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치명적이고 치기 어린 상상
20세기폭스 20th Century-Fox 의 부회장 달린 챈Darlene Chan 의 표현처럼 "〈위험한 정사〉는 《뉴스위크》의 결혼 연구를 정신병으로 표현한 것"이다. - P198
반격은 1980년대 할리우드의 많은 여성 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형적인 테마에서 여성은 여성과 각을 세웠다. 자신의 사회적 환경에 대한 여성의 분노에서는 정치색이 빠져 버렸고 그 대신 이런 분노는 개인적인 우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여성의 삶은 ‘좋은 엄마‘는 이기고 독립적인 여성은 벌을 받는다는 도덕 이야기의 틀에 갇혀 버렸다. 할리우드는 반격의 주장들을 반복하고 강화했다. 그러니까 미국 여성들이 불행한 것은 이들이 너무 자유롭기 때문이고, 여성해방은 여성들에게 결혼과 모성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P198
미국 영화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노력은 반격의 시기에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었다. 1934년 거침없이 말하는 독립적인 여성 메이 웨스트*의 언행은 반동적인 ‘제작윤리강령Production Code of Ethics‘을 마련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1950년대 말까지 영화상에서 혼전 성관계를 금지하고 결혼을 강요한 (하지만 강간 장면은 허용한)이 검열 규정을 촉발한 것은 웨스트의 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신랄한 혀였다. 웨스트는 자신의 영화에서, 그리고 그보다 더 나쁘게는 자신이 직접 쓴 대사에서 남자들에게 말대꾸를 함으로써 미국에 있는 도덕의 수호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5) (출판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는 그녀를 "미국 가정이라는신성한 제도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대사를직접 썼다. - P199
영화사학자 마저리 로젠Marjorie Rosen의 관찰에 따로면 "1940년대 여성 제물들의 목록은 병원 환자 명부 같다." 영화상의 싱글 직장 여성들, 인정머리 없고 비쩍 마른 이 집단의 사람들 역시 정신 질환 치료를 위해 진료실로 향했다. <다크 미러Dark Mirror〉(1946), 〈레이디 인 더 다크 Lady in the Dark〉(1944), 그리고 좀 더 나중에 나온 <더 스타The Star>(1952) 같은 영화에서 이들은 모두 일을 그만두고 결혼하라는 동일한 의학적 처방을 받았다. - P201
할리우드에서 1987년은 여성의 독립을 상대로 반격을 감행하기 위한 주홍글씨의 해였다. 그해에 개봉되어 최고의 수익을 거둔 영화 네 편 모두에서 여성은 두 집단으로 양분되어 보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다. 좋은 여성은 모두 비굴하고 밋밋한 가정주부(〈위험한 정사〉, 〈언터처블The Untouchables〉(1987))거나, 아기이거나 말없는 아가씨(〈세 남자와 아기>, <비버리힐스 캅 2〉)다. 여성 악당은 모두 〈세남자와 아기〉의 남자 같고 아기를 혐오하는 성질 더러운 여자나 〈비버리힐스 캅 2>의 허리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총잡이 여성, <위험한정사〉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직장 여성 같은 자신의 독립심을 버리지않는 여성들이다. 이 네 영화 모두 파라마운트 Paramount가 제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반세기 전에 이 영화사를 파산에서 구해 준 것은 메이 웨스트였다. - P203
미국적인 가정의 귀환에 대한 그 모든 감상적인 헌사에도 불구하고(〈문스트럭>에서 아들은 "가족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라며 건배를 하고, <언터처블>의 남자들은 서로에게 "결혼하니까 좋지 않아?" 하고 말한다) 1980년대 말의 가족 친화적 영화에는 여성의 요구에 대한 남성들의 분노와, 여성 진보에 대한 남성들의 우려가 가득하다. - P232
남성들이 꿈을 꾸듯 남성성이 과장되게 흘러넘치는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동안 아직 죽지 않은 여성 캐릭터들은 훨씬 폭력적인 시련에 혹사당했다. 1988년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오른 여성 중 한 명을 제외한 전부가 피해자 역을 맡았다 (단 한 명의 예외는 기가 막히게도 멜라니 그리피스가 연기한 일하는 ‘소녀’였다). 그해 수상자였던 조디 포스터Jodie Foster는 <피고인The Accused〉(1988)에서 강간 피해자 역을 맡았는데, 이 영화의 제작자는 셰리 랜싱이었다. - P234
랜싱은 <피고인〉이 미국 사회에 여성에게는 강간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돌파구와 같은 영화로 환영해 마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성들이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를 이야기할 뿐이라는 점에서 이 시대의 우울한 초상으로 애도하는 게 더 말이 되는 것 같다. 1980년대 말에 이르자 영화가 그저 젊은 여성을 난폭하게 다루는 데 반대하기만 해도 대담한 페미니즘적 선언처럼 행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P235
6장 10대 천사와 결혼하지 않은 마녀
《뉴욕우먼》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시즌에는 텔레비전 작가들이 일하는 엄마라는 개념을 불편하게 여기는 게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잡지는 이런 불편을 담담하게 기록한 퀴즈를 냈다. "일하는 엄마들"이라는 퍼즐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황금시간대 드라마와, 거기에 나오던 일하는 엄마 캐릭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연결시켰다. 정답은 다음과 같다.
