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서각 - 한밤에 깨어나는 도서관 보름달문고 43
보린 지음, 오정택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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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바야흐로 스토리의 시대이다. '컨텐츠' 의 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이야기' 를 담고자 한다. 심지어 자동차의 타이어 하나에게도 스토리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야기는 생명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받아들여간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아바타에 유저를 이입시키기 위해서도 설득력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의 설득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은 대상에 이입된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 그것은 결국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충분한 인과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사실, 우리의 현실은 논리적인 개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깊이있게 살펴보면 무슨 일이든 뚜렷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뚜렷한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이야기는 오히려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작품들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작품들 속에서 인과관계를 찾으려면 작품 밖의 상황들까지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르소설은 바로 그 속에서 잉태되었다.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현실의 부조리. 부조화. 현실의 부조리와 부조화를 드러내기 위해서. 때로는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감정, 상황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완벽하게 가공된 세상을 그리고자 했다. 공상 과학 소설을 포함한 판타지 소설들. 그리고 각종 미스테리 추리물들. 그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논리적인 개연성을 가지고 있고, 그 무엇보다 뚜렷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세계. 그곳이 바로 장르소설의 세계이다.

 

 발상, 캐릭터, 이야기, 흐름과 호흡. 장르소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미덕들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든 소설들이 추구하는 미덕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소설 작가들은 스스로를 "사기꾼, 뻥쟁이" 라고 일컫지 않던가?? 얼마나 진짜 같은 거짓말이냐에 따라 소설의 역량은 결정된다. 그렇다면 장르 소설이야 말로 독자들과 가장 정정당당한 대결일 수도 있다.)   

 '장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발상과, 그 발상으로 만들어진 세계관 속에 불협화음 없이 녹아있는 설득력있는 캐릭터, 그리고 그 세계관 속의 캐릭터들이 펼쳐내는 또렷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 과 캐릭터들이 풀어나가는 '에피소드' 의 적절한 분배, 그리고 독자들의 호흡을 잡아 당겼다가 밀었다가, 모았다가 터뜨리는 완급조절. 이 모든 것들을 단순하게 스토리 텔링이라고 부를 수 있을것이다. 뛰어난 이야깃꾼들. 위대한 스토리 텔러들은 이것들을 적절히 갖추고 있었고,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단 다섯줄의 글로도 독자를 울릴수도, 웃길수도. 때로는 호흡하는 것을 잊게 만들수도 있다.

 

 [귀서각] 은 이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훌륭하게 품고 있다. 이 작품의 본질은 성장소설이지만, 그 토대는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것도 판타지. 게다가 한국의 여러 전통 설화들을 양분삼고 있는 거대한 나무이다. 먼저 작품이 갖고있는 세계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국의 전통 세계관에 기인하기 때문에 크게 새로울 것은 없다. 귀신과 도깨비들. 귀신들이 갖고있는 몇몇 규칙들. 그리고, 귀신과 대치관계에 있는 신령들. 그 모든 설정들은 우리가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크게 거부감이 일지 않는다. 작가가 새로 창조해낸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것들을 잘 조합해 익숙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캐릭터들 또한 그 디테일이 놀랍다. 말 더듬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구오' 와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소녀 '제이'. 부모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구오의 행동이나 반응은 전형적이지만 대단히 디테일하기때문에 누구나 쉽게 설득된다. 일체의 위화감 없이 구오가 받아들여지고, 쉽게 이입된다. 구오와 제이가 [귀서각] 의 세계에서 겪는 사건들은 마치 롤플레잉 게임의 그것과 같다. 퀘스트가 주어지고, 그것을 해결하면 아이템이나 경험치가 쌓인다. 이런 익숙한 패턴 또한 거부감 없이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안내한다. 

 작가는 '재미' 를 위한 조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역시 특별할 것 없지만,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며 독자들을 차근차근 이야기의 끝으로 이끄는데, 마치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를 보는 느낌이다. 교과서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이야기. 독자들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완벽한 호흡. 충분한 볼거리. 거기에 교훈과 감동까지.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것을 딱 한가지만 꼽자면, 결국 주인공. 즉 화자일 것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이 작품은 소년 '구오' 의 성장 스토리이다. 부모님과 말더듬 때문에 인간관계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득한 소년 구오. 누구나 한번쯤 거쳤을 어린시절.그 중 가장 '어두운 부분' 만을 모아서 발현 시킨듯한 구오와 제이. 어린 아이들의 세계는 한정적이다.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곳. 집, 학교, 학원. 아이들의 세계는 그처럼 좁고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받는 변화로 인한 충격은 어른들이 받는 그것보다 훨씬 날카롭고 깊으며 치명적이다. 아이들의 세계의 인간관계 또한 제한적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세상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며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더욱 강렬하며, 그것은 심리적인 외상을 남기고 결국 영원히 남는다. 그 중 부모에게서의 무관심, 혹은 상실은 아이에게 있어 세상 전체가 뒤집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이다. 아이에게 부모란 신이고, 세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어른에게도 마찬가지 이다. 부모에게 아이의 상실은 역시 인생 전반의 상실과도 같다. 작품속에서 구오와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대상인 '송헌' 은 바로 가족을 상실한 가장의 표상이다.

