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알못을 위한 겨울서점 추천도서!

모든 윤리의 가장 중요한 근본은 중용의 법칙, 또는 상호주의 법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법칙 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타인이 내게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만큼 우리도 타인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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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옥, 김명시, 박차정, 이화림

기사를 보고 나는 실소했다. 일제의 검열 때문이라 해도 내가 중국 군대까지 가서 비행사로 활동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꽃 같은 여류비행사" 따위의 말만 가득한 데다, 동지인 이영무를 연인이라 하니 어이가 없었다. 수많은 여성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건만 여자를 보는 세상의 눈은 변함이 없구나 싶었다. 그래도 신문기사 덕분에 가족 친지들이 내가 조종사가 되어 전장을 두비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 P232

당시 우리 조선 여성은 남존여비의 봉건적 속박에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기본적 인권마저 유린당하는 이중의 구속을 받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 진정한 해방을 이루려면 여성이 주체가 되어 주도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민족혁명당과 별도로 여성 통일전선 조직을 만든 이유였다. 나는 당원 가족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단결과 훈련에 힘쓰는 한편, 《앞길》이라는 잡지에 여성문제 해결에 관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 P271

여러 날이 지난 뒤 마침내 김구 선생을 만났다. 그는 냉담한 얼굴로 불쑥 물었다.
"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는 비로소 경계를 풀었다.
나는 여성은 안 된다는 그를 집요하게 설득해 결국 애국단에 가입했다. 1931년 가을의 일이다. - P285

난징에서 나는 조선민족혁명당 부녀국에서 박차정 등과 함께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 무렵 윤세주 등 간부들의 권유로 독립군 장교인 리집중 동지와 재혼했으나 그 역시 가부장적으로 내 활동을 속박하기에 이내 헤어졌다. 당차원에서는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남자와 평등해야 한다고 선전하고 있었으나 실제론 전혀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서 나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내게는 가야 할 길이 있기에 결코 후퇴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 P290

"이화림의 타고난 결함은 여자다운 데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군복을 입었더라도 여자는 여자다운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그녀는 남성 동지들의 호감을 통 사지못했다. 나도 워낙 속이 깊지 못하고 경박한 편이어서 덩달아 이화림을 비웃고 따돌리고 하였으니 정말 부끄럽고 면목이 없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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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으로 이름을 되뇌어 봅니다. 기억하기 위해.
박자혜, 김옥련, 정칠성, 남자현, 안경신, 김알렉산드라

"당신이 남기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 당신의 괴로움과 분함과 설움과 원한을 담은 육체는 2월 22일 오전 11시, 남의 나라 좁고 깨끗지 못한 화장터에서 작은 성냥 한 가지로 연기와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여! 가신 영혼이나마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 P114

그래도 견뎠어. 주모자를 불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자칫하면 우리 선생님들이 고초를 겪을 테니까. 우리한테 선생님들은 부모보다 더한 분이야. 부모는 어디 사상이나 공부에 대해서 얘기해주나? 다들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분들이 우리를 공부시키고 눈을 뜨게 해줬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참았지. 나중에는일제 경찰들도 우리 해녀들의 강인한 기질과 단결심에 탄복을 하더라고. - P131

해방이 되고 이리 잘사는 나라가 됐지만 가끔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우리가 한 일은 자랑스럽지만 세상이 너무 박하고 빨리 잊는 것 같아서. 하지만 후회는 안 해. 우리가 누구야? 제주 바다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해녀잖아. 자랑스러운 설문대 할망의 후손인 제주 해녀라고! - P133

그이는 우리처럼 머리로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하고는 달랐습니다. 젊어서는 나도 사회주의 공부하고 여성해방, 민족해방을 부르짖었지만 현실과는 괴리된 관념론, 이상론에 가까웠지요. 한데 정칠성 씨는 일제를 왜 타도해야 하는지, 여성해방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가능한지, 몸으로 마음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내가 진작 그걸 깨달았으면 삶이 좀 달라졌을까…. - P144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글도 참 잘 썼어요. 1926년에 삼월회 간부 자격으로 《조선일보》에 <신여성이란 무엇>이라는 논설을 발표했는데 어찌나 명쾌하게 잘 썼는지, 장안의 화제가 됐답니다. 신여성 하면 자유연애부터 떠올릴 땐데, "신여성이란 구제도의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무산여성"이고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려는 정열이 있는 새 여성"이라고 선언했다고. 어떤 작자가 그걸 보고 기생이 이런 글을 쓸 수가 없다고, 누가 대필해준거라고 해서 내가 아주 혼쭐을 내줬어요. - P146

