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서 혼자 뒤처져 남겨진 탓에 여자는 자궁에 깃든 그 두려움에 따라 자신을 재현한다. 한 포기 풀과 대치하면서 자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탐구해 온 옛사람들의 모습, 자신을 단단히 응고하는 모습이재현된다. 아픔을 가지지 못한 삶의 창조성은 생산성의 논리로 이어진다. 아픔을 아프다고 느끼는 삶의 창조성은 나를 해방하기 위한 창조 - P65
성이다.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에게의미가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창조성이다. - P66
엉망인 상태란 존재 그 자체가 말하는 진짜 속내이고, 종종 가장 분명한 진짜 내 마음이기도 하다. 나 자신과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 P68
남과 만날 수 없는데, 자신과 마주해 자신을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엉망인 상태와 만나는 게 아닐런지. ‘나는 나‘라고 할 때 전자의 나는 엉망인상태 그 자체를 가리킨다. 후자의 나는 진짜 속마음을 바탕으로 사회를알고, 인간을 알고,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는 나일 것이다. - P69
그 여자가 매니큐어를 바른 게 잘못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여자가쏟아 낸 그 교과서 같은 해방 이론의 말이 매니큐어로 상징되는 그 여자의 마음속에서 성찰해서 나온 말이 아닌 게 문제였다. 표면적 이치에 자신을 종속시킨 그 모습이 잘못이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여자‘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자신 내부에 매니큐어와 혁명 이론을 함께 있도록한 자신을 응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한 인간 속에는 서로 모순하는 속내가 항상 함께 있고, 그 두 가지모습을 합한 것이 ‘여기에 있는 여자‘의 존재이다. 여자에서 여자들로향하겠다는 연대의 마음도 진짜 마음이고, 툭하면 여자들을 외면하고싶은 것도 속내이다. 여성해방은 언제나 이 두 가지 속내에서 출발한다. 그 두 가지 사이에 있으면서 ‘엉망인 상태‘로 출발한다. ‘여기에 있는 여자는 두 가지 속내 사이에서 흐트러진 현재 모습 가운데, 바로 여자가 살아가기 힘든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휘어지고 꺾이고 만다. 그렇게본래 여자의 모습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살아 있는 여자는 온기를 품고 있다. 엉망이고 볼품없는 여자의 모습이야말로 ‘여기에 있는여자가 틀림없이 지금까지 살았고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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