 

 성장이란 통찰력이다. 구오는 눈 앞에 부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단순히 부모가 자신을 버린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당연하다. 아이들에게는 그 이상을 바라볼 통찰력이 없다. 대부분의 통찰력은 선험적 지식, 즉 경험을 통한 지식으로 쌓여 나가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안기고, 챙김 받고, 혼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가 없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먹이고,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주기 위해 매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구오는 자신이 버림받고 미움받는 존재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는 폭력이나 말더듬 같은 행동으로 표출된다. 제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이는 구오와는 반대로 심리적 상처가 아닌 육체적 상처로 인한 충격에 쌓여있던 아이였다. 결국 구오와 제이 모두 귀서각에서의 하룻밤을 통해 자신이 알지 못하던 세계, 즉, 부모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그럼으로 한단계 성장하게 되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듣게 되며, 맡을 수 없던 냄새를 맡고, 할 수 없었던 말을 하게 된다.

바로 "원망하지만 그리워한다는 것" 도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 역시 2011년에 문학동네에서 발표된 [가노코와 마들렌 여사] 라는 작품속에서 저자인 마키에 마나부가 작중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지혜를 깨쳐 세상이 훨씬 넓어지는 것" 처럼 말이다. 머리에서 '뽁' 라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로 '통찰' 이라는 능력을 습득하게 되는 순간이다.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레벨업을 하며 없었던 기술이 생겨나듯.

 

 전형적인 플롯에 교과서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씌여졌지만, [귀서각] 은 대단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작가 '보린' 의 세계는 논리적이고 규칙적이며 규칙에 맞춰 논리를 무시하고, 논리적으로 규칙을 무시하기도 하는 등, 대단히 변화무쌍하고 설득적이다. 뿐만 아니라, 게임 시나리오로 데뷔한 작가답게 마치 롤플레잉 게임처럼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 해 나가며 작은 에피소드들을 모아 큰 이야기의 흐름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 정말 세련됐다. 특히 클라이맥스의 반전들은 소름돋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그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도깨비와 귀신, 그 밖의 존재들도 전통적인 냄새를 풀풀 풍김과 동시에 환상적이고 매력적이며 익숙하면서도 신선하다. 마치 '해리포터' 를 처음 봤을때의 느낌이랄까. 충분히 '해리포터' 에게 불꽃 싸닥션을 날리며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만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긴 호흡으로 보다 디테일하게 서술해 나갔어도 좋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보린 작가의 앞으로의 작품들이 더더욱 기대된다. 한국의 전통 세계를 기반으로 한 [귀서각] 의 완성도 높은 세계관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 나와도 좋을 것 같고, 좀 더 보완된 새로운 세계관을 들고 나와도 충분히 맛있게 잘 살릴 것 같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클라이맥스 부분에서의 호흡 속도라고나 할까. 아마 아이들용 책이라 분량에 제한이 있어서 클라이맥스 부분은 지나치게 힘겨운 느낌이었다.

 허나 충분히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대단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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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반양장)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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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두께에 노란 표지.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표지 일러스트.
도톰한 재질의 종이에 큼직한 글씨, 10페이지 정도에 한번씩 등장하는 한두 페이지짜리 삽화.

그렇다!!! 이 책은 동화책이 확실하다. 심지어 화자조차 동화 작가이고, 등장인물들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이다. [완득이] 라는 청소년 소설로 센세이셔널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던 김려령 작가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확실하다.

하지만, 세상에 연령구분이 있는 책은 없다. 책을 즐기는 방법은 한가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훈을 주는 것이 목적인 글이라고 해도, 교훈만 있을 수는 없다. 독자가 이야기를 접하는 방식과 시각에 따라 메시지는 천변만화 한다. 이 작품 또한 동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단순히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이 작품은 분명 '부모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밖동네" 같은 유머는 분명 어린이를 노린 것이 아니잖아?!

 

 지난해, 내가 보고 펑펑 울었던 애니메이션 중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벼랑위의 포뇨] 라는 작품이 있다.

외항선원인 아버지와 노인요양원 간호사인 엄마와 함께 섬마을에 살고있는 '소스케'와 일찍 엄마를 여의고 바다의 신인 아버지 밑에서 홀로 자란 인면어 '포뇨' 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 감정선을 건드린 것은 소스케와 포뇨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스케와 포뇨의 부모들과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 이었다. 바닷가 섬마을에서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은 택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소스케의 아빠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들을 위해 좀 더 벌이가 좋은 직업을 구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직업은 먼 바다로 나가 오랫동안 일을 하는 외항선원. 수십일동안 사랑스러운 처자식을 볼 수 없지만,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그정도의 희생은 감수하고자 한다. 소스케의 엄마 또한 비슷한 처지. 남편만 믿고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아이를 혼자 두는 시간이 걱정되지만,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돈을 벌어야 한다. 소스케는 자연스럽게 노인 요양소의 노인들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고, 아이의 마음은 점점 조숙해진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보면 슬프다. 그리고, 자식과 떨어져야 하는 부모도 슬프다.

이 작품 또한 그런 부모들이, 아이들이 등장한다.

 

 동화작가 오명랑은 작가 데뷔에 성공하지만, 세상 모든 작가들에게 등단은 첫 관문에 불과하다.