〈인생의 1년A Year in the Life〉-사망. 이〈풀 하우스〉-사망. 〈나는 도라와 결혼했다 I Married Dora〉-사망. <아빠가 둘〉-사망. <발레리네 가족 Valerie‘s Family> 사망. 〈서른 몇 살〉―직장을 그만두고 주부가 됨. 〈모든 게 상대적〉-드라마가 취소됨. 〈마마보이Mama‘s Boy〉-드라마가 취소됨. - P241
텔레비전 프로그래머들에게 아무리 근육질의 남성을 불러들일이유가 있었다 해도 대중들의 요구는 달랐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경찰 드라마와 서부극에 가장 관심이 적다.15) 그런데도 NBC의 오락 부문 사장인 브랜든 타티코프Brandon Tartikoff는《뉴욕타임스》에서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짐승으로 변하고있는 건 "시청자들"이 "셔츠 소매에 감수성을 뚝뚝 흘리고 다니는 앨런 알다Alan Alda 식의 주인공들"과 남자 "약골들"에게 신물났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16) 그러면서 그는 그 증거로 실제 사람이 아니라마초 영화들의 범람을 지목했다. 이는 어떤 문화적 수단의 제작자들이 반격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또 다른 문화적 수단의 제작물을 들먹이는 여러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 P243
하지만 여성해방에 대한 텔레비전의 공세는 필연적으로 할리우드보다는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의 영향력은 극장에서보다는 텔레비전 앞에서 더 크다. 그러니까 여성들은 시청자의 다수를 점할 뿐만 아니라 광고주들이 가장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이다. 1987~1988년 시즌에 텔레비전 프로그래머들이 꼴사나운 남자들과 시든 여자들의 모습을 억지로 보려 주려 하자 큰 충격을 줄 정도로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텔레비전을 그냥 꺼버렸다. - P244
독립적인 여성들을 상대로 한 텔레비전의 반격이 오락가락하는것은 텔레비전 산업 자체가 여성 시청자들에게 대단히 양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황금 시간대의 텔레비전 프로그래머들은 영화 제작자들보다는 여성들의 인정에 더 많이 매달리지만, 바로 이런 의존성 때문에 더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방송국 종사자남성들이 할리우드가 있는 서쪽으로 옮겨 온 것은 흔쾌히 여성을 주인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리고 종사자 대부분은 남성이다. 가령 텔레비전 작가의 90퍼센트 이상이 백인 남성이다). 이들은 시청자가 많이 보는 드라마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드라마가자율적인 여성들을 내세우면 이런 드라마를 없애려고 한다. <디자이닝 우먼>과 <케이트 앤 앨리 > 모두 엄청난 인기를 얻은 시리즈물이었음에도 이를 폐지하려는 방송국의 반복된 시도에 맞서야 했다. - P247
독립적인 여성을 상대로 한 1980년대 텔레비전의 반격은 시즌에 따라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이에 일부 드라마들은 주기적인 부침속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L.A. 로L.A. Law〉, 〈디자이닝 우먼〉, 〈골든 걸스The Golden Girls〉가 이런 예에 속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1980년대의 반격은 텔레비전에서 건강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을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향수로 범벅된 비정치적인 ‘가족’ 여성의 초상을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은 두 단계를 거쳐 텔레비전 오락물 속으로 침투했다. 먼저 1980년대 초에는 페미니즘 사안들을 지워 버렸다. 그러고 난 뒤 1980년대 중반에는 교외의 주부가 최상층에 있고직장 여성이 그 아래 단계에 있고 싱글 여성들이 맨 밑바닥에 있는‘전통적인’ 여성 위계를 재구축했다. - P249
