보이듯 또렷한 색채와 경계를 가지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작품들이 현실을 암담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화자들은 꾸준하게 시도하고 있다. 파괴되고 있는 현실과 자아를 그리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이런 파괴적인 '현실' 이 우리의 '자아' 를 파괴하고 있으며,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이런 현실에 맞서 자아를 지켜낼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절망을 희망을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인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한 서구 유럽 사회들에 비해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긍정적인 요소는 바로 '역동성' 에 있다. 실제로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 있는 역동성이 우리 사회엔 아직 존재하고 있다. 작가들은 현실을 파괴적으로 그려내지만 끊임없이 제시한다. 바로 그런 '현실' 에 적응해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말이다. 여전히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고, 소통에 목말라 하며, 대화하기를 멈추려 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알아가면서' 시작된다. 현재 20~30대를 구성하는 세대들은 주로 70년대 중반~8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급격한 과도기의 시대에 태어났고, 미성숙된 사회 속에 던져졌다. 우리는 미완성된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애매한 개인주의로 살아오고 있다.  세상이 더 나아질지, 아니면 더 암담해 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은 온 지구가 물에 덮일때 까지 계속되는 비와 같고, 가루 하나 남지 않고 분해되는 세상과도 같다. 확실한 건, 절망도, 희망도 모두 삶이 계속 될 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낙오도 우리의 탓이 아니고, 가난도 우리의 탓이 아니며, 고립과 외로움도 우리의 탓이 아니다. 암담하고 어두움 속에서 캄캄하다고, 앞이 안보인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굶어 죽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우리가 포기하고 주저앉는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 자신의 유일한 실수이자 잘못이 될 것이다. 우리는 빛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니면 어둠에 눈이라도 익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대화해야 한다. 뗏목을 만들어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듯, 무너져 내린 아스팔트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넘어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던 그 집으로 가듯.  
 또 하나, 가장 쉽고도 확실한 것 한가지는 [떠, 떠, 떠 ....떠]듬 거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든다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이 있을때, 삶에 작은 방향키가 생길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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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기 세트 - 전6권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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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C통신의 '하이퍼 터미널' 접속음. 팩스의 접속음과 비슷한, 치~~ 하는 잡음과 삐요오 삐요오~ 하는 그 독특한 기계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파랗고 까만 바탕 색 모니터 속에 픽셀로 찍혀있던 글자들. 그 안에서 생명력을 얻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수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중 단연 뛰어났던 것은 흔하디 흔한 귀신 이야기에, 흔하지 않은 등장인물들이 뒤섞인, 뻔하디 뻔한 퇴마 이야기에, 뻔하지 않은 드라마틱한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뒤섞인 이야기 [퇴마록] 이었다. 현실과 비현실, 상상력과 통찰력, 액션과 드라마, 전통과 현대,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들이 절묘하게 비벼진 [퇴마록] 은 한국형 퇴마물의 효시였음과 동시에 한국형 판타지의 출발점이었고, 영화로, 게임으로 변형되며 컨텐츠의 멀티 유즈의 첫 발자욱 - "원소스" 의 위대한 첫 발자욱이자 문단이나 평단의 인정이 아닌, 순수한 대중들의 지지로 빛을 본 첫번째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일본 문화 전면개방과 맞물려 일본 라이트 노벨이나 퇴마물 등 장르소설들이 급속도로 유입되며 한국형 판타지 소설들이 PC통신상에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고, [퇴마록] 의 엄청난 성공과 더불어 그런 PC통신 출신 장르 소설들이 출판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게다가 IMF 와 함께 소설 대여점이 합법적인 사업 형태로 인정받으면서 소위 "대여점 용" 장르 소설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 그 발원지가 바로 PC통신, 그 아버지는 [퇴마록], 즉 PC통신계의 '본좌' 이우혁 작가일 것이다.