후속작을 내지 못하고 어느새 백조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자, 새언니의 의견에 따라 다른 일을 병행하기로 하고, 아파트 단지 내부에 광고 전단지를 붙이기 시작한다. "잘 듣는 아이가, 말도 잘한다!" 는 모토를 대문짝만하게 써붙인 "오명랑 동화교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대단해서, 이런 단순한 광고 문구를 보고도 문의 전화가 몰려든다. 그리고 1달 무료라는 문구에 힘입어 모여든 세명의 아이.

초등학교 오학년 종원이와 이제 일학년인 종원이의 동생 소원이. 그리고, 동화작가가 꿈이어서 광고 전단지의 "동화작가 오명랑" 이라는 이름만 보고 득달같이 달려왔을 초등학교 오학년 나경이. 오명랑 동화교실은 모토대로, 오명랑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 듣기만 하면 되었다.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명랑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의 제목은 '그리운 건널목씨'

 

 동화작가 오명랑과 종원, 소원, 나경이는 정확하게 '작가' 와 '독자' 의 모습을 닮아있다. 

작가는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독자는 작가가 하는 이야기에 반응한다. 의구심을 품거나, 호기심을 갖거나, 그 대로 이해하려고 한다. 때로는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의 메시지를 단박에 이해하기도 한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해하기도 한다.

 작가가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

세상에 어떤 이야기가 가장 완벽하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장,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완벽한 묘사, 감정이 넉넉히 묻어나는 감칠나는 수사법,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놀라운 연출, 개성이 뚝뚝 묻어나는 매력저인 캐릭터들. 그래, 그것들이 필요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진정성' 일 것이다. 진정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마음. 진정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그런 마음.  오명랑은 진정으로 그리운 이 남자. '건널목씨' 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건널목씨의 이야기 속에는 마음 속 가장 깊숙이 또아리 틀고 있는 한없이 어둡고 아픈 기억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진정성은 순수한 어린아이들에게 곧바로 내리 꽂혔을 터다.

 

 요즘 아이들은 일찌감치 외로움에 노출된다.

많은 부모들은 일찍부터 아이들을 유치원으로, 학원으로 내몬다. 또래 아이들과 시끌벅적 떠들며 공부하던 아이들은 텅 빈 집으로 돌아온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학원비며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맞벌이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 혼자 방 안에서 TV나 컴퓨터를 들여다 보는 것에 더욱 익숙해진다. 텅 빈 집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컴퓨터 본체 옆과 TV 앞 뿐일 테니까. 부모들은 집에 돌아오면 피곤함에 파김치가 되어 침대에 몸을 뉘인다. 아이가 하루 종일 어떤 일들을 겪고,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들어줄 짬 따위는 없다. 부모는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을 외로움 속으로 몰아 넣는다. 때로는 잘못을 해도 혼내지 못한다. 자신의 아이들이 안쓰럽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들을 혼내기에 몸도 마음도 너무 피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점차 외롭게, 그리고 예의없이 자라난다. 마치, 건널목씨에게 린치를 가한 초등학생들처럼 말이다.

 

 세상의 모든 어린 아이들은 마음 속에 밝음과 어두움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란 건 선하네, 악하네 이런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밀기에는, 인간이 처해있는 주변 환경들이 지나치게 복잡하다. 그리고 아이들을 자라나면서 밝음과 어둠이 개화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자각' 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시기. 이 시기에 어떤 '어른' 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인격은 극명하게 갈라지고 명징하게 새겨진다.

'그리운 건널목씨' 에 등장하는 '도희' 와 '태석,태희' 남매 는 바로 이 시기에 아주 끔찍하게 어두운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그 때 이 아이들에게 건널목씨가 안 계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온다. 아이들에게 있어 부모의 역할, 어른의 역할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인생의 잣대. 이정표. 그렇다. 바로 길을 건너게 해주는 '건널목' 인 것이다. 수많은 차들이 씽씽 지나가는 위험한 공간을 안전하고 무사히 지나게 해주는 역할.  어둠의 길로 빠져 들 수 있는 갈림길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등불과도 같은 역할. 그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 어른의 역할. 바로 '건널목씨' 같은 역할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다 어른답지 않은 것 처럼,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부모다운 것은 아니다.

여지껏 싱글에 솔로인 나에 비해 내 절친한 친구들은 거의 다 결혼을 했다. 아이 아빠가 된 녀석도 있고, 예비 아빠 엄마들도 수두룩 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치고 받고 욕하고 웃고 울며 온갖 걱정과 고민들을 공유했던 친구들이 곧 부모가 된다고 생각하니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하다. 지금도 만나면 맥주 한잔에 세상얘기, 야구얘기, 축구얘기 같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그들은 가정으로 돌아가면 엄연한 부모이다.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부모로 태어나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녀석도 이제 자식들과 뒤엉키고 마음의 상처를 주고 받으며 점차 부모다운 부모가 되어갈 것이다. 정신없이 처자식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대한민국의 구조상, 녀석은 어쩌면 자식을 위해 뼈빠지게 고생하는 아버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랑한다고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뽀뽀해주는 아버지는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태석과 태희의 어머니와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부모는 언제나 아이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은 당장 '오늘' 만을 본다. 태석과 태희가 받은 상처는 어찌보면 부모의 잘못만은 아닐수도 있다. 부모와 자식이기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기때문에.

