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체이스에게 몇 년 전의 실수에 대해 털어놓았다. 열 명 의 여성 디제이를 추천하는 글에 무신경하게 논바이너리 디제이를 포함시키고 말았다고. 마감이 밭았고, 직접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변명거리야 있었지만 그야말로 무신경했던 탓이라고, 급히 수정을 하고 당사자에게도 사과했는데 그래도 계속 마음에 남는다고, 무신경하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거기까지 털어놓자 체이스도 진지해졌다.
"그래도 좋은 성격이네."
"뭐가?"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
"두 종류로 나누는 건 너무 단순화시킨 거 아냐?"
"그러게, 그러면 안 되는데." - P208

그런 면에서 지금껏 원주민들과 다른 유색인 이민자들의 지향이 언제나 일치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종종 서로 힘을 합칠 수 있을 때면 더한 나락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음, 네. 여기가 천박한 시장 바닥이 되는 걸 막으려는 사람들은, 착취적이지 않은 진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모두 로컬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 P214

그리고 아무도 새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종종거리고 있고, 정말 아무도, 안 그래도 죽어가는데 그깟 방음벽에, 유리창에 스티커 하나 붙여주지 않아서 더 죽이고 있었다. 에너지 효율도 형편없다는 유리 건물을 계속 지어대는 것도 싫었다. 홈쇼핑에서 구스 이불을 팔아대고 행사마다 풍등이니 풍선이니를 날려버리는 것은 떠올리기도 징그러웠고……… 그런 화제들을 꺼내면 네가 커서 고쳐, 공부 열심히 해서 고쳐, 하고 아주 우습다는 듯 대견하다는 듯 반응해오는 것도 짜증났다. 자기들이 신나게 망쳐놓은 다음에 어쩌라고? - P225

일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길들여지지 않는 괴물 늑대와 같아서, 여차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물 것이었다. 몸을 아프게 하고 인생을 망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조금만 사랑하자니, 유순하게 길들여진 작은 것만 골라 키우라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소소한 행복에서 의미를 찾자, 바깥의 평가보다 내면이 충실한 삶을 택하자는 요즘의 경향에 남녀 중 어느 쪽이 더 동의하는지 궁금했다. 내면이 충실한 삶은 분명 중요한데, 그것이 여성에게서 세속의 성취를 빼앗아가려는 책략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성취를 하려니 생활이 망가지고, 일만 하다가 죽을 것 같고…… - P248

경아는 자리를 지키고 엉덩이로 뭉개기로 마음먹었다. 관절 좋은 사람이 의자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을 때에는 더 똑똑한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천천히 거품이 꺼지고 가라앉는 업계에서 살아남은 여자가 어디선가 나타나면 바통 터치를 할 것이다. 그전에 주 사 일제를 시도해 본다거나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가 망해버리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망했다 흥했다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들은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나의 작은 권력은 그래도 이제 빌려 쓰는 권력이 아니지."
커피를 사러 가며 작게 말해보았다. 아무도 듣지 못하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상관없었다. - P267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
전시회에서 그렇게 흡족해하시던 심시선 선생이 가끔 뵙고 싶습니다. - P269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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