 이우혁 작가는 그렇게 자신이 만든 한국 판타지 소설의 필드 위에서 본격적으로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퇴마록 완결 이후 세상에 내놓았던 작품 [왜란 종결자] 가 그것이었다. [왜란 종결자] 는 당시 대여점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당시 한국의 판타지 소설과는 그 궤 자체가 완벽하게 다른 작품이었다. 대여점의 폭발적인 증가세와 더불어 함께 불어났던 한국 작가들의 판타지 소설들은 소위 '일본식' 판타지인 '로도스섬 전기' 나 일본 라이트 노벨인 '슬레이어즈' 의 아류작에 불과했다. 엘프, 정령, 드워프, 호빗 등 유럽식 판타지에 일본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화려한 액션, 그리고 한국 무협지 풍의 무공들이 뒤섞인 만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수준높은 이야기를 짜내는 작가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결국 유럽식을 일본식으로 가공한 라이트 노벨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한국 판타지 소설계에 등장한 [왜란 종결자] 는 '역시 이우혁'! 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 했다. 임진왜란이라는 익숙히 알려진 사건 속에 실제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까지 녹여냈던 한국형 팩션(Faction - Fact와 Fiction을 섞은 합성어)이자, 대 유행했던 엘프, 드워프, 오크, 오우거 같은 뻔한 종족들까지 단숨에 배재하고 저승사자, 도깨비등과 같은 우리네 전통 설화에서 이끌어낸 종족들까지. 그리고 사용하는 아이템이나 기술들 또한 철저하게 전통적이었고,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심지어 당시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재해석에 가까운 전개까지!! 진정 새로운 모습의 판타지 소설을 선보였던 것이다.

 당시에 그저 만화적인 상상력만으로 맘대로 아무렇게나 글을 써대던 수많은 판타지 작가들에게 '판타지 작가로서의 길' 을 정확히 제시한 작품이었다. '대여점' 은 신인 작가들에게는 최소한의 판매부수를 보장해주는 장점인 동시에, 중견 작가들에게는 대여점 이상의 책을 팔 수 없는 단점이기도 했다. 때문에 작가들은 단순히 누적부수를 늘려 수입을 늘리기 위한 글을 쓰는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등장한 [왜란 종결자] 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역사고증, 그런 역사적 사건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폭넓고도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제대로 짜여진 판타지의 틀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왜란 종결자] 는 바로 이 작품을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음 밝혀지며, 수많은 장르소설 팬들을 흥분시켰으니, 바로 [치우천왕기] 이다. 이 리뷰를 적고 있는 내가 수년 전, 군대 가기 직전까지 정말 열심히 읽었던 작품 [치우천왕기] !!