 부모답지 않은 부모 이전에 부부답지 않은 부부도 있을 수 있다. 부모는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남자와 한 여자이기도 하므로. 부모로서의 인생 이전에 한 남자로서의, 한 여자로서의 인생도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선택은 반드시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고, 그 결과가 누구에게 어떤식으로 작용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이 어른을 어른으로 만들고, 부모를 부모로 만든다.

 

 오명랑은 등돌린 어머니 앞에서 세명의 제자들에게 '그리운 건널목씨' 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그 이야기 안에는 오명랑 자신의 상처가 들어있었고, 어머니의 상처가 들어있었으며, 새언니의 상처도 들어있었다. 상처가 곪으면 곪은 부위의 상처를 더 크게 째서 농을 빼내야 한다. 곪은 상처는 덮으면 덮을수록 점점 더 깊게 곪아든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가족의 역할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자식이 부모의 상처를 찾아내고 핥아주는 것. 가족이란 사람과 사람의 모임이기에 필연적으로 상처를 주고 받지만, 가족이란 관계이기에 상처를 드러내고 보여주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은 동화의 형식을 빌어 어른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 하다.

어른들아,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니?

부모들아, 부모 역할은 제대로 알고나 있니??

아니, 그 전에, 어른과 부모들아. 너희 주변에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관심은 가져봤니??

너희가 생각하는 그대로, 너희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가슴 한켠이 따뜻해 지면서도, 뒷통수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책이었다.

 

 가득한 메시지도 메시지이지만, 이야기 자체로도 굉장히 재미있다. 주인공인 화자가 제자인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으로서, 이야기 자체에 상당한 리얼리티를 불어넣어준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건널목씨의 이야기는 물론, 화자인 오명랑까지 실재처럼 느낄 수 있을것이다. 그것은 단연 김려령 작가가 창조해낸 생생한 캐릭터들과 세련된 연출기법, 깊이 녹아있는 진정성 덕분일터다. 동화작가 '오명랑' 은 이름 그대로 '명랑' 하기 짝이 없는 아가씨이다. 그녀의 성격은 아이들에게 '그리운 건널목씨'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곳에서 재치있게 드러난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혼자 흥분하는 장면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역시 요즘 아이들 다운 디테일한 묘사가 눈에 띄었다.

 마치 '독자' 전체를 상징하는 존재들처럼 '작가' 오명랑의 이야기에 몰입해가는데, 특히 가장 어린 소원이의 한마디 한마디는 아이다운 천진함이 가득 묻어나서 절로 미소짓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뚱 했지만, 점점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몰입해가는 종원이의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아이 답지 않게 빠릿빠릿한 나경이의 모습도 생동감 넘쳤다.

 뿐만 아니라, 인물간의 관계에 대한 약간의 미스테리함을 가미함으로써 독자들이 시종일관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한 세련되고도 영리한 플롯은 김려령 작가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 텔링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노인인구가 급증하는 고령화 사회가 되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른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소외된 노인들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며 점점 더 편협하고 날카롭게 변해간다. 일찍부터 부모와 떨어져 혼자만의 동굴을 파고드는 아이들은 이기적으로 자라난다. 이런 우리 사회에 건널목씨 같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진정성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는 진짜 어른. 이렇게 진정성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 감화시키기 마련이다.

 

"좋은 사람이란 그런 거야. 가만히 있어도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내가 이걸 해 주면 저 사람도 그걸 해 주겠지? 하는계산된 친절이나, 나 이 정도로 잘해 주는 사람이야, 하는 과시용 친절도 아닌 그냥 당연하게 남을 배려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건널목 씨야. 그런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참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p.77

 

한 아이는 자라나는 과정 속에서 수 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어린 아이의 경우에 이 갈림길에서 '선택'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몫이 아니다. 부모의 몫, 근처 어른들의 몫이지만, 그 책임은 오롯하게 그 아이가 모두 짊어지게 된다. 이 세상에 건널목씨 같은 어른과 부모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많은 어른들이 건널목씨를 닮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진정성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어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좋은 사람' 으로 자라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ps.

경쾌한 이야기의 흐름처럼 개성적인 일러스트가 참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삽화속의 주인공 오명랑이 남자로 묘사되있어서 깜짝 놀랬다.