텔레비전 네트워크는 실제로 페미니즘 주제에 초점을 맞춘 에피소드를 단속했다. 남녀평등헌법수정안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로젠즈위그는 페미니즘 지도자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단역으로 출연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기준과 관행 부서의 임원들은 마치 악명 높은 연쇄 살인자에게 카메오를 맡기기라도 했다는 듯 질겁하면서 스타이넘의 출연을 금지시켰다. 그러고 난 뒤에도 일곱 곳의 가맹방송국들이 여성의 권리라는 주제가 여성 시청자들을 불쾌하게 만들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방영 시간 몇 시간 전에 이 에피소드 전체의 방영을 취소해 버렸다. - P253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임원들은 자신들이 이 프로그램의 내용에 간섭하는 것은 오직 캐그니와 레이시 같은 직장 여성들에게 위협을 느낄 여성 시청자들을 걱정해서라고 말했다. 로젠즈위그는 이들에게 말했다. "내 책상에는 전혀 위협을 느낀 것으로 보이지 않는 여성들에게서 온 팬레터 4,000장이 쌓여 있습니다. 조사를 어떤 식으로 한겁니까?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으면서."(사실 베커의 집안에 있는 근거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켰다. 35세의 주부인 베커의 아내는 이 드라마의 "왕팬"이었다고 그는 인정한다.) 캐그니와 레이시라는 강인한 두 여성에게 불편해한 건 여성 시청자들이 아니라 바로 CBS의 남성 프로그래머들이었다. 베커는 당시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여성들이 "지나치게 거칠고 목소리가 크며 따스함이 없다"고 불평했다. 또 다른 CBS 임원은 《티비가이드》에서 이 여성 주인공들이 "지나치게 여성해방에 경도되어 있고 〈캐그니 앤 레이시>에 나오는 이 여성들은 경찰 일을 하는 것보다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데 더 혈안인 것 같다. 우리가 보기에 이들은 동성애자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 P254
다른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애써 직장 여성에 대한 이런 얄팍한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의 일부 프로그램에는 병아리처럼 자식들을 줄줄이 낳아 돌보는 교외의 엄마들이 워낙 많이 나와서예전 드라마를 재방송해 주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풀 하우스>에 출연한 한 여성은 "난 준 클리버가 되어 가는 중"이라며 한숨을 쉬었는데, 정확한 지적이었다. <케빈은 열두 살 The Wonder Years〉같은 어떤 프로그램들은 아예 과거를 배경으로 했다. 페미니즘이 태동하기 전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뜨거운 스토브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엄마를 보여 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 P257
아무리 계몽된 사명감을 가진 프로그램이라 해도 직장에 다니는엄마를 비난하고픈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텔레비전 제작자 게리 데이비드 골드버그Gary David Goldberg 는 가족 중심의 어린이집에 대한 시리즈물인 〈데이 바이 데이Day by Day〉를 공개하면서 이 프로그램은 황금 시간대에 어린이집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주는 보기 드문 볼거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도 일하는 엄마들에 대한 경멸적인 어조는 여전했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일하는 엄마들은 노이로제 환자처럼 전전긍긍하는 데다 미숙해서 매일 아침 갈팡질팡하면서 어린이집을 찾아와서는 고상한 척하는 관리자들(이 태만한 엄마들의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월스트리트에 있던 직장을 희생한 것에대해 5분에 한 번씩 서로 자랑스러워하는 부부로 구성된 팀)의 품 안에 아이들을 밀어 넣는다. - P259
출세 지향적인 싱글들은 여성 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했다. 이들은 인간성과 월급을 맞바꿨고, 남자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기의 모습만 살짝비쳐도 안 그래도 차가웠던 그녀의 체온은 북극 수준으로 얼어붙을 수 있었다. - P264
전일제로 둥지를 지키는 여성을 떠들썩하게 반기는 건 이 드라마의 여성 배우와 시청자들이 아니라 남성 제작자들이었다. 이들은여성운동과, 이 운동이 자신들에게 미친 영향 때문에 괴로움에 빠졌다. 〈서른 몇 살〉의 공동 제작자 마셜 헤르스코비츠는 한 남성지에서 "남자로 산다는 게 끔찍한 시대라고, 어쩌면 역사상 최악인 시대라고 생각한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남성들은 일종의 생물학적 지상 과제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했지만 이젠 더 이상 이런 필요를 표출할 "용납 가능한 경로"가 없다. "최근 몇 년간 남성성은 평가절하되었고 더 이상 별 의미가 없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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