 당시 한국 판타지 문학계는 [왜란 종결자] 이후로  작가들 사이에서도 일대 격변이 일었고,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기 위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나, 몇몇 작품들을 제하고는 사실 습작에 무방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그 와중에 등장한 [치우천왕기] 는 그야말로 한국형 판타지의 종결자였다. 역시 치밀한 사전조사와 엄청난 현장고증과 역사고증, 마치 실제 그 시대를 살았던 것 같은 치밀한 인물과 상황묘사, 배경묘사들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5권인가 6권까지 읽어보고 군대에서 전역했으나, 치우천왕기는 완결이 나지 않았다. 후에 PC통신에서 열광했던 독자들이 그대로 넘어온 모 온라인 동호회와 각종 뉴스를 통해서 이우혁 작가의 송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결국 치우천왕기는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완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에 다른 책의 리뷰를 통해 살짝 언급한 적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판타지 소설을 볼 때 '좋은 작품' 을 가늠하는 기준은 단연 '세계관' 이다. 물론 판타지 소설 또한 '소설' 이기 때문에 소설적 가치들도 따지지만, 특히 판타지에는 '세계관' 이라는 요소를 덧붙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훨훨 날아다닌다고 치자. 이들이 어떤 원리로, 어떤 방법을 통해 어떻게 날아다니며, 날아다니는 사람들과 날아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런 것들이 설득력이 충분하냐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훨훨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분명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른 모습일 것이며, 사람들의 생각, 사상, 습관 또한 완벽하게 다를 것이다. 어쩌면 헤어스타일, 피부 색, 감각기관, 팔다리, 손가락, 발가락 갯수가 다를수도 있다. 어쩌면 네 발로 기어다닐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현재 모습으로 진화한 가장 큰 요인은 '직립보행' 때문이므로. 가느다란 뼈대 두개로 물이 가득한 가죽 주머니를 오른쪽으로 던졌다, 왼쪽으로 던졌다 하며 균형을 잡아가는 뇌의 능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진화의 결과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직립보행 할 필요 없이 날개로 파닥파닥 날 수 있었다면, 혹은 날개 없이 붕붕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다면, 지금 모습처럼 진화했을리가 없다. 지금 우리와 같은 모습이면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에 걸맞는 타당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마법을 쓰는 세상이라면 역시 사람들의 생각, 사상은 물론 사회의 모습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바로 '세계관' 이고, 그것들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느냐가 바로 판타지 소설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그런 기본적인 철저한 세계관이 정립되어있지 않다면, 그 작품은 판타지 소설이 아닌 그냥 상상력을 지맘대로 끼적댄 낙서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물며,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파고 들어가는 작품이라면 어떨까? 역사의 반은 허구와 상상력으로 이루어져있다. 게다가 문자가 발명되기 전, 문명시대 이전 시대는 빈약한 후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중국 역사에서도, 하-은-주 시대는 전설시대로 분류되고, 비슷한 시기의 우리 역사인 고조선 시대 또한 그렇게 접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우혁 작가는 아예 '판타지 소설' 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활용해 그 시대를 풀어냈다. 하지만, 역시 대가답게 철저한 현장 고증과 자료 검증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배경을 그려냈고, '신수' 와 '주술' 이라는 개념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그려냈다. 그 뿐아니라, 그 이후 시대에서는 왜 신수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고, 주술의 개념이 변화했을까에 대한 부분까지 짚어냈다. 그런 디테일한 부분들이 판타지 소설이지만 세계관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뚜렷한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뚜렷한 인과관계를 통해, 세계관은 작가의 전작인 [왜란 종결자] 를 아우르고, 심지어 '맥달' 이 등장하기도 했던 [퇴마록] 의 세계까지 아우른다. 즉,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현실 세계까지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 있는 '현실적인' 세계관이 완성된 것이다.

 

 작품의 초반부는 작가가 개정판 서문에도 밝혔듯, 지나치게 친절하게 세계관을 설명하려 한 부분이 존재한다. 발귀리 선인과의 만남에서는 8계에 대한 설정이 장황하게 설명되서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그 부분이 결국 [왜란 종결자] 의 세계관을 아우르기 위한 선행작업이었던 셈이다. 초반부를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치우천과 치우비로 불릴 희네와 나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치우천과 치우비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대하 소설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즉, 판타지 소설이지만 허무맹랑하게 주인공들이 눈 앞에 시련들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는 것이 아니다. '정립' 작가가 그려냈던 '광개토 대제' 처럼, 그리고 이문열 작가가 그려냈던 '대륙의 한' 의 근초고왕처럼 치우천과 치우비 형제는 죽을동 살동 말 그대로 피눈물을 흘려가며 차근차근 시련을 이겨낸다. 이야깃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시련이 크면 클수록 독자들은 더욱 깊이 이입된다. 우리가 영웅 서사의 원형으로 잘 알고있는 '니벨룽겐의 반지' 의 지그프리트를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홍길동만 봐도 그가 겪는 시련은 평범한 것을 넘어선다. 서자로 태어나 거대한 사회적, 신분의 벽을 절감하는 것은 물론, 새어머니라고 부를수도 없는 아버지의 부인에게 목숨을 위협받는다. 가족도 배경도, 친구도 잃고 혼자가 되는 홍길동. 광개토대제나 근초고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맨몸으로 꿋꿋하게 일어나서 악한 길로 빠지지 않고, 선한 길을 걸어가서 끝끝내 자기 희생적인 신념을 지켜내는 인물, 그를 우린 영웅이라고 부른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치우천과 치우비 형제 또한 그러한 선천적 시련과 후천적 시련들을 하나 하나 이겨나간다. 그러한 끊임없는 시련에 괴로워하고, 수많은 위협과 유혹들, 그리고 수많은 의문, 의문, 의문들. 치우천과 치우비 형제는 때론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버려가면서도 끝끝내 나아간다. 나아가고, 나아가고. 너무 쉬운 길이 있어 보임에도, 피눈물을 흘리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어렵고 험한 길을 꾸역꾸역 헤쳐나간다.