사실 난 '새언니' 란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왔는데도 책의 중반부까지 오명랑이 남자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림 의존도가 큰 아이들에게는 더욱 더 그럴 듯 한데, 개인적으로는 오타보다 더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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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매력적인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사랑받아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찌감치 '이야기' 를 즐기는 문화가 발달되었다. 운율이 있는 서사시로 신들의 이야기를 전래하면서 민족의 뿌리와 원형을 노래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신화] 이다. 우리도 가지고 있는 [단군신화] 가 단순히 곰과 호랑이가 나오는 고릿적 전래동화가 아니듯, 고대 그리스의 신화들 또한 단순히 전래동화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모든 신화는 당시 사회상을 담고있고, 당시인들의 사상, 이념, 생활풍습등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 모든 문학작품들은 함축적인 요인들을 지니고 있으며,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그렇기에, 문학을 그냥 읽는 자체로 즐겨도 충분하지만, 조금 더 생각하고 파고들어보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얻어낼 수 있다. 그렇기에 [문학] 이 단순히 읽고 즐기는 것이 아닌 인류사적인 [문화유산] 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문학 자체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있고, 그 중에서도 동양문학, 서양문학으로 세분화 되어 연구를 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도 시와 소설을 구분하며, 때로는 역사학자들도 문학작품을 연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같은 일반 독자들이 그렇게 깊이 작품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우린 그냥 문학을 즐길 뿐이지 않은가?? 작품을 문장 그대로 이해하고,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만을 즐겨도 좋지만, 아주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한 작품을 통해 훨씬 많은 것들을 얻어낼 수 있다.

 

이 작품은 아주 전문적인 학생들이 아닌, 우리같은 평범한 독서가들에게 문학작품을 즐기는 최소한의 통찰력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꽤 어려워보이는 제목과 달리, 책은 아주 술술 넘어간다. 저자의 오랜 경력이 돋보이는 책으로서, 전공과목의 수업용 도서라는 느낌보다, 한 학기용 교양수업용 참고서적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압축적이고 단순하며 효과적이고 흥미롭다. 우선 이 작품은 시대에 대표적인 작품 두세 작품씩 꼽아서 챕터별로 쭉쭉 정리해 나간다. 그리스 시대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부터 시작해서 게르만 신화와 중세 기사문학의 [니벨룽겐의 노래] [트리스탄] 등을 리뷰하고, 셰익스피어의 [햄릿],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 [파우스트] 를 거쳐, 낭만주의의 브론테 자매의 [폭풍의 언덕] 과 [제인에어] 그리고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 ,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본격적인 현대문학으로 접어들면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카프카의 [변신],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넘어 90년대의 대표적인 여류 작가인 엘프리데 옐리넥의 [피아노 치는 여자] 와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 까지 훑으면서 전반적인 문학사의 흐름의 맥을 짚어나간다.

 

작품들을 짚어나가는 방식 또한 명확하고 재미있다. 우선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작품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미, 색채등을 소개하고 설명해준다.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의 사회적 통념, 사상, 이념등을 소개하고, 작품을인용하여 사회적인 흐름을 주도하거나, 흐름에 이끌리기도 하고, 때로는 거스르기도 했던 작품 자체의 사상과 이념등을 설명한다. 대부분 잘 알려진 문학 작품들을 예로 들고 있고, 그 설명이나 해설도 비교적 일반론적인 부분들이 많아서 무척 쉽고 친절한 문학 감상법 안내서로 보기에 더없이 좋다.

 

최근 인문 서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전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도 무척 높아지고 있다. 이런 수많은 인문, 고전 서적들의 다이제스트라고 할까, 안내서라고 할까, 요약모음이라고 할까, 무튼 그런 책들 또한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 중 고전 '문학' 들이 대부분 서양쪽, 특히 유럽쪽인 것이 안타깝지만, 그것은 동서양의 대중의식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달했기에 어쩔 수 없었을터다. 동양은 뜻문자인 한문위주로 발달했기때문에 사건이나 이야기를 종이에 적어넣기보다,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이미지, 사상들을 적어넣는 것에 많은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학자들의 노력 덕에 그러한 동양의 뛰어난 고전 인문 서적들이 재발견되면서 이러한 붐을 일으키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 특히 고전문학을 읽기 위해 준비중인 독자들이라면 한번쯤 술술 넘겨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문학을 즐기는 방법이란 것은 따로 정해진 바는 없다. 하지만, 아는만큼 보이는 법 아니겠는가?? 문학을 즐기는 여러 방법들 중 이러한 방법 하나 정도 알아두면 훨씬 더 폭넓고 깊이있는 문학세계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물론. 이 책 한권 읽고, 이 책이 언급한 문학 작품들을 다 읽고 이해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길.

문학의 세계는 엄청나게 깊고, 또 넓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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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시사인 만화 - 신세기 시사 전설 굽시니스트의 본격 시사인 만화 1
굽시니스트 지음 / 시사IN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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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씨인사이드를 통해 이미 '본좌' 급으로 자리잡았던 '굽시니스트' 님. 이제 필명으로 자리잡은 그의 닉네임 '굽시니시트' 는 '굽신거리다' 와 어떤 행동을 하거나 믿는 사람들은 지칭하는 영문법의 접미사인 '-ist' 가 조합된 합성어이다. 대충 '굽신거리는 사람' 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 하다. 디씨 갤러리에 띄엄띄엄 올라오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로 수백만 디씨폐인들을 사로잡았던 그의 매력은 단연 '오덕스러움' 과 절묘한 통찰력의 완벽한 조화였다. '오덕' 은 일본의 매니아 문화인 '오타쿠お宅' 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단어로 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심취하는 행위나 사람을 말한다. 81년생인 굽시니시트는 태생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매니아일 수 밖에 없다. 아마 81년생 만화를 좋아하거나 만화가를 꿈꿨던 남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깊이 심취했을 것이다. 우리 세대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되었고, 한국의 만화 시장은 일본 만화에 잠식되었으며, 그와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방영해주는 케이블 채널, 일본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소대하는 잡지,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식 수입작들이 비디오 대여점에 깔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씨 인사이드' 의 토대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소위 '디씨 폐인' 들은 70년대 중후반~ 80년대 초중반 세대로부터 시작되었다.  

