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염색체를 중시한 법원의 판단은 10년이 지나 뒤집힌다. 2006년 대법원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따라 법적 성별을 정정할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서 대법원은 "인간의 성은 염색체, 생식기 등 생물학적 요소만이 아닌 정신적·사회적인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2009년 대법원은 위와 유사하게 법적 성별은 남성인 트랜스젠더 여성이 강간 피해를 입은 사건에서 1995년의 경우와는 달리, ‘피해자는 여성이며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판결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법적 성별을 판단하는 기준이 고정되거나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 P19

법 앞에 자신을 인정받기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을 법 앞에서 인정받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공적인서류에 반영되는 것은 단지 개인의 불편을 더는 수준의 사안이 아니다.
이는 근본적인 인격권에 관련된 문제다. 작년 10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제3의 성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며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격에 관한 권리는 개인의 인격의 구성 요소인 성별정체성 역시 보호한다. 한 개인이 어떤 성에 속하는가는 그의 정체성에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여길지에 출발점이 된다. 여기서, 남성에도 속하지 않고,
여성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의 성별정체성 역시 보호되어야 한다. - P25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안전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때, 과연 그것이 누구의 안전인가 하는 것이다. 앞서 국가인권위의 조사 결과에서트랜스젠더의 다수가 화장실을 이용할 때 언어폭력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고, 미국 윌리엄스연구소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9%가 물리적으로 폭력을 겪는 것으로 집계됐다. 성별분리 화장실은 트랜스젠더 등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결코 안전하지 않은 공간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안전을 중요한 가치로 둔다면 정말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안전한 화장실‘이 아닐까?
결국 화장실, 성별분리 자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모두가 안전하고 쾌적한 화장실은 어떠해야 하고, 그곳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 P31

존재에 대한 처벌은 타당한가

구금시설 수용자는 죄를 지었지만 사람이다. 그렇기에 죄에 대한 책임과는 별도로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성별이분법을벗어난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성별에 맞지 않는 수용시설에 강제로 수감되고, 성별정체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처벌‘ 하는 것이다. 존재를 위법하다고 보고 처벌하는 것, 이것이 현재 한국의 구금시설이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대해온 방식이다. 이제는 이를 바꾸기 위한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방책들을 마련해야 한다. - P34

다만 동성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에 대한 논쟁과 별도로, 성적 지향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미국소아과학회에서 아래와 같이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다.

최신 문헌과 이 분야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적 지향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즉 개인은 선택에 의해 동성애자 또는 이성애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성적 지향은 대개 아동기 초기에 형성된다.

성적 지향은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인 요소가 함께 작용하여 아동기초기에 형성된다는 설명으로, 스스로의 성적 지향을 인지하게 되는 10대가 되면 이미 개인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선택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 P41

그런 측면에서 ‘HIV 보균자‘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감염인은 제거해야 할 병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병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HIV 환자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가족이 경찰에 신고하면 전국에 수배령이 내리는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 HIV 감염인은 특정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뿐,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살아가는 존엄한 인간이다. 영어로 감염인을 ‘HIV/AIDS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people living with HIV/AIDS 이라고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당뇨 환자를 ‘당뇨를 가진 사람‘이라고, 조현병 환자를 ‘조현병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동의를 얻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P52

혐오는 쉽다. 가장 약하고 아픈 사람을 욕하면 되니까. 어떤 이들은 HIV감염인에게 ‘네가 잘못해서 걸린 거다. 네 치료에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고 함부로 손가락질한다. 이러한 혐오는 인권과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그릇된 태도일 뿐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한다. 혐오와 낙인은 한국의 HIV 신규 감염을 부추기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한국사회의 HIV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첫걸음은 혐오와 사회적 낙인을 거두고 그 바이러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것이 HIV감염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지난 30년간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인류가 터득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 P53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트랜스젠더가 받는 호르몬요법이나 성전환수술이 개인의 ‘성적 기호‘에 따라 본인이 ‘선택‘한 성별로 살아가기 위해 받는 ‘미용성형‘쯤으로 여겨 굳이 의료적 트랜지션을 국민건강보험으로 보장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곤 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성적 기호가 아닌 트랜스젠더 개인이 겪는 성별위화감 정도에 따라 의료적 트랜지션이 시술된다는 것이다. 최근 의학 전문가들은 의료적 트랜지션이 트랜스젠더가 겪는 성별위화감을 완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고 필요한 조치라는 점에 합의하고 있다. - P60

‘차별은 나쁘다. 하지만 내게 가까이 오지는 마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하면서 실제로는 도덕성이나 취향의 문제로 우회하여 배척하는 태도, 성소수자가 직면하는 한국사회의 민낯이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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