 

 현실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눈 앞의 시련을 쉽게 이겨내지 못한다. "나에게 왜 이런일이??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나에게만?? 저 사람은 편하게 살고있는데, 왜 나만 괴롭고 어려워야되?" 너무나 쉽게 그렇게 단정짓고, 그러한 시련들로부터 피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어리석은 방법인 '죽음' 을, 역시 너무나 쉽게 택한다. 그러한 정신적 나약함을 세대 전체로 돌릴수도 있을 테지만,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어느 세대에나 많았을터다.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 강인함을 키울 수 있는 너무나 쉬운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독서일 터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도 과거부터 전해오는 영웅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으로 태어나 인종차별을 당해왔고, 게다가 여성이었기에 성차별도 당했으며, 10대때 강간당하고 유산까지 겪었던 그녀가 수많은 사람들의 멘토로 인류 공동체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역할은 단연 '독서' 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 강점기, 시련에 빠진 민족을 위해 역사속 영웅들을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렇다. 바로 역사와 역사속 영웅들을 사람들에게 '읽힌' 것이었다. 이러한 위인전들은 한 사람이 맨몸으로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과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시련에 처했을때,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거대한 의문이 생겼을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고통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회비용' 이란 것은 단순히 경제활동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불교에는 '인과율' 이라는 것이 있어서, 지금 내가 하는 이 악행은 언젠가 반드시 배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고 말한다. 불교 뿐 아니다.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금 나의 행동은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을 받기 마련이다. 원인과 결과. 그것은 세상 모든 이치를 관통하는 진리이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신념' 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지불했는가? 그리고, 자신이 지켜내야 할 '신념' 과 자신이 지불해야 할 그것의 가치를 어떻게 비교했는가? 더 큰 것을 위해, 어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 그 찰나의 선택에서 어떤것을, 어떤 마음으로 선택했을까.

 

 이우혁 작가가 [치우천왕기] 를 구상할 때,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이미 최고의 작가였고, 엄청난 인세를 벌어들이는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수년간 곰팡내 나는 고서적들을 뒤진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이미 다른 작가들은 상상력만으로도 별의 별 말도 안되는 소설들을 쏟아내며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고, 이우혁 작가 또한 검증된 스토리 텔러로써 아무 얘기나 써도 독자들이 달라붙었을텐데, 왜 그렇게 힘들게 자료 조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인가?? 물론 그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겠지만, 그 욕심은 '한국의 영웅을 부활시킨다' 는 명제로부터 시작된 것일터다.