 굽시니시트는 바로 이 세대에게 완벽하게 먹히는 센스를 지니고 있었다. 한국 사회의 남자들은 비교적 비슷한 단계를 거쳐가며 성장한다. 여배우나 애니메이션, 음악에 열광하는 치기어린 시기를 거쳐, 연애에 목 메는 시기, 취업에 목메는 시기,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지만 생계유지에 목메는 시기. 사회, 정치, 경제에 두루 관심이 생기지만, 넘사벽을 뛰어넘지는 못하는 방관자의 삶. 굽시니스트가  그려냈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는 이런 디씨인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만화였다. 나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물론 그 뒤에 숨겨져있는 수많은 비밀들. 자본주의 시장 점유를 위한 열강들의 대립과 이념과 민족간의 갈등들이 뒤섞인 복잡하기 짝이없는 제 2차 세계대전의 발생 원인과 전황들을 '세일러 문' 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일본 애니메이션부터 '소녀시대' 까지 넘나드는 오덕스러운 대입으로 절묘하게 풀어냈다.   

 그런 그의 통찰력과 즐거움을 주는 오덕스러움을 눈치챈 분이 정통 시사주간 잡지인 '시사 인' 의 기자였다는 것이 뜻밖일 따름이다. 기자가 직접 간택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시사 인] 이라는 이름이 주는 견고한 방 안에 일본 애니메이션 오덕후와 여 아이돌 빠가 있었던 것이고, 그걸 커밍아웃 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과거를 그렸던 굽시니스트의 통찰력이 현실 정치세계와 접목되기 시작했다. 그의 오덕스러움고 함께 접목된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최근 몇년간 일본 애니메이션은 당연히 더 많이 쏟아져 나왔고, 패러디 할 소재와 패러디 될 대상은 무궁무진하게 늘어났으니, '만평' 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격 시사인 만화] 는 위에 언급한대로 시사주간지인 '시사 인IN' 에 2009년부터 개재 되었던 만화를 묶은 것으로 각 호에 실렸던 작품이 두 쪽, 그리고, 굽시니스트의 작가멘트와 각 챕터와 제목이 두 쪽, 총 두 페이지에 실려있다. 보기좋게 잘 정리되어 있고, 2009~2011 사이의 현실 정치세계에선 정말 큼직한 이슈들이 너무 많았기에, 당시에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독자들이라도 작가의 멘트를 곁들이면 큰 무리 없이 고개를 끄덕일 만 하다. 게다가 '오덕' 이 익숙치 않은 독자들 또한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오덕' 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강한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패러디 된 소재를 전혀 모르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이 작품을 단순히 정치만화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굽시니스트라는 작가는 태생부터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와 역사에 관심은 많았을지언정, 좌-우 편향적인 인물은 아닌 평범한 소시민에 가깝다. 소시민의 입장에서 보이고 생각나는대로 그렸다는 느낌의 작품이다. 그저, 2009~2011 한국 사회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을 퍼 올리기에 매우 좋다는 느낌이다.  

 '통찰' 이란 부분을 보고 전체를 가늠하는 능력의 통칭이다. 요즘엔 너무나 많은 정보와 언론들이 수많은 대중들, 국민들을 혼란케 만들고 있다. 장님이 코끼리의 다리와 코, 상아까지 만져보고 코끼리라는 사실을 인지해 가고 있는데,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자다! 늑대다! 아니야, 개야!! 호랑이가 물어간다!! ' 라고 시끄럽게 떠들어서 오히려 장님의 판단력을 흔드는 격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본격 시사인 만화] 가 한국 정치 현실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그려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통찰력이 있어도 평범한 시민들을 보지 못하는 흑막이 있는 것이 바로 정치이므로.  

 하지만, 적어도 이것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려준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다가 아니며, 귀에 들리는 소리 또한 다가 아니라는 점. 좀 더 보기위해 노력하고, 좀 더 능동적으로 행동해보고, 좀 더 많은 것을 듣기위해 노력하여, 그것들을 가지고 보다 깊이 있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 대한민국은 분명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공권력에 굽신거리고 있는 모든 굽시니스트들이여. 마음만이라도 굽시니스트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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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장은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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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겐 이런 기대를 갖게 해주는 작가군은 있다.

  "아, 이 작가는 대충써도 이만큼은 해줄거야."

전작인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가 너무 강렬한 작품이어서 그랬을까??

이번작품은 솔직히 평하면 딱 그만큼이다. "이만큼".

