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의 너른 빈터_조지 오웰
자기 비움적 창조(kenotic creation)
마리아 미즈의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박솔뫼 외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김진영_도망치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

번아웃의 시기에 나를 지배했던 질문은 오직 하나 ‘왜 계속 살아야 하지?‘였는데 생의 감각이 내게 가져오는 질문은 다양하고 넓었다. 어차피 계속 살아야한다면, 나를 계속 살게 하는 삶의 형태는 무엇일까. 서울에서 계속 사는 것이 맞을까? 이 직업을 유지하는 것이 맞나? 지금과 같은 가족의 형태가 가장 적합한가?"
여전히 뾰족한 답이 내려지지 않는 질문들이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번민과 스트레스로 다시 스스로를괴롭히고 있는 나 자신에 처음엔 좌절했다. 이제는 도망도 더 이상 소용이 없구나, 도망도 쉼이 되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가만 살펴보니 질문의 초점이 모두 ‘나‘에게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분명 다른 유형의 스트레스였다. 삶의 상수라고 생각되는 것에서 도망치다 보니, 정말로 상수인 것들과 변수인 것들이 구별되었다. - P85

소영광_무신론자에게 보내는 편지

이런 맥락에서 조지 오웰의 말을 음미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 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 저는 저 ‘단순함의 너른 빈터‘가 우리를 기존의 진지함으로부터 뺄셈하게 하는 안식일의 시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 P95

쉼 호를 만드는 편집자들은 ‘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를 맞추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느냐가어떻게 쉬느냐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저자들과 함께배워가고 있어요. 선생님의 신학적 논의는 제 머리에 쥐가 나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에 대한 사유로부터 더 배울 게 있다는 예감도듭니다. - P101

편집자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요약해서 소개한 ‘자기 비움적 창조(kenotic creation)‘ 도식이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지시나요? 더엄밀한 논의 풍성한 전거들이 있지만 우리편지에서는 생략하기로 해요. 관건은 저 신적인 창조 이해가 과연 세계의 기원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느냐가 아니라, 세계 안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함의를 제공하는가일 것입니다. - P104

하나님의 안식은 타자가 존립하기 위한 빈터를 마련하는 창조의 기쁨, 곧 자기를 비운다는 점에서 자기 바깥으로 벗어나는 무아적인(ecstatic) 기쁨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님이 신학자들의 감사의 말에서 주목하셨듯이 능동적인 자리에서 수동적인 자리로 물러나는 일, 자기를 이차적인 위치로 퇴각시키는 일은 내 욕망이나 실적, 삶의 영역에 이미 침투해 있는 타자의 기여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비춰 본 안식은 우리 안에 이질적인 타자가 존립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타자의 등장에서 촉발된 공존을 입체적으로 음미하고 향유하게 합니다. - P105

복음서에서 예수는 공적인 삶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서 40일간 광야에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저 40일간의 광야 생활을예수의 피정(靜)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피정은 문자 그대로 빈틈없는 일상에서 물러나서 정숙하게 자신을 살피는 일에 해당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가 피정 직후에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을 선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소명이란 다름 아닌 안식의 구현자로 사는 것입니다. - P107

연어*채효정_농사짓기에서는 뭐가 일이고 뭐가 쉼인가?

효정 1980년대까지 농촌은 서양식으로 농촌 근대화정책을 따라 소농들을 없애고 비료와 농약을 투입해서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변화해 왔어요. 그걸 비판하면서 유기농, 친환경, 생태농, 자연농 같은 대안적 담론과실천들이 생겨나기도 했고요. 그런데 농촌의 현실을보면 생태적인 방법으로 농사짓지 않는 분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지금 같은 시장과 소비자 중심의 농산물 인증 체제하에서 유기농업을 오롯이 개인이 떠맡게 되면, 농민들은 정말 뼈가 삭거든요.
그래서 체제전환운동포럼에서 농생태적 전환이 체제전환의 핵심이라고 했던 거고요. 저는 밭을 빌렸더니, 빌려주신 분이 제 밭까지 로타리 치고 비닐 멀칭까지싹 다 해 주셨더라고요. 선의로 해 주신 걸 화를 내겠어요, 싸우겠어요? 처음에는 주위에서 제초제 친 논두렁만 봐도 내가 말라 죽는 것 같고 가슴에 화가 가득 차고 - P133

그랬는데요. 물론 지금도 마음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지만, 이제는 왜 나는 그걸 안 하고 다른 방식으로 하려고하는지,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오랜 관계 속에서 진득하게 설득해 나가야 한다는 걸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 P134

또 저는 텃밭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도 부여하는데요. 에코 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자급의 삶은가능한가』를 보면 ‘타로 밭의 정치‘로 끝나거든요. 미 - P142

즈는 텃밭을 여성들의 정치 공간으로 적극 상상합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거나 멀리 돈 벌러 가거나 민회에 가서 싸우는 동안 여자들이 들판에서 밭을 일구면서마을 일을 의논하고 같이 운영해 나가는 모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인도의 칩코 운동(벌목을 막기 위한 나무 껴안기 시위)은 대표적인 사례고요. 아까 구멍가게의 비공식 경제, 재생산영역이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여성들의 자급과 자치의역량도 비가시화되었어요. 저는 이런 ‘들판의 민주주의‘에 주목하고, 다른 정치를 상상할 때 반드시 참고하고 복원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텃밭을 생활 정치의 장으로도 적극 조직해 보면 좋겠습니다. - P143

저는 원래 삶의 목표 중 하나가 자급자족이었는데, 농촌에 내려와 살면서 오히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어요. 그런데 자급자족(Self-sufficiency)을 넘어선 공급자족(Community-sufficiency)은 혼자 자급하는 게아니라 이웃들의 일을 돕고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며 필요를 충족하는 삶이에요. 저는 공급자족의 방식으로 풍요를 채워 가는 삶에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상상하기 어렵고 장벽이 있을지라도 새로운 삶을 꿈꾸는 동료들을 만나 관계를 만들어 가면 좋겠어요. - P146

정기현*이정화_책 만드는 사람들이 도시 농부가 된 이유

박솔뫼 작가가 쓴 ‘붙이기‘라는 제목의 원고가 있거든. 검열 때문에 완전히 다른 두 영화를 맥락 없이 갖다 붙인 내용에 대한 글이야. 그 무맥락의 붙임, 전혀 다른 두 개를붙이는 게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여기저기에서 느꼈어. - P156

내 경우는 좋아하는 것에 몰입할 때혹은 내 몸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움직일 때 가능한 것 같아. 예를 들어서 등산을 하면 너무 힘들잖아. 처음엔 힘들고 괜히 왔다 싶다가 어느 시점에 몰입이 되면서아 걷길 잘했구나, 하고 머리가 가벼워지는 거야. 그래서 완전 소화를 하려면 내 생각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몸을 움직여야 하는구나 생각했어.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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