 '영웅' 은 어디에나 필요하다. 오죽하면 미국이라는 거대 사회와 거대한 문화의 주춧돌이 '슈퍼맨' 이었을까. 아직도 수많은 미국의 어린이들은 '슈퍼맨' 을 가장 닮고 싶은 위인으로 손꼽는다. 아이들은 단지 슈퍼맨처럼 날고싶다거나, 행성을 옮길만한 힘을 갖고싶어서 쫓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슈퍼맨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닮고싶어한다. 어떠한 적이 나타나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희생정신, 아무리 사악한 적도 인권과 생명을 존중해주는 자애심, 신념을 가진 행동에 한 톨 부끄러움이 없는 당당함. 완벽히 창조된 '캐릭터' 이지만, 슈퍼맨은 이야기를 통해 생명력을 얻고, 미국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 완벽히 창조된 '캐릭터' 에 숨을 불어넣고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바로 '이야기' 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디테일하고 인과관계도 뚜렷하며 너무나 잘 짜여진 '이야기'. 슈퍼맨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들의 세상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고뇌를 겪고 시련을 겪는다. 인간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유혹에 시달린다.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한 인간이 지구의 정복자가 아닌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 과연 성장기 때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친구들과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욕망을 어떻게 제어했고, 차별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나쁜 유혹들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이런 수많은 디테일함들이 수십년동안 꾸준하게 쌓이면서 '슈퍼맨' 은 한 '사람' 으로 각인되어 수많은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스포츠 스타들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맨몸으로, 수많은 부상들과 위협을 이겨내고 거대한 상대를 당당하게 맞서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영웅을 본다. 리오넬 메시가 호르몬 이상증후군을 이겨내고 세계 최정상에 우뚝 서는 모습, 유럽에서 인종 차별과 부상을 끝끝내 이겨내며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각광받는 박지성의 '이야기' 를 통해서 말이다. 이우혁 작가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영웅이 이미 수천년 전부터 존재해 왔음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러한 '디테일' 을 획득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고, 결국 이렇게 우리 눈 앞에 '치우천왕' 을 보여주었다.

 동북공정에 맞선다는 단편적인 해석도 좋다. 그래봤자 가상인물이라는 비아냥도 좋다. 결국 판타지 소설이지 않느냐는 조롱도 좋다. 다시 말하지만, 미국 어린이들은 슈퍼맨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스스럼 없이 꼽는다. 욕심을 버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언제나 타인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가치를 최선으로 삼는 '스타워즈' 의 '제다이 나이트' 들도 있다. 중국이 숭배하는 영웅들은 다른가?? 그들이 숭배하는 탕왕이나 무왕 같은 영웅들도 모두 전설시대의 신화같은 인물들이다. 관운장은 어떠한가? 그들이 숭배하는 관운장은 역사속 인물 모습 그대로인가? 위에도 언급했지만 역사의 반은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허구이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겉모습도 아니고, 그 사람의 업적도 아니고, 그 사람의 계급이나 지위도 아니다. 그들은 그의 정신을 숭배한다. 그리고 그들에겐 모두 공통점이 있다.

 목숨을 쉽게 여기지 않았고, 어떠한 시련 아래에서도 당당하게 그것에 맞서 극복해나가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사랑과 관용으로 아군과 적을 모두 포용했다는 것이다. 치우 형제처럼 말이다.  

 

 너무나 쉽게 '삶' 의 스위치를 내리는 세상이다. 그렇다. 때론 이 고달픈 삶 속에 태어난 것이 내 의지가 아니라면 적어도 계속 살지, 아니면 그만 여기서 멈출 지 정도는 내가 선택하게 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투정을 부리고 싶을때도 있다. 마치 불을 끄듯, 삶의 스위치를 내리고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편하게 생각될 정도로 극심한 고통과 시련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럴 땐, 지키고 싶은 것을 떠올려 보라. 치우천은 '세상' 이라는 큰 꿈을 꾸었지만, 동생인 치우비는 '형님' 이라는 꿈을 꾸었더랬다. 치베는 '우정' 이라는 꿈을 꾸었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이름없는 모든 사람들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인물들처럼 크진 않았지만, 치우천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며 '자식' 이라는 꿈을 꾸었고,'아내' 라는 꿈을 꾸었으며, '집' 과 '자식' 이라는 꿈도 꾸었다. 그리고 당연히 '돈, 재물' 이라는 꿈도 꾸었다. 그 꿈은 이루고 싶은 꿈이었으며, 지키고 싶은 꿈이었고, 삶을 지탱해나가는 굵은 밧줄이었다. 

 어렵지 않다. 그러나, 쉽지도 않다. 하지만, 평생 한번 쯤 꿔볼 만한 것이다. 지금의 삶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 꿀 만하다. 언제나 영웅은 난세에서 나오기 마련, 또 아는가? 지금 이 책을 읽는 나나 당신이 '세상' 이라는 꿈을 꾼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다가오는 시련에 당당하게 맞설 준비를 한다면, 충분히 될 수 있다.

 '치우천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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