그렇다고 작가가 대충 썼을리는 없다. 오히려 너무 부담을 가진게 아닐까 싶다. 작품을 다 읽은 뒤 정보들을 찾아봤더니 모 인터넷 북 쇼핑몰에 연재되었던 작품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물론 연재된 텍스트들을 그대로 옮겼을리는 없다. 퇴고의 과정을 거쳤겠지만, 이젠 확실히 그런 작품들은 태가 난다고 해야할까. 일단 장은진 작가의 전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작품은 지나치게 전작과 비슷하다. 거기에 감동은 덜 하고, 메시지는 더 많다. 아니, 메시지가 너무 많아서 감동이 덜하다고 해야 할까, 메시지를 위해 감동을 포기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페이지는 더 적으며 연재되는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한 듯한 일종의 패턴이 있다. 전작인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와 비슷한 패턴이지만, 전작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할 때 마다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서 이야기 전체가 역동성이 있었던 반면, 이번 작품에서는 비슷한 분위기가 반복되며 이야기는 갈수록 더 정적이 된다.

결국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보다 '인물' 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작가는 '사건' 이 아닌 '인물' 에 집중을 했고, 서로간의 관계와 대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영화로 따져보면 일종의 로드무비, 버디무비에 가까운 작품으로서 이야기 자체를 즐기기보다 '캐릭터' 한명 한명에 집중해야 작가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작가의 전작 역시 그랬지만, 이번 작품은 인물들간의 관계가 보다 농밀하고 끈적하다.  

 

 이야기의 화자는 지금 어떤 여자와 마주하고 있다.

여자의 이름은, 그래, 화자는 그녀를 "제이" 라고 불렀다.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까, 우연히라고 해야 할까. 무튼, 그녀 제이는 주인공의 집에 숙식하고 있다. 20대의 열쇠장이인 화자. 한때 소설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열쇠가게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한때는 절친한 사이였으나 연인을 몇번이나 빼앗긴 뒤 절교하게 된 "케이". 부잣집 아들로 한때는 화가가 꿈이었으나 극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으며, 최근 고흐처럼 자신의 한쪽 귀를 도려내기까지 했다. 케이는 화자를 "와이" 라고 부르게 된다. 케이와, 화자인 와이는 제이의 집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 힌트는 무성한 숲과 구름다리. 케이가 제이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린 그림 한 장. 그 한 장을 들고 우리나라에 있는 구름다리가 놓여있는 숲을 찾아 무작정 떠나게 된다.

 

 이런 간단한 줄거리만으로도 책을 많이 읽어보신 분들은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어 나갈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두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 그렇다. 가장 안정적이라고 하는 구도로 자리잡고 있는 이 삼각 관계가 얽히고 설킴과 함께, 각각의 과거와 현재가 얽혀들어 갈 것이다. 이 작품안에서는 여 주인공인 제이를 꼭지점으로 한 감정적인 삼각관계와 절친한 친구였던 케이와 와이의 과거가 드러나며 서로가 가지고 있던 오해와 갈등들이 해소된다. 결국 그 여행은 제이의 집을 찾아주기보다 케이와 와이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여행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 한가지가 더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와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탁월한 음악적인 감각까지 가지고 있는 그녀 - 제이는 문명의 소산을 먹어야만 생존이 가능하지만, 그것때문에 사회에서 격리되고 만 존재였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도시로 들어가야 하지만, 도시 안에서는 숨어 지내야 하고, 자연을 사랑하지만 문명의 이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아이러니 덩어리의 혼란스러운 존재. 

 한편, 제이의 반대편에서 각 점을 이루고 있는 케이와 와이는 '돈' 을 기준한 위 아래 두 계층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매일매일 죽을만큼 일해서 한달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버는 열쇠장이 와이. 매 시간 돈에 쫓기듯 살아야 한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을 돈과 연관시키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진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연인들이 돈이 많은 절친한 친구였던 케이에게 달아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케이에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고, 부조리한 사회 자체에 대한 불만과 미움, 증오가 있지만 그런 것들을 미워하고 증오할 여유는 없다. 당장 오늘 일해야, 다음 달에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케이는 엄청난 부잣집의 막내아들이었다. 생존은 물론 일체의 모든 것들이 여유있게 보장된 케이. 그 엄청난 부유함의 댓가는 '자유' 였을터다. 케이는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했으나, 너무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케이를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결국 우울증에 걸린 케이는 미친척 연기를 하고 자해를 해서야 간신히 아버지의 눈 밖에 나게 되지만, 그동안 깊어진 우울증은 그를 끊임없이 자살충동 속으로 몰고간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제이" 이다.

제이를 둘러싼 두 남자. 와이와 케이는 제이를 받아들이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미 여자들에게 상처를 받은 와이는 제이를 짐덩어리 취급하고 불필요한 것으로만 인식한다. 즉, 사랑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밀어낸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도 그러하지만, 상대적으로 세상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새로운 감정을 품는 것을 두려워한다.

꾸준히 언급하고 있지만, 난 인간에게 가장 큰 적은 외로움, 고독함이라고 생각한다.

"자아" 라는 것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선물인 동시에, 인간을 언제나 외롭게 만드는 저주와도 같다. "나는 나" 라는 확고한 의식은 '남' 과 '나' 를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서 스스로를 완벽하게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게 한다. 외로움이나 고독감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고, 연인, 가족, 동호회는 물론 인스턴트 메시징,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끊임없이 "대화" 를 갈구한다.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기를,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다른 이가 있기를 바란다.