나는 그의 배려로 군정서에 입단하여 다른 여성들과 함께 대원들이 입을 옷을 짓고 음식 준비를 했다. 남의 땅에서 많은 대원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그 자체로 작은 나라 하나를 경영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만큼 고되고 큰일이었다. 부인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는 자랑도 없이 묵묵히 이 힘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감동적인 헌신이로되, 독립투쟁에서조차 남녀유별이 있는 듯해 속상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군자금과 식량을 마련하는 등 독립군 지원 활동을 하면서 망명 생활에 적응해갔다. - P163

"독립 청원이나 협상으로는 결코 오늘의 사태를 해결할 수 없소. 협의로 안 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무엇이겠소? 무력으로 응징하는 것 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느냐 말이오?"
단호한 대답에 김보원은 낯을 붉혔다. 화가 난다기보다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컸다. 일부 사람들처럼 보원도 처음에는 경신의 작고 못생긴 외모만 접하고 얕잡아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게 얼마나 한심하고 못난 생각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의 작은 몸에 깃든 커다란 내면, 이 내면세계를 관통하는 알차고 강인한 투쟁 정신을 알기 때문이었다. - P187

차르의 전제정치에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이나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살길을 잃은 조선 민중이나, 지배계급의 억압 아래 똑같이 고통받고 있음을 알렉산드라는 절감했다. 두 나라 민중이 자유롭고 사람답게 사는 길은 독재와 제국을 무너뜨리는 혁명뿐이었다. - P207

알렉산드라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나는 볼셰비키다. 나는 억압받는 민족과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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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김마리아, 강주룡, 정정화, 박진홍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만났을 때 놀랐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할 만큼 생생하다. - P5

"너는 언제부터 조선의 독립을 생각해왔는가?
"한시도 독립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없다."
"여자가 어째서 남자들과 함께 운동을 했나?"
"세상이란 남녀가 협력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서 만들어지고 좋은 나라는 남녀가 협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 P25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투사가 되었느냐 물었지요. 나는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조선에서 어떻게 하면 투사가 안되고 살 수 있습니까? 친일 부호라면 몰라도 우리 같은 노동자는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하는 게 현실이지요. 따지고 보면 기자 선생도 지금 붓으로 싸우고 있는 거 아닙니까?" - P39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 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 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300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가장 큰 지식은, 대중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란 것입니다. - P48

한 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울 때 그 아이의 일생을 누가 알겠는가. - P57

"얻고 싶었던 것을 얻었고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가는 지금, 나는 그토록 갈망했던, 제 한 몸을 불살랐으나 결국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한 채 중원에 묻힌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대신해 조국에 가서 보고해야만 한다. 싸웠노라고,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나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 P73

사람들은 임신한 몸으로 가혹한 심문을 견딘 나를 보고, 독하다고 했지만, 당시 일제에 맞서 싸우는 운동가라면 누구나 그래야 했어. 다른 동지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최대한 버티는 건 우리의 원칙이었지. 그러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잡혀서 똑같은 고통을 겪고 목숨이 위태로워지니까. 나와 함께 검거됐던 박영출 동지도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고 말았는데, 그러고 보면 정말 독한 건 그런 고문을 한 일제이건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독하다고 하는구나.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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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퇴직자, 즉 부성적 질서에 의해 완성된 동굴 속 황제들은 쉽사리 변화를 인정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적인 타협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직에서의 권위를 다시 회복할 수 없고, 취약한 가족 관계에서 친밀성은 강화되지 않는다. 경제적 자원 또한 이전과 같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변화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옳다고 믿어 왔던 가치와 삶의 일관성을 위협하는 일이다. 결국,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서사를 바꾸는 전략을 택한다. 퇴직자들이 서사를 축소하고 멘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때 느끼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표적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그동안 살아온 삶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변화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서사적 맥락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인 것이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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