 

 "문득, 사람이란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이야기하기 위해 사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자기 이야기를 쓰고 읽고 듣는 과정인 건지도 모른다고."

p.222

 

사람이란 한권의 책과 같다. 표지와 제목만 보고 책의 내용을 알 수 없듯 사람의 외모와 이름만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책을 펴고 꼼꼼히 읽어 나가듯,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해야 그 사람을 알 수 있게된다. 절친한 사이였던 와이와 케이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된 이유는 '연인' 때문이었다.

와이와 케이는 좋아하는 여자의 취향이 비슷했다. 와이는 가난한 열쇠공이고, 케이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으므로 와이는 언제나 케이에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여자친구가 결국 케이의 매력에 이끌려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런 심각한 오해와 그로인한 갈등들은 제이의 집을 찾아주는 여행동안 나눈 많은 대화를 통해 오해가 하나씩 풀려가며 갈등들이 해소되어진다.

즉, 제이의 집을 찾아 떠난 여행은 와이에게 있어, "제이" 라는 이름의 책 한권과, "케이" 라는 이름의 책 한권을 읽는 여행이었다고나 할까.

 

아무리 좋은 책을 읽어도, 책 한권을 읽는다고 한 사람의 삶이 확 변하진 않는다.

하지만, 연못 한 가운데에 던진 작은 돌 하나부터 시작된 파문이 연못의 가장자리까지 닿듯이, 좋은 책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일렁거림은 언젠가는 그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있다. 와이와 케이. 그리고 제이의 삶 또한 그럴 것이다.

 

자, 이제 작품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파고들어 보겠다.

작품 속에는 꾸준하게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이 등장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 의 철학이 집대성된, 어마무지하게 어려운 책이라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으며 집을 찾아가는 '제이'.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에는 니체가 주장한 "존재의 자기 긍정을 하는 자" 즉, '초인' 의 세가지 변용이 등장한다고 한다.

 

 그 첫번째는 '낙타' 이다.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성실히 걸어나가는 낙타는 환경에 적응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이다. 게다가 등지 지고 있는 짐도 자기 짐이 아니다. 자신이 왜 남의 짐을 져야 하는지,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 왜 가는지도 모르며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조물주, 신, 절대자, 공권력, 체제 앞에 무릎꿇고 짓눌려 살아가는 전체주의에 매몰된 인간상이다.

  두번째는 '사자' 이다. 사자는 의욕과 자율의 상징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고 있고, 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사자의 자유는 긴장된 자유이다. 사자라는 동물은 알다시피 한 영역에 한마리의 수컷만이 존재한다.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수컷 사자들은 모두가 적이다. 사자의 자유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아슬아슬한 자유이고, 공격적이며 방어적이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상인 '초인' 은 바로 '어린아이' 이다.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새로운 놀이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움직임이며, 하나의 신선한 긍정이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상을 잃어버린 자는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획득하는 것이다. 자유롭지만 고독하지 않고, 자신의 세상을 창조할 수 있으며,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이 초인의 단계는 어느날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위키백과, 네이버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사상" 에서 발췌,요약 ) 

 

작품속에 등장하는 와이는 낙타의 단계라고 한다면, 케이는 사자의 단계에 가깝다. 그리고 제이는 어린이, 즉, 초인의 모습이다.

제이를 통해 와이와 케이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어낸다.

위에 언급했던 "좋은 책 한권" 을 읽은 정도의 파문이겠지만, 제이는 케이와 와이가 인격적 성장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

과연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결국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로 마무리 된다.

 

그녀의 행동과 생각, 모습은 니체가 표방했던 완전한 인간.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 '어린이' 로 변용된 초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를 통해 화자인 와이는 끊임없이 삶에 대해 생각하고, 과거에 대해 생각하며, 환희과 고통, 오늘과 내일에 대해 사색한다.

그리고 결국 생의 긍정. 삶의 긍정. 존재의 긍정을 받아들인다. "제이" 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는 동안 '케이' 라는 이름의 책과 '제이'라는 이름의 책을 읽어낸 화자 "와이" .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와이의 삶이 하루아침에 뭔가가 확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아침 일찍 열쇠집 문을 열어야 할 것이고, 하루종일 열쇠를 깎아대야 할 것이며, 매달 날아드는 고지서와 아슬아슬한 통장을 보며 걱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어제보다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는 눈 앞의 현실을 믿기 시작했고, 그것은 즉. 긍정했다는 의미니까.

 

 

P.S)

 책을 덮고, 한번 더 읽고, 니체의 사상을 찾아보고, 요약-해설되있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까지 읽어보고서야 작품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전작만 생각하고, 인터넷에 온라인 연재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동화틱한 일러스트 표지 아래 250여페이지의 얄팍한 두께만 보고 만만하게 덤볐다가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새삼, 장은진 작가가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아무렇지 않게 술술 풀어내는 글속에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다만, 각 챕터가 그날 그날 독자들에게 보여지니까, 자꾸 무언가를 더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조금 작위적인 느낌이랄까. 문학계에 일고있는 온라인 연재의 붐의 장단점은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물론 과거부터 신문연재소설도 꾸준히 있어왔고,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들거나 명작의 반열에 들기도 한다. 하지만, 책으로 묶어낼땐 연재 기간만큼 길고 정성스러운 퇴고 과정이 있었음 또한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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